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1까지 대전 소소아트시네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ttp://naver.me/GG7ExJBa



볕뉘. 


행사소식 전해요. 회갑 잔치를 하지 않는데, 어쩌다보니 대전에 이런 기묘한 문화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 있는 분들은 한번 들러 재미나게 놀다 가셔도 좋습니다. 다른 행사에 일가견이 있는 분들이라 품질은 보장합니다요. 2부 태화장은 멘보샤 소문난 맛집이기도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볕뉘




포항 꿈틀로 전시가 끝난 지 얼마되지도 않아 또 전시. 놀라시기도 할텐데 <다-다르다> 전시도록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내용-형식이 이어지는 전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릅쓰고 이어가기로 했답니다. 


아시겠지만 글, 텍스트가 많습니다. 


아마 텍스트를 소화해내야지만 전시개요를 알 수 있는 불편한 전시이기도 합니다. 숨은 그림처럼 도록 안에 소개되는 책을 지도로 해서 살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늘 전시는 많은 분들과 공감하고 나누고 싶은 데 역시 뜻대로 되지 않는 것도 전시이기도 합니다. 늘 관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玄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4-02-02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Ⅸ. 사람들은 왜 자진해서 종속하기 위해 싸우는가?


Ⅹ. 무엇을 할 것인가?



(3) 일원론과 이원론

 

푸코가 알아냈다. 두 편성이 갖는 공통원인으로서 권력과 권력과 앎이 협동한다는 것을 말이다. 권력과 앎은 서로 직접 포함한다. 앎을 전제하지 않는 권력관계도 권력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는 앎도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푸코에 있어서 앎과 권력이 이원론적으로 대등한 관계다. 들뢰즈는 여기서 앎에 대한 권력의 우위, 앎의 관계에 대한 권력관계의 우위읽어내려 한다. 들뢰즈는 이원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원론이란 필시 사태의 발생 후의 모습이고, 발생을 묻지 않는 한 전제 가능한 것이다. 푸코는 기존(데카르트, 칸트, 스피노자, 베르그송)의 이원론을 뛰어넘었다. 저작에 이원론이 보인다해도 준비적으로 어떤 분할을 전제하고 있다. ‘외관상의 이원론에 지나지 않는다. 1.5원론. 근저에는 일원론적 원리가 발견되는 것이다. 권력이야말로 그 원리이다.

 

앎의 의지

 

권력은 도처에 있다. 모든 것을 통괄하기 때문은 아니다. 도처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권력은 소유 가능한 것이 아니라 불평등하고 가동적인 승부 속에서 행사되는 것이다. 권력관계는 다른 관계들(경제적 과정, 앎의 관계, 성관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내재하고 있다. 권력은 밑에서 오는 것이고, 권력관계의 원리에는 지배자/피지배자라는 대립은 없다. 권력관계는 의도는 있지만 비주관적이다. 즉 목적은 갖고 있지만 권력자와 같은 자의 결정에서 유래하지 않는다. 권력이 있는 곳에는 저항이 있지만, 저항은 권력에 대해 외측에 위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렇게 푸코는 권력의 개념을 철저하게 생각해왔다. 모든 행위는 권력의 행위에 의해 유발되는 행위이다. 권력이라는 행위에 대한 행위가 행위라는 것의 전부를 메우고 있다. 어떤 막다른 길처럼 보인다. 권력이 삶을 대상으로 할 때에는 반드시 권력에 저항하는 삶을 폭로하고 유발한다. 저항의 횡단적 관계들이 재지층화되고 권력의 여러 매듭들을 만나면 대체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 푸코는 여기에 대한 대답이 없다. 그는 슬그머니 그리스 로마시대의 윤리에 관해 말한다. 그는 분명 권력론을 버리고 윤리학을 지향했다.

 

(4) 욕망과 권력

 

권력론이라는 틀로 사물을 생각하고 있는 한 푸코와 같이 될 수밖에 없다. 권력론은 우리를 반드시 어떤 막다른 길로 몰아넣는다.

