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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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허블, 2019-06-24.


  오로지 비현실적인 상황 자체로만 ‘이것은 SF소설이오’라고 내미는 소설이 있다. SF라는 소재를 반감시키며 대체로 경직된 분위기, 옅은 과학적 상상력, 매력적이지 않은 문체로 인해 오랜 여운을 주는 SF소설을 찾기란 어려웠다. 그래서 잘 읽어지지 않고 찾게 되지 않는다. 열광하는 외국 작가 몇몇에 의지하게 되는 이유다. 이들의 소설이 소재와 생각의 무한함을 보여주며 얼마나 우아하고 매력적으로 이야기를 펼쳐놓는지 말이다.

  과학도였다는 작가의 이 소설집은 그동안 읽어본 한국 작가의 SF 소설과는 다른 느낌이다. 과학이라는 표피만을 훑어서 이야기를 쏟아놓지 않았다. 익숙한 주제들을 푹 고아서 독자들에게 먹기 좋게 내밀어 준 듯 느껴졌다. 다소 테드 창의 소설을 보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래서 좀더 편안하게 읽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인상적이고 좋았다.

  소설 주인공으로 할머니가 제법 등장한다. 우주는 항상 아득한 느낌인데 할머니라는 단어 또한 그런 느낌을 준다. 아득함과 아득함이 만나 소설은 친숙하기도 하고 낯선 감정과 조금은 서글픈 감정에 빠지게 한다. 이런 감정은 잘 팔릴까.

  「감정의 물성」은 다양한 감정을 물성처럼 만들어 판매하는 회사와 이를 소비하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기쁨이나 즐거움만이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들도 잘 팔린다. 왜?


“부정적 감정 라인은 판매되는 물량에 비해 실 사용량이 적대요. 다들 쓰지 않아도 그냥 그 감정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언제든 손안에 있는, 통제할 수 있는 감정 같은 거죠.”  -「감정의 물성」


  눈물 흘리는 누군가를 위로할 때 “울지 마”가 아니라 “그래, 실컷 울어”라고 말할 때의 기분을 생각했다. 실제로 이렇게 통제만 적절히 이뤄진다면 온갖 부정적 감정들을 물성화해 생산해 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현대 사회가 다채로운 감정을 펼칠 기회를 주지 않고 특정한 감정만을 발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 말이다. 감정적 동물이어서는 안되겠지만 감정이란 필요한 것이니까.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는 유전자 선택으로 장애도 없고 혐오와 차별도 없는 그리고 사랑도 없는 유토피아 같은 행성을 그린다. 그리고 여전히 혐오와 차별과 장애가 있는 그런 지구가 있다. 지구로 순례 여행을 떠난 이들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마치 「감정의 물성」에서 우울체를 손에 쥐고 있으려는 구매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떠올려진다. 하지만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이미 없는 것이 가득한 그 세계보다 단 하나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 어쩌면 늘 정답으로 정해진 그 하나의 이유, 그것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당장 내일도 미래이지만 과학기술이 좀더 발전된 어느 미래라고 해서 인간의 삶이 특별히 달라져 보이지는 않는다. 삶은 기술발전에 따른 편의와 편리를 경험한다 해도 감정의 스펙트럼은 특별히 달라질리 없으니까. 여전히 희로애락이란 삶을 지배하는 절대적 요인이 된다. 여전히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는” 기술적 한계와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가득한 세상이다. 달라진 듯 달라지지 않은 풍경 속에서 그럼에도 의지하고 기대고 위로받는 것은 역시 인간이라는 사실. 그래서 「스펙트럼」속의 루이는 할머니에게, 인간에게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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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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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만들어진다


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 문학동네, 2018.


  여성에게 소설쓰기와 아이 기르기는 어떤 의미일까. 구병모 작가의 여덟 단편을 읽고 난 첫 질문은 이것이었다.

