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파간다 파워 - 인간과 세상을 조종하는 선전의 힘
데이비드 웰치 지음, 이종현 옮김 / 공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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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11 사태 때 미국 언론들은 ‘테러’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기사를 쏟아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런 사태가 발생한 맥락에 대한 논의는 아예 생략해버렸다. 부시 정부가 "세계의 자유를 주도하는 미국은 테러 공격의 목표물이 되었다"고 발표하자 주류 언론들은 이 성명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왜 미국 언론은 무비판적이고 부정확한 분석만 내놓았을까? 놈 촘스키에 따르면 세상은 기업권력을 축으로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의 프로파간다(선전)에 의해 움직인다. 기업 자본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언론은 그럴듯한 거짓말로 권력과 공생하며 프로파간다를 확대 재생산한다. 이런 문제는 워낙 구조적인 것이어서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양상과 쟁점은 사뭇 다르지만, 한반도도 ‘프로파간다 문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특정한 이념이나 주장을 의식적으로 퍼뜨리려는 프로파간다가 흔하다. 남한 사회의 담론공간은 보수진영에 유리한 기울어진 경기장이며, 보수 세력의 ‘종북’ 프레임은 반대 이슈를 블랙홀처럼 집어삼킨다. 북한은 자주통일을 강조하는 프로파간다 포스터들을 새롭게 선보인다. 북한의 관영 매체는 주체사상에 입각한 김씨 일가 우상화를 위한 프로파간다에 주력하고 있다.

 

《프로파간다 파워》의 저자 데이비드 웰치는 선전을 ‘선전가의 이익에 부합하게 의식적으로 생각해내고 계획한 모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안해낸 개념을 전파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정치선전의 출발점은 정치권이나 언론이 주도하는 의제설정이다. 의제설정은 ‘대중이 어떤 이슈를 생각하게 하는 것’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세상 풍경을 그리게 한다. 의제설정 과정에서 현실에 대한 이해와 해석에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는 프레임이 형성된다. 한번 프레임이 형성되면 쉽게 깨지지 않는다. 언어를 반복사용하면 인간의 심리 저변에 무의식적으로 프레임이 고착되기 때문이다. 정치선전의 성패는 의제설정과 프레임 형성에 달린 셈이다.

 

프로파간다는 로마제국 시대에 이와 같은 선교활동의 의미로 쓰였으나 십자군 전쟁 때는 상대방의 잔학행위를 들추어낼 목적으로 이용됐다. 종교개혁 때는 신교도와 구교도 사이에 활발한 선전전이 이루어졌다. 20세기에 들어와 선전활동은 비약적 발전을 보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전쟁 당사국들 사이에는 온갖 방법을 통한 대내선전과 대적(對敵)선전이 난무했다. 소비에트연방의 성립과 함께 공산주의 선전이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다. 히틀러는 공산주의와 나치스의 국가사회주의가 상극이었음에도 레닌의 선전술을 훌륭하게 계승 발전시켰다. 이를 위해 중용된 인물이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다. 그는 라디오가 대중선동을 위한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믿고 라디오를 널리 보급했다. 라디오의 2차 대전 전황 소식은 전부 거짓이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독일인은 연합군이 베를린을 함락시킬 때까지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이런 극단적 선전은 다 옛날얘기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선전은 심하게 왜곡되고 오인된 말이다. 일반인들은 이 말을 저급하거나 아주 비열한 것을 의미하는 데 사용한다. 선전이라는 말은 항상 뒷맛이 쓰다.” 괴벨스의 경구를 기억해야 한다. 선전이란 사람의 생각을 휘두르는 조작 방식이라는 의심을 많이 받는다. 아무리 까다롭고 냉소적으로 일관하더라도 사람들은 결국 반응하게 된다. 광고ㆍ홍보 전문가, 정치인, 컨설턴트 등 대중을 유혹하고자 하는 이들은 많다. 어떤 경우 ‘가만히 있는 것’이 프로파간다가 되기도 한다. 바나나맛 초코파이 사례가 대표적이다. SNS에 올라온, 바나나맛 초코파이를 먹어본 사람의 인증샷이 바나나맛 초코파이의 폭발적 인기를 견인했다. 정부는 대중이 기꺼이 수용할 만한 방법을 통해 존재와 목적을 알린다.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왜곡된 프로파간다가 승리하는 일이다. 그래서 《프로파간다 파워》는 프로파간다의 양면성을 보여 준다.

 

정치와 선전은 불가분의 관계다. 선전에서 언어는 핵심요소로 작용한다.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요체는 사람들과 정보를 쌍방향으로 주고받고, 공유하며, 공감하는 데 있다. 그러나 정치가들은 노골적이고 은밀하게 인간의 신념과 행태에 영향을 미치고 조종하려는 선전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정보 과잉의 대중미디어 시대에 수용자는 이성적 사고와 판단력 미비로 선전에 취약하다. PR,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전략 등이 ‘대중의 무의식’을 교묘하게 이용하지만, 대중은 이런 기술에 점차 무감각해지고 있다. 어느 사회, 어느 체제에서나 권력을 가진 자, 가진 권력을 지키려는 자들에겐 여전히 큰 유혹이 될 수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매일 공론장에서 제기되는 의제와 담론경쟁의 배경과 메시지, 선전논리와 기법, 수사적 언어, 프레임의 형성과정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다면 선전에 쉽게 넘어가기에 십상이다. 정부가 내놓는 정책치고 미사여구로 덧칠하지 않은 것이 드물다. 화려한 문구로 포장하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 ‘프로파간다의 시대’라서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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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3 2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5-04 16:28   좋아요 1 | URL
특정 정당 편파 방송에, 대놓고 간접 광고까지... 프로파간다의 모든 걸 보여주고 있어요. ㅎㅎㅎ

