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징


문양과 더불어 관심사이기도 하다. 구석기 시대 상징이나 암각화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도 하고 책도 구입해서 보는 편이다. 환각-명상-이니시에이션(통과의례)-동굴-선禪. 어두운 곳에서 장시간 아니 며칠, 몇주?가 되면 눈에서 스스로 빛이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다. (명상은 아직 해보지는 않았지만, 음악을 따라 편안한 상태가 되려고 한 적은 많다.) 샤먼이 되기 위해서, 청년이 성년이 되는 의식과 의례를 통해 뭔가 쉽지 많은 않구나 한다. 무당의 신내림도 그러한 지는 모르겠다. 대마나 lsd 환각의 사례들 역시 68혁명의 책들을 통해서 접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언급들을 관통하는 것, 아니 증명이라고 할까. 있다고 한다.


2. 정동


플랫폼 기업을 목도하는 것을 넘어, 그 와중에 아니 수중에 있다고 할 것이다. 모든 것을 뺏기는 기분과 함께 낚았다는 기쁨까지, 그래 그것이 정동이다. 알라딘서재도 그렇다. 남김없이 준다고 남김없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플랫폼의 마력과 구조를 모른다는 사람은 이제는 없지 싶다. 거리의 상가는 몇달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인테리어 공사하는 곳이 천지다. 이 곳 역시 대박 아니면 쪽박이다. 서로 다-다른 베이스를 갖는 사람들은 서로 다-다른 상품을 낚아채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서로 다-다르지만, 서로 다-비슷한 양태를 갖고 있다. 


3. 신화


신화는 논리적인가. 신화가 이진법의 산물이라고 하면 믿을까. 말이 활자화되기 이전, 구전은 정교함이 없단 말인가? 현생인류의 뇌는 유연한 정신을 바탕으로 사고해야 한다. 네안데르탈인이 여러 대의 PC를 조립해서 쓰고 있다면, 현생인류는 서로 연결해서 뇌의 용량을 줄였다. 유연한 정신은 지금까지와 다른 모습이다. 대칭성에 기반하고 있다. 신화-다신교-유일신은 대칭성과 비대칭성으로 넓게 사고해야 한다. 비대칭성이 과도하게 발현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4. 일상


여기에 귀기울이는 것은 이분법의 사고를 넘어가는 징검다리 같은 것이다. 천재와 특이한 특별한 사람을 통해서 발견되거나 발명되었다는 근거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도나 모로 이루어진 것이 과학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 자명한데도 다른 것들을 연관짓기가 귀찮으니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론과 실천. 이론과 실험. 그 사이에 길고도 깊은 실행의 기예가 자리잡고 있다. 실험실과 천재적인 발명가가 독보적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증기기관이나 산소나 진공이나 등등 일상의 기예가 번뜩이거나 실행의 주변을 살필 때에만 아 그럴 수가 있구나. 수 많은 우연의 산물이기도 하구나가 된다. 자본주의의 발전에 프로테스탄트의 근면성이 기여를 했다는 것이 베버의 견해이자 정설로 되어있지만, 흔들린지도 오래다. 예를 들어 볼테르가 프랑스 카톨릭에 질리거나 위해의 위협에서 영국으로 와서 본 것은 새로운 문화다. 노동자 성령의 감화를 받은 사례들을 개신교에서 말하는 이가 한 둘이 아니라는 걸 느낀다. 정말 개인으로서 신심을 접한 것이 새로운 깨달음이자 개인으로서 자본주의 발전 이유의 하나라는 걸 짚어낸다. 이유는 한 둘로 좁힐 수는 없다. 자본주의 시초가 '정념과 이해관계'라는 것도 허상이라는 걸 밝혀낸 것은 몇 번을 이야기한 바 있다.


