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감촉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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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감촉


시간의 감촉, 은희경, 문학동네, 2026-06-22.

 

  요즈음 난 ‘몸’에 대해 할 말이 많다. 노년에 대해서도.

  이 소설은 ‘몸’에 대한 기억이다. 아니, 그보다는 ‘밀도 있는 삶의 기록, 기억’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나’를 설명하려 해도 ‘나’의 생김새는 ‘몸’이란 형체에서 시작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몸’보다는 ‘정신’에 더 우위를 두듯 이야기한다. ‘한낱’이나 ‘기껏’ 육체로 폄하하고 병든 육체일수록 노화된 몸일수록 더더욱 소외되기 일쑤다. 하지만 ‘몸’과 분리한 ‘정신’이 있을 수 있을까. ‘몸’은 필연코 ‘정신’, ‘영혼’을 발산하는 기본이다. 나무의 나이테와 같이 ‘몸’의 변화에 따라 삶의 변화가 이어지듯이. 그렇다. 삶을 기억하고 기록한다는 것이 ‘몸’이란 형체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소설 속 안나가 말하듯 “몸에 관한 한 타인은 결코 개입하지 못한다. 남이 볼 때 남루하든 비참하든 한심하든 몸의 당사자에게만 유일하게 감각되는 고유의 삶인 것이다.”

  여기 ‘몸’의 주인 둘이 있다. 안나와 경선 두 자매다. 자매의 이름이 안나와 경선인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듯 이름을 들여다본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항렬자를 쓰는 탓에 이름 끝자만 다르다. 대체로 형제자매라면 비슷하게 이름을 지을 텐데, 유독 다르게 느껴지는 어감으로 자매의 이름을 설정한 것에 쓸데없이 의문을 품는다. 더구나 안나는 1월생, 경선은 12월생이다. 의문은 품지만 끝내 특별한 이유는 찾지 못하고, 괜시리 이름 때문인지 ‘안나’는 독립적이고 고립된 삶, ‘경선’은 경쟁적이며 북적한 삶을 그 이름 속에 품은 듯이 여긴다.

  안나가 예순다섯 생일 아침 홀로 커피를 마시며 ‘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무위와 단조로움’이 한몫한다. 안나는 “가족이 없고 경제활동도 끝났고 빚도 없고 만날 사람도 만들지 않”지만 하루의 삶을 유지하려면 ‘몸’이 기본적인 일을 수행해야 한다는 유기체의 숙명을 생각한다. 그리고, 일년 정도는 보지 않고 지낼 정도인 자매, 오랜만에 만난 ‘경선’의 변화, 늙음을 압축적으로 느낀다. 안나는 경선의 간병인으로 병원에서 경선을 만난다.

  ‘경선’은 오피스텔에서 “무력감과 압박감”을 느끼며 깨어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전남편의 사망 소식과 자신의 건강검진 결과에 “자신이 느낄 수 있는 죽음의 실체는 잠든 뒤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상태로 상상”된다. “죽음은 소멸이고, 모두가 겪는 일이라고 해서 두려움이 덜어지는 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자매가 만나게 되니 서로가 지난 과거를 떠올린다. 안나는 경선을 중심으로 경선의 탄생과 백일, 그즈음의 이웃들과 친척들까지, ‘생로병사’의 사건들을 생각하며 그 속에서 느끼고 생각했던 삶의 모습들을 생각한다. 또한, 안나의 사랑과 경선의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며 “몸이란 삶의 조건이지만 한편으로 죽음의 조건”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경선의 경우, 막연한 죽음이 훨씬 더 가까이에 따라오고 있음도.

  일년에 한번쯤 만날까 하는 두 자매는 격렬하게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틋하게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다. 어릴 적에야 함께 성장한다지만 성인이 된 후에야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 보통이니까. 그래도 동생의 병간호를 부탁하고 해줄 만큼의 사이인 자매. 사사건건 사물을 보는 시각에서 차이를 나타내며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어린 시절 자매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듯하다. 마음은 그토록 지난 기억을 갖고 있는 ‘어린’ 자매이건만 지금 두 자매는 시간의 흐름에 따는 필연적인 ‘노화’를 맞이하고 있다. 경선은 ‘노화’와 함께 ‘병마’까지를 ‘몸’에 새기고 있는 순간이다.

  집중력과 기억력이 뛰어난 편이었던 안나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상대에게 답답함과 짜증을 느껴왔는데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자 “노화란 어쩌면 자신이 혐오했던 모습으로 퇴화해가는 고통과 저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한다. 자기혐오가 우울증이 되고 우울증이 때로 증오와 공격성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경선에게 안나가 그 대상이 된다.

  두 자매는 노인으로 보이기 싫은 시기에 이르렀고, 노화와 병마 속에 이처럼 자기혐오에 빠지게 되는 것은 “노인으로 대해지는 게 불만스러운 마음 안에는 스스로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세상의 잣대에 맞춰야 했던 데 대한 분함과 심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혐오 속에 점멸될지 모르는 두 ‘노인’은 경선의 손녀 ‘다니엘’과 함께 해외여행을 하며, ‘우리의 첫 경험에 대한 게임’을 하며 생각의 전환을 맞는다.