표맥(漂麥) 2016-05-03 2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대 사기의 시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cyrus 2016-05-04 16:29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나쁘게 말하면 사기죠. ㅎㅎ


stella.K 2016-05-04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나나 맛 초코파이 먹어보니 어떠니?
말에 의하면 지네들도 그렇게 인기가 있을 줄 몰랐다며
생산을 늘릴 거라고 했다던데.
그 소식 한 달쯤 전에 들은 것 같은데 지금쯤 인기가 좀
줄지 않았나? 버터 허니칩도 지금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잖아.

cyrus 2016-05-04 16:32   좋아요 0 | URL
허니버터칩 가격이 일반 감차칩보다 조금 높아서 그렇지, 동네 가게에 가면 흔히 볼 수 있어요. 지금은 흔한 고급 감자칩입니다. 요즘 유자맛, 딸기맛 초코파이도 있어요. 한 박스 가격이 4800원 정도합니다. 어마어마한 가격이죠. ㅎㅎㅎ 그래도 바나나 맛 초코파이가 생소해서 이거 한 번 맛보려는 사람이 엄청 많아요. 저는 정말 운 좋게 샀어요. 어머니 심부름 갔다고 그냥 한 박스 샀어요. 일주일 뒤에 다시 가보니까 다 팔리고 없었어요.

바나나 맛은 나긴 나는데, 맛이 밋밋해요. 초코 맛이 덜해요. 그런데 크기는 일반 초코파이보다 두툼합니다. 막상 먹어보면 별거 아니에요. ^^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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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트위터에 떠돌던 야한 유머. 여자가 남친(남자 친구) 화 푸는 간단한 방법을 알고 나서 직접 실험을 해봤다. “가슴 만질래?” 한 마디 하니까 바로 남친의 기분이 풀렸다고 한다. 영국의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둥그렇게 생긴 가슴 형태가 성적 신호라고 했다. 그의 주장은 여성이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네 발 시절 남성을 유혹했던 엉덩이를 대신해 가슴을 키웠다는 가설을 뒷받침했다. 심지어 여성의 가슴이 남편의 구타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만큼 가슴은 다른 신체 부위보다 섹시하면서도 에로틱한 느낌을 준다. 이 유머가 남친 화 푸는 법이라는 제목이 붙은 짤방(글에 첨부된 이미지)으로 널리 알려졌다. 생각보다 유머에 공감하는 남자, 여자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유머를 가벼운 재미로 받아들이면, 그 속에 있는 불편한 진실을 보지 못한다. 남자를 달래주려고 가슴을 드러낸 여자, 그녀의 가슴을 보자마자 화색이 돌기 시작한 남자. 이 두 남녀의 모습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왜곡되었다.

 

몇 천 년 동안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 인식되었다. 남성이 외도하면 남자답다고 하면서 관대하게 여긴다. 이로써 남성은 남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강화하게 된다. 반대로 여성이 외도하면 여자가 감히!’ 라고 매도한다.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남성들은 남성들과의 관계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려는 여성들에 대한 부당한 살인을 자행하였다. 남성들의 저항은 성차별적인 사회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거나 그것에 저항하는 여성들, 즉 페미니스트에 대한 낙인으로 이어진다. 이 낙인은 주류남성의 관계로부터 소외된다. 가부장제사회에서 남성의 관심 어린 시선에 벗어나면 여성들에게 의미 있는 자원을 획득할 기회 박탈로 연결된다. 따라서 여성은 고정화된 여성성에 맞춰 살아간다. 남성은 어렸을 때부터 용맹함, 진취적인 기상의 중요성을 배우면서 자란 반면에, 여성은 정숙, 순결, 아름다움, 순종, 심지어 아내로서의 덕성을 배운다.

 

지금도 여전히 남자는 남성적인 것이, 여자는 여성적인 것이 심리적으로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성 역할 구분은 현대 사회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을뿐더러 인간이 타고난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데에 장애요인이 된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경제활동의 약자로 간주하여 왔다. 나이지리아 소설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강고한 남성적 질서의 문제점과 오해를 지적한다.

 

 

지금 우리가 남자아이들을 기르는 방식은 아이들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남자아이들의 인간성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남성성을 대단히 협소한 의미로만 정의합니다. 남성성은 좁고 딱딱한 우리와 같고, 우리는 그 속에 남자아이들을 밀어 넣습니다. (28)

 

 

여성은 단단한 남자의 기분을 맞춰주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래서 가슴을 드러내어 남성을 만족하게 한다. 이 유머에서 성 역할이 왜곡된 채 사회화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여성이 남성의 취약한 자아를 맞춰주는 존재로 보고 있다. 잘못된 여성성은 여성을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공격당한다. 가진 것이 없어서 그저 남자의 성적 욕망을 충족해주는 김치녀라고 비난한다. 결국, 남성과 여성에 대한 편견은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된다. 차별을 넘어서 혐오에 가까운 오해가 생긴다. 기존의 남성성, 여성성이 강화될수록 남자들도 감정조차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는 부담에 억눌린다. 남성들의 권위가 약화되는 좁은 세상 속에 사는 남자들은 불안감이 생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아 분노를 표출한다. 이로 인해 여성들은 불합리한 혐오에 고통 받는다.

