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을 사랑하기


[ ] 니체의 전설인 수퍼맨은 살과 금속의 공생이라는 대담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징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니체에 대한 이러한 현대적 활용과 남용에 있어서 잊혀지고 지워진 것은 초인에 관한 그의 반복되는 기원이 인간적인 것으로 되돌아가는 우리를 불러낸다는 것이다. 초인의 약속은 그러한 방식들로 묶여져 있지만 인간적인 것에 관한 기억과 더불어서는 거의 탐구된 바도, 이해된 바도 없다. 현대의 기술론적 이론화는 ‘인간의 진정한 문제‘에 관해 우리를 눈멀도록 한다. 36

[ ]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주의 깊게 읽으면 그에게 인간적인 것이 영속적인 극복의 자리에 놓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시원들에 관한 질문, 그리고 자기 투명성을 향하는 데에 수반되는 욕망은 그 책의 시작에서부터 추방된다. ‘우리‘ 인간들은 ‘필연성으로부터 빠져나와‘ 우리 자신을 낯선 사람으로 두어야만 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지자가 될 수 없다. 39

[ ] 그는 실존의 희극의 인간 역사의 비극을 전환시킴으로써 도덕의 시원에 대한 진지한 탐구로 인해 기대되는 ‘보상‘을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가 상위의 ‘영원한‘ 생성에 종속되는 동시에 ‘영혼의 운명‘에 관한 디오니소스적 드라마를 향해 새로운 반전과 성과를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다. 이 서문은 인간의 새로운 기억에 호소한다. 이는 한 번 획득되고 나면 우리가 ‘근대인‘이라는 돌림병을 잊어버리게 되는, 바꿔 말해 ‘독해의 기예‘를 망각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예에 이르고서야 다시 배우게 되는 것은 니체의 처방 이전에 있는 ‘어떤 시간‘, 곧 도덕적 과거와 초도덕적 미래에 대한 독해 가능성이다. 이러한 독해의 기억술은 살을 가진 글쓰기로서 우리의 신체 위에 통합되고 새겨져야만 한다. 42

[ ] 니체는 인간의 ‘진정한 문제‘를 작업하는 데에 있어 문화의 ‘실제 도구‘와 문화의 ‘잠재적 담지자들‘을 구분한다. 문화란 단순히 맹수인 인간을 문명화된 동물로 기르고 길들이는 일일 뿐이다. 문화의 기술들은 오로지 무를 의지하는 힘에의 의지를 육성할 따름이다. 즉, 힘에의 의지의 내면화 과정인 수동적 허무주의는 문화가 자기 혐오와 경멸 이외에는 그 병으로부터 빠져나올 어떤 것도 산출해 내지 못하는 지점에 이른다는 것이다...문화의 훈육을 향한 의혹의 태도는 낯설고 근대적인 지배자 혐오주의라는 중대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49

[ ] 기억은 음악가들과 미술가들의 작품에서 증명되는 대각선적인 운동을 통해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로워 진다. 모든 창조적 행위는 궁극적으로는 ‘탈역사적‘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그들은 ˝창조란 세계를 재현하는 과업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 낸 돌연변이적인 추상적 선들로서 이는 정확히 그것들이 분절된 계들 하에서만 다시 포함되거나 다시 자리 잡는 새로운 형식의 역사적 실재를 모아 내기 때문˝이다. 52

[ ] 프루스트에 대한 연구에서 들뢰즈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기억이란 도구로 작동한다 - 우리는 단순히 극복에 대한 복무 하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가적인 종류의 의도적인 조작과 선전에 굴복하지 않는다. 기억의 주체는 이 자기 극복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가 프루스트의 작품이 갖는 시원성을 논한다는 것은 과거와 기억의 발견이 아니라, 미래와 배움의 진보인 것이다. 56

[ ] 기억은 시간의, 지나가는 현재의 움직이는 토양을 재현해내긴 하지만 사실 그 바탕이란 능동적 주체의 시간을 빼앗아 버림에 따른 되기의 전유에 도전함으로써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다. 들뢰즈 이를 기억의 심오한 수동적 종합이라고 한다. 기억은 시간의 근본적 종합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라는 상태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현재를 지나가도록 허용한다. 59

[ ] 보들리야르는 ‘인간이란 전갈(엉큼한 사람)‘이라고 쓴다. 살아있는 사물들을 함께 묶는 것은 ‘생태학적인, 생물권적인 연대‘가 아니라 죽음을 향한 또 다른 말인 항상적 평형론 덕분이다. 오히려 선good을 자유롭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악 또한 자유롭게 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진정한 평형론‘과 균형을 만들어 내는 그것들과의 분리 불가능성 때문이다. 73 선과 악은 생명이 부단히 자신을 극복해야만 하는 무기들이자 멀리 울리는 상징이어야만 한다...가장 위대한 악은 가장 위대한 선에 속한다. 곧 , 그러나 이는 창조적인 선이다. 74 인간의 기억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그의 구성물로서 인간에 속하는 기억과 그의 소유가 아닐지도 모르는 기억인 인간적 되기에 대해 이중적으로 말한다는 것이지만, 동시에 어떤 다른 것과 ‘넘어섬‘을 알리는 일이기도 하다. 75


 2. 초인을 향해: 니체적 선별의 기예와 기교에 관하여


[ ] 당신은 모든 가치 판단에 있어서 관점주의적 감각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 전치, 왜곡, 그리고 기껏해야 한계가 명백한 목적론과 관점주의에 항상 들러붙은 뭐든지 간에.....당신은 모든 것을 향한 그리고 반하는 것 하에서의 필연적인 부조리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삶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서의 부조리이자, 삶 자체가 관점주의적이고 부조리하다는 감각에 의거하여 조건 지어진 것이다 ; 해방의 수수께끼는 스스로의 덕뿐 아니라 스스로의 자기 극복을 정복하는 극기의 과정을 포함한다. 이는 관점주의 하에서의 훈련을 요구한다. 86,87

[ ] 당신은 아마도 탈주선을 그리며 도약을 만들어 낼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모든 것을 재층화하는 조직화, 기표에 대해 힘을 다시 부여하는 형식화, 오이디푸스의 부활에서부터 파시스트적인 응고물에 이르기까지....주체를 재구성하는 귀속을 다시 마주치게 될 위험이 존재한다./자유로운 영혼은 자신만의 독특하고 유일한 사례를 일반화해 내며(한낮의 경험이라고 하는) 이러한 경험의 기초 위에서 결정하는 법을 배운다. 95

[ ] 충일함으로 고통받는다는 일 98/우리는 오로지 우리 자신을 향한 불신의 태도를 취함으로써만 낭만주의를 ‘넘어서‘ 갈 수 있을 뿐이며, 이에 따라 자신의 가장 깊은 친구로서 가장 위대한 적이 된 스스로에 반하여 다른 쪽으로 데려갈 수 있고,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낭만주의적 허위에 반대하는 용기 있는 염세주의˝에 대한 스스로의 길을 찾을 수 있다. 102/ 즐거운 학문- ˝영혼의 야단법석˝에 대해 말한다. 104 철학은 ‘변형의 기예‘이다. 위대한 건강이란 그것ㅇㄹ 고무하는 병과 이상들에 대한 긍정의 도래라는 필수 부분을 포함한다....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통해 생각을 낳아야만 하며, 어머니들처럼, 피, 심장, 열정, 쾌락, 정념, 고통, 의식, 운명 그리고 파국 모두를 유산으로 물려주어야만 한다. 107 극도로 심하고 은밀한 병들로부터 ‘되돌아와‘ ‘새로 태어난다‘108 자신의 시간이 가진 궁극적 가치에 대한 측정에 주목하길 희망하는 ‘초월하는‘ 인간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안에서 이 시간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시간을 극복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우리의 앞선 반감, 그로부터 나오는 고통, 그리고 낭만주의를 낳는 고통을 극복하는 일을 포함한다. 다시 한 번 영원회귀는 이러한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오로지 그것의 수수께깨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110