  경선이라는 이름처럼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의 가난과 고독에 견주며 그보다는 낫다는 데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순간들이 있었던” 경선도 왜 안나와 친밀한 사이가 되지 못한 채 그저 그런 자매로 살아왔는지를 기억하며 “사람은 병과 실수와 약점을 통해서도 교감”하며 “고통과 맞닥뜨리는 걸 피해버리면 화해할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갚을 길 없는 빚이 되고마는 것”임을 인식한다.

 

어떤 시간은 생활의 때묻은 이력으로 채워진 채 흘러간다. 하지만 같은 시기의 또다른 어떤 시간은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 그대로의 세계 안에서 흘러간다. 삶이란 그처럼 의미가 다른 여러 개의 시간이 겹쳐져 흘러가는 게 아닐까. 몸의 일상은 현실의 시간대에서 변해가지만, 언젠가 포착한 적 있었던 꿈과 이상의 시간은 그 나름의 도착지를 향해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 인간이 마지막까지 품고 있는 시원이나 본향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두 노인의 ‘몸’에 대한 이야기, ‘노인’으로서 ‘노화’된 몸을 바라보는 이야기는 삶의 기록과 엉기어 자연스럽게 노화를 수용하는 형태로 나아간다. 그것은 몸이 살아온 시간만큼 겪은 그 수많은 ‘사건’들을 다시 바라보고 기억을 재생하며 현재에 그때 자신의 행동에 대해 ‘반성’과 ‘화해’를 담는다. 비록 힘겨운 몸으로 인해 짜증이 나고 자기혐오에 빠지게 되었을지라도 그것이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데 한걸음 더 나아가는 길이다. 비록 앞으로의 미래가 얼마나 남았을지, 아니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다가와 있을지 모른데도 마냥 두려워하거나 회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하루하루 첫 경험인 듯 첫 기억인 듯 살아내는 것.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그것은 모두 ‘첫’이니까. “그것은 ‘가장 오래된’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최근’과 ‘우리의 다음’이 되기도 한다.”

  두 자매처럼 노년과 병마에 힘겨운 부모님이 ‘노화’를 ‘노년’을 좀더 자연스럽게 인식하며 좀더 평안하기를 바라지만 두 자매는 부모님에 비해서 너무나 청춘이다. 육십 오세, 그래 아직은 청춘 아닌가. 세상의 변화는 빠르기도 하다. 삶을 살아내는 데 좀더 바빠 어떤 여유를 가지기 힘겨웠던 부모님 세대, 삶을 반추하기도 전에 ‘자기혐오’ 속에 허우적거리는 건 아닐지, 아니 그러고 있는 것도 같은데 무얼 어찌해야 할지 모를 시간이 간다. 자식에게도 힘겨운 시간이다. 처음 겪어보는 현실이니까. 안나와 경선처럼 저 나이가 되면 노화를 긍정하면서 더 깊어진 노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손에 쥐어지는 시간의 감촉이 갑자기 너무 차가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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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조각 시간 - 제2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성수진 지음 / 나무옆의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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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만 더 숨쉬다가


유리 조각 시간 - 제2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성수진, 나무옆의자, 2026-05-20.

 


  도망치는 일도, 힘을 쏟아야 한다. 책을 덮고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유리 조각 시간’이란 게 가늠되지 않아서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궁금했다. 시간이 유리 조각처럼 파편화되는 것을 말하는가.

  책을 읽는 동안엔 오래 전 스쳐 본 유튜브 영상이 떠올랐다. 단편적인 기억에 의존하여 몇 날 며칠 유튜브를 헤맸다. 실로 일주일 넘게 미친듯한 집착이었다. 마침내 찾았을 때 감정을 뭐라 표현할 길이 없다. 몇 단어에서 기억과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왜 그토록 이 기억을 완전하게 할 원본을 찾고 싶었을까. 대략 6분 정도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나’는 열아홉 살에 엄마, 아빠, 오빠를 교통사고로 한번에 잃었다. 장례식 후 가족 따라 가려고 양화대교에 섰다. 10분만 더 숨 쉬다가 뛰어야지, 가야지 하다가 해가 뜨고 지나가는 차들이 많아져서 조금 기다리는데 조금씩 밝아지면서 보이는 강물이 너무 예뻐서 잠깐 보고 있다가 잠시 지난 시간을 생각하며 서 있었는데 자전거가 지나가다 멈췄다. 자전거에서 누가 손을 잡았는데도 세상에 감흥이 없어 놀라지도 않고 그 사람을 쳐다보는데, “새벽공기 좋지?”하는데 눈물이 났다. 따스한 말에 주저앉아 마구 울었고 또래였던 그 친구가 자기 얘기를 오래도록 들어주었다. 그 친구가 ‘나’를 너무 챙겨줘서 살고 싶어졌다고. 그 친구가 말하길 경찰에 신고하려다가 너무 슬퍼보여서 자기도 모르게 옆에 갔서 말 건 거라고. 스무살 둘이 원룸을 구해서 같이 의지하며 잘 생활하며 행복하게 지냈는데 5년 지나 그 친구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미쳐버릴 것 같은 마음에 울기만 하고 쓰러지기도 했는데 열아홉 살 때처럼 극단적인 생각은 들지 않았다고. 친구가 알려준 것이 너무 많아서, 그 친구가 준 사랑에 힘입어, 삶으로 이끌어준 그 친구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잘 살아가고 있다는.

