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설연휴다. 월요일 27일. 생산물량이 어느 정도 있어야지만 다음 달 정산에 유리한데 여러 제안을 해보지만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 필요한 원재료 수급이 불가능해 쉬기로 한다. 모처럼 긴연휴는 1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기도 하다. 불황도 한 가운데 있길 희망한다. 


올라간 길에 전시 협의를 위해 영화관에 들러 한 측면을 책장과 서재 형식으로 꾸미는 걸 손쉽게 합의하고 집에 있던 책들도 옮겨 채우기로 한다. 몇 가지 아이템 가운데 하나는 해결, 나머지를 궁리하고 포항에서 차로 옮기면 숙제의 절반은 해결되는 것이다.


1월 마지막 날. 독서 세미나가 있어 전날 내려와 2부를 읽어낸다. 처음의 밑줄과 달리 읽히는 부분들이 많다. 속도를 내느라 편식을 한 게다. 어쩌면 저작의 앙꼬인 셈이다. 지금까지 찐빵 겉만 호호 불면서 먹은 셈이다. 작업실에 들러 옮겨갈 작품들을 손보고 자주 가는 단골카페에서 휴식도 취하려는데 연휴라 휴무다. 더군다가 챙겨갈 한 무더기의 작품들이 대전에 있는 것인지 일터와 사택에 있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요란스럽게 왔다갔다 이동하여 확인해본다. 


오늘 세미나의 읽기 테마는 <탈-정체화>와 <틈새>다. 자아-해체. 낯익은 대목이지만 처음읽는 분들에게는 여전히 생소하여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 도식화된 자기 계발서를 읽는 것과 사뭇 다르다고 얘기를 나눈다. 별자리 가운데 몇 가지 종류의 개념어를 읽어내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한다. 시인을 제대로 읽기 위해 그가 잘 쓰는 단어를 골라내듯이 인문-사회과학서는 저자별 개념어와 서론과 목차에 방점을 두어 읽으면 훨씬 수월하다고 코멘트를 해둔다.


다행이다. 어디에 있는 지 확인이 되어 안심이다. 세미나 한 뒤에 작업실의 그림들을 골라서 이동하여 플래너와 만날 시간을 미리 보낸다. 토요일 오후 세시. 그 쯤이면 소소아트시네마에 죽이되든 밥이되든 전시할 작품들이 모이게 된다. 드디어 2부. 계급횡단자들 세미나가 시작된다. 발제자 마다 토론자마다 다들 완독을 하였지만 자신의 시선으로 읽어내는 경향들이 하나 둘 드러난다. 주제어마저 자신의 선입견대로 읽어낸다. 어쩔 것이냐. 민중의 저자 미슐레에 대한 대목도 나오는데 이 마저 설명을 저자의 의도로 착각하고 만다. 개인-사회라는 이분법이나 이원론의 개념에 걸려 헤어나오지 못하기도 한다.  어떡하냐 어떡하지. 


하지만 우리에겐 달팽님이란 토론 명장이 계시다. 차근차근. 또박또박 밑줄을 읽어내면서 짚지 못한 부분을 확인해낸다. 부르디외, 아니 에르노, 까뮈, 미슐레 등등 우리는 또 다른 별자리들을 짚어낸 지도 모른다. 가지고 간 작품들은 스토리어 이자 플래너 서진배시인의 도움을 받아 아름다운 별자리로 태어날 듯 싶다. 긴 여독 끝에 막걸리 한 병과 가지고온 반찬, 두부 한모로 빛나는 저녁으로 갈무리한다.

제2부 밑줄펼치기 ▼

 

I. 탈 정체화

인정을 위한 투쟁은 대다수의 경우좋든 싫든 하나의 성적 정체성 또는 사회적 인종적 정체성을 사회가 수용하도록 촉구하고 문제의 정체성 범주에 대한 존엄성과 권리를 부여하도록 사회에 압력을 가하는 운동에 기초하기 마련이다이 과정 속에서 그러한 정체성 정치에 기초한 사회운동은 개인을 고정된 추상적 규정성예컨대 여성동성애자노동자부르주아지기업가 등등의 범주 속에 가두는 위험을 치르게 된다. 161

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정 개념이라는 문제틀은 그것이 개인들을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에 고착시키고 개인들을 단지 하나의 유형이나 그들의 독특한 본질을 표현해 주지 않는 부편적인 하나의 공통 통념으로 환원시키게 될 때 그 불충분성을 드러낸다그러나 한 개인은 결코 성별인종사회적 지위 등의 불변의 특성에 구속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기질 개념은 섬세한 차이와 존재들의 특수성을 고려하도록 또한 갈등적 관계들을 인정의 용어보다는 인식의 용어로 사유하도록 이끈다. 161

 

개인적 자아의 해체팡세자아란 무엇인가” 파스칼은 세 단계에 거쳐 자아 개념을 해체한다. 1. 창밖에서 거리를 내다보는 구경꾼의 관점에서 자기를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2. 사랑에 빠진 연인의 시선에서 자아를 고려한다. 3. 나의 판단력과 기억력때문이라면 나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것일까노화 혹은 사고와 질병 등은 영혼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앗아가 버릴 수 있다사랑은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단지 내게 잠시 주어진 특성들을 향하고 있을 뿐이다그 특성이 신체적인 것인지 정신적인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어떠한 특성이든 그것은 모두 빌려 온 것에 불과하다결론적으로 우리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우리는 다만 몇가지 특성을 사랑할 뿐이다. 162-165 물론 파스칼이 이러한 자아 개념의 해체를 통해서 의도했던 바는 틀림없이 인간이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이 영원히 불안정한 존재라는 점을 증명하는 것따라서 인간은 신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을 통해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만 자신의 실체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66

자아의 유령적 성격 166 잭 런던의 마틴 에덴

 

사회적 자아의 해체:

모든 정체성은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언제나 일종의 사칭이다위인의 조건에 관한 첫 번째 담론171 풍랑을 만나 뜻밖에도 미지의 섬에 내던져진 사내의 경우처럼 우리는 우연한 마주침의 결과로 세상에 던져졌다.. 조난자처럼 사회적 지위를 정당화해 주는 어떠한 공적merite도 없다 173 파스칼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신체와 정신의 가소성이다정신과 신체는 어떠한 상태이든 구별 없이 수용할 수 있다어떤 사람이 절대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욱 유리하고살아가기 더 편한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은 끊임없이 한 곳에서 다른 한 곳으로 이동하는 인간의 본성과 합치하지 않는다한편 기질 개념은 개인들의 통일성과 정체성의 원리로서 실체적 자아 혹은 주체-자아라는 관념이 폐지된 자리에 드 대안을 제공해줄 수 있다왜냐하면 기질 개념이 인과 규정들의 짜임새를 출신과 도착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사유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175

 

이행으로서 기질권위의 조건에 관한 첫 번째 담론』 패싱passing 통행자 누구인 체 하며 이행하기패싱:이라는 말을 프랑스어로는 이행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백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에서 태어난 클레어(패싱의 실천)와 아이린 패싱작품한 방울의 원칙one-drop rule.177 이 단어가 지닌 의미론적 다양성 탓에 이해의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바로 그 다양성 덕분에 선을 넘는다는 의미와 두 세계의 경계를 넘는 밀행자paaeur가 된다는 의미를 표현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179

 

적응과 도태 사이의 계급-이행

아니 에르노는 <<남자의 자리>>에서 나는 내가 지금까지 교양 있는 부르주아 세계로 들어갈 때마다 그 문턱 앞에서 내보여야만 했던 나의 유산을 드러내는 것을 그만두었다적응은 내려 두는 과정을심지어는 새로운 자리를 잡기 위해 기존의 것을 내팽개쳐버리는 과정을 포함한다적응은 예전의 가치와 방식을 버리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따라서 적응은 자신의 허물로부터 벗어나는 일종의 탈피 과정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변신은 결코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그렇기 때문에 계급횡단자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가게 된다. 183

쁘띠 브르주아지와 최상층 부르주아지

상류층 사람들은 상당한 호감을 준다왜냐하면 무엇보다도 그들이 인간 조건의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불평과 불만의 토로를 아예 제거해 버리고 누구에게나 유익한 이타주의의 일환에 따라 실천하기 때문이다이러한 사회에 계급횡단자가 변신하게 에는 필연적으로 일정한 시간과 긴 숙성의 과정을 요구한다왜냐하면 일단 자신의 화법에서 사람들이 거슬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변신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89

표범의 부유한 농부 돈 태로지: “너 귀가 먹은 거야 뭐햐?”라고 말하지 않고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1

 

수많은 유리잔들과 식사 용품들은 그 사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세련미와 화려함을 보여주는 증표라기보다는 오히려 식사 중 결례를 범할지도 모르는 횟수의 증가를 의미할 뿐이다그래서 계급횡단자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만이 아니라 물건들까지도 두려워하게 된다그는 언어의 법정 앞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물들의 법정 앞에 서 있다. 193

 

계급횡단자에게 사건은 자신의 여유로움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라기보다 그의 불만족스러움을 이겨 내야 하는 시험이다스피노자적 용어를 빌려 온다면 자족감보다는 만족을 낳는다자족감이 자기 자신과 스스로의 행위 역량을 관조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기쁨이라면만족은 바랐던 것보다 상황이 더 낫게 이루어진 일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그러므로 만족은 예상되었던 슬픔을 이겨 낸 기쁨의 형식이다계급횡단자의 기질은 무모함과 소심함 그리고 호전성과 유순함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195

복합물 혹은 화학적 합성물로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그의 기질의 형성은 화학적 분자 구조와 유사하다. 195

 

Ⅱ.틈새

 

거리의 에토스

 

계급횡단자는 언제나 경계 주변에서만 맴돌고 있다왜냐하면 사회적 코드에 알맞게 행동하고 상황에 어긋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그에게는 잠시 물러나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고다라서 그의 생각과 실천에는 항상 거리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209

부르디외 이중의 거리 마틴 에덴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하얀 가면,디디에 에리봉 낯도깨비같은 존재 그들의 기질 자체가 긴장 속에 있다. 221

 

마음의 동요긴장 속에 있는 기질.

