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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청춘의 초상 - 조국의 독립에 바친 뜨거운 젊음, 한 장의 사진이 증언하는 찬란한 그 순간
장호철 지음 / 북피움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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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하셨습니까!

 


독립운동가, 청춘의 초상

-조국의 독립에 바친 뜨거운 젊음, 한 장의 사진이 증언하는 찬란한 그 순간

 장호철, 북피움, 2025


  책 속 26명의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본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 실려 있던 인물이 몇 명이나 되나. 살아가면서 이 사람의 독립운동가라고 이름 들어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되나. 하지만, 이런 분도 있었어?를 더 남발함에 부끄럽고 또한 안타까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했겠지만, 기본적으로 독립운동가에 대해 얼마나 제한적으로 가르쳐왔으며 소극적으로 알렸던가, 이들을 외면하고 왔던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독립운동가의 삶은 조국의 독립에 바친 뜨거운 젊음, 한 장의 사진이 증언하는 찬란한 그 순간이라는 책의 부제처럼 뜨거웠다. 이들에게 조국은 무엇인가를, 국가란 국민에게 무엇이어야 하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몇 년의 상황들과 맞물려 더더욱.

  책은 돌아오지 못한독립운동가와 돌아온독립운동가로 나누어 이야기하고 있다. 독립운동가의 삶을 읽다가 보면 감정이 울컥해지며 숙연해짐을 느끼게 되는 지점이 있는데,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대부분, 10대와 20대라는 것이다. 청년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린 그들. 그들은 그 어린 나이에 조국의 독립을 외치고 실천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죽음은 일제에 의한 직접적인 처형이거나 굶주림으로 인한 것이라는 점이다. 최근 유튜브에서 AI로 복원한 독립 운동가의 식사하는 장면을 보았다. 왜 이러한 장면을 복원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내내 제대로 드시지 못한 그들이 편안하고 조금은 풍족한 한 끼를 드셨기를 바라는 마음, 뒤늦은 감사와 응원의 마음 아닐까.

  이러한 마음으로 숙연해지는 가운데, 어쩔 수 없이 분노하게 되는 지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일본에 대한 분노여야 하는데, 한 나라의 초대 대통령이란 놈에 대한 것이다. , 일본의 앞잡이이니 일본에 대한 분노와 같은 건가.

  독립 운동가 장인환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제의 제국주의를 옹하고 한국의 독립을 방해한 미국인 더럼 스티븐스를 저격한다. 당시 한인들의 모습을 보자.

 

의거 후에 두 사람이 재판에 넘겨지자 한인들은 성금을 모아 변호사를 선임했고 유학생이던 신흥우가 통역을 맡았다. 애당초 이승만에게 통역을 맡기고자 했으나 그는 샌프란시스코까지 왔다가 자신이 학생 신분이며 기독교도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하여 한인사회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 이쯤에서 내가 잘못 읽었나 하여 다시 한번 문장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둘도 없을 것 같은 이름, 이승만이 그 이승만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데, 그건 여성 직업 교육에 매진한 차미리사의 활동에서다. 여자로 태어났다고 섭섭이라고 불린 차미리사의 소개 내용은 이렇다.


그는 동포의 고통을 외면하고 천국에 가길 소원하는 내세 지향적 영혼 구원 신앙, 불의한 현실 사회에 대해 무관심한 초월주의적 신앙, 정교분리 뒤에 숨어 민족의 아픔을 외면하는 경건주의적 신앙 모두를 비판(한상권)”하면서 의혈 투쟁의 소신을 편 것이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의 재판 법정 통역을 기독교도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한 이승만이 해방정국에서 면담을 요청하자, 차미리사가 이를 단호히 거부한 데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저런 인간을 몇 번이나 대통령에 뽑아. 뽑아 버려야 할 인간을 전직 대통령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과하게 칭송하고 받드는 무리들이 있어 그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이 어떤 나라인가. 식사하셨습니까가 인사이고 안부인 나라. ‘밥 한번 먹자가 만날 약속의 표현인 나라인데.


