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야... 내쳐 킨케이드의 <애니 존>을 읽었다. 기대하고 흥분된 마음에 읽었는데 ... 아, 그 맛이 아니네?
<루시>의 전작이며 고향 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이의 이름은 루시 아니고 애니. 총명한 아이는 부모의 '그들 나름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식민지 문화 속에서 성장한다. 역사 교과서의 콜럼버스 그림에 '나쁜넘 ...' 이라고 썼다고 영국인 선생님에게 벌을 받는다. <실락원> 필사하기.
엄마가 자신을 떠나는 게 가장 큰 공포였던 어린 애니. 자신만의 공간을 지키려는 십대 초반의 딸은 (점점 키가 큰다. 처음엔 아빠를 따라 잡고, 나중엔 엄마 보다 크더니 결국 외할머니의 키 만큼 자란다) 결국 엄마에게 소리친다. "엄마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그러나 엄마는 살아있고 (다행이지) 대신 딸 애니가 사경을 헤맨다. 광야의 사십 일 아닌 백 일 넘는 장마가 지붕을 두들기는 동안 애니는 고열과 환각에 시달리고 계속 키는 자란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등을 굽히고 누운 애니. 부모님의 결정으로 애니는 영국 유학(아니고 루시의 경우 처럼 남의 집 살이 + 실용적 공부하기)길에 오른다. 마지막 챕터에 가서야 애니는 독자에게 알린다. 실은, 우리 엄마랑 나 이름이 같아. 그리고 우리 아빤 엄마보다 서른여섯살 많아.
작가가 제일 공을 들였을 병상 투쟁 혹은 성장통은 이질적이지만 이 소설의 특별한 매력이다. 그래도 이 부분이 꽤 길어서 힘들다. 그 고통을 알겠는 내가 힘들었다. 나도 숨겨봤거든. 구슬이랑 책이랑 돈이랑 친구랑 .... 나 자신을. 엄마와 딸 사이의 애증, 애착과 증오, 혹은 살을 떼어내는 아픔...이라지만 루시의 모녀 관계 만큼 (아직 딸이 어리기에) 분리되지 않는다. 그 찜찜함이 남았기에 루시에서 더 모질게 떼어내려 애쓰는지도 모르겠고.
어린 시절 (열살도 되기 전에) 엄마의 친구 아들 (세살 위) 이랑 놀던 기억의 묘사가 인상적이다. 그 소년은 연극하기 놀이에서 모든 배역을 혼자 맡는다. 살인자도 피해자도 판사도, 북도 장구도 그 소년은 혼자 다 친다. 그저 옆에서 말없이 물건 갖다주는 역할만 애니에게 돌아온다. 말을 할 기회가 애니에겐 없다.
같은 작가가 자전적 경험으로 겹치는 내용을 가지고 쓴 소설이지만 <루시>와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근데 난 <루시>가 더 좋았다. 이렇게 적고보니 <애니 존>도 좋았네? 킨케이드는 엄마 생각을 떼어낼 수가 없었나보다. 엄마 이야기 책이 하나 더 번역되어 나왔다. 표지의 저 가방 이야기는 <애니 존>에 나온다. 엄마도 애니/루시 나이에 집을 나왔거든. 그런데 나 이건 못읽을 것 같다. 맴이 아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