 

  소설 속 유영은 하루하루 ‘10분만 더 숨 쉬다가’를 읊조리는 ‘나’ 같다. 그러면 ‘경진’은 그 친구일 수밖에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실체를 알 수 없는, 무겁고 가라앉은 분위기에 놓여본” 유영은 아홉 살에 감각적으로 그 실체를 파악한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건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 사고로 사망한 언니 유경의 존재였다. “곁에 있는 나를, 내게 드리운 그림자를 보듬어줄 것”을 바라지만 영원한 아픈 손가락 유경이 엄마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하여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아 유영은 엄마가 “내가 죽어야 나를 이해해줄 것 같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영은 제 존재에 대한 의심과 외롭고 쓸쓸함을 가득 안고서 성장하게 된다.

  가족 속 결핍을 외부에서 찾게 된 유영은 중학생 시절 채팅 사이트에서 ‘경진’을 만나 우정을 나눈다. 채팅 속 문장으로 만난 ‘경진’, 채팅명 ‘델’은 유영에게 위안이 되는 존재였다. 유영은 “찬란한 아픔. 아름다운 구역감.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 말로 하면 빛바래고 어딘지 유치해지는 그 느낌”을 델하고만 공유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메일과 문자를 주고받으며 소통하던 ‘경진’에게서 소식이 끊어진 지 오래, 간호사가 된 유영은 업무 문제와 가족 안에서 여전히 편치 않은 상황에서 낯선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자 병원을 그만두고 출국을 준비한다. 그러던 중 5년 만에 경진에게서 메일이 도착한다. ‘경진’이 보내온 ‘유영’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돌이키면 상처 가득한 과거를 회상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

  채팅으로만 만나던 둘이 처음으로 만나던 날, 유영은 다리 난간에 섰었다. 그날 델은 필사적으로 유영을 끌어안았다. 이제야 생각하면 그때 유영이 다리 난간에 선 것은 ‘치기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는지 그때 델은 “자신의 마음을 돌릴 수만 있다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듯한 태도”로 유영을 붙들었다. 그날 델의 품 안에서 한참을 울던 유영은 델의 왼쪽팔에서 ‘부풀어 오른 흉터’를 보았다. ‘하나의 긴 선과 그것을 가르는 짧은 선들을’. 델은 주머니에 유리 조각을 넣고 다니며 제 몸에 상처가 나길 기다리는 아이였다. 그런 델, 아니 경진은 “자신이 어떤 세계의 일원이 되고 싶은지 파악했으며 그 세계에 속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러면서 연락이 뜸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나는 서로에게 몰두했다가 조금씩 빠져나온 뒤 자신의 일상에 복귀해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이 사랑과 우정의 공통된 과정”이지만 그래도 변화된 관계가 눈물 날 만큼 서글펐던 유영은 갑작스런 경진의 소식에 불길한 느낌과 함께 경진을 찾는다.

  아마도 다리 난간에 섰었던 유영과 이를 막으려던 경진의 모습에서 “10분만 더 숨쉬다가” 영상이 연상되었을 거다. 5년이라는 시간 또한 연상작용에 한 역할을 했을 테고. 물론 유튜브 영상 속 10분만 더 숨쉬다가와 유영이 가진 상처와 외로움이 ‘가족’으로 기인한 것이라 해도 다르다. 그 곁에 선 ‘친구’의 존재가 삶에서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숨을 쉬게 해주는 존재인지는 알 것 같다. 가끔 생각한다. 오래 전 연락이 끊긴 친구의 갑작스런 소식에 반응하는 나의 모습에 대해서. 유영이 생각한 것처럼 “서로에게 몰두했다가 조금씩 빠져나온 뒤 자신의 일상에 복귀해 관계를 이어나가는” 이 반복적인 과정에서 가끔 선택의 순간이 찾아오게 될 때, 결정적 요인은 무엇인가에 대한 뭐, 그런.

  학창시절엔 이상하게도 ‘친구’에 대해 ‘우정’에 선택해야 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그런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뭔가 ‘마음이 끌리는 대로’가 아니라 ‘그래야만 해야 하는’ 형태로 움직였던 것도 같다. 나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많은 친구에게 본능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신경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시간의 길이’의 우위를 ‘우정’의 선택 순위에 높여 놓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취향이나 생활반경 내 존재하는 이들이 우정의 대상이 되었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그래도 특정한 몇을 제외하고 직장에서 만난 관계는 오래 유지되지는 않은 것 같다. 어릴 때 만난 친구들일수록 취향이나 사회를 보는 시선이 얼마나 다른가도 확인하게 되기도 한다. 소식이 끊긴 가끔 생각나는 친구도 있고. 달라진 게 있다면 한때는 ‘친구’란 같은 나이인 경우에 한정했다면, ‘친구’는 ‘나이’와는 상관없는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 속에 내가 ‘유영’이라면 시간이 흘러 찾아온 이 상황에 어떤 반응을 하게 될까.

 

“그렇게 각별한 친구야? 몇 번 만나지도 않았다며…….”

