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마지막 코멘트

 

 

캉길렘은 잘 알려진 단절에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유래와 연속성 또한 추적하였다. “이건 어디서 왔지?” 강박적으로 반복되던 이 질문은 때로 우리를 몇 시간 동안이나 단 하나인 문단에 붙잡아 두었다. 137

 

치열하게 사유하는 것캉길렘이 심어 준 윤리는 게으른 사유의 경향을 거부하는 데 있었다. “악은 본질상 게으름인 이기심이다. 게으름은 쾌락의 추구와 노력으로부터의 회피라는 두 측면을 지니고 있다. 행동한다는 것은 이 게으름과 싸우는 것이다. 다른 모든 행동은 기만적이고 덧없다. 우리가 세상에 홀로 남더라도, 그리하여 주변에 아무도 없고 우리 자신에게 부과되는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더라도, 법칙은 동일하게 남아 있을 것이며, 진정으로 산다는 것은 항상 삶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일 터이다.” “고통을 견디기보다는 삶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면에서 회의주의는 옳다. 세계과 자신을 난해하게 만드는 것이며, 혼돈을 선언해야 한다. 그런데 혼돈은 아무 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과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할지말지, 선택해야 한다.” 145

 



3장 역사적 인식론?

 

바슐라르 저작의 본체를 구성하는 세 가지 공리. 1 진리는 얻을 수 없다. 다만 제1 오류들만이 있을 뿐이다.“ 첫 번째 공리는 오류의 이론적 우선성에 관한 것이라고 정식을 인용하며 쓴다. 또 다른 정식 직관들은 파괴당하는 역할을 맡는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하다로 표현될 수 있는 두 번째 공리는 직관에 대한 사변적 평가 절하에 관한 것이다”. “세 번째 공리는 관념의 관점으로서 대상의 지위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실재를 구성해야 하는 필요성 그 자체로부터 실재를 이해한다. 우리의 사유는 실재로부터 줄발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 향한다.” 70-71

 

오류는 무력함이 아니라 힘이며, 몽상은 연기가 아니라 불꽃이다라고 쓸 수 있었다. 능동적 연구에서 오류는 증식한다. 오류는 사유 그 자체에 원천을 두고 있다. 오류들은 욕구, 이미지 그리고 몽상을 관념으로 변환한다. 사유는 자신을 지배하는 동요를 모면했을 때에만 지식을 향한 여정에 가담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새로운 기예를 요구하는 과학사가 나타난다. ” 이 역사는 더 이상 자연사와 마찬가지로 전기들의 모음, 학설에 대한 묘사가 될 수 없다.“ 이 역사는 합리적 가치가 어떻게 과학적 활동 자체를 이끄는지를 보여 주는 개념적 계보의 역사가 된다. 71 바슈라르는 이제껏 하위 범주에 속해 있었던 상황에서 과학사를 끄집어 내 일선의 철학 분야로 끌어올림으로써“ ‘과학사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쇄신했다고 평가한다. 72

 

과학의 논리와 철학 세션의 논문 <17, 18세기 반사 개념의 형성>에서는 낡은 역사(생리학에서 데카르트적 기계론의 역사)와 승인된 역사(생기론의 전통 역사)를 구분할 수 있게 하는 개념적 계통의 역사를 쓴다. 73

 

데카르트는 모든 의학적 실천의 외부에서 의학 이론을 만들었다. 그는 정상적인 것으로부터 병리적인 것으로 나아갔다. 윌리스는 병리적인 것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그는 생명적 운동의 원리와 원천에 대한 거의 시적인 직관에 가까운 유비 추론 능력으로 거의 대부분을 사로잡는다. ”유비의 힘 덕분이다. 윌리스는 생동이자, 임페투스(관성)이며, 불관성에 반하는 노력으로서 생이 빛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이 그에게 빛의 법칙에서 생의 법칙의 본보기를 발견하는 것이 자명해 보였던 이유이다.“ 이처럼 생기론적과학자의 전통은 윌리스로부터 프로체스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중요한 것은 임상으로부터 출발하여 생을 현상의 고유한 질서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78 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참조.