 

누군가는 유머를 심각하게 보는 나의 태도에 속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하지 싶다. “설마, 당신도 페미니스트?” 가부장제 사회에서 페미니스트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여성들은 주류사회로부터의 추방을 각오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페미니스트 담론은 개개인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SNS를 중심으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선언하는 운동이 확산하였다. 페미니스트가 환영받는 시대라고 하지만, 이중 잣대는 여전하다. 여자들이 페미니즘을 들고 나오면 너는 왜 그렇게 사니?라고 하는 이들이 많다. ‘성 평등이 이미 낡은 단어로 느껴지지만, 현실은 아직도 성 평등과 무척 거리가 멀다. 사회는 물론이고 교육 현실 속에서, 그리고 교육이 시작되는 가정에서도 남자답게여자답게가 뿌리 깊은 게 사실이다. “남자아이가 그것도 못하고 계집애처럼 울면 되겠어?”, “여자애가 칠칠치 못하게우리가 자라면서 많이 듣던 이런 말을 자연스럽게 되풀이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의해야 한다. 어려서부터 갖게 된 남녀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정말 무섭다. 무의식 속에서 오랫동안 박혀 있던 성의 고정관념이 가끔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정말로 다양하게 존재하는, 차이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서로 배려하면서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려면 여성성·남성성이라는 이분법적 단어가 사라져야 한다. 아디치에의 사전에는 페미니스트가 오로지 여성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사람이라고 적혀 있지 않다. 페미니스트는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페미니스트의 자격요건은 반드시 여성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성 역할을 강요하는 사회에 불편함을 느껴 문제제기하는 사람들은 모두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즘 담론은 인간 사이의 연대와 소통을 회복하는 방법을 찾으려는 고민이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배운다면 남성은 덜 힘들고 여성은 덜 아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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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4-19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이와 차별을 구분못하는 경우가 너무 비일비재합니다.
남여의 차이를 가지고 차별하면
남자나 여자나 둘다 불행하거든요...

cyrus 2016-04-20 07:46   좋아요 1 | URL
맞아요. 남녀 갈등과 혐오는 남자 여자 모두 정신적 상처를 주고받는 최악의 상황입니다.

표맥(漂麥) 2016-04-20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드니 아내의 눈치만 보게 되던데... 아내여~ 남편을 배려하고 이해하라! 이해하라! 이해하라~~~ (철없는 남편)^^

cyrus 2016-04-21 15:17   좋아요 0 | URL
저는 미혼이라서 누구 눈치 볼 필요가 없습니다. ^^;;

만두 2016-04-30 17: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실 `미혼`도 여성주의에서는 지양하는 단어중 하나에요(결혼을 당연한 전제적 과업으로 상정하고있으므로..) 무튼 믿고 읽는 cyrus님 리뷰...! 잘읽엇습니당

cyrus 2016-04-30 18:5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불평등이 노년의 삶을 어떻게 형성하는가
코리 M. 에이브럼슨 지음, 박우정 옮김 / 에코리브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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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최고의 노래를 꼽자면 단연코 이애란의 ‘백세인생’이다. 이른바 ‘못 간다고 전해라~’ 신드롬을 탄생시키며 국민적 화제를 모았다. 노랫말은 백세까지 사는 인생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시켜주기에 충분했다. 병치레 없이 오래 살고 싶다는 바람은 단지 개인의 욕망 차원에 머무르진 않는다. 헌법에도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살아갈 권리’가 명시되어 있다. 노년 복지는 국민의 기본권 차원에서 다뤄져야 할 문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건강 불평등’이란 말이 갈수록 회자하는 실정이다. 우리나라 노인소득불평등지수는 OECD 국가 중 멕시코, 칠레에 이어 세 번째로 높다. 경제적 불평등이 장기화하면서 현재 40ㆍ50대가 노인이 되면 불평등이 더욱 심화하고 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보유한 자원을 활용해 그나마 여유 있는 노후 준비를 할 수 있지만, 경제적 약자들이 문제다. 환경적 요인과 함께 사회경제적 여건이 개인의 건강·사망을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라는 사실이 최근 학계에서 잇따라 제시됐다. 삶의 여건이 평생 건강을 좌우한다.

 

장 자크 루소는 적어도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했지만, 코리 에이브럼슨의 책을 본다면 인간은 불평등하게 태어나는 순간 평생 불평등한 인생을 살다간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현실에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하다. 《불평등이 노년의 삶을 어떻게 형성하는가》의 원제는 ‘The End Game’이다. 사회에서 태어난 인간의 미래를 결정하는 가장 강력한 요인은 ‘어떤 부모로부터 태어났느냐’이다. 돈 있고, 교육 수준이 높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와 돈 없고, 교육 수준이 낮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의 미래는 극명하게 갈린다. 여기서부터 한 사람 인생 전체를 의미하는 게임의 결과가 달라진다. 교육, 부 그리고 삶의 기회 격차가 벌어지면 후자의 인생 게임은 불공정하게 진행된다. 가난한 사람이 늙고 병들수록 심리적으로 위축된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백세인생에 대한 희망이 없다. 이미 예상된 인생의 슬픈 종지부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에이브럼슨은 인종과 민족이 다양한 미국의 중산층과 저소득층 거주지 2곳씩을 2년 6개월 동안 심층 인터뷰를 했다. 그 결과, 고령화 사회의 불평등이 각종 복지서비스 제공만으로 해소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나이가 들면서 오는 자연스러운 신체 노화와 질병은 불평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저소득층 노인은 질병을 치료하는 데 드는 비용의 증가를 감당하지 못한다. 특히 체력이 부족한 노인은 일상생활에 제약을 받는다.

 

 

“노인들에게 교통수단은 중요한 문제예요. 그들은 점점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죠. 그래서 걷기 힘든 대다수 노인은 그냥 집에 붙어 지냅니다. 먹고, 잠자고, 텔레비전을 보고, 약을 먹지만 어디에도 가질 못해요. 집에 갇힌 신세가 되는 거죠.” (74쪽)

 

 

활동량이 적은 노인들은 스스로 가족, 친구에게 버림받았다고 밝혔다. 교우 관계가 단절되면 우울증이 심각해지며 건강 악화의 원인이 된다. 중산층 노인 거주 지역과 저소득층 노인 거주 지역 간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더 심각하다. 인간은 전 생애에 걸쳐 불평등한 사회의 각종 병폐를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그리하여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죽을 때까지 받는 차별적 경험만큼 건강도 차별적 영향을 받게 되어 건강 불평등이 양산된다. 중산층 노인 거주 지역은 노인 복지를 위한 정부 보조금 지원이 원활하게 진행되지만, 저소득층 노인 거주 지역은 비영리단체의 지원에 더 많이 의존한다. 당연히 중산층 노인의 삶의 질이 높아지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많다. 반면 저소득층 노인은 의료 복지와 의료 기관에 회의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더 이상 삶에 의욕을 느끼지 못한다. 일부 노인은 공허한 분위기를 달래려고 술과 약물에 의존하는 성향을 보인다.

