내추럴-본 사이보그 포스트휴먼 총서 4
앤디 클락 지음, 신상규 옮김 / 아카넷 / 2015년 12월
평점 :
품절


 

 

 

<은하철도 999>의 주인공 철이는 기계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메텔과 함께 기계 제국으로 향한다. 기계 몸을 공짜로 얻기 위한 여행이다. 돈 많은 인간은 기계의 몸을 지니고 영생을 누리지만 기계 몸을 얻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의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힘겹고 긴 여정은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훌쩍 지나가고 마침내 기계 제국에 도착한다. 하지만 철이는 감정 없는 기계 인간으로 영원히 사는 것보다는 슬픔과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기계 몸을 선택하지 않고 인간으로 남는다. 그는 다시 999호를 탑승하여 지구로 떠난다.

 

기계 인간의 꿈을 포기한 철이의 선택은 만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이 세상에도 철이가 많다. 그들은 네오러다이트(Neo Luddite)’ 족이다. 첨단 문명 파괴주의자 유나바머로 상징되는 적극적 네오러다이트 족이 있는가 하면, 첨단 문명을 단순 거부하거나 은둔하는 소극적 네오러다이트 족은 헤아릴 수조차 없다. 초창기 단순히 사람의 몸에 IT기기를 걸치는 데 머물렀던 웨어러블 컴퓨팅(Wearable Computing)은 최근에는 섬유와 일체화하여 옷이 곧 IT기기가 되는 시대에 이르렀다. 더 나아가 웨어러블 컴퓨팅은 사람의 옷이 아니라 사람의 몸속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웨어러블 컴퓨팅이 장밋빛 전망만을 지닌 것은 아니다. 인간을 이롭게 하려고 개발된 웨어러블 컴퓨팅이 종국에는 인간의 능력을 퇴행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기술이 점점 발전할수록 인간의 기능 중 더 많은 영역을 웨어러블 컴퓨터가 차지한다. 언뜻 보면 신체 능력을 향상하는 것 같지만 결국 컴퓨터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신체의 역할은 줄어든다.

 

만일 내추럴-본 사이보그의 저자 앤디 클락이 메텔이었으면, <은하철도 999> 결말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앤디 클락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사이보그에 가까웠다고 주장한다. 사이보그는 생물과 기계장치의 결합을 의미한다. 영국의 로봇공학자 케빈 워릭은 자신의 몸에 컴퓨터 칩을 내장한 최초의 사이보그 인간이다. 그가 정의하는 사이보그는 일반적인 로봇과 다르다. 완전히 기계로 이루어진 로봇뿐만 아니라 특정 컴퓨터 전자 장비 등으로 몸 일부를 개조한 인간이나 인공복합 생명체를 뜻한다. 클락은 사이보그의 정의에 관한 기존 관점을 뒤집는다. 인간의 두뇌는 비-생물학적 자원(기계장치)을 능숙하게 활용할 수 있어서 전자기기의 비중이 커지는 세계에 적응할 수 있다고 말한다. 클락의 주장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산소와 같이 컴퓨팅이 어디에서나 가능하고 투명해진 시대 속에 살고 있다. 내추럴-본 사이보그2003년에 나온 책이다. 책 속에 소개된 전자기술들은 거의 상용화되고 있다. 손에 늘 쥐고 다니는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실시간으로 네트워크에 연결한다. 생각만으로 컴퓨터와 로봇 팔을 제어하는 장치는 기대해볼 만하다.

 

인류의 미래가 생물학적 완결성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 오랫동안 인류의 진화를 가로막았던 자연재앙과 환경파괴, 질병과 노화 등 신체적 한계 등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기계와 공생을 이뤄나갔다.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밝힌 대로 인간의 두뇌는 외적인 조절자. -생물학적 자원을 활용하기 위해서 자체적으로 변화시킬 줄 안다. 그러므로 인간과 기계의 융합이 더욱 강해질수록 두뇌는 능동적으로 디지털 환경에 적합한 사이보그상태로 전환한다. 이미 우리는 아주 낮은 단계의 사이보그인 셈이다.

 

클락은 사이보그가 활성화된 미래 사회에 초래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논하면서도 장밋빛 미래를 낙관적으로 예상한다. 아무리 기술적으로 인간에 버금가는 지능과 활동성을 지닌 사이보그 등장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현실화되는 데는 수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컴퓨터의 처리 성능이 획기적으로 빨라지면 인간이 마음으로 생각하고 문제를 처리하는 속도가 뒤처질 수 있다. 우린 최근에 인간의 사고능력을 가뿐히 넘어선 알파고의 우월한 존재감을 지켜봤다. 그래도 아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인간은 위험하거나 일상적 반복적인 일을 로봇에게 맡기고 인간은 더욱 인간적이고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본다. 인간 중심적인 기술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리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기술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정보기술의 휘황찬란한 베일 뒤를 들여다볼 수 있다. 빠른 속도로 진화하는 디지털 기술을 먼 미래의 일처럼 여긴다면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린 처음부터 사이보그니까 괜찮다. 우리 삶의 일부나 마찬가지인 휴대용 인공지능스마트폰을 포기 못 하면서 알파고의 등장에 벌써 두려워하면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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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6-04-15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이와 사이보그... 접근이 아주 신선합니다.^^
생체 재료를 활용한 생명 연장 기술은 점점 더 발전할 것이고, 그걸 어떻게 보편화 시킬 것인가가 관건이지 않난 싶습니다. 아무래도 빈익빈 부익부의 재판일 듯해서요...^^

