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버릴 것 같은 날의 행복


프랑수아 를로르, 이지연 (그림) , 꾸뻬 씨의 행복 여행

 

    폭염이 너무 길었던 탓이다. 삶이 지루하게 여겨지는 것까지야 어쩌랴 해도 온갖 감정의 세레나데에서 허우적대다, 마침내 감정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는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딱히 불행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행복하지도 않은 하루 하루가 잘도 흘러갔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가 아니라 결국엔 바라는 것이 많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 그 욕심으로 인한 마음의 방랑을 폭염으로 인한 몸과 마음의 심란으로 가려주어 오히려 폭염에게 감사해야 할 때인가.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해 머언 길을 떠난 정신과 의사 꾸빼 씨처럼 나 역시, 지금 이곳을 떠나 되돌아오면 행복을 끌어올 수 있을까. 도대체 행복이 무엇이기에!


 행복이라, 그것에 대해 정의를 내리려고 시도하다가는 머리가 깨질 겁니다. 행복은 기쁨인가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요. 기쁨, 이것은 단순한 감정이고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단지 순간의 행복일 뿐이지요. 주의하세요. 그 순간을 언제까지나 붙잡고 있을 수만 있다면야 좋겠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그러면, 쾌락은? 아, 그래요! 모든 사람이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그것도 분명히 오래 가진 않아요. 그렇다면 행복이란 작은 기쁨들과 작은 쾌락들의 합계가 아닐까요? 내 동료 학자들은 ‘주관적인 행복’이라는 용어에 동의합니다. 물론 당신도 그 개념에 대해선 벌써 알 겁니다! p155


   행복은 상대적이었다가 절대적이 된다. 이 삶에서의 행복이란 자꾸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 그렇게 생각이 흘러간다. 이렇게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행복에 대한 잘못된 원인은 사람들이 행복을 목표라고 믿기 때문이라는 말이 얼마나 정확한 지적인가.

   꾸빼 씨가 행복여행을 통해 배운 행복에 대한 의미들은 결국 마음가짐,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전한다. 잘 알고 있는 말들이 어느 순간을 대하면 모두 잊혀진다는 것이 행복의 의미를 알고 있음을 무색케 한다.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음에도 멀리의 것, 타인의 것을 찾고 비교하느라 행복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강조하는 이야기들이 그것이 행복이라고 거듭 이야기하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것 역시 거듭된다. 반복적으로 마음가짐을 다잡는 일이란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하지만 의지와 기억력 부족만을 탓할 순 없다. 꾸빼 씨의 배움에도 나와 있듯이 바로 이러하니까!


  좋지 않은 사람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에서는 행복한 삶을 살기가 더욱 어렵다.

   

   이 행복에 대한 의미로 인해 의기소침해졌다면 꾸빼 씨가 찾아온 다른 배움의 의미를 또 끌어당겨 와 억지로라도 행복할 방법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행복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행복할 수 없는 행복의 의미를 발견했으니 위의 말로 그 의미를 지워버려야지. 거센 폭우로 이 폭염을 지워버렸듯이 그렇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롤점검은 날마다 필요하다


 

    중학생 조카가 <제인 에어>를 들고 나왔다.

    “그 책은 너 취향 아니잖아? 읽으려고?”

    “어. 지금 롤점검 중이야. 게임을 할 수가 없어”

   그래도 게임 대신 선택한 것이 책이라니, 그나마 다행이다. TV가 없던 시절엔 나름 열심히 책을 읽더니, 중학교에 들어가고 핸드폰도 생기면서 책하고는 거리를 쌓았다. 특히나 감성적인 애도 아니라 문학책에 대해서는 더욱 더 관심이 없는 남학생이다. 그래도 책갈피가 반페이지에 있는 것으로 봐선 거기까진 읽은 모양이다.

  

  “고전을 읽으라 해서 읽는데 재미없어. 초반엔 그나마 재밌는데 갈수록 더 그래”

  “좀 더 읽다 보면 재밌을 거야. 연애 얘기도 나오고”

   “뭐? 연애?”

  여학생들이라면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의 사랑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였을 텐데, 그 말에 더 이상 읽을 이유가 없다는 듯 도리도리 고개질 하는 조카를 보며 급 방향을 선회했다.