[ ] 도덕이란 선과 악을 뛰어넘어 가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그것 자체가 바깥으로의 횡단이 불가능한 것이다. 112 금욕적 이상은 ˝인간의 총체적 역사˝로 스스로를 새겨 왔으며 그러한 방식에 있어서 양자는 두렵고 망각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지구라는 행성 위에서의 이러한 ‘진정한 파국‘은 또한 진정한 문제를 제기한다. - 단순히 개별성의 초월이나 바깥이 아닌 그것들 아래에 흐르는 어떤 흐름들을 위해서 말이다. 113


 3. 죽었는가 살았는가 ; 영원회귀의 죽음에 관하여


[ ] 유고- 억압적인 것으로서 비생기적인 것으로의 회귀에 대해 생각하기를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차라리 우리는 죽음에 대한 재해석과 재평가를 통해 스스로를 완전하게 해야만 하며, 따라서 실제적인 것과 더불어, 또한 사후 세게와 더불어 우리 자신과 화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 세계가 사후 세계로 가로질러 들어가는 것으로부터 연유하여 나아가는 하나의 축제라고 쓴다. 그러한 과업은 감각 가능한 상태이기에 그것을 즐겨라는 코미디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일이다. 근본적인 전도를 통해 우리는 죽음을 생명의 대립이 아니라 그것의 진실된 자궁으로 다루어야만 한다. 129 긍정의 힘 즉, 역능과도 같은 영원회귀는 영원성으 계기인 모든 다수성을 긍정한다./어린아이와 같이 각각의 시간과 모든 시간들을 긍정하는 상태로서 변화의 총체를 이룰 때에만 승리할 수 있다. 131

[ ] 영원회귀라는 형식론은 극단적 잉여로의 시험을 밀어붙임으로써 자신의 바탕에서부터 범주적 요청을 패퇴시키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미리 주어진 도덕 법칙에 관한 반복에 관계되는 대신 도덕성을 뛰어넘는 법칙의 형식일 뿐인 반복 자체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블랑쇼가.. 영원회귀는 시간의 찰라성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과 존재 바깥에 있는 것으로, 또한 그것 자체를 바깥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이는 그것이 영원한 것, 곧 영원성으로 불릴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라고 한다. 132

[ ] 죽음은 즉자적으로는 무의미하지만 대자적으로는 흐름과 이동성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134 죽음의 삭제가 아닌 그것의 극복. 통합적 변형은 여전히 죽음에 속해 있긴 하지만 이제 소수자적 언어 속에서 드러나며, 그것은 한계로의 이행이 된다. 135 끊임없는 변화에 따라 삶을 해석하는 일은 삶이라는 잠재적 연속체를 전면에 가져다 놓는 일이어야만 하는 것이다./명령어들에 있어서 삶은 죽음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비행하고 창조해 냄으로써 그것에 답해야만 한다. 137

[ ] 바타유는 오로지 뻔뻔함만이, 음탕한 악마성만이, 충분히 행복한 자아의 상실로 이끌 수 있다고 쓴다. 죽음 이전의 유쾌함이란 삶이 뿌리에서부터 정상에 이르기까지 축하받음을 뜻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소멸하는 것에 대한 찬양 그 자체이거나 그것을 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보수를 넘어, 제한을 넘어 그리고 보존을 넘어. 139 세계에 도래하게 된 모든 존재의 유쾌함과 같은 모든 것들의 폭발적인 소진일 뿐이다.....나는 피투성이가 되고 부서졌지만 변화된 나 자신을, 끊임없이 죽이고 끊임없이 죽는 시간의 먹이이자 턱으로서 세계와 일치하는 나 자신을 상상한다. 140 죽음선에 대한 언급에서 신비주의적인 죽음욕동에 호소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의 고원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욕망 안의 내적인 욕마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배치들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욕망은 늘 배치의 문제였다. 142

[ ] 차라투스트라의 순수 생성을 도입하는 일에는 역행되는 잉여로서의 죽음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맥락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죽었다는 것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이다. 즉, 그는 다시 또 다시 자신이 소멸과 변형의 지속 하에서 수많은 작은 죽음들을 갖는다. 최종적인 열사는 단번에 죽는 일이 불가능함을 증명하게 될 영원회귀의 반엔트로픽한 원리를 침식할 것이다. 154

[ ] 모든 이들은 죽음을 중요한 사건으로 다룬다. 하지만 죽음은 축제가 아니라...우리는 죽기를 배워야만 하며 도한 거기에는 임종을 맞은 이가 살아 있음에 대해 서약을 바치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축제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차라투스트라의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 나는 차라투스트라의 생성, 니체 철학의 생성을 괴물 같은 불-‘기계‘-로 독해할 것을 제안한다. 160 불-기계는 그것을 요리하고 끓임에 다른 우연성을 긍정하는 기계로서, 결국 작고, 복수적인 조작들에 의해 해방된 막대한 힘들이다./삶 안에서의 단련이자 심지어 초월까지도 넘어서는 살아 있는 동물적 능력의 육성을 요구하는 죽음인 것이다. 161

[ ] 니체가 자신이야말로 역사 속 모든 이름임을 주장했을 때, 그는 어떤 거대하고, 천박하고 우스꽝스러운 정체성을 스스로의 탓으로 돌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이 갖는 통약 불가능성을 긍정하고 영겁적 생성의 거리에서 나온 역사를 확장하는 중에 있다고 볼 수 있다. 163 죽음이란 결코 멈추지 않는 것이자 모든 생성에 있어서 결코 끝나는 일 없이 벌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자체 내에 주름져 있고 강도에 의해 접혀 있다. 죽음은 일어난다. 하지만 ‘생성‘에 따라서만 그러하다 165


4. 다윈에 반하는 니체


[ ] 니체가 다윈주의에 응하는 것이 생물학적 이론이 아니라 사회적 다위주의로서의 사회 이론임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이다. 178

[ ] 힘에의 의지론은 적응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니체에게 이는 삶에 대한 총체적이고도 반동적인 개념이다. 삶의 능동적 개념은 오로지 그 강세가 적응이 아닌 자발성, 확장 그리고 새로운 방향과 해석을 제시하는 자기 형성적 힘들인 자기조직화가 우선에 놓일 때에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는 삶의 과정에 있어서의 본질적 현상이 정확히 조형적이고, 형상을 창조해 내는 거대한 힘으로부터 작동하고 그 결과 외적 환경들을 이용하고 개발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181 자연도태는 계통발생학적인 나무의 가지를 쳐내지만 성장을 위한 새로운 가지들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니체에게 힘에의 의지는 더 거대한 복잡성, 날카로운 차이화, 발전된 기관과 기능들의 우연성의 결과를 낳은 해석과 연결의 무의식적 과정에 따른 복잡한 진화 하에서의 능동성이다. 183

[ ] 니체가 생명의 목표와 목적이라는 관점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대목은 홉스, 스피노자, 애덤 스미스, 다윈류의 자기 보존인 반면, 이러한 극복의 결과인 보존을 동반한 힘을 단지 거두어들일 뿐인 것으로부터 빠져나와 강조하는 것은 바로 살이 있는 것들이 향유하는 것이다. 189 유기체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압도적이고 지배적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적응으로 재해석된 압도성과 지배성, 또한 과거의 의미와 목적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애매해지거나 완벽하게 제거된다. 191니체는 기계론적인 생리학과 생물학이 자연과학에 속한 투쟁을 정치화하며, 이는 결국 보다 상위의 힘으로서 지배하길 원하는 모든 것에 대립된다고 말한다....법을 도입한 사회는 힘의 결합체 간의 싸움에 필요한 수단이 아니라 일반화된 투쟁에 반하는 수단이자, 또한 마찬가지로 생명에 대해 적대적일 뿐 아니라 무로 통하는 비밀을 감춤으로써 인간의 미래를 암살하고자 하는 대표적인 것에 불과하다. 193

[ ] 인간이 번창해 온 것은 능동적 유형의 강함이 아니라 반동적 유형의 약함때문이라는 것이다..../생명에 대한 다윈-맬서스적인 관점의 승리가 이를 통해 설명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정확히 그러한 인간과 도덕성의 역사라는 것은 바로 역사와 문화의 수준에서 일 뿐이며..../우리가 그러한 자아라는 개졈을 가정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고립되고 자기 충족적인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 구성원들의 연쇄 속에서 복잡한 결합에 따른 것이야만 한다는 것이다.194 니체는 누군가가 천재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문화는 독특하고 특이한 존재들의 비예측적이고 계산 불가능한 섬광과도 같은 출현을 선화는 조건들 위에 있을 뿐이다. 196