5. 과학


과학은 물리와 기계논리로 시작한다. 그래서 화학이나 생태의 근거나 뿌리로 접근하는 방법이 부족하다. 쿤의 패러다임 논리는 토끼냐 노파냐는 이중시선의 그림과 엇비슷하다. 이거냐 저거냐의 논리도 일리는 있지만 그렇게 빠른 과학의 여파가 지금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여러가지가 걸리적 거리고 이것저것 연결되어 있는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느리지 않으면 제대로 길고 오래 연결시키면서 회복시킬 수 없다. 앙꼬 빼먹듯 지구살을 빼먹은 빠른 과학은 이제 지구를 살리는 느린과학의 뒤안길로 물러서기엔 많이 늦은 듯싶다. 


6. 종교


기도를 하라 그러면 믿음이 생길 것이다. 팡세의 말이자 수행이 사람을 바꾸는 사례와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구이기도 하다. 과학이 진실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종교는 신은 없다할만큼 철부지가 아니다. 지금을 살아내는 사람들은 오히려 믿음이 없어 스스로를 바꾸어내지 못한다. 나라는 3차원의 개인이 클라인 병의 한 곳을 통과하면 다른 곳이 모두 타자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 한다. 아직도 스스로가 원자 알갱이라니, 그런 족속이 우리 인간이다. 반물질, 아원자를 떠들어대고 나는 혼자다. 


볕뉘


0.


책들이 다가선다. 폭염. 아니 기후우울증이란 말은 거부하고 있었지만, 정녕 그러했다. 전시장을 다녀오면 녹초가 되는 듯하다. 한 주는 쉬어줘야 한다. 아트매니저님에게 가자미 한지 시작품 잘 다루어달라 부탁하고 쉬는 내내, 위 큰 책들에 빠져있다. 알듯말듯을 지나 이제는 스피노자의 마음이 쏙들어온다싶다. 그래서 걸리는 책들과 읽히지 않아, 구년씩 묵힌 책들도 읽다. 시간의 간극만큼이나 잘 이해하고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만든 작품들과도 많이 겹친다. 또 다른 길을 갈 수 있을 듯싶다. 이번 주 14일 한 팀과 저녁 겸 전시 안내가 있고, 15일 오전 식사와 안내 뒤 철수를 한다. 호암교수회관 직원분들이 많이 부러워하고 좋아하셔서 덩달아 기쁜 마음이다. 찾아주신 분, 관심 가져주신 분들께 모두 감사드려요.


-1.












위 주요 저자들은 마르크스와 들뢰즈와 가타리, 브루노 라투르의 비환원주의, 스피노자를 혼합하면서도 너머서고 있다. 신승철의 공동체기업은 로르동의 공동결사기업과 유사한 모델로 대안이면서도 자세한 방법론의 접근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읽을만하다. 논의확장이 되면 더 좋겠지만, 그 것은 책과 강독으로만 접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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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olook.com/archives/2025050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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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은 흐른다. 익숙한 풍경과 반복되는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쉽게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나는 그 흐름들을 잘게 쪼갠다. 찰나의 감각들을 나누고, 분해하고, 다시 바라본다. 분해된 감각들은 홀로 남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연결을 찾아 다시 엮인다. 이 과정이 곧 작업이고, 탐구이며, 존재의 방식이다


미세한 기울기로 일상의 세밀한 결들을 포착한다. 사라지는 소리의 여운, 빛의 흔들림, 손 끝에 스치는 촉감, 이렇게 마주치는 감각들은 쌓이고 이어지며, 그 자체로 만들어진다


분해가 곧 낳음이 되고, 나뉨이 곧 창조가 되는 역설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움직임은 순간의 연속이지만, 그 순간을 무한히 나누다보면 정지한 듯 보인다. 그 정지된 찰나 속에서 무한한 변화를 포착한다