cyrus 2016-04-16 16:12   좋아요 0 | URL
책의 저자가 사이보그가 보편화된 사회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지만, 두루뭉술하게 낙관적인 전망을 밝히고 있을 뿐입니다. 사이보그가 상용화되더라도 빈익빈 부익부 문제는 생길 겁니다. 지금부터가 제일 중요합니다. 인공지능의 등장에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미래에 대해서 심도 있게 전망해야 할 시점입니다.
 

 

 

 

 

 

 

르네 마그리트 가짜 거울』 (1928년)

 

 

 

눈꺼풀 형체 안에 둥그런 안구가 있다. 그런데 다시 보면 그것은 하얀 구름이 떠 있는 하늘이다. 이 눈은 하늘을 보는 것인가, 아니면 하늘이 눈에 보이는 것일까. 눈이 하늘로 인식하는 순간 실제로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하늘이다. 이 그림의 제목은 가짜 거울(Le faux miroir)이다. 우리가 아무 의심 없이 보려 했던 의식을 벗어날 때 겪게 될 혼란스러움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 면을 부각하려고 마그리트가 가짜 거울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일 수도 있겠다. 마그리트는 그림으로 일상적으로 훈련된 인식의 틀을 바꾸려고 했다. 그는 자연 질서를 무시한 채 사물들을 엉뚱하게 배치한다. 낯설게 정지된 그의 그림은 관람자를 당혹스럽게 한다. 과연 시각이 느끼는 실재의 정체가 무엇이며, 회화를 통해 사람들이 과연 실재를 보고 있는지 질문하게 한다.

 

 

 

 

 

 

 

 

 

 

 

 

 

 

 

 

 

 

흔히 사람들은 보는 것이 전부이고 봤기에 옳다고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고, 아는 만큼 본다. 이미지는 그 자체로 인간에게 착각을 안겨줄 위험을 내포한다. 수용자의 의식에 의해 보이는 것이 실체가 다르게 망막에 맺힐 수도 있다. 여기서 수용자의 의식은 외부에서 주어진 문화적 산물을 의미한다. 발터 벤야민은 인간의 감각지각이 사회적 영향에 받아 변화하기 쉽다고 말했다. 우리가 보고 믿는 실재는 이데올로기나 관습, 문화 등 요소가 어우러진 프리즘에 굴절되면서 가공된다. 자유로울 것 같은 우리의 의식조차도 이미 외부조건들에 길들어 있다. 우리가 당연한 실재라고 봤던 것이 사실은 아주 유동적이며 가변적이다. 결국 눈은 외부조건들을 수동적으로 반사하는 거울과 같다.

 

오늘날 세계는 이미지 폭주 시대이다. 사진과 동영상으로 대표되는 이미지 세계는 급속도로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이미지는 즉각적·직관적으로 감정과 현상을 전달하는 장점이 있다. 현대의 소통 문화는 문자 텍스트에서 이미지 텍스트로의 권력 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미디어가 만든 이미지 텍스트로 구축된 세계를 체험하고 있다. 진중권은 이 현상을 미디어 아프리오리(a priori, 선험적 형상)’라고 규정한다. 우리 일상에 침투하는 미디어의 힘을 톺아보면 미디어에 갇힌 눈의 실체가 드러난다.

 

보드리야르는 허구의 이미지가 실재를 지배한다고 했다. 광고는 하나의 상품에 현실과 상상이라는 이중적 존재를 부여한다. 광고를 받아들인 소비자의 눈은 만족과 쾌락을 얻는 환상을 바라본다.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가 역전되면 실재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위성방송을 통해 전쟁 뉴스를 바라보는 시청자는 전쟁을 스포츠 경기처럼 관람한다. 뉴스 화면의 이미지는 전쟁을 컴퓨터 게임처럼 만든다. 사라지는 것은 전쟁터에 흥건한 피와 병사들의 아비규환이다. 전쟁을 관람하는 시청자는 병사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보고 바로 느끼는 이미지가, 읽고 깨닫는 문자 텍스트보다 우월하다고 볼 수는 없다. 이미지의 범람은 현대인에게 참을 수 없는 사유의 경박함을 안겨줬다. 미디어의 힘이 점점 강해지고, 이미지가 난무할수록 현실의 본질은 흐려진다. 사유가 없는 이미지는 조작, 거짓, 착각의 위험이 있다

