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19세기 영국 여성 작가들의 소설을 연달아 읽고 있다. 



오늘 아침에 읽은 (토요일 브런치는 빅토리안 시절의 고딕 소설입니다, 라고 밀어본다) 조지 엘리엇의 '벗겨진 베일'. 고딕 답게 죽음 나오고, 심령 현상 나오고, 불가사의한 초능력 나오고, 천재 친구 나오고, 욕망과 비뚤어진 마음 나오고, 그래도 피할 수 없는 운명(아니고 운) 같은 사랑 나오고, 넘치도록 많은 재산과 땅과 하인들 나오고, 배신 나오고, 그래도 결국 죽는다는 운명(아니고 명줄) 나온다.


조지 엘리엇이 브론테의 영향을, 그리고 메리 셸리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충분히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바탕에 깔린 잔잔한 여성 혐오랄까, 아니면 자기 분열적 자기 혐오의 감정들. (이 분석은 산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자세히 설명된다) 과하게 어렵거나 억지스럽지 않아서 한 호흡에 읽을 수 있지만 브론테의 절절한 우울 (정말 '빌레뜨' 읽다가 울었어요. 샬럿의 우울증, 외톨이의 묘사는 너무 생생해서 살짝 무섭기도 했어요. 나...나도 미친 걸까...), 메리 셸리의 인물 묘사에는 못미친다. 하지만 그녀의 열쩡, 소설쓰기에 대한 자신감과 (누구를 향하는지는 불분명한) 엄청난 시기와 질투는 느껴진다. 그래서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다 싫었다. 그래도 싫은데 동질감을 찾게되는 '빌레뜨' 인물들도 아니고, 싫은데 장엄한 '프랑켄슈타인'도 되지 못한다. 



미래를 얼결에 체험하듯 보는 나약한 (하지만 여성처럼 예쁘장한) 남자 주인공 래티머, 그는 강인한 인상의 아름다운 여자 버사('제인 에어' 로체스터의 본부인 이름)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미래의 불길한 환영은 저주처럼 찾아와 계속 래티머를 아프게 (자꾸 쓰러짐. 고딕 문학의 빠질 수 없는 설정이 바로 기절하기) 하고 죽음의 환영은 피할 수 없어 사실이 된다. 래티머는 자신의 죽음도 본다. 그리고 아내의 무서운 계획도 알아버린다. 그에게는 두번째 초능력, 다른 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 능력까지 있기 때문이다. 저급한 사람들의 속내는 너무나 괴롭다. '베일'은 들춰져 버려서 그는 그 잔인한 인간의 더러움을 봐야만한다. 눈을 감아도 들리는 그 증오와 오만, 거짓과 계략들. 그 와중에 죽었던 사람을 살려내는 '실험'에 참여하는 래티머. 그 죽음과 부활은 버사의 숨겨진 진실을 폭로한다. 두둥. (하지만 별로 긴장감은 없...)


읽게는 되는데 막 감탄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읽다가 책장 위에 떨군 보리차 몇 방울이 종이에 흡수 되지 않고 또로록 굴러가는 것은 신기했다. 워터프루프 입니다, 이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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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2-06-11 14: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 조지 엘리엇은 하나도 안 읽어본 사람입니다만 그에게서 브론테의 향기가 난다면 그건 좀 궁금해지는군요.
워터프루트 타입의 책으로 저도 좀 읽어봐야겠어요!!

유부만두 2022-06-12 08:44   좋아요 2 | URL
워터프루프 종이는 무겁고 손에 더 달라붙는 느낌이에요. 두꺼운 책은 만들기 어렵겠다 싶은데 많이 낯섭니다. 그런데 어쩐지 이런 고딕 소설의 서늘함과는 어울려요.

조지 엘리엇은, 글쎄요 아직 전 추천하기 애매한 작가에요. 당시대엔 엄청난 인기 작가였고 여성 작가로 분석할 면은 많다지만 한없이 늘어지는 서사와 상징 넘치는 인물들이 (분석할수록 밉상이거나 다른 작가들에게서도 보인다거나) 독특해 보이질 않아요.

청아 2022-06-11 17: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래티머와 반대로 갑자기 사람들에게 속마음이 생중계되는 사람에 관한 일본 영화가 떠오르네요(사토라레?) 고딕영화 속 초능력이라니 너무 궁금합니다. 찾아보니 버사와 약혼할때만해도 (유일하게 그녀의)속마음을 잃을 수 없었나보네요? 강추하시는것 같진 않아서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 했어요 후힛

유부만두 2022-06-12 08:46   좋아요 2 | URL
사토라레 라는 그 사람 너무 불쌍하군요. 자기 마음이 다 생중계 된다니. ㅜ ㅜ 전 그랬다면 우리 가족들이 느낄 배신감이 가장 클겁니다. ;;;;;
버사의 속내는 끝까지 완전하게 파악은 못하더라고요.
소설은 상징의 바다를 허우적 대고 멋지려고 애쓰면서 끝납니다. 워터프루프라 특이한 독서 경험이었어요. ^^

프레이야 2022-06-11 15: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샬롯 브론테의 마지막 작품, 담아갑니다.
개정판 표지가 너무 매혹적이네요.^^

유부만두 2022-06-12 08:48   좋아요 3 | URL
그쵸??!! 빌레뜨 표지 아주 멋지죠. 주인공이 특별하게 여기는 장소인 정원을 (전 더 야생의 정원을 상상했지만요)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어 주어서 마음에 들어요. 어둡고 퀴퀴한 다락방이나 그림자는 일단 묻어두고 읽을 수 있으니까요. ^^

꼬마요정 2022-06-11 20: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운명 아니고 운, 운명 아니고 명줄 너무 딱 맞는 표현이네요. 제인 에어에서 이름을 따온 게 맞나 봐요. 저도 ‘버사’ 나올 때 제인 에어를 떠올리긴 했는데 당시 흔한 이름인가보다 했죠.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군요!! 마지막에 ‘별로 긴장감 없는’에도 박수를!!

워터푸르프라고 넘나 비쌉니다, 책이.

유부만두 2022-06-12 08:51   좋아요 2 | URL
비싸죠. 그죠.... 문학사에서 큰 의미가 있다지만 조지 엘리엇 소설, ... 전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이 소설은 작가 자신도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대요. 단편 모음집을 낼 때도 일부러 뺐대요. 버사라는 이름의 연상작용은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도 나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