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상황을 바라는 몸짓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 Big Little Lies

 리안 모리아티, 마시멜로, 2015-10-12.


  커져버린 거짓말이라니. 처음부터 이 상황에선 ‘거짓말’ 이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는 것이다. 이 세상 어디에서든 누구라도 소설 속 상황에서 ‘거짓말’은 당연한 공식이 되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은 후의 생각이란 “거짓말”에 초점을 둘 것이 아니다. 거짓말을 불러오는 상황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 폭력이란 거짓말을 일으키는 핵심이다.

  리안 모리아티의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은 세 가지 궁금증에 대한 긴장감을 끝까지 유발시키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누가 죽었는가, 누가 죽였는가, 아마벨라를 괴롭힌 아이는 누구인가. 흥미롭고 유쾌한 잡담처럼 풀어놓는 대화와 삶의 이면을 바라보는 내면의 목소리가 잘 어우러져 살인사건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음에도 유쾌하게 읽어나가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스토리가 영화나 드라마화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 드라마화가 진행 중인 소설이다. 니콜 키드먼과 리즈 워더스푼이 등장하는 미드로, 2월 19일 오늘자 방영이라고 나온다.

  소설 속 인물들의 관계맺음은 예비학교에서 이루어진다. 호주의 피리위라는 아름다운 해변을 가진 도시의 학교 학생과 학부모들의 관계로 말이다. 이야기의 축을 이끌어가는 마흔살의 재혼녀 매들린, 싱글맘 제인, 미모와 재력 모두 갖춘 셀레스트의 각각의 이야기 또한 흥미있고 그들의 관계 역시도 몰입감을 준다. 성격도 나이도 다른 세 명의 여자가 친분과 유대를 쌓아가며 또다른 학부모 그룹과 가지는 갈등이 이 사건의 전면에 나온다. 아이를 둘러싼 파워게임, 아이도 어른도 외모와 재력과 권력의 힘을 자랑하고파 하고 그것을 부러워하고 힘을 가진 이에게 더 친분을 형성하고파 하는 익히 알고 있는 부모들의 모습이 전개된다. 그 과정의 이야기가 유머스럽게 펼쳐지는 가운데 우리나라라면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상황, 이혼한 부부가 한 학교의 학부모로 만나 벌어지는 일이 얽혀져 있다.

  아이의 세계나 어른의 세계에나 평행하게 전개되는 거짓말. 우린 타인의 말에 대해 자의적으로 의심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타인의 삶에 깊이 관여하려 하지 않는다. 타인의 삶이, 말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그것은 식탁 위에, 카페 테이블 위에 놓인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거짓말이 좋아서 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다. 거짓말은 늘 다른 것을 감추기 위해 하게 된다.

  폭력은 늘 거짓말을 끌어들인다. 학대받는 아동들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교사의 ‘폭력’을 알리지 못하는 것은 폭력을 경험한 공포 때문이다. 폭력을 당한 여성이 폭력의 가해자인 남편을 고소하지 못하는 것 역시 공포다. 또한, 오랫동안 이 사회는 가정폭력의 일상성을, 문제없음을 전제했기 때문이다. 또한 폭력 후에 일어나는 “잘 될거야”와 “참아야 하는 것”이라는 자기암시적 거짓말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그러니 친구의 폭력을 참고 그 가해자를 발설하지 못하는 아이나 폭력의 일상화된 모습을 목격하며 저도 모르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 자신이 폭력당하고 있음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셀레스트, 어릴 적부터 당한 학대와 폭력으로 인해, 또는 어쩌다 당한 한번의 폭력으로 인해 그 공포와 분노가 성인이 되어서도 내재화되어 떨치지 못하는 인물들 모두, 폭력의 피해자는 얼마나 같은 모습인가.