 

테일러주의적 합리화는 노동계의 저항을 야기하면 그 실천적 한계를 드러낸다. 여기 실패의 저변에는 이론적 오류가 자리잡고 있다. 자기 삶의 모든 의미가 박탈당하지 않는 이상 사유하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이 사유를 통해 자신의 고유한 환경을 구성하는 생명체인 인간 개체의 특수성을 무시한 것이다. 그래서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적 오류를 보여주는 증거인 것이다. 82

 

<<방법서설>> 출판 300주년 기념 학술대회 데카르트와 기술에 대한 발표에서 과학 덕분에 자연의 교수이자 선생님이 된 인간이 필연성에 대한 지식을 능력으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이 기획은 자연에서 모든 목적성을 제거하고, 영적 차원을 완전히 부정하고, 물질에 질적인 것은 없다고 이해한 후에만 세워질 수 있는 기획이라고 말한다. 85

 

과학은 기술로부터 생겨난다. 그러나 이는 참이 유용한 것의 체계화, 성공의 기록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기술적 곤경, 불완적한 성공, 실패가 정신으로 하여금 인간적 기예를 통해 마주친 저항에 문제를 제기하게 하고, 마주친 장애물이 인간의 욕구와는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며, 참된 지식에 대한 탐구를 촉발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86

 

기술의 주도권은 생명체의 요구 안에 있다. 이 요구를 전달하는 충동은 이론가의 허가를 기다리지 않는다. 기술은 창조로서 사유되어야 한다. 과학의 문제는 과학의 영역에서 해결될 수 없다. 과학은 기예의 관점에서, 그리고 기예는 생명의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기술이 과학에 우선한다. 기술중심주의적 의미가 아니라 과학적 사유의 비약적 발전의 조건은 기술의 실패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과학은 제작하려는 충동이 마주치는 실패와 장애물에 대한 반성으로서 나타난다. 열역학, 파스퇴르 이론, 탄도학 문제를 사유한 갈릴레이까지 차고 넘친다. 87


볕뉘.


팔월의 끝. 진행중인 작업. 쉼이 필요한가. 쉬어 주어야 하는가. 불안증이 몸을 덮고 있다. 작업실을 달리 세팅하고 스토리라인을 만들어둔 것이 출발하기 전 날이다.  진도는 아주 조금씩 작업실에 거처한 만큼만 나간다. 


다녀오자. 찾던 책도 둔 곳이 어디메뇨 헤매이다 식수냉장고 곁에 꽂아둔 걸 발견한다. 오고가는 길. 오늘에서야 두 권을 마저 읽다.


 다시, 세 권을 주문 넣다. 


현대미술관 청주 수장고 전시를 보다가 얻은 아이디어를 구겨 넣어보니 괜찮다. 또렷하게 시간과 작업을 채워넣으면 된다. 뫔이 많이 편해지고 있다. 횟수만큼 마무리된다고 여기고 나니 말이다.  내일은 구월의 이틀. 사흘.


많이 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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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주말 그림작업중에 후배지인에게서 연락이 온다. 몸을 담았던 단체에서 강연자로 소개한 책이기도 해서 관심있었는데, 곡 읽어보라는 전갈이다.  한 선배에게서 근황을 들었던지 이러다가 이곳 지역사람 되는 거 아니냐고 농담한다. <신곡>이 아니라 접근하고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 감탄스럽다고 다짐을 넣는다.







둘.


 풀은 꿈을 꾸는가? 근래에 불쑥 스며든 생각은 도망치지를 못한다. 살아있는 것들은 생명이라고 하자. 그러면 그 생명체는 잠을 자는 동안 어떤 형태로든 쌓인 것들을 풀게 되어있다. 사람들이 꿈에서 그러한 일을 하는 의식작용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마 꿈도 꾸지 않을까? 그렇게 이름을 붙여야 될 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형태로든 긴장을 푸는 기능들이 있을 것이다. 아메바도 그런가하면 답은 그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어디쯤에선가 그런 책은 나오지 않았을까하고 더듬어 본다.  여러 해, 아니 십년 전쯤에 <들풀>이라는 주제로 책들을 읽었던 적이 있다. 저절로 손이 가는 책이어서 이렇게 손을 뻗는다.




