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시스, 1904년 6월 16일의 랩 혹은 일기




이것은 랩이야!

 

  어디에서 뽑은 최고의 작품이라거나 꼭 읽어야 할 책이라며 책을 순위화한 목록을 보게 된다. 아주 오랫동안, 내가 본 목록들의 상위권에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있었다. 선입견이라는 것은, 행동의 방향을 바꾸는데 얼마나 탁월한지. 

  그러니까 오래도록 나는 타인이, 전문가가 꼭 읽어야 할 책이라는 목록을 살피면서도 이 율리시스를 잘 피해왔다.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율리시스, 오디세우스는 이미 내겐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었고 이야기였다. 굳이 이 이야기를 제임스 조이스의 시각으로 다시 읽을 필요까지야라며 스킵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강제적으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려서 책을 펼치고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했던 것들과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 까닭이다. 오랫동안 이 책을 등한시했던 시절이 안타까워지며 이 두꺼운 책을 얼른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해짐과 동시에 읽는다는 기쁨이 솟구쳤다. 그토록 사람들이 율리시스에 대해 많은 말을 하는 이유가 아마도 정복욕이지 않을까.

  율리시스를 읽다가, 특히 마지막 장을 읽으며 든 생각은 ‘이것은 랩이야’란 생각이었다. 사실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흘러가는 말들이 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생각의 흐름을 감히 말이 뒤따라 갈 수 없다. 

  오디세우스 10년의 이야기보다 율리시스 하루의 이야기가 이렇게 양적으로도 승리를 거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페넬로페 역시 남편을 기다리면서 무수한 내적 갈등을 했을 것이고 거듭 거듭 생각의 순환이 이어졌을 것이다. 몰리가 내뱉는 문장들을 보면서 마침표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블룸의 생각들을 다시 뒤적였다. 마침표가 있다. 이것은 엄청난 차이다. 읽어 가면서의 호흡도 달라진다. 조이스가 의도한 것이겠지. 무엇을 의도한 것일까. 블룸의 간결하면서도 딱딱 끊어진 호흡과 달리 몰리의 호흡은 쉴새가 없다. 여성의 생각도 수다스러움이려니 하는 걸까. 아무튼 몰리의 생각들은 랩처럼 음악이 따라붙는 느낌이었다.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기도 했고 내용의 놀라움도 상쇄시켜주는 듯 고조시켜 주는 듯한 문장들을 읽으며 현대판 랩으로 읽어 내려갔다.


율리시스는 오디세우스의 여행담이 아니다


   율리시스 이야기를 생각했던 내게 당연 첫 장부터 ‘이게 뭐지’란 당황스러움을 주었다. 하지만, 이것도 여행담이다. 머릿속을 항해하는 이야기. 하루 동안에도 아주 짧은 시간에도 인간은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하고 사는가. 참 재밌네, 재밌어란 생각들을 하면서 어딘가를 떠도는 것만큼 의식의 흐름 역시도 재미있는 유랑이란 생각을 했다.

   거창하게 들리는 의식의 흐름이란 문학용어가 사실은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우리가 하고 있는 생각이라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소설로서 재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조금의 소설기법이 가미되었겠지만. 그래서 오히려 나는 이 율리시스가 난해하고 낯설다기보다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음, 뭔가 익숙해, 익숙해.

   우리가 강제적으로 쓰라고 재촉받으며 제출해야 했던 어린 시절의 일기가 아니라 뭔가 가정의 격랑을 겪을 때 혹은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써내려간 일기가 이와 같지 않았을까. 이토록 기법적으로 쉬운 소설이 어디있을까.


율리시스는 외설인가 아닌가


   조이스의 연보에서 율리시스가 외설시비로 휘말렸다고 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는 ‘뭐?’. 그 다음 떠오른 이미지는 마광수의 책. 마광수의 책을 본 적은 없지만 도대체 무엇이 이 책을 저런 황당한 시비에 휘말리게 했을까란 궁금증이 인 것은 당연하다. 결론은, 글쎄 모르겠다. 어느 시대이건 꼬투리 잡는 인간과 집단은 있고 그것을 사명감으로 여기는 집단은 있으니.

   외설의 기준은 무엇인가. 당시의 재판 결과 최종적으로는 해금조치가 되었으니 이 책은 외설시비에서 최종 승자가 되긴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외설’에 더 각인되어 있을 듯하다. 오늘날처럼 포르노가 넘쳐나는 시대에서 본다면 이런 시비가 있다는 것이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1920년대 유럽도 역시, 실제 외설스러운 행동을 일삼는 것과 그것을 표현해 낸 작품들을 보는 것은 인식을 달리하는 모양이다.

 

일단, 율리시스는

 

   당대에 그토록 시달림을 안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이토록 격찬을 받으며 평가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책의 소개에, 작품 소개에 구구절절하게 나온 바에 의하면 <율리시스>가 가지는 가치는 혁신적인 소설기법이라고 한다. 이 소설이 나올 시점에 한창 주가를 홀리던 의식의 흐름 기법이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탁월한 언어미학이라고 한다. 언어미학의 관점에서는 번역을 보는 입장에서는 늘 아쉽다. 어떻게 언어유희가 활용되는지를 모국어를 느끼는 그 맛으로 알고 싶지만 늘 각주를 의지해야 하며 그마저도 쉽게 와 닿지를 않으니 안타깝다. 특히 언어유희를 즐기는 나로서는.

  어쨌든 이 두 가지가 <율리시스>를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위치지은 이유란다. 그 위치를 지은 것은 누구인지 모르겠다만. 아마도 그 시기를 지나 문학을 전공한다는 ‘전문가’에 의해서겠지. “나는 <율리시스>에 아주 많은 수수께끼를 숨겨 두었기에 앞으로 수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분주할 것이다.”라고 조이스가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말들도 있다 한다. <율리시스>로 문학박사를 받은 사람이 <율리시스>를 끝까지 읽은 사람보다 많다라는. 난해하고 어렵다고 하면서도 최고의 작품으로 올려놓는 것이 그러니 의아스럽기도 할밖에. 그토록 공격받은 제임스 조이스의 이 소설은 공격으로 인해 더욱 회자되어서일까.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도 한다. T. S. 엘리엇,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 등이 자기들의 작품을 쓸 때 이 책의 영향을 받았나나 어쨌다나.

  왜 ‘다름’은 늘 공격받아야 하는 것인지. 나의 이해하지 못함이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는 일들은 참 안타깝다. 어쨌든, <율리시스>보다 더 욕먹었던 작품이 <피네간의 경야>인데, 이 책도 지난 번부터 계속 읽어야지 하고 있던 책이다. 욕을 많이 먹은 작품이라니 또 불끈 이 책이 읽고 싶어진다.

   아무튼 말년에 눈 때문에도 딸 때문에도 힘들었던 제임스 조이스, 지금 후대에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만족스러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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