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테드 창으로 시작해서 김초엽, 문목하를 거쳤으니 요즘 젊은 작가들의 sf 소설이 더 궁금했고 읽을 자신이 생겨서 드디어 천선란 작가의 단편집을 읽었다. 제목 부터 '물질'이 들어가서 언뜻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과 '깨지기 쉬운 것들의 과학' 이 생각났다. 제목이 과학 같은 소설들.


8편의 이야기들이 그리는 세상은 미래의 지구, 우주, 다른 행성이다. 다 망쳐버린 지구에서도 사람들은 고달프지만 여전히 애닲게 사람의 온기를 찾는다. 너와 나의 경계, 옳고 그름, 같고 다름, 여자 남자의 기준은 하찮다. 표제작인 <어떤 물질의 사랑>은 배꼽도 없고 성별도 정해지지 않은 주인공이 성장해 나가는, 여러 사랑, 경계 없는 사랑을 겪으며 자라나는 이야기다. 후반부엔 초반의 생동감은 줄고 작가의 염려 어린 설명이 많았지만 그만큼 신기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다. 사랑하는 대상에 따라 '바뀌는' 성별이라니. 그걸 심드렁하게 말하는 엄마라니. 표지에서 보여주는 '넌 알에서 태어났어' 이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건지. 그래도 좋아. 


sf에 빠지지 않는 AI 이야기로 자동차 사고 시뮬레이션용 Dummy 이야기 <마지막 드라이브>가 따뜻하고 인상 깊었다. 더미도 사랑을 합니다. 임신 중단 이야기 <너를 위해서>는 자녀 출산을 준비하는 태도를 조신한 남성에게 묻고 있는데, 자녀의 미래를 위해서 인생을 내 놓는 게 지금 누군가 생각하면 찬물 한 잔을 마시게 된다. 


모든 이야기에는 사랑하는 이들이, 여자 친구를 기다리고 보호하는 여성, 딸을 찾는 엄마, 여동생을 구하려는 언니, 치매 엄마를 보살피는 딸 등 여성들끼리의 사랑이 주가 된다. 의도적으로 남성을 배제했거나 우매한 적으로 만드는 설정도 있지만 억지스럽지는 않다. 다만 작가의 애착어린 개입이 드러날 때가 많은데, 그래서 결말이 아무리 끔찍하게 보이더라도 어쩐지 희망을 바라게 된다. 비극이고 절망인데 그 절망을 작가가 반쯤 막아준 덕분이다. 네, 사랑을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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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2 1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12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표지가 웃기다고 생각했다. 외출하고 헛되이 지치느니 '고전' 속 여자 등장인물들을 만나고 수다를 떠는게 낫다, 는 표지의 글에 어울리려면 누가 저런 브래지어 차림으로 침대에 엎드려 있겠나. 속옷은 벗고 대신 헐렁한 티셔츠 바람이 낫지. 


그런데 이 책 속에서 말하는 저자/독자 유즈키 아사코는 저런 검은 속옷 차림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외모와 나이, 결혼과 연애 이야기가 짧은 서평의 많은 부분을 잡아 먹어서 시시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책 이야기, '수다'라 여기고 편안하게 읽었다. 고전 소설이라고 무게 잡고 인상 쓰면서 읽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책 내용은 프랑스,영국,미국, 일본의 "고전 소설"을 읽은 후 감상문인데 일본 소설의 경우 책 목록이 덜 고전적으로 보였다. 


어느 소설을 만나더라도 여자 등장인물의 장점, 강인함 혹은 의연함을 발견해 칭찬하는 저자의 긍정 마인드가 놀랍다. 친구들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완독하고 핼러윈 파티 겸 코스튬 플레이와 테마 디너를 준비했다니, 고전을 갖고 놀 수도 있다는 게 (그 젊은 나이와 더불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잡지 엣세이로 젊은 여성 독자를 의식하는지 너무 달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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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10-11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수다 떠는 것같은 느낌이 드는 책들이 편안해서 끌리더라구요. 선선한 가을밤 심심할 때 읽어보아야겠습니다^^*

유부만두 2020-10-11 20:38   좋아요 1 | URL
네. 가볍게 친구랑 책 이야기 하는 기분으로 읽었어요. 읽고 싶어지는 책 목록도 당연히 챙겼고요. 선선한 가을밤....감기 조심하세요~

북극곰 2020-10-12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첫 단락 완전 동감인데욧! 비웃비웃 ㅋㅋㅋㅋ 라고 생각했는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읽고 파티하는 여자는 다른 건가.... (괜히 시무룩)

유부만두 2020-10-12 16:17   좋아요 0 | URL
저자의 전작들과 글 분위기가 표지의 으잉? 스러움과 닿아있지만, 저자가 완독한 고전들 이야기에는 ‘네...‘하는 자세가 되더라고요. ^^;;; 고전 읽고 ‘놀기도‘하는 젊은 마음이 부러웠고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아직 못 읽었지만, 완독 한다면 전 아마 영화를 다시 볼 거 같아요.
 

교통사고로 오래 잠들었다가 깨어난 오기. 사십대 지리학 교수인 그는 동승했던 아내가 사망한 걸 알아도 턱부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다. 몸도 움직이지 않는다. 통증도 느낄 수 없다. 그에게 남은 '가족'은 장모 뿐이다. 