셋. 동결견, 오십견, 관절낭염이라고도 하는 윗옷을 벗기도 힘든 증상이 나타난지 몇 달이 지나고 <어깨동무>라는 한의원에 들렀다. '동결되었다'는 표현이 괜찮았다. 잘 녹혀주면 된다고 말이다. 그래서 3주 진단이 나왔고 하루이틀 지나서 뒤쪽 회전말고는 다 좋아져서 한의사도 놀라는 눈치였다.  <<바디 멀티플>>이란 책은 <동맥경화>를 '중첩'되게 다룬다. 의사, 영상파트, 한의원, 환우, 연령별 차이를 두고 각기 다른 입장에서 이 병을 쫓아가다보면 우리가 하나에 지나치게 권위를 위탁하고 몰아간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러다가 정답같은 것이 없다라고도 느낄 수 있으나 결국 '하나 더하기 여럿 '이라는 판단력이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캉길렘은 알튀세르, 발리바르 등등 프랑스 이론 산실의 거장 은 아닐까. 사유의 풍요로움은 거기서부터는 아닐까. 과학사와 철학사의 겹치게 볼 수 있는 <<조르주 캉길렘>>을 빨리 완독하고 있지 못하다. 이 번 주문한 책으로 겹쳐 소화할 수 있기를 빈다.  어깨가 말렸고, 수직에서 떨어져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날개뼈 아랫근육을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잔근육들을 풀어주면서 살지도 못한다는 습관들이 통째로 걸려있다. '멀티플'하게 증상과 치료효과를 보는 지금에서야 폼롤러를 끼고 있다.












<<과 교환양식>>을 보다가 어 고진이 이런 면이 있었어 한다.  이 책은 무척이나 오래된 책이기도 하다. 고진 책들을 바리바리 싸서 대전 대동 작은 책방에 건네준 적이 있어, 이젠 수중에는 없다. 그의 삼부작은 이 두 권 외에 한 권이 더 있다. 다시 읽어내야 한다. 칸트의 초월성와 마르크스다. 이제는 많이 만만해지기도 하다. 새롭게 읽어내는 기회가 왔으니 충분히 즐길 일이다. 기대된다.







 다섯


 신양객잔 주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강좌를 진행중인 것을 잘못 알아들었다. 프랑스 유학 경험을 듣고 르페브르 전공자의 강연이 있다는 걸 이 분으로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생활세계의 혁명성에 대한 몇 권의 책들을 인상깊게 읽었는데, 지금 다시 읽혀야 할 부분을 나누고 있다는 것이 대견하게 여겨지기도 하다. 이 또한 십여년도 지난 일이지만 지금이 오히려 <혁명>이라는 말에 더 신경이 뾰족해지기도 한다.









볕뉘


이렇게 읽지 않은 책들을 소개한다. 작은 책방에 주문한 책들이고 즉시배송이 아니라 찬바람이 부는 날, 라이딩으로 들르면 이 책들이 배달와 있을 것이다. 그런 기다려주는 행운을 펼치는 기분 또한 새로울 것이다. 그러면 한결 더 흥미롭게 저자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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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원론으로 사유한다. 그것은 벗어나는 일은 철학이나 정치의 한 맥락을 잡고 해석하여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아시겠지만, 그것은 자신을 요동시켜 그 그물의 사유찌꺼기를 말끔히 털어버리는 일이다. 그것은 또한 스칼라, 양이 아니라 벡터의 사유이기도 하다. 방향과 힘을 갖고 있는 흐름으로 고정된 세계의 사유를 뒤집어 엎는 일이기도 하다. 알고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습속들을 낱낱이 드러내어 재조립하는 것이다.


-1


그렇다. 조립의 문제 역시 잘못본 것이다. 다시 태어나는 일이다. 




0


79년생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객체론들이 잘못 밟고 있는 지점들을 속속들이 알 수 있다. 친절하게도 역사의 선상에서 처음부터 되짚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차근차근 연습할 수 있게 해준다.


1


가다보면 양자론과 맞닥뜨리게 된다.  로벨리, 양자 중력이론, 플랑크 길이와 다시 만난다. 얽힘과 캐런 바라드 또한 만날 수 밖에 없다. 밑절미 삼아 또 다시 탐색해보는 수 밖에 없다.


















