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어>의 작가 서보 머그더의 초기작 <아비가일>이 출간되었다. 나는 3년전에 불역본으로 읽었는데 이번 책은 헝가리 원서 직역이다. 표지에 그림자 일부를 넣은 디자인이 <도어>와 비슷하다. 반가운 마음에 예전에 쓴 독후감을 옮겨놓는다. 제인 오스틴을 생각나게 한다고 신간 소개에 나와있지만, 나는 읽으면서 '소공녀' '사운드 오브 뮤직' 등을 떠올렸다. 청소년 소설 느낌도 많이 난다. 선선한 아침 공기 덕분인지 가을날 학생들이 산마을 과수원에 가서 사과를 따는 장면(+사건)이 생각난다. 3년전에 읽었을 땐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사람도 안 죽고 피도 안나고 배신도 없고;;;;), 지금 다시 독후감을 읽어보니 흠... 귀엽고 재밌기도 했었었었 .... 스포 경고 표시를 했지만 진짜 스포는 안 써놓았다. 그러니까, 아비가일이 누구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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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나이 열네 살, 우리식으로는 중학 3 학년생인 주인공 지나는 전쟁으로 엄마처럼 늘 함께 했던 가정교사 마르셀과 장군 아빠를 떠나 시골 기숙학교로 전학합니다. 9월 개학부터 3월 학교를 떠나는 날까지 칠 개월 동안, 2차 세계대전 중 청소년 주인공이 겪은 전쟁, 성장, 우정 이야기입니다. 독일군의 유대인 체포와 항독 레지스탕스 등이 묘사되기는 하는데 늘 마뚤라 학교와 선생님들, 아비가엘이 보호막처럼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지나는 그런 마뚤라 학교에서 세 번의 탈출을 시도합니다. 지나는 마뚤라의 학생들과 교사들을 열네 살 소녀가 아닌 어른의 눈으로 그것도 모든 상황을 겪어낸 미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책에서 자주 어른이 된 지나는 훗날 ...’ 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지나는 학생들 전체를 집단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열네 살의 소녀들이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결혼과 연애입니다. 미남인 칼마 선생에게 연정을 품고 선생들 사이의 연애 이야기를 발전시키거나 수다를 떱니다. 그리고 엄격한 학교 규율 사이에서 작은 장난을 치기도 합니다. 이런 놀이와 장난이 전쟁 중의 피난처였다고 작가는 강조하고 있습니다노처녀와 외모 평가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판에 박힌 묘사가 많아서 아쉽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나왔던 마르셀이라는 프랑스 가정교사는 부유하고 편안했던 지나의 과거 장식물일 뿐 살아있는 여성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행동하는 여성 미치 혼 여사가 용감하게 묘사되지만 번잡스럽고 고집스러운 인물입니다. 담임 수녀 수자나는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융통성 없게 굴며 학생들 사이의 갈등도 해결하지 못 하는 한계를 보이다가 사랑 앞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반면 묵묵하게 자신의 원칙을 지키는 교장, 사람들의 멸시를 받지만 속으로는 예리한 코닉 선생만이 상황을 제대로 읽고 있습니다.

 

소설은 1943년부터 1944년의 헝가리 시골을 중심으로 전쟁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거리에 나붙는 반전 표어나 조각상은 전쟁의 부조리를 말하고 소녀들은 겁에 질려 울거나 피하려 애씁니다. 학생들은 전쟁에 맞서지 못합니다. 아직 어리기때문이지요. 지나가 숨어야 하는 사실을 이해할때야 비로소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라는 자각이 듭니다. 지나는 이제 친구들 개인 개인을, 선생님 한명 한명을 개별적으로 알아볼 만큼 성장합니다. 그래도 지나의 성장은 학교 벽 안에서 이루어지고 벽 바깥의 세상, 진짜 전쟁이 벌어지는 곳은 어른의 세상입니다. 세 번째 탈출이 이루어져야 지나는 어른이 될 겁니다. 이 탈출을 하며 지나는 진정한 공포와 전쟁을 마주합니다. 마뚤라 학교도 부다페스트 만큼이나 지나에게는 먼 과거가 될 것이고 이제 아버지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아직 독자는 많이 불안한 상태로 남습니다. 끝까지 아비가엘을 부르는 지나는 과연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요.

 

소설의 마지막 장, 지나의 눈에는 갑작스럽고 놀랍게 아비가엘의 정체가 밝혀지지만 이미 소설 초반부터 힌트는 넘칩니다. 아비가엘 정체와 관련해서 긴장감이 사라지고 전형적인 인물 묘사와 제한적인 사건들, 나이에 비해서 너무 어리게 구는 학생들의 생활은 (물론 그 덕에 덜 폭력적인 학교 갈등 상황이 되었지만) 지루합니다. 어른의 눈으로 바라보는 십대 소녀들의 기숙생활은 작가의 교사 경험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더 생생하고 활기 찬 모습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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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9-21 13: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만두님의 리뷰(독후감)을 읽으니 아비가엘이 누구인지 더 궁금해져욥!!!!
선생들 중 한 명일까요??? 아 ~~~ 궁금해랑~~~~.ㅎㅎㅎㅎ
암튼 저는 도어도 사 놓고 아직 안 읽은 일 인...ㅠㅠ

난티나무 2022-09-21 14:49   좋아요 2 | URL
라로님 ㅎㅎ 저도요 ㅠㅠ 사놓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ㅎㅎㅎ

유부만두 2022-09-22 08:08   좋아요 1 | URL
저도 도어 좋다는 평을 많이 봐서 얼렁 얼렁 읽고 싶어요 ... 맘만 급해요

scott 2022-09-21 13: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작가대학 졸업후 이런 기숙사 학교 교사 였어요 라틴어 영어
전 서보 머그더 이책 부터 읽고 이자의 발라드 카탈린 거리 까지 읽고
마지막 드디어 도어를 읽을 계획 😊

유부만두 2022-09-22 08:08   좋아요 2 | URL
저도 곧 도어를 읽겠습니다.

mini74 2022-09-22 12: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도어 넘 재미있게 봤어요. 저도 그 정체 넘 궁금합니다. 아비가일 정체가 궁금해서라도 읽고싶어집니다 *^^*

유부만두 2022-09-23 06:36   좋아요 1 | URL
ㅎㅎ 아비가일이 누구게~ 야 말로 진정한 책 홍보 아닐까 싶네요.
프시케의 숲 출판사랑 아무런 관련 없는데 말이죠. ^^

Falstaff 2022-12-02 14: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이걸 불역본으로 읽으셨다니! 그것도 3년 전에요!
전 지금 독후감 쓰고 있습니다. ㅋㅋㅋ

유부만두 2022-12-02 16:28   좋아요 1 | URL
골드문트님의 독후감을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