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재 1%안만 들어가는

 동네 대학(ICU)이 문을 닫게 생겼다한다

  아무도 사립대학이어서 어떻게 될지 알려고도 알려주지도 않았다

 

  안해가 코디일을 한다

  백만원넘게 받는다 하는데 일가에 깔린

  다단계같은 돈덩어리 할부금과 들어가는 비용을 제하니 남는 것이 별반없다

  누구도 코디를 특수고용노동자라고 알려주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비정규직으로  평생을

 살아왔고 일하여 왔지만, 노동자라고

 파업은 다른 사람이나 하는 일이라고  알았다

 누구도 파업의 권리가 있다고, 노동자임을 알려고도 알려주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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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발. 그림자처럼 싸움은 늘 곁에 있어도 정작 나만은 전투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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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돈'은 밝히는 사람들은 관계를 맺는 방식이 유별나긴 하지만 - 돈을 벌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라고 묻자 동구에 있는 나무에 발가벗고 매달려서 그 나무를 놓치않는다면, 그렇게 해야 돈을 모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긴 하지만 - 사람관계까지, 아니 이젠 너무도 당연하여 얼마나 덜 손해보느냐?로 행동을 옮긴다. 철저하게 돈만 밝히는 것이 일상의 일이 된 것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그런  돈을 중심에 놓은 이해타산이 좀더 더, 오랫동안 벌기위해 쓰는 몸짓이 이타심이다. 수전노-구두쇠에서 전후좌우를 살피고 시간과 때에 따라서 사람의 마음까지 고려하도록 진화를 하고 있다. 내가 잘되고 좀더 벌기 위해서 문화를 고려하거나 배경에 관심, 이타심까지 철저하게 배우고 있는 것이다.

-2.

정치란 무엇인가?  언듯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추악하다. 공익보다는 사리사욕을 채우거나, 한자리해 먹으려는 명예욕으로 떡칠을 한 모습. 돈으로 그 힘과 권력을 사려는 무리들만 연상작용으로 떠오르는 모습. 추악함. 가까이해서는 안될 것들. 누가 해보았자 다 똑같은 것. 이 상식이 된 것은 아닐까? 그런 인식에서 출발한 이상적인 정치란 어이없게도, 물론 반작용의 산물이겠지만 뭔가 이상적인 것을 그려놓고(그것을 이데올로기이든, 이념이든, 진리라고 생각하는 가치이든, 도덕이라고 하든, 무소유라고 하든) 그것이라고 하는 것일까? 정치는 진리이다. 정치는 도덕이다. 진리나 도덕에서 출발하지 않는 것들은 전부 잘못된 것이다 라고 옳고 그름의 문제로 환원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현실은 아닐까? 아니면 이상적인 상을 그려놓고 그것에 근접하지 못하는 것은 전부 쓸데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또 다른 면은 아닐까? 정치의 실종 이면에는 끈끈이처럼 붙어있는 것이 진리이거나 도덕이거나, 나의 머리속 틀로 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실종된 이면의 현실은 아닐까?

-1.

(-3)에서 언급한 '돈'이나 '이해타산'을 지금보다 더 나아진 모습, 결과로 놓자. '이익'이라고 하자. 사적 이익, 공적 이익 줄여서 사익, 공익으로 이야기할 수 있으니 좀더 수월한 것 같다. 이 세상에 두사람만 있다면 (나-너)의 이익이 시이소오가 된다. 내가 많이 취하면, 너가 부족하고, 너가 많이 취하면 내것이 줄어든다. 그러면 셋이면 좋겠다. 셋이상의 관계에서는 공익이 생겨난다. 그 공익을 위해, 제한된 것(힘,자원,역량)을 공정하고, 효율성 있게 써서 지금보다  더 이익이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0.1

 이것을 정치라 한다. 돈을 더 벌기 위해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그 방법을 그대로  '돈'이나 '사익'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서 해라. 셋이면 을 위해서 넷이면 의 최대이익을 위해서 하라. 그것이 정치다.

0.2

 그러면에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아끼고, 더 공부하고,  더 쓰고 하는 일은 정치와 무관한 일이다.  도를 닦는 일도, 이 다음에 그 자리에 오르면 어떻게 하겠다는 일은 모두 정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다. 내 식성에 맞추라고, 내가 좋아하는 반찬만 먹으라고 하는 일은 더 더구나 정치적인 행위가 아니다.