2009년 정부가 발표한 교육 부분 친일반민족행위자 22명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근대 여성운동과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 불리었던 사학 설립자들이 많다. 서울여대를 세운 고황경, 인덕대학을 세운 박인덕, 상명대를 세운 배상명, 성신여대를 세운 이숙종, 추계예술대학고 중앙여중고를 세운 황신덕 등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김활란은 이화여대의 초대 총장의 신화로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보다 훨씬 큰 지배력을 지닌 인사로 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지금도 여전히, 이런 현상은 이어진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여전히 힘겨운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친일 세력은 그때 얻은 어마어마한 부를 바탕으로 더 많은 부를 챙기고자 여전히 친일에 목매고 있다. 독립된 지 오래되었는데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친일 문제는 오늘까지 이어져 나라를 흔든다.

 

  한편,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대부분의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동도 알 수 있었다. 여성 독립 운동가로 유관순 누나만 주로 이야기되었던 현실이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여전히 누나로 불리는 것은 그를 온전한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로 바라보는 걸 방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를 유관순 열사라 부를 때 그는 이준 열사와 같은 위상의 공적 영역에 존재하는 인물이 된다는 점을 되새길 만하다.

 

독립 유공자 가운데 여성의 비율이 3%가 채 되지 않는 현실은 옥바라지와 경제활동, 양육까지 병행하며 항일투쟁에 참여한 여성들의 희생이 재조명되어야 할 필요성을 웅변으로 증명한다. 그늘에 가려진 부인들의 뼈를 깎는 희생은 남편에 부수되는 내조가 아니라 동등한 투쟁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아쉽다. 내로라하는 독립운동가들의 투쟁과 헌신은 바로 그들 가족의 희생을 전제로 가능했기 때문이다.

 

  낯선 이름들이 뒤늦게라도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하였을 터인데, 기록에 없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많아 안타깝다. 그러나, 명백히 드러난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외면하고 폄하하는 무리들이 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이들의 투쟁과 희생으로 살아 있으면서 다시금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으려는 밥버러지들의 밥그릇을 걷어차 버리고 싶은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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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사이언스 클래식 4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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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에는 별이 있다


코스모스, 칼 세이건, 사이언스북스, 2004.


  지나치게 걱정이 앞섰던 걸까. 마치 물리학이나 고급 수학 교재처럼 생각했던 까닭에 코스모스를 들쳐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주를 이해하고자 하면 더 쉽고 가벼운 책으로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더 쉽고 가벼운 과학책을 보았던 건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과학책을 읽고자 하는 강력한 열망이 생겼다. 코로나 19 상황이 가져온 긍정적 요인이다. 이해하지 못할 신천지 종교관과 행동에 대한 반발심은 과학과 사실이란 단어에 더 집중하게 했다. 우주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거짓과 망상이 아니라 사실과 증거로 내 사고체계의 중심을 잡고 싶은 까닭인지 과학적 사실에 대한 강력한 욕구가 마침내 코스모스를 읽게 했다. 그리고 알았다. 코스모스는 너무도 쉬운 책이라는 걸. 수학적 기호와 물리학 공식이 가득한 ‘교재’가 아니었다.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음만 활짝 열면 되는 거였다. 그러면 아름다운 문장과 이야기들이 마음을 사로잡아 우주로 이끈다. 시작부터 이 책을 읽고자 했던 마음에 꼭 들어맞는 문장이 등장했다.


오늘날 우리는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강력하고 정교한 방법을 알고 있다. 그것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과학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낮추는 일이 된다거나 무엇인가의 권위에 도전‧반항하는 것이란 사고는 오래 전에도 있었지만 여전한 듯하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건 모두 ‘신의 뜻’이라 말하며 머리를 조아리면 되었다. 2,500년 전 이오니아에서 새로운 깨달음의 기운이 일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이 미신에 갇혀 세상을 보고 있을까. 많은 것들을 보고 들으며 현상을 발견하고 해석해 내면서 인간은 점차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에 부여된 체계적 질서를 알아가게 된다.


과학의 세계에서 새로운 생각이 인정을 받으려면 증거 제시라는 엄격한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벨리코프스키건의 가장 서글픈 면은 그 가설이 틀렸다거나 그가 이미 입증된 사실을 간과해서가 아니라, 자칭 과학자라는 몇몇 이들이 벨리코프스키의 작업을 억압하려 했던 데에 있다. 과학은 자유로운 탐구 정신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했으며 자유로운 탐구가 곧 과학의 목적이다. 어떤 가설이든 그것이 아무리 이상하더라도 그 가설이 지니는 장점을 잘 따져봐 주어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생각을 억압하는 일은 종교나 정치에서는 흔히 있을지 모르겠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이 취할 태도는 결코 아니다.


