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모든 것이고 나는 모든 것을 하는데,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한다." 어느 날 신, 계명 등등이 오직 당신을 해치고, 그것들이 당신을 쇠약하게 하고 파멸시키는 것이 아주 분명해진다면, 꼭 기독교인들이 아폴로나 미네르바(Minerva) 혹은 이도교의 도덕을 비난했었듯이, 당신은 신, 계명 등등을 내던질 것이다. 분명히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도덕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그다음에 마리아를 자신들의 마음에 밀어 넣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자신들의 영혼의 구제를 위해서, 이렇게 자기중심성 혹은 자기소유성으로 이 일을 하였다. 이러한 자기중심성, 이러한 자기소유성으로 그들은 신이라는 낡은 세계를 벗어났고 거기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자기소유성이 새로운 자유를 창조하였다. [180] 왜냐하면 자기소유성은 모든 것의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천재성(Genialität) (특정한 자기소유성)항상 독창성(Originalität)이다 이 새로운, 세계사적 생산물의 창조자로 오랫동안 여겨져 온 것과 같다. 당신이 '자유'를 문제 삼으려고 노력하려면, 그때 자유의 요구를 깊이 따져 논하라. 도대체 누가 자유롭게 되어야만 하는가? 그대, 나, 우리이다. 무엇으로부터 자유인가? 그대, 나, 우리가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 따라서 나는 모든 포장에서 벗어나야 하는 핵심이고, 속박하는 모든 겉껍데기로부터-자유롭게 되어야만 하는 핵심이다. 내가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 내가 자유롭게 되었을 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오로지 내가 남아 있고 모름지기 내가 남아 있다. 그러나 자유는 이러한 나 자신한테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255
'당신 자신을 인정하지 말라. 하지만 자기 소유성은 당신한테 당신 자신을 불러들인다. 자기소유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 자신에게로 오라!' 자유의 보호를 받으며 당신은 많은 것들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새로운 어떤 것이 다시 당신을 괴롭힌다. "당신이 악마를 벗어났지만, 악은 남아 있다. " 자기 자신으로서의 당신은 실제로 모든 것에서 해방된다. 그리고 당신한테 달라붙은 것은 당신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선택이고 당신의 의향이다. 처음부터 자기 소유자(Der Eigene)는 타고난 자유인이고, 자유로운 사람이다. 이와 반대로 자유인은 자유에 미친자, 몽상가이자 광신자일 뿐이다. 자기 소유자는 처음부터 자유롭다. 왜냐하면 자기 소유자는 모름지기 자신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맨 먼저 자신을 자유롭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부터 자기 밖에 있는 모든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고,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자신보다 더 높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간략히 말해 그는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여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인 사람은 자식된 도리에 사로잡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그러한 강제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하려고 여전히 노력하고 있다. 자기소유성은 어린 자기중심적 사람 속에서 작동하여 그에게 원하고 바라던ㅡ자유를 마련해 준다. 수천 년의 문명화된 문화는 당신에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은폐하였고, 당신에게 자기중심적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상주의자('선량한 인간')가 천직이라고 믿게 하였다. 그것을 떨쳐 버려라! 257
내 자기소유성을 부정한다. 현재의 과정이 목표에 이르지 않고 따라서 잘못된 길로 이끌기 때문에, 내가 내 방식을 포기하는 것은 다른 경우이다. 또 다른 경우는 내가 항복하여 포로가 될 때이다. 내가 충분한 화약을 가지고 있어서 돌을 깨뜨릴 수 있을 때까지, 나는 나에게 방해가 되는 암석을 피하여 에둘러간다. 그리고 내가 법을 전복할 수 있는 힘을 모을 때까지, 국민의 법을 피해간다. 내가 달을 움켜쥘 수 없으므로, 그런까닭에 달은 나한테 '신성한' 존재, 곧 아스타르테이어야만 하는가? 내가 그대를 움켜쥘 수만 있다면, 나는 확실히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대한테 다가갈 방법을 안다면, 그대가 나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리라! 오직 내가 나 혼자 힘으로 이해력을 획득하여 그대를 나 자신의 것이라고 부를 때까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인 그대는 나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나는 그대 앞에서 나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때가 오기를 고대할 뿐이다. 지금 내가 그대의 무언가를 만지는 것에 만족한다면, 나는 여전히 그대의 무언가를 기억한다! 강력한 사람은 항상 그렇게 해왔다. 만약 '헌신적 사람들'(Ergebenen)이 강제되지 않는 힘을 자신의 지배자로 찬양하고 섬겼을 때, 그리고 그들이 모든 사람한테 섬기기를 요구하였을 때, 그때 복종하지 않으려는 그런 기질의 자식이 출현했다. 그리고 그는 다다를 수 없는 올림포스산에서 섬김을 받는 힘을 내쫓았다. 그는 회전하는 태양에 '가만히 있어라'라고 큰소리로 외쳤고, 지구가 회전하라고 했다. 헌신적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든 참아야만 한다. 그는 신성한 떡갈나무에 자신의 도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헌신적 사람들'은 천국의 불이 결코 그를 다 태워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교황의 의자에서 교황을 팽개쳤다. 그리고 '헌신적 사람들'은 그 일을 저지할 방법을 몰랐다. 그는 신의 은총이라는 일을 파괴하고 있고, '헌신적 사람들'은 헛되이 원망하는 말을 하다가, 마침내 침묵한다. 260
