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볕뉘




포항 꿈틀로 전시가 끝난 지 얼마되지도 않아 또 전시. 놀라시기도 할텐데 <다-다르다> 전시도록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내용-형식이 이어지는 전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릅쓰고 이어가기로 했답니다. 


아시겠지만 글, 텍스트가 많습니다. 


아마 텍스트를 소화해내야지만 전시개요를 알 수 있는 불편한 전시이기도 합니다. 숨은 그림처럼 도록 안에 소개되는 책을 지도로 해서 살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늘 전시는 많은 분들과 공감하고 나누고 싶은 데 역시 뜻대로 되지 않는 것도 전시이기도 합니다. 늘 관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玄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4-02-02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Ⅸ. 사람들은 왜 자진해서 종속하기 위해 싸우는가?


Ⅹ. 무엇을 할 것인가?



(3) 일원론과 이원론

 

푸코가 알아냈다. 두 편성이 갖는 공통원인으로서 권력과 권력과 앎이 협동한다는 것을 말이다. 권력과 앎은 서로 직접 포함한다. 앎을 전제하지 않는 권력관계도 권력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는 앎도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푸코에 있어서 앎과 권력이 이원론적으로 대등한 관계다. 들뢰즈는 여기서 앎에 대한 권력의 우위, 앎의 관계에 대한 권력관계의 우위읽어내려 한다. 들뢰즈는 이원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원론이란 필시 사태의 발생 후의 모습이고, 발생을 묻지 않는 한 전제 가능한 것이다. 푸코는 기존(데카르트, 칸트, 스피노자, 베르그송)의 이원론을 뛰어넘었다. 저작에 이원론이 보인다해도 준비적으로 어떤 분할을 전제하고 있다. ‘외관상의 이원론에 지나지 않는다. 1.5원론. 근저에는 일원론적 원리가 발견되는 것이다. 권력이야말로 그 원리이다.

 

앎의 의지

 

권력은 도처에 있다. 모든 것을 통괄하기 때문은 아니다. 도처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권력은 소유 가능한 것이 아니라 불평등하고 가동적인 승부 속에서 행사되는 것이다. 권력관계는 다른 관계들(경제적 과정, 앎의 관계, 성관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내재하고 있다. 권력은 밑에서 오는 것이고, 권력관계의 원리에는 지배자/피지배자라는 대립은 없다. 권력관계는 의도는 있지만 비주관적이다. 즉 목적은 갖고 있지만 권력자와 같은 자의 결정에서 유래하지 않는다. 권력이 있는 곳에는 저항이 있지만, 저항은 권력에 대해 외측에 위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렇게 푸코는 권력의 개념을 철저하게 생각해왔다. 모든 행위는 권력의 행위에 의해 유발되는 행위이다. 권력이라는 행위에 대한 행위가 행위라는 것의 전부를 메우고 있다. 어떤 막다른 길처럼 보인다. 권력이 삶을 대상으로 할 때에는 반드시 권력에 저항하는 삶을 폭로하고 유발한다. 저항의 횡단적 관계들이 재지층화되고 권력의 여러 매듭들을 만나면 대체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 푸코는 여기에 대한 대답이 없다. 그는 슬그머니 그리스 로마시대의 윤리에 관해 말한다. 그는 분명 권력론을 버리고 윤리학을 지향했다.

 

(4) 욕망과 권력

 

권력론이라는 틀로 사물을 생각하고 있는 한 푸코와 같이 될 수밖에 없다. 권력론은 우리를 반드시 어떤 막다른 길로 몰아넣는다.

 

욕망과 쾌락- 1977년 들뢰즈가 푸코에게 보낸 편지.

 

미시 장치와 다이어그램의 관계: 전자는 개개의 구체적인 장치(, 가족이나 공장이나 학교나 군대 등), 후자는 그것들이 작동하는 양태를 가리킨다. 다이어그램이란 그 자체로서 결코 알려질 수 없는 권력관계가 실제로 작동할 때의 양태이고 사회적 영역의 총체를 망라하는 추상기계라 할 수 있다. 푸코는 미시 장치에 관해서는 뛰어난 분석을 남겼지만 다이어그램으로서 제시되는 권력관계그 자체의 차원에 관해서는 고찰이 불충분하지 않았는가? 힘의 관계들, 미셸은 이것을 더 밀고나가지 않았다. 다이어그램의 관점은 후퇴하고 -정치라는 조잡한 개념을 등장시켜 미시 분석의 풍부함도 축소시키고, 거시/미시라는 흔한 대립의 한쪽을 맡는 것으로 격하되어버렸다.