일상을 미분하여 분리된 조각들을 다시 잇고, 그 연결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낸다. 작업은 의도와 우연을 넘나들며, 규칙 없는 질서 속에서 완성된다. 미분한 일상은 끝없는 과정의 연속이며, 이것이 존재하는 자리이자 내가 되어가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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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5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울 2025-05-15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금요일 오후 토요일은 가능한 한 현장에 대기하려 합니다. 연락주시면 더 좋은 관람되실거예요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헤겔의 비유로, 철학이 이미 역사로 굳어진 것만을, 즉 기존의 것만을 인식한다는 점을 가리킨다. "세상을 사유하는 철학은 현실이 형성과 준비를 마친 후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철학이 그것이 가진 회색을 다시 회색으로 덧칠하기만 한다면 생의 모습은 낡아 버리게 되고, 회색을 그대로 두면 젊어지지 못할 것이며 다만 인식되기만 할 뿐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내릴 부렵에야 비로소 비행을 시작한다. 헤겔은 철학이 앞으로 도래할 것을 파악하는 능력이 없다고 말한다. '회색으로 덧입힌 회색'은 '기존의 것'이 지닌 색이다. 철학은 돌이켜 생각함이지 앞서 생각함이 아니다. 그것은 전망적이지 않고 회고적이다. 이와 반대로 희망의 사유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어 현실을 본다. '새로운 태양이 뜨는 아침의 닭 울음소리, 세계의 젊어진 모습을 선언하는 것이다. 117-118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본질의 로직을 벗어나 새로운 것이 동트는 광채를 볼 눈이 멀어 있다. 희망의 사유는 인식의 초점을 미래로, '기존의 것'에서 '앞으로 도래할 것'으로 옮기며, 본질의 시간성을 나타내는 항상 이미 아직 아님을 대비시킨다.


 블로흐는 회색에 희망의 색인 파란색을 대비시켰다. "먼 색인 파란색은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미래적인 것과 아직 무엇이 되지 않은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괴테는 파란색을 '끌어당김이 있는 무'로 정의했다. 파란색은 우리를 매혹하고 갈망을 일깨우는 '아직 아님'이다. 파란색은 우리를 먼 곳으로 끌어당긴다. 쾨테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높은 하늘, 먼 산을 파랗다고 보는 것처럼 파란 면은 우리 눈앞에서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눈앞에서 멀어지는 어떤 호감 가는 대상을 우리가 기꺼이 좇는 것처럼 우리는 파란색이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에 이 색을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희망이 없는 공동체는 회색으로 덮여 있다. 것이 없다. 


희망의 정신을 지닌 우리는 '지나간 것' 안에서도 '앞으로 도래할 것'을 발견한다.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자 다른 것인 '앞으로 도래할 것'은 '지나간 것'이 꾸는 낮의 꿈이다. 희망의 정신 없이는 동일성 안에 갇히게 된다. 희망의 정신은 '지나간 것' 안에서 '앞으로 도래할 것'의 흔적을 좇아 나아간다. 그렇게 과거는 구원을 암시하는 은밀한 지표를 지니고 있다. 125-126


'아직-아:닌' 전시는 희망을 다루는 만남이다. 희망의 원리라는 책의 부제, 아니 원제목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이기도 하다. 밤꿈이 아니라 낮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위의 <<불안사회>> 역시 희망을 다루고 블로흐를 언급하고 있다. 오프닝때 전시설명을 마무리하면서 낭독한 대목이기도 하다. 


Bowl시리즈는 공동체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모임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붙이고 긁고 오리고 금가게 하고 다른 것들로 채우기도 하고, 선물present이기도 한 것이다. 말하고 싶은 텍스트들도 판박이처럼 붙어있기도 한데, 훗날 알게될 스토리이기도 하다.


Blue 시리즈는 옮긴 대목을 다시 보며 환기시켜도 좋을 듯하다.




볕뉘


소소영화관에 전시중인데 상주하고 있지는 않다. 주말 간간히 들르긴 하지만, 위의 스토리를 갖고 보시면 더 좋을 듯하다. 소소영화관에서 추천중인 영화 <쇼잉업>을 보시면 더더욱 좋겠지만, 이 역시 작가의 욕심일 수도 있겠다싶다. 아마 4월 중순까지 편하게 오셔서 둘러보시고, 한 켠에 마련한 책장과 책들도 전시를 위해 준비한 소품이니 참고하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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