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영상작업에 푹 빠져있는 친구가 오토바이를 타고 여기까지 내려오다. 6시간 가까이 운전을 한 셈이다. 그 친구는 동해 바다를 찍으며 우회해서 다시 대전으로 갈 것이다. 그 친구는 어른 김장하 영상을 보며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는 대목에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 친구의 선민의식에 늘 불만이 있었다. 말은 하지 못했지만 , 늘 더 낫다라는 엘리트의식이 배여있는 벗이다. 그 간극, 간격에 말걸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근 삼십년 지기의 한계이기도 한 것이다. 진보를 자부하는 자들을 의심해야 한다. 나는 더 알고 있다라고 자부하는 자들도 조심해야 한다. 왕년을 벗삼는 친구들은 더 심하다.


깨달음은 자신을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잠시의 깨우침이었을 뿐, 다시 타성을 갖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 친구와 나의 공통점은 이제 겨우 확인된 것이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푹빠져서 온도를 높이는 과정을 즐긴다는 것이다.


나무밴드 30주년 공연을 올해 준비한다고 한다. 여유와 설빈, 인효인상 등등이 그가 키워낸 제자들이기도 하다.


일상을 채우다보면, 일상을 채워 넘치게 하다보면 주변을 활짝 피우기도 할 것이다. 선민의식을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의식하지 않는 자연스러움만이; 추종하지 않게하는 힘이다. 모두는 나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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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랍 안에는 새 것과 쓰던 것이 있다. 늘 애용하는 쓰던 것의 라벨이 떨어지자 새 것을 사용해본다. 그런데 정이 가지 않는다. 손톱의 부분이 잘리거나 날라가기에 불안하다. 낡은 것은 적절한 힘으로 또각또각 온전한 손톱모양을 유지하며 잘린다. 자르고 난 뒤 한번만 다듬기로 굴려주면 맵시도 있고 완벽하다. 모아 버리기도 수월하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여러 경로 가운데 알맞은 길을 찾으려고 노력중이다.  그림 카드를 만들고, 전시홀별로 자석식 도면도 만들어 둔다. 캔버스별로 라벨을 달고, 투명상자도 구입해 따로따로 넣어둔다. 그러기 위해서는 있는 것들을 또 다시 확인하고 분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흐뜨러뜨리고 다시 기억을 살리는 작업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관계들도 그러할 것이다. 경도된 결과에 어처구니없이 버려진 과정들. 여러 경우의 수의 과정들이 있던 것이다. 왜 그 관계가 어그러졌을까. 미리 예비하는 징조들이 있었을텐데, 왜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일까. 지난 과거의 기억들을 흐트러트린다. 


지난 번에 읽은 책이 로르동이다. 분명 여성분이구나 했는데, 새 책을 보니 남성이다. 지난 번 느낌적 느낌이라는 단어를 새기면서 다시보게 되는 책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의 느낌의 위상학이라는 책을 건네들기도 했다. 


과정이 실재다


이상사회라는 것은 없다. 그렇게 결과에 집착되는 세계는 없다.

영원한 과정만 있을 뿐이다.
















볕뉘


잘 짤리지 않는 손톱깎이를 사랑한다. 온전한 과정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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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돋보이기 위해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가지 질문을 동시에 하는 사람들도 그 가운데 한 부류이기도 하다. 비판도 그러하다. 자신을 도드라지게 하려고 비판의 대상을 아래에 두려는 것이다. 


선민의식. 남보다 낫다. 무엇이 문제일까. 관계는 서툴고, 사과는 어렵다. 사람들은 겹치지 않고 피해간다. 


여러 사연들이 들린다. 뒷얘기가 없을 수 없겠지만, 서로 간 아니 형제나 식구들도 오해가 아니라 절연의 과정들로 회복될 수 없는 지경.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 거기까지 가게 되었는가. 그 또한 높은 확율이 아니었음에도 결국 선을 넘고 말았다니 말이다.


말은 날카롭다.