 

 

 

 

 

※ 진중권의 《미디어 이론》 책 앞날개의 저자소개에 있는 책 제목 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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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5 1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15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4년 전 모 일간지에서 주최한 대학생 칼럼 공모전에 당선된 적이 있었다. 페이스북 페이지에 남긴 글이 논설위원의 칼럼과 함께 신문지에 실리는 영광을 누렸다. 이를 계기로 나는 다른 칼럼 응모자들이 남긴 글을 첨삭하고, 추천하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 이 일에 매진하느라 당해 알라딘 서재 활동이 뜸했다. 하루에 페이스북 페이지에 오른 글의 수가 평균 열 편 정도가 된다. 대학생 칼럼 당선자가 해당 일간지 언론고시에 응시하면 1차 시험이 면제된다. 언론고시를 준비하는 신문방송학과 혹은 국문학과 출신 학생뿐만 아니라 자신의 작문 실력을 알고 싶은 학생들도 칼럼 공모전에 여러 번 도전했다.

 

내 역할은 칼럼에 응모하는 학생들이 글을 잘 쓰도록 돕는 것이다. 글쓴이의 주장이 얼토당토않거나 글의 주제를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빈약하면 댓글로 알려준다. 내가 지적한 부분만 잘 고친다면 좀 더 나은 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격려도 빼놓지 않는다. 글 첨삭 및 추천 역할을 하는 학생은 나를 포함한 총 네 명. 이 네 명이 추천한 글은 대학생 칼럼 후보작이 된다. 최종 결정은 대학생 칼럼 공모전을 총괄하는 기자가 한다.

 

남이 쓴 글을 읽는 건 쉬워도 그 글을 쓴 사람에게 내 의견을 똑 부러지게 말하는 일은 무척 어렵다. 특히 작문 실력이 좋다고 할 수 없는 내가 어찌 감히 남이 쓴 글에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겠는가. 글을 첨삭할 때 거만한 자세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상대방이 쓴 글을 내 글이라고 생각하면서 애지중지 살폈다. 귀찮다고 해서 대충 읽으려고 하지 않았다. 잘못된 맞춤법과 어색한 문장이 있는지도 확인했다. 그 과정을 통해 나 역시 글 쓰는 방법을 하나씩 배워나갔다.

 

누구나 글을 쓸 때 가장 많이 하는 실수 중 하나가 길게 쓰는 문장이다. 내가 2010년에 썼던 글의 문장 하나를 예로 들어보겠다.

 

 

장영희 교수님의 에세이들은 접했을 때 여성 특유의 섬세한 문장이 쉽게 읽혀졌고 자신의 투병 생활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은 점에서 왜 이 책이 많은 독자들이 읽게 하는지 알게 되었다.

 

 

쓸데없이 긴 문장은 독자의 몰입을 방해한다. 독자는 이 문장을 보자마자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라고 생각한다. 수식어도 지나치게 많다. 좋은 글이 되려면 문장이 매끄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간결해야 한다. 그러면 문장의 의미가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글자 수 제한을 두는 칼럼의 형식상 글의 핵심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이 좋다. 긴 문장은 짧은 문장으로 나누어 쓴다.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수식어를 삭제하면서 문장을 새로 다듬는다.  

 

장영희 교수님의 수필을 읽으면 섬세한 문장의 매력이 느껴진다. 그녀는 투병 생활 중에도 끝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독자의 마음에 긍정적인 힘을 불어넣는 그녀의 글을 안 읽을 수가 없다. 

 

 

문장을 짧게 쓰는 것은 글쓰기의 기본이다. 그렇지만 아주 중요한 글쓰기의 기본을 알려줬는데도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문장이 형편없는 글을 읽고 나서 문장을 짧게 쓰라고 충고했다. 잘못된 문장을 인용하면서까지 직설적으로 문제점을 알려주는 내 태도에 글쓴이가 자존심이 상했다. 그는 깐깐하게 보는 내 첨삭 방식에 불만을 드러냈다. 자신의 글에 고칠 게 전혀 없는데도 내가 쓸데없이 지적했다면서 화를 냈다. 한번은 글쓴이의 지인에게 내 첨삭 태도에 대한 불만사항을 들어야 했다. 나는 글쓰기의 기본 방식을 숙지해서 친절하게 알려줬을 뿐이다. 유명한 작가가 글의 문제점을 알려주면 감사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반면에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충고하면 ‘니가 뭔데 내 글을 판단해’라는 표정으로 정색한다.