부르디외 자기-분석을 위한 초고

카뮈 최초의 인간어머니-가사도우미 자크는 수치심과 수치심을 느꼈다는 수치심을 동시에 경험한다왜냐하면 카뮈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크는 세상의 판단과 또 자신의 악한 마음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렇게 해서 수치심은 자가 증식의 폐쇄 회로 속에서 계속 재생산된다. 234 일반적으로 수치심은 생각행동 또는 자신이 보여지는 방식이 나쁜 것으로 지적-그 지적이 옳건 틀렸건 간에-받는 데서 생겨나는 모욕감이다수치심이 원천은 다양할 수 있겠지만 이 감정은 언제나 평가하고 판단하는 자의 시선-이 시선이 외부의 것이든 혹은 내면화된 것이든-에 대한 표상을 함축하고 있다. 235 주체 자신이 판단하는 자와 판단되는 자로 분열되어 있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법이다스피노자가 수치심을 우리에 대한 외부의 비난의 결과로 국한시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비난한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우리의 어떤 행동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으로 정의하는 까닭이다. 235

 

사실 그 누구도 사회적 수치심을 느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자신의 출신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누군가를 단지 부르주아지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혹은 프롤레타리아트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은 키가 크거나 작다는 이유로 상대로 낙인찍는 것만큼이나 부조리한 일이다그러나 이러한 상식적인 주장이 자신이 수치스러운 존재라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 줄 힘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왜냐하면 사회적 수치심은 객관적인 멸시의 상황에 대한 반사적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이 감정은 치욕의 원인이 사라졌을 때조차 계속해서 실재적인 결과들을 생산하는 허구적 표상들을 먹고 자라난다사회적 수치심이 감정은 이 점에서 다른 형태의 수치심들과 동일한 규칙을 따르고 있다사회적 수치심의 발생론 239

 

수치심의 사상계는 삶의 방식과 사회적 실천들 사이의 격차를 존재에서 가치로 이행시키는 절차로부터 생겨난다다시 말해서 존재론적 판단의 가치론적 판단으로 전환이 수치심을 낳는다요컨대 사회적 자긍심이나 수치심은 특정한 환경의 삶의 조건에 관해 단지 어떤 삶은 이러저러하다고 사실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안혹 그것이 저속하다느니 고상하다느니 비난을 규정할 때 생겨난다. 240

 

결국 문제는 세상의 모든 차별을 만들어 내는 존재에서 가치로의 이 은밀한 미끄러짐이 어디에서 연원하는지 알아내는 것이다어떤 점에서 그러한 이행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존재에서 가치로 이행은 역관계들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이다따라서 이것은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지배의 결과이며 그러한 지배 관계를 피지배자들의 동의까지 이끌어 내는 기만적 의식과 결합되어 있는 영속적 지배에 대한 욕망의 결과이기도 하다.240

 

수치심의 상상계는 역사적 우연에 의한 결과인 지배 관계를 마치 실존에 앞서는 본질인 것처럼 둔갑시키고 누군가의 운명이 원래부터 천한 것처럼 만드는 형이상학적 바꿔치기 속임수에 의해 구축된다피지배자들은 지배 관계가 마치 자연적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또한 자신들의 열등성을 타고난 결함이자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치욕의 표식으로 여길 정도로 지배 관계를 내면화하게 된다수치심은 변하지 않는 본질이 된 모멸감의 체화에 기초한다. 242

 

신생전설스탕달 적과 흑쥘리앵 소렐 주워온 아이부유한 누군가의 사생아 250

 

타자를 통해 자기자신으로 존재하기

 

어떻게 하면 이행의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찢기고 파열된 기질의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모든 어려움은 소외되지 않으면서도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되는 것에 있다타자성이냐 소외냐이것이 계급의 변화를 거치면서 일어나는 자기-변형에 걸린 판돈이다. 256

 

강인한 영혼은 올라가는 일이든 내려가는 일이든 상관없이 수행할 수 있다. 260

 

민중 계층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연대와 상부상조는 그 밖의 다른 자원이 전혀 없는 결핍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전된 행동 양식이다그렇다면 과연 이것을 자연적 선함과 온정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연대는 빈자의 유일한 자산이다따라서 연대가 알아서 잘 지내는 유복한 계급에는 널리 퍼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울 일도 아니다자기 자신으로 남는다는 것그것은 민중으로 남는 것을 말하는가그러나 우선 실체적 자아라는 것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이 민중적인지 부르주아적인지 논하는 것은 무용하다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를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가장 어려운 것은 계급 사다리를 오르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 혹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이는 우리가 엄격히 말해 민중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아비투스 도야를 통해 민중이 된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하다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민중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생겨나고 변천하는 여러 민중만이 있다. 265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과 화해는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에 대한 명예 회복을 함축하고 있다이것은 어빙 고프만이 낙인의 전도라고 부른 것다시 말해서 모욕의 기호를 도리어 당당히 드러내고 자신의 상징으로서 주장하는 것을 통해 일어난다. 268

 

미슐레가 보기에 개인적 수준의 계급의 변화는 집단적 진보의 운동과 연장선상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올라간 자들이 자신의 색을 잃고 싶지 않다면 그들은 야만인이 되어야 한다즉 계몽하는 자가 되어 되찾은 자긍심의 기호들을 널리 퍼뜨리는 기수가 되어야 한다이는 계급횡단자들이 단순히 사는 곳의 경계를 바꾼 이행자로 존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과 부정의한 속박의 굴레를 계급과 함께 파괴하고 승리의 역사를 향해 전진하는 개척자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274

어쩌면 이상화된 형태의 민중에 대한 지적 옹호야말로 배신이 극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한 옹호는 후견주의 우민 정치 이상으로 일상적 현실에 대한 무지와 경멸을 드러내고 있다사실 민중은 자신의 해방보다는 억압 상태를 지속시키는 온갖 소외와 편견으로 가득한 일상 속에 살고 있다민중 계급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이 민중 계급의 상당수가 여성동성애이민자의 권리와 그들의 사회적 자리를 인정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진보적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과 상충하지 않는다그러므로 수치심과 관련해서 구별한 것과 마찬가지로 건강한 자긍심과 해로운 자긍심을 구별하고 출발 계급와 도착 계급에 대한 이중의 이상화를 자제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277

 

계급 횡단자가 타자를 통해서 그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죄책감을 제어함으로써 이 감정을 동력원으로 바꾸어 자신을 짓누르는 것을 지렛대로 변형시키고 기장들을 오히려 발돋움판으로 사용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은 없다. - 이 죄책감이야말로 결정적인 것입니다이 감정이 제 글쓰기의 기저에 있다고 한다면 그와 동시에 글쓰기가 저를 그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281

 

나는 아버지의 말과 제스처취향아버지의 삶에 흔적을 남긴 사건들나 역시 공유하고 있는 한 존재의 객관적인 기호들을 모아보려 한다추억의 시도환희에 찬 조롱도 없을 것이다평평한 글이 자연스럽게 쓰여졌다내가 부모님께 중요한 소식을 말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식 그대로 쓰인 글이. 286

 

대립물들을 합치시킨다는 것은 그것들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는 일이라기보다 타자와 자기 자신 사이의 화해를 이루는 일이다이러한 화해는 타자를 그리고 계급 장벅 뒤편에서 부정하고 억압했던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자신 안으로 재통합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재회를 주선해 준 것은 지배자들의 세계 중심에서 획득한 민족지적 문화이다./<<슬픈 열대>>를 반대로 뒤집은 것이 부르디외의 민족지적 프로젝트다.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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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첫손님이다. 전집 사장님은 월요일 손님과 통화중이다. 생굴을 먹은 것이 문제가 생긴 듯하다. 노로 바이러스. 음식으로 인한 문제가 생길 것을 대비해서 보험을 들어둔 것 같다. 아. 이런 굴전이나 생굴 생각이 나 왔건만 어쩐다. 요즈음 오후 날씨가 봄날 같더니 이런 사달이 났구나 싶다. 딸아이와 p협력사의 쉰이 되지 않은 아빠가 일손을 거들어주기도 하는데, 쉽지 않겠다 싶다. 책을 읽지 못할 정도로 전등이 흐리기도 하는데, 손님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알바도 구하기 쉽지 않아 절절 매던 일들도...그래서 혼자 오기는 쉬운 게지. 


전집을 온 이유는 계약 관련 긴 협의의 끝이 보이기도 해서이다.  과메기 안주도 되지 않고, 전은 그렇고  두루치기를 시켰다. 막걸리 한 병을 주전자를 가져와 따른다. 제법 요리시간도 많이 걸리는 것이 이 가게의 특징이다. 무와 콩나물 밑반찬에 막걸리 한 모금을 우물거리며 마신다. 계약 당사자인 l감사에게는 원가분석을 하시라고,그래야 거짓말하는지, 일들은 제대로 하고 있는 것 알 수 있지 않겠냐구 마음을 여러 번 보탠다.  거꾸로 오너의 지시가 역으로 떨어지고 나서도 진척이 보이질 않는다. 서로 바닥은 봐야지 협상 수준을 알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분석을 기대하는데 더디다. 공장은 대보수공사로 북적이고 정신이 없는데, 회의록 작성하라는 오더에 문제해결보다 보고에 더 신경쓰는 모양새다. 


공문도 여러 번 보내면서 결재 수준, 전달 과정, 소통 방식을 확인하는 작업도 병행한다. 뭘 믿고 무얼 확인할 것인가.


아껴서 먹는 막걸리는 배추쌈을 주어서 그나마 더 맛있게 들 수 있다. 알바분이 오시고 말 소리들이 더해져서 전집은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감량 덕분에 위가 많이 줄어든 듯, 배부른데 탄수화물이 당긴다. 오뎅탕은 많고, 적당한 안주는 없는 걸까. 벽에 붙은 오뎅우동 광고가 있어 되느냐고 묻는다. 이 것 역시 혼자 먹을 수 있는 양을 넘어선다. 첫 개시인 듯싶다. 매콤한데 나쁘지 않다. 술은 한 병 더 가져오고 주전자에 담고 한 두잔 먹자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다. 


테스트를 여러 번 해보았다. 물량을 이월해서 정산을 하자고, 월급은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말로 되지 않을 것 같아, 공문으로 보냈고, 공문으로 되지 않아 구두로 확인해보아도 어처구니없는 대답만 한 가득이다. 그럴 줄 알고 보낸 카드가 있는지조차 모른다. 눈 앞에 있는 것만 관심이 있고 배경을 헤아리고자 하는 의도는 없다. 여러 번 교차해서 확인한 결과, 영혼이 없구나. 일만 있어 처리만 할 줄 안다. 


남은 막걸리를 병에 다시 따른다. 거의 목까지 올라왔다. 부자가 된 기분이다. 그렇게 술 한병을 들고 촐랑촐랑 사택으로 돌아간다.


볕뉘


야망계급론은 힙스터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신 구별짓기란 신흥부자들의 행태이기도 하다. 어떻게 살아지는가에 대한 관심의 끈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기본 소득은 분명 또 다른 출발점이기도 하다. 출발 선이 너무 다르다. 극우들아 제발 공부 좀 해라. 대체 아는 게 뭐냐. 모든 것 갖고 싶으냐. 모든 것을 누리고 싶으냐. 그럴러면 정신은 차려야 하는 것은 아니냐. 보수 한 점 없는 이 땅위에 화만 잔뜩 있으니 누가 너희를 좋아하겠는가. 떠벌이지만 말고 출발선상의 불평등같은 것이 왜 문제인지, 평생에 단 한 번이라고 고민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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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2-04 0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사이 들어 ‘살림’이라는 이름을 살려서 쓰는 이웃을 이따금 봅니다. 얼마 앞서 《살림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인 책이 나오기도 하더군요. ‘살림글’이라면, 한자말로는 이른바 ‘생활글·생활문학’일 텐데, 모든 살림이란 시골에서 논밭을 짓는 일부터 우리가 보금자리에서 맡는 모든 집안일부터 헤아립니다.