 

욕망과 쾌락- 1977년 들뢰즈가 푸코에게 보낸 편지.

 

미시 장치와 다이어그램의 관계: 전자는 개개의 구체적인 장치(, 가족이나 공장이나 학교나 군대 등), 후자는 그것들이 작동하는 양태를 가리킨다. 다이어그램이란 그 자체로서 결코 알려질 수 없는 권력관계가 실제로 작동할 때의 양태이고 사회적 영역의 총체를 망라하는 추상기계라 할 수 있다. 푸코는 미시 장치에 관해서는 뛰어난 분석을 남겼지만 다이어그램으로서 제시되는 권력관계그 자체의 차원에 관해서는 고찰이 불충분하지 않았는가? 힘의 관계들, 미셸은 이것을 더 밀고나가지 않았다. 다이어그램의 관점은 후퇴하고 -정치라는 조잡한 개념을 등장시켜 미시 분석의 풍부함도 축소시키고, 거시/미시라는 흔한 대립의 한쪽을 맡는 것으로 격하되어버렸다.

 

여기서부터 미셸과 차이로 옮겨가려 한다. 욕망의 배치에 관해 말하는 것은 여러 미시 장치들이 권력이라는 용어로 그려질 수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민중들이 잔혹한 처형장면을 보러간다고 해보자. 지금도 그러할까? 이 욕망은 자연적인 결정작용도 자발적인 결정작용도 아닐 것이다. 이것은 복수의 요소가 조합되고 어떤 특정 욕망의 배치가 이루어져 특정 권력양식을 발생시킨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학교의 시험은 그 제도가 있어서 학생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속에 원래 나만 뒤처지고 싶지 않다라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한 욕망의 배치가 널리 사회에 미치고 있을 때에만 이 권력장치는 작동한다.

 

기율형 사회 대신에 통제사회통제는 지배가 아니라 체크를 의미한다. 감시에 의해 사람들에게 행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체크포인트를 설치하여, 기준을 만족한 인간만을 앞으로 보내는 것이 통제사회의 작동양식이다. 이처럼 어떤 권력양식이든 일정 욕망의 배치를 전제로 하고 있다. 권력장치는 배치의 다양한 구성요소 속에 위치해야만 한다. 이렇게 보면 권력장치란 배치의 한 구성요소가 되는 것이다.

 

권력은 어떻게 욕망될 수 있는가?그것을 물어야만 한다. 권력은 욕망의 변양이다. 권력이 왜 발생하는가를 물어야만 한다.

 

권력이란 개념은 어쩔 수 없이 어떤 주체가 존재하고 있고 그것이 행위를 하게 된다는 도식을 전제하고 있다. 반드시 어디서부턴가 무언가로 작용한다. 잘 살펴보자. ‘정말로 하고 싶은 것실제로 하게끔 되고 있는 것이 권력이란 개념 속에서는 구분될 수 없다. 이 개념으로 보면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은 사라지고 무언가를 하게끔 되고 있는 것만 나타난다. 욕망은 주체에 내재하는 힘이다. 그리고 그 내재하는 힘이 여러 요소들과 조합되어 욕망의 배치가 구성된다. 권력의 개념은 욕망 배치의 선단, 즉 결과밖에 다룰 수 없다. 그래서 권력장치 분석은 이차적의미만을 갖는다. “권력에 대한 욕망의 우위라는 시각이 없으면 사회현실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 이제서야 자기 자신의 억제, 착취나 모욕, 노예상태를 참는, 자기자신의 억제를 욕망하게 되는가를 명백하게 알 수 있다. 단지 욕망이라는 것과 사회라는 것만이 존재하고 그 이외의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들뢰즈=가타리는 정신분석가가 환자 일반이 아니라 개개의 환자를 대하듯이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권력장치, 그것을 작동시키는 다이어그램,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선 그 전제에 있는 욕망의 배치를 분석할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다시 열린다.