읽지 않고 타인의 작업을 폄훼하는 자신감들은 어디서 발생하는걸까. 말을 걷잡을 수 없이 뱉게되고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전력을 다한, 혼신을 다 바치는 일들을 비평할 수 있다는 건, 확실히 위험한 일이다. 어떤 잣대로 비난이 아니라 비판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상대의 삶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면서 말이다.


모르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알게 된 이상, 예전과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정정. 실수를 용인하는 삶. 이 사회에서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진심이 어려있지 않다면 사과하는 만큼도 못한 것이 현실이다.


왜 사람들이 빙빙 겉돌기만 하는지. 어렴풋이 잡히는 그물망들 그 당시에 알았다면 중재할 수 있었을까. 그 또한 모르는 편이 나았을까?


무수한 사연들. 


자신이 요리할 수 있을 때, 대표라는 이유로, 책임자라는 이유로 사적으로 전유하고 평가하기는 그 또한 얼마나 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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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인근에 다가서자 흐린 하늘이 짙어지더니 비가 내린다. 행사시간에 지나가면 좋으련만 챙긴 우산이 비바람에 뒤집어 질 정도다. 쌀쌀한 날. 토닥토닥 천막에 국화빵을 만드는 냄새가 향기롭다. 하나를 베어문다.


열 번째이다.  첫 해에도 비가 왔고, 그 마라톤 소식은 <꽃피는 봄이오면>이란  동화책으로도 접할 수 있기도 하다. 표지화, 삽화, 그림책을 그리면서 몇 번씩 울컥할 때가 많기도 했다.  감정이 이입될 수록 난감한 현실 앞에 먼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예산이 잡히면 어김없이 취소되기를 반복하는 현실도 매몰차다. 여전히 진행형이다.


지인과 함께 달린다. 자원활동을 하는 응원단들이 이백여미터 마다 빼곡하다. 화이팅이 넘치고 힘을 외치고 주고 받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대회를 위해 처음으로 마라톤 준비를 했다는 강선생님은 천천히 자기 페이스대로 잘 달려나간다. 헛, 시인님은 아이들을 챙긴다더니 치고 나가신다. 어딜 그렇게 쏜살처럼 달려나가는 폼이 초교 육상선수 출신이 맞다싶다.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몸이 배여있는 갑천변, 늘푸른축구장이 있던 곳의 반환점을 돌아, 조금 빠르게 달려준다. 어라 저기 건우동생 선우, 그림책의 우산공주님이 열심히 달려나간다.  이름을 불러주자 정말 대단하세요란 멘트를 날려준다.


그렇게 빗속을 달린다. 장애나 어려움들은 다 또다른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사회를 또 다른 시선으로 보게하기도 한다. 5.3k 32:19


볕뉘


행사장의 메인무대 주로 안내팝업 모두 여울 그림으로 채워서 남다른 느낌이기도, 무언가 기여를 한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한 대회장이다.  지인들과 올라간 김에 파면뒤풀이를 즐기다오다.


함하세 700인분의 짜장을 준비해주시다. 사회민주당봉사팀 멋지다. 대장님 인사를 건네지 못해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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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90년대 산업사회의 올드노멀과 그 이후 급속한 뉴노멀에서 구조적으로 바뀐 것은 무엇인가. 바뀔 것을 제대로 예측했는가. 학자나 사상가들이 말한 대안은 증상의 일부만 서술했던 것은 아닌가. 무엇을에 집착해 어떻게 다른 시선으로 볼 생각들이 모자란 것은 아닐까 하지만 세월은 흘렀고 시간은 지났고 조금만 둘러보면 누구나 경험해냈다. 지난 과거를 본 이론이 과연 합당했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론을 되돌아보고 정정할 것은 정정하고 폐기할 것은 폐기하고 보탤 것은 보태야 하는 것은 아닌가?




