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흔적을 추스릴 겸 책을 살펴보는데, 밑줄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다.  초저녁에 잠들어 한밤중에 일어나 살펴보는데, 베그르송과 에머슨의 연관성 아래에서 보지 않은 연유이기도 했다.  에머슨은 피터슬로터다이커의 <인간공학>에 나오는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미국독립운동의 초석이기도 하며 삶의 다기성 긍정성을 내내 언급해주기도 한다. 프래그머티즘, 실용주의의 혁신성을 존듀이를 읽고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는데, 이렇게 뒤늦은 깨달음은 베르그송을 다시 읽고서야 그 물결들이 이어지고 있음을 눈치챈다.  기억이란 이리 중첩되면서 밀려가기도 하고, 다시 중심을 잡고 서면 더욱 선명해지기도 하는 듯싶다. 









2.


저강도 운동이 지지부진한 이유와 베르그송의 <근육의 단련> 또는 근육힘쓰기를 언급하는 부분이 있어 짚어본다. 시간의 공간화. 예를 들면 운동을 부위별로 한다든가? 시간을 양화시켜서 질적으로 달라지는 부분을 보거나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3.


신발을 사러가는 길. 이거는 공부다. 선택불안을 가중시키는 노동이기도 하다. 안정화 쿠션화 카본화와 왜 해부단어들을 알아야만 하는가? 그러고보니 아웃솔이 다 닳아 바꾸어야 한다고. 부상의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하며 아치깔창으로 긴급보완을 잘했다고 해준다. 그렇게 주말 작업과 소소한 휴일일상들을 바쁘게 보내본다. 프리지어 세 단을 사서 세 네 곳을 밝혀둔다. 춘삼월. 사무실의 반려식물들도 <자태>로서 보답하는 모습이 참 좋다.  어서 어서 기분좋은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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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치깔창을 챙기고 조금 일찍 나선다는 것이 십여분 늦다. 주차장을 찾았으나 주차할 곳이 없는 곳을 들어서 되돌아서 편한 주차장을 찾고 대회장을 향한다. 안개가 자욱해 보이지 않지만, 맑은 볕에 곧 금강이 드러날 것이다. 45분 페이스메이커가 앞쪽에 서있다. 저 속도는 될 수 없겠지만, 뒷쪽이 50분 여성페이스메이커가 있으니 아마 그 사이가 될 것이다.


따듯한 날씨지만 손이 곱다. 이십년쯤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짬달을 하던 곳이 이곳이기도 하다. 익숙하고 낯익은 곳의 일터는 십오년쯤 공주로 이전하였다. 주로는 매끄럽고 곱다. 한일교라는 이정표가 없다면 몰랐을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5k는 무리없이 달린다. 23년전 나홀로달리기를 한 기록이 48' 50"였다는 걸 옛 일지를 보고나서야 알게된다. 신기한 일이다.


내려오는 길 챙겨간 책을 뒤적여본다. 어린 조셉 필라테스는 몸이 약했고 온갖 병에 시달린다. 하지만 병약한 유년기를 이겨내고 온갖 운동과 명상 호신술을 하며 탄탄한 체형을 갖게 된다. 서커스 단원이 되기도 하는데 1차 세계대전으로 수용소에 억류된다. 그러나 수용소에 있는 동안 자기만의 방식으로 운동 프로그램을 다듬고 체계화시켜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운동법을 <컨트롤로지>라 이름 붙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독일로 돌아간 필라테스는 독일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43세에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렇게 해서 아내를 만나고 뉴욕에 피트니스 스튜디오를 차린다.  


맞다 당신이 즐기고 있을 지도 모를 필라테스가 사람이름이다. 조셉 후베르투스 필라테스 Joseph hUBERTUS Pilates.








볕뉘.


1.


저 곳은 강변 모래가 아름다웠던 멱감기 좋았던 곳이다. 지금은 여전히 금강댐으로 천막을 치고 농성을 이어가는 그 강이기도 하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합강지점이고 오른 쪽으로 꼬불꼬불 올라가면 부강-신탄진이 이어져 대전으로 간다.


2.