왜 사람은 자유롭게 될 수 없는가? 왜 사람은 자유롭게 되려고 하지 않는가? 어떻게 하면 자유를 추구할 수 있게 되는가?


5. 정 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Ⅵ. 인간은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다.


Ⅷ .우리는 왜 우울을 앓을 수밖에 없는가?


 

욕망에서부터 사회를 고찰하는 이 철학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욕망에서부터 사회를 고찰함이란 어떠한 것인가? 푸코는 권력에서부터 사회를 고찰하려고 했다. 그에 비해 들뢰즈는 욕망에서부터 사회를 고찰하려고 한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감시와 처벌


 

들뢰즈가 강조하는 것은 푸코는 철학자라는 것이다. 게다가 들뢰즈는 푸코를 새로운 칸트주의철학자라고 부르고 있다. 칸트가 철학에 경험 가능성의 조건을 물었다면 푸코는 현실 경험의 조건을 묻는다. 각각의 시대에는 특정 경험의 조건이 있다. 그 자체가 역사적이다. 푸코는 역사를 이른바 방법으로서 이용하면서 칸트 철학을 철저하게 심화시키려 하고 있다. 광기에 관하여 17세기 유럽에서는 광인을 일반 시료원 등에 감금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것은 이른바 정신병원에 정신질환을 앓는 인간을 입원시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사태이다. 게다가 일반 시료원에는 걸식자나 부랑자, 나아가서는 범죄자, 낭비가, 나태한 인간, 무신론자 같은 사람들이 합쳐서 수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용되고 있던 자들을 낙인찍고 있던 것은 바로 당시 새롭게 출현한 비이성이라는 개념이다. 17세기 시점에서 이성은 아직 미약한 지위 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그 이성이 비이성에 공포를 품기 시작한 그때 비이성을 폭력으로 감금한다는 사태가 일어났다.

 

18세기 말까지 프랑스에서 가짜 치료사의 담론과 의사의 담론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시점부터 하나의 확실한 분할이 일어난 것입니다. 18세기 말 의학적 담론을 과학적 담론으로서 독립시키는 규칙이 성립한다. 푸코는 그 규칙을 문제 삼아 어떤 형태의 담론이 형성되고 또 변동하는가를 물은 것이다.

 

지식의 고고학


이 방법론의 저작은 담론적 편성과 아울러 그 밖에 위치하는 또 하나 다른 편성의 존재를 언급한다. 그것이 비담론적 편성이다. 알기 쉽게 말하면, 이 편성은 언어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 사물의 영역, ‘보는것이 대상으로 하는 영역에 속하고 있다. 이전의 저작도 비담론적 편성을 시야에는 넣고 있지만, 그것에 연구대상의 지위를 부여하고 이른바 언어 외 현실에 대한 다른 길을 만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이책을 과도기적 작품, ‘경첩의 역할을 한 저작으로서 위치시키고 있다. 그 이후에서야 들뢰즈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저작 감옥의 탄생이 나온다.

 

이 책은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감옥이라는 하나의 사물이 존재한다. 이것은 환경의 편성(감금적 환경)이다. 그것은 비행성이나 비행자라는 완전히 다른 말이나 개념으로 반송되고, 그 말들과 개념들은 위법행위와 처벌, 또한 위법행위와 처벌 각자의 주체를 언표하는 새로운 방식을 표현한다. 곧 환경은 언표를 낳고 언표는 환경을 규정한다. 한 시대, 한 사회는 담론적 편성과 비담론적 편성을 그 본질적 측면으로 갖는 것으로서 다뤄지게 된다. 들뢰즈에게는 필시 언어 내의 현실만으로는 현실이 파악될 수 없고 언어 외의 현실에 다가가야만 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담론적 편성과 비담론적 편성(들뢰즈는 양자를 긍정적으로 명명하도록 각자를 표현의 형태내용의 형태라고도 부른다)은 대단히 섬세한 인과관계 안에 있다. “거기에는 대응관계도, 동형성도, 직접적 인과성도, 상징적인 관계도 없다.”