 

과거에는 건강을 개인의 책임 또는 타고난 유전적 문제로 인식했다. 비슷한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건강한 생활을 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병원 신세를 진다. 결국 건강은 개인의 의지에 달려 있고, 개인의 책임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조금만 더 시각을 넓혀서 관찰해보면, 이러한 차이가 사회 계층별로 매우 구조화되어 있다. 불평등에서 비롯된 빈곤은 사회적 현상 그 자체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환경에 영향을 받는 인간의 삶과 신체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그렇게 해서 사회적 불평등은 건강의 불평등을 발생시키는 근본적 원인으로 작동하게 된다. 사회 계층 간의 차별적인 환경과 장벽이 구조적으로 존재함을 고려하지 않고, 건강을 개인의 책임으로 결론을 내리면 건강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건강을 개인의 책임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삶의 질이 보장된 동일한 여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우리나라 절대빈곤 가구의 절반 이상이 고령가구다. 근로능력이 없는 노년층 가운데 적지 않은 인구가 최저생계비에 의존하고 있어서 소득불평등도가 더 높게 나온다. 우리나라의 빈곤문제는 현재 미국에서 일어나는 고령층 생계문제와 유사하다. 노년기의 불평등은 인생의 다른 시기에 겪는 불평등과는 다르다. 빨라진 은퇴연령, 늘어나는 평균수명, 고령층을 위한 사회안전망 부실 등 다양한 원인으로 노년계층의 경제난은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순간, 우리 인생의 게임이 불행하게 끝날 수도 있다. 불평등 사회 속에 백세까지 있는 최종 단계까지 행복하게 살아가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미래가 어두운 ‘백세 불평등 인생’을 생각하면 ‘백세인생’ 노래를 즐겁게 따라 부를 수가 없다.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 너무 살기 힘드니 따라 간다고 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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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8 2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4-19 16:4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서글프지만, 아프지 않고 생의 소풍을 조용히 마치는 게 더 편하죠.

세실 2016-04-18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픈 현실입니다.
퇴직후 사십년을 뭐하며 지낼까 생각하면 답답합니다. 이십년이상은 병원 다니며 연명할수도...

cyrus 2016-04-19 16:49   좋아요 0 | URL
오늘 아침에 현 노년층 경제 상황이 암울하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지금 20대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걱정됩니다. 이 문제를 바로 잡지 않으면 노년 불평등이 다음 세대로 계속 대물림됩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개정증보판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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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또이는 행복한 사람들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사람들은 그 이유가 갖가지라는 세계의 문호다운 예리한 관찰을 했다, 사실, 그 점은 국가도 마찬가지다. 잘 사는 국가는 비슷하게 잘 사는데, 못 사는 국가는 그 이유가 제각각이니까. 신문의 국제면은 연일 기아, 전쟁, 빈곤, 환경파괴, 무역 분쟁, 삶의 질의 저하 등으로 메워지고 있다. 세계가 이렇게 자기 소모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다가는 지금의 문명이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누가 세계를 이렇게 만들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누가 수혜를 보는 것일까.

 

 

 

 

 

 

한쪽에서는 이것이 세계의 번영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이것이 재앙을 초래하고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세계화가 바로 그것이다. 세계화가 시대의 화두가 된 지도 오래다. 세계화의 문제는 한마디로 불평등의 문제이다. 선진국과 개도국,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에 가속하는 격차를 두고 위기의식이 거론되고 있다. 한스 페터 마르틴과 하랄트 슈만은 공저 세계화의 덫(영림카디널, 2003)에서 전 세계가 20%의 부유층과 80% 빈곤층으로 양분된다는 암울한 전망을 하였다. 오늘날 현실은 그들이 경고한 ‘20 80 사회 향해 날로 고착화하는 형편이다. 세계화는 지구촌을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시키면서 동시에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갈가리 찢어놓는 이중성을 드러냈다. 국경이 사라진 거대한 세계시장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쌓는 부()는 그 이전 시대보다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이미 경제학에서는 세계화가 경제성장에 미치는 효과에 관해 치열한 이론적, 실증적 논쟁이 벌어져 왔다. 주류경제학자들은 경제를 개방하고 상품과 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한다면 개도국에서 투자가 촉진되고 경제의 효율성이 상승할 것이라 주장한다. 세계은행은 1996년 로마 식량정상회의에서 2015년까지 세계 기아 인구를 절반 수준으로 줄인다는 계획을 채택한 바 있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로 진행되고 있다. 세계화의 가속화에 따라 국가 간, 계층 간 소득 격차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 곳곳이 기아의 고통에 허덕인다.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남부에 사는 59000만 명 중 3분의 1은 극심한 영양실조 상태에 놓여 있다. 식량 원조는 거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지역 인구를 먹여 살리는 데 필요한 식량은 원조량의 5배에 달하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사회학자 장 지글러는 저서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기아의 실태와 그 배후의 원인을 아들과의 대화 형식으로 설명한다. 개발도상국의 빈곤문제는 그 자체가 매우 복잡한 사회적 현상으로서 구조적이고 다면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책의 제목처럼 왜 많은 사람이 굶주려야 하는가에 대해 다양한 사례와 해석을 내놓았다. 농사짓기 좋고 종족 갈등도 없는 소말리아가 기근으로 시체의 산을 이루는 건 군벌들의 다툼 때문이다. 구호단체 화물선이 정박할 항구는 전쟁통에 폐쇄됐거나 통행세를 요구하는 무장 세력으로 득실댄다. 선진국들은 개도국과 후진국에는 자유 시장논리를 강요하면서도 정작 자국 시장은 봉쇄하고, 자국 농민은 보조금 정책을 통해 보호하고 있다. 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세계화는 소수의 다국적기업이 세계 농업 무역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결국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식량을 살 돈이 없어서 굶주리는 일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아프리카 올해의 축구선수로 가봉 국적 공격수 피에르 오바메양이 선정되었다. 독일 분데스리가의 녹색 그라운드를 질주하는 오바메양의 모습에 시종일관 시선을 떼지 못했지만, 머나먼 대륙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것이 세계화된우리의 현실이다. 세계화는 이미 거부하기 어려운 현실로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세계화로 인해 무한 경쟁 논리가 지구상의 모든 사람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침투되고 있다. 대부분 고등학교 경제 교과서에서는 세계화를 국경의 개념이 허물어져 세계가 하나의 열린 시장이 됨으로써 자본, 물자, 인력, 정보 등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현상으로 정의하고 있다. 전 세계가 자본주의라는 단일한 경제 체제로 통합됨으로써 자본이 전 지구를 대상으로 자유롭게 이윤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세계화의 본질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전 지구화.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세계화의 본질을 보여주기에는 2% 부족하다. 그 이유는 세계화라는 자본주의의 빛에 가려진 어두운 그늘에 대한 언급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세계화의 그늘인 기아 문제가 발생하게 된 이유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바람을 잔뜩 들이마신 우리 사회는 기아를 초래하는 원인을 알고도 침묵한다. 만일 경제 교과서에 세계화의 원인이 다국적 기업의 탐욕이라는 문장 한 줄만 보여도 뉴라이트 세력이 트집을 부릴 것이다. 기아 문제에 침묵하는 사회일수록 집단 전체에 지적 마비증세가 온다. 장 지글러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계 경제의 그늘을 이해하지 못한 학생들은 현실에 동떨어진 인간애를 가지고 졸업한다. 그들의 호주머니에 결식아동의 하루 식사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돈이 있다 하더라도, 그보다는 스타벅스 커피 한 잔 마시는 것이 더 유익이라는 판단이 오늘도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는 이유가 된다.