 











332 객체는 아무리 사소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제작하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종종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객체를 관계적 과정으로 간주한다면 어쩌면 그로 인해 우리는 관찰 사건의 특이성에 더 주목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객체를 가능한 상태들의 총체가 결여된 비결정적 과정으로 간주한다면 어쩌면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진행 중인 특이한 변화에 더 민감하도록 고무할 것이다. 게다가 어쩌면 이런 운동적 해석은 운동 중인 물질의 진정한 참신성과 창조성뿐만 아니라, 그런 참신성의 공-생산자로서 과학자들의 역할을 더 정확히 반영할 것이다. 그들은 중립적 관찰자들이 아니라 운동적 조작자들이다.

 

333 폴 디랙은 객체를 고정된 특성들을 갖춘 이산적인 정적 양자로 간주하기보다는 오히려 관계적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어떻게 될까? 위치, 속도, 각운동량, 그리고 전자기 퍼텐셜이 오직 다른 객체들과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출현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하여 우리는 전이-중인-양자를 설명하는 전적으로 상대론적인 양자론을 갖추게 될 것이다./ 디랙이 장과 입자를 수학적으로 통일했을 때 그는 시간과 공 334 간이 균질하지 않다는 특수 상대성 이론에 의해 제시되는 모형을 좇았다. 양자장은 그 진동 또는 들뜸이 이산적인 층위 또는 에너지 준위에서 입자가 출현하게 하는, 진동하는 기타 현처럼 작용했다. 디랙은 입자와 장을 동일한 움직이는 물질의 진동으로 간주했다. 그는 광자란 연속적인 비결정적 전자기장의 들뜸 또는 진동이라고 주장했다. 디랙은 이것을 양자 전기역학이라고 일컬었다.

 

335 1970년대 물리학자들은 기초 물리학이 여태까지 고안한 가장 성공적인 단일 모형에서 중력을 제외한 모든 관찰된 장, 입자, 그리고 힘을 통합했으며, 그 모형을 표준 모형이라고 일컬었다. 1973년에 과학자들은 이 모형을 완성했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그 모형은 다양한 실험에서 견지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대략 열다섯 가지의 양자장에 관해 알고 있는데, 그 양자들은 전자, 쿼크, 뮤온, 중성미자, 그리고 힉스 보손을 비롯한 기본 입자들이다. 오늘날(물질에 관한 쿼크 이론 같은) 기본 입자들에 관한 모든 이론은 양자장 이론이다. 입자는 근저에 자리하는 장의 에너지 들뜸으로 여겨진다.(2013년 힉스장, 2017년 중력장)

 

336 중력이 가장 최근에 양자장 이론에 추가하고자 하는 부분이 된다. 양자 중력 이론은 장이론 방정식들을 사용하여 공간과 중력이 에너지의 양자 요동에서 출현함을 서술한다....양자 중력은 여전히 확증되어야 하지만, 많은 물리학자에게 그것은 미래의 통합된 만물 이론에 대한 가장 개연성 있는 후보이다.

 

337 양자장 이론은 비결정론적이다. 어떤 장의 최저 에너지가 영도 아니고 어떤 결정적 양도 결코 아님을 깨달았다. 양자장에는 이른바 양자 요동이라는 매우 작은 비결정적 진동 상태가 있다. 이런 요동 상태는 이 상태에 있지도 않고 저 상태에 있지도 않기에 엄밀히 따지면 객체가 아니다. 양자 진공은 텅 빈 공간과 유사하기보다는 오히려 충만한 공간과 유사한다. 338 돌발적으로 생겨나고 사라지는 물질과 반물질의 일시적인 입자들로 들끓고 있다. 가상입자는 가상적이지도 않고 입자도 아니라 오히려 장 자체의 실재적이고 비결정적인 운동적 진동이다.

 

338 이런 요동의 운동을 난류성 소용돌이로 서술하고, 그것이 양자장 이론의 방정식에 미치는 효과를 섭동 이론으로 서술한다. 진공 요동은 단지 입자를 교란하는 것만은 아니다. 입자는 장의 진동이다. 양자장 이론에서 모든 물질은 어떤 지점에서 진공으로부터 생겨나는 요동이다. 사살상 양성자와 중성자의 질량 대부분은 해당 질량의 1퍼센트를 구성한 따름인 쿼크들에서 비롯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의 비결정적 진동 요동들 또는 가상 입자들의 움직임의 결과이다. 자연은 진공을 혐오하지 않는다. 자연은 진공을 경애한다.