희주의 물음을 듣고 나서야 마음속에 아주 확고하게 다른 결심이 들어섰다. 얼마나 자주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었는지, 서로의 생활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지 아닌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오직 내게 중요한 건 김경진이라는 존재 그 자체였다. ‘친구’라는 단어로는 차마 설명할 수 없는, 그냥 김경진. 우리가 서로를 만났다는 것.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 이유는 충분했다. 나는 경진이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었다.

 

  경진은 “자신이 고유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소설을 쓴다”고 했다. 나는 영화나 소설 속에 묘사되는 ‘멋진’ 친구의 모습이 되고자 한 때가 있었다. 어느 순간엔 내겐 그런 친구가 있는가란 물음을 하게 되곤 한다. 어릴 적부터 오랜 시간을 친구로 지내오면서 사소하다고 해야 할지 그런 일들로 관계를 끊었다고 얘기하는 주위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걸 알게 되면서 뒤늦게 ‘관계를 끊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유영은 ‘각별한 친구’는 몇 번 만나지 않은 것 정도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났다’는 이유, ‘존재’ 자체로 ‘김경진’을 각별한 친구로 정의했다. 그들의 학창시절이 그 기억이 유영과 경진이 ‘각별함’을 보여주는 요인이 된다. 마음 속에 누군가에 대해 어떻게 기억하고 있느냐, 어떤 시간을 나누었느냐가 현재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친구란 “삶으로 이끌어주는” 존재, 지금은 이 말이 와 닿는다.


손바닥에 유리 조각을 두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소주병 혹은 사이다병이 깨지고 난 뒤의 시간을 짐작해보았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모래사장에서 바람과 파도를 맞으며 서서히 마모되어온 시간을. 수많은 모래알 사이에서 나는 초록으로 빛나는 작은 유리 조각 하나를 주워 경진에게 건네었고, 오랜 시간이 흘러 경진은 그것을 다시 내게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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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세대
백온유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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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8회는 있는가


약속의 세대, 백온유, 문학동네, 2026-03-20.

   

 

  “약속의 8회가 왔습니다”

  야구 경기 8회가 되면 늘 이런 코멘트가 나온다. ‘8회에 도대체 무엇을 약속했기에’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8회에는 꼭 무슨 일인가 벌어져야 한다는 강렬한 기원, 주술같은 이야기에 휩쓸리고 만다. 승리 굳힘일지 역전의 날림일지 모를 8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패배가 굳혀진 경우가 더 많았지만 그 ‘약속의 8회’는 항상 당연한 듯 이어지고 머문다. 아무것도 몰랐거나 아무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한순간의 유흥으로 지나갔을 ‘8회’는 ‘약속의’라는 단어가 붙은 후엔 단순하지 않은 마음을 휘젓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기대에 미치지 못한 후폭풍은 전신을 휘감는다. 『약속의 세대』에서 ‘약속의 8회’를 떠올리는 건 기시감일까.

  이 소설집엔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약속의 세대’를 제목으로 하는 소설은 없다. 「사망 권세 이기셨네」에 ‘5분위 약속 세대’가 등장할 뿐이다. 소설 속 ‘5분위 약속 세대’는 “역전교가 세계의 주인이 되었을 때를 대비해 일찍부터 통치자 교육을 받은 집단”이다. 작가는 여기에서 제목을 가져왔고 일곱 편 모두에 ‘약속’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곱 편의 소설을 아우르는 ‘약속의 세대’가 뜻하는 건 무언가, 어느 세대를 말하는 건가.

  작가의 말과 인터뷰에 모든 소설을 관통하는 것이 ‘약속’이라고 했다. “헌신하는 만큼 보상이 따를 거라는 기대, 인내하면 찬란한 미래가 당도할 것이라는 믿음”에 배반당한 “헐거운 약속이 지켜지기를 바라며 사는, 삶의 비애를 감내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그렸다고.

  ‘약속’, ‘약속의 세대’라니 뭔가에 너무나 매여 있는 느낌이다. 자신도 모르게 주어진 책임감을 끌어안고 있는 특정한 세대가 있는 건가. 소설집을 읽기 전 수록된 소설 중 「반의반의 반」을 읽었기에 약속의 세대를 ‘노인 세대’라고 생각했다. 이 사회에서 무언가를 약속하는, 그러니까 내가 받은 것과는 상관없이 무언가 끊임없이 ‘주어야 하는’ 세대. 무언가를 준다는 건 ‘가지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그것이 물질이든 마음이든 ‘줄 수밖에 없는’ 세대. 하지만 생각보다 노인들의 등장은 많지 않았고 난 완전히 반대로 생각했던 거였다. ‘약속의’ 의미를. 약속이란 상호적이기도 한 것 아닌가. 그러니 약속하는 사람이 있으면 약속을 받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약속‘하는’이 아닌 약속‘받는’ 것에 대한 것을. 그러니 이건, 약속의 8회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의탁과 위탁 사이」에는 병원에 입원한 할머니를 간병하는 이십대 손녀가 나온다. ‘엄마’는 자연스럽게 잠시만 할머니를 돌봐달라고 딸 ‘연수’에게 부탁하는데 연수는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길러졌기에 그에 대한 부채감과 더불어 이를 수락한다. 여기서 눈여겨봐지는 건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당연하게 ‘돌봄’의 주체가 되는 ‘엄마’가 열외에 있다는 것이다. ‘아이’ 돌봄도 ‘노인’ 돌봄도 엄마는 비껴가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손녀와 할머니를 중심으로 돌봄 과정에서의 감정이 이야기를 차지하지만 이 감정의 영역에서 ‘엄마’는 배제되지 않는다. 할머니는 병원 사람들에게 “오래전부터 친밀했고, 유독 살가웠고, 그만큼 각별했노라고” 손녀와의 관계를 이야기하지만, 그럴 리가. 손녀는 “할머니를 진정으로 측은해하지도, 가여워하지도 못했”고 그 이야기를 힘겹게 듣는다. ‘엄마’가 해야 할 역할이 ‘할머니’와 ‘연수’에게 각각 전이된 상황에서 연수는 자신을 돌봐 준 할머니에 대한 애정보다 엄마에 대한 적개심을 더 갖는다. 또한 일상의 모든 것을 챙겨 준 할머니보다도 가끔 물질적인 것을 주었던 할아버지를 더 따르기도 했다. 손녀에 대한 할머니의 애정은 약속받지 못하게 된 건가.