 

여기서부터 미셸과 차이로 옮겨가려 한다. 욕망의 배치에 관해 말하는 것은 여러 미시 장치들이 권력이라는 용어로 그려질 수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민중들이 잔혹한 처형장면을 보러간다고 해보자. 지금도 그러할까? 이 욕망은 자연적인 결정작용도 자발적인 결정작용도 아닐 것이다. 이것은 복수의 요소가 조합되고 어떤 특정 욕망의 배치가 이루어져 특정 권력양식을 발생시킨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학교의 시험은 그 제도가 있어서 학생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속에 원래 나만 뒤처지고 싶지 않다라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한 욕망의 배치가 널리 사회에 미치고 있을 때에만 이 권력장치는 작동한다.

 

기율형 사회 대신에 통제사회통제는 지배가 아니라 체크를 의미한다. 감시에 의해 사람들에게 행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체크포인트를 설치하여, 기준을 만족한 인간만을 앞으로 보내는 것이 통제사회의 작동양식이다. 이처럼 어떤 권력양식이든 일정 욕망의 배치를 전제로 하고 있다. 권력장치는 배치의 다양한 구성요소 속에 위치해야만 한다. 이렇게 보면 권력장치란 배치의 한 구성요소가 되는 것이다.

 

권력은 어떻게 욕망될 수 있는가?그것을 물어야만 한다. 권력은 욕망의 변양이다. 권력이 왜 발생하는가를 물어야만 한다.

 

권력이란 개념은 어쩔 수 없이 어떤 주체가 존재하고 있고 그것이 행위를 하게 된다는 도식을 전제하고 있다. 반드시 어디서부턴가 무언가로 작용한다. 잘 살펴보자. ‘정말로 하고 싶은 것실제로 하게끔 되고 있는 것이 권력이란 개념 속에서는 구분될 수 없다. 이 개념으로 보면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은 사라지고 무언가를 하게끔 되고 있는 것만 나타난다. 욕망은 주체에 내재하는 힘이다. 그리고 그 내재하는 힘이 여러 요소들과 조합되어 욕망의 배치가 구성된다. 권력의 개념은 욕망 배치의 선단, 즉 결과밖에 다룰 수 없다. 그래서 권력장치 분석은 이차적의미만을 갖는다. “권력에 대한 욕망의 우위라는 시각이 없으면 사회현실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 이제서야 자기 자신의 억제, 착취나 모욕, 노예상태를 참는, 자기자신의 억제를 욕망하게 되는가를 명백하게 알 수 있다. 단지 욕망이라는 것과 사회라는 것만이 존재하고 그 이외의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들뢰즈=가타리는 정신분석가가 환자 일반이 아니라 개개의 환자를 대하듯이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권력장치, 그것을 작동시키는 다이어그램,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선 그 전제에 있는 욕망의 배치를 분석할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다시 열린다.


왜 사람은 자유롭게 될 수 없는가? 왜 사람은 자유롭게 되려고 하지 않는가? 어떻게 하면 자유를 추구할 수 있게 되는가?


5. 정 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Ⅵ. 인간은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다.


Ⅷ .우리는 왜 우울을 앓을 수밖에 없는가?


 

욕망에서부터 사회를 고찰하는 이 철학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욕망에서부터 사회를 고찰함이란 어떠한 것인가? 푸코는 권력에서부터 사회를 고찰하려고 했다. 그에 비해 들뢰즈는 욕망에서부터 사회를 고찰하려고 한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감시와 처벌


 

들뢰즈가 강조하는 것은 푸코는 철학자라는 것이다. 게다가 들뢰즈는 푸코를 새로운 칸트주의철학자라고 부르고 있다. 칸트가 철학에 경험 가능성의 조건을 물었다면 푸코는 현실 경험의 조건을 묻는다. 각각의 시대에는 특정 경험의 조건이 있다. 그 자체가 역사적이다. 푸코는 역사를 이른바 방법으로서 이용하면서 칸트 철학을 철저하게 심화시키려 하고 있다. 광기에 관하여 17세기 유럽에서는 광인을 일반 시료원 등에 감금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것은 이른바 정신병원에 정신질환을 앓는 인간을 입원시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사태이다. 게다가 일반 시료원에는 걸식자나 부랑자, 나아가서는 범죄자, 낭비가, 나태한 인간, 무신론자 같은 사람들이 합쳐서 수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용되고 있던 자들을 낙인찍고 있던 것은 바로 당시 새롭게 출현한 비이성이라는 개념이다. 17세기 시점에서 이성은 아직 미약한 지위 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그 이성이 비이성에 공포를 품기 시작한 그때 비이성을 폭력으로 감금한다는 사태가 일어났다.