 

340 주위의 진공이 요동하면서 움직이는 대야 속의 물의 파동처럼 자신에 반응함에 따라 그것은 자신의 입자들의 준안정한 상태를 교란한다. 이런 역반응은 디랙이 자신의 방정식에 결코 전적으로 만족하지는 못했던 이유 중의 하나이다. 장들이 관계적인 동시에 끊임없이 벼화하고 있다면, 각각의 변화는 모든 장 관계를 거듭해서 계속 변화시키고 있다. 전자의 실재는 파동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통해서 현시되는 방식이다.

 

341-342 양자장에 생겨나는 들뜸은 그 장 표면에 선회하는 소용돌이 선회또는 거품을 형성함으로써 그 장이 자신 및 다른 장들과 상호작용하게 한다. 변환 사이클에서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고리를 형성하거나 고리 양자 중력은 시공간 자체의 본질적 알갱이적인 짜임새를 구성한다. 이런 양자장 고리의 회집체는 물리학자들이 스핀 거품 네트워크를 만든다.

 

343 사물들이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들이 사물의 개념을 정초한다. 양자역학의 세계는 객체들의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사건들의 세계이다. “객체는 한결같은 과정이다파도가 바다로 또 다시 용해되기 전에 잠시 그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돌은 잠시 그 구조를 유지하는 양자들의 진동이다. 객체는 장의 창발적 면모이다. “가상 입자들의 매개적 교환을 통해서 자신(그리고 다른 입자들)과 내부작용한다. 그러므로 이처럼 무한히 많은 가상적 내부작용의 에너지-질량은 전자의 질량에 무한히 이바지한다. 이렇게 해서 양자 객체론은 비결정적 되먹임 효과로부터 구축된다.

 

343-344 양자 되멱임의 또 다른 중요한 사례는 얽힘이다. 얽힘은 양자역학을 특징짓는 하나의 특질이 아니라 오히려 유일한 특질, 즉 양자역학을 고전적 사유 노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도록 강제하는 특질이다. ”우리는 계 전체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의 상이한 부분들이 서로 얽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349-350 양자장들이 진동하고 상호작용함에 따라 그것들은 공간과 시간을 형성한다. 고리 양자 중력의 방정식에서 우리는 에너지를 플랑크 길이라는 양화 가능한 최저 한계까지 모형화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알려진 입자 또는 가능한 실험 측정값보다 상당히 더 작다. 플랑크 길이 아래서는 에너지 요동이 근본적으로 비결정적인 것이 되기에 우리가 그것을 관찰학자 할 때 요구되는 광자 에너지가 너무 강력하여 블랙홀이 생성될 것이다. 이런 까닭에 플랑크 길이를 양자론의 자연적 차단으로 서술한다. 양자 고리’ ‘방울그리고 거품의 내부에는 접근할 수 없는 방대한 미시 블랙홀들의 바다가 존재한다고 추측하는 이론가들도 있다. /에너지는 플랑크 길이 아래에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매우 근본적으로 비결정적인 것이 되기에, 알려진 물리 법칙들은 붕괴하게 된다. 351 예를 들어 플랑크 길이 히하의 크기를 갖는 상자 속에 입자 하나를 넣는다면 그 위치의 비결정성은 그 상자의 크기보다 더 클 것이며, 그리고 그것의 질량은 플랑크 길이의 두 배가 되는 반경을 갖는 블랙홀을 산출할 것이다. 이 반경을 가로지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플랑크 시간의 네 배일 것이다. 이런 초강력 에너지 상태에서는 공간의 용동과 곡률이 매우 비결정적인 것이 되기에 우리는 양자 중력 이론을 사용하더라도 그것들과 관련하여 유의미한 것을 전혀 계산할 수 없다.