   「지속되는 호의」와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를 보며 끝날 줄 모르는 짜증과 답답함이 있었다. 그 감각이 여전히 뒷목을 서늘하게 한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산골로 거주지를 옮긴 정주에게 모든 것을 간섭하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 다른 아이들을 보살피는 과정에서 점점 노골적으로 무례함을 보이는 아이들의 태도, 그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 지 모르는 불안과 공포가 잊히지 않는다. 공동육아, 육아에 대한 사회서비스가 증가하고 체계를 갖춘다 해도 ‘내 아이’에 관한 한 관대하고 편협하게 행동하는 부모의 존재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움직여야 하지만 합의된 방식이란 여전히 모성신화를 기반으로 하는 건 아닌가.

  엄마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모성신화는 실존을 뛰어넘는다. 그보다 우선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기에 모성신화만큼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인 프레임이 있을까. 환상적 신화에 맞추어 현실이 창조된다. 그래서 엄마는 있지만 나의 엄마는 없는 듯이 생각되기도 한다. 모든 것에 우선해 ‘나’라는 존재의 확립이 중요할 거라는 건 완벽하게 짜여진 신화 앞에 기꺼이 무너진다. 그래서 여성 자신의 자아 찾기에 관한 담론이 늘어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현실을 벗어난 가상의 세계 속에서 새로운 신화를 찾아보고자 만들어보고자 하는 것인지도.

  소설집을 읽으며 거듭 나의 언어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현실 세계이든 가상 세계이든 상황을 인식하며 나라는 정체성을 명확히 하며 살기 위해선 어떤 ‘말’이 필요한지, 어떤 ‘말’에 휘둘리지 않아야 하는지 그런 생각들. 글이란 글쓰기란 존재를 자각하는 행위라고 생각할 언어 자체가 한계를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할 것이다. 「오토포이에시스」는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주체는 AI 소설 기계이지만. 그 이름이 ‘백지’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그는 날마다 수많은 한 문장을 쓰고 버렸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였다. 꿈은 이 세계 바깥의 현실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거나 모든 것을 기억하라. 미로에서 빠져나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솟아오르는 것이다. 모든 것을 관조하라. 우아함은 정열의 독이다. 이 같은 문장들 사이사이에는 아무런 서사적 인과관계가 없었으나, 한 문장 한 문장은 저마다 자꾸만 무언가 의미를 담아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백지가 그토록 버리려고 했던 의미를.   ―「오토포이에시스」


  미래를 상상하는 건 무궁무진하지만 어느 상상력이든 현실과 유리되지 않은 삶의 연장선이다. 새로운 세계에도 그 세계를 지칭하는 신화와 말은 존재한다. 그곳에서 또한 나는 규정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이야기의 주제를 압축하는, 나아가 그 모든 이야기와 무관한 궁극의 문장”. 본질적인 나를 규정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규정된, 원치 않는 신화를 깰 언어가 문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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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주
김소윤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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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주가 없다


난주, 김소윤, 2018.


죄인 정난주는 더럽고 탐욕스러운 사학에 심취하여 임금께 씻을 수 없는 불충을 범하였고 제사를 폐하는 무부무군한 패륜을 저질렀다…… 죽은 자의 나라가 되살아난다는 요언을 일삼고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혔으며…… 나라를 파는 데 앞장선 대역죄인 황사영의 처로 백성을 현혹한 죄가 죽어 마땅하나……


  지구 탄생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이니 그만큼 수많은 사람들의 탄생과 죽음이 있었다. 구전과 문자로 전해지고 기록된 사람이 있는 반면 존재함조차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이 이 세상에 머물렀다. 이렇게 존재했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건 아련함으로 인해 흥미를 끈다. 시대와 상황, 생각하는 바가 다른 어떤 사람의 생애가 회자된다는 건 현재에 우리들에게 어떤 종류이든 울림을 주기 때문일 텐데, 난주란 인물은 어떨까.