 

18세기 말까지 프랑스에서 가짜 치료사의 담론과 의사의 담론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시점부터 하나의 확실한 분할이 일어난 것입니다. 18세기 말 의학적 담론을 과학적 담론으로서 독립시키는 규칙이 성립한다. 푸코는 그 규칙을 문제 삼아 어떤 형태의 담론이 형성되고 또 변동하는가를 물은 것이다.

 

지식의 고고학


이 방법론의 저작은 담론적 편성과 아울러 그 밖에 위치하는 또 하나 다른 편성의 존재를 언급한다. 그것이 비담론적 편성이다. 알기 쉽게 말하면, 이 편성은 언어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 사물의 영역, ‘보는것이 대상으로 하는 영역에 속하고 있다. 이전의 저작도 비담론적 편성을 시야에는 넣고 있지만, 그것에 연구대상의 지위를 부여하고 이른바 언어 외 현실에 대한 다른 길을 만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이책을 과도기적 작품, ‘경첩의 역할을 한 저작으로서 위치시키고 있다. 그 이후에서야 들뢰즈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저작 감옥의 탄생이 나온다.

 

이 책은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감옥이라는 하나의 사물이 존재한다. 이것은 환경의 편성(감금적 환경)이다. 그것은 비행성이나 비행자라는 완전히 다른 말이나 개념으로 반송되고, 그 말들과 개념들은 위법행위와 처벌, 또한 위법행위와 처벌 각자의 주체를 언표하는 새로운 방식을 표현한다. 곧 환경은 언표를 낳고 언표는 환경을 규정한다. 한 시대, 한 사회는 담론적 편성과 비담론적 편성을 그 본질적 측면으로 갖는 것으로서 다뤄지게 된다. 들뢰즈에게는 필시 언어 내의 현실만으로는 현실이 파악될 수 없고 언어 외의 현실에 다가가야만 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담론적 편성과 비담론적 편성(들뢰즈는 양자를 긍정적으로 명명하도록 각자를 표현의 형태내용의 형태라고도 부른다)은 대단히 섬세한 인과관계 안에 있다. “거기에는 대응관계도, 동형성도, 직접적 인과성도, 상징적인 관계도 없다.”

 

(1) 감옥의 탄생에서 두 개의 편성

 

그 책의 제2부는 형법 개혁자들의 담론을 다루고 있다. 잔혹한 형은 인간성에 어긋난다가 아니라, 잔혹형을 구경거리로서 이용하는 것은 효율이 나쁘므로 더 효율적인 처벌권력의 행사법을 생각해야 한다고 하는 경제책의 관점에서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었음을 명백하게 한다. 범죄의 성질과 처벌의 성질에 대응관계를 갖기 위해 권리 남용의 죄에는 권리 박탈의 벌, 도둑질에는 몰수의 벌, 오직에는 벌금, 그리고 방화에는 화형을 과하는 형벌체계의 필요를 주장했다. 하지만 이 실로 다종다양한 형벌들은 그 뒤의 형법에서 전혀 채용되지 않았다. 그들의 안은 망각되어버렸다. 그리고 난데없이 감옥이라는 처벌양식이 나타나 극히 단기간 동안 벌금과 사형 사이의 모든 처벌을 담당하게 되어버렸다. 이어서 제3부는 감옥뿐만 아니라 공장이나 학교, 병원 등의 기율로서 정식화하고 판옵티콘은 마지막에서 다뤄진다. 4부는 비행자가 지배 권력에 이용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지적한다. 범죄자는 이전과 달리 비행성을 담론으로 왜 이런 인간이 되었는가?라는 효과를 낳는다. 그들의 사회복귀는 이뤄지지 않고 역으로 재범자를 낳는다. 이런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지배자층이 그런 인물을 사회 주변에 머무르게 하고 관리 가능한 상태로 머무르게 해두는 것에 도움이 된다. 그것만이 아니다. 지배자층은 그 비행자들을 이른바 장기말로서 이용할 수 있다. - 담론적 편성을 둘러싸고 쓰인 제2. -비담론적 편성을 둘러싸고 쓰인 제3. - 두 편성의 상호침투를 둘러싸고 쓰인 제4

 

(2) 권력과 두 개의 편성

 

들뢰즈는 푸코의 권력론을 소개함에 있어 마르크스주의 권력관과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 방증 속에서 새삼스레 담론적 편성과 비담론적 편성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이 두 항은 일찍이 마르크스주의가 채용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라는 이원론적 도식과 유사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푸코 역시 지식의 고고학까지 이원론 도식으로 사고하고 비담론적 편성에 조금의 우위를 보여줄 뿐이었다. 그에 비해 감옥의 탄생에서 비담론적 편성에 적극적인 지위를 부여하고 두 편성의 상호침투적인 관계를 그려내었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들뢰즈는 두 편성의 상호침투를 밝혀내면서도 거기에는 대응관계도, 동형성도, 직접적인 인과성도, 상징적인 관계도 없다고 한다. 거기서 다시 되묻는다.