‘우리한테 있는 빛’이라면, 먼먼 옛날부터 물려주고 물려받으면서 저마다 가꾼 ‘살림’이 있다고 느낍니다. 오늘날에야 왼날개와 오른날개를 가르지만, 지난날에는 누구나 왼날개와 오른날개를 나란히 품고 헤아리면서 ‘온날개’로 하루를 그리고 짓는 온살림을 했다고 봅니다. 우리한테 왼손과 오른손이 있어서 살림을 빚거나 짓거나 가꿉니다. 우리한테 왼발과 오른발이 있어서 기쁘게 거닐면서 이웃한테 마실합니다.

어쩐지 요즈음 자꾸 번지는 ‘극우·극좌’ 같은 이름은 그만 서로서로 미워하는 마음에 싫어하는 등돌림과 따돌림과 손가락질을 부추기는 밉말(혐오표현) 같습니다. 다 다른 사람을 끌어안자는 마음이 아름답다고 여기지만, 정작 걷는 길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넌 틀렸어!” 하고 윽박지르면서 가르치려고 드는 물결이 대단히 드세면서, 날마다 싸움판 같습니다.

틀림없이 “넌 틀렸어!” 하고 말할 만한 자리까지도 ‘그들’이 하려는 말을 가만히 귀담아듣고서 이 말을 하나하나 짚으며 ‘함께 배울 살림’을 이야기로 들려줄 수 있다고 봅니다. 처음부터 “넌 틀렸어!” 하고 딱 끊을 적에는 아무 어깨동무(평등)를 못 이루면서, 아무 살림도 못 나누는 담벼락을 그들뿐 아니라 우리부터 높고 단단하게 세우는 굴레이지 싶습니다.

‘우리한테 있느 빛’은 모름지기 ‘살림’ 하나와 ‘사랑’ 둘에, 살림과 사랑을 심고 가꾸는 ‘두손’이요, 살림과 사랑을 나란히 바라보는 ‘두눈’이며, 살림과 사랑을 함께 그리고 펴는 ‘두다리’이지 싶습니다.
 

지불을 하지 않으면 폰으로 엑셀도 텍스트 작업도 할 수 없다. 취소하려면 찾아가기도 어렵다. 그렇게 돈이 슝슝 빠져나가도록 된 구조다. 합법적이다. 불편을 가장한 합법. 눈뜨고 코 베이는 세상이다. 


기침이 가라앉지 않아 바깥 바람을 쐬기조차 삼가고 있다. 어제 저녁은 그나마 약을 먹지 않고 버티었는데, 새벽 나은 기미가 보인다. 달리면서 몸부리는 재미에 빠졌는데, 부상이 오거나 이렇게 몸이 말을 듣지 않으면 더 간절해진다.


어제 저녁 손에 들린 책이다. 피터싱어와 영아살해에 대한 논쟁을 담은 첫 글을 읽는다. 무척 힘들다. 하지만 많이 좋아졌다.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아픈 존재는 무엇인가? 불편한 존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불편하기 그지 없던 예전과 달리 시선에 맞춰 읽어나갈 수 있어 다행이다.


무수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나의 존재 기반을 무너뜨리는 발언을 어떻게 수긍하고 긍정할 수 있을까? 논리와 말 이전에 존재가 있다. 머무르지 않고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말을 찾아야 한다. 논리도 싸움도 찾아야 한다. 끊임없이 출발하는 것이 존재다. 


이유도 없이 굴복당한 무수한 존재들. 삶들. 말조차 없어 끙끙 앓던 이들. 무수한 편견과 시선의 겹겹으로 누르는 짐같은 하늘아래 사는 존재들. 삶들. 한줄기 빛과 같은 깨달음도 함께 하길. 우리는 서로 곡예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만들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다. 삶을 사랑하기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아끼고 마음에 담기에 말이다.


볕뉘


며칠동안의 침체를 딛고 오늘은 강변까지 달려가고 싶다. 싱싱한 바람과 솟아오르는 땀의 호흡을 느끼고 싶다. 조금씩 작업이 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갈증을 쌓아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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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모든 것이고 나는 모든 것을 하는데,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한다." 어느 날 신, 계명 등등이 오직 당신을 해치고, 그것들이 당신을 쇠약하게 하고 파멸시키는 것이 아주 분명해진다면, 꼭 기독교인들이 아폴로나 미네르바(Minerva) 혹은 이도교의 도덕을 비난했었듯이, 당신은 신, 계명 등등을 내던질 것이다. 분명히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도덕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그다음에 마리아를 자신들의 마음에 밀어 넣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자신들의 영혼의 구제를 위해서, 이렇게 자기중심성 혹은 자기소유성으로 이 일을 하였다. 이러한 자기중심성, 이러한 자기소유성으로 그들은 신이라는 낡은 세계를 벗어났고 거기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자기소유성이 새로운 자유를 창조하였다. [180] 왜냐하면 자기소유성은 모든 것의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천재성(Genialität) (특정한 자기소유성)항상 독창성(Originalität)이다 이 새로운, 세계사적 생산물의 창조자로 오랫동안 여겨져 온 것과 같다. 당신이 '자유'를 문제 삼으려고 노력하려면, 그때 자유의 요구를 깊이 따져 논하라. 도대체 누가 자유롭게 되어야만 하는가? 그대, , 우리이다. 무엇으로부터 자유인가? 그대, , 우리가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 따라서 나는 모든 포장에서 벗어나야 하는 핵심이고, 속박하는 모든 겉껍데기로부터-자유롭게 되어야만 하는 핵심이다. 내가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 내가 자유롭게 되었을 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오로지 내가 남아 있고 모름지기 내가 남아 있다. 그러나 자유는 이러한 나 자신한테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255

 

'당신 자신을 인정하지 말라. 하지만 자기 소유성은 당신한테 당신 자신을 불러들인다. 자기소유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 자신에게로 오라!' 자유의 보호를 받으며 당신은 많은 것들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새로운 어떤 것이 다시 당신을 괴롭힌다. "당신이 악마를 벗어났지만, 악은 남아 있다. " 자기 자신으로서의 당신은 실제로 모든 것에서 해방된다. 그리고 당신한테 달라붙은 것은 당신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선택이고 당신의 의향이다. 처음부터 자기 소유자(Der Eigene)는 타고난 자유인이고, 자유로운 사람이다. 이와 반대로 자유인은 자유에 미친자, 몽상가이자 광신자일 뿐이다. 자기 소유자는 처음부터 자유롭다. 왜냐하면 자기 소유자는 모름지기 자신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맨 먼저 자신을 자유롭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부터 자기 밖에 있는 모든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고,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자신보다 더 높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간략히 말해 그는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여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인 사람은 자식된 도리에 사로잡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그러한 강제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하려고 여전히 노력하고 있다. 자기소유성은 어린 자기중심적 사람 속에서 작동하여 그에게 원하고 바라던자유를 마련해 준다. 수천 년의 문명화된 문화는 당신에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은폐하였고, 당신에게 자기중심적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상주의자('선량한 인간')가 천직이라고 믿게 하였다. 그것을 떨쳐 버려라! 257

 

내 자기소유성을 부정한다. 현재의 과정이 목표에 이르지 않고 따라서 잘못된 길로 이끌기 때문에, 내가 내 방식을 포기하는 것은 다른 경우이다. 또 다른 경우는 내가 항복하여 포로가 될 때이다. 내가 충분한 화약을 가지고 있어서 돌을 깨뜨릴 수 있을 때까지, 나는 나에게 방해가 되는 암석을 피하여 에둘러간다. 그리고 내가 법을 전복할 수 있는 힘을 모을 때까지, 국민의 법을 피해간다. 내가 달을 움켜쥘 수 없으므로, 그런까닭에 달은 나한테 '신성한' 존재, 곧 아스타르테이어야만 하는가? 내가 그대를 움켜쥘 수만 있다면, 나는 확실히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대한테 다가갈 방법을 안다면, 그대가 나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리라! 오직 내가 나 혼자 힘으로 이해력을 획득하여 그대를 나 자신의 것이라고 부를 때까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인 그대는 나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나는 그대 앞에서 나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때가 오기를 고대할 뿐이다. 지금 내가 그대의 무언가를 만지는 것에 만족한다면, 나는 여전히 그대의 무언가를 기억한다! 강력한 사람은 항상 그렇게 해왔다. 만약 '헌신적 사람들'(Ergebenen)이 강제되지 않는 힘을 자신의 지배자로 찬양하고 섬겼을 때, 그리고 그들이 모든 사람한테 섬기기를 요구하였을 때, 그때 복종하지 않으려는 그런 기질의 자식이 출현했다. 그리고 그는 다다를 수 없는 올림포스산에서 섬김을 받는 힘을 내쫓았다. 그는 회전하는 태양에 '가만히 있어라'라고 큰소리로 외쳤고, 지구가 회전하라고 했다. 헌신적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든 참아야만 한다. 그는 신성한 떡갈나무에 자신의 도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헌신적 사람들'은 천국의 불이 결코 그를 다 태워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교황의 의자에서 교황을 팽개쳤다. 그리고 '헌신적 사람들'은 그 일을 저지할 방법을 몰랐다. 그는 신의 은총이라는 일을 파괴하고 있고, '헌신적 사람들'은 헛되이 원망하는 말을 하다가, 마침내 침묵한다. 260

 

 

곧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인류에 속할 필요가 있을 뿐이고, 그저 그와 같은 유개념의 표본으로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구체적 나로서의 내가 무엇인지, 그것은 선량한 자유주의자로서의 당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오로지 나의 개인적 일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이자 같은 어머니, 요컨대 인류의 자식이다. 말하자면 나는 '인류의 자식'으로서 그대와 같은 사람이다. 그럼 당신에게 나는 무엇인가? 혹시 그것은 내가 걸어가고 서 있듯이, 뼈와 살을 갖춘 그러한 나인가? 그건 아니다. 생각과 결단, 정열을 가진, 이렇게 뼈와 살을 갖춘 나는 그대의 눈에는 그대의 관심사가 아닌 개인의 관심사'이고, '자신을 위한 관심사'이다. 오로지 나의 개념, 곧 나의 유개념, 다시 말해 철수라고 불리기도 하고, 쉽게 영희 혹은 영수로도 존재할 수 있는 인간만이 '너를 위한 관심사'이다. 그대는 나에게서 나를, 곧 뼈와 살을 갖춘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재하지 않는 것, 곧 유령, 다시 말해 인간을 본다. 기독교의 수 세기 동안 우리는 가장 다양한 사람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매번 우리가 그들로부터 저 정신의 척도에 따라, 예를 들어 그들에게서 구원할 필요가 있는 정신을 가정할 수도 있는 각자를, 그 이후에는 정당함의 정신을 갖는 각자를, 마침내 인간다운 정신과 인간다운 얼굴을 본 각자를 기대하였다. 이렇게 '평등'의 원칙은 변화하였다. 이제 평등은 인간다운 정신의 평등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을 포괄하는 어떤 평등은 확실히 발견된 것이다. 우리 인간은 어떤 인간다운 정신, 다시 말해 인간 정신 말고 다른 정신을 결코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도대체 누가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191] 그러나 위에서 말한 이유 때문에 현재 우리는 기독교의 초기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그 당시 우리는 신다운 정신을 가져야 한다. 270