  으레 사람을 소개할 땐 누군가와의 관계성을 앞세우긴 하지만 난주를 소개할 때에도 이렇게 시작한다. 정약용의 조카. 정약현의 딸. 정약용과 그 집안이 가지는 영향력이 있기에 정난주가 정약용 집안이라는 점에서 예상되는 바가 있다. 지식인, 강인함, 종교적 신념, 더불어 박해, 탄압 그런 것.

  황사영은 신유박해로 천주교가 처형되고 탄압을 받자 그 실태를 명주천에 적어 북경에 있는 프랑스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된다. 포교의 자유를 위해 프랑스 함대를 보내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이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천주교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고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는 제주도 관비가 된다. 이러한 정난주의 삶을 그려낸 소설이다.

  정난주의 삶은 주어진 환경의 영향과 개인의 심성과 신념에 기인한다. 당시의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에도 천주교에서 구원와 삶의 가르침을 얻고자 한 정난주는 살아가는 내내 종교적 신념을 굳건히 하고 그에 따른 삶을 살아나간다. 흐트러짐 없이 강인하며 품격을 잃지 않는 정난주의 태도는 많은 이들에게 공경과 공격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정난주의 삶의 태도가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고 그 태도가 종교적 신념에 따르는 삶이라고 했을 때 소설에선 종교적인 색채가 그렇게 눈에 띄게 느껴지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핍박받은 천주교인이라는 점과 그 이미지만을 안고 있다. 어쩌면 천주교만이 가진 색채와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 아니라서일 수 있겠다. 그저 매우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수준에서 종교적인 뉘앙스를 다루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살아온 방식보다 살아갈 방식이 더 힘겨운 상황에서 정난주가 지켜가는 삶의 자세는 매우 인상적이다.

  정난주는 매우 격정적인 상황을 자주 맞닥뜨리지만은 가장 격정적인 장면은 아들에 대한 것이다. 난주는 제주도로 유배가는 길목에서 어린 아들을 ‘버린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 부모들이 아이를 입양 보낸 것이 생각나는데 신분제 사회에서 노비로 살아갈 아들의 미래를 염려하며 아들 경헌을 추자도 갈대밭에 내려두고 떠난다. 다행히 경헌은 마을에 살던 노인의 손에 길러졌다. 평생을 그리움과 죄책감 가득 살아가는 정난주의 마음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이후 정난주는 제주에서 다른 아이들을 제 자식처럼 거두고 보살피며 살아간다. 아들과 함께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장면만큼이나 인상적인 장면은 마을에 전염병이 돌 때이다. 아마도 이 시점에서 <난주>를 떠올리게 된 건 이 부분 때문이다.

  마을에 전염병이 돈다. 그 시작이 난주의 양딸 보말로부터 시작된다. 세상 가장 무서운 전염병, 마마님의 급속한 확산에 전염병 치료를 맡게 되는 정난주는 실로 성심성의껏 치료에 힘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니 어떤 차별도 없이 병의 위중을 보아가며 치료에 힘썼고 최선을 다했지만 병의 시작이 양딸로부터 시작되었으니 그에 대한 책임감 또한 막중했으리라. 어떤 경우이든, 어떤 종교이든 인간에 대한 존엄과 사랑이 핵심이고 본질이 아닐까. 그런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려고 포교 활동을 하는 게 아닌가? 말로 떠드는 게 아니라 그런 삶의 태도를 실천하며 자신이 믿는 종교의 뜻을 보여주는 거 아닌가?