  “읽다 보면 재밌어. 추리도 좀 나올 거고”

  제인 에어를 추리라고 소개하다니. 웃음이 나왔지만 어쨌든 덕분에 제인 에어가 생각나고다시 들여다볼 마음이 들었다. 여학생이라면 제인 에어는 몇 번을 읽었을 텐데. 제인 에어의 어릴 적 학대에 마음 아파하고 로체스터와 제인 에어의 사랑이야기에 마음 졸이고, 돈필드 저택을 상상해 보기도 하면서 어떤 운명을 향해 나아갈지를.

  책을 소유하고 있다는 장점은 생각이 날 때 펼쳐볼 수 있다는 점인 것 같다. 제인 에어를 읽을 당시엔 <폭풍의 언덕>과 비교하며 작가 샬롯 브론테와 그녀의 동생 에밀리 브론테의 생애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책 속의 주인공들의 성격이 각자의 성격을 반영한 것이란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다. 브론테 자매들은 너무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많은 작품을 남기진 못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 고전에 자신의 작품들을 남겨놓고 있다. 1800년대의 이야기를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읽고 있고 읽고 싶은 책, 읽어볼 만한 책으로 꼽고 있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중학생이던 때, 제인 에어를 읽고 세인트 존을 좋아한다는 친구가 있어 엄청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제인 에어에게 어울리는 사람’으로 분리해서 보면 그 친구의 선택이 전자였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해가 된다. 자신의 선택이 아닌 선택해 주는 사람과의 결혼을 강요받던 시대, 강요받던 여성이 자신의 결정으로 사랑과 결혼을 이루는 이야기는 수많은 여성들에겐 얼마나 환상적으로 다가왔을지.

  제인 에어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표현되고 있다. 고아이기 때문에 겪었던 수많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독립적이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것이 수많은 여성 독자들을 매료시킨 이유일 것이다. 지금 따져보자니 로체스터의 행동들은 많은 논란의 여지를 준다. 사실 세세하게 따져보면 매우 충격적이다. 자기중심적인 것을 떠나 로체스터의 행동은 현대에서는 비난에서 그치지 않는 범죄 수준이다.

  나이가 들어서 때때로 예전의 책들이 다시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때의 느낌, 이미지, 문장, 이야기, 그리고 그 책을 읽을 당시의 ‘나’가 그리워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책들. 하지만, 어른이 되어 읽었을 때 머리가, 냉소적으로 문제를 지적하듯 보게 되는 책도 있었다. 제인 에어도 가끔 생각날 때, 다시 읽게 되면 중학생 때 느꼈던 로체스터에 대한 감정이 상당히 변해지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180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 속, 제인 에어의 시점으로 읽어 나가면 다시금 그 마음으로 보게 될지 어떨지.

  인생이란 어떤 책을 읽어야 되는 나이가 있긴 한가 보다. 지금 생각하면 학창시절 이 책을 읽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그래서, 조카에게 제인 에어의 페이지가 조금 더 넘어가게 도와준 롤점검에게 큰 공을 돌리고 싶다. 나 또한 덕분에 제인 에어에 대해 추억에 잠기는 시간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롤점검은 매일 하면 좋겠다. 특히나 방학 즈음, 그 시간만큼이라도 게임에 빠진 아이들이 조금이나마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어떤 책을 읽고 감흥을 느끼는 건 개인차, 취향이기도 하지만 ‘시기’라는 것도 있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업종변경합니다

 

장 퇼레, 자살가게


   이런 가게가 있다면 사람들이 많이 찾을 것이다. 

인터넷상에서 죽는 방법을 검색하며 함께 죽을 사람을 찾는 요즘의 분위기에서 온라인을 벗어난 오프라인에서 

‘자살’ 방법을 친절히 안내해주는 가게가 등장한다면!

  자살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자살을 희망하는 이들이 있기에 이들을 위해 철저한 맞춤서비스를 행하는 가게가 있다. 이 가게는 가문 대대로 자살용품을 판매해왔고 여전히 이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는 건, 그만큼 수익이 된다는 이야기다. 그만큼 이용자가 많다는 얘기다. 