[ ] 승리란 생명이 나약함의 지배하는 방식을 통한 그러한 유형의 인간을 보존함에 따르는 이해관계에 의거하여 설명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니체적인 정의의 범위 하에서 스스로 일어나는 가치들에 대한 재평가의 관점으로부터 내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여기서 정의란 생명 그 자체를 최고로서 대표하는 것이자 선과 악이라는 협소한 관점들을 뛰어넘는 기능인 파노라마적 힘으로 파악된다. 199

[ ] 자연, 생명, 기술이라는 내재면 위에서는 더 이상 주체나 객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유기체는 경계를 무너뜨려왔다. 참으로 본질적 사물은 더 이상 주체와 객체, 형상과 질료에 관한 물음이 아니라 힘, 밀도, 강도에 관한 물음인 것이다. 이는 힘의 광대무변함이 제어되어 왔다는 기술, 배치 등의 자연과 인공의 대립을 초월하는 거대한 기계권에 도달해야만 하는 일이다. 231

[ ] 니체는 좋은 예술가는 힘이 넘치는 동물들처럼 넘치는 에너지로 꽉 찬 이들이라고 주장한다..../그것은 쾌락 가능한 상태가 획득되고 동물적인 잘 삶과 욕망이라는 섬세한 뉘앙스가 섞일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흥분을 경험하는 동물성의 부분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지점이다/니체는 줄 수 없는 이들은 받을 수도 없다고 한다. 232, 233


 5. 바이로이드적 생명; 기계들, 기술들 그리고 진화에 관하여


[ ] 철학과 마찬가지로 생물학 분야는 태생적인 플라톤주의자들로 가득 차 있지만 공생은 유전자들, 플라스미드들, 세포들, 유기체들 그리고 게놈드과 같은 유기적 단위들의 탈선화가 결코 절대화되거나 이상화되 모델이 아니라 오히려 연구의 한 양상에 관한 도구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순수하고 자율적인 존재들과 단위들이라는 개념에 도전하는데, 왜냐하면 혈통이 아닌 결연을 통해 이질적인 항들에 의해 만들어진 다양체들인 작동하는 배치들을 통해 기능한다. 배치들 하에서 유일한 단일체는 복수적인 기능을 하는 공생 혹은 공명인 것이다. 258 진화에서 나타나는 유일하게 정당한 되기/생성은 새로운 규모들과 새로운 왕국들을 가져다주는 공생들에 의해 탄생한다. 오로지 관통하고 자유롭게 생성하는 사물들만을 허용하는 절화만이 형성적 블록들에 의한 혈통적 진화와의 관계를 끊어 낸다. 절화는 혈통이나 유전의 질서에 입각한 차이가 아니라 오히려 잉여로서 사유된 것이다. 절화는 진정한 자유이며, 그 리좀은 계보학적인 수목과는 대립된다. 260

[ ] 초인간적 상상력은 기계들에 관한 인간중심적 편견들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 그것들에 대한 비인간적 선언이 쳐놓은 덫을 고안해 내는 방식들을 추구한다. 기계의 철학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더불어 출발하기 때문에, 그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소외를 통해서만 존쟇다. 추상기게는 자신의 무형식과 더불어 탈층화되고 탈영토화된다. ..지적인 특성은 실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질료에 의해서, 형식에 의해서가 아닌 기능에 의해 작동한다. 266

[ ] 만일 살아있는 계들이 기계들이라면 결국 그것들은 관계들에 따라 이해될 필요가 있는 것이지 구성요소적인 부분들에 따라 그러한 것이 아니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관계들과 더불어 사고한 것이지, 구성요소들과 더불어 사고한 것은 아니다.

[ ] 우리는 기술-기게에 의해서가아니라 무엇이 기술적 요소들을 사용, 확장 그리고 이해하는가라고 하는 어떤 계기 하에서 규정된 사회적 기계에 의해 억압된다. 기술적 기계들은 경제적 범주가 아니라 항상 그것들과 구분되는 사회체 또는 사회적인 기계를 가르킨다. 280


6. 탈인간적 조건에 관한 시대적 고찰; 허무주의, 엔트로피 그리고 그 너머


[ ] 만일 인류가 역사의 목표와 목적을 생성해 내고자 한다면, 그것은 비인간적인 힘(자연)의 결과일 때에만 그러할 것이며, 인간적 의도나 기획에 의해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바꿔 말해, 인류의 궁극적인 인간성은 비인간화의 과정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298

[ ] 근대성의 상상력을 특징지어 온 것은 바로 생명의 힘에 대한 도덕화와 인간화이다. 300

[ ] 기술의 역설적인 조건 하에서 실로 변증법은 자신에게 만족해 왔으며....비판적 사고라는 꿈에서와 마찬가질 부정성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확실성인 총체성 하에서 취해진 것임을 인식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그것은 더 이상 우리가 자신의 소외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투명성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중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블랑쇼에 따르면 역사는 종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원리, 질문 그리고 정식화가 이해를 멈추게 됨을 뜻한다./기술의 시간은 모든 것의 종말을 뜻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블랑쇼의 지적과 같이 모든 것의 종말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09 블랑쇼가 견지하는 바와 같이 이제 사유를 향한 모험은 근대기술의 도래와 같은 거대한 변화라는 결과로 드러나며, 철학자는 모호한 과학의 끔찍한 혼합, 교잡된 비전 그리고 의심스러운 신학을 조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허무주의를 탈인간적 조건의 피할 수 없는 특성으로 인식할 때라야 비로소 종말의 난국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을 찾기 시작할 수 있다. 우리가 인간중심주읮거인 자만심의 몰락한 자유 경험으로부터 출현하는 능력과 원천을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이다.310

[ ] 인간적 가치들이란 인간이 자연과 외부세계를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해 기획해 온 실용주의적 관점들의 결과이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물들의 본질을 잘못 투사해 왔다는 것이다./인간에 관한 문제와 그것들의 아픈 상태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은 인간의 비인간중심주의화된 미래의 비전으로서 초인overhuman을 상상하는 일이다. 311

[ ] 탈인간적 조건이란 인간적 상태의 초월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중심주의적인 탈규범화의 내재적 과정에 있는 비목적론적인생성에 관련된다./ 인간성을 취하거나 유산하는 것이 아닌 비인간 및 탈인간과 필연저으로 묶여있는 미래를 니체가 말하는 중이다./이렇듯 깨지고 부서진 이행의 시간이라는 니체의 본질적 통찰이 지닌 무게를 느낄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냉혹함과 너무나도 두터운 현실들을 부수고 여는 힘을 갖춘 홈리스들인 것이다.315

[ ] 허무주의라는 사건의 출현과 더불어 현재는 부러진 시간, 쪼개진 시간이 되어 버렸으며, 이는 인간과 인간성의 미래에 관한 질문이 의혹에 처해 있다는 것이며 또한 비판적으로 다루어져 함을 말한다. 315 허무주의는 그것 자체보다는 어떤 도래를 예고함으로써 늘 미래에 대해 말하며, 그러한 사건이 없이는 성장이 불가능하다. 허무주의는 우리가 가정하는 모든 가치들과 나란히 내재해 온 필수적인 학습경험으로서 우리에게 도달한다. 따라서 허무주의가 그렇게 낯선 문제란 말인가? 니체는 근대의 가장 보편적인 신호는 인간이 터무니없는 범위의 것에 대해 자신만의 관점을 가진 채로 위엄을 잃어 왔다.는 사실에 있다고 쓴다. 317

[ ] 역사에 관한 기계적인 철학은 남근중심주의적인 역사의 대상이자 목적인 인간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기계들이 역사를 만드는 인간과 대비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거기에는 역사의 주체나 행위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계들이 인류의 발명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이야기이다. 그러한 발명의 시간을 말하기 위해서는 탈인간이 되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잉여의 논리를 좇는다는 것은 선과 악에 대한 긍정을 포함하여 선과 악을 뛰어넘어 도덕 외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한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모든 종류의 자연, 기계 그리고 기술을 넘어서는 총체적인 통제를 향한 편애를 동반한 목적론이라는 파우스트적인 개념화로부터, 기술의 생성의 동반한느 우리의 기계적 노예화와 그에 연루된 지각불가능성과 계산불가능성으로의 이동을 긍정하고 참여시킨다. 318, 319