 

351 운동적 조작자는 텅 빈 공허가 아니라 들끓고 있는 생성적 비결정성이다. 플랑크 길이 아래로 진입하는 블랙홀의 핵심에서 에너지와 운동량은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비결정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블랙홀은 에너지를 파괴하는 우주적 진공이 아니라, 에너지를 풀어서 다시 엮는 직조기다. 매우 작은 플랑크 크기의 블랙홀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시공간을 대단히 불안정한 거품투성이의 것으로 만드는 엄청난 비결정적 양자 요동의 원천일 수 있다.

 

352 플랑크 길이 아래에서 양자 비결정성은 더 상위의 설명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물리학에 알려진 모든 예측 방법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해석에 따르면 우리는 비결정성을 무작위적인 것, ‘결정론적인 것, 또는 확률론적인 것이라고 일컫지 말아야 한다. 이것들은 근대적 객체론에서 수입된 관념들이다. 나의 논점은 비결정성이 우리에게 다른 방향을 가리키리라는 것이다. 물질/에너지의 움직임이 객체들로 환원될 수 없고, 오히려 객체들의 내재적이고 총체화될 수 없는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적으로 실행 가능한 해석이다.

 

355 물질의 역동성은 새로운 사물들을 세계에 생성한다는 의미에서 생성적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들을 산출한다는 의미에서도, 세계의 진행중인 재배치에 관여한다는 의미에서도 생성적이다. 신체는 단순히 세계에서 자기 자리를 차지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신체는 단순히 특정한 환경에 처하거나 자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환경과 신체는 내부작용을 통해서 공-구성된다. 신체는 존재하는 것의 중추적 부분이거나 역동적 재배치이다.

 

356 에너지, 엔트로피, 그리고 얽힘은 플랑크 상수 아래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점점 더 비결정적인 것이 될 따름이다. 객체는 더 작은 근본적인 단위체들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비결정적 접힘의 운동적 조작에서 생겨난다.

 

358 새로운 운동적 객체론을 향한 길은 비결정적인 얽힌 운동을 결정론, 무작위성, 또는 확률로 설명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오히려 자연을 근본적으로 운동적인 것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양자과학은 운동 중인 물질의 패턴들을 무언가 다른 것에 의한 궁극적인 설명을 추구하지 않고서 추적함으로써 완벽하게 잘 작동한다. 운동적 장은 물질의 움직임을 어떤 더 심층적인 원리 또는 근본적인 측정 단위체로 설명하지 않은 채로 공-창조하고, 그 지도를 그리는 내재적 장 또는 범위이다.



2.

 이 책도 겹쳐져서 읽을 필요성을 느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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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취호공원 


여행이나 관광을 예찬하지 않는 나는 상상력의 공간을 압축시켜 없애는 걸 빌미 삼는다. 하지만  다녀온 관광의 흔적이 아니라 여행의 기억을 건네주면, 불쑥 그것이 빌미가 된다.


아를이란 마을에 가고싶단 마음이 파도처럼 인 것이 몇 주 전이다. 미술관들이나 예술가, 작가의 삶이 묻어있는 곳이라면... ... 언젠가.


취호공원은 저자인 시인에게 마음의 평온과 시를 만들게 해 준 배경같다는 느낌을 준다. 낯선 곳의 낯선 날들이 가져다주는 안온함과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마음의 여백같은 공간이 되어주는 곳 말이다. 



2.부


1988년, 반지하의 제본소에서 일한 적이 있다. 달력을 만들 때는 야근이 허다하고,  또래의 모습은 핏기도 없고 일상은 쳇바퀴처럼 돌아갔다. '1997년, 어느 지하실의 기억' 저자는 미싱공 시다 생활을 한다. 반지하에서....몇달 간의 생활을 마치고 군대로 가는 나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벗어난다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그 기억이 예전으로는 돌아가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삶을 이어주는 모스신호같은 것은 아닐까 한다. 


2부에서 시인은 그런 마음들을 모아 표현한 듯 싶다. 새롭게 자라고 싶다는 '삭발', 모든 빗줄기가 울음이고 싶다는 '장마',  스스로 반추하는 '불량품'과 온몸으로 기다림의 축적물이라는 '개화'는 서로 겹쳐 같이 있다. 바다에 귀 기울이는 '소라', '개미떼를 죽이다'는 이런 면에서 살얼음처럼 이어지는 마음들이다. 먼 뫔의 기억으로부터 자라나는 새싹들인 것이다.