  가짜뉴스가 나돌고는 있다고 하지만 감추고, 무질서하며, 보편적인 예의를 갖추지 않은 종교인들의 태도가 종교 자체에 대한 믿음을 줄 수 있을까. 소설 <난주>는 집단의 힘이 세상에 내놓은 영향이 아니라 오로지 한 개인의 성정으로 만들어간 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종교적 힘이 <난주>의 삶을 이끌었을까 했던 생각은 종교의 힘이 아니라 개인의 힘이라는 생각을 더하게 한다. 그리하여 지금 ‘난주’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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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18 - 모르는 영역
권여선 외 지음 / 생각정거장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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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힘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18-모르는 영역 


  비록 난 대상 수장작가 자선작 <전갱이의 맛>에 더 매료되지만 <모르는 영역>을 읽고 나면 왜 이 작품이 이효석 문학상 대상작인지 느껴진다. <메밀꽃 필무렵>이 바로 떠올려진다. 봉평 장날 풍경은 떠들썩한 식당 안 풍경으로, 메밀꽃 핀 달밤은 어둠 가득한 저수지와 차오르는 달의 이미지로, 부자관계일지 모를 허생원과 동이의 대화는 소원한 부녀관계인 명덕과 다영의 대화와 닮은 듯 여겨진다. 내용은 다르지만 전체적인 인상에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여운이랄까, 여백이랄까 그런 이야기 분위기가 닮았다.

  가족관계에서 시간이 지나면 더욱 어색해지는 관계, 부녀관계가 아닐까. 언제부턴가 아버지의 ‘딸바보’가 대세처럼 자리하고 있지만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된 딸과 아버지의 관계는, 더구나 어머니가 부재한 부녀관계는 소설 속 부녀관계처럼 소원할 것이다. <모르는 영역>은 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가족이란 가깝지만 먼 그런 관계다. 그 관계의 익숙함을 경험하고 느끼고 있는 모습을 “모르는 영역”이라는 단어로 “해 입장에서 밤에 뜨는 달은 영영 모르는 거지”라는 문장 속으로 잘 그려내었다.

  <전갱이의 맛>은 권여선 작가의 단편이다. 첫 낚시 경험은 양식장 사이의 바닷가에서 장난감 같은 낚시줄로 우럭을 몰아쳐 잡은 거였다. 함께 장난감 낚시를 하던 이는 전갱이만 잡힌다고 울상이어서 전갱이가 맛이 덜한 물고기인줄 알았다. 그날 밤 잠결에도 우럭을 건져 올릴 때의 짜릿함이 손가락 끝에 머물렀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우럭 잡기가 쉽지 않다는 말에 의아해하면서도 우럭만을 건져 올린 것에 심취해 있었던 것인지 바닷가에 돌아와서 내내 천원짜리 줄낚시에 대한 경험을 늘어놓던 때가 생각난다. 어쩜 우럭잡기에 대한 이야기는 더 우려먹을 지도.


그러니까 사람은, 사람이란 존재는……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혀로 맛보고, 그렇게 감각하는 자체만으로 도저히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더라고. 내가 지금 이걸 느낀다, 하는 걸 나에게 알려주지 못하면 못 견디는 거지. 어떤 식으로든 내 느낌과 생각을 내게 전달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감각이나 사고 자체도 그 자리에서 질식해버리고 마는 것 같았어.


  남자는 성대낭종 수술을 받고 회복과정 동안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그 시간 동안 남자는 말에 대해 생각한다. ‘말’이라는 게 타인과의 관계에서 필요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와의 대화라고. 그런 생각을 하게끔 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말을 들려주기 위해 표현하려는 과정들이 마음에 와 닿았다. 새삼 말이, 언어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내 낚시 바늘을 비껴간 전갱이의 맛은 여전히 모른다. 그럼에도 이혼한 전남편과 우연히 만난다면 전갱이보다는 우럭을 먹을 것 같지만 식당이고 시장이고 널린 것은 우럭이기도 했다. 소설 제목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내게 없는 감각이었다. 나는 전갱이 맛을 모른다. 그 결여된 감각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그 무엇, 그 이야깃거리.