[ ] 몸체가 없는 정보의 통치는 시간이라는 사건의 종말 이외의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늘날 철학의 과업은 단지 사건의 비사건성에 대한 공표를 산출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 만일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향수와 한탄을 넘어 살고자 한 것이 있다면, 지금 그는 확실히 시간의 잔여를 위해 잃어버린 사건의 시간을 경건하게 애도함으로써 그러한 조건을 확립했을 것이다. 327리오타르의 허구적인 설명에 수반되는 진정한 문제는 그것이 생기론과 목적론을 자본의 탓으로 돌린다는 데에 있다. 331

[ ] 기계들 자체를 취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설명하는 것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늘 기술적인 것만큼이 너무나도 사회적이라고 하는 장치와 배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특정한 에너지의 원천 및 동력원의 활용과 개발은 그러한 역사적 우연성과 속박이 결과로서, 이는 자본주의적 세계 경제라는 사회적 기계의 결정요인이 핵심적이다. 333 발전에 관한 논의는 자연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 정치에 관한 논의인 것이다. 334

[ ] 보드리야르, 자본은 사회적 관계를 지닌 악마적 마술로서 도덕성이라고 하는 어떤 탈역사적 기준이나 경제적인 합리성에 따라 고발당하지 않는, 바로 그러한 응답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 도전한다. 자본은 영원한 반복이라고 하는 생산논리의 덫에 걸린 잠재적인 기계로 작동한다./마수미에 따르면 자본은 그 해위가 대상에 뿌리를 둔 것이라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내적 동력이라고 하는 미래적 과정에 생산물을 변형시킨다는 의미에서 잠재적으로 작동한다./포스트모던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의 삶은 잠재적인 양식과 변형적 경향이라는 견지로부터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335 혹은 어떤 단계에서도 스스로를 변형시키는 과정이다. 336 자본주의적 조건인 후자에 있어서 인간 존재는 더 이상 거대한 기계의 구성요소가 아니라, 노예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종속되고 중개된 노동자들이자 소비자들인 것이다. 337

[ ] 자본주의 체계의 진화는 그것이 불가피하게 일으키는 총체적인 통제가 착각이라는 기계적 분석을 통해 드러날 때 탈물화될 수 있다. 338 괴물의 손에 있는 불가피하고 비극적인 죽음에 직면하게 됨으로써 기계, 기계적으로 생성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됨을 긍정하는 문제가 된다. 340

[ ] 윌러스틴은 모순이 단순한 대립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전이의 사례임을 강조하는 입장을 견지한다. 340

[ ] 자본주의적 기게의 분열증적 논리 하에서 산출된 분자적 흐름들과 기계적인 변형들을 단번에 통제함으로써, 통화 공급을 단번에 조절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343

[ ] 시몽동은 살아있는 계들의 생성을 사유하는 방편으로서 준안정적인 평형상태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353

[ ] 우리에게 이 삶과 죽음의 잔혹극이 낳는 효과는 단순한 감염이 아니라 돌림병 사건과도 같은 잔혹함과 사악함이라고 하는 잠복해 있는 암류로의 외화를 향해 재촉하는 폭로인 것이다. 364


볕뉘

맑스는 알튀세르부터 프레드릭 제임슨, 테리 이글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유, 확장되어와서 이론의 지반을 풍요롭게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니체는 드물다 싶었는데, 여러 철학의 흐름과 버무려져서 나왔다 싶다. 천천히 따라가면 의외로 벅차고 흘러내리거나 번지는 것이 있을 것 같다. 음미하는 독서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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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치적 감정

 

 

  믿고 찾는 저자의 책이 나왔다. 급속한 행보에 놀라기도 했는데 말미, 일련의 지적 흐름를 조율하던 출판기획자의 죽음이 있었던 셈이다. 감정의 격동 3부작, 칸트가 선험성을 기반으로 이성의 역작을 만들었다면, 저자는 감정의 코드로 재구축하고 싶어했고 천여쪽이 넘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 이후에도 분노, 혐오, 수치심 관련 저작들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 책의 모두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으로 시작한다. 남성-이성-적대의 틀로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감정-배려의 연주로 풀어나가는 전형의 시도로 모차르트의 작품을 들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은 텍스트에 가까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시민종교, 인간종교. 공적감정을 갖는 시민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 꼼꼼이 짚어내고 있다. 그리고 남성-이성의 학문이 놓쳤던 여러 틀을 수선해내고 감정의 새끈으로 보수해서 튼튼한 동아줄을 만들고 있다. 

 

그녀는 이러한 이론적 검토로 인간을 초월하고자 하는 감정도 유아적인 발상에 다름아님을 동물과 인간의 감정의 대유에서 찾아내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펀홈, 당신엄마 맞아의 저자가 유아기의 애착과 과정을 다룬 도널드 위니캇의 연구에 많은 근거를 대고 있기도 하다. 시적 정의에서 시가 갖는 힘이 어떠한 것인지 미적 결정이 얼마나 다양한 시각을 확보하며 조화롭게 만들 수 있는지 말한다. 이 책에서도 비극과 희극, 그것이 공적감정을 위해 얼마나 절실할 것인지 잘 밝혀내고 있기도 하다.

 

 

 

 

 

 

 

 

 

 

 

2. 잡초 생태학

 

 

  저자의 책들을 동시에 보고 있다. 겹치기도 하지만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약자들의 모습들이 감탄스럽게도 하다. 가늘고 길게, 추울 때 더 열심히... ...주류의 이야기가 아니라 간간히 농담삼아 하는 이야기들. 그 방편의 진실의 방편이자 삶의 지혜라는 것. 새삼스럽지만 묶어서 분류하고 나누는 것이 때로는 좋지 않은 습관이란 것을, 세세히 살펴보고 있는 그대로를 보려고 하는 것이 훨씬 풍요롭게 볼 수 있는 방법이란 것을 풀들은 하나하나 말하고 있다.

 

 

 

 

 

 

 

 

 

 

 

 

 

 

 

3. 미셸 투르니에

  이 책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116개의 닮음과 다름의 상상력. 상하 위아래 존재 비존재 신무신의 고립된 반대개념이 아니라 여기서 언급하는 반대 개념은 상반된 대립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 그는 신과 악마, 존재와 무, 선험과 경험, 포크와 스푼, 황소와 말, 시와 산문 등등 그는 산문의 묘미를 그가 이루지 못한 철학교수의 꿈이 곳곳에 스며있기도 하다. 벽으로 가득차 어쩌지 못하는 지금의 산과 같은 대립을 곁에 다른 개념들을 슬며시 집어넣으면서 풍부해지고 오묘해진다. 읽다보면 어느새 설득당하고 마는 마술의 힘과 같은 책이다. 어쩌면 우리의 사고습관과 행태가 극도로 단순해져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철학을 알아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접근하기보다 삶의 여러 결을 느끼는 척도로 고민해보고 싶다면 어김없이 추천해주고 싶기도 하다. 

 

돈후안과 카사노바. 그는 이 짧은 산문에서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 오페라 대본 작성시 돈후안이 아니라 카사노바의 창작을 염두에 두었다고 흘린다.

 

 

 

 

 

 

 

 

 

 

 

 

 

4. 화영시경, 돈후안

 

 

 

 화영시경, 시와 그림글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독특한 장르의 책이다. 수필가인 저자는 시각이 불편한 분들을 함께 주석까지 읽는 음성도서 작업을 오랫동안 해오시고 영화도 같이 보기도 한다. 투르니에에서 점자책의 관능미대목이 나와 실제도 그런가 되물어봤다. 하지만 그것은 상상에 가까운 현실에 근거하지 않는 묘사라고 했다.