0.3

힘이 적다고 정치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힘을 키우기 위해 하는 일이 정치이다. ,  나의, 우리의, 정파의, 정당이 옳다고 확신하는 것에 복속시키려는 행위가 정치가 아니다. 지금의 우리 수준에 대한 합의, 한계에 대해 명백히 인식하고, 그 보다 낫게 만들기 위해 힘을 만들어내고, 연결망을 만들고, 한번 더 생각을 나누게 하고, 고민을 섞게하고, 한발자욱 딛게 하는 것이 정치이지 않을까? 맞다고 확신하는 것에 규합을 시키지만, 늘 그 사람 그 범위에서 움직이지 못한다면, 10년내내 만나는 사람과 접촉점만 있다면 그동안 정치적인 행위는 하나도, 아니 퇴행을 시키는 행위를 끊임없이 자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0.4

뭔가 정리가 되어야만 움직이는 습속들과 행위들은 여전히 비정치적인 행위를 양산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중과 유리되고, 조합원과 만나지 않고, 끌어당기려고만 하는 것도 마찬가지는 아닐까? 정파가 달라 만나지 조차 않고, 일도 하지 않는 행위는 유아적 행동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퇴행자임을 공개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아닐까?

0.5

제도권에 진입을 하고도, 가지고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이념에 맞지 않는다고 힐난하는 행위도 그 퇴행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닐까? 눈높이를 대중에 맞추지 못하고, 우리가 겨우 가지고 있는 힘높이에 맞추지 못한다면, 그 곳에서 출발하지 못한다면 그 끊임없는 행위는 우리는 정치도 모르는 바보입니다를 반복적으로 자임하는 꼴은 아닐까? 모임성원의 현상태에서 더하기 일을 하는 행동은 없고 사고만 있는 행태도 마찬가지는 아닐까?

1.0

 마키아밸리가 의도한 전제,  '공익 한점' 보태기는 사라지고, 기교만 아니 술수만 가져가서 응용하는 현실 정치는, 정치를 실종시킨 원흉은 아닐까? 정치라는 로망도 살해하고, 정치가 마치 이념을 주입하는 것인냥, 사상을 공부시키는 것인냥, 정치가 도를 닦거나 도덕인 것처럼 머리 속에 주입한 결과, 숨도 쉬지 못하고, 호흡도 가눌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은 아닐까? 사회단체는 어쩌다 대행기관이 되어버리고, 혼 마저도 위임과 위탁하는데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

1.1

돈을 벌 듯 하는 모든 행위를 공익을 위해, 우리가 합의하는 역량을 키우는 일에 집중하는 일은, 사칙연산 가운데 불과 덧셈을 만드는 일은 아닐까? 손해가 되면 분노하고 흥분하는 것처럼, 손해가 예상된다면 가장 적은 손해를 보기위해 노력하는 행위, 봉우리를 일단 올라가고 다음 봉우리를 향하자고 하는 일, 저 높은 산 정상만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지치고 힘들지만 올라온 봉우리와 주변의 친구들을 냉정히 살펴보는 일, 다음 봉우리를 향하기 위해, 날강도같은 놈들의 트럭이라도 올라타거나, 차비를 얻으려고 길거리공연이라도 하는 일들, 사라진 일상을 복원하는 일은 어떨까?

1.2

,뒷골목에 외롭다고 뜨거운 눈물만 뚝뚝 흘릴 것이 아니라, 점선같은 관계망들을 만들어가는 일, 더하기 일을 위해 함께하는 것, 상상의 발칙함들... 일상적인 행위가 사라진 지금, 일상적인 뜨거움조차 소멸해버린 것일까? 복원가능한 일일까? 블로그란 공간에 자신의 세계를 그려내는 작업도 훌륭하지만, 일상의 뜨거움과 아무런 힘도 없을 것같은 한점을 사회에 던지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소중한 것은 아닐까? 복원을 전제로 한다면...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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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치와 진리
    from 木筆 2007-10-16 15:17 
    (생각품기) 정치와 진리, 책세상문고, 한나아렌트 정치라는 말에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요. 물리지요? 이 단어를 쓰면 저 자신도 물립니다. 현 시류와 겹쳐져 기분도 별반 좋지 않군요. 정치하면 흔히들 떠올리시겠지만 저도 마키아벨리를 떠올립니다. 군대 근무중 불침번을 서면서 진중문고판을 읽고 무슨 이야기인지? 서양사에 무지한 나로서 이해하기도 곤란하였답니다. 그 무지가 별반 달라지지 않았지만, 르네상스시대 마키아벨리 궤적을 읽으며 느낌이 달라졌습니
 
 
 

 

일터 회식 - 동료들에게 한잔, 반잔씩 나누고, 동료 대리운전차를 얻어 타고 참* 사무실로 가니 막 끝나는 참이다.