 

 

다시 말해 나는 '인간다운 사회'를 없애고 그 자리에 자기중심적 사람들의 연합(Verein von Egoisten)을 세운다.[197] 그러므로 국가는 내가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함으로써 나에 대한 적대관계를 나타낸다. 그 요구는 나는 인간다운 인간이 아니라, 나를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를테면 국가는 나에게 인간다운 존재가 되는 것을 의무로 지운다. 더 나아가 국가는 국가의 존속을 막으려는 어떠한 행위도 내가 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국가의 존립은 나한테 신성한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나는 자기중심적 사람이 아니어야만 하고, 오히려'존경할 만한, 의로운 사람', 다시 말해 도덕적 인간이어야만 한다. 잘 알았다. 나는 국가 앞에서 그리고 국가의 존립 앞에서 무기력한 사람이고 경의를 표하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등등. 실제로 현존하는 국가가 아니라, 여전히 창조될 필요가 있는 이러한 국가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이상이다. 국가는 참된 '인간다운 사회'가 되어야만 하고, 인간다운 사회는 모든 '인간다운 사람'이 자리를 찾는 곳이다. 자유주의는 '인간다움'을 실현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인간다움을 위한 세계를 창조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일은 인간다운 세상이거나 보편적(공산주의적) 인간다운 사회일 것이다.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는 오직 정신만을 고려할 수 있었고, 국가는 인간다운 존재만을 고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다운 존재''정신'이 아닌가? 278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발견의 결과로 얻은 이익을 받아들일 것이고, 인류를 기독교와 종교의 새로운 성과로 그리고 인류 일반의 이상적 노력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지금 인간은 누구인가? 나구나! 기독교의 목적이자 결과인 그 인간(Der Mensch)은 나처럼,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자 이용할 수 있는 재료, 희생의 역사 이후의 향유의 역사, [198] 인간 혹은 인류의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나 자신의 역사이다. 그 인간이 보편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나와 자기중심적 사람이 정말로 보편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자기중심적 사람이고 모든 일을 자기 자신을 위해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도무지 자기중심적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아직도 여호와에게 자기 자신을 헌신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독교인도 전혀 자기중심적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은 하느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자기 자신을 하느님에게 복종시키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처럼 그리고 유대인처럼, 인간은 자기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게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욕구 중 일부를, 특정한 욕구만을, 어떤 어중간한 자기중심성을 만족시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중간한 인간의 자기중심성이고, 어중간한 자기 자신의 어중간한 유대인의, 어중간한 자기 자신의 소유자, 어중간한 노예의 자기중심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항상 서로를 어중간하게 배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서로를 인간으로서 인정하지만, 서로를 노예로서 배척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다른 두 주인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완전한 자기중심적 사람이 될 수 있으려면, 그들은 훨씬 더 확고하게 서로를 완전히 배제해야 하고 그런 일을 함께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치욕은 서로를 배제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배제하는 일이 그저 어중간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280

 

 

재판관의 마음에 따라 싸워야만 하는 특별한 권리에 맞선 겸손한 투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결론으로, 내가 여전히 권리의 내부를 파헤치고, 적어도 그 말을 그대로 두는 한에서만, 내가 기꺼이 사용했던 어중간한 표현법을 여전히 철회해야만 한다. 그러나 사실 [권리] 개념과 함께 [권리라는] 단어 역시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내가 '나의 권리'라고 불렀던 것, 그것은 전혀 권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권리는 오로지 정신에 의하여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인데, 권리가 자연의 정신이든, 종개념(槪念), 인류의 정신이든, 신의 정신이든, 신이라는 신성함의 정신이든, 신이라는 높음의 정신이든 어떤 정신일지라도 말이다. 내가 권리를 준 정신이 없다는 것, 그것은 내가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오로지 내 힘을 통해서 권리를 가진다.

나는 어떤 권리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나는 어떤 권리도 인정할 필요가 없다. 내가 힘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것, 그것을 나는 힘으로 얻는다. 그리고 내가 힘으로 얻지 못하는 것에 대해 나는 어떤 권리도 없다. 나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자랑하지도 않거나 그러한 권리로 마음을 달래지도 않는다. 절대적 권리와 함께 권리 그 자체가 죽는다. 동시에 '권리라는 개념'의 지배는 제거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개념, 이념 혹은 원리가 우리를 지배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지배자 중에 권리의 개념 혹은 정의의 개념이 가장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를 맡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권리를 주거(Berechtigt)나 권리를 주지 않는 것은내 알 바 아니다. 만약 내가 단지 힘이 있다(mächtig), 나는 이미 나 자신에게 무엇을 할 권력을 주는 (ermächtigt) 것이고 결코 다른 전권위임(Ermächtigung) 혹은 자격부여도 필요치 않다.325

 

 

부르주아 계급의 마음속에서 모든 사람은 소유자이거나 '재산 소유자'이다. 글쎄, 어째서 대다수가 여전히 거의 소유하지 못하는가? 이것은 마치 아이들이 자신의 첫 번째 작은 바지를 입고 즐거워하거나, 심지어 선물로 준 첫 번째 동전 한 푼에 기뻐하는 것처럼, 비록 그것이 작은 옷 쪼가리일지라도, 어쨌든 이로부터 이미 대다수가 소유자가 된 것을 기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본질이 소유가 아니라, 오히려 재산 소유자라는 선언과 함께 곧 등장하였다. 여기서 헤아려야 할 사항은 개인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정확하게 개인의 특수한 이해관계를 형성하는 어느 정도의 문제는 개인에게 맡겨졌다. 그러므로 개인의 자기중심성은 이러한 어느 정도 내에서 가장 자유롭게 활동할 공간을 유지했고, 지칠 줄 모르는 경쟁을 하였다. 그러나 운 좋은 자기중심성은 덜 운 좋은 자기중심성을 향해 불쾌감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인류의 원리를 기반으로 삼고 있는 후자는 여전히 어느 정도 소유하느냐와 같은 문제를 내놓고 이에 대해 '인간은 그가 필요로 하는 만큼 소유해야 한다'라고 대답하였다. [293] 그것으로 나의 자기중심성 그 자체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까?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 그것은 아무래도 나를 위한 그리고 내 필요를 위한 척도를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더 적게 혹은 더 많이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리어 나는 내 자신의 것으로 할 능력이 있는 (vermögend)만큼 가져야만 한다.407

 

 

우리 모두 풍요로움의 한가운데에 있다. 자 이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나 자신을 도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다렸다가 나한테 동등한 분배가 어느 정도나 남아 있는지 확인해봐야 하는가? 극빈자 사회의 원리, 곧분배가 경쟁에 반항하여 궐기한다. 개인은 어떤 단순한 부분, 사회의 어떤 부분으로 여겨지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왜냐하면 개인은 사회의 부분보다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의 유일성은 이러한 편협 고루한 견해를 거부한다. 그러므로 개인은 자신의 능력이 다른 사람에게 분배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게다가 노동자 사회에서도 동등한 분배는 약자가 강자를 착취하게 할 것이라는 양심의 가책이 제기된다. 차라리 개인은 그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능력을 끌어내기를 기대하며 이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능력은 내가 소유할 능력이다. [295] 정말이지 아이는 자신의 미소, 자신의 놀이, 자신의 외침, 한마디로 말하면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그의 현존으로 많은 능력을 소유하지 않는가! 그대는 아이의 요구에 저항할 수 있는가? 혹은 그대는 어머니로서 아이한테 젖을 내주지 않는가? 그리고 그대는 아버지로서 그대가 소유한 많은 것을 아이가 필요로 하는 만큼 내주지 않는가? 아이는 그대를 강제한다. 그러므로 아이는 그대가 그대의 것이라고 부르는 것을 소유한다. 그대라는 사람이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면, 그대는 나에게 이미 그대의 실존으로 돈을 지급한 것이다. 내가 당신의 속성들 중에서 하나의 속성에만 관심이 있다면, 어쩌면 그대의 승낙 혹은 그대의 도움은 나를 위해 어떤 가치(화폐가치)를 가지며, 나는 그것을 구매한다. 내가 보건대 그대가 어떤 화폐가치보다 더 많은 것을 자기 자신에게 줄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독일 원주민이 아메리카에 팔렸다고 역사에서 배운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판매되도록 한 사람들이 판매자에게 더 가치 있는 사람인가? 판매자는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법을 모르는 살아 있는 이 상품보다 현금을 선호했다. 410

 

첫 번째 기쁨 속에서 인간다운 것 쪽으로 손을 쭉 뻗는 것이 허용될 때, 사람들은 그 외에 다른 기쁨을 여전히 원하고 있다는 것을 잊었다. 그리고 마치 인간다운 것의 소유가 우리의 모든 소망의 목적인 것처럼, 사람들은 끊임없이 정력적으로 경쟁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 경쟁하다 지쳤다. 그리고 그들은 '소유가 행복을 주지 않는다'라는 것을 차츰차츰 알아차리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 쉬운 구매로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꼭 필요로 하는 시간과 노고만큼만 시간과 노고를 소비한다고 생각한다. 재산의 가격이 하락하고, 만족스러운 빈곤, 근심 없는 극빈자가 유혹적 이상이 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능력이라고 확신하는 그런 인간다운 행위는 높은 월급을 받아야 하고, 모든 생명력의 수고와 소비를 들여서 요구되어야 하는가? 일상의 말투에서조차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내가 단지 장관이거나 심지어 ..이라면, 그때 완전히 다른 일이 일어났을 텐데'라는 저 확신은 자신을 그런 고위 관직에 있는 사람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는 점을 드러낸다. 비록 정확히 모두는 아닐지라도, 어쨌든 많은 사람에게, 사람들은 거기에서 그러한 종류의 일에 속하는 것은 유일성이 아니라, 오히려 달성할 수 있는 교육일 뿐이라고 인식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런 일을 위해서 평범한 인간이기만 하면 된다고 인지하고 있다. 가령 명령(Ordnung)이 국가의 본질에 속하듯이, 종속(Unterordnung)도 국가의 본성에 기초한 것이라고 한다면, [300] 우리는 종속된 사람들(Untergeordneten)435 혹은 특권을 받은 사람들이 낮은 계급에 놓여있는 사람들한테 지나치게 엄청난 삯을 요구하게 되고 그들을 속여 이득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을 목격한다.417

 

 