 

 서남유럽사에서는 돈후안이 자주 언급된다. 선을 넘나드는 그의 삶은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지금여기를 너머서는 장치로서 드나들기도 한다. 그것은 지금여기의 삶이 늘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맴돌기 때문일 것이다. 까뮈도 그의 작품에서 돈후안이란 인물을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의 삶은 외줄을 타려고도 하지 않고 올라서지도 않으려한다. 하물며 떨어지면 또 올라갈 수 있는 안전망을 확보해보려는 상상력 조차도 없는 것 같다. 그렇게 맴맴 도는 이상 예술가들이 그러한 것처럼 작가들은 여전히 변주하려 들 것이다. 삶과 사회가 바뀌는 것과 크게 상관?없이 그럴 지도 모른다. 우리는 작품 속에서 무엇을 찾는가? 찾아낸 것들은 어떻게 섞이는가? 섞인 것은 우리 일상의 온도를 올릴 수 있는가? 더구나 우리의 삶의 농도는 스미며 다르게 필 수 있을까?

 

 

 

 

 

 

 

 

 

 

 

 

5. 이원재, 존 러스킨

  임금이라는 것은 일을해야 받는다는 생각이 적절한가? 드로잉과 건축, 사회 사상가인 존 러스킨은 경제에서 훌륭한 저작을 남겨놓았다. 제목처럼 일을 종료한 시점부근에 와서 일한 사람에게 똑같은 일당을 주는 주인에게 하인들은 되묻는다. 합당하지 않다고...당신들에게 합당한 일당을 주었으므로 이것은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억울해 할 일도 아니라고 말이다. 그는 일터를 빗대어 말하면 부자가 이익만 남기려고 하면, 이익을 남길 수 없는 것이 상식이라고 되짚는다.  사람들의 감정과 다른 것을 헤아리지 않으면 그 조직은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고 한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학자도 지금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며 경제를 위해서도 기본소득 개념을 말하고 있다한다. 의성의 한 곳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지역이 일인당 천만원이상의 예산이 지출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면에서 지금상황을 여러가지 각도로 되짚어볼 필요가 절실하다. 좋은 텍스트로 추천할 만하다. 나-우리의 평균적인 삶의 경제는 최소한 느끼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상위 20%가 1%를 탓하며 자신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입자의 비율이 7.*% 남짓하다고 한다. 우리의 삶은 가늠하고 있는 것이다.

 

토지와 인간을 발라낸 경제, 그 악마의 맷돌을 말하는 칼 폴라니, 러스킨을 적극 번역하여 알린 간디, 미국의 현실을 위의 취지에서 말하고 있는 20 대 80의 사회를 참조할 만하다.

 

 

 

 

 

 

 

 

 

 

 

 

 

 

6. 시민의 물리학 외(유상균, 야마모토 이시타가)

 

 

 

 

 

 

 

 

 

 

 

 

제도밖의 연구, 공부란 무엇일까. 편안하고 쉬운 자리를 탐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분야와 그 외부, 사회와 관계를 이어내는 작업. 본연의 물리학을 도외시 않으면서 삶을 접붙혀 나가는 노력들이 읽힌다. 과학의 탄생은 일본 전공투 의장을 하셨던 분이 연구소를 나와 학원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십여년만에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서 발표한 작업 결과물이다. 뉴튼의 만유인력, 중력이 불쑥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연금술, 마술...본원적으로는 자력에 연관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7. 삶이 있는 도시디자인

 

 

 

 

 

 

 

 

 

 

 

 

 

 건축과 풍화의 저자 조성룡건축가의 작품인 어린이대공원 꿈마루를 보고 왔다. 여기에 있는 이 책들도 저자 강연에서 언질을 받은 책이다. 건축과 사회사를 읽고, 이어서 이렇게 읽고 보고 있는 셈이다. 어떻게 사람을 이어주고 활기차게 만들 수 있을까? 만들어지는 도시는 대표적인 것이 중세의 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참여하고 보고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기획의 요점들이 너무도 단순하고 쉽지만, 어느 새 우리 건축은 정작 중요한 것은 다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말미 책은 우리만의 독특함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한데 미술비평가의 우리 미에 대한 탐구들이 인상깊다 싶다. 좀더 세독을 해야 할 듯싶다.

 

 

8. 유라시아 견문

 

 

 

 

 

 

 

 

 

 

 

 

동남아시아와 중국을 세계테마기행과 함께 보고 있다. 역사의 여러 지층들을 겹쳐놓아 흥미진진해진다. 더구나 막히는 부분은 그 방면의 권위자와 대담이 섞여있어 흥미롭다. 실크로드와 면화길... ...중국 신장과 위구르까지 찾고 보고 느끼는 맛이 새록새록 재미있다. 물론 이렇게 영상 리터러시는 대전아트시네마 주인장의 코멘트를 들었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상을 담당하는 이들은 가보지 않고도 훤히 아는 놀라움이 중복되었기도 하다.

 

 

 

9. 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박홍규)

 

 

 

 

 

 

 

 

 

 

 

 

 

 

 

 

 

 

 

 

 

 

 

 

** 이 달의 베스트

 

 

 

 

 

 

 

 

 

 

 

 

 

 

  모임 가운데 베스트인 책

  <<어머니의 나라>>는 모계사회인 중국 모소족의 이야기이기기도 하고,  돈주앙이 어김없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책읽기가 이어지기도 한다. OBS 취재 영상이 나와있기도 하다. 루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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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9 1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울 2020-01-09 19:31   좋아요 0 | URL
아, 감사요. 수정할께요^^
 



마음의 생태학 위기

1.

[ ] ‘다른 사람에게 선한 행동을 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미미하고 상세한 일에서 선을 행해야 한다. 일반적인 선은 깡패, 위선자, 아첨꾼들의 변명이다.‘ 일반적인 선이란 자라는 세대에겐 위선의 냄새를 풍긴다. 712

[ ] 인식론의 병리:

[ ] 우리 마음은 시차가 심도 있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필요한 수학적 계산을 하도록 훈련되어 있거나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그리고 훈련을 위한 많은 근거들이 존재한다. 마음은 결단이나 여러분의 의식 없이 이런 묘기를 수행한다. 여러분은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 이 예를 내가 말하려는 오류의 패러다임으로 사용학 싶다. 그리고 이것은 인식론적 오류의 만질 수 없는 성결과 인식론적 습관을 변화시키기 어렵다는 점을 예증한다. 721 일상적인 사고 속에 나는 여러분을 본다.....정신이상은 이를 너머서는 정신 요법이나 어떤 커다란 새로운 경험으로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 721

[ ] 마음이란: 1. 시스템은 차이들을 가지고, 차이들을 근거로 작동할 것이다. 2. 시스템은 차이나 차이의 변형이 전달되는 통로의 닫힌 고리 또는 네트워크로 구성될 것이다.(뉴런에 전달되는 것은 충동이 아니라 차이에 관한 소식이다.) 3. 시스템 내의 많은 사건들은 방아쇠를 당기는 부분의 충격보다는 반응하는 부분에 의해 활성화될 것이다. 4. 시스템은 항상성을 향하거나 폭주하는 방향으로 자기-교정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자기-교정은 시행착오를 내포한다. 724

[ ] 이제 컴퓨터가 생각을 하느냐는 문제를 잠시 살펴보자.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생각하고‘ ‘시행착오‘에 참여하는 것은 인간 더하기 컴퓨터 더하기 환경이다. 그리고 인간과 컴퓨터와 환경 사이의 선은 순전히 인위적인 가상의 선이다. 그 선은 사고하는 시스템의 경계가 아니다. 생각하는 것은 시행착오에 참여하는 전체 시스템이며, 그것은 인간 더하기 환경이다. 723

[ ] 이제 우리는 서구 문명의 인식론적 오류들의 일부를 보기 시작한다. 19세기 중반 영국의 일반적인 사고 풍토에 따라 다윈은 자연선택과 진화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는데, 그 이론에서 생존 단위는 가계, 종, 하부 종, 또는 그와 비슷한 것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오늘날 이것이 실제 생물학적 세계에서의 생존 단위가 아니라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생존 단위는 유기체 더하기 환경이다. 우리는 쓰라린 경험을 통해 자신의 환경을 파괴하는 유기체는 자신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배우고 있다. 만약 이제 우리가 다윈의 생존 단위를 수정해서 환경과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포함한다면, 아주 이상하고 놀라운 동일성이 출현할 것이다. 진화의 생존 단위는 마음의 단위와 동일한 것으로 드러난다. 725

[ ] 오늘날 육체와 분리되고, 사회와 분리되고, 자연과도 분리되어 있는 총체적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믿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미신‘이라고 말할 사람들을 위해, 나는 그런 미신과 함께하는 사고 습관과 사고방식이 아직도 그들의 머릿속에 있으며 아직도 그들의 사고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는 것을 즉시 증명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장담한다. 여러분은 나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지적으로 알 수 있지만, 그런데도 여러분이 나를 볼 수 있다는 관념은 여전히 여러분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 728

[ ] 권력은 타락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것은 난센스다. 사실은 권력에 대한 관념이 타락하는 것이다. 권력은 권력을 믿는 사람을 가장 빨리 타락시키며, 권력을 가장 원하는 것도 이런 자들이다. 분명 우리의 민주주의 시스템은 권력을 갈망하는 자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으며, 권력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권력을 피할 모든 기회를 제공한다. 만약 권력을 믿고 원하는 자들을 타락시킨다면, 그것은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한 제도이다. 아마 일방적인 권력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하지만 권력의 신화는 물론 매우 막강한 신화이며, 아마 이 세상 모든사람들이 많든 적든 그 신화를 믿을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믿는다면 그만큼 신화는 자기-정당화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인식론적으로 정신이상이며, 필연적으로 여러 종류의 재앙으로 나아간다. 729, 730


2.