몸리터러시. 운동도 그러한가보다. 청소가 일의 전후를 매듭짓듯이 사소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일의 매듭을 이어주는 부드러움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운동은 부드러움을 필요로 한다고 되새긴다. 나의 얄팍함에 질타를 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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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3-01 1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보통 걷다가 뛰다가 하면서 한 6~7km를 대략 한시간 정도 운동하는 것 같은데 10km를 48분만에 주파하신다니 여울님 참 대단하신것 같아요^^

여울 2026-03-03 09:22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도 꾸준히 러닝해주시는군요. 작년 발목 뒤꿈치 부상이 있어서 예방하는 방법들을 찾고있어요. 쉬운 건 없는 것 같아요. 다치지 않고 꾸준히 컨디션 유지하면서 하는 것이 최상인 것 같아요. 무리하지 않기로 다짐해봅니다^^
 

황수영의 책을 읽은 뒤 <차이와 반복>이 들어올 수밖에 없다. 그동안 놓치고 있던 부분이 물밀듯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사무실에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차이와 반복>을 꺼내들고 여기저기 키링처럼 들고 다닌다. 














<이런이론>모임에서 다음 주제작가는 해러웨이로 정해 텍스트는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다. 읽었는지 말았는지 어디까지 봤는지도 가물한데, 일단 찾고보자.


해러웨이의 책이 책꽂이 어디쯤 있어야 하는데 없다. 어디로 간 것인가 대전 소소에 있나 행방이 묘연하다. 결국 사택에선 찾지 못한다. <트러블과 함께하기 원서>, <선언문>, <겸손한 목격자>만 찾아 합방시켜둔다. 해러웨이는 오래 전부터 찾아 읽기 시작하고 원서 번역까지 맡기면서 읽었다. 하지만 선언문의 내용을 재독할 때, 처음독서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재독을 완료하고 나서이다. 제대로 읽기 어렵겠지만 다시 한번 소화시켜낼 기회가 온 것이다.


더불어 책을 찾다가 의학사의 인물들을 미리 읽어냈음에도 기억에 없어 아련해진다. 그 책은 <근현대 프랑스철학의 뿌리들>이고 밑줄도 선명히 그어져있다. 이렇게 과거는 비의식 어느 편인가 꽂혀있긴 한 것이겠지. 아연해지지만, 먼 곳으로 우회하지 않고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아 반가운 마음도 든다. 시몽동을 이런 흐름으로 읽어내지 못한 부끄러움도 살짝 들기도 한다. 부끄러움은 내 몫이지만, 이겨넘칠 기회가 온 것이니 설레기도 한다.







경험론자인 윌리엄 제임스를 인상깊게 읽던 기억이 새로운데 여전히 읽는 책 속에서 언급이 많이된다 싶다. 책들 사이 그가 대학교육만이 아니라 우주까지 관심을 가진 것은 긴가민가 했다. 그런데 책꽂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세상에나. 읽어보지도 않은 것인가?  다원주의자로서 제임스, 다중우주의 앞선 주장자인지 좀더 살펴봐야겠다. 





볕뉘


책들을 찾다가 못찾고 모둠별로 따로 모아두기만 해둔다. 읽겠지. 어디 도망가지는 않을꺼야. 흥미로운 독서가 봄처럼 기다리고 있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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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손에게서 시작해보자. 그에게 생성은 시간과 동의어이다. 시간은 작용한다. 작용하는 시간은 족적을 남긴다. 시간의 족적은 세계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움을 드러낸다. 그래서 시간의 작용은 곧 창조이다. 352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들은 본질이나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들은 예측과 반복이 가능하다. 반대로 자신보다 상위의 힘에 종속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사건은 각자가 최초로 세상에 던져지는 한에서 탄생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예측가능하기는커녕 자신의 독자성과 더불어 생겨나고 또 그렇게 진행된다. 그러므로 사건은 세계에 단 한 번 주어진다. 일회성과 현존재성이 바로 그것의 본질이라면 본질이다. 352

 

이질적 사건들은 전개되면서 단지 흩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가 나름의 틀로 어렵사리 인식할 수 있는 경향들을 보여 분다. 경향은 단어 자체의 의미에서 필연성과는 관련이 없으며 우발성이 어떤 방향성을 띠고 집적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경향들의 축적이 곧 기억과 역사를 이룬다. 역사는 생성의 운동이다. 353

 

창조로서의 시간의 또 다른 특징을 이루는 것은 생산적 순환성이다. 사건들은 단선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복수의 사건들이 뒤엉킨 실타래처럼 무언가는 되풀이되고 다시 돌아온다. 기억과 역사는 이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일정한 경향들로 응집되면서 스스로를 자신 안에 반영하는 자기지시적체계를 이룬다. 베르그손이 제시하는 다양체 또는 잠재성의 현실화 도식은 바로 이러한 복잡성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다. 잠재성의로서의 초의식은 상호침투하는 무수한 경향들을 내포하며 생명적 약동의 폭발을 통해 현실화된다고 가정된다. 353