 「광일」을 보며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떠올랐다. 인력거꾼 김첨지는 택시 운전사 광일로 재탄생했다. 게다가 ‘광일’을 단순 이름 풀이하면 빛나는 하루가 아닌가. 광일에게도 계속 택시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광일’에게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는-좋지 않은 쪽으로-예감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 아내에게 거듭 일찍 가겠노라고 약속하지만 “안락하고 평안한 우리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며 거듭 아내가 바라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광일이다. 택시기사로서 자신을 “신”으로 여기기까지 하는 광일이, 삶의 동반자인 아내를 “헤매지 않고 원하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도록 할 수 있을까.

 

“이따금 신이 택시 기사의 모습을 빌려 사람들을 인도한다는 거예요. 인간은 자신이 신의 안내를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로 그 순간을 통과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그건 기적적인 일이죠. 헤매지 않고 원하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에요.” _「광일」

 

 「사망 권세 이기셨네」속 ‘미리’는 “삶에 위독한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그 근원을 나와 내 어머니로 지목하는 세주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럼에도 “작정하고 조목조목 반박하지 않고” 세주가 원하는대로 끌려다닌다. “종교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적”이 있기 때문일까. 역전교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럼에도, “치리(治理)하고 싶은” 마음에, “훌륭한 왕이자 좋은 백성이 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외면했던 것에 대한 반성일까. 어린 나이부터 역전교로부터 ‘배반’당한 위치는 같은데도 ‘미리’는 ‘세주’를 또다른 교주를 모시듯 종속되고 만다. 종교가 제시한 찬란한 미래가 파괴되고 세주가 미리를 착취하며 삶의 결핍과 좌절 속에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면, 미리는 세주를 끊어내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초연과는 다른 모습이다. “사망 권세”를 이기기라도 하고픈 심정인 건가. 사이비 종교에 대한 글을 읽으면 늘 드는 의문이다. 왜, 어떻게 계속 믿느냐. 열망뿐만이 아니라, ‘믿음의 배반’이 무서워 의문을 갖더라도 ‘회피’하는 거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 ‘미리’도 그런가.

  믿음도 배반도 흔한 시대, 무엇을 믿는지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의 ‘진리’는 이제 하나가 되어 가는 것 같다. ‘내게 좋은 것, 이익되는 것’이 곧 ‘선’이라는. 사회가 외치는 ‘약속’이 함께 만들어가는 ‘약속’이 그 자체가 ‘문제’를 담고 있어서는 안될 거라는 생각을 한다. 또한, 명확한 대안없이 그저 주술처럼 외치는, 일단 질러버리는 ‘약속의 8회’도.

 

 

*https://v.daum.net/v/20260328130128275/

 https://v.daum.net/v/20260401043236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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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나라
손원평 지음 / 다즐링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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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팍팍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젊음의 나라, 손원평, 다즐링, 2025-08-08.

 

 

  “넌 늙어봤냐, 난 젊어 봤다.”

  이런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노인들 영상은 드라마 속에서 꽤 경쾌하였건만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오래전이었는데, 가사도 풍경도 왜인지 서글프게 느껴졌다. 나이 듦, 늙음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인 건가. 늙음은 젊음을 대척점에 두고 얘기된다. ‘늙음’이 ‘늙음’으로 서기 위해선 젊음과 비교하여 그 가치가 정립되지 않아야 한다.

 『젊음의 나라』는 ‘늙음’을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젊음’을 부각하고 있다. 청년인 ‘나(유나라)’의 일기에서 그려내는 ‘늙음’, 이 책을 지금 이 시대 젊은이가 바라보는 노인세대에 대한 인식으로 바라보아도 좋을까. 언뜻 보면 ‘청년’에게 닥친 문제는 모두 ‘늙음’으로 인한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늙음’의 문제를 해결하면 ‘젊음’에게 닥친 문제는 해소될 수 있는가.

