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왔다는 소식에 들러 매대를 살펴본다. <에너지 지정학>이란 책과 이 책이 끌려 구매한다. 금요일 밤과 다음날 새벽에 마저 읽어낸다.


<블랙홀> 시리즈들을 읽어낸지도 일 년이 되어가는 것 같다. 뜨문뜨문한 강독으로 새로운 관점들만 남지 기억에 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기억조차 희미해지는 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환기시키는 독서가 있다면, 그래도 묵직하게 남거나 이어지는 것이 있다.


블랙홀도 블랙홀 나름이다. 시원찮은 녀석은 호킹복사이론에 따라 시간의 지평선에 반짝거리면서 입자-반입자쌍이 무게감량이 이어져 그 녀석 역시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물질이 반물질보다 겨우조금, 아주 미세하게 많아지면서 이런 사달이 난 것은 지금의 물리학자뿐만이 아니라 외려 고대인들이 더 치밀하게 사유하거나 상상력은 더 뛰어났다는 생각도 든다. 회전하며 소용돌이치는 에너지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 시작한다. 태초는 늘 그렇게 만들어진다.


12개의 입자와 4개의 힘을 갖게 하는 매개입자로 세상은 이뤄진다. 읽고 난 뒤에 제미니에게 여러 질문들을 던져본다. 깔끔한 답변들이 나온다. 그래 이제서야 정리가 되는구나. 또 다른 한 걸음을 디딜 수 있겠구나 한다.


볕뉘


덧붙여 파동함수와 슈뢰딩거의 방정식, 양자터널링은 덤으로 확인해야 한다. 양자역학의 세계로 접어들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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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법‘*

봅시다
이런경우와 저런경우 이러저러한 경우가 있는데 

안쪽으로 이렇게 좁혀들어가고 

밖에서 저렇게 이렇게저렇게 

무한으로 다가서면 

이 답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직선(지렛대) ㆍ포물선 ㆍ무게중심

ㆍ 원기둥 ㆍ원뿔 ㆍ구ㆍ 원주율도 

이렇게저렇게 

96각형으로 

안팎으로 다가갑니다.


보세요.

거침도 없고 빈틈도 없다
미래세대에 읽힐 간절함도 섞여있다

물위에 팽이같은 물체를 놓고
봐요 봐 저게 뒤집힐까요
회전하다가자리잡을까요
그래그래요
밀도마다 다르죠


<* 1998년 200만불에 팔린 양피지에 적힌 고서 제목이다.>
#아르키메데스












입자가속기로 사본들이 빛을 보게 되었단다. 조르다 브루노가 무한을 주장하다 화형당했지만, 고대에 벌써 동역학 전제의 수학물리학 처세부와 명예 신은 의인화되지 않은 시대가 무척 길었다.


2.



‘미래세대‘

당신은 알고 있었으면서 무엇을 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에서야/부터
써/스며/번져
내려가는

+/× 더하기와 곱하기

* 이자벨 스탱게르스,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에디토리얼

당신은 아는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나요?

그것이 당신의 관심사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나요?








3


‘필연‘*

있다고 여기는 순간,
벌써 한 번의 기회를 잃어버린다

우연이라 여기면 그래도 다음의 희망이라도 남을텐데

이거냐/저거냐도
이와 유사한 예단으로
다가오는 기회와 희망을 놓쳐버릴 거다.

괄호를 만들고
그 안에 당신이 원하는 걸 하나하나 넣어보자
진선미이데아 ㆍㆍ돈ㆍ신ㆍㆍ
하나씩 확인해보며
점점 숫자를 늘려
무한으로 가보자

파이가 3과 4사이란 것의 개략도 모른 체
당신은 추상이란 벽에 다가서기만 할 뿐
현실이란 구체의 울타리를 한번도 넘어보지 못하리라

바꿔서
빗껴가는 어슷함에 기댄다면
우연의 방문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저 울타리 밖
희망과 매번 만날 수 있으리라

점점

무한 번 다가서고 있음을 느낄 수 있으리라.
현실은 늘 그 안쪽이란 것도

*칼 맑스, 고병권 역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그린비


물론 내 말이 아니다 23살 청년. 그리스철학에 통달한 맑스의 이야기다. 그는 참 많은 답들을 알고 있던 듯하다. 에피쿠로스ㆍ루크레티우스의 사사師事자들은 왜 이리 많은가

4.



4.


‘철학‘*

묻는다
나이 들어서도 해야하는 거냐구

반문한다
행복의 시작에 나이가 있냐구

*에피쿠로스 편지글 가운데



5.


‘각주‘ *

서양철학과 삶이란
여태
플라톤의 것이다.

다행히
아르키메데스의 것이
여집합처럼 뉴턴갈릴레이로 이어졌지만,

빈 시공간들은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로
곱해져야 유쾌한 퍼즐이 맞춰진다.