운*위를 제대로 참석하지 못한 셈이다.

 

 뒤풀이,

 회의분위기가 느껴진다.

 이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는 것일까~. 유령하고 지내왔단 말인가?

 

 뒤늦은 시각~. 말미 남는 질문하고 남은 단어들이 머리 속으로 우수수 쏟아진다.

 신뢰 - 공감 - 열림 <--->  욕심 - 반복 - 뒷담화 - 부동 - 전우 - 암울

 

무한궤도 위의 에스컬레이터를 올라타질 못한다. 탈 듯, 탈 듯 하면서도 믿지 못하는 한쪼가리, 마음을 열다 닫아버리는 분탕질에 제자리이다. 가이드가 있는지조차 못느끼는지, 제 욕심에 제 그릇만 보이는 것일까?  평균 몇에 표준편차 플러스 마이너스 얼마인가? 분산을 고려하지 않은 짓인가? 마음이 털썩 주저 앉는다. 이 정도밖에, 이정도까지, 이정도씩이나... ... 얼핏설핏 느껴봐야 느끼지 않는 것이나 같은 것인가? 답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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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는 엿세 가운데 이틀 모임, 짬을 내어 달린 것이 나흘, 마지막 일요일은 동네 마라톤대회를 참가한다. 아침 서늘한 기운은 어느새 뙤약볕으로 바뀌었지만, 멈추지 않고 꾸준히 달려준 것에 만족해야 했다. 다소 더운 날씨이어서 맥주로 목축이고, 달콤한 오수로 몸을 놓아주다. 21.1k  113' 점점 거북이가 되어가지만 그래도 좋다. 

주말 참* 자원활동 겸 학교에 들러 중고자전차점을 들르다. 녹이 드문드문 보이고, 약간 없어보여 남들에게 손이 타지 않을 것(어차피 외국인이 가져가려하지만 오지 않는다구. 4만냥+열쇠 5천냥)으로 골라 시승 겸 돌아다닌다. 둘러맨 가방도 부담스럽지 않고, 제법 속도도 괜찮다. <유사엠티비용>으로 짧고 굵은 시간을 메꾸어줄란다.

어제 모임으로 다소 늦은 시각, 귀가.

잔차 출근길 - 가을날 설레임으로 알맞은 시각에 일어나 몸을 싣는다. 음~ 제법 쓸만하다. 일터 주변 공단에 접어드는 냄새-환경이 고약하긴 하지만, 나머지는 합격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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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부 2007-10-09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차 사셨구만여..ㅎㅎ...한턱내셔야지!!

여울 2007-10-10 08:30   좋아요 0 | URL
잔차가 몸을 그냥두지 않는구만, 이 넘 덕분에 일찍 일어났네. 오늘도 출근-잔차 위주로 생각하니 교통동선이 부딪히네. 너무 불편해. 횡단보도부터... 시청앞 우레탄로가 비단길을 달리는 듯 좋구만...

연두부 2007-10-10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에다 트레일러를 달면 더 불편해져여...쩝...

여울 2007-10-10 17:02   좋아요 0 | URL
ㅎㅎ. 일이 커지는구만, 트레일러를 위해 특별조례라두...발의!!
 
[제안] 알라디너 모꼬지?! , 누리꾼의 공간과 한계
070728 누리꾼 생각글 - 풍요로움을 위한 윤리(作)



0. x축을 지금이라두자. y축을 시간이라고 하자. 지금이라는 수평면을 상황이 벌어지는 국면(생각면)이라고 하자. 그리고 a라는 사람의 생각, b라는 사람의 생각이 부딪치거나 발화하는 지점이라고 하자. a라는 사람의 생각은 반드시 직선일 필요는 없지만, 일정한 생각의 방향성을 가지고 왔다고 하자. 굳이 a와 b일 필요도 없고, c와 d로 이어진다고 하자. 그러니 다양한 주제로 다양하게 생각면을 가질 수 있다고 하자.

1. 사람들은 발화지점, 논쟁이 열리는 지점에 몰려든다. 논리라는 것이 논거를 대략 꼭지가 3가지 이상이라고 하자. 그러면 생각면의 발화지점을 포위할 수 있다. 그 그물에 들어오거나 근거를 원형으로 하거나, 별모양으로 하거나 하트모양으로 하거나 평면에서 다양한 형태로 그 지점을 에둘를 수가 있다.