곧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인류에 속할 필요가 있을 뿐이고, 그저 그와 같은 유개념의 표본으로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구체적 나로서의 내가 무엇인지, 그것은 선량한 자유주의자로서의 당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오로지 나의 개인적 일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이자 같은 어머니, 요컨대 인류의 자식이다. 말하자면 나는 '인류의 자식'으로서 그대와 같은 사람이다. 그럼 당신에게 나는 무엇인가? 혹시 그것은 내가 걸어가고 서 있듯이, 뼈와 살을 갖춘 그러한 나인가? 그건 아니다. 생각과 결단, 정열을 가진, 이렇게 뼈와 살을 갖춘 나는 그대의 눈에는 그대의 관심사가 아닌 개인의 관심사'이고, '자신을 위한 관심사'이다. 오로지 나의 개념, 곧 나의 유개념, 다시 말해 철수라고 불리기도 하고, 쉽게 영희 혹은 영수로도 존재할 수 있는 인간만이 '너를 위한 관심사'이다. 그대는 나에게서 나를, 곧 뼈와 살을 갖춘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재하지 않는 것, 곧 유령, 다시 말해 인간을 본다. 기독교의 수 세기 동안 우리는 가장 다양한 사람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매번 우리가 그들로부터 저 정신의 척도에 따라, 예를 들어 그들에게서 구원할 필요가 있는 정신을 가정할 수도 있는 각자를, 그 이후에는 정당함의 정신을 갖는 각자를, 마침내 인간다운 정신과 인간다운 얼굴을 본 각자를 기대하였다. 이렇게 '평등'의 원칙은 변화하였다. 이제 평등은 인간다운 정신의 평등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을 포괄하는 어떤 평등은 확실히 발견된 것이다. 우리 인간은 어떤 인간다운 정신, 다시 말해 인간 정신 말고 다른 정신을 결코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도대체 누가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191] 그러나 위에서 말한 이유 때문에 현재 우리는 기독교의 초기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그 당시 우리는 신다운 정신을 가져야 한다. 270
다시 말해 나는 '인간다운 사회'를 없애고 그 자리에 자기중심적 사람들의 연합(Verein von Egoisten)을 세운다.[197] 그러므로 국가는 내가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함으로써 나에 대한 적대관계를 나타낸다. 그 요구는 나는 인간다운 인간이 아니라, 나를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를테면 국가는 나에게 인간다운 존재가 되는 것을 의무로 지운다. 더 나아가 국가는 국가의 존속을 막으려는 어떠한 행위도 내가 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국가의 존립은 나한테 신성한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나는 자기중심적 사람이 아니어야만 하고, 오히려'존경할 만한, 의로운 사람', 다시 말해 도덕적 인간이어야만 한다. 잘 알았다. 나는 국가 앞에서 그리고 국가의 존립 앞에서 무기력한 사람이고 경의를 표하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등등. 실제로 현존하는 국가가 아니라, 여전히 창조될 필요가 있는 이러한 국가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이상이다. 국가는 참된 '인간다운 사회'가 되어야만 하고, 인간다운 사회는 모든 '인간다운 사람'이 자리를 찾는 곳이다. 자유주의는 '인간다움'을 실현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인간다움을 위한 세계를 창조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일은 인간다운 세상이거나 보편적(공산주의적) 인간다운 사회일 것이다.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는 오직 정신만을 고려할 수 있었고, 국가는 인간다운 존재만을 고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다운 존재'는 '정신'이 아닌가? 278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발견의 결과로 얻은 이익을 받아들일 것이고, 인류를 기독교와 종교의 새로운 성과로 그리고 인류 일반의 이상적 노력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지금 인간은 누구인가? 나구나! 기독교의 목적이자 결과인 그 인간(Der Mensch)은 나처럼,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자 이용할 수 있는 재료, 희생의 역사 이후의 향유의 역사, [198] 인간 혹은 인류의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ㅡ나 자신의 역사이다. 그 인간이 보편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나와 자기중심적 사람이 정말로 보편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자기중심적 사람이고 모든 일을 자기 자신을 위해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도무지 자기중심적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아직도 여호와에게 자기 자신을 헌신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독교인도 전혀 자기중심적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은 하느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자기 자신을 하느님에게 복종시키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처럼 그리고 유대인처럼, 인간은 자기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게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욕구 중 일부를, 특정한 욕구만을, 어떤 어중간한 자기중심성을 만족시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중간한 인간의 자기중심성이고, 어중간한 자기 자신의 어중간한 유대인의, 어중간한 자기 자신의 소유자, 어중간한 노예의 자기중심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항상 서로를 어중간하게 배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서로를 인간으로서 인정하지만, 서로를 노예로서 배척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다른 두 주인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완전한 자기중심적 사람이 될 수 있으려면, 그들은 훨씬 더 확고하게 서로를 완전히 배제해야 하고 그런 일을 함께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치욕은 서로를 배제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배제하는 일이 그저 어중간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280
재판관의 마음에 따라 싸워야만 하는 특별한 권리에 맞선 겸손한 투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결론으로, 내가 여전히 권리의 내부를 파헤치고, 적어도 그 말을 그대로 두는 한에서만, 내가 기꺼이 사용했던 어중간한 표현법을 여전히 철회해야만 한다. 그러나 사실 [권리] 개념과 함께 [권리라는] 단어 역시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내가 '나의 권리'라고 불렀던 것, 그것은 전혀 권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권리는 오로지 정신에 의하여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인데, 권리가 자연의 정신이든, 종개념(槪念)의, 인류의 정신이든, 신의 정신이든, 신이라는 신성함의 정신이든, 신이라는 높음의 정신이든 어떤 정신일지라도 말이다. 내가 권리를 준 정신이 없다는 것, 그것은 내가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오로지 내 힘을 통해서 권리를 가진다.