  이 책은 가상의 미래공간 “시카모어 섬”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섬은 “치열한 경쟁과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 35세 이하의 청년 60퍼센트와,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슈퍼 리치 시니어 30퍼센트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최고의 삶을 누리는 꿈의 섬”이다. 아니다. 유토피아 같은 이 섬에 살기 위하여 현실을 살아가는 29세의 ‘나’가 위치한 곳은 ‘유카시엘’이니 이곳이 진짜 배경이라고 해야 한다. 현실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나’가 보는 현 세계는 저출생 고령화시대로 노인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인간보다 로봇의 기능이 더 확대되는 사회다. 이민자들이 증가하고 혐오와 차별이 증가한다. 이런 사회에서 ‘나’는 자신보다 “더 젊고 어린 사람들에게 그리고 기계에게 밀려나고”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룸메이트인 이주 2세대 ‘엘리야’를 ‘사회적으로 공인된 약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약자가 강한 존재이자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더더욱 하루하루가 조바심나고 버겁다. 친밀감이 덜하고 인간관계도 좁은 ‘나’는 어린 시절 빛이었던 연락도 닿지 않는 ‘민아 이모’에 대한 그리움과 오직 ‘시카모어 섬’에 가고픈 열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리고 시카모어 섬에 가는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유카시엘 상담사로 일하게 된다.

  ‘나’가 일하는 유카시엘은 어떤 곳인가. 시카모어 섬과 업무 협약을 맺고 있는 국내 최대의 노인 복지 시설로 사회적 위치외 경제적인 상황(어쩌면 균질성)에 따라 유닛 A부터 F까지 다섯 곳으로 분류된다.

 

여러 사람이 한 장소에 모였을 때 분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뭔지 알아? 바로 균질성이야.

비슷해야 해. 모든 면에서 서로의 수준이 맞아야 갈등이 줄지. 최소한 경제적 조건과 사회적 위치라도 비등하면 분란의 여지가 적어.

 

  ‘나’는 좌천되어 자의반 타의반으로 유카시엘의 모든 유닛을 경험한다. 유닛 A인 ‘사파이어 레이크’에서 ‘선샤인 마운틴’, ‘뉴시티 필드’, ‘아리아드네 정원’, ‘프리 하우스’ 순으로 높은 단계에서 낮은 단계의 시설에서 일하게 되는데, 이는 곧 ‘사는 곳’에 따라 다른 노인들의 삶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유닛 A ‘사파이어 레이크’는 “여기 올 수만 있다면 자신이 가진 젊음을 늙음으로 바꾸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상상이 들 만큼 “모든 게 완벽”한 곳이다. 거주 노인들은 “사회의 중심을 이끌면서도 긴 세월 동안 재력을 유지한 사람들”로 그들은 “주류에 속해 있는 동시에 이 나이 되도록 가진 걸 잃지 않고 꼿꼿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남들 눈에는 세상 편해 보일지 몰라도 뼈를 깎는 노력”을 하고 있다. 반면 유닛 F는 ‘더 이상 갈 곳 없는 노인들을 마지막으로 맡아주는’ 곳으로 노인들은 숙식을 제공받기 위해 ’노동력을 제공‘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이들이 하는 일조차도 기계로 대체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결국 세상에서 가장 싼 건 사람”이기도 하다.

  유닛 B ‘선샤인 마운틴’의 거주 노인들을 상담할 때 나이가 들어 습진 때문에 손끝이 자꾸 갈라지는 것이 불편함이라고 얘기한다. ‘나’는 “삶의 끝자락에 다다라 마음에 품은 고민이 손끝의 습진 정도라면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생각한다. 유닛 C ‘뉴시티 필드’에선 꿈을 꾸기도 하며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제자리인 노인, ‘선 넘지 않고 함부로 꿈꾸지 않은’ 채 살아온 노인, ‘자기연민’ 가득한 삶을 보며 “어제의 행복이 비참함과 불행으로 전환되는 오늘이 진저리나게 서글프다”고 느낀다. 유닛 F의 전단계인 유닛 D ‘아리아드네 정원’의 노인들은 “대체로 조용하고 경직된 인상을 풍겼”는데 벌점을 받으면 퇴출되는 유니시엘 시스템에서 아무도 유닛 F에 가길 원하지 않으므로 벌어진 풍경이다. ’나‘는 “강한 법규 아래에서 인간이 얼마나 고분고분해질 수 있는지를 확인”하며 씁쓸함을 느낀다.

  각 유닛을 거칠 때마다 ‘나’는 거주 노인과 상담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또한 그때마다 엘리야와 자신의 ‘노인’에 대한 시선과 삶에 대한 생각을 기록한다. 요양병원 간호사인 엘리야는 ‘노인 세대’에 대한 반감과 혐오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사회의 변화를 위해 유닛을 철폐하고 청년을 위한 복지를 늘려야 한다는 ‘급진파’에 속한 엘리야는 ‘나’에게 집회에 참가할 것을 권유한다. 노인들은 소비도 생산도 하지 않아 “뭔가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 전반을 삐거덕거리게 하고 느리게 만드는 존재들”, “사회와 경제가 굴러가는 데 하등 보탬이 되지 않는. 그냥 시스템의 얼룩 같은” 존재라고. 그렇기에 “적어도 새로운 소비 주체, 미래의 납세 주체를 만들어 낸, 최소한 젊었을 때 아이라도 한 명 낳은 사람이 더 당당”한 거라며 ”평생 자기의 개인적인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개, 고양이만 키우다 늙어버린 사람의 노후“를 지탱해줘야 하는 것에 불만을 갖는다. ‘나’는 ”차별이란 단어를 무기로 써서 속을 거리낌없이 표현할 수 있는“ 이민자 엘리야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노인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있다“고, ”나이가 들어서까지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젊은이들의 막대한 세금을 빨아먹고 있다“고 생각하며 방관자에서 벗어나 집회에 참여한다.