 

세계화의 치부를 드러내는 자료는 넘쳐나는데, 주류경제학자들은 세계화가 얼마나 신나는 것인지 설명한다. 반세계화 운동을 비난하는 이들을 향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말로 경제성장이 개발도상국의 빈곤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 적이 있었는가?” 이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세계화 시대의 파국을 피부로 겪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궁극적인 해결책을 찾기 쉽지 않겠지만, 지금 우리에게 당장 요구되는 것은 세계화의 모순적인 이면에 대한 관심이다.

 

 

 

 

※ 서평대회 이벤트에 응모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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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은 바다표범을 무서워한다. 바닷물 속에서 먹잇감을 찾다가 그만 자신이 바다표범의 먹잇감이 된다. 펭귄들이 살아남으려면 바다표범이 살지 않는 안전한 바다를 찾아야 한다. 이럴 때 ‘퍼스트 펭귄(first penguin)’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는 겁이 많은 펭귄들을 대신하여 바닷속으로 뛰어든다.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을 본 펭귄들은 퍼스트 펭귄을 따라서 바다로 들어간다. 바다를 헤엄치며 이동해야 할 때도 퍼스트 펭귄이 가장 먼저 앞장선다. 펭귄 무리는 그의 행동을 믿고 의지한다. 

 

그러나 퍼스트 펭귄이 바다표범에 잡혀 죽는 불상사가 생겼다. 살아남은 펭귄 무리는 퍼스트 펭귄이 끔찍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그저 지켜봐야 했다. 또다시 다른 육지로 이동해야 할 시기가 찾아왔다. 펭귄들은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여기 한곳에 오래 있으면 북극곰에게 발각될 수 있다. 이번에도 퍼스트 펭귄이 나서야 할 때다. 그런데 펭귄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퍼스트 펭귄이 되면 집단을 위해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막중한 책임감이 따른다. 그걸 잘 알기에 아무나 퍼스트 펭귄이 나오기만 기다린다. 그러자 한 펭귄이 침묵을 깨고 바닷속으로 뛰어든다. 그는 계속 기다리기만 하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퍼스트 펭귄이 되기로 했다. 새로운 퍼스트 펭귄은 물속 주위를 확인하고 바다표범이 없다는 사실을 육지의 펭귄들에게 알렸다.

 

“얘들아, 지금은 안전하니까 얼른 물속으로 내려와!”

 

그러나 육지의 펭귄들은 우두커니 서서 퍼스트 펭귄을 쳐다봤다. 이들은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그래? 안 갈 거야?” 퍼스트 펭귄이 재촉하자 펭귄 무리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안전하다고 말해도 물속에 들어가기가 무서워.”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개마고원, 2013)와 《공부 중독》(위고, 2015)은 삶의 변화를 두려워하는 집단적 공포에 지배당한 우리 사회에 경각심을 주는 책이다. 오찬호, 엄기호, 하지현. 이 세 사람은 성과에 집착하도록 유도하는 현 교육 체제의 문제점을 공유한다. 그리고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갖춘 ‘퍼스트 펭귄’들이다.

 

오찬호는 지금의 20대들에게 자기계발의 환상적 주문에서 빠져나오라고 당부한다. 자기계발 시대 속에 살아가는 20대들은 ‘뜨거운 열정’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젊은이들은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만 있다면 ‘열정 페이’를 해서라도 자신의 열정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기업이 원하는 ‘뜨거운 열정’이 구체적이지 않은데도 의심할 겨를 없이 자신들의 하나뿐인 청춘을 끊임없이 담금질한다. 너나 할 것 없이 전국의 젊은이들이 ‘열정’을 보여주려고 난린데, 취업이 무난하게 될 리 없다. 취업이 안 된 친구들은 점점 입이 바짝 타기 시작한다. 이제 서른이 코앞인데 변변한 직장을 갖지 못하면 왠지 사회에서 뒤처지는 기분이 든다. 수차례 낙방하면 깊은 좌절감에 빠진다. 주변 어른들은 그들에게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한다.