 

베르그손에게서 유전이란 현상은 고정된 법칙이 아니라 약동의 전달이다. 하지만 약동은 유한 한 힘이고 생명의 사건들은 무엇보다 지나간 흔적 위에서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의 역동적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자신이 처한 역사적 맥락과 환경 속에서 자신의 다른 얼굴을 만난다. 생명 현상들은 내적 역사이든, 외부 환경이든 간에 주어진 조건들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들 자체외 일체를 이룬다. 354

 

깡길렘은 유기체가 가장 하위의 형태에서부터 이미 긍정적 가치에 대한 선호와 부정적 가치에 대한 거부로 이루어지는 역동적 양극성을 보여 준다고 한다. 역동적 양극성의 작용으로 생명체는 부정적 변화에 대처하고, 긍정적 변화를 전유하는 자신만의 규범을 설정한다. 규범을 설정하는 유기체의 능력은 자신의 내부에 긍정적 가치와 부정적 가치에 대한 기억을 축적하는 데서 비롯한다. ...우리는 규범성의 능력이 생명체가 수행하는 고도의 자기지시적 활동이자 생산적 순환성임을 알 수 있다....깡길렘 역시 베르그손과 같이 생명체게게 환경은 물리화학적인 필연적 현상의 총체가 아니라 매번 달라지는 사건의 형태로 나타난다. 생명체에게 환경의 변화가 불확실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깡길렘이 새를 받쳐주고 있는 것은 나뭇가지이지 탄성의 법칙이 아니다...환경의 불확실함이란 엄밀하게 말해서 그 생성이며 역사이다.”라고 말할 때 그는 생명의 세계가 법칙적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수준의 현상이라는 것, 즉 생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다. 356

 

시몽동은 깡길렘과 달리 물질계에서 출발하여 그 생성의 특징을 찾아낸다. 이 점에서 베르그손과 대립점에 위치한다. 결정의 형성과정은 물질이 단지 흐름이 아니라는 것, 그것조차도 개체화과정을 겪음으로써 개체로 생성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로써 그는 물질적 연속성에 단절이 도입되는 정확한 계기가 있음을 보여준다. 결정화 과정은 마치 생명체가 엔트로피의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주어진 에너지 조건을 이용하여 구조화되는 비가역적 과정이다. 시모동은 개체화과정이 모든 종류의 실체주의에 대립하는 생성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결정화과정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사건으로 일어난다. 357

 

결정형성과정은 생산적 순환성을 나타낸다. 시몽동이 정보이론으로부터 차용한 내적공명이라는 말에 잘 표현되어 있다. 개체화가 진행될 때 한 지점에서 일어나는 일은 계의 다른 모든 지점들에 반향된다. 결정의 형성은 싹으로부터 극성을 띠고 응집되면서 이 특징을 주변의 다른 분자들에 계속 전달하는 과정이다. 구조의 탄생은 에너지 조건이 내적 공명에 의해 계 전체에 반향됨으로써 가능한데 이는 일종의 자기지시적 활동이라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시몽동이 생성을 존재와 대립시키지 않고 그 자체로 적극적 존재로 인정한다는 것, 생성이 존재가 자신과 관련하여 스스로 상전이라는 능력, 그러면서 스스로 용해되는 능력에 상응한다....베르그손이 생명과 의식의 현상에서 생성의 문법을 발견하고 물질게에 대해서는 이를 소극적으로 적용하고자 했다면 시몽동은 그것을 물질계와 생명계에 공통적으로 확립하고 그 관계를 공고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358-359

 

들뢰즈의 경우 어떤 발견의 논리보다는 종합의 논리로 자신의 철학을 일구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베르그손과 깡길렘, 시몽동이 각각 생물학과 의학, 물리학에 직접 조회하고 그 자료들을 분석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기초 개념들을 구성했다면 들뢰즌 무엇보다 철학적 사유의 역사에 조회하여 주요 개념들을 종합하고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새롭게 전유하는 것같다. <<차이와 반복>>에서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화두로 삼는 것처럼 개념의 발명으로 이어져 생성철학의 역사의 중요한 획을 긋는다. 359

 