2. 그러다보면, 논거를 가진 논리의 그물이 촘촘해지면서, 애초의 감정이나, 쟁점에 담겨진 방향성을 가진 지적,선입견,논의의 출발점이 시간에 따라 사라진다. 그리고 소멸한다. a와 b가 만난 지점, 아니 좀더 정확히 하면 a 든 b든 삶과 생활의 과정을 담고 균열을 낸 지점. 폭탄이 터진 현장이 아니라, 폭탄이 왜 던져졌는가?

3. 논쟁의 출발은 포탄이 터진 파편이 아니다.

4. 그리고 논리의 그물도 허약하기때문에 수선도 해야하고, 시간에 따라 자동수선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지고 이기는 것을 떠나서 과연 a, b, c, d라는 사람이 수용을 할까? 논쟁이 격해질 수록 수용에 대한 마음의 문은 좁아진다. 그리고 지금이 아니라 이것저것 자양분으로 자란 생각이란 것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요한다고 되는 일도 아닌 것 같다. 논리적으로 합당하더라도 몸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는가?

5. 그것도 모르는 쫌생이, 자기생각만하는 뭐뭐. 라는 또 하나의 꼬리표를 만들어 마음 속에 넣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생각들이 충돌한 지점에 대한 관심(이것은 또 언젠가 계기를 만나면 논쟁을 열게된다. 단지 수면 아래 있을뿐..)과 시공간에서 여전히 유효할 것인가?도, 현명하다면 가져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6. 우리의 토론문화가 미숙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a와 b의 또 다른 c와 d일지도 모른다. 단지 수면 아래 있을뿐, 그리고 또다른 생각주머니들이 터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계속 반복될지도. 뭘 이야기하고 싶은지 한마디로 정리가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파생된 논리-논쟁에 갇혀 또 다른 논쟁이란 안개에서 헤매고 있다면, 한번의 논쟁에서 모든 것이 결정난다고 여전히 착각한다면, 시간이란 변수 속에 건망증처럼 모두 잊혀지기를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7. 익히 예상된(그것 역시 꼬리를 잡다가 생긴 파생된 논쟁?이었다) 일들이 고스란히 재현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상처내지도 상처받지도 않고 이끌어갈 재주있는 분들이 당장 해결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아니면 논쟁이란 나무에 집착해서 혹 숲은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따로따로 꼭지를 떼어 새로운 논쟁거리들과 품은 생각들도 많이 나와 활홀할 지경인데, 사건에 가려 제 빛을 내지 못하거나, 제 값을 받지 못하는 쟁점들도 그냥 묻혀질까봐 아쉽다.

8. 토론도 논쟁도 그 만큼만, 꼭 그 만큼만 자라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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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7-11-21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펌]인터넷 상에서의 논쟁에 대하여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논쟁 당사자들과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에 따라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째는 논리와 합리성을 중시하며 진심으로 자신의 글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가질 수 있는 이들이 논쟁의 당사자가 되는 경우이다. A가 예리한 문제의식이 담긴 시의적절한 글을 인터넷에 올린다. 그 글과는 다른 의견을 가진 B가 A의 글을 논박한다. B의 논리에 의해 A글의 균열과 외부가 발견되고 A는 그것을 수긍하며 자신의 논리를 수정한 뒤 B의 논리에 내재한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렇게 논쟁은 건설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어 논쟁의 결말과는 관계없이 논쟁 당사자들은 각기 긍정적인 지적 자극을 받게 된다. 두번째는 논리와 합리성은 무시하고 결점이 있는 글을 올린 A에게 B가 그 결점을 지적하면서 시작되는 논쟁이다. 이 경우엔 대개 A가 B의 글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외면함으로써 논쟁은 어느 순간부터 논쟁의 외피를 쓴 B글의 공개강의가 되어 버린다. 마지막, 쌍방이 모두 논리와 합리성 따위엔 관심이 없는 경우이다. 마지막 유형은 논리싸움論爭이라기보다 자존심을 건 감정싸움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대부분 두번째나 세번째 유형에 속한다. 두번째, 세번째 유형의 논쟁을 지켜보면 어느 일방이나 쌍방이 본질적으로 똑같은 말을 언어만 바꿔서 계속 반복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게다가 어느 시점부터는 논점과는 상관없이 상대방의 인격을 공격하는 표현이 등장하기까지 한다. 대부분의 논쟁이 이렇게 소모적으로 전개되는 이유는 논쟁의 일방 혹은 쌍방 모두가 논리적 무결성을 중요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에 글쓴이는 글의 내용엔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있었던 것은 글을 통해 획득되는 인정, 이미지였다. 당시 화제가 되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발언한 어떤 이는 애초에 그 이슈에 진지한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발언함으로써 획득되는 '의식있는, 참여적인 이미지'와 그에 따른 인정, 공감을 원했던 것이다. 물론 그 이슈는 정교한 사고를 요해서는 안되며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합의가 되어있기에 전혀 민감하지 않은, 말랑말랑한 것이어야 한다.