 

“젊은이, 좌절하지 말고 더 노오오오력해보시게나.”

 

젊은이들은 자신이 무능력해서 연거푸 실패의 쓴잔을 들이켜 마신다고 생각한다. ‘취업 준비 중’인 젊은이들은 비좁은 고시원 방에 갇힌 채 두꺼운 자격증 문제집을 끼적거린다. 그들의 방문 앞에 ‘지금도 노력 중’이라는 푯말이 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20대들은 이렇게 침잠한 잉여 상태로 청춘의 끝자락을 보낸다.

 

 

 

 

 

‘지금도 노력 중’ 상태로 맞춰 살아가는 20대들은 엄청난 양의 공부에 중독되어 있다. 어른들은 공부가 재미없어도 미래를 위해서라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명문대에 입학해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고, 죽을 때까지 넉넉하게 돈을 만지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누구나 다 공부하는 시대가 된 지금, ‘공부 성공론’의 신화가 산산이 부서졌다.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는 어른들, 그리고 그 밑에 자란 아이들은 공부가 자신들의 성공을 보장해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착각한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은 자신의 초라한 성적에 실망한다. 어른들이나 학교 또한 마찬가지. 성적을 기준으로 학생들의 능력을 평가한다. 공부에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학생들은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으려고 고민한다. 그런 와중에 선택하는 것이 바로 자기계발이다. 학교 성적이 형편없어도 학교 밖에서 하는 자기계발을 잘하면 중졸이든 고졸이든 사회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을 거로 기대한다. 20대들은 자기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선택지가 무수히 많다. 그런데도 먼 곳에 있는 선택지를 보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선택지는 공부와 자기계발이다. 이 둘 중 하나만 잘하면 성공하는 인생이 보장된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할 결정적인 시기가 찾아오면 부모들은 벌써 자식의 미래를 걱정한다. 그리고 자식이 공부하라고 주문한다. 성공을 위한 왕도(王道)가 공부임을 철석같이 믿는 어른들은 아이들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끼여든다. 자식의 성공을 바라는 욕망이 지나칠수록 아이들은 머리만 좋을 뿐, 사회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하지현은 과열된 교육열로 너무 뜨거워진 우리 사회에 투덜대려고 대담을 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이러한 문제점의 심각성을 파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기대한다. 그러면 다수의 사람을 한쪽 길에만 움직이게 하는 ‘공부’ 드라이브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현뿐만 아니라 오찬호, 엄기호도 공부 에너지만 내는 ‘Made in Korea’ 교육 드라이브에 브레이크를 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그걸 지켜보는 독자들도 자신들과 함께 브레이크를 걸자고 제안한다. 설마, 자신들과 문제점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줄줄이 나오기만 기다려보자는 건 아니겠지. 사실은 이미 몇 년 전부터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점을 깨달은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공부’ 드라이브를 멈추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대한민국 사회는 너무나 오랫동안 공부에 중독되었다. ‘공부가 전부’라는 인식을 쉽게 버리지 못했을뿐더러 그 문제점을 알면서도 개선의 시작을 어디부터 잡아야할지 함께 공유해본 기회가 적었다. 그러니까 문제점은 누구나 다 알면서도 변화할 의지를 제대로 표출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오찬호, 하지현, 엄기호 같은 퍼스트 펭귄들이 계속 등장하여 사회에 태클을 여러 차례 걸어봤다. 그러나 사람들은 변화를 두려워하여 겁이 많은 펭귄들처럼 그냥 그들의 행동을 바라만 봤다. “아, 맞아! 그들이 지적하는 말은 맞아, 그런데 지금까지 해온 걸 막상 포기하자니 두려워.” 기존 사회 체제에 익숙해진 기성세대들은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고통을 꾹 참고 지내왔다. 오로지 경제적으로 성공한 삶을 누리려고 말이다. 지금의 20대들은 어른들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당연히 그들의 말에 경청하고 따르면서 자랐으니까. 그렇게 공부에 중독된 아이들은 이러지도 저러지 못하는 구경꾼, 잉여가 된다. 앞으로 이런 교육 문제를 논하기 전에 우리는 각자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자. 과연 나는 사회를 개선할 마음이 있는 퍼스트 펭귄인가, 아니면 문제점이 뭔지 알면서도 고치려는 일에 자신 없어하는 겁 많은 펭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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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6-02-17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전하게 위대해지는 길은 없다!˝

불확실성을 감수하고 용감하게 처음 바다에 뛰어드는 퍼스트 펭귄

다만, 퍼스트펭귄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cyrus 2016-02-18 14:05   좋아요 0 | URL
집단 속에 퍼스트펭귄 역할을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로 정해서 분담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니데이 2016-02-17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cyrus 2016-02-18 14:06   좋아요 0 | URL
좋은 하루 보내세요. ^^

나비종 2016-02-17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용기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거라고 하더군요.
아직까지 저는 겁 많은 펭귄인 것 같습니다ㅡㅡ;

cyrus 2016-02-18 14:13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습니다. <공부 중독>의 엄기호 씨의 지적에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미디어가 많아질수록 시민들은 어떠한 사회 문제 앞에서 의견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사회 문제를 구경하면서 말할 뿐이지, 참여자의 자세라고 보기 어렵죠. 그냥 사회 문제를 품평하는 언어만 남을 뿐이다. 사람들은 사회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면 마치 참여자의 입장이라고 착각하는 거죠. 오래된 문제점을 개선하려면 판을 갈아 엎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할 수 있어도 막상 실현되기 시작하면 불안해요. 기존 체제에 너무 익숙해졌으니까요.

프레이야 2016-02-17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험하게 살아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cyrus 2016-02-18 14:17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이 하신 말이 오늘 처음 본거라서 무슨 뜻인지 알아보려고 검색해봤습니다. 니체가 한 말이었군요.