나는 어떤 권리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나는 어떤 권리도 인정할 필요가 없다. 내가 힘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것, 그것을 나는 힘으로 얻는다. 그리고 내가 힘으로 얻지 못하는 것에 대해 나는 어떤 권리도 없다. 나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자랑하지도 않거나 그러한 권리로 마음을 달래지도 않는다. 절대적 권리와 함께 권리 그 자체가 죽는다. 동시에 '권리라는 개념'의 지배는 제거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개념, 이념 혹은 원리가 우리를 지배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지배자 중에 권리의 개념 혹은 정의의 개념이 가장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를 맡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권리를 주거(Berechtigt)나 권리를 주지 않는 것은내 알 바 아니다. 만약 내가 단지 힘이 있다(mächtig)면, 나는 이미 나 자신에게 무엇을 할 권력을 주는 (ermächtigt) 것이고 결코 다른 전권위임(Ermächtigung) 혹은 자격부여도 필요치 않다.325
부르주아 계급의 마음속에서 모든 사람은 소유자이거나 '재산 소유자'이다. 글쎄, 어째서 대다수가 여전히 거의 소유하지 못하는가? 이것은 마치 아이들이 자신의 첫 번째 작은 바지를 입고 즐거워하거나, 심지어 선물로 준 첫 번째 동전 한 푼에 기뻐하는 것처럼, 비록 그것이 작은 옷 쪼가리일지라도, 어쨌든 이로부터 이미 대다수가 소유자가 된 것을 기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본질이 소유가 아니라, 오히려 재산 소유자라는 선언과 함께 곧 등장하였다. 여기서 헤아려야 할 사항은 개인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정확하게 개인의 특수한 이해관계를 형성하는 어느 정도의 문제는 개인에게 맡겨졌다. 그러므로 개인의 자기중심성은 이러한 어느 정도 내에서 가장 자유롭게 활동할 공간을 유지했고, 지칠 줄 모르는 경쟁을 하였다. 그러나 운 좋은 자기중심성은 덜 운 좋은 자기중심성을 향해 불쾌감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인류의 원리를 기반으로 삼고 있는 후자는 여전히 어느 정도 소유하느냐와 같은 문제를 내놓고 이에 대해 '인간은 그가 필요로 하는 만큼 소유해야 한다'라고 대답하였다. [293] 그것으로 나의 자기중심성 그 자체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까?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 그것은 아무래도 나를 위한 그리고 내 필요를 위한 척도를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더 적게 혹은 더 많이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리어 나는 내 자신의 것으로 할 능력이 있는 (vermögend)만큼 가져야만 한다.407
우리 모두 풍요로움의 한가운데에 있다. 자 이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나 자신을 도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다렸다가 나한테 동등한 분배가 어느 정도나 남아 있는지 확인해봐야 하는가? 극빈자 사회의 원리, 곧분배가 경쟁에 반항하여 궐기한다. 개인은 어떤 단순한 부분, 사회의 어떤 부분으로 여겨지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왜냐하면 개인은 사회의 부분보다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의 유일성은 이러한 편협 고루한 견해를 거부한다. 그러므로 개인은 자신의 능력이 다른 사람에게 분배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게다가 노동자 사회에서도 동등한 분배는 약자가 강자를 착취하게 할 것이라는 양심의 가책이 제기된다. 차라리 개인은 그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능력을 끌어내기를 기대하며 이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능력은 내가 소유할 능력이다. [295] 정말이지 아이는 자신의 미소, 자신의 놀이, 자신의 외침, 한마디로 말하면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그의 현존으로 많은 능력을 소유하지 않는가! 그대는 아이의 요구에 저항할 수 있는가? 혹은 그대는 어머니로서 아이한테 젖을 내주지 않는가? 그리고 그대는 아버지로서 그대가 소유한 많은 것을 아이가 필요로 하는 만큼 내주지 않는가? 아이는 그대를 강제한다. 그러므로 아이는 그대가 그대의 것이라고 부르는 것을 소유한다. 그대라는 사람이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면, 그대는 나에게 이미 그대의 실존으로 돈을 지급한 것이다. 내가 당신의 속성들 중에서 하나의 속성에만 관심이 있다면, 어쩌면 그대의 승낙 혹은 그대의 도움은 나를 위해 어떤 가치(화폐가치)를 가지며, 나는 그것을 구매한다. 내가 보건대 그대가 어떤 화폐가치보다 더 많은 것을 자기 자신에게 줄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독일 원주민이 아메리카에 팔렸다고 역사에서 배운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판매되도록 한 사람들이 판매자에게 더 가치 있는 사람인가? 판매자는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법을 모르는 살아 있는 이 상품보다 현금을 선호했다. 410
첫 번째 기쁨 속에서 인간다운 것 쪽으로 손을 쭉 뻗는 것이 허용될 때, 사람들은 그 외에 다른 기쁨을 여전히 원하고 있다는 것을 잊었다. 그리고 마치 인간다운 것의 소유가 우리의 모든 소망의 목적인 것처럼, 사람들은 끊임없이 정력적으로 경쟁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 경쟁하다 지쳤다. 그리고 그들은 '소유가 행복을 주지 않는다'라는 것을 차츰차츰 알아차리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 쉬운 구매로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꼭 필요로 하는 시간과 노고만큼만 시간과 노고를 소비한다고 생각한다. 재산의 가격이 하락하고, 만족스러운 빈곤, 근심 없는 극빈자가 유혹적 이상이 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능력이라고 확신하는 그런 인간다운 행위는 높은 월급을 받아야 하고, 모든 생명력의 수고와 소비를 들여서 요구되어야 하는가? 일상의 말투에서조차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내가 단지 장관이거나 심지어 ..이라면, 그때 완전히 다른 일이 일어났을 텐데'라는 저 확신은 자신을 그런 고위 관직에 있는 사람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는 점을 드러낸다. 비록 정확히 모두는 아닐지라도, 어쨌든 많은 사람에게, 사람들은 거기에서 그러한 종류의 일에 속하는 것은 유일성이 아니라, 오히려 달성할 수 있는 교육일 뿐이라고 인식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런 일을 위해서 평범한 인간이기만 하면 된다고 인지하고 있다. 가령 명령(Ordnung)이 국가의 본질에 속하듯이, 종속(Unterordnung)도 국가의 본성에 기초한 것이라고 한다면, [300] 우리는 종속된 사람들(Untergeordneten)435 혹은 특권을 받은 사람들이 낮은 계급에 놓여있는 사람들한테 지나치게 엄청난 삯을 요구하게 되고 그들을 속여 이득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을 목격한다.417