나의 말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기억되거나 발견되는 거야. 내가 어떤 언어를 간절히 원했던 순간을 기억하거나, 그 간절함이 생겨나는 그 순간을 발견해서 내 말로 삼는 거지. 그러니까 내 말들은 어원을 잃는 법이 없어. 최초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그 위에 다른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말 속에 삶이 깃드는 방식이라고나 할까. 때로는 뜻을 알 수 없는, 그저 표현으로 먼저 생겨난 말도 있고, 가끔 아주 외설적인 말도 뛰어나와.


  전갱이의 맛을 읽고 조금 벅찬 감정이었는데 언어가 가지는 힘에 대한 경외감이라고 할까. 타인과의 대화를 몇날 며칠 하지 않는다고 질식하지 않으리라 자신하지만 끊임없이 생각이란 걸 하고 있다는 건, 남자가 말한 것처럼 자신과의 대화를 놓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그 수단인 말. 내가 말을 하는 방식, 내가 말을 생각하는 방식, 그런 것들이 내 삶을 채워간다는 생각에 나는 좀더 말에 대해 겸허하겠다 생각하는 동시에 보다 많은 말을 건져 올려야겠다 싶다. 내가 기억하고 발견하는 만큼 나의 ‘말’이 내 언어의 ‘어원’이 많아질 것이므로. 작가는 원고를 마치고 나면 술을 마신다고 했는데 이런 감각을 얻으려면 소주에 전갱이를 먹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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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수상작
박솔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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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움이라 할 수 있을까


을, 박솔뫼, 자음과모음(이룸), 2010.


  ‘을’이란 제목을 보자마자 갑을병정 사회에서 살아가기에 그 ‘을’이라 생각했다. 을이 있으려면 갑이 있어야 하고 그런 이야기일거라는 예상은 빗나갔고 시공간이 어딘지 짐작할 수 없을 소설을 만난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을이란 걸 알았음에도 책을 덮고 나서 뿌연 안개를 걷어내지 못한 채 생각했다. 이건 갑을의 그 을이 맞노라고.

  어쩌면 이렇게 기억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 ‘을’이라는 소설은 세 사람에 관한 소설이고, 그런데 그들은 연인도 친구도 아니고 정확히 어떤 사이인지 알 수 없었다고. 외딴 호텔에 그들은 머물렀고 호텔은 어느 나라,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아무데나 갈 수 있잖아’라는 대사처럼 도대체 등장인물들의 마음이 행동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이 소설이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소통의 매개가 아니라 기호의 등가물이 되는 것들을 사랑’하는 을처럼 소설은 독자와 소통할 의사가 없는 것 같다. 익숙한 소설의 서사 방식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기호와 메시지같아 소설은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진다. 작가의 의도를, 이야기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언제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며 글을 읽었던가. 그래서 등장인물의 이름 ‘을’이 아니라 갑을관계의 ‘을’이란 기호로 읽어버린다.

  소설 속 인물의 이야기보다 ‘을’이 본 영화 얘기가 더욱 흥미롭다. 하긴 그것이 그들의 관계를 암시하는 내용일 것이다. 호텔은 행복한 낙원은 분명 아니지만 막상 한방의 총성이 울린 호텔은 더욱 불온하게만 느껴진다.


을이 보았다는 영화는 세 사람에 관한 영화였다. 어떤 외딴 곳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연인도 아니었고 친구도 아니었다. 을은 그들이 정확히 어떤 사이인지 알 수 없었다. 을은 그들이 외딴 곳으로 몰린 사람들로 보였다. 그들이 어떤 사이인지 알 수 없었지만 ‘외딴 곳’이라는 장소가 그들에게 동지애 비슷한 것을 느끼게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사는 외딴 곳에 새로운 사람이 방문하게 되었다.


