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년전, [지금의 우리]를 예상할 수 없었나?




둔산 도심의 구 육군통신학교 숲이 남아 있고, 오리농법으로 키우는 둔산 벌 논,밭에서 나는 쌀과 채소로 학교 급식을 하며, 변두리에 있는 폐교가 대안과 문화, 교육으로 스며들어 전국 각지에서 살고 싶어하는, 경전철과 자전거도로로 손쉽게 접근할 수 있어 늘 문화와 거리로 북적이는 마을로, 도심은 여름이면 아파트 단지 사이로 물길과 바람길이 통해 산바람, 강바람보다 시원한 거리를 만들 수는 없었을까?  산을 헤집고, 빌딩을 높이고 바람도 통하지 않는 공동주택을 만든 지금과 견주어보면 개발에 대한 자금을 쓴 것의 아주 조금만 쓰더라도 경제만 생각하는 관점에서 벗어났으면, 누구나 오고 싶고 살고 싶고, 다른 곳으로 가고싶지 않은 도심이 되지 않았을까? 오히려 대전시는 그렇게함으로써 경제유발 효과도 더 클 수는 없었던 것일까?

 

 가끔 인근 대학을 가보면 담장이 쳐진 것은 물론이고, 자동차 주차비 징수하는 것을 보면 변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것도 서울처럼.  대학의 녹지가 건축물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만큼 비슷한 속력으로 도시가 변하는 것 같습니다. 작은동산과 숲,나무와 꽃 그리고 이야기가 있는 대학이 꽃도 나무도 옆의 친구도 느낄 수 없는 직업훈련소처럼 변해가는 것을 아닐까요? 지역 인근 대학이 이미 교직원과 학생들 물리적인 환경용량뿐만 아니라 감성적인 영역의 용량까지 침범한 것은 아닐까요? 대학의 변한 겉과 속의 변화물은 온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난 20년동안 말입니다.

 도시가 숲과 산의 속살을 드러내어 콘크리트로 평준화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어떻게하면 없앨까 궁리를 해도 그 정도는 아닐텐데. 여지없이 보이지 않거나 인적이 드문 숲은 몇 년을 버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숲의 산길의 오밀조밀한 곡선과 여유가 아니라 아무런 곡선도 없는 회색 건축물의 경쟁만 난무한 것이 지난 20년의 결과물은 아닐까요?


 사회적 약자와 인근 변두리는 지속가능성의 어떤 속성에서도 점점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합니다. 버스는 점점 드문드문, 아이는 최소한 교육도 힘들고, 점점 젊은이는 사라지고, 살기 힘들어지는 것. 도시인들은 왜 편한 도시에 살지 않느냐고 항변하는 듯 합니다.  소외와 배제의 정책도 과연 이렇게 치밀하게 할 수 있을까요?


 한편, 도시에 사는 누구나 각박한 도시생활을 푸념하면서 전원생활을 꿈꿉니다. 경제적 효과와 편리성이란 이유로만 꿈도 잊어버리고 합리화와 최소한의 시혜에만 익숙했던 것이 지난 20년의 정책,행정 결과물은 아닐까요?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

 

발제자가 정리한 지속가능성 개념의 다섯가지 속성, 포괄성-연결성-형평성-신중성-안정성에 공감을 표합니다. 그리고 지속가능한 도시 환경의 개념적 구성체계로서 경제적-물리적-사회적 환경의 균형점과 공진화에 인식을 같이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같은 풍부한 설명으로 인해 ‘지속가능성’에 대해, 우리의 현실에 대해 다시 한번 돌이켜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또한 도시의 인구규모와 환경용량에 대한 비교데이터는 우리의 처지에 대해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어 무척 유용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무척이나 가치중립적인 ‘지속가능한’과 같이 붙어있는 ‘개발’이나 ‘발전’에 의심의 눈초리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사회는 어디에 방점이 찍혀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지속가능한’이란 수식어가 발전을 합리화시켜준 것은 아닐까? 그럴듯한 화장을 하여 잘 보이게 하는 것을 아닐까?란 의구심이 생각의 꼬리를 물었습니다.


‘자본’이 환경이란 개념을 포획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더 목소리 높여, 환경을 부르짓습니다. 석유를 대체하고 환경을 생각하기 위해 장려한 바이오디젤은 이제 산업의 수준이 아니라  브라질의 한 지역을 황폐화하고 지구의 호흡을 가쁘게 하는 일로 번졌습니다. 대안이라는 것이 나라의 사정, 여건이라는 변수가 있을텐데 그것을 외면하는 발상은 아닐까요? ‘환경’과 ‘대안’을 생각한다는 이면에 ‘자본’의 사슬로 깊숙이 연결이 된 셈은 아닐까합니다. 오밀조밀한 굴곡을 생각하지 않고 천편일률로 친환경바이오디젤을 하여야 한다는 집중적 사고는 ‘자본’의 힘만큼 무서운 것은 아닐까요?


더구나 이러한 개념이 우리에게 오면 ‘지속가능한’ 수식어마저 사라지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요? 발전이란 덫에 걸리거나, 그것을 합리화시키는 알리바이용으로 쓰이거나, 그 이념을 순화하는 기능을 해왔던 것은 아닐까요? 모든 지속가능성이란 개념이 우리에게 들어오기만 하면 서열지어지거나 중앙집중의 이데올로기의 그물망에 걸려, 그 수준에서 사고하는 것은 아닐까요? 따로 여럿이 함께 꾸준히라는 분권이라는 마음이 들어가 있는 것일까요?