이런 이들에게 있어 글의 내용은 부차적일 것이다. 애초에 논리나 논점 따윈 안중에도 없었으니 상대가 논리적으로 지적하고 들면 감정을 앞세워 상대의 글을 제 입맛에 맞게 오독하고, 상대 글의 논리적 맥락과는 상관없이 따온 구절을 토대로 <자신의 감정과 자존심>을 방어하기에 바쁘다. 따라서 논리적 무결성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A에게 B가 논리적 결점을 지적하는 것은 별 소용이 없다. 서로가 중요시하는 전제와 화법부터가 다른 것이다. 그럼 그것을 알면서 왜 논쟁을 하느냐.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A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논쟁이 두번째와 세번째 유형으로 전개되는 경우 난 A가 내 논리에 설복하리라는 기대를 처음부터 접어 버린다. A와 대화하고 A를 설득하여 생각을 바꾸게 할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다. 내가 의식하는 것은 A가 아니라 <말없이 논쟁을 지켜보고 있는 익명의 독자들>이다. 즉, A와 나, 그 어떤 쪽에도 편향된 정서를 지니지 않고 중립적인 위치에서 논쟁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다. 입은 A를 향하고 있되, 눈은 논쟁의 외부를 향해 있는 것이다.

단지 부술 뿐이다. A글의 논리적 외피를 파괴하며 <논리적인 듯이 글을 쓰고 있는 상대는 사실 논리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 뿐>이라는 사실을 <말없이 논쟁을 지켜보는 익명의 독자들>에게 폭로할 뿐이다. 파괴되는 A글의 외피를 보며 정서적으로 어떤 쪽에도 기울어져 있지 않고 중간지대에 서있는 대다수의 독자들은 A논리의 허구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 지에 관계없이 논쟁은 중립적 위치에 있는 제3자가 A논리의 결점과 A주장의 허구성을 깨달을 정도의 수준에서 종결된다. 애초부터 논리에 관심이 없었던 데다가 논쟁 외부를 보지 못하는 A는 아무리 정교하게 논박해도 끊임없이 <자신의 훼손된 자신감>을 방어하려 들 것이기에, B는 자신의 해설글이 정규교과를 정상적으로 이수한 정도의 평범한 독자들에게 충분히 이해될만한 수준이라고 판단되면 미련없이 논쟁을 끝마쳐야 한다. 잔말은 필요없다.

그렇다고 철저하게 논리에만 집중해버리면 안된다. 한국인들은 로고스보다 파토스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글이 제3자들에게 미칠 정서적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논리만으로 밀어붙인다면 그 글은 지적 마스터베이션을 위한 A의 글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내용이 아무리 정당할지라도 선택한 어휘와 표현들이 제3자들에게 반감을 불러 일으킨다면, 논쟁 상대와 익명의 독자들 그 누구에게도 논리를 통해 자신의 문제의식을 호소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는 파토스가 로고스에 선행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논쟁글을 쓸 때는 자신이 선택한 어휘와 표현, 구성이 제3자들의 정서에 미치는 파장까지도 철저하게 고려하여 글을 써나가야 한다. 내가 글쓰기 능력이 부족하다고 자조하는 것은 이와 같은 전략적인 글쓰기 능력이 아직 미숙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인터넷 상에서의 논쟁에 회의적이거나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얻는 것 하나도 없이 감정만 소모할 뿐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이성이 욕망을 누르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기에 내 글에 동의, 동감하는 이들도 막상 실제 현실에서 어떤 행동을 할지는 알 수 없다. 열심히 머리 굴려가며 최대한 전략적으로 글을 써도 그 글의 현실적 유용성은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내 이상을 이 세상에 관철시키고자 하는 나는 그럴 수 없다. 이상은 저 높이 있으면서, 모순된 현실을 바꾸고 싶으면서, 현실적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내가 넋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좌파들이, 지식인들이, 아무리 비웃어도 어쩔 수 없다. 위대한 사람들이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동안, 못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이것 밖에는 없는 것이다.




논쟁# by 이글루스 샤피로 | 2007/10/22 22: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