 

이 형태들 외에 사회적 영역에 내재하는 공통의 원인이 일반적으로 존재하는가? 두 형태의 조정이나 상호침투는 어떻게 구체적인 경우에 있어서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하게 되는가? 라고 말이다. 형태 혹은 편성의 이원성은 내재적인 공통원인을 배제하지 않는다. 상정되는 공통원인은 두 형태의 요소들 선분들 사이의 혼합, 포획, 방해 등을 끊임없이 계속 측정한다. 어떤 장치도 혼합하는 죽같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책은 외관상의 이원론을 명백하게 뛰어넘으려고 한 책이다. 그리고 공통원인의 대답은 간단하다. ‘권력이야말로 두 편성을 결부하는 3의 심급이다. 권력이야말로 두 형태의 요소들 혹은 선분들 사이의 혼합, 포획, 방해 등을 끊임없이 계속 측정한다.” 이렇게 푸코는 신좌익이 과제로 하고 있던 부르주아적 사고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항하는 형태로 전개된 권력의 문제를 다시 묻고 있다.

 

권력은 소유물이 아니다.(소유물의 공준) 권력은 소유되지 않고 오히려 실천되는 것이다. 또 한 권력은 국가장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국재성의 공준) 그래서 국가장치 속으로 따라 기입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근대 사회를 특징짓는 기율형 권력은, 예를 들어 공장이나 학교나 군대와 같이 공간 속에서 지배되도록 교묘하게 배치하고 감시함으로써 그들에게 행위하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권력은 국재적이지 않은 것은 물론 포괄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확산적이다. 권력은 하부구조에 딸려있지 않다.(복속의 공준) 권력이 상부구조에 끌려가는 하부구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체적인 경제활동의 총체, 예를 들어 작업장이나 공장 쪽이 기율이라는 권력을 전제하고 있다. 권력은 권력자, 지배자의 속성이 아니다.(본질 또는 속성에 관한 공준) 피지배자와 구별하는 지배자 나름의 본질이나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권력은 권력자라는 높은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권력은 관계이다. 권력관계는 높은 곳에서 강요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실로 얌전한 민중들, 낮은 곳에서 떠받쳐지고 있다. 폭력이나 이데올로기만으로 권력의 개념을 다 설명할 수 없다. 권력은 행위에 대한 행위이다. 사람을 교묘하게 배치하고 그것을 감시하는 것만으로 행위하게 하기가 가능하다. 억제란 폭력과 이데올로기는 힘들간의 투쟁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에 의해 말려 올라간 흙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이 마르크스주의적인 권력관과 비교해낸 것이다. 신선하지 않은가?


하나 남은 것이 부르주아적 사고이다. 법이 위법행위에 대립하지 않는다. 부르주아를 위한 법이다.(합치성의 공준) 위법행위와 법은 섬세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그때그때 지배층의 경우에 따라 어떤 위법행위를 허용하고 지배계급의 특권으로 날조된다. 기업에 관한 법률을 생각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푸코는 법이 하나의 평화 상태도, 쟁취된 전쟁의 결과도 아니라는 것을 제시한다. 법은 전쟁 그 자체이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전쟁의 전략이다. 바로 권력이 지배계급이 획득한 소유물이 아니라 바로 지금 행해지고 있는 그 전략의 행사 그 자체임과 마찬가지다.

 

권력은 여러 힘들의 관계로 정의된다. “권력이란 여러 힘들의 관계이고 혹은 오히려 온갖 힘들의 관계는 하나의 권력관계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소멸하기 쉽고 미발달된 것으로 잠재적인 채 머무른다. 따라서 권력관계는 그것을 통합하는 이라는 파트너를 필요로 한다. 이 권력과 앎이라는 쌍에 대해 권력은 유연하게 작용하고 다양한 을 경유하는 데 비해, 앎은 단단한 형태를 구성한다. 앎은 교과서를 만들거나 그를 위한 학과를 개설하거나 한다. 앎은 그런 의미에서 일정 기간 존속하는 단단한 형태를 갖는다. 그에 비해 권력은, 예를 들어 학교의 한 사람 한 사람의 학생, 공장의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동자 등과 같은 점에 대해 유연하게 작용한다. 점과 점을 선으로 결부함에 의해서 권력은 작동한다.(다이어그램)

 

칸트가 말하는 도식이란 감성이라는 수동적 능력과 오성이라는 능동적 능력 사이를 매개하고 중개하는 구상력을 말한다. 칸트에 있어서 도식론이 푸코의 판옵티콘같은 다이어그램 같은 역할을 한다. 감성과 오성 사이에는 뛰어넘기 힘든 심연이 있다. 감성이 받아들이는 것은 무한하게 다종다양한 지각인데, 오성은 그것을 기성의 개념들로 통합해내야만 한다. 칸트가 물 자체에 근접시켰듯이 들뢰즈에 의하면 권력관계도 같은 작용을 갖는다. 그것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알려질 수 있는 것은 그 제시인 바의 다이어그램뿐이다.