형벌의 집행 기간이 끝났을 때, 용서하는 마음이 없는 교도관은 자신의 선량한 충직한 기독교인 형제들을 경멸하면서 자신에게 침을 뱉은 오명을 씌운 사람들을 다시 내쫓는다. 그렇다. 은혜 없이 '사형을 받아 마땅한 범죄자를 단두대로 끌고 간다. 그리고 환호하는 군중의 눈앞에서 보상받은 도덕률이 자신의 숭고한 복수를 축하한다. 도덕률 혹은 범죄자 중 하나만이 살아갈 수 있다. 범죄자가 처벌받지 않고 살아가는 곳에서 도덕률은 몰락할 것이고, 도덕률이 다스리는 곳에서 범죄자는 쓰러져야만 한다. 그것들의 적개심은 파괴할 수 없다. 정확하게 기독교의 시대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해야만 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실제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인간다운(신다운) 소명을 달성하는 곳으로 그들을 데려가기 위한 자비의 시대, 사랑의 시대, 관심의 시대이다. 그러므로 교류를 위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가장 중요시 하였다. 이것저것이 인간의 본질이고 그 결과 이것저것이 인간의 소명이며, 인간의 소명을 위해 신이 인간에게 소명을 주었거나 (오늘날의 개념에 따르면) 인간의 인간다운 존재(유개념)가 인간에게 소명을 준다. 이러한 일로부터 개종을 위한 열정이 나온다. 공산주의자와 인간주의자가 기독교인보다 더 인간들에게 기대한다는 사실은 그런 관점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다운 것이 되어야 할지니라!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에게 신다운 것이 자신의 일부가 되는 것이 충분하였다면, 인간적인 것은 사람에게 인간다운 것이 쇠약해지지 않길 요구한다. 양자는 자기다운 것을 완강하게 반대한다. 물론이다. 왜냐하면 자기다운 것은 사람에게 승인될 수 있거나 수여될 수 있는 것(봉토)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람은 자기다운 것을 자신을 위해 마련해야만 한다. 사랑은 인간다운 것을 주고, 나는 나 자신에게 자기다운 것만을 줄 수 있다. 지금까지의 교류는 사랑, 사려 깊은 행동거지, 서로를 위한 행동에 근거해 왔다. 마치 사람이 자신을 구원받게 하거나, 자신에게 최고의 본질인 축복받음을 받아들이거나, 그것을 진리 (vérité (사실과 실제))로 가져오는 것을 그 자신에게 빚지고 있었듯이, 사람은 그들의 본질과 그들의 소명을 그들이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빚지고 있었다. 447
하지만 원래 나의 것이었던 것이, 우연히,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소유로서 나에게 주어졌다. 내가 사랑했을 때, 내가 인류의 봉신이 되었을 때, 인류라는 유개념의 표본일 뿐일 때, 그리고 나로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으로서, 곧 인류라는 표본으로서, 다시 말해 인간답게 사랑으로 행동했을 때, 나는 봉토(土) 소유자가 되었다. 소유가 나의 것이 아니라, 인간 혹은 인류의 소유이어서, 문명의 전체 조건은 봉건제이다. 일종의 거대한 봉건 국가가 세워졌고, 개인은 모든 것을 강탈당했고 모든 것은 '인간'에게 남겨졌다. 마침내 개인은 '철저하게 죄인'으로 나타나야만 했다. 혹시 내가 다른 사람한테 강렬한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사람의 기쁨과 다른 사람의 안녕은 나한테 대단히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다른 사람한테 제공한 즐거움이 나한테 나 자신의 또 다른 즐거움보다 많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그러기는커녕, 나는 기쁘게 그에게 무수한 즐거움을 희생으로 바칠 수 있고, 나는 그의 즐거움을 드날리기 위해 한없이 많은 나의 것들을 단념할 수 있다. [324] 게다가 나는 그에게 없으나 내게 가장 값비싼 것, 곧 내 생명, 내 복지, 내 자유를 그를 위해 위험을 무릅쓸 수 있다. 실제로, 그의 행복과 그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 나의 즐거움과 행복을 형성한다. 그러나 나는 나를, 나 자신을, 그에게 희생으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중심적 사람으로 남아서그를 향유한다.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고 계속 모든 것을 그에게 희생으로 바친다면, 그런 일은 매우 쉬운 일이고, 게다가 삶 속에서 그런 일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흔해 빠졌다. 하지만 그런 일은 내 속의 하나의 열정이 나머지 다른 모든 열정보다 더 강력하다는 점을 논증하는 것일 뿐이다. 기독교 역시 하나의 열정에 모든 다른 열정을 희생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만약 내가 하나의 열정에 다른 열정들을 희생으로 바친다면,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여전히 나를 희생하지 않는다면, 게다가 내가 참으로 나 자신이므로 어떤 것도 희생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 본래의 가치, 나의 자기소유성을 희생으로 바치지 않는다. 449
사랑은 본질적으로 이성적이란 말이군! 포이어바흐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와 반대로, 종교를 믿는 사람은 사랑은 본질적으로 믿음이 깊은 (glaubig) 것으로 생각한다. 전자는 이성이 없는 사랑을 극구 반대하고, 후자는 믿음이 없는 사랑을 극구 반대한다. 둘 다 모두 그런 사랑을 기껏해야 어떤 지독한 악덕 (splendidum vitium)으로 여긴다. 두 사람 모두 사랑은 이성도 믿음도 없는 형태로 존재하도록 둘 수 없을까? 그들은 비이성적이거나 믿음이 없는 사랑은 터무니없고, 사랑이 아니라고 과감히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비이성적이거나 믿음이 없는 눈물은 결코 눈물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나 비록 비이성적일지라도, 등등, 사랑은 사랑으로 여겨야만 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랑들이 인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지면, 이것은 단순히 다음을 말한다. 사랑은 최고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이나 믿음이다. 비이성이거나 믿음이 없는 사람조차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믿음이 깊은 사람의 사랑일 때에, 사랑은 오직 가치를 가진다. 포이어바흐가 사랑의 이성성을 사랑의 '자기제한'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환상이다. 믿음이 깊은 사람은 동등한 권리로 신앙을 신앙의 자기제한이라고 부른다. 비이성적인 사랑은 '잘못된' 것도 '파멸의 근원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랑으로서 그것의 봉사를 행한다. 세계에 대해, 특히 사람들에 대해 나는 어떤 특정한 감정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만 한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것들을 사랑의 감정으로, 곧 '사랑으로 맞이해야만 한다. 확실히, 이 경우에는 내가 세계가 가능한 모든 감정으로 나를 공격하게 내버려 둘 때보다, 그리고 가장 혼란스럽고 무작위적 인상들에 계속 노출된 채로 남아 있을 때보다, 자유재량과 자기 결정이 훨씬 더 잘 드러난다. 457
