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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이후 도록을 준비하며

 

전시가 끝났다. 관객이 찜한 작품을 전시 상태 그대로 전달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가필을 해서 넘겨주어야 하는지 고민이다. 도록 역시 전시이후 준비하는 것은 괜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하여 부산스럽다. 그건 사후 약방문은 아닌가. 감상자의 몫을 외려 좁히는 것은 아닌가.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글을 쓰기까지 제법 시간이 투덜투덜 흘러간다. 전시하면서 교감과정에서 생기는 것들과 미쳐 기획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뒷배경들이 아로새겨지면 더 좋겠다는 느낌이 몇 차례 스몄다. 그렇다고 서성거리는 그 상황을 잡아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분간을 쉽게 내린 것은 아니다. 이런 마음을 벼리기에 앞서 잡지나 편집자의 손을 거쳐 탄생하는 배움이라는 과정을 몰랐다면 덜컥 자료집 수준에서 일을 저질렀을 것 같다. 망설인지 두 달, 주제넘는 일인 것 같은 방황이 이렇게 민망과 의무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다시 마음을 가두어 둔다. 사후의 일이 늘 그렇듯이 합리화의 몇 가지 근거를 대어 보는 것이다. 그림 열 점 남짓, 시 열 편을 만들게 한 그림자들을 어쩌면 더 표현하고 싶은 것이겠다. 그 여백이나 뿌리같은 일들을 좀더 기록해두어야겠다는 것이 슬그머니 들어왔다고 하는 것이다. 기획의도를 꿰뚫으려던 질문에 대한 덧말이라고 한다. 단순한 편집을 하여 기록물로서 남기고 싶은 애초의 욕심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전문가를 만나면서 책과 잡지란 작품을 낳는 일이어서 내용의 완성도 만큼 따라가는 일이란 말에 조급함이 그대로 들켰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처음과 다른 길목에 들어섰다.

 

고민들이 시계추처럼 반복하는 사이.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은지 남기는 것이 나은지. 지금과 결과물이 나오고 나서도 주춤거릴 것이다.

 

포스코 야경을 배경으로 청년의 뒷모습을 비추고 있는 그림에 [비장소성 Placeless]라는 제목을 단 이유들을 궁금해 하던데 특별한 의미를 두셨나요.

 

- 흔히들 장소에 대한 선입견이 있죠. 가보고 싶거나 살고싶은 곳들. 때로는 지방이 되기도 하고 서울이 되기도 하죠. 하지만 정작 로망은 장소가 채워주지 못하죠. 도시와 시골처럼 말입니다. 끊임없는 실망이 이어지기도 하고 말에요. 포항 역시 좋거나 나쁜 이미지로 각인되길 바라고 싶지 않아요. 주변은 더 작은 시골로 관계되어 있죠. 비장소 Placeless는 그런 의미에서 채워나가거나 만들어가는 과정으로서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어떤 곳이든 관계를 만들어가는 시공간으로서 장소. 자신을 스며들어가게 하는 곳으로서요. 그러면서 다른 의미들이 피어나죠. 그래요. 그걸 비장소성이라고 표기하고 싶었어요.

 

제목의 표기를 숫자로 했던데 그 이유는 뭐죠. n행시/시집/달팽이책방 수채화는 [ -3], 전사한 자기의 글과 책들은 [-2], 매달린 시 열 편 가운데 시작이 [-1], [0], [서시]로 이어지던데요.

 

- 영점. 0이라는 숫자는 수학사의 큰 발견, 아니 발명이기도 했다죠. 블로그서재를 하면서 짧은 글 속에 0과 마이너스를 표기하면서 하고픈 이야기의 이면이나 준비정도를 나타내고 싶었는데 어쩌다 습관처럼 된 일이죠. 주제의 바닥을 0으로 그 저변을 마이너스로 표기했죠. 그런 의미에서 전시회의 축은 주제에도 있지만 그 보다는 저변에도 시선이 가 주길 바랬던 것 같아요. 특히 [- 3][- 2]에 하고 싶은 것이 가장 많이 담겨있다고 보시면요. 그렇게 보니 의도의 과잉으로 보이네요.

 

- [- 3]이란 작품은 그동안 '다시' 모임에서 다룬 시집의 제목으로 n행시를 한 것들을 과정으로 그대로 남겨두면서 전시를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동안 끙끙거리던 것들이 고여있기도 하구 그림이나 시 작업에 여러모로 바탕이 되기도 해서 그렇게 담았어요. n행시를 꼼꼼이 살펴보고 의견을 달아주신 분들도 있고, 질문들도 깊숙하게 들어온 분들도 계시죠.