형벌의 집행 기간이 끝났을 때, 용서하는 마음이 없는 교도관은 자신의 선량한 충직한 기독교인 형제들을 경멸하면서 자신에게 침을 뱉은 오명을 씌운 사람들을 다시 내쫓는다. 그렇다. 은혜 없이 '사형을 받아 마땅한 범죄자를 단두대로 끌고 간다. 그리고 환호하는 군중의 눈앞에서 보상받은 도덕률이 자신의 숭고한 복수를 축하한다. 도덕률 혹은 범죄자 중 하나만이 살아갈 수 있다. 범죄자가 처벌받지 않고 살아가는 곳에서 도덕률은 몰락할 것이고, 도덕률이 다스리는 곳에서 범죄자는 쓰러져야만 한다. 그것들의 적개심은 파괴할 수 없다. 정확하게 기독교의 시대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해야만 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실제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인간다운(신다운) 소명을 달성하는 곳으로 그들을 데려가기 위한 자비의 시대, 사랑의 시대, 관심의 시대이다. 그러므로 교류를 위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가장 중요시 하였다. 이것저것이 인간의 본질이고 그 결과 이것저것이 인간의 소명이며, 인간의 소명을 위해 신이 인간에게 소명을 주었거나 (오늘날의 개념에 따르면) 인간의 인간다운 존재(유개념)가 인간에게 소명을 준다. 이러한 일로부터 개종을 위한 열정이 나온다. 공산주의자와 인간주의자가 기독교인보다 더 인간들에게 기대한다는 사실은 그런 관점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다운 것이 되어야 할지니라!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에게 신다운 것이 자신의 일부가 되는 것이 충분하였다면, 인간적인 것은 사람에게 인간다운 것이 쇠약해지지 않길 요구한다. 양자는 자기다운 것을 완강하게 반대한다. 물론이다. 왜냐하면 자기다운 것은 사람에게 승인될 수 있거나 수여될 수 있는 것(봉토)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람은 자기다운 것을 자신을 위해 마련해야만 한다. 사랑은 인간다운 것을 주고, 나는 나 자신에게 자기다운 것만을 줄 수 있다. 지금까지의 교류는 사랑, 사려 깊은 행동거지, 서로를 위한 행동에 근거해 왔다. 마치 사람이 자신을 구원받게 하거나, 자신에게 최고의 본질인 축복받음을 받아들이거나, 그것을 진리 (vérité (사실과 실제))로 가져오는 것을 그 자신에게 빚지고 있었듯이, 사람은 그들의 본질과 그들의 소명을 그들이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빚지고 있었다. 447

 

 

하지만 원래 나의 것이었던 것이, 우연히,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소유로서 나에게 주어졌다. 내가 사랑했을 때, 내가 인류의 봉신이 되었을 때, 인류라는 유개념의 표본일 뿐일 때, 그리고 나로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으로서, 곧 인류라는 표본으로서, 다시 말해 인간답게 사랑으로 행동했을 때, 나는 봉토() 소유자가 되었다. 소유가 나의 것이 아니라, 인간 혹은 인류의 소유이어서, 문명의 전체 조건은 봉건제이다. 일종의 거대한 봉건 국가가 세워졌고, 개인은 모든 것을 강탈당했고 모든 것은 '인간'에게 남겨졌다. 마침내 개인은 '철저하게 죄인'으로 나타나야만 했다. 혹시 내가 다른 사람한테 강렬한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사람의 기쁨과 다른 사람의 안녕은 나한테 대단히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다른 사람한테 제공한 즐거움이 나한테 나 자신의 또 다른 즐거움보다 많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그러기는커녕, 나는 기쁘게 그에게 무수한 즐거움을 희생으로 바칠 수 있고, 나는 그의 즐거움을 드날리기 위해 한없이 많은 나의 것들을 단념할 수 있다. [324] 게다가 나는 그에게 없으나 내게 가장 값비싼 것, 곧 내 생명, 내 복지, 내 자유를 그를 위해 위험을 무릅쓸 수 있다. 실제로, 그의 행복과 그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 나의 즐거움과 행복을 형성한다. 그러나 나는 나를, 나 자신을, 그에게 희생으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중심적 사람으로 남아서그를 향유한다.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고 계속 모든 것을 그에게 희생으로 바친다면, 그런 일은 매우 쉬운 일이고, 게다가 삶 속에서 그런 일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흔해 빠졌다. 하지만 그런 일은 내 속의 하나의 열정이 나머지 다른 모든 열정보다 더 강력하다는 점을 논증하는 것일 뿐이다. 기독교 역시 하나의 열정에 모든 다른 열정을 희생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만약 내가 하나의 열정에 다른 열정들을 희생으로 바친다면,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여전히 나를 희생하지 않는다면, 게다가 내가 참으로 나 자신이므로 어떤 것도 희생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 본래의 가치, 나의 자기소유성을 희생으로 바치지 않는다. 449

 

 

사랑은 본질적으로 이성적이란 말이군! 포이어바흐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와 반대로, 종교를 믿는 사람은 사랑은 본질적으로 믿음이 깊은 (glaubig) 것으로 생각한다. 전자는 이성이 없는 사랑을 극구 반대하고, 후자는 믿음이 없는 사랑을 극구 반대한다. 둘 다 모두 그런 사랑을 기껏해야 어떤 지독한 악덕 (splendidum vitium)으로 여긴다. 두 사람 모두 사랑은 이성도 믿음도 없는 형태로 존재하도록 둘 수 없을까? 그들은 비이성적이거나 믿음이 없는 사랑은 터무니없고, 사랑이 아니라고 과감히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비이성적이거나 믿음이 없는 눈물은 결코 눈물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나 비록 비이성적일지라도, 등등, 사랑은 사랑으로 여겨야만 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랑들이 인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지면, 이것은 단순히 다음을 말한다. 사랑은 최고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이나 믿음이다. 비이성이거나 믿음이 없는 사람조차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믿음이 깊은 사람의 사랑일 때에, 사랑은 오직 가치를 가진다. 포이어바흐가 사랑의 이성성을 사랑의 '자기제한'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환상이다. 믿음이 깊은 사람은 동등한 권리로 신앙을 신앙의 자기제한이라고 부른다. 비이성적인 사랑은 '잘못된' 것도 '파멸의 근원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랑으로서 그것의 봉사를 행한다. 세계에 대해, 특히 사람들에 대해 나는 어떤 특정한 감정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만 한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것들을 사랑의 감정으로, '사랑으로 맞이해야만 한다. 확실히, 이 경우에는 내가 세계가 가능한 모든 감정으로 나를 공격하게 내버려 둘 때보다, 그리고 가장 혼란스럽고 무작위적 인상들에 계속 노출된 채로 남아 있을 때보다, 자유재량과 자기 결정이 훨씬 더 잘 드러난다. 457

 

 

나는 사람들에 대한 한 가지 감정에 나 자신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자유로운 활동의 공간을 제공한다. 어떻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과감히 귀에 거슬리는 말로 나타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 나는 세계와 사람들을 이용하는구나! 이런 식으로 나는 세계와 사람들에 대한 인상(印象)에서 나 자신을 억지로 떼어놓지 않고, 모든 인상에 나 자신을 개방할 수 있다. 나는 사랑할 수 있는데, 곧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수 있다. 게다가 나는 그 자체로 항상 원기를 회복하는 내 정열이라는 자양분 이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애인을 선택하지 않고, 내 마음속에 최대한으로 죄다 태워버리는 정열의 불꽃이 타오르게 할 수 있다. 애인에 대한 내 모든 염려는 내 사랑의 대상에게만 해당되고, 내 사랑을 필요로 하는 애인에게만 해당되며, '열렬하게 사랑받는 애인'에게만 해당된다. 이러한 나의 사랑이 없다면 애인은 나에게 얼마나 무관심했을까! 나는 오로지 애인과 함께 나의 사랑을 먹는다. 오로지 이 일을 위해서만 나는 애인을 이용한다. 말하자면 나는 내 애인을 향유한다. 쉽게 떠오르는 또 다른 예를 선택해 보자. [331] 나는 사람들이 허깨비들 무리 때문에 칠흑같이 어두운 미신 속에서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고 있다. 만약 내 힘의 한도만큼 내가 야행성의 유령에 약간의 밝음이 비쳐 들어오게 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당신에 대한 사랑이 나에게 이런 일을 고취하기 때문인가? 내가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글을 쓰는가? 아니다, 나는 세상에 내 생각을 주어 세상에 현존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글을 쓴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생각이 당신한테서 당신의 휴식과 평화를 빼앗을 것이라고 예견할 수 있을지라도, 이러한 생각의 씨앗으로부터 가장 잔혹한 전쟁과 많은 세대의 멸망이 싹튼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여전히 나는 내 생각을 널리 퍼뜨릴 것이다. 당신이 하고자 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해라. 그것은 당신의 일이고 나는 그 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마 당신은 오로지 그것으로부터 근심, 전쟁과 죽음을 겪을 것이고, 그것에서 기쁨을 이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459

 

 

사람의 자기유용성은 호혜주의를 요구하고(그대가 나한테 하듯, 그렇게 나도 그대한테), 아무것도 '공짜로'(umsonst) 하지 않고, 노력하여 획득하고 보상을 치르고 얻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엇으로 자선을 얻을 수 있을까? [348] 내가 바로 지금 '애정 어린 사람'과 상대할지 말지는 우연에 달려 있다. 애정어린 사람의 헌신은 나의 완전히 한탄스러운 외모, 나의 궁핍함, 나의 불행, 나의 고통을 통해서만 구걸하여 얻을 수 있다. 애정 어린 사람의 도움을 얻기 위해 나는 그에게 무엇을 내어놓는가?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는 구나! 나는 애정 어린 사람의 도움을 일종의 선물로 받아들어야만 한다. 사랑은 갚는 것을 넘어선 것이다. 혹은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은 가장 확실히 갚을 수 있지만, 상대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사랑으로만 갚을 수 있다("가는 호의가 있으면 오는 호의가 있다."). 예를 들어 선물들이 가난한 날품팔이꾼으로부터 꼬박꼬박 징수되는 것처럼, 타인의 호의에 대한 보답 없이 해마다 선물을 받는 데에는 궁색함과 비참함이 필요하지 않은가? 수취인은 애정 어린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고 그의 재산인 기부한 동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만약 날품팔이꾼이 갚아야하는 것을 자신의 법, 제도 등등으로 가지고 있는 수령인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날품팔이꾼은 참으로 더 많이 향유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불쌍한 놈은 자신의 주인을 사랑한다. 아니, 지금까지 역사의 '목적'이었던 공통성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우리 스스로 공통성이라는 모든 거짓 꾸밈과 결별을 선언하고, 우리가 인간으로서 동일하다면, 바로 우리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한다. 우리가 실제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라고 생각될 때만, 우리는 생각에서만 동일하다. 나는 나이고 그대는 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나가 아니다. 482

 

 