나는 사람들에 대한 한 가지 감정에 나 자신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자유로운 활동의 공간을 제공한다. 어떻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과감히 귀에 거슬리는 말로 나타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 나는 세계와 사람들을 이용하는구나! 이런 식으로 나는 세계와 사람들에 대한 인상(印象)에서 나 자신을 억지로 떼어놓지 않고, 모든 인상에 나 자신을 개방할 수 있다. 나는 사랑할 수 있는데, 곧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수 있다. 게다가 나는 그 자체로 항상 원기를 회복하는 내 정열이라는 자양분 이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애인을 선택하지 않고, 내 마음속에 최대한으로 죄다 태워버리는 정열의 불꽃이 타오르게 할 수 있다. 애인에 대한 내 모든 염려는 내 사랑의 대상에게만 해당되고, 내 사랑을 필요로 하는 애인에게만 해당되며, '열렬하게 사랑받는 애인'에게만 해당된다. 이러한 나의 사랑이 없다면 애인은 나에게 얼마나 무관심했을까! 나는 오로지 애인과 함께 나의 사랑을 먹는다. 오로지 이 일을 위해서만 나는 애인을 이용한다. 말하자면 나는 내 애인을 향유한다. 쉽게 떠오르는 또 다른 예를 선택해 보자. [331] 나는 사람들이 허깨비들 무리 때문에 칠흑같이 어두운 미신 속에서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고 있다. 만약 내 힘의 한도만큼 내가 야행성의 유령에 약간의 밝음이 비쳐 들어오게 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당신에 대한 사랑이 나에게 이런 일을 고취하기 때문인가? 내가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글을 쓰는가? 아니다, 나는 세상에 내 생각을 주어 세상에 현존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글을 쓴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생각이 당신한테서 당신의 휴식과 평화를 빼앗을 것이라고 예견할 수 있을지라도, 이러한 생각의 씨앗으로부터 가장 잔혹한 전쟁과 많은 세대의 멸망이 싹튼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여전히 나는 내 생각을 널리 퍼뜨릴 것이다. 당신이 하고자 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해라. 그것은 당신의 일이고 나는 그 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마 당신은 오로지 그것으로부터 근심, 전쟁과 죽음을 겪을 것이고, 그것에서 기쁨을 이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459
사람의 자기유용성은 호혜주의를 요구하고(그대가 나한테 하듯, 그렇게 나도 그대한테), 아무것도 '공짜로'(umsonst) 하지 않고, 노력하여 획득하고 보상을 치르고 얻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엇으로 자선을 얻을 수 있을까? [348] 내가 바로 지금 '애정 어린 사람'과 상대할지 말지는 우연에 달려 있다. 애정어린 사람의 헌신은 나의 완전히 한탄스러운 외모, 나의 궁핍함, 나의 불행, 나의 고통을 통해서만 구걸하여 얻을 수 있다. 애정 어린 사람의 도움을 얻기 위해 나는 그에게 무엇을 내어놓는가?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는 구나! 나는 애정 어린 사람의 도움을 일종의 선물로 받아들어야만 한다. 사랑은 갚는 것을 넘어선 것이다. 혹은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은 가장 확실히 갚을 수 있지만, 상대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사랑으로만 갚을 수 있다("가는 호의가 있으면 오는 호의가 있다."). 예를 들어 선물들이 가난한 날품팔이꾼으로부터 꼬박꼬박 징수되는 것처럼, 타인의 호의에 대한 보답 없이 해마다 선물을 받는 데에는 궁색함과 비참함이 필요하지 않은가? 수취인은 애정 어린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고 그의 재산인 기부한 동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만약 날품팔이꾼이 갚아야하는 것을 자신의 법, 제도 등등으로 가지고 있는 수령인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날품팔이꾼은 참으로 더 많이 향유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불쌍한 놈은 자신의 주인을 사랑한다. 아니, 지금까지 역사의 '목적'이었던 공통성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우리 스스로 공통성이라는 모든 거짓 꾸밈과 결별을 선언하고, 우리가 인간으로서 동일하다면, 바로 우리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한다. 우리가 실제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라고 생각될 때만, 우리는 생각에서만 동일하다. 나는 나이고 그대는 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나가 아니다. 482
혈연이 연합을 성사시키지 않고, 믿음(다시 말해 정신)도 연합을 완성시-키지 않는다. 가족, 종족, 민족, 아니 그뿐인가 인류 같은 자연적 결속에서,개인들은 종개념이나 유개념이라는 표본의 가치만이 있다. 그리고-공동 사회, 교회처럼, 정신적 결속에서-개인은 동일한 정신의 구성원일 뿐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양자의 경우에서 그대가 유일한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억제되어야만 한다. 그대는 연합에서만 그대자신을 유일자로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연합이 그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대가 연합을 소유하거나 연합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소유는 연합 속에서, 그리고 연합 속에서만 인정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더 이상 어떤 본질이 하사한 봉토로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350] 공산주의자들은 종교적 진화 과정에서, 그리고 특히 국가에서 이미 오랫동안 존재해 왔던 것을 한결같이 계속해서 행할 뿐이다. 곧 재산이 없는 상태, 다시 말해 봉건제를 말이다. 국가는 욕망하는 사람을 길들이려고 애쓴다. 달리 말하면 국가는 바로 그런 사람의 욕망을 오로지 국가에 맞추려고 애쓰고 국가가 그에게 제공하는 것에 그가 만족하도록 애쓴다. 국가는 욕망하는 사람에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국가는 구속이 없는 욕망을 발산하는 사람에게 '자기중심적 사람'이라고 욕한다. 그래서 '자기중심적 사람'은 국가의 적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바로 자기중심적 사람과 잘 지낼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정확하게 자기중심적 사람을 '확실히 이해할 수 없다. 국가는 (달리 가능한 방법이 없듯이) 자신을 위해서만 행동하기 때문에, 내 필요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어떻게 나를 죽일지에 관심을 쏟는데, 다시 말해 나를 또 다른 나, 곧 선량한 시민으로 만들지에 관심을 쏟을 따름이다. 국가는 '도덕을 더 좋게 만들' 채비를 한다. 그러니까 국가 자체는 무엇으로 개인을 이기는가? 그 자체로, 다시 말해 국가의 것으로, 곧 국가 소유로 국가는 모든 사람을 국가의 ‘재산’에 관여시키는 일에, 모두를 위하여 ‘문화라는 재산’을 갖추어 주는 일을 끊임없이 부지런히 할 것이다.484