즉자로서의 반복은 없다. 차이만이 즉자적이다. 생성으로서의 반복은 언제나 일회적이고 독특한 차이와 관계하고 있다. 이념의 세계에서 차이가 잠재태로 존재한다면 생성-반복의 세계에서 그것은 강도차로 나타난다. 강도차는 언제나 어떤 불균형, 불안정, 비대칭, 일종의 틈새와 간격들로 구성되는 역동적인 질서이다. 강도차로 나타나는 반복은 개체화 속에서 애벌레 주체의 강요된 운동에 의해 새로운 질서를 구성한다. 생성은 플라톤에게서와 같이 영원성의 타락이 아니라 베르그손에게서처럼 잠재성의 현실화, 니체에게서처럼 유일무이한 힘이 자신의 역량을 창조적으로 실현하는 방식이다. 360-361


볕뉘


목차의 2장에만 체크표가 있는 책이  <베르그손의 고고학>이란 책때문에 다시 불려나온다. 베르그손의 책들을 모으다가 어 이 책 왜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지란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깡길렘을 읽고, 의사, 의과학에 대한 관심. 물리학, 화학과 다른 결을 갖는, 진리에 대한 접근 방법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제야 나타날 수밖에 없구나 한다. 


이 책에서는 비샤부터 의학의 역사와 독특한 프랑스 과학-철학사의 개요도 확인할 수 있다. 팩트체크라고 해서 우리는 사실이란 것이 명백히 있다는 착각을 은연중에 한다. 사실의 자연사에 따르면 이 또한 개인-집단-현실의 요동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질병의 역사로 보면 이러한 관점을 확연이 얻을 수 있다. 물리학 뉴턴-아인슈타인에 사로 잡혀 명확하다고 여기지만 그 또한 사실이 아님은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자유스러운 것이나 고정된 관점 사실이라는 것도 그러하다. 최근 핫한 블랙홀은 어떠한가. 호킹복사를 통해 사라지는 블랙홀이 관찰되기도 하지 않는가.


이처럼 진리하는 것도 지천에서 시작해 강물을 이루고 결국 바다에 이르는 것이다. 진실이라는 것이 개인-집단-현실의 역동적 인식으로 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프렉은 이 개념으로 중력장이란 표현을 쓴다. 통약불가능한 패러다임의 퍼즐이 아니라 사유양식과 사유집단이 만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한다. 퍼즐의 맞추거나 방정식의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퀼트같이 삶을 나누거나 삶을 만들거나 삶을 넘치게 하는 일인 것이다.


기후위기라고 아무리 외쳐도 현실은 요지부동이다. 기후정의를 외치기 위한 활동가들의 퍼포먼스는 심금을 울리지 못한다. 자본과 국가는 녹색을 칠하며 전쟁마저 서슴지 않는다. 빙하가 녹고 산호초가 죽어가도 여기는 딴 세상같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 미래세대와 어떤 교감이 실마리처럼 이어질 수 있을까? 진리는 있는 것인가.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가?


위 책에는 주류철학이 아니라 비주류의 철학을 끌고가는 저자의 외침도 섞여있다.  사실이 아니라 관심이나 감식의 방법으로 모아낼 수 있을까? 아마 당위보다는 유연해질 수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 아니 살아있는 사람들이 기본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조금 더 나은, 조금 더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할 수 있을까? 물론 지금보다 나와 내새끼의 삶의 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쫓겨가는 삶이 아니라 달라지는 삶과 운명이라는 잣대가 조금씩 서로 물들어간다면 지구라는 얇은 대기권의 막에 대한 관심은 높아질까? 아마 그럴 것이다. 전쟁금지 주간이나 전쟁금지 세계지도자, 제2의 평화협약, 아프리카전역기본소득확대시행 예기치못하는 사건들이 일어나면 조금 분기점은 마련할 수 있을까.  작고 조그마한 생각씨들을 덧붙여본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견하듯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의 확율을 높여가는 작은 일씨들의 범벅이 모여 흘러가면서 아마 이루어질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정해진 날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들이, 삶이 깨우침들이 강물로 흘러가다가 또 다른 우연과 겹쳐 또 다른 흐름길로 갈 것이다. 집단의 기억은 이렇게 지금-여기와 다르게 만나 과거를 바꾸며 미래로 흘러들어갈 것이란 것은 명확하다. 