북다이제스터 2016-02-17 21: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퍼스트는 기성 세대가 되어야 하는데, 겁 많은 펭귄이 되어 버렸죠. 그중 대표는 이 책에서 소극적 대책을 제시하는 저자 오찬호와 젊은 세대에게 모든걸 떠 넘기려는 장하성 교수라고 생각됩니다.
분석이 잘 되었지만, 젊은 세대가 분명 비분강개할 책입니다. 억울합니다.

cyrus 2016-02-18 14:24   좋아요 1 | URL
<공부 중독>의 평점을 저는 별 세 개를 줬습니다. 솔직히 별 네 개, 다섯 개 평점 수준은 아니었어요. 하지현 씨 같은 경우도 소극적인 대책을 제시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엄기호 씨가 조금이라고 태클을 걸지 못한 점이 아쉬웠어요. 두 사람이 서로 치고받고 의견 차가 나는 대담이 재미있는데, <공부 중독>은 그런 재미가 없었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2-17 21: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에세이`라면 재미있는 책이라 생각하지만 사회학 서적이라면 단점이 많은 책이라 생각됩니다. 이 책은 작은 채집군(자신의 행동 반경인 대학 속 자신이가르치는 강의 속 학생들)을 가지고 20대 젊은이 전체를 분석한다는 측면에서 치명적 오류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제가 이 책이 단순한 에세이라면 인정하지만 사회학이라고 했을 때는그리 좋은 책은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인데요. 뭐.. 그렇습니다. 횡성수설하네요.. ㅎㅎㅎㅎ

cyrus 2016-02-18 14:27   좋아요 0 | URL
횡설수설이라뇨? 맞는 말씀하셨는데요. ㅎㅎㅎ

곰발님이 지적한 점에 저도 공감합니다. 그리고 자기계발서를 비판하는 내용은 독창적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 전에 그런 주장을 한 책이 있었고, 오찬호 씨는 그 책의 내용을 참고했더군요.

만병통치약 2016-02-17 2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거에는 첫번째 펭귄이 뛰어들면 나머지들도 같이 뛰어들어서 집단이 도하에 성공했고, 첫번째 펭귄은 죽어서 영웅이 되거나 살아서 영웅이 되었죠(국회의원도 되고요) 하지만 요즘은 뛰어드는 펭귄만 뛰어들고 나머지는 구경만 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 아일랜드처럼 추첨에 뽑힐 날만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만 어떻게 살아 나갈 궁리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어느 책을 읽으니 펭귄들이 자발적으로 뛰어 들기도 하지만 밀기도 한다는데요? ㅋㅋ)

cyrus 2016-02-18 14:34   좋아요 0 | URL
펭귄들이 자기가 나서기 싫어서 만만한 놈을 골라서 미는 거 아닐까요? ㅎㅎㅎ

위에 나와같다님 댓글을 보면서 방금 그 생각을 했었습니다. 퍼스트 펭귄이 무조건 한 사람이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어요. 이러니까 이 한 사람만 너무 억울해요. 호기롭게 퍼스트 펭귄이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는데, 실패를 해보십시오. 비난에 대한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을 잘 알기에 눈치를 살살 보면서 슬그머니 빠지는 거죠.

고양이라디오 2016-02-17 2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조금 다르게 비유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과연 오찬호교수가 퍼스트 펭귄일까요? 그는 이미 다른 안전한 육지로 건너간 펭귄은 아닐까요? 그곳(다른 육지)에서 바다에 뛰어들지 못하는 소극적인 펭귄들에게 바다로 뛰어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육지보다 바다가 안전하다는 보장도 없는데 말입니다. 자기계발과 공부(육지)를 포기하고 바다로 뛰어들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의문입니다. 소극적인 펭귄들에게는 바다에서 바다표범을 몰아내주거나 그들이 살고있는 육지를 더 넓혀주는 일이 더 절실하지 않을까요? 현실을 바꾸지하고 펭귄들에게 먼저 변하라고 하는 것은 잡아먹힐지도 모르는 펭귄들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을 것 같습니다.

cyrus 2016-02-18 14:44   좋아요 1 | URL
남극의 상황을 비유해서 말하자면 고양이라디오님의 말씀은 얼음으로 된 육지(교육제도)를 사라지지 않도록 하자는 뜻이겠죠? 그러면 펭귄들이 육지를 떠날 일이 없으니까요. 어제 작성한 글 후반부에도 언급했듯이 <공부 중독>의 하지현 씨의 해결책에 실망했습니다. <공부 중독> 3부 제목이 ‘중독에서 해독으로’입니다. 저는 이들의 해결책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어도 뭔가는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확인해봤습니다. 그런데 허무하게도 교육 제도의 문제점을 깨달은 사람들이 많아지길 좋겠다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정신 차린 사람들이 더욱 많아져야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다고 낙관적으로 봤습니다. 결국 고양이라디오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하지현 씨의 발언은 공부에 중독된 시민들이 얼른 정신 차리고 변화하라고 요구하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변화를 주저하는 시민들(펭귄들)은 사태를 심각하다는 걸 알면서도 이를 개선하려는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사실에 변화를 주저하는 것 같습니다. 고양이라디오님의 의견에 동의하는 입장에서 제 생각을 다시 정리해봤는데, 제가 라디오님의 의견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해가 안 되거나 잘못된 점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고양이라디오 2016-02-18 15:05   좋아요 1 | URL
제 이상한 비유를 알아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현 교육제도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 교육제도의 문제점을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저는 당장에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라고 강요하는 것은 조금 현실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현교육제도는 입시와 취업위주로 되어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많은 사람들이 전공을 살리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입장에서는 학업성적과 연봉과의 상관관계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입니다. 여유가 있어야 다른 곳에도 눈을 돌릴 수 있는데 그 `여유`가 우리사회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안전장치, 기회의 부족, 심각한 임금과 고용불평등을 해결하지 않고 마냥 자기계발과 공부를 포기하라고 하는 것은 말그대로 생계를 포기하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겉으로 드러난 증상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병의 근원과 본질을 치료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비유하자면 우리사회는 감기에 걸려있습니다. 기침, 콧물, 두통, 발열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데 기침을 못하게 막는다고 콧물을 못 흘리게 막는다고 감기가 낫지는 않습니다. 면역력을 키워주고 바이러스를 잡아줘야 감기가 낫는 것입니다. 공부중독은 증상입니다. 그 원인을 찾아서 치료하면 공부중독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입니다.