터무니없이 싼 값으로 당신을 조롱거리로 만들지 말라,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하는 용감한 사람을 본받으라. [353] '나는 내 삶(소유)을 값비싸게 판매하고자 하니, 적은 나의 삶을 값싸게 구매하지 않아야만 한다. 그때 당신은 공산주의를 거꾸로 올바르게 인식해서, '당신의 소유를 포기하라!'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소유를 실현하라 (Verwerte)! '라고 말한다. 우리 시대의 출입구에는 저 아폴로 신전의 유명한 금언인 "너 자신을 알라"가 새겨져 있지 않고, 오히려 "너 자신을 실현하라 (Verwerte Dich)!"라는 금언이 새겨져 있다. 프루동은 소유를 '강탈'이라고 부른다(책에서). 그러나 그때 소유는 타인의 소유이다. 그리고 그는 단지 이러한 소유에 대해서만 말한다. 타인의 소유는 포기와 양도, 겸손을 통해서 현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타인의 소유는 어떤 선물이다. 사람이 어리석고, 비겁하게 선물을 주는 자일뿐일 때, 왜 강도의 가난한 희생자처럼 그렇게 감상적으로 동정을 요구하는가?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강탈하지 않은 채 남겨두는 동안에, 여전히 우리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인데, 마치 그들이 우리를 강탈했던 것처럼, 왜 여기서 다시 다른 사람에게도 잘못을 전가시키는가? 빈자는 부자의 존재에 대해 책임이 있다. 대체로, 아무도 자신의 소유에 대해 격분하지 않고, 오히려 타자의 (fremd) 소유에 대해 화를 낸다. 실제로 그들은 소유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유의 소외(Entfremdung)를 공격한다. 그들은 더욱 적지 않게 그들의 것이라고 부르길 원하고, 모든 것을 그들의 것이라고 부르려 한다. 또한 그들은 타자성(Fremdheit)과 투쟁하거나, 소유와 유사한 말을 만들기 위하여 타자의 것(Fremdentum)과 싸운다. 488
내가 나를 나 자신과 구별하는 한에서만(내 불멸의 영혼을 내 지상의 현존재 등등과 구별하는 한) 나 역시 나 자신에 대한 어떤 의무가 있는 것처럼 (예를 들어 자기 보존의 의무, 그러므로 자살하지 않는 것),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해 어떤 의무도 없다. 나는 더 이상 어떤 힘 앞에서 결코 나 자신을 낮추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힘이 나를 거스르는 힘으로 위협하거나 내 위에 있는 힘으로 해를 가한다고 위협할 때, 나는 곧바로 모든 힘들이 내가 굴복시켜야만 하는 나의 힘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래서 그 힘들 각각은 나를 관철시키기 위한 내 수단의 하나이어야만 한다. 어떤 사냥개처럼 우리의 힘은 사냥감을 향해 있다. 하지만 힘이 우리 자신을 공격한다면, 우리에 의해 파괴될 것이다. 게다가 나는 나에게 헌신하기 위해 나를 지배하는 모든 힘들을 과소평가한다. 우상들은 나에 의해 존재한다. 내가 단지 우상들을 새롭게 창조할 필요가 없다면 우상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더 높은 힘들'은 오로지 내가 우상들을 찬양하고 자신을 낮추기 때문에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하자면 세계와 나와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나는 더 이상 세계를 위해, '신을 위해 어떤 일도 하지 않고, 나는 '인간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내가 하는 일은 '나를 위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세계가 나를 만족시킨다. 반면에 내가 도덕적이고 인간다운 입장도 고려하는 종교적 관점의 특징은 세계의 모든 것이 어떤 신앙이 깊은 소망(경건한 소망(pium desiderium)), 다시 말해 어떤 올세상, 어떤 실현되지 않는 어떤 것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라는 보편적 구원, 보편적 사랑이라는 도덕적 세계, 영원한 평화, 자기중심성의 중지 등등이 남아 있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완전하지 않다.' [358] 이러한 불쾌한 격언으로, 선량한 사람들은 세상과 분리되어 신을 위한 그들의 작은방으로, 또는 그들의 거만한 '자기의식'으로 피신한다. 하지만 비록 우리가 이러한 '불완전한 세상에 머물더라도, 우리는 불완전한 세상을 우리의-자기 향유를 위해 사용할 수 있다. 494
엄청난 차이가 견해를 두 가지로 나눈다. 이를테면 해묵은 나는 나를 향하여 가고, 새로운 나는 나로부터 출발한다. 전자에서 나는 나 자신을 그리워하고, 후자에서 나는 나 자신을 소유하고, 사람들이 어떤 다른 소유물로 만들 듯이 나 자신을 내 소유물로 만든다. 나는 나의 뜻대로 나를 향유한다. 나는 더 이상 내 삶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삶을 '소비한다.' 지금부터 질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삶을 얻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삶을 소비하고, 향유할 수 있는가이다. 혹은 어떻게 참된 나를 자신으로 회복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자신을 해체할 수 있고,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가이다. [360] 정말로 이상은 항상 멀리 떨어진 나를 찾으려는 것과 다른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찾는데, 그 결과 아직 자신을 찾은 것은 아니고, 인간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을 얻고자 노력하는데, 그 결과 자신을 찾지 못한다. 사람은 갈망에 살고 갈망 속에서 수천 년을 살았고, 희망 속에 수천 년을 살았다. 산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 향유인데 말이다! 이 일은 혹시 이른바 신앙이 깊은 사람한테만 영향을 주는가? 아니다. 이 일은 역사의 중요한 시기와 이별하는 사람에 속한, 심지어 방탕아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그들에게도 근무일 다음에는 일요일이 이어졌고, 더 나은 세상이라는 꿈, 보편적 인간의 행복이라는 꿈, 한마디로 이상(Ideal)에 대한 꿈으로 세상의 소란이 이어졌다. 그러나 특히 철학자들은 신앙이 깊은 사람과 대조를 이루었다. 자, 그들은 이상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가, 절대적 나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계획하였는가? 갈망과 희망은 어디에나 있고, 이것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것을 낭만주의라고 부른다. 삶의 향유가 삶의 갈망 혹은 삶의 희망을 이겨서 의기양양하다면, 삶의 향유는 실러가 제시한 『이상과 삶』이라는 이중적 의미에서 삶의 갈망과 삶의 희망을 제압해야만 한다. 497
식물 혹은 동물도 '소명'을 받지 않듯이, 사람도 '소명을 받지 않고, 어떤 '사명'도, 어떤 '운명'도 없다. 꽃은 자신을 완성하기 위한 소명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다. 꽃은 가능한 한 세계를 향유하고 소비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힘(Kräfte)을 들인다. 다시 말해 꽃은 들이마시고 수용할 수 있는 만큼 땅속의 양분과 창공의 공기와 태양의 빛을 흡수한다. 새는 어떤 소명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최대로 날기 위해서 자신의 힘을 사용한다. 다시 말해 새는 곤충을 잡아먹고 자기 마음껏 노래한다. 꽃과 새의 힘은 사람의 힘과 차이가 거의 없다.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자는 오히려 꽃과 동물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세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사람은 소명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은 그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자기 자신을 분명히 나타내는 힘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힘의 존재는 오로지 힘의 표시 (Äusserung)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치 생명처럼 절대 활동하지 않고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한순간조차 '침묵'하더라도, 삶이 더 이상 삶이 아닌 것처럼 힘은 하는 일이 없이 남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자 이제, 사람들에게 '당신의 힘을 사용하라'라고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명령에는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사명이라는 의미가 놓여있을 수도 있다. 