 

최근 미국 미시간대학의 언어학 연구팀이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다른 사람의 문법이나 틀린 맞춤법에 민감한 사람일수록 성격이 까칠하다고 한다. 내가 이토록 오자에 민감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실험 결과를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반대로 생각하고 싶다. 글의 문제점이나 오자를 잘 찾는 사람은 글에 대한 집중력이 높다. 일간지마다 차이가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칼럼의 글자 수는 1,300자 이내다. A1 용지 한 장을 채우는 분량이다. 이 정도로 글이 길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짧아진 글과 사진 위주의 정보가 공유되는 SNS 환경에 길들어지면, A1 용지 한 장 분량의 글이 길게 느껴진다. 우리가 인터넷이나 SNS의 글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이 고작 1분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는 긴 글보다는 짧은 글을 선호한다. 글을 천천히 읽는 여유가 없다. 길지 않은 글을 대충 읽을수록 독해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가끔 내가 알라딘 서재의 글을 읽다가 댓글로 오자를 알려주면 글쓴이 입장에서는 불쾌하게 생각할 수 있다. 내 실수가 남에게 들키거나 알려지면 부끄럽기 마련이다. 그러나 부끄러움은 한순간이다. 가볍게 넘겨버릴 수 있는 사소한 일이다. 대학생 칼럼 첨삭 활동했던 과거의 모습과 지금을 비교하면 깐깐스러운 성격이 죽은 편이다. 여전히 내 지적이 불쾌하면, 화를 내기 전에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아! 사이러스 저 사람은 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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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4-14 18: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간 cyrus 님의 글에 댓글을 단 적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글을 많이 읽어오긴 했지만 댓글을 단 기억은 거의 없네요. 이 글을 읽으니 그간 님의 글을 읽고 느꼈던 점을 오늘은 댓글로 달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상대방이 cyrus님의 지적에 화를 냈다면 그건 님이 `평범한데 충고를 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님의 태도에 `상대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그래서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 드러나서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간 님의 글이나 또 님이 다른 분의 글에 댓글을 다는 걸 봤을 때, 저는 님에게서 맨스플레인이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이건 이렇게 하면 되지`, `이건 이런거다` 라고, 친절한 말투였으나 기본적으로 본인이 더 나은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려 하시더라구요. 저는 몇차례 그걸 느꼈습니다. 지금 쓰신 이 글만 해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껴야되는지를 가르치려고 하시는 것 같고요.

저는 cyrus 님이 악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하려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라고 물론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글에 조언을 하거나 지적을 할 때, `네가 나보다 더 많이 알 수도 있다`, `네가 나보다 더 고민했을 수도 있다`, 등을 한 번 더 생각하시고 말씀하셔야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cyrus 2016-04-14 19:32   좋아요 3 | URL
안녕하세요. 다락방님.

댓글을 읽자마자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오늘 제가 쓴 글이 오만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서평의 정의에 관한 글을 썼을 때 오늘과 같은 실수를 한 적이 있었어요. 부끄럽게도 맨스플레인 기질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제 문제점을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다락방님이 말씀하신 대로 글을 쓰기 전에 읽는 분들의 감정을 먼저 헤아려보도록 유의하겠습니다.

2016-04-14 1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4-14 19:42   좋아요 1 | URL
저는 완성된 글을 올리기 전에 맞춤법 검사 기능을 사용합니다. 그래도 비문은 남아 있어요. 누군가가 글의 잘못된 부분을 알려주면 바로 고칩니다. 글을 고치면서 잘못된 점을 확인하는 거죠. 저도 댓글을 생각나는 대로 쓰는 거라서 띄어쓰기가 잘못 된 게 있을 거예요.

2016-04-14 1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4-14 20:01   좋아요 0 | URL
제가 좀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에요. 안 좋게 보면 상대방 배려 없이 표현합니다. 잘 되는 의미에서 남을 도와준다는 게 오지랖 넓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잘 생각하고 행동해야겠어요.

2016-04-14 2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4-14 20:19   좋아요 0 | URL
사소한 실수는 자고 나면 싹 잊힙니다. 그렇지만 큰 실수를 알려주는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들으면 잘못된 점을 바로 잡으려고 합니다. 시간이 좀 지나서 잊힐 때가 되면 실수를 반복하게 문제지만, 내 자신을 바로 잡아주는 분들이 있다는 점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만일 이런 분들을 만나지 못했으면 저는 비뚤어진 태도로 상대방을 대하고 있었을 겁니다.

2016-04-14 2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4-14 20:40   좋아요 0 | URL
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마음에서 ‘좋아요’를 누르고 싶은데, 비밀댓글이라서 안 되네요.

