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일까. 아마 <액체근대>라는 말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아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며 고체가 아니라 액체에 가깝다는 말은 많이 했고 나누었다. 그리고 고체, 액체, 기체라는 개념을 거꾸로 자아에 접목시키면 묘하게도 다르게 확장된다는 느낌을 갖은 적이 있다. 엘렌 식수의 <오렌지로 살기>를 다시 읽게 된다. 무척 아끼면서 재독을 한 경험인데 무척 놀라운 기분이 든다, 아니 마른 하늘에 벼락처럼 번쩍거린다. 아직까지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분명 봤다.
이런 생각들과 겹쳐지기는 해도, 꼭 맞아 떨어진 것은 아니다. 욕심과 욕망. 섹슈얼리티를 도덕과 윤리의 잣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사유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벌써 오염된 우리의 사고방식은 있는 그대로 그 개념을 확장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언어가 사람들을 넘어가면서 회자되는 동시에 오염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막을 길이 없다. 그 단어 역시 개인사의 개념, 개인의 인식틀 안에서 희석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액체라고, 손바닥 안에, 두 손으로 모은 물 한 모금이라고 하자. 그것은 내가 끼거나 소유하는 반지나 키링이 아니다. 욕망은 이렇게 액체라고 해보자. 그러면 욕심은 그것을 고체화시켜 소유하는 것이라고 해보자. 이런 확산은 몸이라는 뜻으로도 전이시켜보게 된다. 샘물이 솟아오르고 어느 정도 흘러내린 고인 공간이라고 해보자. 나란 몸은 액화시켰으므로 들어오고 나오는 고인 시공간 속의 나이다. 그러면 먹고 마시고 자고 놀고 하는 공간은 나의 소유이자 소유물인 고체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좀 더 신중을 기해 모시게 될 어떤 것으로 바꿀 가능성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단어와 언어가 포획한 것은 일부분이다. 결코 그것은 담을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 굳이 언어로 확대시켜 말의 범위를 넓히지 말자. 아직 거기까지는 아직 단어에서도 정해진 것이 없으므로 지나친 것이겠다.
<오렌지로 살기>에서 오렌지, 사과, 장미는 무척 이를 무한대로 벌린 사건이다. 온도차, 밀도차, 강도차이가 실로 어마무시하게 크다. 그러니 정말 좁혀보겠다. 내가 어루만지거나 자주쓰는 말들로 국한시켜 보겠다.
무엇부터 할까. 돈, 사랑, 명예 너무 거창한가. 편지. 아니 오늘 꽃을 피운 난초의 향기로 할까.
향기, 향
이건 기체에서 액체로 축소시키는 것은 아닐까.
이는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나는 읽은 것이 있고, 밑줄까지 그어두기도 한 것이다. 단지 기억에는 없을 뿐, 이렇게 상기시킬 기회가 어제 왔다. 그 대목이 <액체의 '작동'>이라는 장이었다. 문제는 피와 살로 만들어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