생태학적 위기의 근원


[ ]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현재의 많은 위협들은 모두 세 가지 근본 원인에 기인한다. 1. 기술의 진보 2. 인구 증가 3. 서구 문화의 사고방식과 태도에서의 어떤 오류들, 우리의 ‘가치들‘이 잘못되어 있다. 736 우리는 이 세 가지 근본 요소 모두가 우리의 세계를 파괴하는 필요조건들이라고 믿는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그중 하나를 교정하면 우리를 구할 수 있으리라고 낙관적으로 믿고 있다. 736

[ ] 현재의 시점에서 가장 치명적인 형태로 우리의 문명을 지배하는 생각들은 산업 혁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환경에 적대적인 우리 2. 다른 사람과 적대적인 우리 3.문제는 개인 또는 개별회사나 개별국가다. 4. 우리는 환경을 일방적으로 통제할 수 있으며, 그 통제를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 5. 우리는 무핞히 팽차하는 ‘개척지‘ 속에 살고 있다. 6. 경제 결정론은 상식이다. 7. 기술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지난 150년 동안의 우리 과학 기술의 위대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파괴적인 위업에 의해 잘못된 것임이 입증되었다. 게다가 이런 생각들은 현대 생태학 이론하에서도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환경과 싸워서 승리하는 피조물은 자신을 파괴한다. 739


3.

도시 문명의 생태학과 융통성


[ ] 생태학자의 목표는 융통성을 증진시키는 것이며, 이런 범위 내에서 그는 대부분의 복지 계획 입안자들(법적 통제를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보다 덜 전제 군주적인 반면에, 그는 또한 이미 존재하거나 창출될 수 있는 융통성을 보호하기 위한 권위도 행사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점(대체할 수 없는 자연 자원의 문제)에서, 그의 권고는 전제 군주적이어야 한다. 사회적 융통성은 석유나 티타늄만큼 귀중한 자원이며, 적절한 방식으로 예산이 짜여야 하며, 필요한 변화를 위해 쓰여야(지방처럼) 한다. 대체로 융통성을 ‘소비‘하는 것은 문명 내의 하부 시스템의 재생(즉 증대) 때문이므로, 결국 이 하부 시스템들이 반드시 통제되어야 한다...융통성은 구속받지 않은 변화의 잠재성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 ] 우리는 적극적인 요구보다는 금지를 선호하는 문명 속에서 살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침해하는 변수들에 대항하는 법률(예컨대 독점금지법)을 제정하려고 노력하며, 침해하는 권위에 대해 법률적으로 이름뿐인 처벌을 함으로써 ‘시민의 자유‘를 지키려 한다. 우리는 어떤 침해를 금지하려고 하지만, 자유와 융통성에 대해 알고, 그 자유와 융통성을 좀더 자루 행사하도록 사람들을 격려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 모른다. 우리 문명에서는, 육체의 변수들을 극한값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육체의 변수들에 많은 융통성을 보유하는 것이 원래 기능인 생리적 육체의 운동조차 ‘관객의 스포츠‘가 되었으며, 사회 규범의 융통성도 똑같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비정상적인 행동을 대신하는 경험을 하려고 영화관이나 법정에 간다. 또는 신문을 읽는다. 754

[ ] 성서에서 가장 확실한 말은 바오로가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않는다˝라고 한 말이며, 이 말은 인간과 그의 생태계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공해와 착취라는 독특한 죄악이 그저 사소한 것이었을 뿐이라거나,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다거나, 최선의 목표를 가지고 저질러진 것이었다고 변명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또는 ‘만약 내가 하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가 했을 것이다‘라는 변명도 마찬가지다. 생태학의 과정은 조롱당하지 않는다. 산중의 사자가 사슴을 죽이는 것은 풀이 과도하게 뜯기는 것으로부터 풀밭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 어떻게 우리의 생태학적 추론들을 생태학적으로 ‘좋다‘고 여겨지는 방향으로 우리가 영향을 주려는 사람에게 전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그 자체로 생태학적인 문제다. 우리는 우리가 계획하는 생태계 밖에 있지 않다. 우리는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생태계의 일부다. 755

볕뉘.

0. 정독할 요량이었지만 메타 이야기를 읽고, 두꺼워 호흡을 조절하다가 그래도 마지막 6장이 하고자할 마음들을 잘 파악할 듯 싶어 읽다.

1. 이 이야기들은 1966 - 1970년에 발표한 글들이다. 하지만 무척이나 간결하면서도 놓치고 있는 우리들의 관점을 예리하게 헤집고 있다. 물론 저자는 그때 그때 느낀 점들 정리한 것들이 향하는 방향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을 집필한 이유도 그 때문이고 무엇이 문제인지 그 관점에서 자신의 의견을 최대한 집약하려고 한 듯싶다.

2. 마음, 기계, 기술에 대한 이야기도 좋은 참조가 되지만, 3절 융통성이란 부분에 대한 그의 강조는 되새겨볼 만하다. 행정이나 법제화자체가 문제가 된다고 하는데 그것이 금지를 위주로 하기때문에 사회가 더욱 경직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을 짚고 있다. 그러면서 그 해결책으로 실험예산, 외줄타기의 심정으로 새로운 실험으로서 행정이 반드시 요소요소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줄타기 밑의 안전망, 실패해도 떨어져도 다시 시할 수 있는 시스템의 구축이 필요하다고 한다.

3. 그는 시민의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문제를 개선시키려는 행정이나 법제화를 실험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스포츠의 관객처럼, 영화나 신문을 소비하면서 해소한다는 점을 뼈아프게 짚고있다. 운동은 관람하면서 좋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문제는 영화를 관전하면서 풀리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이야기하듯이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 것을, 풀이 없어지는 것을 막기위해서 합리화시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아닌가 되묻고 있다.

4. 관계는 나 이전에 있다는 말, 유기체는 환경으로 더해져 있다는 말. 그 차이가 마음이고 거꾸로 우리의 생태를 흔들고 있는 그물이 무엇이냐고 되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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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0-01-09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울님 늦었지만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여울 2020-01-09 15:57   좋아요 0 | URL
늘 감사합니다. 복 많이 받으실거예요^^
 


0. 익숙한 곳에서 몸에 익은 듯 전원을 연결하고 브루투스 자판을 두드린다. 옆에 막 나온 책들은 금방 식기라도 할 듯, 어서 봐달라고 재촉을 한다. 오늘은 금방 가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자정은 활처럼 휘어져 한 것 제 몸을 늘리다가 새벽쯤 황급히 시위를 떠나는 화살을 낳을지도 모를 일이다.

1.

[ ] 사고 과정 전체는 여전히 우리에게 불가사의로 남아 있지만, 나는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려는 시도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밝혀내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튜링, 1951 11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2.