  칼 세이건은 우주 탄생과 생명의 진화, 별과 행성, 항성에 관해 관찰과 탐험의 사례를 유려한 언어로 이야기해준다. 칼 세이건은 금성은 높은 압력과 맹렬한 더위, 맹독성 기체 등으로 지옥 낙원보다는 지옥에 가까운 현장이라고 이야기한다. 화성―지금도 여전히 많은 과학자들이 탐험하며 알고자 하는―엔 생명체가 존재하는가,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인가를 설명하며 보다 본질적인 것을 지적한다. 화성에 생명이 있다면 그대로 놔둬야 한다고. 그건 지구조차도 잘못 사용한 인간이 화성에 생명이 있을 시 화성을 어떻게 만들어갈 지에 대한 우려를 표한 것인데 실제 화성에 대한 탐사를 수식하는 단어가 ‘정복’이라는 점에서 이 점에 동의한다. 어떤 문명이 한 문명에 우위를 점하고 그에 대하여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칼 세이건은 단순히 과학적 사실과 현상만을 나열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인간이 우주를 알고 이해하려는 이유를 끝없이 주지시킨다.

  칼 세이건의 언어로 우주의 이야기로 읽는 과정은 여행기를 읽는 것처럼 흥미롭다. 인간이 별과 달과 행성에 가 닿기 위한 끝없는 도전 과정, 우주의 모든 별과 행성의 흔적은 학창 시절 교과서를 통해 배웠던 단편적 이해를 뛰어넘어 아름답게 보이고 가슴 벅찬 느낌을 준다.

  꽃 중에 코스모스를 좋아했는데 왜 코스모스인지 궁금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코스모스 사진을 보고서야 알았다. 코스모스는 가운데 통과 같이 생긴 꽃인 통상화와 꽃잎으로 알고 있는 설상화 두 가지 종류의 꽃이 합쳐진 꽃이라 한다. 이런 꽃을 두상화라고 한다는데 코스모스의 통상화를 잘 들여다보면 각각의 별모양을 한 꽃들이 한덩어리로 무리지어 있다. 코스모스 속의 코스모스. 아, 우주의 질서는 더할 나위 없이 신비롭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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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발자국 - 생각의 모험으로 지성의 숲으로 지도 밖의 세계로 이끄는 열두 번의 강의
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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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발견

열두 발자국, 정재승, 2018.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호기심 못지않게 놀라운 재능 하나가 또 있습니다. 바로 ‘강한 호기심을 잠시 느꼈으나 이내 그것을 억누르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을 살아가는 놀라운 억제력’ 말입니다.


  내 인생의 첫 발자국이 어땠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왼발이었는지, 오른발이었는지, 보폭은 얼마큼이었는지, 그곳이 어디였는지 모른다. 달에 남긴 닐 암스트롱의 발자국보다 환호했을 부모님은 기록대신 기억을 선택했고 그 기억은 이제 흐릿해졌다. 내가 기억해야 할 내 삶의 몇몇 발자국도 흐릿하다. 절절했고 중요했던 그 순간마다 나는 어떻게 판단하고 결정짓고 발자국을 옮겼는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이젠 어떤 선택을 하려는 시도를 하려는 일이 드물고 선택의 순간을 회피하려는 때가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서두의 이 문장이 얼마나 강하게 와 닿았는지 모른다. 그 놀라운 억제력을 여전히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 변화가 없는 건가?!

  삶에서 특별히 기억나는 발자국의 순간은 망설임과 맞닿아 있다. 종종거리던 그 순간들은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때였고 그건 엄청난 에너지를 요하기도 했다. 어떤 결정을 위해 창의력을 발휘한 적 있었던가, 그런 여력이 있었는지, 그런 후에 벌어지는 결과를 후회없이 실망없이 수긍하였던가. 이 디테일을 기억해내지 않아도 선택하는 그 순간의 기본 작용을 이해한다면 난, 언제나 같은 패턴으로 움직였으리라. 이 책을 읽었다면 다르게 사고하고 행동했을까.

  이 책은 인간의 의사결정에 관한 뇌과학적 작용에 관해 이야기 한다. 창의적인 사람들의 뇌, 의사결정을 주저하고 미루는 이유, 요즘 상황에 딱 들어맞는 의문인 “왜 우리는 미신에 빠져드는가?”와 같은 질문을 통해서 유의미한 대안을 생각하게끔 한다. 우리가 얼마나 획일적인 패턴에 갇혀서 사고하고 있는가를 말이다. 그리고 그런 작용이 뇌가 기민하고 체계적으로 작동하기보다는 오류에 쉽게 빠지며 착각을 일으키는지도 말이다.