저 명령에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먼저 이 명령을 자신의 소명으로 바라보지 않고 각자가 실로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항상 모든 사람은 그가 소유한 만큼의 힘을 사용한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패배한 사람에게 그의 힘을 더 발휘했어야만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패배의 순간에 그가 그의 힘(예를 들어 신체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힘을 발휘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비록 그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 단 1분간의 무기력 (Murlosigkeit)이었을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긴 1분의 힘의 결핍 (Kraftlosigkeit)이었다. 확실히 힘은 특히 적대적 저항 혹은 우호적 도움에 의해 날카로워지고 강화될 수 있다. 505
[367] 그러나 힘의 적용을 그리워하는 곳에서 힘의 부재 또한 확신할 수 있다. 돌을 부딪쳐 불을 피울 수 있다. 그러나 부딪힘 없이 결코 불을 피울 수 없다. 같은 방식으로 인간 또한 '자극'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힘은 항상 자기 자신을 활동적으로 입증하기 때문에, 힘을 사용하라는 명령은 불필요하고 의미 없을 것이다.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소명이나 사명이 아니라, 오히려 항상 그의 행위, 실재하고 현존하는 행위이다. 힘은 힘의 표시(Kraftäusserung)라는 말을 더 줄인 말일뿐이다. 실은 마치 이 장미가 시작부터 참된 장미이고, 이 나이팅게일이 언제나 참된 나이팅게일이듯이, 그렇게 내가 나의 소명을 행하고 나의 목적에 따라 살아갈 때만, 내가 참된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처음부터 '참된 인간'이다. 내 최초의 옹알거림은 '참된 인간'의 생명 유지에 필수적 표시이고, 내 삶의 투쟁은 그런 힘의 산출(Kraftergiüsse)이며, 내 최후의 호흡은 '인간'이 지닌 최후의 힘의 발산(Kraftaushauchen)이다. 참된 사람은 갈망의 대상을 미래에 놓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하고 실제 하는 대상을 현재에 놓는 사람이다. 내가 어떻게 누구로 존재하든지 간에, 곧 즐겁거나 슬프게, 어린아이이거나 노인으로, 확신하거나 의심하거나, 잠을 자고 있거나 깨어 있는 사람으로 존재하든지, 나는 이것, 곧 나는 참된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바로 그 인간(der Mensch)이라면, 그리고 종교적 인류가 먼 목표라고 부른 그 인간을 정말로 나 자신에게서 발견했다면, '참으로 인간다운' 모든 것 역시 나 자신의 것이다. 인류라는 관념에 귀속되는 것이 나의 소유이다. 예를 들어 인류가 아직 달성하지 못한 저 자유무역,─그리고 매혹적 꿈처럼 인류의 황금 미래를 향해서 출발하는 저 자유무역, 나는 이것을 내 소유로 선취하고, 당분간 밀수의 형태로 자유무역을 계속해 나간다. 확실히 몇 명의 밀수꾼이 자신들의 행위를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의 소유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506
그러나 자기중심성이라는 본능은 그들의 의식을 바꾼다. 위에서 나는 언론·출판의 자유에 대해 똑같은 것을 보여 주었다. [368] 모든 것은 나 자신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에게서 벗어나려는 것을 나에게로 되돌린다. 그러나 좌우간 내가 나 자신의 어떤 예속에서 탈주했을 때, 무엇보다도 나는 항상 나를 되찾는다. 하지만 이것 역시 내 소명이 아니라, 오히려 내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내가 나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과 나 자신을 목적지로 여기는 것은 상당히 강한 차이가 있다. 목적지로서의 나는 나 자신을 소유하지 못하며,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의 것이 아니며, 나는 나의 본질, 곧 나의 '참된 본질'이다. 게다가 이러한 나의 것이 아닌 '참된 본질'은 수천 가지 이름의 어떤 유령으로서 나를 조롱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타자(신, 참된 인간, 참으로 신앙이 깊은 사람, 이성적 사람, 자유인, 등등)가 나이고, 나의 나이다. 여전히 나 자신으로부터 멀리 있는 나는 나를 반으로 나눈다. 그중 하나는, 성취되지 못하고 성취되어야 하는 것은 참된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참되지 않은 나, 구체적으로 말해서 정신적이지 않은 나는 희생물로 사용되어야만 한다. 또 다른 나, 곧 참된 나는, 완전한 인간, 즉 정신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그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정신이 인간의 본래의(eigentlich) 본질'이거나 '인간은 정신적 인간으로서만 존재한다.'이제 정신을 잡기 위해 탐욕스럽게 정신으로 달려가는데, 마치 그때 사람이 자기 자신을 찾는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그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맹렬히 추적하듯이, 그렇게 그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여기는 현자들의 방식조차 경멸했고, 사람들을 마땅히 있어야만 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 507
기도는 ‘신성한 진리’에서 기도의 확고한 믿음의 기초를 보유하고, 진리라는 정신을 기도라는 헌신으로 끌어올리는 놀라운 기계일 뿐이다. 자유로운 사유와 자유로운 학문이 나의 마음을 차지한다. 왜냐하면 내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내가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가 자유롭고, 사유가 천국과 신성한 것 혹은 '신적인 것'으로 나를 차지하기기 때문이다. 정확히 그것은 내가 세계와 [381] 세속, 곧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에 몰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세상을 뒤집고 세상을 교란시키는 일이고, 세상의 본질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종의 정신 착란이다. 생각하는 사람은 사물들의 직접적 접촉에 눈먼 사람이고 사물들을 지배할 수 없다. 이를테면 생각하는 사람은 먹지도, 마시지도, 향유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먹는 사람과 마시는 사람은 결코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로, 생각하는 사람은 사유를 넘어서 먹고 마시는 일, 삶 속에서 자신의 생계, 음식물에 대한 관심 등등을 망각한다. 그러니까 마치 기도하는 사람 역시 그런 일을 망각하듯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일을 망각한다. 그런 이유로-꼭 미치광이가 고대인에게 그렇게 나타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강력한 기질의 사람을 대단한 사람으로 여길지라도, 생각하는 사람은 강력한 기질의 사람에게 어떤 미친놈으로, 어떤 바보로 나타난다. 이 자유로운 사유는 광기이다. 왜냐하면 이 자유로운 사유는 나머지 사람들을 이끌고 조절하는 그저 정신적 인간의 순수한 마음의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무당과 사변 철학자는 정신적 인간, 곧 몽골인의 사닥다리의 가장 낮은 발판과 가장 높은 발판을 표시한다. 무당과 철학자는 허깨비들, 악마들, 정신들, 신들과 싸운다. 이러한 자유로운 사유는 자신의 사유, 나의 사유, 나를 이끌지 않고, 오히려 내 기쁨에 따라 나에 의해 이끌리고, 지속하거나 중지하였던 사유와는 완전히 다르다. 내가 기뻐하는 대로 만족하는 나 자신의 육욕과 내가 굴복하는 자유로운, 제어하기 어려운 육욕이 다른 것처럼, 이런 자신의 사유는 자유로운 사유와 다르다. 524