이제서야
겨우
싸움을 거두어낼
반보를 디뎌낸 것이다.


*자생적 루크레티우스주의자들


볕뉘


 이제서야 다시보거나 완독하게 된다. 견주어보면서 그때 그때 느낌들을 남기도록 노력해본다. 어디쯤 다가서게 된 듯 싶다. 하지만 늘 거기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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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시간


에피쿠로스는 완전히 달랐다. 본질이 세계로부터 배제된 시간이 그에게는 현상의 절대적 형식이 되었다. 말하자면 시간은 사건의 사건(속성의 속성)으로 규정된다. 사건은 일반적으로 실체의 변화(변이)다. 사건의 사건은 자신 안에서 반성하는 것으로서의 변화, 즉 변동으로서 변동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상계의 이 순수한 형식이 시간이다. 101쪽


시간이 현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습은 원자의 개념이 본질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습과 마찬가지다. 즉 모든 규정된 현존들의 대자 존재로의 추상과 파괴, 그리고 환원이 바로 그것이다. 102


에피쿠로스는 현상으로서 현상, 다시 말해서 본질의 소외-본질은 현실 안에서 소외로서 자신을 나타낸다-로서 파악한 첫번째 사람이었다. 102


마지막으로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시간은 변동으로서 변동이고, 현상의 자기 안에서의 반성이기 때문에 정당하게 현상적 자연은 객관적인 것으로 정립되고, 또 정당하게 감각적 지각은 비록 그것의 토대인 원자가 이성을 통해서만 인식된다 하더라도 구체저 자연의 실재적인 판단기준이 된다. 실제로 시간은 감각적 지각의 추상적 형식이기 때문에 시간은 특수하게 실존하는 자연으로서 자연 안에 붙박혀진 필연성이다. 102


감각적 세계의 변화로서 변화, 변동으로서 변동이라고 하는 시간의 개념을 구성하는 현상의 자기 안에서 반성은 의식적 감성 안에서 각각의 실존을 갖는다. 따라서 인간의 감성은 체화된 시간이고, 감각적 세계의 실존하는 자기 안의 반성이다. 103















볕뉘


1. 


미셸 세르는 저작에서 베르그손이 루크레티우스를 끼고 살았다 한다. 수제자로 칭할 수 있다고 말이다. 베르그손은 <물질과 관념>이 아니라 <물질과 기억>이라고 했다. 그는 이미 기존의 이가(二價), 이분의 낭패를 잘 깨닫고 있었다. 물질과 기억, 경험, 감각. 사물자체의 본성과 그것이 용해되는 현실이라는 대양의 표식 역시 같은 궤를 간다.


2.


청년 마르크스를 읽으면서 4장의 이 대목을 보며 깜짝 놀라게 된다. 시간에 대한 무수한 서술을 읽어냈지만, 이렇게 명쾌함은 없었다. 디오게네스의 에피쿠로스 편(3편의 편지)의 기술이 나온다. 에피쿠로스는 당부한 규정, 자연학, 윤리학 세 편의 편지를 쓰면서 이 점은 꼭 기억하라고 반복해서 기억하라고 그러지 않으면 놓치게 된다고 말이다. 맑스 역사 토 하나도 높치지 않고 저작들의 오류들을 끌어모아 다시 짚어낸다.


3.


명쾌함이란 특출난 방법이기도 하지만, 길이기도 하다.



4. 


추상론자인 데모크리토스가 평생을 그 사슬에 메여 세계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지만, 현자에게도 답을 찾지 못했다. 그 많은 세계경험도 답을 주지 못한다. 갇혀 산다는 것이 이리 무서운 것이다. 등잔 밑은 정녕코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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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2-03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픽쿠로스하면 아포니아와 아타락시아를 주창햔 쾌락주의 창시자인줄만 알았는데 다른 철학적 사유도 하셨네요.

여울 2026-02-03 21:25   좋아요 0 | URL
그리스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집대성된 것이 아니라 에피쿠르스 루크레티우스 아르키메데스를 감안해서 봐야한다고 해요. 이분법의 사유가 아니라 무한의 사유가 이미 있었던거죠. 에피쿠로스 저작은 남은 게 거의 없어요. 디오게네스 철학 10권에 편지글 세 편이 있는게 대부분인듯요. 그것도 놀랍다는
 




















미셸 세르과 루크레티우스를 번갈아 읽고 있다. 첫 독서의 찬란함을 잊을 수 없어, 각주까지 꼼꼼하게 챙기고 있다.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를 설렁설렁 읽고 그어둔 밑줄은 권당 말미에 조금뿐이다. 이런 흔적들을 새삼스럽게 다시 읽어내야한다는 깨달음이 미셸세르의 작품때문이기도 하다. 빗나감, 클리나멘. 어긋남. 폭포의 사유, 팽이의 사유, 난류의 사유, 만물은 대양과 같다는 지평의 확대와 연결이 필요하다는 새삼스러움 말이다.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의 완결적이 구조와 종합적인 시야는 좁혀질 수가 없었다. 다시 읽는 동안, 별이 아니라 별자리들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알 수 있게된다. 스피노자가 이미 겹치고, 이 사유를 바탕으로 이미 무한의 접근이 가능했다는 사실에서는 아연해지게 된다. <1417년, 근대의 탄생>은 이 책,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가 발견된 해이기도 하다. 마키아벨리가 필사를 한 책이기도 하고, 다빈치는 물론 르네상스인들이 또 다른 하늘을 만들어 낸 계기가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미적분학은 이미 있었다.