대강의 줄거리를 알고 시작했는데도 긴장하면서 읽었다. 등장인물 누구도 편들고 싶지 않았다. 오기도, 그 부인도, 장모는 더더군다나. 그런데 이런 불쾌감을 안고도 계속 읽을 수 있던 건 소설이 '안전하게' 한방향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끝이 보였다. 제목의 그 홀. 구멍. 구덩이. 어차피 빠지게 되어있다. 이미 빠져 있었고, 피할 수는 없다. 


오기의 부인이 겪었던 허영과 좌절이 낯설지 않다. 그 부인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게 깔려 있다고 상상했다. 가짜 같고 엉성해 보이지만 그만큼 더 괴상한 장모와 함께. 생각해 보면 여기 저기, 끔찍한 아가리를 벌린 구멍들이 일상 도처에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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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는 가끔씩만 들어서 유툽으로 옮겨갔다는 것도 장강명 작가가 시즌 2로 그만 두었다는 것도 이 책을 읽고야 알았다. 책 팟캐스트는 많은 것 같지만 편안하게 들을만한 것은 별로 없다. 진행자들끼리만 너무 친하거나 목소리가 엇비슷하거나 소란스레 왁왁거리거나. 


장강명 작가의 소설을 두 편, 엣세이 하나, 르포성 책 하나를 읽었다. 비소설 책에서 풍기는 느낌은 야무지고 얄밉....지만 꼼꼼하게 일하려 애쓰는 사람이다. 소설은 그에 비해 몰입해서 읽지는 못했다. '그믐'이 아련하게 남는 편이다. 


이번 책은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를 시작해서 진행하고 마무리 하는 동안의 팟캐스트 안팎의 이야기, 자신의 안팎에서 생기고 스러지고 다시 기어나오는 것들, 좋거나 나쁜 것들을 모두 이야기 한다. 초반부터 꽤 솔직하게 다른이들이 '자신에게' 한 말과 행동을 써놓아서 놀라기도 또 감탄하기도 했다. 트윗도 아니고 페북도 아닌 종이책에 이렇게. 박제. 기록. 책임. 혹은 자신감. 


어깨에 힘을 빼고 억지로 웃기려들거나 너무 끈적거리게 감상적이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 책 이야기라 추천 도서를 주섬주섬 나도 장바구니에 담았다. 챕터가 많은 경우 말 줄임표로 끝난다. 참았다는 걸까, 아낀다는 걸까. 다 얘기하는 것 같아도 자기가 작가니까 자신의 몫이 있다는 걸까. 


마지막 챕터를 읽다 놀라서 웃음이 나왔다. 작가는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불러낸다. 책, 문자를 비판했던 그의 의견이 책에 대한 이번 책에서 아주 예외의 등장은 아니겠으나, 직접 대놓고 등장시키니 (한국어 잘함) 추석 특집 나훈아 콘서트가 바로 떠올랐다. 콘서트나 책 피날레에 이렇게 이루어지는 소크라테스 소환은 어떤 습관, 혹은 변명 같다. 장강명은 소크라테스를 테스 형 대신 '소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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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10-09 10: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장강명 작가가 팟캐를 그만두었다는걸 유부만두님 글을 통해 처음 알았습니다^^;; 팟캐스트를 진행한 시간을 책 한권으로 남기다니 참 부지런히 기록하시는 분인가 봅니다. 작가를 업으로 하시는 분들은 역시 다른가봐요… 마지막 ‘소 선생님‘에서 저도 웃고 갑니다ㅋㅋㅋ 행복한 한글날 되세요~

유부만두 2020-10-10 19:27   좋아요 1 | URL
파이버님, 한글날 잘 보내셨나요? ^^ 장강명 작가는 정말 바지런한 사람이라는 걸 다시 확인했어요. 그리고 계속 글의 세계와 말의 세계에 대해 그 흥망의 시류를 고민하더라고요. 작가 자신이 글의 세계에 있으면서 다른쪽을 마냥 경계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의미를 곱씹는달까...하는 인상이었어요.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어요.

단발머리 2020-10-09 1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장강명 작가 책 몇권 읽었는데 전 <표백>이 젤 좋았어요. 이 책도 읽어보려는데 ‘소 선생님’에 먼저 한 번 웃습니다!

유부만두 2020-10-10 19:28   좋아요 0 | URL
이번 엣세이가 다른 책들보다는 더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어요. 단순히 팟캐스트 방송 뒷이야기나 내용 정리가 아니라 책의 미래, 글의 의미, 더하기 ‘글로 먹고 살기‘ 라는 중요한 이야기를 피하지 않고, 답을 내놓지는 못하더라도, 고민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짠했어요.
 

급식으로 지친 마음을 달래주신 서재 친구 D님!
여름에 받은 커피 선물을 가을 버전으로 달콤하게 즐기고 있어요.
정말감사합니다! 막내 이번주 등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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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0-07 1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유부만두 2020-10-08 08:17   좋아요 0 | URL
;)

moonnight 2020-10-07 2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서재친구 D님이시군요!!

유부만두 2020-10-08 08:18   좋아요 0 | URL
DA정한 친구님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