혈연이 연합을 성사시키지 않고, 믿음(다시 말해 정신)도 연합을 완성시-키지 않는다. 가족, 종족, 민족, 아니 그뿐인가 인류 같은 자연적 결속에서,개인들은 종개념이나 유개념이라는 표본의 가치만이 있다. 그리고-공동 사회, 교회처럼, 정신적 결속에서-개인은 동일한 정신의 구성원일 뿐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양자의 경우에서 그대가 유일한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억제되어야만 한다. 그대는 연합에서만 그대자신을 유일자로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연합이 그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대가 연합을 소유하거나 연합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소유는 연합 속에서, 그리고 연합 속에서만 인정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더 이상 어떤 본질이 하사한 봉토로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350] 공산주의자들은 종교적 진화 과정에서, 그리고 특히 국가에서 이미 오랫동안 존재해 왔던 것을 한결같이 계속해서 행할 뿐이다. 곧 재산이 없는 상태, 다시 말해 봉건제를 말이다. 국가는 욕망하는 사람을 길들이려고 애쓴다. 달리 말하면 국가는 바로 그런 사람의 욕망을 오로지 국가에 맞추려고 애쓰고 국가가 그에게 제공하는 것에 그가 만족하도록 애쓴다. 국가는 욕망하는 사람에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국가는 구속이 없는 욕망을 발산하는 사람에게 '자기중심적 사람'이라고 욕한다. 그래서 '자기중심적 사람'은 국가의 적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바로 자기중심적 사람과 잘 지낼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정확하게 자기중심적 사람을 '확실히 이해할 수 없다. 국가는 (달리 가능한 방법이 없듯이) 자신을 위해서만 행동하기 때문에, 내 필요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어떻게 나를 죽일지에 관심을 쏟는데, 다시 말해 나를 또 다른 나, 곧 선량한 시민으로 만들지에 관심을 쏟을 따름이다. 국가는 '도덕을 더 좋게 만들' 채비를 한다. 그러니까 국가 자체는 무엇으로 개인을 이기는가? 그 자체로, 다시 말해 국가의 것으로, 곧 국가 소유로 국가는 모든 사람을 국가의 재산에 관여시키는 일에, 모두를 위하여 문화라는 재산을 갖추어 주는 일을 끊임없이 부지런히 할 것이다.484

 

 

터무니없이 싼 값으로 당신을 조롱거리로 만들지 말라,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하는 용감한 사람을 본받으라. [353] '나는 내 삶(소유)을 값비싸게 판매하고자 하니, 적은 나의 삶을 값싸게 구매하지 않아야만 한다. 그때 당신은 공산주의를 거꾸로 올바르게 인식해서, '당신의 소유를 포기하라!'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소유를 실현하라 (Verwerte)! '라고 말한다. 우리 시대의 출입구에는 저 아폴로 신전의 유명한 금언인 "너 자신을 알라"가 새겨져 있지 않고, 오히려 "너 자신을 실현하라 (Verwerte Dich)!"라는 금언이 새겨져 있다. 프루동은 소유를 '강탈'이라고 부른다(책에서). 그러나 그때 소유는 타인의 소유이다. 그리고 그는 단지 이러한 소유에 대해서만 말한다. 타인의 소유는 포기와 양도, 겸손을 통해서 현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타인의 소유는 어떤 선물이다. 사람이 어리석고, 비겁하게 선물을 주는 자일뿐일 때, 왜 강도의 가난한 희생자처럼 그렇게 감상적으로 동정을 요구하는가?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강탈하지 않은 채 남겨두는 동안에, 여전히 우리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인데, 마치 그들이 우리를 강탈했던 것처럼, 왜 여기서 다시 다른 사람에게도 잘못을 전가시키는가? 빈자는 부자의 존재에 대해 책임이 있다. 대체로, 아무도 자신의 소유에 대해 격분하지 않고, 오히려 타자의 (fremd) 소유에 대해 화를 낸다. 실제로 그들은 소유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유의 소외(Entfremdung)를 공격한다. 그들은 더욱 적지 않게 그들의 것이라고 부르길 원하고, 모든 것을 그들의 것이라고 부르려 한다. 또한 그들은 타자성(Fremdheit)과 투쟁하거나, 소유와 유사한 말을 만들기 위하여 타자의 것(Fremdentum)과 싸운다. 488

 

 

내가 나를 나 자신과 구별하는 한에서만(내 불멸의 영혼을 내 지상의 현존재 등등과 구별하는 한) 나 역시 나 자신에 대한 어떤 의무가 있는 것처럼 (예를 들어 자기 보존의 의무, 그러므로 자살하지 않는 것),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해 어떤 의무도 없다. 나는 더 이상 어떤 힘 앞에서 결코 나 자신을 낮추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힘이 나를 거스르는 힘으로 위협하거나 내 위에 있는 힘으로 해를 가한다고 위협할 때, 나는 곧바로 모든 힘들이 내가 굴복시켜야만 하는 나의 힘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래서 그 힘들 각각은 나를 관철시키기 위한 내 수단의 하나이어야만 한다. 어떤 사냥개처럼 우리의 힘은 사냥감을 향해 있다. 하지만 힘이 우리 자신을 공격한다면, 우리에 의해 파괴될 것이다. 게다가 나는 나에게 헌신하기 위해 나를 지배하는 모든 힘들을 과소평가한다. 우상들은 나에 의해 존재한다. 내가 단지 우상들을 새롭게 창조할 필요가 없다면 우상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더 높은 힘들'은 오로지 내가 우상들을 찬양하고 자신을 낮추기 때문에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하자면 세계와 나와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나는 더 이상 세계를 위해, '신을 위해 어떤 일도 하지 않고, 나는 '인간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내가 하는 일은 '나를 위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세계가 나를 만족시킨다. 반면에 내가 도덕적이고 인간다운 입장도 고려하는 종교적 관점의 특징은 세계의 모든 것이 어떤 신앙이 깊은 소망(경건한 소망(pium desiderium)), 다시 말해 어떤 올세상, 어떤 실현되지 않는 어떤 것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라는 보편적 구원, 보편적 사랑이라는 도덕적 세계, 영원한 평화, 자기중심성의 중지 등등이 남아 있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완전하지 않다.' [358] 이러한 불쾌한 격언으로, 선량한 사람들은 세상과 분리되어 신을 위한 그들의 작은방으로, 또는 그들의 거만한 '자기의식'으로 피신한다. 하지만 비록 우리가 이러한 '불완전한 세상에 머물더라도, 우리는 불완전한 세상을 우리의-자기 향유를 위해 사용할 수 있다. 494

 

 

엄청난 차이가 견해를 두 가지로 나눈다. 이를테면 해묵은 나는 나를 향하여 가고, 새로운 나는 나로부터 출발한다. 전자에서 나는 나 자신을 그리워하고, 후자에서 나는 나 자신을 소유하고, 사람들이 어떤 다른 소유물로 만들 듯이 나 자신을 내 소유물로 만든다. 나는 나의 뜻대로 나를 향유한다. 나는 더 이상 내 삶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삶을 '소비한다.' 지금부터 질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삶을 얻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삶을 소비하고, 향유할 수 있는가이다. 혹은 어떻게 참된 나를 자신으로 회복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자신을 해체할 수 있고,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가이다. [360] 정말로 이상은 항상 멀리 떨어진 나를 찾으려는 것과 다른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찾는데, 그 결과 아직 자신을 찾은 것은 아니고, 인간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을 얻고자 노력하는데, 그 결과 자신을 찾지 못한다. 사람은 갈망에 살고 갈망 속에서 수천 년을 살았고, 희망 속에 수천 년을 살았다. 산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 향유인데 말이다! 이 일은 혹시 이른바 신앙이 깊은 사람한테만 영향을 주는가? 아니다. 이 일은 역사의 중요한 시기와 이별하는 사람에 속한, 심지어 방탕아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그들에게도 근무일 다음에는 일요일이 이어졌고, 더 나은 세상이라는 꿈, 보편적 인간의 행복이라는 꿈, 한마디로 이상(Ideal)에 대한 꿈으로 세상의 소란이 이어졌다. 그러나 특히 철학자들은 신앙이 깊은 사람과 대조를 이루었다. , 그들은 이상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가, 절대적 나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계획하였는가? 갈망과 희망은 어디에나 있고, 이것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것을 낭만주의라고 부른다. 삶의 향유가 삶의 갈망 혹은 삶의 희망을 이겨서 의기양양하다면, 삶의 향유는 실러가 제시한 이상과 삶이라는 이중적 의미에서 삶의 갈망과 삶의 희망을 제압해야만 한다. 497

 

 

식물 혹은 동물도 '소명'을 받지 않듯이, 사람도 '소명을 받지 않고, 어떤 '사명', 어떤 '운명'도 없다. 꽃은 자신을 완성하기 위한 소명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다. 꽃은 가능한 한 세계를 향유하고 소비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힘(Kräfte)을 들인다. 다시 말해 꽃은 들이마시고 수용할 수 있는 만큼 땅속의 양분과 창공의 공기와 태양의 빛을 흡수한다. 새는 어떤 소명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최대로 날기 위해서 자신의 힘을 사용한다. 다시 말해 새는 곤충을 잡아먹고 자기 마음껏 노래한다. 꽃과 새의 힘은 사람의 힘과 차이가 거의 없다.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자는 오히려 꽃과 동물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세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사람은 소명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은 그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자기 자신을 분명히 나타내는 힘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힘의 존재는 오로지 힘의 표시 (Äusserung)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치 생명처럼 절대 활동하지 않고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한순간조차 '침묵'하더라도, 삶이 더 이상 삶이 아닌 것처럼 힘은 하는 일이 없이 남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자 이제, 사람들에게 '당신의 힘을 사용하라'라고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명령에는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사명이라는 의미가 놓여있을 수도 있다. 저 명령에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먼저 이 명령을 자신의 소명으로 바라보지 않고 각자가 실로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항상 모든 사람은 그가 소유한 만큼의 힘을 사용한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패배한 사람에게 그의 힘을 더 발휘했어야만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패배의 순간에 그가 그의 힘(예를 들어 신체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힘을 발휘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비록 그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 단 1분간의 무기력 (Murlosigkeit)이었을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긴 1분의 힘의 결핍 (Kraftlosigkeit)이었다. 확실히 힘은 특히 적대적 저항 혹은 우호적 도움에 의해 날카로워지고 강화될 수 있다. 505

 

 