stella.K 2016-04-14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스플레인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 같아.
특히 블로그질을 하면 할수록. 더구나 많은 추천과 댓글을 받으면 받을수록.
아무리 개인블로그라고 하지만 누군가에게 읽여질 것을 생각하고 글을 쓰는 거거든.
쓰면서도 느끼잖아. 내가 지금 아는 척하고 글을 쓰는 거지 하는.
나만해도 서재질을 많이 하니까 일기같이 아주 나만 보는 글은 못 쓰겠더군.
지난 번 서재 달인이라고 받았던 다이어리도 처음엔 어떻게든 써 보려고 했는데
못 쓰겠더라구.ㅠ
그리고 오탈자 맞춤법은 정말 기가 막가 막혀.
나도 가끔 지적을 받곤 하는데 기분 나쁘기 보다 귀찮다는 생각이 들고.
그냥 대충 알면 됐지 뭘 이걸...
그러다 나중에 다시 보면 이걸 글이라고 썼나 화끈거릴 때가 많지.
사람들한테 미안하고, 어쩌다 아는 이의 서재에서 오탈자 발견하면
마치 내가 틀린 것처럼 마음은 편치 않은데 함부로 지적하기도 뭐하고
대충 그렇게 되더군. 지금 여기까지 댓글 쓰면서도 신경 쓰인다.
그렇다고 안 쓸 수는 없고...ㅠ

cyrus 2016-04-15 12:54   좋아요 0 | URL
제일 한심한 착각이 누구나 아는 정보를 마치 자신이 제일 먼저 발견한 것처럼 소개하는 태도예요. 예전부터 지금까지 제가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쓰는 느낌이 들었어요. 친절하게 오류를 알려줬다고 생각하지만, 익명성의 세계에서는 그런 선의의 진심이 전달되지 못해요. 그래서 상대방의 지적으로 인해서 불화가 생기기 쉬워요.

2016-04-14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4-15 13:02   좋아요 0 | URL
누구나 갑작스러운 공개 지적을 받으면 순간적으로 당황하거나 화가 나기 마련입니다. 솔직히 저도 처음에 얼굴이 화끈거렸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 상대방이 알려준 내 문제점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해요. 어제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니까 오히려 이 글을 보는 사람의 감정이 더 상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님처럼 오류를 지적하는 자세를 호의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데도 저는 알라디너 전체를 지적 받는 상황 자체를 꺼리고 회피하는 존재로 봤습니다. 이건 당연히 심각한 오류고, 상대방이 기분 나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영혼을위한삼계탕 2016-04-15 0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문 맞춤법 은 소통할 때 쓰이는
하나의 약속이죠
이런 걸 다 의식하면
움츠러 들 수 있드라구요~
글 잘 읽고 갑니다^^

cyrus 2016-04-15 13:04   좋아요 0 | URL
맞아요. 맞춤법 가지고 너무 까다롭게 굴 필요도 없고, 집착이 심하면 상대방을 피곤하게 만들어요. 까다로운 성격을 고쳐야겠어요.

마립간 2016-04-15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과 꼭 같지는 않지만,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 글을 남깁니다.
이와 비슷한 댓글대화가 balmas 님의 서재에서도 있었지요.

http://blog.aladin.co.kr/balmas/8398715
http://blog.aladin.co.kr/balmas/8397854

댓글에는 `토론 상대를 미니멈으로 상정하지 마세요`라는 글도 보입니다.

남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남의 오류를 지적한다는 것이 원리적으로 옳지만, 실제적으로 얼마나 가능한지는 의문입니다.

`페미니스트의 주장의 오류를 감정의 자극없이 지적한다.`,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할아버지께 감정을 자극하지 않고 오류를 지적한다`, `개신교도들에게 감정을 자극하지 않고 개신교의 오류를 지적한다.` 이와 같은 상황이 잘 상상되지 않습니다.

cyrus 2016-04-15 13:10   좋아요 0 | URL
어제 제가 balmas님과 같은 실수를 저질렀어요. 저 같은 경우에 알라디너 전체를 올바른 비판과 지적을 회피하고 싫어하는 존재로 설정하고, 제 행동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펼쳤으니까요.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오류를 지적하는 일이 정말 어려워요. 어떠한 하나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관점에 조금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서로 다른 의견으로 양분되고,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2016-04-15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톰은 제리를 잡으려다 계단에 내려오는 피아노에 부딪혀 혼수상태에 빠진다. 톰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간다. 천국행 열차를 타려면 천국의 문지기 역할을 하는 역무원 고양이의 확인 절차를 받아야 한다. 천국행 열차 탑승객이 아니면 지옥으로 가야 한다. 역무원 고양이 앞에 줄로 묶은 자루가 공처럼 통통 튀면서 등장한다. 자루 밖에 나온 세 마리 새끼고양이들은 물기를 털면서 천국행 기차가 있는 쪽으로 달려간다. 새끼고양이들의 모습을 지켜본 역무원 고양이는 혀를 차며 ‘정말 안 됐군’ 하면서 혼잣말을 한다.