[ ] 만진다는 것은 ‘피부에 닿아서 깨닫는다‘는 촉각의 감각을 말한다. 12 촉각은 무엇보다 인간의 감정이나 정서적 측면과 직결되기에 나는 촉각 그 자체로 예술적이라고 생각한다. 13 춤, 어떤 형태로 가기 이전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춤은 시작되며, 가장 본질적인 것은 내면에 깃들어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바깥으로 밀려 나오면 비로소 형태가 된다 34 세계의 살, 우리, 타자, 세계는 모두 살이라는 존재의 원소를 토대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자아와 타자는 서로 얽혀 있다. 살은 가역적이기에 본다는 것은 보인다는 것이고 만지는 것은 만져진다는 것, 다시 말해서 몸은 ‘감각되는 감각하는 것‘으로 존재한다. 그리하여 봄과 보임, 만짐과 만져짐 사이에 얽힘과 교차가 일어난다. 그는 정신과 몸, 나와 타자의 이분법을 넘어 작동되는 몸을 통해 인간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만들어 간다. 37 건축, 촉각이 가지는 근접성, 친밀성, 진실성, 동일시, 애정의 측면이 배제되면 인간은 무관심, 소외감, 외면성의 영역으로 밀려난다. 수영하는 사람이 물의 흐름을 자신의 피부로 감지하듯, 이미지의 흐름은 강화된 촉감적 감각으로서 이해해야만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다. 38 접촉 경험에 실패한 아이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 행동적으로 서툰 인간으로 성장함을 지적하면서 타인과 생애 첫 의사소통을 시작할 때 인간이 촉각으로 통한 탐색으로 첫발을 내딛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킨 바 있다. 만약 촉각적 경험이 부족하다면 기지 tact를 갖춘 존재로 발달하는 데 실패하고 타인의 욕구에 둔감하며 대처하는 데 서툰 존재로 성장한다고 애슐리 몬터규 ashely montagu의 책 <<터칭>>에서 언급한다. 63 <<촉각, 그 소외된 감각의 반격>>, 유려한 에서


3.

[ ] 베이트슨은 마음의 생태학이란 물질적 형태의 사물들 속에 구현된 패턴, 정보, 관념의 생태학리라고 주장했다...마음이라는 것에 자기-교정적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하고 반응하는 능력을 가진 그 무엇임이 분명했다. 마음은 과정과 패턴을 위해 배열된 다수의 물질적 부분들로 구성된 것이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마음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자신의 물질적 기초에서 분리될 수 없으며, 육체에서 마음을 분리하거나 물질에서 마음을 분리하는 전통적 이원론은 잘못된 것이다. 마음은 다수의 유기체들뿐만 아니라 살아 있지 않은 요소들도 포함할 수 있으며, 잠깐뿐만 아니라 장기간 동안 기능할 수도 있으며, 반드시 피부의 외피와 의식 같은 경계에 의해 정의될 필요는 없다. 단 하나의 유기체보다 그 이상을 포함하는 정신시스템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생존의 단위가 언제나 유기체 더하기 환경이라는 주장으로 그레고리를 이끌었다. 14 그레골의 마음의 생태학을 인식론적 생태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을 주로 물질주의적인 대학의 생태학과 구별시켜준다. 20 개체에 앞서 관계가 있다./오늘날 육체와 분리되고, 사회와 분리되고, 자연과도 분리되어 있는 총체적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믿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미신‘이라고 말할 사람들을 위해, 나는 그런 미신과 함께하는 사고 습관과 사고방식이 아직도 그들의 머릿속에 있으며 아직도 그들 사고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는 것을 즉시 증명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장담할 수 있다. 여러분은 나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지적으로는 알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나를 볼 수 있다는 관념은 여전히 여러분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 같은 식으로 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잘못된 것으로 알고 있는 인식론에 지배당하고 있다. <<마음의 생태학>>, 그레고리 베이트슨 표지에서

4.

[ ] 좌-우. 근대-전근대.서구-비서구. 3중의 분단체제를 넘어서는 ‘유라시아/사‘의 재구성. 새 길을 내고 싶었다.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공간의 장벽을 허물고, 전통과 근대 사이의 시간적 단층을 돌파해내고 싶었다. 유라시아의 길을 걷고 싶었다. <<유라시아 견문>> , 이병한


-1. 흔적을 남기는 일도 오래된 기억같다. 여러 책들 사이 책갈피에 시선을 모으게 된다. 책들은 읽는 사이, 또 읽을 책들을 낳고 만다.
-2. 일터 일들도 뒷그림자를 남기고 있다. 말미의 불안감. 뭔가 챙겨야 할 일들이 대기하고 있는 기분이다.
-3. 친구가 다녀갔다. 이야기는 자꾸 말을 재촉하는 듯 싶었다. 밀린 이야기들을 했고, 이미 달려가거나 붙어가버린 몸들의 흔적을 물끄러미 봐야할 듯하다.

5. 몇 차례 만남들은 다른 책읽기를 요구한다 싶다. 이미 깊숙하게 읽고 있는 듯싶다. 구석구석을 걷고 있는지 모르겠다. 걷다보면 어디쯤 가 있을 것이다. 숨이 차더라도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는 곳에서 머물러야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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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 깨달음과 즐거움 간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둘 모두를 그대로 드러내는 힘은 말년의 양식의 특징이다. 반대 방향으로 팽팽하게 맞서는 두 힘을 긴장 속에 묶어둘 수 있는 것은,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오류 가능성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노년과 망명으로 인해 신중한 확신을 얻은 예술가가 가진 성숙한 주체성이다. 195

[ ] 그리고 그 땅이 설령 초라하다 할지라도 이타카는 자네를 속이지 않을 것이니, 많은 경험을 쌓아 현자가 되도록 하게. 그때가 되면 이타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네. 193 이상 7. 그 밖의 말년의 양식들에서

 



6.

[ ] 굴드의 연주는 워낙 독특해서 청자의 환심을 사거나 고독한 황홀경과 일상의 혼잡함사이의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연주가 의식적으로 노리는 것은 합리적이면서 동시에 즐거운 예술, 연주를 통해 작품이 여전히 작곡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술을 대표하는 비평적 모델이 되려는 것이다. 175

[ ] 굴드가 몇 차례 중요한 기회를 통해, 자신이 연주라려고 선택한 바흐의 작품엔 뭔가를 생성해내는 뿌리 같은 면이 있다고 언급한 사실이다... ...굴드 본인은 생전의 청중과 사후의 청중은 물론 그를 개인적으로 알았던 사람에게도 대단히 고립된 인물, 독신에 우울증에 괴상한 습관이 있고 제멋대로이고 지적이고 낯선 인물로 여겨졌다. 어떤 의미로 보든 굴드는 어떤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았고, 영향을 받은 음악가나 사상가도 없다. 그에 대한 모든 것이 관습적인 영토에서 벗어나 연주를 통해 자신의 거주지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초연한 남자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굴드가 바흐 음악을 풍성한 열매를 맺는 창조성의 보고로 여겼으면서 정작 자신은 자손도 없이 고립된 생활을 했던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174

[ ] 바흐의 음악이 기적적이라는 생각은 뒤로 물리고, 그 대신 바흐가 어떤 규칙은 지켜야 할 것으로 어떤 규칙은 무시해도 좋은 것으로 간주하고, 어떤 한계는 신성하게 받아들이지만 어떤 한계는 구속적이라며 버리고 어떤 기법은 생산적으로 보지만 어떤 기법은 쓸모없다고 무시하고, 어떤 아이디어는 존중하지만 어떤 아이디어는 낡은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을 추적해보는 것이 더 생산적이면서 바흐의 자발적인 창안을 가정하는 미적모델로 존중하는 태도일 것이다. 171

[ ] 바흐 연주는 드러냄인 동시에 들어올림이 된다. 바흐에 있어 특정한 종류의 창안을 연주자가 포착하여 현대적 관점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굴드가 이런 식으로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선견지명과 본능을 발휘하여 명인기적이면서 한편 담론적인 의미에서 지적이기도 한 다성음악 작법에 드러난 바흐의 창조성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169