데카르트가 육체와 영혼, 신체와 정신을 나누어 진리나 궁극을 위해 탐구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런 데카르트의 분류에 못마땅해했다. 스피노자는 삶과 죽음, 삶의 지복에 관해서만 모든 탐색을 지속했다. 운명이란 무엇인가, 코나투스란 덧셈이란 곱셈이란....그래서 그는 육체와 정신을 빙빙 돌려 서로 나가떨어지게 하지 않는다. 그의 사유엔 늘 그 둘을 잇는 감각, 감정, 정서, 정동으로 살아숨쉰다. 관념과 물질로 나눠서 따로 따로 놀지 않는다. 심상을 매개로 실제 나에게로 흔들리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짚어내게 만든다. 


올드노멀에 뿌리내린 학자나 사상가들. 아감벤, 바디우 액체근대 벌거벗은 생명 등등은 버려지고 황폐해지는 증상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보았지만 그 사이사이를 살아숨쉬게 느끼게 만들지는 못했다. 지끔까지의 이론들은 관념이나 물질의 한 면만 종합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한계를 넘지는 못한다. 정서, 정동은 과연 어떻게 세상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표류하는 우리들을 제대로 살펴볼 수는 있을까 극우의 선동에 30-40%가 쓸려가는 지금을 어떻게 설명해낼 수 있을까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친밀함을 원한다. 호혜성도 그 방편이기도 하다. 세상이 예측가능하고 안정적이라면, 변화가 느리고 한 세대이후 안정성 있는 삶이 보장된다면 느긋하고 한가롭고 사교가 예측가능하고 삶도 그러하다. 올드노멀을 그렇게 살아낸다. 굳이 맞벌이가 필요없다. 연애하고 결혼하고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삶들은 압축적 근대화란 명명처럼 우리는 전지구인들은 몸소 겪고 있다. 일자리는 줄어들고 올드노멀의 쓰레기더미을 뒤지는 것이 지금의 세대다. 아니 뒤질 것조차 없어 히키꼬모리다. 우울이다.


그래도 살아내야 한다. 지금이 원하는 것은, 하루하루 살아내더라도 친밀함의 한끼 밥이 필요하다. 카페인 없는 커피, 연애와 결혼은 말도 못해 썸타기와 어장관리, 쿨함, 무관심, 체념하는 것 자체가 삶의 성취이자 목적이 되지 않으면 위태로운 하루를 견딜 수 없다. 우리는 딱딱 떨어지는 고체같은 주체와 개인이 아니게 된 것이다. 디딤돌이라고 여겼던 생각이 지표들은 다 녹아가며 그 토대가 흔들리고, 떠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상황은 통제할 수 없다. 나를 제대로 바라보기 어렵다. 다 내탓이다. 이생망 탕진잼 이런 극단의 두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죽어간다. 나를 두드려주는 타인은 없다. 온통 내탓내탓하다가 앓는다. 앓다가 먹고 마시고 도박하고 포르닉하고 중독들을 하나씩 가지고 살아낸다. 모두 아Q이자 거의 좀비다.


바틀비는 계속하지 않겠습니다.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하면서 체제에 저항했지만 그 또한 올드노멀이다. 


아이들에게 꿈이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정작 어른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꿈이 무언지 모른다. 그것을 찾아내기가 무척 어렵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원할 수 없다. 망막함과 위태로운 간두에 서서는 그저 나를 구제해줄 느낌적느낌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다. 정동의 지능은 애착을 갖는 것을 찾기 마련이다. 유동하는 주체, 유동하는 계급, 정동적 계급은 순응과 저항의 이분법적 시선으로 묘사해낼 수 없다. 


이 책은 이런 것들을 흔든다. 뿌리채. 그러니 읽어내려 노력해야 한다.


볕뉘


4.4 세계헌법 수호의 날. 작은 책방에 모여 큰 소리내서 기뻐하지도 못하는 동네에서 맘껏 기쁨을 나누며 일상과 대안을 짚어봅니다. 백색소음의 시대에서 뭔가 다른 소음을 만들어가는 존재들. 그 사이에 에너지를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여기가 로도스다. 뛰어보라. 여기가 이타카다. 저기가 아니라 지금여기. 뭔가를 시도하는 맛. 삶에서 제일 진한 맛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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