3.부


사회학자인 시인은 이 곳에서 사회학이 담아내지 못하는 논문 이상을 담아내고, 사회를 읽어내게 만든다.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경계인들 '지금 우리는' '어느 노동자의 항변' '백수白手'에 대한 담백한 기술에 너머 개인이 스스로의 꿈까지 잡아먹고 있음을 여실히 밝힌다. '방1' '방2' '꿈'이란 시에서 그 '지구' 란 집합 안의 하나의 기호로서 여실히 골라내고 있음에 섬뜩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소셜 네트워크' '허영덩어리' '부부들에게'는 그 증상들을 적확하게 묘사한다. 이런 세상에서 삶은 온전하지 못함을 '고백'한다. 


시라도 쓰는 삶이 아니었으면 작게 흔들리는 것들을 부여잡는 시인의 마음마저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4.부


'산책' '삐삐 롱스타킹'  아픔과 구조의 그물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자본주의' '프레카리아트' '오월' 이란 삶 안에 풍요로운 섬하나는 가꾸어야 한다. '소매물도' '긍정주의자'란 시가 그렇다면  그 속에 흔들리는 나도 나일 수밖에 없다. '어째서 자꾸 나는 슬퍼지는가' 


우리는 아름다움 한점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햐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비'


연약한 날개 짓

바람에 홀려 춤을 춘다.


창공을 가르는

현란한 빛깔은 서글프게 고와


내 마음을 삼키고


아무것도 아닌 이곳에

아름다움,

그 하나의 의미를 남긴다.



5.부


어쩌면 아름다움을 발견한 이들에게 삶은 그래도 살아지게 만들지 않을까. 각박과 척박이란 세상의 비를 피하거나 막는 작은 우산, 우산 살이 망가졌지만 그래도 아주 잠시 빗자락은 피할 수 있는 묘수 말이다.  '정거장' 그냥 대충 사세요. '이상주의자' '유서'를 쓴다는 건 '희망'에 대한 강한 확신이기도 하다. 갈 때까지 가 보자 '인생'은 결기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시인의 외침은 부드럽지만 강하다.


'바람'


아무리 둘러 봐도

아무리 쥐려 해도

바람 속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나 바람 부는 날에

그 속에 서면 나는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아야.


때로는 따사로운 햇볕

때로는 시원한 비

때로는 하얀 눈송이와 함께

슬며시 내 주위를 감싸는 

바람


아, 나는 아무것도 없는 바람 속에서

하늘을 세상을 뛰어 넘고 싶어요.


볕뉘.


'영혼의 노래, 詩'


시 모임을 한다. 누구는 시도 공부하느냐고 웃어젖혔다는데, 

그래도 우리는 모였다. 회원은 셋 서진배 시인, 노현승

대표 그리고 나, 이상한 조합이다. 전에 살갑게 대화

한번 나눈 적 없던 사이인데 시가 좋다고 이렇게 함께하니

시란 도대체 뭐람? 안도현, 박준, 이시형의 시를 읽었다.

시어를 허공에 풀어 휘휘저저 낚아 올린다. 가끔은 꿈

틀거리나 잽싸게 패대기도 쳐본다. 이리 저리 부유하며

떠도는 언어. 표정도 향기도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 시란 도대체 뭐람? 고통의 모퉁이에서 홀로

노래하는 시인아, 서러워말기를. 당신의 영혼은 무지개를

타고 밤하늘을 수놓으리. 그러니 찬란하게, 찬란하게 生을

살아내어라. 이다음에 새싹처럼 쑥쑥 자라 시인이 되겠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시도 공부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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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팝꽃이 바람에 눈처럼 날린다. 무척이나 이른 아카시향은 바닷바람에 드세다. 곳곳에 폭우 소식과 이어이어 보이는 지구는 두바이에도 브라질, 중국, 미국에도 인정사정 없다. 매일 마무리가 엉크러진듯 반듯하지 못해 싱숭한 마음자리가 쉽지 않다. 올 여름은 어쩐다. 냉천 공사는 한정없이 늘어지는 듯싶다. 오고가는 길 쓸데없는 생각들이 뿌려진다싶다.