cyrus 2016-02-18 15:13   좋아요 1 | URL
이상한 비유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유를 들면서 의견을 밝히는 댓글 내용이 좋았습니다. 학업이 성적 그 다음에 취직에 직결되기 때문에 시민들 입장에서는 이걸 한꺼번에 포기하고 바꾸자는 지식인들의 조언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상황입니다.

yamoo 2016-02-20 22:15   좋아요 2 | URL
고양이라디오님..

저는 당장에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라고 강요하는 것은 조금 현실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현교육제도는 입시와 취업위주로 되어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많은 사람들이 전공을 살리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입장에서는 학업성적과 연봉과의 상관관계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체제를 인정하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고양이라디오 님이 말씀하시고 계신 논점의 핵심은 오찬호 교수를 비판하고 있는 바로 그 지점입니다.

바뀌려면 김예슬 같은 학생이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 할 것 없이 계속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바뀔 낌새라도 있지요. 헌데 그런 시도를 한 김예슬 양은 운이 좋아 시민단체에서 근무하지 백수로 낙인찍힐 위험이 매우 높았습니다. 우리사회에서 내부고발자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면 이런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뀌는 게 없는 거죠. 체제를 인정하고 있는데 어떻게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말씀하신 `원인을 찾아 치료하는`게 어떻게 가능한지요. 체제를 인정하는 순간..저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서 비슷한 양상의 비판서만 줄창 나오는 거 같습니다.

고양이라디오 2016-02-20 23:06   좋아요 1 | URL
야무님 의견에 저도 동의합니다. 위험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좋겠죠. 하지만 제 의견은 체제를 인정하고 옹호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현 체제에서는 그 체제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하는 것이 개개인에게 위험부담이 큰 것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개개인에게 그런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원인을 찾아서 치료한다.` 는 것은 현 체제를 개선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해결책은 북유럽국가들의 복지모델입니다. 우리나라의 불평등지수는 OECD국가 중 4위라고 합니다. 임금과 고용불평등이 심하기때문에 다들 대기업취업이나 공무원같은 안정적인 직장을 선호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고 현 체제의 문제점이 아닐까요? 이런 문제점을 그대로 둔 채 개개인에게 다른 선택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그 개개인이 이런 현실을 인식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고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yamoo 2016-02-18 01: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근데 중요한 건 저런 문제 진단 뿐이라는 거...교육 실상은 전혀 바뀌지 않는데, 이런 책에서 계속 말해 봤자, 대안 없는 비판만 있는 듯해서 좀 거시기 합니다. 교육 관료와 정치인을 바꿔야 하는데, 정작 소리를 내야하는 주체는 그냥 아무 생각없이 체제를 따르고만 있습니다. 김예슬 같은 학생이 고교에서 무더기로 나와야 정치적 쟁점이 되는데, 학자들이 맨날 대안없는 비판만하면 어쩌라는 건지...계속 계란으로 바위를 쳐도 교육 시스템 자체가 바뀔 생각을 않는데....퍼스트 퓅귄을 떠나 이런 비판이 대안 없는 메아리 같아 식상합니다. 김예슬 선언이 훨씬 강도가 높았다고 생각됩니다만...개인적으로 퍼스트 펭귄은 김예슬 같습니다만..

cyrus 2016-02-18 14:52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매년 이런 책을 내는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커져만 가는데, 정작 이걸 들어야 할 사람은 안 듣게 되니 거시기하죠. 그래서 살기 위해서 사회 체제에 적응하는 시민들만 어중간한 위치에 있죠. 지식인들은 “시민들아, 정신 차리자!”라고 외치는데, 정부는 “시민들아, 우리가 교육제도를 다시 손 봤으니 이번에 믿어 달라”고 말하고 있으니 답답하죠. 그래도 시민들이 제도에 불만족스러우면 지식인들은 마치 시민들의 불만사항을 대변하듯이 투덜거리죠. 정부랑 말이 안 통하니까 시민들을 향해 간접적으로 비판을 하죠.

김예슬 씨는 요즘 뭐하는지 궁금하네요. 그녀의 주체적인 행동은 정말 대단했죠. 제가 잠시 김예슬 씨를 잊고 있었어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 퍼스트 펭귄으로 비유하면 김예슬 씨가 어울립니다.

고양이라디오 2016-02-20 23:05   좋아요 0 | URL
야무님이 이 글에서 말씀하신데로 교육시스템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김예슬같은 학생이 몇몇 나와도 단발성으로 끝나고 말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학생들이 단체로 합의해서 무더기로 현 교육체제를 거부하는 일이 벌어질리도 없을 것 같고요.

마녀고양이 2016-02-19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부분은 제 직업으로 인해 굉장히 고민하는 문제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지 않으면 어떤 길로 갈 수 있나에 대해 아직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어요.
거기다 사회가 워낙 취업이 어렵고, 양극화가 심하니 불안할 수 밖에 없구요. ㅠㅠ

우리 기성 세대는 사이러스님같은 20대에게 미안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난지 오래 되어서, 아직 20대가 맞나요?)

cyrus 2016-02-19 14:53   좋아요 0 | URL
거짓말 안 하고 올해가 마지막 20대입니다. ㅎㅎㅎㅎ

정작 교육 사업으로 수익만 챙기는 사람들이 반성해야 하는데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공부해야하는 평범한 시민들만 반성하는 상황은 잘못됐다고 봐요. 위에 북다이제스터님과 고양이라디오님이 댓글로 이 점에 대해서 말씀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