 

 

 

 

톰과 제리 ‘천국행 열차(Heavenly puss)’의 장면, 3분 16초부터

 

 

이 짧은 장면 속에 불편하고 가슴 아픈 진실이 있다. 새끼고양이들은 인간의 손에 의해 자루에 담겨 물에 빠져 죽은 것이다. 과거 미국에는 고양이의 번식력을 감당하지 못해 새끼고양이를 물에 빠트려 죽이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고양이 잔혹사를 되돌아보면 고양이 미신과 연관성이 깊다. 아주 오래전부터 고양이, 특히 검은 고양이는 마법의 상징이나 흉조로 여겨졌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고양이를 숭배했는데, 고양이를 죽이면 사형에 처했다. 영국과 아일랜드를 제외한 유럽 문화권에서는 검은 고양이를 마주치면 불행한 일이 생긴다는 미신이 전해 내려왔다. 고양이를 두려워한 유럽인들의 인식은 오래된 고전문학 작품 속에 남아 있다.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검은 고양이》는 검은 고양이 미신을 소재로 한 공포작품으로 유명하다. 주인공은 자신이 기른 애꾸눈의 검은 고양이가 흉측스러워서 죽이려다가 그만 아내를 살해한다. 이 남자는 그전에 ‘플루토(지옥의 왕)’라는 이름의 검은 고양이의 한쪽 눈을 도려내어 나무에 매달아 죽였다. 러브크래프트의 짧은 단편 《울타르의 고양이》는 고대부터 전해져오는 고양이의 전설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울타르(Ulthar)는 고양이 살육을 금지하는 마을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고양이를 신처럼 모신다. 과거에 마을 사람이 고양이를 죽인 뒤에 끔찍한 저주를 받았다. 그 사건 이후로 마을 사람들은 고양이를 신성한 존재로 여기게 된다.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에 나오는 고양이 또한 무시무시하면서도 불길한 분위기를 조장한다. 테레즈는 남편 카미유 몰래 남편 친구 로랑과 불같은 사랑을 한다. 테레즈의 집에 고양이 한 마리가 사는데, 테레즈와 로랑이 사랑을 나눌 때 고양이는 마치 그들을 감시하듯이 쳐다본다. 욕망에 눈이 먼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낀 로랑은 자신을 바라본 고양이의 시선을 두려워한다. 테레즈의 고양이를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 장면은 포의 《검은 고양이》의 사건 발단과 유사하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1865년)

 

※ 그림 오른쪽에 있는 고양이를 확대한 부분

 

 

 

죄책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내면의 심연을 깊숙이 찌르는 고양이의 날카로운 시선은 졸라의 독창적인 발상이 아닐 수도 있다. 《테레즈 라캥》이 발표되기 2년 전, 졸라의 친구이자 화가인 에두아르 마네는 관람자를 노려보는 고양이를 그림에 그려 넣었다. 이 작품이 파리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던 『올랭피아』다. 그림 오른쪽 구석에 있는 검은 고양이가 꼬리를 바짝 세운 채 관람자의 눈을 응시한다. 『올랭피아』의 고양이는 매음굴에 가서 발기하는 파리의 부르주아 남성들을 상징한다. 마네의 의도를 알아챈 남성 관람자들은 <올랭피아> 그림에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남성들은 그동안 숨겨왔던 자신들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고양이의 시선이 두려웠다.

 

 

 

 

 

 

고양이 미신에 대한 믿음을 지우지 못한 인류는 불길한 분위기를 가라앉으려고 고양이를 무자비하게 죽이기까지 했다. 고대 로마의 형벌 중에 살인죄를 저지른 사형수를 자루에 넣어 물에 빠뜨려 죽이는 익살형이 있었다. 익살형 집행자는 자루에 사형수와 개, 원숭이, 암탉, 뱀을 함께 넣었다. 이 네 마리 동물은 죄를 정화하는 주술적 힘을 가진 제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원숭이, 뱀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원숭이와 뱀을 대체하는 동물로 고양이를 선택했다. 그들이 무슨 의미로 고양이를 사형수를 위한 제물로 선택했는지 현재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인류의 마음을 점령한 고양이 미신의 위력을 생각해본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악의 상징인 고양이를 사형수와 함께 죄를 씻겨내야 할 존재로 봤을 것이다. 미신이라는 이름으로 죄 없는 고양이들이 자루에 갇혀 물에 빠져 죽었다. 불쌍하게도 인간이 저지른 죗값에 고양이가 대신 치렀다.

 

 

 

 

 

 

 

 

 

 

 

 

 

 

 

 

 

심지어 통제 불가능한 인간의 무시무시한 분노에 희생당할 때도 있다. 1730년대에 프랑스 인쇄소 노동자들은 고양이 대학살을 감행한다. 고양이 대학살을 주도한 인쇄소 노동자 인쇄공 제롬과 레베이예는 부르주아 집안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먹다 남긴 밥을 먹을 정도로 비참하게 살았다. 인쇄소 노동자들은 고양이보다 못한 자신들의 삶에 분노하여 단체로 고양이들에게 화풀이했다.