  이 상점의 판매물품을 한번 보자. 어떤 목매달기 총과 칼, 밧줄, 독약은 물론이고 독이 묻은 사과와 투신용 시멘트 등 죽을 수 있는 모든 상품이 준비되어 있다. 상품을 팔기 위해 손님들을 위해 친절과 적극적인 서비스를 행한다. 죽지 않으면 전액 환불!까지도 해주는 극강의 서비스 마인드로 상점을 운영하는 이 가게에 가업을 이을 아들 알랑이 태어난다. 주인인 미시마 튀바슈는 칼과 총의 전문가이고, 아내인 뤼크레스는 독극물 전문가이다. 장남 뱅상과 딸 마릴린이 있기에 굳이 알랑이 태어나지 않아도 가업을 이을 자식 걱정을 하지는 않아도 되었지만 그저 알랑은 오직 자살용품을 시험해보다 태어났을 뿐이다.

  알랑은 출생부터 이 가게의 분위기와 맞지 않게 태어났다. 그는 웃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고, 애가 웃네!”라고 하면 세상 모든 부모들은 좋아하지만 이 가게에선 발끈한다. 웃는 게 아니라 입가 주름이라고 바득바득 우긴다. “튀바슈 가문은 절대로 웃지 않는다구요”


"벌받고 있는 겁니다. 학교에서 자살자에 대한 질문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근데 쟤가 뭐란 줄 아십니까? 아 글쎄, '자, 살자!' 고 하는 사람이라나 뭐라나, 그랬다는 거 아닙니까!" p39


  알랑은 가게의 분위기에 맞지 않는 웃는 인상으로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킨다. 가게 인사법은 “명복을 빕니다”라고 가르쳐 주고 손님들 앞에서 흥얼거리지 말고 웃지 말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가게는 음침한데도 화사한 햇살이 내리비치는 푸른 하늘 그림을 그리고 좋은 꿈꾸라고 인사한다. 탁월한 긍정과 낙천적인 알랑의 행동에 가족은 걱정이 한가득일 수밖에 없다. 보통의 가정에 괴짜 하나가 분위기를 반전시키듯 괴짜 가족에 보통의 아이가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 가족이 평범해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욱 더 알랑이 평범해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사고치는 개구쟁이 아이가 어떠한 구박에도 주눅들지 않고 여전히 개구쟁이짓에 빠져 있듯이 알랑은, 자기만의 개구진 활동에 열심이다. 가족들이 원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서 어쨌든 가족들에게 알랑의 행동들이 ‘튀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럼 다른 아이들은 알랑과 어떻게 다른가. 큰아들 뱅상은 반 고흐에서 딴 이름인데 그는 식욕부진증 환자로 한시라도 붕대를 감지 않으면 머리가 터질 거라고 믿으며 어두운 그림만 그린다. 뱅상은 삶을 끝장내고자 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유원지, 자살 테마파크 모형물을 만들고 있다. 이곳에선 돈을 내고 사격장에서 과녁이 되거나 감전사, 익사 등의 방법으로 죽을 수 있다.

  마릴린은 먼로의 이름을 연상하게 하지만 먼로와는 달리 통통하고 거북스런 몸매를 가지고 있다. 마릴린은 이런 자신을 창피해하며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며 티셔츠에 ‘사는 게 지겨워’라는 문구를 달고 있다. 마릴린은 생일선물로 받은 주사기를 가지고 침샘에서 독이 만들어지는 방식으로 자살자에게 죽음의 키스를 판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엔 그 사람에게 키스할 수 없어 괴로워한다.

  어쩐지 음침하고 우울할 것만 같은 이 가게는,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다. 바로 알랑의 문제적인 행동들 때문에 시종일관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가득하고 코믹한 느낌이 가득하다.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했다는 작가 장 퇼레의 글솜씨가 책을 보는 내내 웃게 한다. 그런 마음이 된 듯 가족들 역시도 어느덧 원하지도 않게 알랑의 긍정에 중독되어 삶에 대한 희열을  찾아가고 심지어는 알랑이 없는 동안엔 알랑을 그리워하기까지 한다.


"삶이란 있는 그대로의 삶 자체를 말하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의 가치가 있는 것이죠! 서툴거나 부족하면 서툴고 부족한 그대로 삶은 스스로 담당하는 몫이 있는 법입니다. 삶에 그 이상 지나친 것을 바라선 안 되는 거예요. 다들 그 이상을 바라기 때문에 삶이 말살하려 드는 겁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그 모든 것을 좋은 면에서 받아들이는 편이 나아요. 목매달 밧줄이나 권총 따위는 여기 이곳에 맡겨두고 말이죠. 요즘 손님처럼 겁에 질리고 불안에 떨 때 밧줄이든 뭐든 목에 걸고 어디 한번 잡아당겨보세요. 뭐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다 의자에서 떨어져 무릎 깨지는 건 순간이죠. 무릎 아프지 않으세요?" p154


  자살가게에서 이런 말을 할 거라 생각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자살가게는 희망을 파는 가게로 바뀌어 간다. 그리고, 알랑에게는?