 

(1) 감옥의 탄생에서 두 개의 편성

 

그 책의 제2부는 형법 개혁자들의 담론을 다루고 있다. 잔혹한 형은 인간성에 어긋난다가 아니라, 잔혹형을 구경거리로서 이용하는 것은 효율이 나쁘므로 더 효율적인 처벌권력의 행사법을 생각해야 한다고 하는 경제책의 관점에서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었음을 명백하게 한다. 범죄의 성질과 처벌의 성질에 대응관계를 갖기 위해 권리 남용의 죄에는 권리 박탈의 벌, 도둑질에는 몰수의 벌, 오직에는 벌금, 그리고 방화에는 화형을 과하는 형벌체계의 필요를 주장했다. 하지만 이 실로 다종다양한 형벌들은 그 뒤의 형법에서 전혀 채용되지 않았다. 그들의 안은 망각되어버렸다. 그리고 난데없이 감옥이라는 처벌양식이 나타나 극히 단기간 동안 벌금과 사형 사이의 모든 처벌을 담당하게 되어버렸다. 이어서 제3부는 감옥뿐만 아니라 공장이나 학교, 병원 등의 기율로서 정식화하고 판옵티콘은 마지막에서 다뤄진다. 4부는 비행자가 지배 권력에 이용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지적한다. 범죄자는 이전과 달리 비행성을 담론으로 왜 이런 인간이 되었는가?라는 효과를 낳는다. 그들의 사회복귀는 이뤄지지 않고 역으로 재범자를 낳는다. 이런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지배자층이 그런 인물을 사회 주변에 머무르게 하고 관리 가능한 상태로 머무르게 해두는 것에 도움이 된다. 그것만이 아니다. 지배자층은 그 비행자들을 이른바 장기말로서 이용할 수 있다. - 담론적 편성을 둘러싸고 쓰인 제2. -비담론적 편성을 둘러싸고 쓰인 제3. - 두 편성의 상호침투를 둘러싸고 쓰인 제4

 

(2) 권력과 두 개의 편성

 

들뢰즈는 푸코의 권력론을 소개함에 있어 마르크스주의 권력관과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 방증 속에서 새삼스레 담론적 편성과 비담론적 편성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이 두 항은 일찍이 마르크스주의가 채용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라는 이원론적 도식과 유사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푸코 역시 지식의 고고학까지 이원론 도식으로 사고하고 비담론적 편성에 조금의 우위를 보여줄 뿐이었다. 그에 비해 감옥의 탄생에서 비담론적 편성에 적극적인 지위를 부여하고 두 편성의 상호침투적인 관계를 그려내었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들뢰즈는 두 편성의 상호침투를 밝혀내면서도 거기에는 대응관계도, 동형성도, 직접적인 인과성도, 상징적인 관계도 없다고 한다. 거기서 다시 되묻는다.

 

이 형태들 외에 사회적 영역에 내재하는 공통의 원인이 일반적으로 존재하는가? 두 형태의 조정이나 상호침투는 어떻게 구체적인 경우에 있어서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하게 되는가? 라고 말이다. 형태 혹은 편성의 이원성은 내재적인 공통원인을 배제하지 않는다. 상정되는 공통원인은 두 형태의 요소들 선분들 사이의 혼합, 포획, 방해 등을 끊임없이 계속 측정한다. 어떤 장치도 혼합하는 죽같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책은 외관상의 이원론을 명백하게 뛰어넘으려고 한 책이다. 그리고 공통원인의 대답은 간단하다. ‘권력이야말로 두 편성을 결부하는 3의 심급이다. 권력이야말로 두 형태의 요소들 혹은 선분들 사이의 혼합, 포획, 방해 등을 끊임없이 계속 측정한다.” 이렇게 푸코는 신좌익이 과제로 하고 있던 부르주아적 사고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항하는 형태로 전개된 권력의 문제를 다시 묻고 있다.