아무 것도 알 수 없긴 하지만, 지금과 다른 방식이 유효한 것 같다. 거대한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거대한 폭포의 물결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지금이다. 거대한 전환을 예측할 수 없지만, 운명처럼 불쑥 올 것은 확실하다. 68혁명의 형식을 빌릴 것인지 극도로 지난한 전쟁들의 형식을 빌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 새로운 흐름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록 낙관의 확율은 커지고 전쟁의 상흔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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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시간이 있고, 그것은 공간적이 아니다."라는 문구가 쉽사리 입에 맴돌지 못한다. 비문이기도 하고, 한참을 다시보고 나서야 뒷말을 있는 말이 앞 문단을 가르키고 있음을 알게 된다. 베르그송 당신 말을 잘 못알아 듣겠으니 한마디로 정리해달라는 사교계의 부인들의 조크에 이렇게 반응했다 한다. <의식적....어쩌구 저쩌구의 시론>은 초기에 잘 읽히지도 않았다고 한다. <물질과 기억>이 인기를 끈 후에서야 읽히지 시작했다 한다. 


그래서인지 베르그송은 <의식적 어쩌구...>를 <<시간과 자유의지>>라는 제목으로 바꾸고 싶은 듯하다. 시간과 자유의지.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길은 베르그송에게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닌 듯하다. 시간과 공간. 물질과 관념. 결정론과 목적록. 분석의 기초를 무엇으로 가져갈 것인가? 이분법의 울타리에 갇혀 진자처럼 왔다갔다만 하는 사유의 철학의 유물론과 관념론이란 집착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끝까지 제 것으로 꼬리표를 달려고 하는 아집.  필연은 그렇게 기회를 잃어버리고 자신이 우연에 풀려날 수 있다는 미지의 것을 사유하지 못한다. 


토끼와 거북이. 제논의 역설처럼  우리는 공간을 잘게 쪼개서 무한으로 근사하는 사유에 집착하면, 시간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베르그송은 그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시간과 자유의지.  자연스럽게 공간 속의 한 물체로, 공간이나 장소 가운데 관조하여 바라보는 고체로서 사유를 시작하면서 부딪치는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사물은 이렇게 밖에서 바라보는 것과 사물 내부의 변화. 시간을 통해 소외, 반성 의외의 면들이 포착되는 것을 포함하여야 전일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흐름이 아니라 정지한 찰나의 순간으로 사유한다. 그것이 문제다. 더구나 고질적이다.


그래서 지속을 말하며, 기억을 말하며, 경험을 논하며, 느낌을 얘기해야 한다. 심신은 이렇게 제3의 생각을 끌어들였을 때만 분리되지 않는다. 경험, 느낌, 깨달음은 과거를 가져오며, 현재를 다른 미래로 이어준다. 과거-현재-미래가 결코 분절된 것이 아니기도 하다. 


사람은 스피노자가 얘기하고 베르그송이 다짐하듯 기쁨과 슬픔, 그리고 욕망이란 삼요소로 삶은 느끼고 자신의 관심사와 관점으로 이루어나간다. 그때 그때 감정들은 신체와 어우러지며 감정의 파노라마를 이루어 앞으로나를 이루어간다. 그 세가지 요소때문에 각자는 다를 수밖에 없다. 홀로 살 수 없기에 나와 집단, 현실이라는 인식의 삼요소 역시 저 바다라는 인식의 지평을 향해 달리 지천으로 강으로 모여가며 사회적으로 농축된다. 이것이 거대한 흐름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 살아있내는 모든 것들은 서로로 향한다.


브루노 라투르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라고 했듯이 스텡게르스는 문명화되기를 말하고 스스로 자신의 성을 만들어갔던 과학의 물결 역시 연관성의 게임이라는 자각이 있었더라면 또다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근대라는 것은 직선으로 이어진 평탄대로가 아닌 것이다. 지나온 모든 돌보지 않았던 모든 부분적 연결의 생태를 인지하고 느끼거나 깨달을 때야 비로소 모던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학문의 재학문이 있어야 하고 사상의 재사상의 역류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결코 더딘 일이 아니라 앞으로의 미지를 알고 느낄 수 있는 지름길일 것이다.


아직도 과거, 현재, 미래를 따로 따로 보는 공간론자이기에 그것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 뿐이다.  양자터널링처럼 당신의 작은 앎이 과거-현재-미래를 스치듯 잇기를 바란다. 이것이 아마 시간의 사유이기도 할 것이다.  어느 순간에 작은 깨달음들이 모여 번질 수 있을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런 우연의 여신은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없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우리도 우리의 미래세대들도 다 잘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만 우리만 잘 살아내야한다는 강박을 벗어버릴 수 있다면, 그것이 한 방편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멀리 길게보는 길로. 지금도...


#달팽이책방

#이런이론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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