나의 친애하는 빌라도여, 진리는 하느님이다. 그리고 어떤 참된 것을 얻으려고 애쓰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찾으려고 애쓰고 찬양한다. 하느님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자네 머릿속 외에 다른 곳에 있는가? 하느님은 오로지 마음이다. 그리고 그대가 어디에서 정말로 하느님을 본다고 믿어도, 거기에서 하느님은 어떤 허깨비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하여튼 어떤 생각 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로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게 만들고, 정신적인 것을 뼈와 살을 갖춘 것으로 만들고, 허깨비는 기독교적 무서움과 고통을 만들고, 허깨비는 유령에 대한 믿음이라는 무서운 불행이었다. 그대가 진리를 믿는 한, 그대는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는 ─하인이며, 종교적 인간이다. 그대만이 진리이다. 또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대는 이전에 그대에게 전혀 아무것도 아니었던 진리보다는 더 나은 존재이다. 확실히 그대 또한 진리에 대해 묻고, 틀림없이 그대 역시 비판한다. 그러나 그대는 어떤 '더 높은 진리’,—다시 말해 그대보다 더 높아야 하는 진리에 대해 묻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는 결코 그러한 진리를 기준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그대는 사물의 모양을 다루는 것처럼, 생각과 표상을 다루지만, 오로지 그것들을 입에 맞게, 향락할 수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만 다룬다. [398] 그것들이 그대에게서 더 이상 탈주할 수 없을 때, 더 이상 놓치거나 이해되지 않는 장소를 가지지 않을 때, 또는 그것들이 그대한테 정당할 때, 그것들이 그대의 소유일 때, 그대는 오로지 그것들을 지배하고 싶어 하고 그것들의 소유자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니까 그대는 자기 자신의 방향을 정하길 원하고 그것들을 편하게 느끼길 원하며, 게다가 그대는 그것들에 진리를 찾고 그것들을 그것들의 참된 빛으로 본다. 더 나아가, 그것들이 다시 더 맹렬해져서, 다시 그대의 힘을 뿌리친다면, 이것이 바로 그것들의 허구성, 요컨대 그대의 무능력이다. 그대의 무능력(Ohnmacht)이 그것들의 힘이고, 그대의 겸손이 그것들의 통치이다. 546
만약 생각이 나에게 너무 불편하고 불만족할 것이라고 위협한다면, 생각의 최후는 나의 힘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 존재의 부정, 부도덕, 위법성의 정신이 생각에 깃들어 있다고 해서, 나는 절대 어떤 행위 앞에서 뒷걸음질 치지 않을 것이다. 성 보니파시오가 종교적 양심 있음(Bedenklichkeit)에서 이교도의 신성한 참나무를 도끼로 자르는 것을 삼가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언젠가 세상의 물건이 공허한 것이 되었다면, 정신의 생각 또한 공허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 어떤 생각도 '헌신'으로 여기지 말아야 하기에, 어떤 생각도 신성하지 않다. 어떤 감정도 신성하지 않다(우정, 어머니의 감정, 등등도 신성하지 않다), 어떤 믿음도 신성하지 않다. 그것들은 모두 양도할 수 있고, 나의 양도 가능한 소유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가 창조할 수 있듯이, 내가 그것들을 파괴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적 의미에서 자기 자신, 다시 말해 그의 정신, 그의 영혼이 없어진다고 체념하지 않고, 모든 것들 혹은 대상들, [403]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 자기 사랑의 대상들을 잃어버릴 수 있다. 소유자는 자신의 마음에 소중했던 그리고 자신의 열정에 불을 붙였던 모든 생각들을 자신에게서 팽개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천 배의 생각들을 다시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생각들의 창조자인 소유자는 남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우리 모두는 자기소유성을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우리 중 누구도 신성한 감정, 신성한 생각, 신성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아마 자신의 신성한 생각 중에서 이런저런 것을 제시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신념에 반대하는 우리의 모든 다툼은, 우리가 아마 적대자를 적대자의 생각이라는 참호에서 몰아낼 수 있다는 관점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내가 무의식적으로 행위 한다는 것은 내가 불충분하게 행동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내가 믿음에 승리한 이후에 다시 어떤 믿음의 포로(정신을 빼앗긴 사람)가 되고, 그다음에 다시 그것이 나의 모든 나를 그것의 헌신으로 데려가고, 내가 성경에 열광하는 것을 그만둔 이후에 나를 이성에 대한 열광자로 만들거나, 내가 기독교를 위해 충분히 오랫동안 싸워온 이후에 나를 인류의 이념을 위한 열광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553
세상 사람은 항상 나에게 나 자신의 밖에 있는 목적을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세상 사람은 내가-인간이기 때문에, 마침내 내가 인간다운 것을 요구해야만 한다고 부당하게 요구하였다. 이것이 기독교의 마법 영역이다. 피히테의 나조차 나 자신 밖에 있는 똑같은 본질이다. 왜냐하면 나는 모두의 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이런 나만이 옳다면, 그렇다면 이것은 ‘그 나’이다. 나는 그 나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어떤 다른 나들과 함께하는 그 나가 아니라, 오히려 유일한 나이다. 그러니까 나는 유일한 나이다. 그러므로 내 욕구조차 유일하고, 내행위, 한마디로 말하면 나에 관한 모든 것이 유일하다. 그리고 마치 내가 오로지 이러한 나로서 행동으로 나타내고 발전하듯이, 오로지 이러한 유일한 나로서 나는 모든 것을 나 자신을 위해 자기 것으로 한다. 곧 나는 인간으로서 나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즉 인간을 반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나로서-나 자신을 발전시킨다. 이것이 -유일자의 의미이다. 558
볕뉘
제2부:나
읽혀야 한다. 이 책들은. 많은 질문들과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