  시종일관 웃음을 머금고 있다는 알랑의 묘사에 웃음띤 알랑을 상상하면서도 묘한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 그 묘한 느낌을 흔들어 생각해보니, 그것은 냉소와 슬픔이 섞인 그림이었다. 가족들에게서 느낀 것이 코믹이었으니까. 이 결말을 생각했을까. 얼마간 자살가게의 살자가게로의 변화는 예측하기도 했지만.


 아이는 한 손으로 버티며 꾸준히 올라간다. 이제 가족과의 거리는 불과 3미터 남짓. 스웨터를 입은 등짝과 바지 위로 네온의 광고문안이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알랑은 붕배를 단단히 틀어쥔 채, 지난 일들에 대한 그 어떠한 아쉬움이나 미움도 없는 덤덤한 마음으로 저 위 가족들 얼굴을 바라보면서 흔들흔들 오르고 있다. 지금 보이는 저들 모두의 행복과 미래에 대한 갑작스런 신념, 저 얼굴들에 빛나는 환한 웃음이야말로 알랑의 일생일대 걸작이나 마찬가지다. 2미터가 남자 누나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린다. 튀바슈 부인은 난데없이 어린 시절 유치원 마당에 들어서는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듯 가까워지는 아들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제 알랑의 임무는 완수된 것. 순간……그는 손을 놓는다! p209


   희망에 전염된, 다시 웃음을 찾은 가족들과 사람들은 이제 찾은 행복한 기운을 잘 유지할까.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의, 알랑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던가를 생각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우울에 허덕일 때, 내 옆의 소중한 사람이 힘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마음이 되어 알랑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어쨌든 이 허무란.

 

    "……잠이나 좀 잘래."

     어차피 내일이면 또 살아야 할 테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율리시스, 1904년 6월 16일의 랩 혹은 일기




이것은 랩이야!

 

  어디에서 뽑은 최고의 작품이라거나 꼭 읽어야 할 책이라며 책을 순위화한 목록을 보게 된다. 아주 오랫동안, 내가 본 목록들의 상위권에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있었다. 선입견이라는 것은, 행동의 방향을 바꾸는데 얼마나 탁월한지. 

  그러니까 오래도록 나는 타인이, 전문가가 꼭 읽어야 할 책이라는 목록을 살피면서도 이 율리시스를 잘 피해왔다.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율리시스, 오디세우스는 이미 내겐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었고 이야기였다. 굳이 이 이야기를 제임스 조이스의 시각으로 다시 읽을 필요까지야라며 스킵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강제적으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려서 책을 펼치고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했던 것들과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 까닭이다. 오랫동안 이 책을 등한시했던 시절이 안타까워지며 이 두꺼운 책을 얼른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해짐과 동시에 읽는다는 기쁨이 솟구쳤다. 그토록 사람들이 율리시스에 대해 많은 말을 하는 이유가 아마도 정복욕이지 않을까.

  율리시스를 읽다가, 특히 마지막 장을 읽으며 든 생각은 ‘이것은 랩이야’란 생각이었다. 사실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흘러가는 말들이 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생각의 흐름을 감히 말이 뒤따라 갈 수 없다. 

  오디세우스 10년의 이야기보다 율리시스 하루의 이야기가 이렇게 양적으로도 승리를 거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페넬로페 역시 남편을 기다리면서 무수한 내적 갈등을 했을 것이고 거듭 거듭 생각의 순환이 이어졌을 것이다. 몰리가 내뱉는 문장들을 보면서 마침표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블룸의 생각들을 다시 뒤적였다. 마침표가 있다. 이것은 엄청난 차이다. 읽어 가면서의 호흡도 달라진다. 조이스가 의도한 것이겠지. 무엇을 의도한 것일까. 블룸의 간결하면서도 딱딱 끊어진 호흡과 달리 몰리의 호흡은 쉴새가 없다. 여성의 생각도 수다스러움이려니 하는 걸까. 아무튼 몰리의 생각들은 랩처럼 음악이 따라붙는 느낌이었다.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기도 했고 내용의 놀라움도 상쇄시켜주는 듯 고조시켜 주는 듯한 문장들을 읽으며 현대판 랩으로 읽어 내려갔다.


