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미 아이언스가 빨간 코트를 입은 여자를 따라서 리스본행 야간 열차를 탄다고 들었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 비교되기도 해서 늙은 교수의 불 같은 사랑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제레미 아이언스는 고전문헌학을 가르치는 '늙은' 교수이다. 비오는 출근 길,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는 빨간 코트의 여인을 구해내고 자신의 강의실까지 데려온다. 하지만 강의 중 그녀는 코트는 두고 나가버리고 교수는 그녀의 코트를 들고 급히 뒤쫒지만 놓치고 만다. 그녀의 코트 주머니에는 작은 책 한 권과 리스본 행 기차표만 있다. 충동적으로 리스본으로 가서 책의 저자에 대한 정보를 찾는데 2D 문헌학 전공자가 3D 세상으로 나온 셈이다. 우연이 겹치고 또 겹쳐서 책의 저자의 지인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들의 삶에 새겨진 역사를 듣는다. 그리고 다시 만나는 그 빨간 코트의 여인. 


최경화 작가의 포르투갈 책을 먼저 읽어서 '카네이션 혁명'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영화를 제대로 따라갈 수 있었다. 독재정치 역사를 가진 나라끼리의 어떤 유대감일까. 그러니 섣불리 연애 이야기를 기대했던 나여, 제레미 아이언스를 아직도 불륜남으로만 보(려하)는 나여, 반성 좀 합시다.


영화는 포르투갈의 아름다운 건물과 광장, 골목들, 바다와 언덕을 보여준다. 거의 죽어버린 나의 여행세포를 되살려 비행기표와 호텔을 검색하게 된다. 하지만 리스본의 배우들은 영어를 쓰고, 인물들은 너무 우연히 다들 얽혀있고 젊은이들도 (별로 안 젊어서) 설득력이 떨어진 열정을 표현해서 (진정한 열정은 제레미 아이언스의 갑.툭.기차 뿐) 뜨거운 역사에 주인공 만큼 감동할 수는 없었다. 더해서 여성들 (자살 기도한 여인, 안경사, 옛 여자친구, 여동생)은 각 연대의 지표로만 수동적으로 서 있어서 갑갑했다. 자연스레 우리나라 역사와 연결지어 생각했는데, 우리의 손녀는 (왜 손자가 아닐까 싶었고) 애초에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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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11-05 08: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레마르크가 쓴 <리스본의 밤>을 영화로 만들었나 싶었는데, ㅎㅎㅎ 아니었군요.

유부만두 2021-11-05 09:10   좋아요 5 | URL
저도 그런줄 알았어요.
독재정치 시절의 폭력과 연애, 배신을 되돌아보는 너무 낯익은 이야기인데 중심 ‘역사‘ 보다는 리스본의 풍광, 우울하고 곱게 늙은 제레미 아이언스가 돋보입니다.

잠자냥 2021-11-05 09: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이 영화 봤는데 기억이 1도 안 나요. ㅋㅋㅋ 근데 만두 님 글 읽으니 어렴풋이... 그 손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건 떠오릅니다.

유부만두 2021-11-05 13:29   좋아요 3 | URL
개연성이 많이 떨어지는 이야기 전개라 그럴거에요. 예전 독재시절 청춘의 이야기는 따로 놀고, 지금의 청춘 아닌 노교수 이야기 따로 놀거든요.
그리고 그 손녀 참 뜬금없어요. 괴롭다고 자기가 왜 죽을 생각을 하나요? 사람들이 욕하고 그랬을까요?
전체적으로 인물들이 다 제각각이고 리스본이 열일했습니다.

다락방 2021-11-05 09:4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화 너무 별로라고 생각했고 책을 먼저 읽었는데 책도 딱히 좋진 않았거든요.
근데 주인공이 포르투갈어 배우고 싶어서 막 열정을 쏟는 장면은 (책속에서) 너무 좋았어요!

유부만두 2021-11-05 13:31   좋아요 3 | URL
책도 별로라 하시니 그 언어 배우는 장면만 찾아 보고 싶네요.
전 이야기는 새롭지 않고 인물들도 시시하지만 주인공이 고전학을 공부한 사람이라 기록을 더 소중히 여기는 점이 좋았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리스본의 거리와 광장이 좋았어요. 다락방님의 사진들이 생각났어요.
아, 저도 가보고 싶어요. 리스본, 포르투.

새파랑 2021-11-05 09: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포루투갈 시리즈네요 ㅋ 유부만두님 세덕 맞습니다~!!

유부만두 2021-11-05 13:32   좋아요 4 | URL
하하하 세덕이 되기엔 좀 모자르고요. 관심은 엄청 많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에 관심을 쏟는 꿈많은 독자입니다.

바람돌이 2021-11-05 17: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영화 못봤는데 그래도 제레미 아이언스면 다 용서되지 않을까 하는 1인입니다. ㅎㅎ

유부만두 2021-11-05 21:06   좋아요 2 | URL
그렇죠. 제레미 아이언스의 매력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영화에선 꽤 짠하게 나옵니다. 많이 불쌍한 할아버지가 되었어요. 연애도 제대로 (시작)하지 못하고요. 그래도 주변 여자들은 친절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