 

권력은 소유물이 아니다.(소유물의 공준) 권력은 소유되지 않고 오히려 실천되는 것이다. 또 한 권력은 국가장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국재성의 공준) 그래서 국가장치 속으로 따라 기입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근대 사회를 특징짓는 기율형 권력은, 예를 들어 공장이나 학교나 군대와 같이 공간 속에서 지배되도록 교묘하게 배치하고 감시함으로써 그들에게 행위하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권력은 국재적이지 않은 것은 물론 포괄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확산적이다. 권력은 하부구조에 딸려있지 않다.(복속의 공준) 권력이 상부구조에 끌려가는 하부구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체적인 경제활동의 총체, 예를 들어 작업장이나 공장 쪽이 기율이라는 권력을 전제하고 있다. 권력은 권력자, 지배자의 속성이 아니다.(본질 또는 속성에 관한 공준) 피지배자와 구별하는 지배자 나름의 본질이나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권력은 권력자라는 높은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권력은 관계이다. 권력관계는 높은 곳에서 강요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실로 얌전한 민중들, 낮은 곳에서 떠받쳐지고 있다. 폭력이나 이데올로기만으로 권력의 개념을 다 설명할 수 없다. 권력은 행위에 대한 행위이다. 사람을 교묘하게 배치하고 그것을 감시하는 것만으로 행위하게 하기가 가능하다. 억제란 폭력과 이데올로기는 힘들간의 투쟁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에 의해 말려 올라간 흙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이 마르크스주의적인 권력관과 비교해낸 것이다. 신선하지 않은가?


하나 남은 것이 부르주아적 사고이다. 법이 위법행위에 대립하지 않는다. 부르주아를 위한 법이다.(합치성의 공준) 위법행위와 법은 섬세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그때그때 지배층의 경우에 따라 어떤 위법행위를 허용하고 지배계급의 특권으로 날조된다. 기업에 관한 법률을 생각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푸코는 법이 하나의 평화 상태도, 쟁취된 전쟁의 결과도 아니라는 것을 제시한다. 법은 전쟁 그 자체이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전쟁의 전략이다. 바로 권력이 지배계급이 획득한 소유물이 아니라 바로 지금 행해지고 있는 그 전략의 행사 그 자체임과 마찬가지다.

 

권력은 여러 힘들의 관계로 정의된다. “권력이란 여러 힘들의 관계이고 혹은 오히려 온갖 힘들의 관계는 하나의 권력관계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소멸하기 쉽고 미발달된 것으로 잠재적인 채 머무른다. 따라서 권력관계는 그것을 통합하는 이라는 파트너를 필요로 한다. 이 권력과 앎이라는 쌍에 대해 권력은 유연하게 작용하고 다양한 을 경유하는 데 비해, 앎은 단단한 형태를 구성한다. 앎은 교과서를 만들거나 그를 위한 학과를 개설하거나 한다. 앎은 그런 의미에서 일정 기간 존속하는 단단한 형태를 갖는다. 그에 비해 권력은, 예를 들어 학교의 한 사람 한 사람의 학생, 공장의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동자 등과 같은 점에 대해 유연하게 작용한다. 점과 점을 선으로 결부함에 의해서 권력은 작동한다.(다이어그램)

 

칸트가 말하는 도식이란 감성이라는 수동적 능력과 오성이라는 능동적 능력 사이를 매개하고 중개하는 구상력을 말한다. 칸트에 있어서 도식론이 푸코의 판옵티콘같은 다이어그램 같은 역할을 한다. 감성과 오성 사이에는 뛰어넘기 힘든 심연이 있다. 감성이 받아들이는 것은 무한하게 다종다양한 지각인데, 오성은 그것을 기성의 개념들로 통합해내야만 한다. 칸트가 물 자체에 근접시켰듯이 들뢰즈에 의하면 권력관계도 같은 작용을 갖는다. 그것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알려질 수 있는 것은 그 제시인 바의 다이어그램뿐이다.


5. 정 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