  장기 투숙자를 대상으로 한 호텔에 ‘을’이 머물고 있고 ‘민주’를 불러들였고, 또다른 투숙객 ‘프래니’와 ‘주이’가 있고 하우스 키퍼 ‘씨안’이 있다. 이렇게 세어 보면 다섯이 되지만 이야기는 늘 셋을 말한다. 처음부터 셋이 아니라 둘이었다가 더해진 셋의 이야기로서. 그래서인지 둘 사이에 더해진 셋은 관계를 흐리게 한다. 둘일 때에는 마치 명확해 보였던 관계가 셋으로 인해 다르게 보인다.


두 명이 있을 때는 다른 할 일이 없다는 듯 뒤엉켜 뒹굴기만 했으나 세 명이 되자 그들은 나라라도 세울 듯이 열심히 일했다. 머릿속으로는 인류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비장하며 가슴 떨리는 상상을 했다. 그렇게 비장하며 건설적이고 청교도처럼 부지런한 날들이 흘렀다. (…) 노동 후 피곤했던 그들은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런데 누군가가 살며시 일어나 어둠 속에서 칼을 들어 누군가를 찔렀다. 푹 하고 찌르는 소리와 끅 하는 비명이 짧게 순차적으로 들렸다. 또 다른 한 명은 가만히 일어나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칼을 들었던 이는 죽은 이의 시체를 질질질 끌고 나갔다. 모리세이는 계속 노래를 부른다. 방 안에는 다시 두 사람이다. 그들은 짙은 어둠 속에 앉아 있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엉겨 붙어 뒹굴었다.


  을과 민주, 프래니와 주이의 관계는 기존 사회질서에서 쉬이 용인되는 관계는 아니다. 그렇기에 사촌 자매인 프래니와 주이는 가족과 나라를 떠나왔다. 남성이 안정된 경제력을 가지고 여성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상황이 통상적인 사회에서 을과 민주는 그렇지 않다. 변화를 위해서 그들이 호텔로 온 것인지 아리송할 정도로 호텔 투숙객으로서 이들의 삶은 목적도 의지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자유로운 듯 위태로워 보이는 일상이기에 지켜보는 입장에선 불안하기만 하다. 서로 자신이 ‘을’인 것처럼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을질’인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관계는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인지 깨려고 하는 것인지조차 아리송하다. 그렇기에 어쩌면 셋의 존재가 중요할 것이다. 그들 서로의 관계를 명확히 해줄 세 번째의 존재, 그 세 번째 인물의 위치가.


이 세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고 있음이 보였다. 그것을 질투나 시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본능적인 긴장감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감정. 그들은 공을 던지듯이 긴장감을 던졌다. 던지는 사람은 늘 서툴렀고 받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렇게 쉼 없이 빠른 속도로 강력한 감정들을 주고받아냈다. 던지고 싶어서 던지는 것도, 받고 싶어서 받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긴장감 안에서 스스로를 지켜낼 수 없었던 것이다.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던지는 것이고, 어디선가 날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얼떨결에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다시…… 그러다 그렇게 주고받던 감정들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사람이 칼을 든 것이었다. 그가 들지 않았다면 누구라도 칼을 들었을 것이다.


  둘 사이에선 더 많이 이야기하는 자가 을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더 많이 지켜보고 그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렇게 알고 있음에도 더 알고 싶고 그러나 더 다가가지 못하는 어떤 관계들. 신인문학상을 받은 소설로 심사위원은 노마드적 사고, 자유로움이 소설에 가득하다고 이야기한다. 분명 끈적이지 않는 이야기다. 새로운 투숙객을 맞이하는 깔끔하게 정리된 침구류를 만진 듯한 느낌과 건조한 문체는 분명하지만 자유로움에 대한 갈망이 느껴지진 않았다. 씁쓸하고 쓸쓸하며 지극히 공허한 느낌이 가득한데 어쩌면 그건 타인과의 소통과 관계를 미적거리며 남긴 탓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쿨한 관계 정리가 아니라 쿨내 나 보이게 했을 뿐인 관계로 인한 미적거림. 그렇게 소통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 이유로,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머물렀다는 생각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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