  더불어 여러 유닛을 거치면서 ’나‘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죽음만큼은 모두에게 공평한 것일지 모르나 “죽음의 형태는 그 사람의 계급을 드러낸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유니시엘에서 그것을 명확히 확인하게 된다. 존엄한 죽음에 이르는 방법 또한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선전하지만 사실은 재력이 넘치는 유닛 A나 B의 시니어들에게만 제공되는 서비스”였으니까. “자유는 팍팍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고 했는데 재력이 없는 유닛 F의 이름은 ’프리 하우스‘이다. 무엇이 프리한 걸까.

  이 소설은 ’나‘를 비롯한 청년세대, 젊은이가 고령화시대에 느끼는 늙은이, 노인세대에 대한 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소설에서 ‘나’가 바라는 것이 한가지 있다. 시카모어 섬을 만든 카밀리아 레드너가 ‘나’가 아는 ‘민아 이모’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녀를 다시 만나고픈 순수한 열망, 그리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금수저’이고픈, ‘권(재)력에 연을 만들고픈’ 염원으로 생각될 수 있다. 이것이 혐오와 자기연민과 더불어 청년들의 꿈꾸는 세계인가. 소설에선 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진 않는데 청년세대의 언어는 지극히 공격적이고 극단적이다. 엘리야를 비롯해 유카시엘 고액 연봉자 선택사 담당 의사 재희, 남북 개방 후 북에서 내려온 브로커 수현까지 정형화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청년과 노인에 대한 갈등과 대비를 너무 작위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요즈음 현실이 그렇긴 하다. 극단적인 혐오의 표현을 더 쓰지 못해 안달이지 않은가.

  이러한 현실에서 보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유카시엘 유닛을 거치면서 어떤 인식을 가지게 되었는가. ‘나’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사회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그것이 이 소설의 핵심적인 화두일 것이다. 그에 대한 답은 시카모어 섬의 면접장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소설은 ‘나’의 일기를 통해서 이 모든 사회의 모습과 ‘나’의 생각과 행동 ‘내면’을 속속들이 기록한다. “지금보다 상황이 나아져 있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일기를 끄적”인 ’나‘는 ’사카모어 섬‘에 갈 수 있는가. ’민아 이모‘는 만났는가. ’민아 이모‘는 사카모어 섬의 창시자가 맞는가. 설렘을 주었던 의사 재희와는 어떻게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 ’나‘가 선택한 결정에 만족하는가. 유토피아가 만들어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시카모어 섬”이 유토피아인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좀더 고급버전의 유카시엘 아닌가 싶은데, 가보지 않아서 뭐라 말할 수는 없다. 유카시엘 유닛별로 나타나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삶과 죽음의 형태에 대해 생각해본다. 한편으론 ’나‘가 유닛 A에서 유닛 F의 노인들을 만나는 과정이 아니라 유닛 F에서 유닛 A의 노인들을 만나는 과정이었다면 ’나‘, ’유나라‘의 인식은 어떠한 형태가 되었을지 궁금해진다.

 

 

손원평, 노인, 청년, 세대, 갈등, 혐오, 차별, 젊음, 늙음, 고령화, 일기, 기록, 죽음, 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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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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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야, ‘인간’이란 그런단다


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한겨레출판, 2026-04-04.

 


  요즘 아니 그보다는 좀 더, 쪼~금 더 된 어느 때부터 “나쁜 무리”가 많음을 느낀다. 그들은 매일매일 매시간, 이렇게 확인하고 외치고 있는 건 아닐까. “이제부터 우리는 한패야”

이러한 ‘나쁜 무리’들이 내 삶을 망가뜨리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나쁜 무리’들의 움직임은 언제나 유치하게 기민하다. ‘나의 무리’가 아닌 ‘너의 무리’, 나는 ‘너’를 알지만 나는 그들과 ‘한패’가 되지 않으려 한다.

  “정말이지, 서로가 서로에게 길이 들었군요.” _「작은 벌」

  아, 생텍쥐페리 「어린왕자」속 ‘길들이다’는 단어가 이토록 불온하게 들리는 상황이라니. 여우야, ‘인간’이란 그런단다.

 

 《너의 나쁜 무리》는 일곱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읽었을 땐 불온하게 봤다. 뭐 이렇게 하나같이 나빠. ‘뭐지!’ 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나서는 그 감정이 많이 소멸되어 ‘뭐지?’.