 또 다른 서울을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은 아닌가요?  넓어지기만 하는 도시, 높아지기만 하는 도시, 과연 그 좁은 도시에서 한번이라도 이런 정책의 마음을 제대로 유지 시행한 적이 있었나요. 그 결과를 올바르게 평가를 한 적은 있던가요? 정책의 일관성과 행정이 오밀조밀하게 연결된 적은 있나요? 정책입안자나 정책에, 시행하는 분들의 가슴에 시간이란 축이 들어간 적이 있었나요? 임기내에 선언의 의미이상을 가진 적이 있었나요? 아니면 문화나 사회적 약자의 마음이 가슴에 들어간 적이 있었나요. 그저 베끼고 색깔없는 실행력없는 기획만 난무하는 것은 아닐까요?

20 년뒤, 여전히 눈먼발전에 발목잡힌 현실만 아이들에게 물려줄 것인가?

- 적게, 쉽게, 빨리 할 수 있는 실험들

언급된 2020년 대전도시기본계획과 대전시와 구단위의 정책방향에 대해 시선을 옮겨봅니다. 꾸준히 늘러난 도시확장만큼이나 그 욕심이 대전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은 아닌가합니다. 개발과 편입, 기껏해야 물리적 환경을 양념으로 생각해주는 계획은 아닐까하는 우려가 듭니다.  그동안의 개발 사업의 역사와 현황이 그동안의 잘못을 고스란히 일러주는 것은 아닐까요. 환경용량과 여유지를 두는 것은 이미 과잉이 된 도시의 기능을 최소한을 유지하자는 몸부림이 아닐까 합니다.


여유지를 남겨두고, 물리적환경이란 속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 정치-문화-사회적 차이와 차별의 공간을 줄여 다시 만들어가는 것이 더욱 소중한 것은 아닐까요? 이미 바람길이 없는 고층아파트 단지에 바람길을 다시 내겠다는 사후정책보다 미리미리 취약지구나 취약계층이 있는 지역을 문화적, 교육적 장점을 갖도록 만들고 배려하는 사전 정책이 예산도 정책효과도 더 큰 것은 아닐까요? 도심에 농사짓는 일도 서로간 대화의 빈도수를 많이 늘려 보안과 안전에도 굉장한 효과가 있다고 하더군요.


대전을 중심으로 기획하고 배치하려는 집중적인 발상에서 벗어나, 주변 군소도시가 나름 먹고 즐기고 멋진 교육과 삶이 있는 중심으로 만드는 것이 더 쉬운 일은 아닐까요? 구단위의 외딴 마을의 취약지역을 생태-문화적 장점-지역을 특색을 만드는 것이 이미 빌딩으로 들어차 바꿀려고 해도, 예산을 퍼부어도 바뀌기 어려운 곳보다 더 쉬운 일은 아닐까요?  굳이 옥천,금산,논산,공주에서 대전까지 유학올 일이 아니라, 정치 사회환경을 만들고, 또 다른 중심을 갖는 생태읍면도시가 되도록 배려하는 일이 돈도 적게 들고, 사람도 그곳에 남게 하는 일은 아닐까요?


20년의 정책과 행정의 결과는 누구보다 시민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몰라서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알아도 하지 않았던 것을 반성해야 합니다. 경제란 성장만 생각하고 환경이란 이름으로 생색내었던 것을 과감히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이율배반적인 관점은 우리의 이런 무의식 가운데 박힌 성장이념 때문에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환경에 사회적 약자의 접근 성과 여기에 계속 살 사람, 사람관계나 경제를 제외한 다른 가치에 내어주지 않으면 논의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20년뒤의 아이에게 물려줄 이 자리는 또 다시 20년 전처럼 숲도, 나무도, 논도 밭도, 실개천도 사람도, 어떻게하면 구마다 다른 색깔의 정책과 정치와 문화에 취해볼까 부러워하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구단위의 동단위 마을마다 색깔을 낼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우리 마을 옥상은 수선화꽃으로 만발하고, 이 마을에서 나온 학생들은 구청공무원으로 취직될 수 있어야 합니다. 노년을 자원활동하면서 멋지게 지역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만드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무늬만 환경, 자본에 조종되는 환경이 아니라 진정 살맛나는 환경을 바라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일이 정녕 뒷감당만 하는 예산쓰기와 달리 돈이 많이 드는 것일까요? 상상력과 하고싶어하는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요? 환경영향평가가 아니라 정신적 측면, 문화적 측면을 고려하는 건강영향까지 평가를 할 수 있는 마인드는 어떤가요?


몇가지 키워드, 눈여겨보기

 - 균형만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 문화적 환경에 대한 실험 필요. 건강영향평가. 안전에 대한 왜곡 - 함께 사는 도시(도시에서 농사짓기). 기존의 발전개념이 요구한 것은 오로지 경제성장. 사회관계,사람, 함께는 생략되어 있어. 분권-유보지와 환경용량을 키우는 상상력.2020년 로드맵은 분업만 있는 경제복제도시. 직선만있고 곡선이나 순환구조는 없어. 인구는 줄어야 이미 과포화. 정치사회적 환경을 중심에 두면 적은 예산 많은 분산효과가 있어. 너무 똑똑하여, 아니면 행정-정책마인드 또한 너무 집중하여 연계성이나 함께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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