  인간행동에 작용하는 것이 지식과 감정의 콜라보라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저자를 통해 듣는 ‘뇌’의 작용은 흥미롭다. 익숙한 사례들이 펼쳐질 때마다 공통의 ‘문제’를 안고 있는 인간에게 친근함을 느끼게 된다.


중요한 메시지는 의사결정과정에서 ‘감정’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성에 비해 감정을 열등하다고 여기지만, 감정은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신속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결정을 내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요. 감정이 만들어낸 선호와 우선순위는 의사결정을 할 때 매우 중요하지요. 그걸 섬세하게 파악하는 뇌 영역이 망가지면, 우리는 선택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피니어스 게이지-쇠파이프가 머리를 관통하여 두개골과 대뇌 전두엽 손상을 입은-의 행동 연구 결과는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뇌의 부분을 알려줌과 동시에 의사결정과정에서 ‘감정’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의사결정을 할 때마다 내 뇌의 어느 부분이 ‘나 지금 작용하고 있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겠지만 뇌가 기능하고 있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사라진다. 뇌의 기능에 대한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렇다. 감정이란 뇌의 작용인 건가. 뇌의 작용은 그 어떤 것도 가능하게 열린 막연한 원칙과 논리 같은 것으로만 느껴진다. 뇌과학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심리학에서 보는 이야기와 맞물린다. 인간 행동에 대한 ‘이해’는 꾸역꾸역 하게 되는데 문제인식을 실행으로 옮겨가는 일은 여전히, 먼 미래의 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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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자연사 -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유령 현상에 대하여
로저 클라크 지음, 김빛나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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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은 죽지 않는다


유령의 자연사, 로저 클라크, 글항아리, 2017-11-03.


  『유령의 자연사』를 자연스레 유령의 자연사(自然死)로 인식했기에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손이 뻗었다. 유령의 죽음은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정말로 유령에게 죽음이란 있는 것인지 그 세계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등등. 유령에 대한 관심은 죽음에 대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관심일 지도 모른다. 타인의, 타국에 대한 관심만큼의 다른 나라에 대해 가지는 관심처럼 유령의 존재를 인정하며 뻗치는 유령의 세계. 많은 것이 미스터리로 존재하는 가운데 유령의 죽음을 알아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은… 自然史에 다소 멈칫했지만 막연하지만 단순하게 대상화했던 유령과 유령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힘’이 ‘필요’가 존재함을 알 수 있었다.

  유령의 죽음에 대한 물리적인 실체를 알고 싶었지만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유령이 영국에서 특히 많이 출몰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저자는 유령 출몰이 많은 것에 대한 과학적·객관적 입증은 없다고 말한다. 단지 목격자, 증언이 많을 뿐이다. 과학적인 입증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들였지만 유령 존재에 대한 과학적 입증을 할 방법은 결국 없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유령에 대한 믿음과 관심을 가진 저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령이 변화했다는 것을 확실히 간파할 수 있었고 유령은 더 이상 영혼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령의 죽음은 결국 소멸이다. 그것은 그 유령을 ‘보는’ 이가 더 이상 없다는, 그 유령은 ‘발견되지 않았다’가 되는 것이다. 유령이 언제 발견되고 발견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죽은 혼령이라는 맥락에서 유령은 한국귀신인데 생각해보면 귀신이나 유령이나 출몰하는 장소나 이유는 같다. ‘귀신을 보았다’에 대해 ‘심리적 요인’이라는 처방이 내려지거나 공동묘지나 사람이 죽거나 살해된 장소에 유령이 대부분 ‘발견’된다. 이러저러한 상황을 볼 때 유령 발견에 대한 역사에 심리적인 역사도 함께 한다고 볼 수 있다. 개개인의 심리를 좀 더 조직적으로 ‘이용·활용’하는데 어쩌면 기인 역사의 영국이 탁월했다는 점에서 유령들의 잦은 영국 출몰은 충분히 이해가 됨직하다. 앤 블린과 ‘몽스의 천사들’은 매우 유명한 유령들이며 문학속에도 수많은 유령들이 존재한다. 유령 문학이 많은 것은 유령을 목격한 이들이 무수히 존재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관심에 비례하는 것이니까.