-5. 


연일우체국 주차장에 미니벨로 뒷바퀴와 짐받이를 둥그렇게 이어서 잠근 뒤, 준등기 볼 일을 마치고 돌아선다. 티딕, 자전거가 나아가질 않는다. 에구 무슨 일이람. 뒷 체인기어 사이에 파고 들어간 자물쇠의 꼬다리가 파쇄되어 날라가고 없다. 천천히 반대방향으로 돌리고 더 복잡해지지 않게 풀어내면서 마무리한다.  


-4.


많은 일들이 셈해진다. 막내녀석도 짧은 3주 군사훈련을 받고 오고, 벗의 북콘서트, 딸아이 결혼 사이사이 잔 일들이 평균보다 높은 간극과 강도로 이어진 셈이다. 저 멀리 부친의 이별만이 아니라 반대 극의 전시도 몇 번 하고, 일터의 일들도 간간히 아니 촘촘히 이어진 것이다. 


-3.


년휴 기간 동안 작업실에서 온전히 작업을 한 것 역시 드문 일이다. 내리 3-4일 작업을 했으니 이리 밀도높게 작업만 한 시간도 근래 가뭄에 콩나듯 한 일이다. 작업실내 공간이 분리가 되지 않아 어젠 오전 내내  버리고 쓸고 닦고 한다.  마음이 조금 추스려진 것이다.


-2


작업실 자전거 퇴근 겸 청림동 바닷가까지 에돌아 간다. 도구 앞 바다로 가는 길은 이어지지 않아 섭섭했지만, 일월 바다를 잠깐 구경한 것도, 저번에 넘어진 주유소를 지나친 것도 국밥에 막걸리 한 사발 걸치고 돌아오는 길, 이런 '상실'이 어디에서 온 연유인가 더듬어지기 시작한다.


-1


작업공간 겸 글 작업을 하던 카페하며, 드문드문 손님을 치루던 활어 초밥집 사장님이며, 화실이며 그리고 가끔 들른 조선통닭 호프집 하며 벌써 지워진 시공간이 한 두곳이 아니다. 시대의 우울이 아니라, 마을의 우울을, 동네의 상실감이 저변에 깔려있음을 문득 깨닫는다.  지키고 싶던 것이다. 나이가 들고 그러하리라 여기던 것이 하나 둘, 곁을 떠나고 그 아쉬움들이 차곡차곡 쌓인 것은 아닐까.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알아채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고 할까.


0


이미 복잡해진 작업공간 역시 하나하나 아쉬움처럼 쌓였던 것이다. 답답함은 키만치 자라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하나 제자리에 돌려놓고서야 마음도 이제서야 빈 여백이 생긴다는 걸 눈치챈다. 


1


어느 사람에 대한 상실감과 아쉬움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밀도 높은 일상들은 여기저기서 아우성이었던 것이다. 미련하게 그 짐을 모른채하고 버티고 서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2


<뒷것 김민기> 를 조금씩 보다 <봉우리>란 가사가 다시 들어온다. 10년 전. 고갯마루 지금여기가 봉우리일지도 모른다는 가사 말에 꽂혔는데, 이제는 '바다'가 들려온다. 오라고 손짓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외치고 있던 것인지도 몰라. 부끄러워졌다.  한 10년 뒤에는 다른 부분이 다른 말이 들릴 것이라고 하며 노래를 보내본다.


























3


<앞것>들은 잘 되고 나서도 먹고 살기 힘들어.  먹고살기 힘드니 앞뒤전후좌우를 어찌 살피겠어. 더 올라가기에 급급하지.  학전 33년. 문을 닫아도 되는 건가.  뒷것 부모들은 그리 뼈 빠지게 대학을 보내도 그 놈의 자식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잖아. 자기가 다 잘나서 된 줄 알아.  앞것들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세상이니. 참. 미련이 남아서 하는 소리는 아니야. 그렇다는 게지. 이렇다는 게지.


4


앞가림하는 순간, 끝나는 게임이지. 그저 휩쓸려갈 뿐. 많은 것들은..작은 것들에게 마음길 손길 한번 주지 않으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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