[367] 그러나 힘의 적용을 그리워하는 곳에서 힘의 부재 또한 확신할 수 있다. 돌을 부딪쳐 불을 피울 수 있다. 그러나 부딪힘 없이 결코 불을 피울 수 없다. 같은 방식으로 인간 또한 '자극'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힘은 항상 자기 자신을 활동적으로 입증하기 때문에, 힘을 사용하라는 명령은 불필요하고 의미 없을 것이다.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소명이나 사명이 아니라, 오히려 항상 그의 행위, 실재하고 현존하는 행위이다. 힘은 힘의 표시(Kraftäusserung)라는 말을 더 줄인 말일뿐이다. 실은 마치 이 장미가 시작부터 참된 장미이고, 이 나이팅게일이 언제나 참된 나이팅게일이듯이, 그렇게 내가 나의 소명을 행하고 나의 목적에 따라 살아갈 때만, 내가 참된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처음부터 '참된 인간'이다. 내 최초의 옹알거림은 '참된 인간'의 생명 유지에 필수적 표시이고, 내 삶의 투쟁은 그런 힘의 산출(Kraftergiüsse)이며, 내 최후의 호흡은 '인간'이 지닌 최후의 힘의 발산(Kraftaushauchen)이다. 참된 사람은 갈망의 대상을 미래에 놓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하고 실제 하는 대상을 현재에 놓는 사람이다. 내가 어떻게 누구로 존재하든지 간에, 곧 즐겁거나 슬프게, 어린아이이거나 노인으로, 확신하거나 의심하거나, 잠을 자고 있거나 깨어 있는 사람으로 존재하든지, 나는 이것, 곧 나는 참된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바로 그 인간(der Mensch)이라면, 그리고 종교적 인류가 먼 목표라고 부른 그 인간을 정말로 나 자신에게서 발견했다면, '참으로 인간다운' 모든 것 역시 나 자신의 것이다. 인류라는 관념에 귀속되는 것이 나의 소유이다. 예를 들어 인류가 아직 달성하지 못한 저 자유무역,그리고 매혹적 꿈처럼 인류의 황금 미래를 향해서 출발하는 저 자유무역, 나는 이것을 내 소유로 선취하고, 당분간 밀수의 형태로 자유무역을 계속해 나간다. 확실히 몇 명의 밀수꾼이 자신들의 행위를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의 소유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506

 

그러나 자기중심성이라는 본능은 그들의 의식을 바꾼다. 위에서 나는 언론·출판의 자유에 대해 똑같은 것을 보여 주었다. [368] 모든 것은 나 자신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에게서 벗어나려는 것을 나에게로 되돌린다. 그러나 좌우간 내가 나 자신의 어떤 예속에서 탈주했을 때, 무엇보다도 나는 항상 나를 되찾는다. 하지만 이것 역시 내 소명이 아니라, 오히려 내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내가 나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과 나 자신을 목적지로 여기는 것은 상당히 강한 차이가 있다. 목적지로서의 나는 나 자신을 소유하지 못하며,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의 것이 아니며, 나는 나의 본질, 곧 나의 '참된 본질'이다. 게다가 이러한 나의 것이 아닌 '참된 본질'은 수천 가지 이름의 어떤 유령으로서 나를 조롱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타자(, 참된 인간, 참으로 신앙이 깊은 사람, 이성적 사람, 자유인, 등등)가 나이고, 나의 나이다. 여전히 나 자신으로부터 멀리 있는 나는 나를 반으로 나눈다. 그중 하나는, 성취되지 못하고 성취되어야 하는 것은 참된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참되지 않은 나, 구체적으로 말해서 정신적이지 않은 나는 희생물로 사용되어야만 한다. 또 다른 나, 곧 참된 나는, 완전한 인간, 즉 정신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그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정신이 인간의 본래의(eigentlich) 본질'이거나 '인간은 정신적 인간으로서만 존재한다.'이제 정신을 잡기 위해 탐욕스럽게 정신으로 달려가는데, 마치 그때 사람이 자기 자신을 찾는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그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맹렬히 추적하듯이, 그렇게 그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여기는 현자들의 방식조차 경멸했고, 사람들을 마땅히 있어야만 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 507

 

 

기도는 신성한 진리에서 기도의 확고한 믿음의 기초를 보유하고, 진리라는 정신을 기도라는 헌신으로 끌어올리는 놀라운 기계일 뿐이다. 자유로운 사유와 자유로운 학문이 나의 마음을 차지한다. 왜냐하면 내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내가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가 자유롭고, 사유가 천국과 신성한 것 혹은 '신적인 것'으로 나를 차지하기기 때문이다. 정확히 그것은 내가 세계와 [381] 세속, 곧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에 몰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세상을 뒤집고 세상을 교란시키는 일이고, 세상의 본질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종의 정신 착란이다. 생각하는 사람은 사물들의 직접적 접촉에 눈먼 사람이고 사물들을 지배할 수 없다. 이를테면 생각하는 사람은 먹지도, 마시지도, 향유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먹는 사람과 마시는 사람은 결코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로, 생각하는 사람은 사유를 넘어서 먹고 마시는 일, 삶 속에서 자신의 생계, 음식물에 대한 관심 등등을 망각한다. 그러니까 마치 기도하는 사람 역시 그런 일을 망각하듯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일을 망각한다. 그런 이유로-꼭 미치광이가 고대인에게 그렇게 나타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강력한 기질의 사람을 대단한 사람으로 여길지라도, 생각하는 사람은 강력한 기질의 사람에게 어떤 미친놈으로, 어떤 바보로 나타난다. 이 자유로운 사유는 광기이다. 왜냐하면 이 자유로운 사유는 나머지 사람들을 이끌고 조절하는 그저 정신적 인간의 순수한 마음의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무당과 사변 철학자는 정신적 인간, 곧 몽골인의 사닥다리의 가장 낮은 발판과 가장 높은 발판을 표시한다. 무당과 철학자는 허깨비들, 악마들, 정신들, 신들과 싸운다. 이러한 자유로운 사유는 자신의 사유, 나의 사유, 나를 이끌지 않고, 오히려 내 기쁨에 따라 나에 의해 이끌리고, 지속하거나 중지하였던 사유와는 완전히 다르다. 내가 기뻐하는 대로 만족하는 나 자신의 육욕과 내가 굴복하는 자유로운, 제어하기 어려운 육욕이 다른 것처럼, 이런 자신의 사유는 자유로운 사유와 다르다. 524

 

 

나의 친애하는 빌라도여, 진리는 하느님이다. 그리고 어떤 참된 것을 얻으려고 애쓰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찾으려고 애쓰고 찬양한다. 하느님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자네 머릿속 외에 다른 곳에 있는가? 하느님은 오로지 마음이다. 그리고 그대가 어디에서 정말로 하느님을 본다고 믿어도, 거기에서 하느님은 어떤 허깨비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하여튼 어떤 생각 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로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게 만들고, 정신적인 것을 뼈와 살을 갖춘 것으로 만들고, 허깨비는 기독교적 무서움과 고통을 만들고, 허깨비는 유령에 대한 믿음이라는 무서운 불행이었다. 그대가 진리를 믿는 한, 그대는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는 하인이며, 종교적 인간이다. 그대만이 진리이다. 또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대는 이전에 그대에게 전혀 아무것도 아니었던 진리보다는 더 나은 존재이다. 확실히 그대 또한 진리에 대해 묻고, 틀림없이 그대 역시 비판한다. 그러나 그대는 어떤 '더 높은 진리’,다시 말해 그대보다 더 높아야 하는 진리에 대해 묻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는 결코 그러한 진리를 기준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그대는 사물의 모양을 다루는 것처럼, 생각과 표상을 다루지만, 오로지 그것들을 입에 맞게, 향락할 수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만 다룬다. [398] 그것들이 그대에게서 더 이상 탈주할 수 없을 때, 더 이상 놓치거나 이해되지 않는 장소를 가지지 않을 때, 또는 그것들이 그대한테 정당할 때, 그것들이 그대의 소유일 때, 그대는 오로지 그것들을 지배하고 싶어 하고 그것들의 소유자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니까 그대는 자기 자신의 방향을 정하길 원하고 그것들을 편하게 느끼길 원하며, 게다가 그대는 그것들에 진리를 찾고 그것들을 그것들의 참된 빛으로 본다. 더 나아가, 그것들이 다시 더 맹렬해져서, 다시 그대의 힘을 뿌리친다면, 이것이 바로 그것들의 허구성, 요컨대 그대의 무능력이다. 그대의 무능력(Ohnmacht)이 그것들의 힘이고, 그대의 겸손이 그것들의 통치이다. 546

 

 

만약 생각이 나에게 너무 불편하고 불만족할 것이라고 위협한다면, 생각의 최후는 나의 힘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 존재의 부정, 부도덕, 위법성의 정신이 생각에 깃들어 있다고 해서, 나는 절대 어떤 행위 앞에서 뒷걸음질 치지 않을 것이다. 성 보니파시오가 종교적 양심 있음(Bedenklichkeit)에서 이교도의 신성한 참나무를 도끼로 자르는 것을 삼가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언젠가 세상의 물건이 공허한 것이 되었다면, 정신의 생각 또한 공허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 어떤 생각도 '헌신'으로 여기지 말아야 하기에, 어떤 생각도 신성하지 않다. 어떤 감정도 신성하지 않다(우정, 어머니의 감정, 등등도 신성하지 않다), 어떤 믿음도 신성하지 않다. 그것들은 모두 양도할 수 있고, 나의 양도 가능한 소유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가 창조할 수 있듯이, 내가 그것들을 파괴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적 의미에서 자기 자신, 다시 말해 그의 정신, 그의 영혼이 없어진다고 체념하지 않고, 모든 것들 혹은 대상들, [403]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 자기 사랑의 대상들을 잃어버릴 수 있다. 소유자는 자신의 마음에 소중했던 그리고 자신의 열정에 불을 붙였던 모든 생각들을 자신에게서 팽개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천 배의 생각들을 다시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생각들의 창조자인 소유자는 남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우리 모두는 자기소유성을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우리 중 누구도 신성한 감정, 신성한 생각, 신성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아마 자신의 신성한 생각 중에서 이런저런 것을 제시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신념에 반대하는 우리의 모든 다툼은, 우리가 아마 적대자를 적대자의 생각이라는 참호에서 몰아낼 수 있다는 관점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내가 무의식적으로 행위 한다는 것은 내가 불충분하게 행동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내가 믿음에 승리한 이후에 다시 어떤 믿음의 포로(정신을 빼앗긴 사람)가 되고, 그다음에 다시 그것이 나의 모든 나를 그것의 헌신으로 데려가고, 내가 성경에 열광하는 것을 그만둔 이후에 나를 이성에 대한 열광자로 만들거나, 내가 기독교를 위해 충분히 오랫동안 싸워온 이후에 나를 인류의 이념을 위한 열광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553

 

세상 사람은 항상 나에게 나 자신의 밖에 있는 목적을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세상 사람은 내가-인간이기 때문에, 마침내 내가 인간다운 것을 요구해야만 한다고 부당하게 요구하였다. 이것이 기독교의 마법 영역이다. 피히테의 나조차 나 자신 밖에 있는 똑같은 본질이다. 왜냐하면 나는 모두의 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이런 나만이 옳다면, 그렇다면 이것은 그 나이다. 나는 그 나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어떤 다른 나들과 함께하는 그 나가 아니라, 오히려 유일한 나이다. 그러니까 나는 유일한 나이다. 그러므로 내 욕구조차 유일하고, 내행위, 한마디로 말하면 나에 관한 모든 것이 유일하다. 그리고 마치 내가 오로지 이러한 나로서 행동으로 나타내고 발전하듯이, 오로지 이러한 유일한 나로서 나는 모든 것을 나 자신을 위해 자기 것으로 한다. 곧 나는 인간으로서 나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즉 인간을 반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나로서-나 자신을 발전시킨다. 이것이 -유일자의 의미이다. 558


볕뉘


제2부:나


읽혀야 한다. 이 책들은. 많은 질문들과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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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x 2025-01-23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만드시길 바랍니다 박종성 드림

여울 2025-01-23 13:25   좋아요 0 | URL
앗, 직접. 번역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필하시구요.
 