율리시스는 오디세우스의 여행담이 아니다


   율리시스 이야기를 생각했던 내게 당연 첫 장부터 ‘이게 뭐지’란 당황스러움을 주었다. 하지만, 이것도 여행담이다. 머릿속을 항해하는 이야기. 하루 동안에도 아주 짧은 시간에도 인간은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하고 사는가. 참 재밌네, 재밌어란 생각들을 하면서 어딘가를 떠도는 것만큼 의식의 흐름 역시도 재미있는 유랑이란 생각을 했다.

   거창하게 들리는 의식의 흐름이란 문학용어가 사실은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우리가 하고 있는 생각이라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소설로서 재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조금의 소설기법이 가미되었겠지만. 그래서 오히려 나는 이 율리시스가 난해하고 낯설다기보다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음, 뭔가 익숙해, 익숙해.

   우리가 강제적으로 쓰라고 재촉받으며 제출해야 했던 어린 시절의 일기가 아니라 뭔가 가정의 격랑을 겪을 때 혹은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써내려간 일기가 이와 같지 않았을까. 이토록 기법적으로 쉬운 소설이 어디있을까.


율리시스는 외설인가 아닌가


   조이스의 연보에서 율리시스가 외설시비로 휘말렸다고 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는 ‘뭐?’. 그 다음 떠오른 이미지는 마광수의 책. 마광수의 책을 본 적은 없지만 도대체 무엇이 이 책을 저런 황당한 시비에 휘말리게 했을까란 궁금증이 인 것은 당연하다. 결론은, 글쎄 모르겠다. 어느 시대이건 꼬투리 잡는 인간과 집단은 있고 그것을 사명감으로 여기는 집단은 있으니.

   외설의 기준은 무엇인가. 당시의 재판 결과 최종적으로는 해금조치가 되었으니 이 책은 외설시비에서 최종 승자가 되긴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외설’에 더 각인되어 있을 듯하다. 오늘날처럼 포르노가 넘쳐나는 시대에서 본다면 이런 시비가 있다는 것이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1920년대 유럽도 역시, 실제 외설스러운 행동을 일삼는 것과 그것을 표현해 낸 작품들을 보는 것은 인식을 달리하는 모양이다.

 

일단, 율리시스는

 

   당대에 그토록 시달림을 안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이토록 격찬을 받으며 평가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책의 소개에, 작품 소개에 구구절절하게 나온 바에 의하면 <율리시스>가 가지는 가치는 혁신적인 소설기법이라고 한다. 이 소설이 나올 시점에 한창 주가를 홀리던 의식의 흐름 기법이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탁월한 언어미학이라고 한다. 언어미학의 관점에서는 번역을 보는 입장에서는 늘 아쉽다. 어떻게 언어유희가 활용되는지를 모국어를 느끼는 그 맛으로 알고 싶지만 늘 각주를 의지해야 하며 그마저도 쉽게 와 닿지를 않으니 안타깝다. 특히 언어유희를 즐기는 나로서는.

  어쨌든 이 두 가지가 <율리시스>를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위치지은 이유란다. 그 위치를 지은 것은 누구인지 모르겠다만. 아마도 그 시기를 지나 문학을 전공한다는 ‘전문가’에 의해서겠지. “나는 <율리시스>에 아주 많은 수수께끼를 숨겨 두었기에 앞으로 수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분주할 것이다.”라고 조이스가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말들도 있다 한다. <율리시스>로 문학박사를 받은 사람이 <율리시스>를 끝까지 읽은 사람보다 많다라는. 난해하고 어렵다고 하면서도 최고의 작품으로 올려놓는 것이 그러니 의아스럽기도 할밖에. 그토록 공격받은 제임스 조이스의 이 소설은 공격으로 인해 더욱 회자되어서일까.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도 한다. T. S. 엘리엇,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 등이 자기들의 작품을 쓸 때 이 책의 영향을 받았나나 어쨌다나.