〈작은 벌〉은 탈주극이다. 죽음을 앞둔 환자와 보호자가 사설 구급차 운전원 ‘이중일’에게서 구급차를 빼앗는 상황을 보여준다. 어떡하든 이중일을 속이고 구슬려 구급차를 탈취하려는 이들과 어리버리하게 휩쓸리는 이중일의 모습엔 살고자 하는 자와 살기 싫은 자의 대비가 뚜렷하다. 구급대원으로 타인의 삶, “환자들의 삶에 관여하는 것이 죽도록 싫었던” 이중일은 그럼으로써 ‘평화’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제 그에게는 ‘평화’가 올까? 그렇다면 제목은 왜, 「작은 벌」일까.

 

그들은 결코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이중일은 속으로 그 문장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거짓말같이 그들은 선한 사람들이며 자신에게 결코 해를 끼치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추운 뺨에 더운 손」은 관계 ‘맺음’이 아니라 이미 관계인 사이의 ‘끊을 수 없음’에 대한 이야기다. 추운 뺨에 더운 손은 한 명의 상태일까, 두 명의 상태일까. 추운 뻠에 갖다대는 더운 손이 타인의 것이라면, 일단 두 사람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만은 않은 듯하다. 그것이 허용되는 관계인 것이니, 이미 이뤄진 관계에서 그 상황을 호의, 선의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아니면 거부하고 싶은가가 중요하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함께 볼 수 있는 게 마임이야. 내가 그것을 보고 있다는 믿음을 통해서.

 

  ‘선의’를 쉬이 파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얼마나 쉬울까. 하지만 ‘선이’에게 ‘선의’를 파악하는 건 쉽지 않다. 이미, 선의로 해석될 수 없기에.

  ‘선이’의 엄마는 다른 사람의 돈과 물건을 훔친다. 이런 엄마라서 부끄러운 ‘선이’는 엄마와 분리되고 싶다. 그러나 ‘엄마’라는 이 관계가 완전히 타인이 될 수 있는 존재일 수 없다. 더구나 어린 ‘선이’에게는 더욱. 그렇기에 선이는 “나로 살고 싶고”, 나로 살고 있는 이들을 미워한다. 엄마에게 짓눌린 어린 ‘선이’가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방법은 있는가. 이해는 해야 하는 건가. ‘선이’에게 새로운 시각을 던져주는 인물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 친구 ‘기문’이다. 선이는 ‘기문’이 그 옛날 자신의 엄마가 훔쳤을 ‘기문’엄마의 금두꺼비를 달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건 그들의 관계도 더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불안을 주는 부분이기도 하니까. 여기에 ‘기문’은 ‘마임’ 이야기를 한다. ‘기문’의 마임 철학을 통해 ‘선이’는 ‘선의’를 볼 수 있을까.

표제작과 같은 「너의 나쁜 무리」속 이 ‘무리’들을 뭐라 불러야 좋을까. “쉽게 오염되거나 잃어버리기 쉬운 물건은 아예 들이지조차 말라”고 했던 여사, “여사와 우리가 되기 위해 애썼던” 유선. 버림받는 것에 두려움을 갖는 둘은 동일한 사람에게 버려진 사이다. ‘여사처럼 살 거다’라 외치지만 ‘너도 떠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여사를 위해 기꺼이 버림을 선택한 유선이다. 정말 진심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인 건가. 「너의 나쁜 무리」속 전개는 점점 점입가경이 되는데, 궁금해진다. 이들의 행동이 ‘연대’라 할 수 있나. ‘유대’라 할 수 있나. 어떤 의미로 서로의 비밀을 움켜쥔 사이에서 무척 강한 연대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부정적일수록 접착력을 더 강화하며 쉬이 물드는. 나쁘지 않은 것, 맞나?

 

나는 여사처럼 살 거다. 아주 많은 사람에게 마음 주고 몸 주고 절절매며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갈 테다. 그러다 진심으로 그런 생각도 했다. 나쁘지 않은데……?


 「아무 사이」. 아무 사이는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사이를 말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사이를 말하는 걸까.

  시터 일을 하는 ‘희지’는 이 일에 의미를 둔다. 이전일을 하면서 쌓인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변화된 것이다. 그러니까 할머니들을 돌보며 이들에게 자신이 필요한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희지’는 성심성의껏 노인들을 돌보고 애정을 쏟는다. 그런데, “아무 사이”라니. 여기 “아무 사이”는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 전혀 관계맺음이 필요없는 사이, 이미 맺어진 그 어떤 관계에도 불구하고 ‘엮이고 싶지 않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니까, ‘희지’를 이른바 ‘고용’하고 있다 여기는 보호자가 ‘희지’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심지어 희지의 돌봄을 받는 노인조차도 마찬가지다.

 

“저는 최선을 다했는데요.”

“희지 씨, 그러지 말아요.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요.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정말로. 그래서 괜찮은 거예요.”

 

 「작은 벌」에서는 최소한의 관계맺음도 없기를 바라는 건조한 사이에 끈끈이가 뿌려져 뭉침이 이루어졌는데, 「아무 사이」에선 최선을 다한 ‘애정’을 주었음에도 끈끈이가 붙지 않을 수 있음을 보는 듯하다.

 「너의 나쁜 무리」속 ‘여사’님의 말마따나 “딱히 중요하지도 않은 주제에 사람 마음을 초조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이 각각의 소설에 있다. ‘징글징글한’ 관계다. 이 징글징글함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항상 반경 안에 있게 되고 “너무도 쉽게 흔들리고 마는 꼴”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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