 

인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미신에 집착했다. 그렇지만 잘못된 미신이 이성의 눈을 가리는 바람에 동물이 희생당했다고 보는 인간의 변명은 치졸하다. 이제 인간은 고양이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고양이를 만만하게 본다. 인간은 자신의 폭력성을 증명하기 위해 고양이를 마음껏 죽인다. 쓰레기봉투 옆을 사자처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잔인한 방법으로 괴롭히거나 죽이는 일은 범죄에 가까운 동물 학대다. 도시의 고양이들은 무방비 상태로 살아간다. 인간의 분노가 담긴 발길질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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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 2016-04-12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캣쏘우` 라는 필명의 누리꾼은 영화 쏘우에 아이디어를 얻어 고양이를 학대하고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애묘인으로 둔갑하여 분양받은 고양이를 칼로 절단하고 죽이는 등의 혐오스러운 범죄를 저질렀는데요. cyrus님의 글을 읽던 도중 문득 그 사건이 생각나 덧글을 달아봅니다. 인간은 고양이 뿐만 아니라 수많은 동물들을 생존이 아닌 재미로 희생시키고 있고 또 희생시킬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cyrus 2016-04-13 22:09   좋아요 0 | URL
기억납니다. 고양이뿐만 아니라 동물을 잔인하게 죽여서 그 장면을 동영상에 담아 공개하는 또라이도 있어요. 그들은 폭력에서 즐거움을 찾아요. 그리고 그걸 과시하고 싶어서 남들에게 보여주려고 합니다. 제정신이 아닙니다.

시이소오 2016-04-12 2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자만 보느라 고양이가 있는줄 몰랐네요. 예리한 관찰력이 십니다. 고양이가 이렇게 학대받아온지도 몰랐네요. 고양이뿐만 아니라 인간 때문에 참 많은 생명들이 고통받는군요. 또 이렇게 배우고 갑니다. ㅎㅎ

cyrus 2016-04-13 22:12   좋아요 0 | URL
화젯거리가 안 돼서 그렇지, 알려지지 않은 동물 학대 건수가 상당히 많을 걸요. 가끔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자신의 동물 학대를 자랑이라고 공개하니까 욕먹습니다.

transient-guest 2016-04-13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세에도 주기적인 `고양이 대학살`이 있었지요. 이유가 잘 생각나지는 않지만, 평민층에 허가된 일종의 축제 같은 것으로 고양이를 죽이면서 귀족에 대한 화풀이를 했다는 강의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의 민담에서도 고양이가 좋게 나오는 경우는 드문 것 같네요. 한국에서는 토끼띠 (묘)라고 하지만, 중국이나 동남아권에서는 발음이 비슷한 고양이띠 (묘) 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역시 그리 좋은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더라구요..

cyrus 2016-04-13 22:15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고양이가 익살형의 제물이 된 이유가 중세의 축제 목적과 유사하겠군요. 한국 전래 동화 중에 고양이를 부정적으로 나오는 장면이 있는 것 같은데, 계속 떠올려봐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yureka01 2016-04-13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반려 동물,혹은 가축이나 어떤 식물이나 동물은 사람 곁에 있으면
좋은 꼴보기가 어렵다능 ....

동네에 돌아다니는 고양이 대부분이 유기묘라는 거....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지론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되는 말은 아닌거 같아서
씁쓸하죠...

cyrus 2016-04-13 22:17   좋아요 0 | URL
길고양이에 대한 일부의 불만(소음, 길거리 미화 문제 등)은 이해하지만, 그 불만이 과열된 분노로 표출되는 건 문제 있다고 봅니다.

빨강앙마 2016-04-13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제리가 너무 미웠던 기억이 있네요 톰과제리..이야기에서..ㅡ.ㅡ
고양이를 무자비하게 죽이다니..사실 그 울음소리와 눈빛때문에 저역시 그리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아무 이유없이 그런건 좀..ㅠㅠ

cyrus 2016-04-13 22:19   좋아요 0 | URL
어른이 되면 어렸을 때 봤던 만화의 불편한 진실들을 하나씩 깨닫게 되죠. ㅎㅎㅎ
예전에 둘리가 어른들에 맞서는 영웅이었는데, 지금은 고길동이 더 불쌍해 보이잖아요.
 

 

 

 

 

 

 

 

 

 

 

 

 

 

 

 

 

 

 

올해는 최명희의 《혼불》이 10권으로 완간된 지 스물 번째 해다. 1990년에 1부와 2부 내용을 담은 네 권의 책이 한길사에서 선보였고, 1996년 12월에 5부 여섯 권의 책이 나왔다. 한길사 판본은 절판되었고, 2009년에 판권이 매안 출판사로 옮겨 재출간되었다.

 

《혼불》 1부는 1981년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된 작품이다. 공모전 상금은 2천만 원. 그 당시로선 어마어마한 상금 액수이다. 정식 작가가 되기 전에 최명희는 여자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평범한 교사였다. 그런 그녀가 1980년대 초 한국 문단에 파란을 일으키면서 등장할 거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단편 『쓰러지는 빛』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이듬해에 최명희는 자신의 인생뿐만 아니라 한국 문단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남겼다. 그 작품이 바로 《혼불》 1부다. 《혼불》로 주목받은 최명희는 1988년 9월부터 1995년 10월까지 월간 <신동아>에 《혼불》 2부에서 5부까지 연재했다. 소설이 연재되는 데 걸린 세월은 만 7년 2개월. 국내 월간지 사상 최장 연재 기록이다.