  왜 ‘다름’은 늘 공격받아야 하는 것인지. 나의 이해하지 못함이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는 일들은 참 안타깝다. 어쨌든, <율리시스>보다 더 욕먹었던 작품이 <피네간의 경야>인데, 이 책도 지난 번부터 계속 읽어야지 하고 있던 책이다. 욕을 많이 먹은 작품이라니 또 불끈 이 책이 읽고 싶어진다.

   아무튼 말년에 눈 때문에도 딸 때문에도 힘들었던 제임스 조이스, 지금 후대에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만족스러운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율리시스와 글쓰기


나는 <율리시스>에 아주 많은 수수께끼를 숨겨 두었기에

앞으로 수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분주할 것이다.


 

   랩같은 문장. 마침표 없는 문장.

  내가 <율리시스>를 보완할 수는 없다는 점은 분명하므로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 어쩌면 몇 번을 더 읽고 나면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대해 주구장창 분석해 댈 수 있을까.

  어떻게 생각하면 경외감, 달리 생각하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율리시스>를 읽었다. 방대한 분량에 놀라고 이것이 하루의 기록이라는 것에 놀라고 이것이 율리시스의 뼈대를 가져왔다는 데 놀라고 조이스의 다른 작품의 주인공들의 돌려쓰기라는 데 놀라고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델이라는데 놀라고 아무튼 놀라고 놀라고.

  이 작가, 교묘한 방법을 쓴다. 자신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야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생각보다 글이 편하게 읽혀졌다. 어쩌면 다른 생각들을 하지 않고 별생각없이 읽으려 했기 때문일지도. 처음엔 무수하게 달려있는 각주 때문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 많은 각주들을 다 이해해야 하니 첫 장이 넘어가지 않았는데 이 책을 북리뷰가 끝난 이후에도 완전히 다 읽기로 작정을 하고서야 각주를 잠시 잊고 그냥 문장들을 읽어나갔다. 그러니 내 식대로 그러려니 하면서 글이 넘어갔다. 아마도 다시 찬찬히 읽으면서 글들을 곱씹게 되겠지만, 어쩌면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해석하려는 생각들이 이 글을 읽는 방해요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너무 많은 의미찾기에 매달리지 않는 것도 재미있게 읽는 방법이긴 한데.

   제임스 조이스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구성과 등장인물을 자신의 <율리시스>를 써 나가는 축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제목과 목차만 봤을 때만 해도 이것은 그 유명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러다가 이것이 왜 율리시스인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율리시스와의 연관성을 계속 곱씹는 맛이 있다.

 오디세우스가 그 긴 세월을 바깥에서 떠돌아다닌 이야기라면 이 작품은 머릿속에서 하루종일 떠드는 이야기다. 제임스 조이스가 태어난 곳, 아일랜드 더블린을 배경으로 1904년 6월 16일 아침 8시부터 그 다음날 오전 2시까지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이 율리시스 속에 담겨 있다.

  <율리시스> 전문가들의 작품 해설들을 끌어와 이 뼈대를 설명하자면, 율리시스는 크게 세 가지의 내용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3부 구조와 같다. 텔레마키아, 율리시스의 방랑, 귀향의 구조라는 것이다. 그리고 각 장들은 역시 호메로스의 그것들을 차용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조이스는 <율리시스>를 온전한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었는데, 등장인물들이 그의 이전 작품들의 등장인물들의 연결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스티븐 데덜러스는 작자 자신이기도 하며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이다. 율리시스에서는 조이스의 작품들 속 등장인물들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단,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는 점이 있지만. 그런데 또 이들 모두는 상상의 인물이 아니다. 자신의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은 거의가 실제 모델이 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주변인물들에 대한 탐색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써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글쎄. 감동이란 건 무얼까. 어떤 글귀가 마음에 남는다? 이야기의 내용이 탁월하다? 그냥 율리시스는 놀랍다. 가만 보면 별 일 아닌 것들을 쉽게 써내려가고 있어, 전혀 대단치 않은 작품이다. 왜냐고, 이것은 우리가 늘상 하고 있는 말과 이야기들 아닌가? 딱히 신비로울 것도 놀라울 것도 없는. 어찌 보면 익숙한. 이것을 소설로 끌어들였다. 그래서 다들 놀란 것 아닌가. 이런 식이라면, 나도 소설을 쓰겠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늘, 첫 시도가 중요한 법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