5. 정 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Ⅴ. 자폐(신경 다양성), 타자는 없는가?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의 서문에서 이전의 스타일로 철학 책을 쓰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고 기술한다. ‘둘이서 쓰다라는 실험은 이 예언을 문자 그대로 실천해본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간접화법을 이용해서 철학자를 논하고 있던 때처럼, 말하고 있는 들뢰즈는 말해지는 쪽에 있는 가타리로 생성변화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두 사람이 말하고 있던 것처럼 라 말할지 말하지 않을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어디를 들뢰즈가 쓰고 어디를 가타리가 썼는가 하는 억측은 전혀 의미가 없다.


기계와 구조가타리


(1) 구조와 기계


구조는 일반성의 차원에 속한다. 거기서는 각 항이 교체 가능하다. 그에 비해 기계는 반복의 차원에 속하고 있다. 반복되는 것은 하나하나가 다른 것이고, 완전히 동일 사태가 반복되는 일은 없다. 반복에서부터 뭔가 새로운 것’, 차이훔쳐내는것으로 일반성 차원에 위치하는 습관이 성립된다. 가타리는 이 일반성의 차원을 구조에, 특이성의 차원을 기계에 배분하고 있다. 기계는 날짜가 있는 사건을 다룬다. 즉 역사를 다룬다는 것이다. 구조주의는 시간이나 역사나 변화를 다룰 수 없다. 물론 이 개념은 서로 이견이 있었고 『천 개의 고원이후 다른 개념으로 치환된다.


라캉에 의하면 무의식 속에, 혹은 에스에 최초의 시니피앙인 Φ가 억눌려져 있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인간은 인간이 된다. 인간은 이 Φ를 계속 구하지만 그것은 결코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영원의 결여이다. 따라서 그 대신이 되는 것을 계속 찾는다. 라캉에게 상정되고 있는 욕망은 항상 단 하나이다. 최초에 있던 모자 간의 욕망의 어긋남, 단 하나의 상실, 결정적인 결여를 채우려고 하는 것, 그 이외의 욕망은 없다. 그렇게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시니피앙이 주체 그 자체를 대리=표상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가타리는 기계의 수준을 도입하면 주체(무의식의 주체성)는 대리=표상되지 않는다고 라캉의 설정에 변경을 더한다. 그것은 욕망을 단일한 결여라는 원인에서부터 설명하기를 그만두고, 욕망을 복수의 흐름으로서 파악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훗날 안티오이디푸스는 결여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욕망의 복수성을 주장하게 된다. 정신병은 원억압이 정상으로 기능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라캉파는 설명한다. 가타리는 라캉파적 구조에서 인간을 보면 정상적 원억압이 있고 상징계로의 진입이 일어난다고 설명되어버리지만, 실제로는 원억압은 그렇게 강고한 것이 아니고 팔루스는 용이하게 이탈한다. 그리고 기계라는 시각에서 상상계와 상징계가 모호하고 명확히는 구별할 수 없음을 의미할 것이다.

 

(3) 구조와 구조주의

 

구조주의는 왜 그렇게 불리는가

 

라캉은 무의식을 개인적인 것으로서도 집단적인 것으로서도 아닌, 간주관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이것은 무의식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덩어리로서 형성되지 않고, 어머니나 아버지라는 상징적 심급과 관계 속에서 계열을 짜내면서 형성되어감을 의미한다. 다음 기준에서 나타나는 공백의 칸이란 그러한 계열 사이를 왕래하고, 구조 간의 항이 끊임없이 이동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팔루스 대상a. 자신의 동일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렇게 얘기한다. 여러 계열들을 계속 돌아다니는 대상=x를 지정하지 않고 구조는 정의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 그것만이 아니라 그 이외의 작품도, 사회가 야기하는 성과도, 질병이 야기하는 성과도, 생 일반이 야기하는 성과도, 사회가 야기해서 명령을 내리는 이 대단히 특수한 대상을 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 된다. 온갖 구조는 대상=x, 기원적인 3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 , 이 항은 스스로 기원을 결여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논의 결론에서 발견되는 실천적 태도는 구조에 사고accident가 찾아와 시니피앙이 사라지거나 시니피에가 사라지거나 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 이외의 무엇도 아님이 명백하다. 이 최후의 기준, 주체로부터 실천으로는 가장 모호한 기준, 미래의 기준이다 고 한다.