수 세기 동안 유령의 존재는 인식되어왔고, 언제나 목적이 있었다.


  한국의 곤지암에 위치한 정신병원이 CNN으로부터 ‘탁월하게’ 소름끼치는 장소로 선정된 후 단순 폐업하고 건물을 인수할 자가 없던 병원이 유령 출몰 장소로 유명세를 떨치는 과정은 저자가 말하는 바에 딱 들어맞는다. 오래도록 유령은 등장했고 한편으로는 ‘오락’의 기능을 담당해왔다. 거대한 자본과 맞물려 ‘유령’이 콘텐츠화되면서 유령은 특정한 이가, 또는 미디어가 그려내는 대로 그 모습을 갖추어 특정 장소를 누비게 된다. 시대마다 유령에 대한 이미지가 변화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상업적인 이유 외에도 유령이 필요한 ‘목적’은 존재했다. 저자는 그 이유를 “종교, 미디어, 사회적 지위”로 들었다. 유령이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공포심을 안겨주는 존재임을 인식하며, 유령의 존재를 조작·조장하며 국가도 종교도 그들의 체제를 강화하는데 활용했다. 전통적으로 인식되는 유령에서부터 엘리멘털, 폴터가이스트, 타임슬립 등 다양한 종류의 유령이 나타나는 것도 효율적인 유령 활용의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왕정복고 이후의 유령들은 불의를 바로잡고 정의를 바로 세우며 잃어버린 문서나 소중한 물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돌아왔다. 섭정 시대의 유령들은 고딕풍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유령들은 강령회에서 질문에 답을 내리는 존재였고, 유령을 보는 것은 여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후기 빅토리아 시대에는 초자연적 현상이 발아들여졌으며, 유령을 목격하는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자연법칙의 현현이라고 여겨졌다. 1930년대에는 폴터가이스트가 발견되었다.


  존재에 대한 의아함을 품으면서도 유령에 대한 관심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는다. 또한 과학의 발전에 따라 유령을 발견하는 상황들도 좀더 발전되어 왔다.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저자가 발견한 유령의 법칙을 살펴보면 유령 또한 소비재의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시대의 목적에 맞게 변화·구현된 유령은 인간의 감정, 욕망의 정도에 따라 달리 인식되고 있다. 실체를 규명하려는 과학적인 시도와는 별개로 ‘유령’은 소멸되지 않은 채 일상에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저자가 인용한 한스 홀처의 말처럼 결국 “유령은 어찌 됐든 인간 또는 인간의 일부이며, 따라서 정서적 자극의 영향을 받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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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를 위한 자연수업 - 우리 주변에 널린 자연의 신호와 단서들을 알아보는 법 산책자를 위한 자연수업 1
트리스탄 굴리 지음, 김지원 옮김 / 이케이북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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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로망


산책자를 위한 자연수업


  1971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아마존 상공에서 여객기 공중 폭발에서 열일곱의 줄리안 케프케만이 폭발 직전 좌석이 분리되어 살아남았다. 홀로 정글에 추락한 케프케는 사고후 11일만에 원주민에 의해 구조되었는데 그 기간 동안 생존을 위해 줄리안이 한 일은 놀라웠다. 나무의 나이테를 파악해 북쪽 방향을 향했고 갑각류가 살고 있는 물과 식용 가능한 식물을 골라 먹었다. 밤에는 모닥불로 불을 피우기까지 했다하니 본능적인 생존의 기술인가 싶었지만 생태학자인 줄리안의 아버지는 평소 외딴곳에서 생존하는 법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잊지 않고 활용하며 그 고통의 날들을 견뎌낸 것이다. 더구나 허벅지 상처에 구더기가 생길 정도의 극심한 상태였는데 버려진 오두막에서 석유를 부어 응급처치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마을을 찾아 강가를 걷고 건다가 쓰려진 상황에서 원주민에 의해 구조되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 다가오면 무엇을 해야 할지 판단이 마비될 것 같은데 자연에 대한 기본 상식도 없는데도 오지탐험에 대한 갈망은 주기적으로 살아나는 것 같다. 생각해보니 오지탐험은 로망이다. 오지탐험이 일반적인 여행이나 관광과는 확연히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에 대한 갈망이 있는 것은 자연·원시적 생태에 대한 로망과 맞먹는 문명사회에 대한 회피 욕망이기도 할 것이다. 그속에서 살아가다보면 역시 고난과 환멸을 겪게 되겠지만 현실세계만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로망을 부추기는 이유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20년이 넘는 야외 탐험과 연구로 자연 탐험의 기술들을 터득하고 있다. 오지에서 저자의 생존력에 대한 부러움을 가득 안고서 가벼웁게 《산책자를 위한 자연수업》을 보면서 마냥 생존방법을 터득하는 책인양 보고 있다.