[ ] 굴드는 활동 초창기부터 바흐의 건반악기 곡들이 한 가지 악기만을 위해 작곡된 것이 아니라 오르간, 하프시코드, 피아노 등 여러 악기로 연주하게끔 작곡되었거나, 푸가의 기법처럼 어떤 악기를 위해서도 작곡된 곡이 아님을 강조했다. 따라서 바흐는 관례나 관습, 혹은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정치적 올바름과 분리된 채로 연주해도 무방하며, 굴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것들을 무시해왔다. 둘째 당대의 바흐는 옛 교회 형식과 엄격한 대위법 규칙으로 회귀하려는 시대착오적인 작곡가이자 연주자였으면서, 동시에 고난도 작곡 기법과 과감한 반음계를 종종 구사했던 대담한 현대적 작곡가이기도 했다. ...굴드의 연주는 낭만주의 이전의 바흐로 돌아갔으며, 음악사운드를 소비의 대상이 아닌 엄밀한 분석의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온전히 현대적이다. 167

[ ] 굴드는 젊은 졸업생들에게 음악이란 ˝체계적인 사고를 순전히 인공적으로 구성한 산물˝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여기서 인공적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로 ˝이면과 관련된 것˝을 나타낸다. ˝부분들로 나뉘 수 있는 일용품˝이 전혀 아니라 ˝부정을 통해 잘려나간 것, 부정의 공백에 맞설 수 있는 아주 작은 담보물˝이다. 그는 계속해서 우리가 정중해야 한다고, 다시 말해 부정이 체계와 비교할 때 얼마나 인상적인지 적절히 설명해야 하며, 이런 점을 명심할 때에만 졸업생들이 ˝창조적인 생각의 출처인 창안력을 계속적으로 공급받아˝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창안은 체계 내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서 체계 바깥에 있는 부정에 조심스럽게 몸을 담그는 것이기 때문이다.˝ 165

[ ] 굴드가 1964년 경력의 정점에서 연주회 무대를 포기한 것은, 그가 여러 차례 밝혔듯이 아도르노가 그토록 거부했던 인공성과 왜곡을 피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었다. 굴드의 연주 스타일이 최상의 상황일 때면 아도르노가 토스카니니를 공박하며 말했던 원자화되고 앙상한 음악성과 정반대의 효과를 나타낸다....굴드는 콘서트 무대에서는 어쩔 수 없는 왜곡이 일어난다면 이를 피했다. 무대에서는 5층 발코니에 앉은 청중의 주목도 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무대를 완전히 떠났다. 164 이상 6. 지식인 비르투오소 에서

5.

[ ] 베토벤, 아도르노, 슈트라우스, 람페두사, 비스콘디는 - 이런 점에서는 글렌 굴드와 장 주네도 마찬가지다 - 음악 비지니스, 출판, 영화, 저널리즘이라는, 20세기 서구 문화를 확산시킨 거대한 규약들의 힘을 업신여기고 이용한다. 그들은 자의식이 무척 강하고 전문기술 또한 뛰어나지만, 그들의 작품에서 수줍어하는 기색은 찾아보기 어렵다. 비록 나이는 먹었지만 으레 수반되기 마련인 평온함이나 성숙함은 필요 없다는 듯이, 사랑스럽게 굴거나 환심을 사려는 생각은 없다는 듯이 군다. 그러나 이들 누구도 필멸을 부인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의 주제로 계속 돌아옴으로써 관습적인 언어와 미적인 것을 훼손하고 그 한계를 묘하게 넓힌다. 154

[ ] 아도르노는 베토벤이 칸트처럼 주관의 관점에서 궁극적인 존재론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대담한 주장을 한다. 즉, 그 작품은 사실상 ˝누군가가 속임수 없이 절대자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노래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이어 아도르노는 장엄미사의 양식적 특징과 의고주의를 풍부한 상상력을 가동하여 분석한다. 음악의 움직임은 ˝표현되지 않은, 규정되지 않은 무언가를 향해˝ 뒷걸으미고, 그렇게해서 나온 딱딱한 양식과 애매함은 작품에 뭔가 마무리되지 않은 듯한 신비한 특징을 부여한다. 주관과 객관의 완연한 조화를 상실한 - 여기서 아도르노는 화해 불가능한, 영원히 풀리지 않는 내적 대립이 말년의 베토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임을 재차 확인한다. 이는 사실상 ˝배제의 작품, 영원한 포기의....작품이다.˝ 129 이상 5. 사라지지 않는 구질서의 매력에서

4.

[ ] 주네를 읽는다는 것은 결국 반항과 열정, 죽음과 재생이 서로 긴밀하게 얽힌 곳으로 끊임없이 돌아가는,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그의 독특한 감수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118

[ ] 주네는 늘 언어를 정체성과 진술을 나타내는 것에서 위반적이고 파괴적이며 심지어는 의도적으로 사악하기까지 한 배반의 양태로 변형시키고자 한다. ˝우리가 이런 ‘변형‘에서 ‘배반‘해야 할 명백한 필요성을 본다면, 이제 우리는 바람직한 것, 어쩌면 성애의 흥분에 필적할 만한 것을 배반하고 싶어질 것이다. 배반의 황홀함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황홀감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해도 무방하다. ...주네의 글쓰기 목표는 맹렬한 반율법주의 성향을 지키는 것이다. 118

[ ] 정체성은 우리가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혹은 영적 존재로서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어떤 것이다. 문화의 논리와 가족의 논리가 여기에 더해져서 정체성의 위력을 증대시킨다. 주네처럼 비행을 저지르고 격리되고, 또 권위를 위반하는 재능이 있고 이를 즐기는 사람은 그로 인해 자신에게 부과된 정체성의 희생자이므로, 그에게 정체성은 결연하게 반대해야 할 그 무엇이다....따라서 주네는 정체성을 넘나드는 여행자, 혁명적이고 끊임없이 자신과 무관한 대의명분에 기껑 몸 바치려고 밖으로 떠나는 관광객이다. 120

[ ] 주네는 정체성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적대적인 인물이다. 그의 모든 노력은 엄정하면서도 우아하며, 가장 정연한 프랑스어 문체라고 했던 양식으로 표현된다. 그의 글에서는 단정치 못하거나 산만한 구석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주네의 유목적 에너지는 정확하고 우아한 언어 속에 들어앉아 있다. 낭만적인 희망도 없고 흔히들 내비치는 불안도 없이 궤적을 그리며 돌 뿐이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천재는 절망을 통해 단련되는 것이다.˝ 121

[ ] 주네는 자신과 그의 인물들을 데려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죽음이 작품 속의 ‘폭발적으로 타오르는‘ 격동의 소란에 개입하여 저지하거나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런 격동의 소란이야말로 작품의 핵심이자 신비스러운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영락없는 종교적 확신이 막판에 그토록 중요하게 부각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주네에게 악마든 신이든 절대자는 인간의 정체성이나 인격화된 신으로는 인식될 수 없고, 오직 모든 것이 말해지고 행해진 뒤에도 가라앉지 않는 것, 포섭되거나 길들여지지 않는 것으로만 인식된다. 126 이상 4. 장 주네에 대하여

 

 

 

 

 

 

 

 

 

볕뉘. 

 

1. 전시 뒤, 행사가 있어 재독을 하다보니 놓치고 있는 것이 많았다. 6년전 가을이었기도 하였고, 그가 말하는 바를 세밀히 뜯어보지도 않은 연유기도 했다. 

 

2. 장 주네를 읽는 것도(사이드가 말하는 책들은 번역이 다 되지 않은 것 같다) 그가 작품을 끝까지 밀어부치며 토해내는 것과 달리 삶은 차분하면서도 냉정하고, 그 경계를 명확히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작품은 다시 읽혀야 하는 것이다.

 

3. 뒷 장에서 말하는 인물들은 더 많기도 하며 더 중요하기도 하다. 카바피스의 시는 장소와 장소상실, 비장소성이라는 말들을 공부하며 체감하기도 한 사실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놀랍기도 했다.

 

4. 굴드 역시 고독이라는 주제로 공부를 하면서 느낀 부분이기도 한데, 흔히들 남는 시간들을 주체하지 못하는 우리들이 꼭 넘어가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 한 시인이 말하지만 고독이라는 신발을 신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 말하지만, 어느 누구도 스스로 주어진 시간을 참아내는 것도 배우려하지 않은 듯하다.

 

5. 토크 행사 텍스트 읽기가 있어 재독을 하게 되었는데, 여러모로 이 가을녘에 읽기엔 알맞은 것 같다. 인문, 삶의 무늬에 관심이 깊어진다면 서슴없이 책과 책 속의 책들을 읽어낸다면 분명 스스로를 뛰어넘을 방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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