 

- [-2]란 작품은 [ -3]보다는 전시준비에 한발짝 더 다가선 것들인데요. 윤동주의 흰그림자, 김수영의 꽃잎, 김사인의 그림자는 없다, 루쉰의 에세이인데 윤동주의 흰그림자 이미지에 가깝죠. 그리고 도나 해러웨이의 회절이라는 부분을 전사한 문구가 있어요. 영상과 직접 관계되기도 하네요. 그림자는 한가지 색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영상을 보면 잔잔하게 가장자리를 퍼지면서 여러 색들을 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도나 해러웨이를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 회절을 통해서 빛의 역사를 알 수 있다고 하죠. 직선이 아니라 파동과 입자. 그 방법으로 사건이나 사물의 역사를 미세한 차이를 통해 파고 들어가죠. 빛이 번지는 지점을 통해 빛의 궤적과 속살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어쩌면 낯선 것들과 친밀함을 통해 서로 변화하고 만들어가는 것들 끊임없이 시도하고 탐구하는 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녀의 저작이 많이 소개되지 않아 아쉽지만, 학문과 학문 사이 경계가 없는 듯이 보여요. 우열도 없이 서로 간섭을 일으키죠. 그렇게 학문 사이, 삶 사이 경계를 구분하지 않으며 확장해나가는 모습이 많이 끌리는 것 같아요. 또한 끊임없이 지금당장, 지금여기를 다루고 넓힌다는 점에서 루쉰가 의도가 닮아있어 절절하기도 하구요.

 

''를 일회용 컵에 거꾸로 전사해서 어른어른 비치게 하고, 돋보기를 하나씩 걸어두셨죠. 그 의미를 몇몇 친구는 "시를 매달아 두었다"고 하거나 "들여다보면 좀더 세상이 잘 보이나요"라고 했다죠. 애초 무슨 생각이셨나요.

 

- 책 안의 시들은 시들시들하거나 시시하지 않나요. 수 많은 시들이 책장 안에 갇혀있는 건 아닐까 했어요. 조금은 날 뛰어도 좋겠다 싶었죠. 걸리적거려도 좋구요. 그림자는 들여다볼수록 잘 보이겠죠. 마음의 눈으로 새겨도 더 잘 느끼겠죠. 그렇게 문구들이나 찰랑대거나 어른거리는 것들이 아픔의 상처럼 한 두마디라도 맺히거나 마음을 베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림자는 없다] 라고 제목을 정하신 이유를 많이 물어보던데요.

 

- 빛과 그림자. 그렇죠. 그림자들. 쉽지 않은 주제이기도 하죠. 시인의 시 제목에서 따온 것이기도 해요. 김수영, 김사인, 정현종.. 어느 특정 시인의 그림자에 대한 해석으로 좁히지는 않았으면 하구요. 그림자의 다양한 모습들을 새겨보거나 느껴봤으면 싶었어요. 그러다가 스러져가는 이들에 대해 0의 시선으로 다시 보고 느끼면 어떨까 싶었죠. 참 어려운 문제예요.

 

시 열편을 일회용 컵에 매달아두고 그 밑에 시들이 색깔 별로 드리워져 있던데 어떤 의미였나요?

 

- 첫 번째 그림 [2월 아스콘 위 햇살에 비친 나무]의 나뭇가지를 묘사해서 시를 한 편씩 새겨두었어요. 사실 일회용컵에 매달아두었고 돋보기로 자세히 본다해도 시 한편을 온전히 읽기는 어려워요. 한 두 단어가 얼핏 비추거나 꽂혀도 의미가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도 혹시 툭툭 부딪치는 시들에게 드리워진 그늘을 볼 수 있다면......그리고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분들도 있으면 좋겠다 했어요. 그래서 시 열 편만이 아니라 좀더 관계있는 시들도 몇 편 더 가장자리에 새겨두었어요. 이런 의도였다면 조명이나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어야 한다는 말씀도 귀담아 들리더라구요.

 

달팽이책방에서 활동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요.

 

- 마음에 드는 기획행사에는 적극 참여하는 편이에요. 달뷴기자로도 참석했었구요. 그 행사들로 느꼈던 것들이 고스란히 전시에 녹아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비장소성이라는 제목도 곰곰궁리에서 구술사 작업을 하면서 느낀 사실이죠. 사실은 하고 싶은 이야기나 추천하고픈 책들은 지난 달뷴 기사에 어쩌면 의도적으로 넣어 놓았는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이렇게 스며들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최근의 관심주제들 역시 '관계'라고 또 다른 신앙이 될 수밖에 없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기도 하죠.

 

이후 작업계획은?

 

- 그림자란 주제로 시작을 했는데, 비슷한 주제가 좀더 이어질 것 같아요. 떨어지는 꽃잎, 꽃그림자, 비 이렇게 큰 주제를 잡고 있어요. 그에 따른 시들도 구상하고 있구요. 후년 말이나 내후년 초에 다른 장소에서 전시할 것 같아요.

 

가장 하고싶은 일들은 무엇인가요. 지금 있으신지요.

 

- 전시를 두 번 본 친구들이 두 번의 전시를 보고 말미 질문을 했어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어요. 그래서 예전에는 하고싶은 것이 있던 것 같다고 말했죠. [늘시작]이라는 자작시집을 화일로 만들어 가까운 지인들에게 건넨 적이 있는데, 그 시들 주제들이 나, , -, 우리에 대한 것들이었요. 모임에 대한 갈망같은 것이었죠. 그래서 모임학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런 것을 추려보고 싶었다고 했죠.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잘 모르겠지만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아마 달라지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고 말이죠. 그러면서 [-3]n행시 마지막 편 조용미 시인의 [나의 다른 이름들]의 그 시를 낭독했어요. 페르난도 페소아 이야기죠. 어쩌면 다른 이름들을 갖고 싶은 것 같다고 말이에요. 사람은 말을 내뱉는 순간, 정해진 것을 피하려는 습성이 있어 그리 말했다고 그리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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