  이 책은 조금만 밖으로 나가면 볼 수 있는 자연에서 특정한 신호와 단서를 알아내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하늘의 별과 나무뿌리의 선을 통해 방향을 숙지하는 법, 구름과 무지개 식물 등을 통해 날씨를 읽어내는 법, 동식물을 통해 지대를 읽는 법 등등 재밌고 의미있는 관찰의 결과를 알려준다. 가벼운 산책을 더할 수 있는 흥미와 함께 길을 잃어버린 경우 유용함을 줄 수 있기도 한 방법들이다. 특히 저자는 인도네시아 고립된 지역에 살고 있는 다약족과 함께 자연의 단서로 살아가는 모습에 관해서도 들려주고 있다. 그리고 다약족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에서든 오랜 삶의 경험으로 터득한 자연현상을 읽어내는 방법들이 노래형태로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전해진다.


   참나무를 조심하라, 벼락을 끌어들인다.

   물푸레나무를 피하라, 번개를 유혹한다.

   산사나무 아래로 들어가라. 그러면 해가 없을 거다.


  전혀 생각지 못한 단서는 네잎클로버가 주는 단서다. 당연 네잎클로버 군락지를 보면 이런 더할나위없는 행운에 기뻐하겠건만 저자는 네잎클로버 여러 개가 한군데 모여 있다면 그것은 제초제를 뿌렸다는 징후라고 말한다. 제초제와 식물 비정상적으로 자라게 한다는 점, 그리고 네잎클로버가 비정상적이었기에 나폴레옹 역기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새삼 네잎클로버가 클러버의 돌연변이 형태라는 사실을, 그리고 거기에 인간이 뿌린 농약이 가세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네잎클로버가 한무더기 피어 있는 것을 보면 좋다고 달려가 마구 뜯거나 그 위에 드러누울 듯한데 그곳이 농약 한무더기 뿌려진 곳이라니.

  하지만 저자가 알려주는 방법들을 머릿속에 깊이 각인하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동네 산책을 나가며 이 단서들을 파악하고 확인하리라 하겠지만 결국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알지 못하지만 마냥 눈여겨 관찰하기는 할 지도 모르겠다. 이건 왜 이렇지라는 생각으로 흘낏.

  저자는 하늘의 별과 달, 해를 읽는 방법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당장 오늘밤 35년여 만에 펼쳐지는 '슈퍼 블루문 개기월식'이다. 오늘이 지나면 19년 뒤에야 이 현상을 볼 수 있다는데 나는 이 책의 지식으로 이 현상을 잘 관찰할 수 있을까. 북극성, 북두칠성을 찾던 어린시절에도 내가 찾은 것이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면서 별을 바라봤지만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제대로 북극성과 북두칠성을 찾은 것인지. 산책을 가든 등산을 가든 정상에 오르는데만 급급하고 산책을 하면서는 세밀하기 보다는 꽃이 폈네, 바람이 부네, 사람이 많네, 이런 정도로만 바라보면서 오지탐험에 대한 열망을 꿈꿀 때마다 우스워지곤 한다. 정말 바라는 것이 오지를 향한 여성이 아니라 현실을 탈피하고픈 욕망이라면 그속에서인들 기꺼이 산책하는 일이 이루어질 수는 있을런지 싶어서.

  한편으로 이 책이 산책의 욕구를 활활 타오르게 하기보다는 수그러지게 만들었다. 날이 추워서가 아니라 순간 ‘너무 머리가 아파서’. 자연학습 테스트처럼 이것을 다 알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들자 한숨부터 나왔던 까닭이다. 간사하고 모순에 가득찼다. 그러면서도 다약족과 함께 도보여행을, 그것이 생존의 방식이라고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모르면 고난이고 누군가에겐 짐이 될 테인데도 다약족의 도움을 얻어서, 내가 가진 지식이 없더라도 누군가의 지식과 경험을 얻어서 그곳을 살아보고픈 욕구. 나같은 사람이 많아서 오지탐험, 정글의 법칙같은 프로가 장수를 누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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