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희망은 내 책들이 쓰인 다음에 참이 되는 것이다...쓰기 전이 아니라 420
“활기차게 사는 것이 투쟁 속에서 기쁨을 갖게 한다. 투쟁 자체에서 과도한 부담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인간성을 즐겨야지 정치적 행동주의가 인간성을 탈인간화해서는 안 된다. 열정적인 참여를 위해서는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동안 조금 떨어져 있어야 한다.” 392
“권력을 선으로 만드는 것, 그러한 권력을 수용하게 하는 것은 아니오라고 말하는 힘으로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을 가로지르고 생산하는 사실이다. 그것은 쾌락을 유발하고, 지식을 형성하며, 담론을 만들어낸다.” 405
권력관계는 자기 구성의 특정 관계에만 한계를 설정하지 않는다.(권력관계가 작동한다) 그것들은 일차적으로 삶, 봄, 그리고 사유의 규범화된 형식으로 개인들을 부추기는 수단의 역할을 한다. 권력관계에 대한 푸코의 분석은 신체가 강제력과 생산형식과의 제휴를 야기하는 방식 및 신체와 사회 간의 복잡한 조화라는 쟁점을 문제화한다. 406
“진리는 진리를 만들어 내고 유지하는 권력체계와의 순환관계 속에 연결되고, 진리를 유발시키고 확장하는 권력의 효과들과 연결된다. 이것이 진리의 ‘체제‘다. 진리가 권력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권력은 진리를 생산한다. 권력은 사회적 신체 내에 참된 담론들을 만들어내고 담론들을 끼워 넣음으로써 작동한다. 여기서 담론들이 포착되고 표현되며 ㄷㅏ른 참된 담론의 주체가 형성된다.” 407
“저항한다는 것은 단순히 부정이 아닌 창조의 과정이다. 상황을 창조하고 재창조하는 것,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은 실제로 그 과정의 능동적 일원이 된다는 것인가?” 이에 푸코는 답한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 내가 제시한 방식이다.” 저항은 창조적이다. 왜냐하면 권력이 ㄱㅐ인들과 행동들의 생산을 통해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411
진리는 미래의 특수한 동일성을 현실화하는 일을 뒷받침하는 데 주어진 도구적 가치이다. 419..”구성된 이론은 하나의 체계가 아니라 권력관계를 둘러싼 투쟁이자 권력관계의 특성의 도구, 논리이다.(그에게 도구는 미래를 위해 현재에 개입하기 위한 방편으로 작용한다.)” 419
진리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발견해 내기 위해 권력관계 속에 우리를 연관지은 더 큰 실험적 과정의 일부이다.(윤리적 주체가 된다는 것은 특정한 권력관계에 대해 우리의 관계를 문제화하는 일과 동시에 권력_지식의 기능을 대체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허구나 가상을 만들어 내는 일 사이의 이중적 운동을 함축한다.) 니체의 ‘위험하게 살기‘라는 개념과 더불어, ㅅㅏ유는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통해서 살아가는 다수의 ㅎㅓ구나 ‘진리들‘이 절대 현실화될 수 없다는 인식 및 위험과 함께 각인된 모험이다. 420
“자기 자신에게 관여한다는 것은 삶을 위한 순간적인 예비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형식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염려는 우리 삶의 다양한 힘들과 우리의 주체성을 변형하는 방식들을 주시하고, 여기에 관여하기 위한 일관적인 윤리적 요구가 된다. 428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표상, 사유를 조심스럽게 점검하는 환전상, 금속.무게.모형을 재는 환정상이 되어야만 한다.” 자기 점검은 자기 폭로 및 솔직함의 행위를 통한 자기의 생산을 향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희망찬 저항적) 주체성의 생산에 기여하고 우리의 매일의 삶을 구성하는 실천의 다양한 구성요소들을 점검함으로써 자기가 될 수 있고, 삶의 기술을 실천할 수 있다. 438
초기 그리스 윤리가 타자와 나의 관계의 장소로서 성인 남자와 소년의 관계 및 폴리스에 초점을 맞춘 반면, 그리스_로마 윤리는 결혼, 우정, 그리고 친척 관계를 통해 타자와의 관계를 더 넓게 문제화하려고 한다. 우리는 자기를 드러내는 일로 타자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이르러야 하고 그렇게 해서 잠재적 변형과 자기 양식화에도 이른다. 푸코는 이 “새로운 실존의 양식”을 “자기로의 퇴거”가 아니라 “아내, 타자, 사건, 시민적이고 정치적인 활동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파악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기술한다. 441
따라서 매순간, 절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에 하나의 색채, 형식과 강도를 부과하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삶의 기술이다. 삶의 기술은 심리학을 제거하는 것이면서, 자기 자신 및 타자와 더불어, 개별성, 존재자, 관계들, 명명할 수 없는 성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하나의 실존은 완전하고 숭고한 작품일 수 있다. 449
현대 미학 윤리는 저항에 추가적인 차원을 더한다. 그런데 그것은 아도르노, 마르쿠제, 카뮈, 심지어는 하이데거의 작업에서 망각될 수 없는 것이고, 선견지명을 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배의 최소화이다. 456
볕뉘.
1. 지난 주 어느날 새벽에 일어나 이 장을 마저 읽다. 어쩌면 푸코에게서 늘 헛갈리던 부분이거나 미흡하던 것들이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2. 첫번째 관건은 전통적인 권력개념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진리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도구적인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 세번째는 성의 역사 2,3권에서 말한 자기에로의 배려나 활동을 고정적인 시점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술, 삶의 예술을 지향하지 않고서는 서로 꽃을 피울 수도 없다는 점이다. 물론 세번째에 방점이 찍혀 있겠다.
3. 우리는 살아가지 않는다. 살아진다. 화폐, 자본의 이미지. 허구가 사실로 자리잡아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항진리는 허구에서 출발하는 것이지만 만들어져야 한다.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몸에 맞는 진리조차 없다. 쓰레기통에 쳐넣어야 할 죽은 이론과 납빛의 진리만이 횡행한다. 김광규시인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시집에서 ‘우리는 부딪쳤을 뿐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라고 했다. 모두가 낯익은 얼굴들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내가 아는 낯선 사람들이 너무 적구나‘라고 말이다. 삶은 무수히 반복되지만 우리 안에 삶을 심고 나누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의 진리가 만들어질 수 없다. 우리의 사유를 확장시켜나갈 수 없다. 그 사유 속에서만 현실에서 거꾸로 살아지게 된 분기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