 키워드:

 신성한 것, 뼈와 살을 갖는 것. 자기중심성. 모두는 특유하다. 고대인,현대인, 자유인(현대인으로서). 정치적 자유주의, 사회적 자유주의, 인간적 자유주의.


몸을 낮춘다. 아니 도려내고 있다. 그간 자유로움의 끝을 보아서 외식을 줄이면서 좋아하는 것과 잠시 결별중이다. 아니 다른 좋아하는 것들을 하고 있다. 발아현미에 건나물을 넣어 밥을 짓고, 강황을 차처럼 한두잔 마셔준다. 그렇게 한 지 한달남짓. 몸의 무게도 내려가기를 멈추고 있다. 


어젠, 이 책을 허겁지겁 먹느라 정신이 없다. 막 1부 인간에 대해 읽고 잠을 청한다. 내란수괴의 마지막 확인몸부림까지 읽다. 잘했다. 그렇게 스스로 못됨을 확인해주는 것도 의미있겠다 싶다.


 

1. 

 

청년은 도처에서 세계를 잘못 생각하고, 세계를 더 낫게 만들려고 하며, 자신의 이상에 따라 세계를 설계하려고 한다. 이와 달리 어른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드린다. 이 사실이 청년과 어른의 차이점이다. 어른에게는, 세계를 자신의 이상이 아니라, 자신의 관심에 따라 다루어야만 한다는 견해가 확고하다자신을 정신으로만 알고 있고, 자신의 모든 가치를 정신임에 두고 있는 한(무가치한 것을 위해, 가장 하찮은 명예를 위해, 자신의 생명, 그 육체가 깃든 생명을 내팽개치는 것은 청년에게는 쉬운 일이다.), 또한 오직 생각만을 가지고 있는 한, 일단 어떤 행동 영역을 찾아내었다면, 청년은 이념을 실현할 수 있길 희망한다. 그러므로 그동안에 그는 오직 이상, 곧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이나 생각만을 가지고 있다뼈와 살을 갖춘 자신을 사랑하게 될 때에만, 게다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즐길 때에만하지만 그러한 것을 확실히 찾아내는 것은 성숙한 나이, 어른의 경우에서이다. 오직 그런 다음에 어떤 자기만의 (persönlich) 또는 자기중심적 관심을 갖는다23

 

 

2.

 

어린아이에게는, 바로 동물처럼, 아무것도 신성하지 않다. 왜냐하면 신성한 것이란 표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미 '좋고 나쁜, 정당하고 부당한' 것과 같은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적 능력 정도는 발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도의 반성 혹은 사리 판단 능력(종교의 고유한 관점)에 의해서만 자연스럽지 않은(다시 말해, 지금 막 생각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경외(Ehrfurcht), '신성한 두려움'이 자연적 두려움(Furcht)을 대신할 수 있다.  이러한 신성한 두려움은 자신의 외부에 어떤 것을 더 강력한, 더 큰, 더 정당한, 더 나은 것 등등으로 여긴다는 것을 포함한다. 그다음 어떤 낯선 힘을 인정하는 태도는 그 낯선 힘을 단순히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낯선 힘을 명확하게 인정하고[78] 다시 말해 낯선 힘을 시인하고, 그것에 굴복하고, 항복하며, 자신을 속박하도록 하는 것이다(헌신, 겸손, 굴종, 복종 등등). 여기에 '기독교적 미덕'이라는 모든 허깨비의 무리가 유령으로 돌아다닌다어떤 존경 혹은 경외를 느끼는 모든 것은 신성한 것이라는 이름을 받을 만하다. 또한 당신 자신에게 말하길, 당신은 그것을 살짝 건드리며'신성한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신성하지 못한 것(교수대, 범죄 등등)에게서도 이러한 기미를 띠게 한다. 당신은 신성한 것을 만지는 것이 무섭다. 신성한 것에는 어떤 두렵고 낯선 것, 다시 말해 어떤 친숙하지 않은 것 혹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이 있다'어떤 것이 사람들에게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으면, 참으로 113


3.

 

'사랑하는 보호자의 원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의 원리도 태생의 원리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평범함이라든가 중용의 원리이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태생의 원리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는 노동의 원리, 다시 말해 이자를 낳는 소유의 원리가 그것이다. 여기서 소유란 고정된 것, 주어진 것, 상속된 것(태생)을 말하는바, 그로 인하여 이자란 수고(노동)이며, 따라서 노동하는 자본(arbeitendes Kapital)이다. 어떤 과도함도, 어떤 극단주의자도, 어떠한 급진주의도 허용되지 않는구나! 틀림없이 태생의 권리는 인정되지만, 오직 태어나면서부터 지닌 소유만이 허용된다. 확실히 노동이 인정되긴 하나,[125] 거의 또는 전혀 자신의 노동이 아니라, 자본의 노동과 고분고분한 노동자의 노동만이 인정될 뿐이다.한 시대가 오류에 사로잡혀 있다면, 이것으로부터 어떤 사람은 손해를 입는 데 반해, 어떤 사람은 항시 이득을 본다. 중세에는 교회가 이 세상에서 모든 권력을, 혹은 최고의 주권을 가져야만 한다는 오류가 기독교인 전체에 해당된 오류였고, 성직자는 평신도 못지않게 이 '진리'를 믿었으며, 양자는 모두가 동일한 오류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오류를 통해서 성직자는 권력이라는 이득을 보았던 반면, 바로 그러한 오류 때문에 평신도는 복종이라는 손해를 입었다. 그러나 '손해를 보아야 지혜롭게 된다'라는 속담처럼, 그렇게 평신도는 마침내 슬기로워졌고, 이제는 더 이상 중세의 '진리'를 믿지 않았다. 이와 동일한 관계가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에도 존재한다. 부르주아와 노동자는 돈의 '진리'를 믿는다. 돈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는 돈을 소유한 부르주아 못지않게 돈의 진리를 믿는데, 이러한 것은 과거에 평신도와 성직자가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돈이 세상을 지배한다.'가 부르주아 시대의 지배적 분위기이다179

 

4.


그러므로 인간적 자유주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은 노동을 원한다. 자 이제, 우리도 마찬가지로 노동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가능한 최대한 노동을 원한다. 우리는 여가를 얻기 위해서 노동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 그 자체에서 모든 만족을 얻기 위해서 노동을 원한다. 우리는 노동을 원한다. 왜냐하면 노동이 우리의 자기발전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노동도 또한 노동의 목적에 맞게 조정되어야만 하는구나! 인간은 인간다운 노동, 자기 의식적 노동, 노동의 목적을 위해 '자기중심적' 의향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만을 갖는, 그리고 인간의 자기표명 (Selbstoffenbarung)인 노동에 의해서만 존경받는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만 한다. laboro, ergo sum : '나는 노동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해야만 한다. [145] 인간적 자유주의자는 모든 물질에 작동하는 정신의 노동을, 어떤 것도 가만히 두거나 기존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는 그런 정신의 노동을, 아무것에도 안심하지 않는 정신의 노동을, 모든 것을 제거하고, 획득한 모든 결과물을 새롭게 비판하는 정신의 노동.206

 

5.


그러나 그대는 그대가 완전히 다른 인간, 더 가치 있고, 더 높고, 더 위대한 인간, 다른 인간보다 그 이상인 인간을 드러낸다(offenbarest)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그대가 인간적으로 가능한 일을 완수해냈으며,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것을 그대가 이루어냈다고 하는 점을 확언하고자 한다. 그대의 위대함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그대가 다른 인간들('대중들')보다 그 이상이라는 것. 보통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보다 그 이상이라고 하는 사실에 있다. 정확히 인간을 넘어선 그대의 고귀함이라고 하는 점에 있다. [147] 그대가 인간이란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대가 '독특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대는 그대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한다. 그대는 한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그러나 한 인간인 그대가 그 일을 성취하기 때문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 인간들 또한 결코 그 일을 성취할 수 없다. 그대는 독특한 인간으로서만 그 일을 행했고 그런 점에서 그대는 유일한 것이다.인간이란 것이 그대의 위대함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대가 그대의 위대함을 창조한다. 왜냐하면 그대는 인간보다 더 나은 존재이며, 다른인간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세상사람들은 한 사람은 인간보다 더 나은 존재일 수 없다고 믿는다. 오히려, 한 사람은 인간보다 더 못한 존재일 수 없구나!게다가 세상 사람들은 한 사람이 성취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인간에게 유익하다고 믿는다. 내가 항상 어떤 사람으로 남아 있는 한209

 

6.

 

더 제한된 공동체 속에서 프랑스 사람은 여전히 독일 사람을 적대했으며, 여전히 기독교인은 이슬람교인을 적대하였다. 등등. 그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 인간(der Mensch)이 그 인간들(die Menschen)에 적대하고, 또는 그 인간들이란 그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인간은 인간답지 않은 인간들에 적대하고 있다.이제 "신이 인간이 되었다."라는 문장에 다음 문장이 이어진다. "인간이 내가 되었다." 이 문장은 인간다운 나를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장을 뒤집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을 찾는 한, 나는 나 자신을 결코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이제 인간이 내가 되길 열망하고 나 속에서 뼈와 살을 갖추길 갈망한다는 일이 아주 분명하다. 어찌되었건 나는, 모든 것이 나에게 달려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없으면 인간도 없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가장 신령스러운 영역에서 나를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내가 추적하는 것이 인간인지 또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들인지를 묻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정신으로 나를 괴롭히지 말게!인간적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작동한다. 만약 그대가 한 가지 점에서 특별한 사람이 되거나 특별한 것을 갖고 싶다면, 만약 그대가 그대를 위해 남보다 뛰어난 특질이라도 지키길 원한다면, 그리고 만약 그대가 '보편적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 한 사람의 권리라도 요구한다면, 그대는 자기중심적 사람이다217


볕뉘


책은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키워드를 중심으로 흐름을 쫓아가면 잡힌다. 인류는 어쩌면 이런 질문을 제대로 해보지 않았다. 아직 아닌 유토피아를 말하려면, 아니 우리의 일상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자 한다면 이 질문은 필수다. 이 양반은  자본주의, 봉건주의 중세, 고대를 아우르면서 삶을 살아가는 입장에서 구조적인 문제짜지 잘 다루고 있다.  몇 번 거듭 보시고 두꺼운 책을 읽어내시면 지금 시류와 맞춰 무척 아름답고 무한한 것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 당신 독서이력에 새로운 방점을 찍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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