 

(사법, 종교, 정치, 경제, 나아가서는 사랑과 노동, 친족과 결혼, 예속과 자유, 삶과 죽음 등 온갖 것에 관계하는 광의의 법)은 하나의 체계이고, 따라서 한 번에 주어진다. 그러나 사회에 의한 자연의 정복은 점진적으로만 행해진다. 형식적으로 말하면 사회는 조금씩 새로운 사태와 조우한다. 그 때문에 법은 그것이 무엇에 어떻게 적용되는지가 사전에 명백하지 않는 채 그 모든 체계가 적용된다. 시니피앙(, 규칙)과 시니피에(그 적용 대상) 사이에는 반드시 불균형이 존재한다. 이 불균형이야말로 사회변혁의 동인이다.

 

(4) 계열, 팔루스, 원억압


들뢰즈는 에스와 자아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선 에스에는 여러 국소적인 자아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복수형으로 말해지는 국소적 자아들이란 부분대상을 구하는 흩어진 부분욕동의 집합이다. 그에 비해 이복수의 미세한 수동적 자아를 그러모아”, “능동적으로 통합하고 에스로부터 구별되는 형태로 생성한 이른 바 자아는 단수형으로 대역적인 자아 moi global”로 불린다. 전자(국소적 자아/쾌락원리/수동적 종합)는 후자(대역적 자아/현실원리/능동적 종합)에 선행한다. 그러나 양자는 동시에 지속하고 있고, 또한 후자가 전자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양자가 동시에 지속하는 한에서다. 이는 프로이트 학설을 발전적으로 재정식화한 것이다. 하지만 거세, 원억압이라는 기원의 일격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억압하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반복하므로 억압하는 것이고, 반복하므로 망각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종류의 경험을 우선 처음으로 반복이라는 양태로서만 살 수 있으므로 억압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반복강박이라 불리는 것을 완전히 뒤집어, 사람은 반복하기 때문에 비로소 억압하는 것이라 한다. 반복이야말로 어떤 종류의 경험을 살기 위한 조건인 것이라고도 말한다. 이것은 억압의 존재는 인정해도 원억압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반복이 억압을 낳는 것이라면 최초의 기원적 억압을 상정할 필요는 없다.

 

이는 위장하므로 억압한다를 살펴봐야 한다. 도라의 히스테리 역시 위장이 있고 그 효과 억압이 있다. 위장의 반면이 억압이다. 대상=x, 요컨대 팔루스가 대상a로 끝없이 뒤쫓기게 되고 차례로 새로운 시니피앙으로 치환되어가는 모습이 위장에 겹쳐지고 있다. 그것에 의해 반복이 행해지는 것이다. 위장, 즉 대상=x에 배정되는 치환이야말로 반복을 구성한다.

 

사람은 반복하기 때문에 위장하고 위장하기 때문에 억압한다.”

 

애벌레 자아가 나오기까지 들뢰즈는 프로이트=헤겔대립모델, 프로이트=라캉 계열모델, 프로이트=라이프니츠 미세지각 모델을 참고하면서 너머선다. 타나토스 개념을 넘어선 것처럼 흥분을 구속한다는 과정의 반복에 의해 심적 장치를 지배하는 습관을 개념화한데 이어 더 깊은 곳에서 반복의 정념=수동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차이로서 흥분이 그것만으로 이미 하나의 요소적인 반복의 응축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욕동은 구속된 흥분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복수의 국소적 자아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5) 분열분석

 

상상계와 상징계 사이에는 국경선이 뻗어 있는 것인가?

 

들뢰즈=가타리는 상상계와 상징계 사이에 어떠한 본성상의 차이도, 어떠한 국경선도, 어떠한 경계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신경증과 정신병은 정신분석에서 명확히 구별된다. 신경증은 생활사에 기원을 갖는 내적인 갈등이 야기하는 심신의 기능장애를 가리키고 거기에서 인격의 장애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정신병에서는 자아가 에스의 지배하게 있고 인격의 장애를 보인다. 라캉파에서는 원억압이 정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 신경증이고 원억압이 실패하고 있는 것이 정신병이다. 원억압의 실패는 시니피앙 연쇄가 미약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신병 환자에게는 세계의 총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의미, 수수께끼로서 주체에게 나타난다. 그것에 비해 신경증에서는 시니피앙의 연쇄는 정상으로 작동하고 있고 일상생활을 의미 가운데서 살고 있다. 신경증은 그 의미 과잉에 시달리고 있다.