 

그녀는 난소암 투병 중에도 펜을 끝까지 놓지 않은 채 원고지에 매달렸다. 병마와 싸우는 고통스러운 집필 끝에 5부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다. 《혼불》 10권 완간 이후로 최명희는 5부 이후의 이야기 구상을 염두에 두었으나 그녀의 몸속에 있는 혼의 기운이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결국, 소설을 끝맺지 못하고 1998년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혼불》은 일제 강점기 남원지방을 배경으로 종가를 지키는 여인 3대의 삶을 추적했다. 제목의 ‘혼불’은 사람이 죽기 전 몸에서 빠져나가는 생명을 뜻한다. 작품에서의 혼불은 이른바 정신의 불이며 존재의 불꽃으로 한 인간 혹은 한 민족의 핵이 되는 요체를 상징한다. 안타깝게도 영원히 끝내지 못한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문장마다 스며든 우리말 가락과 치밀하게 복원된 민속 풍습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

 

 

 

 

 

 

 

《혼불》 1부는 1983년 동아일보사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신동아> 연재 시절에 《혼불》을 접한 독자들의 현재 나이는 대략 50세 초반에서 60대 후반이다. 이들은 동아일보사에 나온 1부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에 한길사 《혼불》을 알게 된 독자들은 동아일보사 판본의 존재를 잘 모를 수 있다.

 

 

 

 

 

 

 

 

 

 

 

 

 

 

 

 

 

 

사실 나도 《혼불》 1부가 따로 출간된 적 있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알았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장 윤성근 씨의 책 《심야책방》(이매진, 2011)에 《혼불》의 역사를 정리한 글이 있다.

 

 

 

 

 

동아일보사 판본은 매안 출판사 판본으로 읽을 수 있는 《혼불》 1부를 담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이 한 권의 책을 원하는 독자가 있다. 동아일보사 《혼불》 1부는 《혼불》의 시작을 알리는 최초의 책이다. 당연히 애서가들은 더 이상 구하기 힘든 최초의 책을 가지고 싶어 한다. 그래서 동아일보사 《혼불》 1부도 온라인 헌책 중고가가 악명 높기로 유명하다. 더욱이 초판일 경우, 책의 값어치가 더 오른다. 기본적으로 중고가 금액이 5만 원이며 가장 비싼 가격은 십만 원이 훌쩍 넘는다.

 

나는 동아일보사 《혼불》 1부의 존재만 알고 있었다가 어제 운 좋게도 대구시청 근처에 있는 헌책방 ‘평화서적’에서 샀다. 이 책은 잔뜩 쌓아 올린 책 무더기 제일 밑에 깔렸었다. 이걸 발견하는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진짜 이 짜릿한 기분 때문에 헌책방을 안 갈 수가 없다. 악명 높은 금액의 희귀도서를 싸게 살 때가 기분이 더 짜릿하다. 지불한 돈은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이었다. 이제 《혼불》 10권을 갖추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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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4-10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고....그 짜릿함...작가의 부재가 더해지네요....

cyrus 2016-04-12 11:21   좋아요 0 | URL
정말 엄청난 소설을 남기고 떠나셨지요. 박경리의 《토지》와 쌍벽을 이루는 여성 작가의 대하소설입니다. 아마도 다음 시대에는 《토지》와 《혼불》 같은 작품을 쓴 여성 작가가 나오기 힘들 겁니다.

오후즈음 2016-04-10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득템 하셨네요! 이런 득템도 뭘 알아야 할수 있는것 같아요.

cyrus 2016-04-12 11:22   좋아요 0 | URL
헌책방을 자주 찾는 분의 블로그에 정보를 많이 얻습니다. ^^

stella.K 2016-04-11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진짜 완전 득템이구만.
혼불이 절판됐나? 이런 건 어느 출판사에서라도 계속 나와야하는데 말야.
오래 전에 1권 읽고 읽어야지 읽어야지 했던 게 결국 못 읽는 신세가 됐군.
변명이지만, 책이 워낙 많이 나오니 뭐 하나를 진득하게 못 붙들고 있겠더군.ㅠ

cyrus 2016-04-12 11:24   좋아요 0 | URL
아니요. 매안 출판사에서 다시 나온 건 지금도 판매되고 있어요.

중학생 때 한길사 판본 1권을 읽으려다가 포기한 적이 있어요. 그때라도 완독 도전해볼 걸 그랬어요. ㅠㅠ

표맥(漂麥) 2016-04-11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불... 장길산... 토지... 객주...
저에겐 같은 레벨로 와 닿습니다...^^

cyrus 2016-04-12 11:26   좋아요 0 | URL
조정래의 《태백산맥》도 있지요. 다섯 작품 모두 읽어보고 싶은데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제가 독서 집중력이 딸려서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