미셸세르는 루크레티우스 못지 않게 저작에서 엇비슷한 비중으로 아르키메데스를 불러낸다. 동역학, 떠있는 물체에서 사유(부력)이나 회전하면서 움직이는 사유(팽이), 폭포의 사소한 어긋남으로 출발하는 사유는 우리가 물리학에서 기초 모델로 삼는 진자나 당구공이 아니다. 그래서 아르키메데스의 저작의 구조가 이런 종합적 사유를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아쉽게도 국내 번역본은 없는 듯싶다. 아래 수소문하여 읽고 있는 책들에서 아쉬움을 달랠 수는 있다.


1998년 양피지 고서에 적혀있는 아르키메데스의 <방법>이라는 글은 200만불에 경매로 낙찰되었고, 최근 입자가속기로 그 글들을 완벽하게 볼 수 있게되었다 한다. 몇 권을 읽으면서도 방법론은 마르크스의 변증법, 아니 마르크스의 박사논문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인데 분명 여기서 배웠음이 틀림없는 듯하다. (클리나멘, 어긋남이 포인트다.)


이렇게 다시읽기를 통해, 지금의 신유물론의 사유가, 브루노라투르가 미셸세르에 이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에피쿠로스의 저작의 대부분은 남아있지 않다. 아르키메데스처럼 현실에 존재하면 어떨까 싶다. 이런 사실은 디오게네스의 책 마지막 편에 남겨져 있다.


볕뉘


 미셸세르, 캉길렘, 바슐라르로 이어지는 과학철학, 과학비평, 과학사에 진도를 더 나가고 싶어진다. 출발한 이분법의 틀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란 문제의식을 쫓다보니 서서히 감이 잡히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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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주문을 작은 책방에 넣었지만, 궁금하다. 가까운 도서관 들러 <프랑켄슈타인>과 <메리 셸리>라는 검색어를 넣어본다. 출력한 자료위치안내를 보니,  843.이 아니라 982.02 << 1816년 여름, 우리는>>이라는 책도 있다. 이건 뭐지라고


그렇게 찾은 책을 대출하여 앉는다. 가벼운 최근 책이 손에 들어온다. 퍼시 셸리와 이종 사촌과 유럽을 여행한 기록이다. 그 유명한 바이런과 함께 말이다. 영국 도버에서 시작해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등을 여행한 기록이다.


그리고 잠깐, 본론으로 들어가기 앞서 삽화가 너무나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패브릭 조각, 인물의 형태는 작업하고 싶던 것들도 갖고 있어 놀랍다 싶다. 아래 다른 책의 삽화, 버니 라이트슨의 작품도 놀랍긴 한가지. 


사실은 <여성의 권리옹호>라는 작품을 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딸이 저자란 걸 몰랐다. 남편은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관심밖에 있던 작품인데, 아래의 <자율적 테크놀로지>의 서술 말미부분에 테크닉, 기술정치의 문제를 얘기하며 정리하는 셈치고 묘사하는 것이 이 프랑켄슈타인인 것이다. 


스스로 자신이 무엇을 만든 것인지 섬뜩한 공포에 눌려 외면하는 모습은 정작 애초의 과학의 욕망과 관계없다. 시체와 죽음을 너머서는 열정이란 집착에서 버려진 것들이 한꺼번에 자신에게 찾아오는 아이러니. 그것에 눌려 그가 만든 피조물을 철저히 외면한다.


피조물 역시 의무와 책임이라는 것을 알려주지도 않는 창조주에 대해 어떻게 살아내야하는지 조차 알 길이 없다. 서로의 결핍이 가져오는 원한과 복수는 거울처럼 한 쌍이다. 끊임없이 자신이 옳았다고 하면서 결말을 향해가는 저자의 서사는 그것이 한 몸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죽음 뒤에 읊는 말, 다른 방법조차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다. 서로.


이는 남은 인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아틀라스'를 전시하고서도

스스로 되묻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볕뉘


낯선 곳의 여행이 프랑켄슈타인의 묘사의 대부분이다. 표현력은 갇힌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낯설게하는 곳들에서 스며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고 싶다. 여기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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