 

가벼운 신경증 환자로서 정상인같은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원억압의 정상적 작동을 의심하는 분열분석은 정신분석과 같이 신경증화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증화한다. 이것은 가벼운 신경증 환자로서 정상인의 이미지를 의심하는 것이다. 정상인의 존재가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면, 그것은 원억압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므로 널리 가족도 포함한 사회영역에 있어서 신경증화의 체제 혹은 억압의 체제가 분석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분열분석의 목표는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리비도 집중의 특수한 본성을 분석하는 것. 다음으로 이것에 의해 욕망하는 주체 속에서 어떻게 자기 자신의 억제를 욕망하게 되는가를 명백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구상된 욕망을 바라보았을 때 우선 최초로 발견되는 것이 사람은 왜 스스로 억제하는가, 환언하면 왜 자신들의 예속을 바라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4. 전 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나는 없고 타자만 있는 것인가?


 


니체와 철학

 

발생론적 발상으로 일관된 초월론적 경험론으로부터 어떤 실천이 유도되는가?


(1) 사유의 강제:


 ‘생은 사유의 능동적 힘이고, 사유는 생의 긍정적 힘이다. 사유하는 것은 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렇다면 사유란 무엇인가?

 

프루스트와 기호들

 

진리는 앞서 존재하는 적극적 의지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고 내의 폭력의 결과라는, 이 테마 이상으로 프루스트가 강조하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 한 조각의 맛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과거의 기억이나 소환이 아니다. 마들렌을 통해 기호의 해독방식을 배

우고 이 기쁨의 비밀을 이해한다. 이처럼 기호를 해독하는 기술을 습득하면서 최종적으로 어떤 종류의 진리의 계시에 도달한다. 우연적인 기호와 만남, 그 해독방식의 습득이라는 경험이 프루스트의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본다. 사유의 새로운 상을 제시하기에 이 책을 이리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마들렌은 나에게 비의지적·무의식적인 상기를 강요한다. 그것은 일종의 폭력’, ‘강제이다. 이 폭력 내지 강제의 작용에 의해서 비로소 사람은 사유하기 시작하고, 그리고 진리에 도달한다. 진리는 어쩔 수 없이 사유하게 됨의 결과로서 획득된다. 사람은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사유하게끔 된다. 사고는 강제의 압력에 의해서만 개시되는 것이고, 그것을 강제하는 기호는 항상 우연적 만남의 대상이다. 여기서 묻고 있는 것은 사고의 발생에 대한 질문이다. 사물을 생각한다는 사태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그는 그것을 폭력이나 강제우연적 만남에 의해 설명한다.

 

반복은 동일한 것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동일한 것이 계속되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반복은 매회가 교환 불가능, 치환 불가능하다. 습관은 그러한 하나하나 교환 불가능, 치환 불가능한 경험의 반복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 즉 차이를 훔쳐내는 것으로 성립한다. 그리하여 성립한 습관이 인간 행동의 규범이 된다. 사람은 반복 속에 차이를 훔쳐내는것으로 살고 있다. 반복은 매번 새롭게 차이를 동반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새로움에 매번 직면하고 있어서는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이 계속되어간다는 기대 속에서 비로소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 이렇게 수동적 종합이라는 지복이라 부르고, 인간은 이 지복 속에 멈춰있기를 원한다. 이것을 되짚어보면 사고를 강제적으로 일으키는 것이란 수동적 종합이라는 지복을 방해하는 한 불법침입이고 폭력이며 이다. 철학이란 앎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출발점은 애지가 아니라 혐지다. 하이데거도 사유란 무엇인가에서 인간은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게끔 된다고 했는데 사유시키는 것이란 선물이라고 했다. 이 은유 안에는 인간이 진리를 사랑하고 사유하는 것을 추구하는 욕망과 의지가 있다는 주관적인 전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유하면 사유시키는 것과 사이에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다가 사유가 발생하는 현장을 놓쳐버린다. 들뢰즈는 사유를 강제하는 폭력을 기호라 부르고 있다. 기호는 선사되는 것이 아니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만남의 대상은 그대로 있는 소여가 아니라 그것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현상의 변화에 관계하는 무언가를 받아들였을 때 사물을 생각한다. 생각하는 것은 변화와 단절될 수 없다.

 

(2) 사유의 습득과 방법


주체를 전제할 수 없으므로 의지도 전제할 수 없다. 어떤 위화감이나 의문을 느끼게 하는 기존 질문과 만남이야말로 새로운 개념을 창조한다. 이것은 해야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건인 것이다. 이런 사유는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기분을 모두 버리는 것이다. 사건만을 초월론적인 요소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조우하는 것, 그것은 발견하는 것이고, 포획하는 것이며, 훔치는 것이다. , 긴 시간에 걸쳐 준비하는 것 이외에, 발견하기 위한 방법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사유 못지 않게 습득이 중요한데, 수영처럼 흐르는 물 속에 뛰어들지 않고는 배울 수가 없다. 그것은 같은 것의 재생으로 행해지지 않고 기호에 대한 응답 및 다른 것과 만남으로 이뤄진다. 사람은 자신과 일치하지 않은 것에 대응하려해서 무언가를 배운다. 그때의 응답들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는 하이데거와 유사하지만 교사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 속에서 전개하도록 몇몇 기호를 발할 수 있는 자이다.

 

질문 그 자체를 결정하고 구성하는 능력 속에 우리는 참된 자유를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문제에서 출발하는데 거짓문제들로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 비존재의 문제에서 쓸데없다는 허무를 상상하거나, 기대하고 있지 않은 질서가 나오면 무질서하다거나, 만약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이랬을텐데 가정하는 것들이다. 문제는 적절한 방식으로 제기되면 스스로 해결되지만(정치경제학 비판), 중요한 것은 해결하는 것 이상으로 문제를 발견하는 것, 문제를 적절한 방식으로 제기하는 것이다. 문제로서 규정되는 조작들, 문제로서 제기하기 위해 이용되는 수단과 매개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론에서부터도 실천의 시점에서부터도 인간의 역사는 문제 구성의 역사이다. 베르그송의 거짓문제에 대한 지적과 문제의식은 비슷하지만 그는 너무 깔끔한 측면이 있다. 그래서 차이와 반복4장에서 문제와 질문을 구별하고 있다. 문제란 질문이 거기서부터 행해지는 기원이다. 사고는 문제로부터 질문으로 나아간다고 한다. 칸트의 이름을 들면서 문제라는 것은 이념’(자아, 세계, )이라고 한다. 이런 문제는 해에 의해서는 소거되지 않는다. 확실히 문제는 우리에게 질문을 하고 우리는 그 해를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질문이 올바른 해를 발견했다고 해서 최초의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문제를 필요없다고 던져버리는 것을 특히 주의해야 한다. 해를 생각함에 있어 필요한 것은 여건이 해의 싹을 포함하도록 점진적으로 문제의 조건들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어서 이 이념 다양체라고도 기술한다.

 

이념이 다양체라면 문제에 대한 해는 그것을 규정하는 조건들에 의해 변화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위험한 것은 이 잠재성을 억압하고 이것이 해이다라고 하여 문제를 가둬버리는 것이다. “하나의 문제는 그것에 대한 여러 해들의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 문제를 덮고 있는 그 해들 속에서 소실되기는커녕 집요하게 지속한다. 문제는 풀려야할 것임과 동시에 규정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앎이 아니라 배움이다. 배움에 있어서 문제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통찰해야만 할 것이다.

 

(3) 물질에 부가되는 주체성:


시네마2


<유럽 1951> 영화에서 주인공인 아이린은 공장 체험을 하고 마치 수인들을 보는 듯했어요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주체성의 새로운 의미를 보려고 한다. 베르그송이 쓴 자동적 재인(소는 풀을 재인하고 그것을 먹는다)과 주의깊은 재인(그때마다 대상으로 향하고 특이성과 직면한다)이란 개념을 쓴다. 지각과 행동의 거리가 생기면 홀연 주체성이 나타난다.(1주체성) 이것은 연장 방식이 결정되어 있고, 새로운 것을 야기하지 않는다. 주의 깊은 재인은 회상에 의해 일어난다.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이었는가? 이것이었는가? 회상도 또한 앞의 거리를 메우려고 한다. ’아아, 그렇다. 여기는 공장이다.., 이곳은 일해야 할 곳이다...‘ 이것에 잠재적인 것을 현동화시켜 대상이 다양한 회로를 통과하고 공장은 감옥이다라는 지각을 낳고 새로운 주체성을 발동시킨다. 주의깊은 재인은 성공했을 때보다도 실패했을 때 훨씬 더 많은 것을 가르친다. 들뢰즈는 이를 제 2의 주체성. 물질에 부가되는 주체성이라 부른다. 세계라는 물질의 요청 내지는 필연성에 합치하도록 해서 새로운 주체성이 발동하는 것이다. 주체/객체라는 도식을 갖지 않아 들뢰즈는 객체에 부가된다라고 말하지 않고 물질에 부가된다고 말한다.


3. 실 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