  아이를 둘러싼 엄마들의 갈등관계는 사망자가 발생한 상황에서 오히려 풀어진다. 진실의 순간은 오해가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진실 앞에서 서로의 유대가 강화된다. 오해로 인해 반목했음에 대한 사과가 이뤄지고 피치 못하게 면면의 거짓말을 해야 했던 이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이루어진다. 엄청난 사건 앞에서야 또다른 엄청난 사건은 드러나는 아이러니. 폭력의 희생자 셀레스트는 말한다.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건 폭력을 말하는 것일까. 폭력을 감추는 거짓말에 관한 것일까. 그냥, 그런 거짓말에 관한 것일까. 헬리곱터 엄마들의 종횡무진 난리부르스를 다룰 것 같은 이야기의 시작에서  사회에 넘쳐나는 폭력의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아이와 어른의 동일한 행동을 나타낸다. 폭력을 행한 당사자로 지목되면서도 친구의 거짓말을 묵묵히 감내해내는 아이, 시끌벅적하고 복잡한 상황에서 살인자가 되어 버린 이를 감싸는 진실을 알고 있는 어른들. 사람들은 그것이 물리적이든 언어적이든 자신도 모르게 타인의 가슴에 맺히는 폭력을 행사하고 또한 그에 맞서 사람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거짓말을 동원한다. 이 맞물려가는 일련의 일들은, 그 사소한 거짓말 속엔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을 위한 몸부림이 숨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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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멋진 일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 보흐밀 흐라발, 버티고, 2006-09-25.

 

  체코 현대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인데 번역작은 단 세 권이다. 작가 자신이 마흔 아홉 에 소설을 쓰기 시작해 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은 작가인가 했더니 그렇지 않았다. 보후밀 흐라발의 책은 정말 많았다. 금서로 지정되어 출판이 금지당하는 상황에서도 체코를 떠나지 않고 체코어로 글을 쓴 작가라면 왜 우리나라에서 이 작가의 작품이 작은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체코라는 나라라는 언어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이 작가의 사상 역시도 영향을 받았다는 것.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극도로 혐오하는 이 나라에서 보후밀 흐라발의 작품을 좋아할 리 없다. 이제, 이 작가의 작품이 많이 번역되어 나올 수 있을까. 2016년 소설가들이 뽑은 소설로 보후밀 작가의 작품이 선정되었으니, 기대를 가져본다. 열정적으로 체코어를 배워 원서를 읽기에는 한계가 명확하기에 일찌감치 포기하고.

  이 소설은 1965년 출간된 작품이고 소설의 내용은 1945년의 체코를 배경으로 한다. 1945년은 잊혀지지 않는 해이다. 대한민국이 광복한 해이고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많은 나라들이 전쟁에서 벗어나며 독립한 해이다. ‘체코 소설의 슬픈 왕’이라 불리는 만큼 이 책 역시도 전쟁과 냉전의 분위기를 가득 담은 슬픈 이야기로 흐를 것이라 짐작하긴 했지만 등장인물들은 초반부터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을 보여준다. 지금에서야 그 때가 전쟁의 막바지라는 것을 알지만 당시 살아가던 사람들에겐 전쟁의 종결이 다가오는지 알지 못할 1945년의 체코. 여전히 독일에 점령당한 채 살아가고 있는 체코인들의 모습은 일상을 살고 있지만 그들을 둘러싼 ‘전쟁’이라는 분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

  한편으론 그렇기에 극도로 우습게 보이는 행동들이 전쟁의 탓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수습 역무원인 주인공 밀로시 흐르마의 족보에서도 희화화되는 등장인물들이 비장미와 함께 등장한다. 밀로시는 가족의 이런 계보를 이어받는다. 


보통 스물두 살밖에 되지 않은 나 같은 젊은이는 무슨 고민으로 괴로워할까? 물론, 나는 마을 사람들이 마치 우리 루카시 증조부나 최면술사 빌렘 할아버지, 또 단지 25년 동안만 전차를 몰고 그 후로 지금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사시는 내 아버지처럼, 나 역시 단순히 일하기 싫어서 내 몫의 일까지 다른 사람들한테 떠넘기려고 손목을 그은 거라고 생각하며,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아 괴로웠다. p18


  전쟁 속 스물 두 살의 고민이 무언가, 시대적인 상황이 그를 자살로 몰고 간 것일까 잔뜩 궁금해하며 마음이 한창 아린 그때 밀로시는 말한다. 여자 친구와의 첫경험에서 실패했다고, 그것이 이유였다고. 지금 그토록 엄중한 시기에 그런 것을 이유로 자살하기엔 너무하지 않냐는 말이 튀어나올 듯하다. 아, 타인에게 말하는 것은 쉽다. 전쟁은 전쟁이고 개인에게 와닿는 일상의 고통은 그 종류와 강도가 다를 텐데도 ‘전쟁’을 들먹이며 밀로시를 비난하게 된다. 충분히 욕먹어도 되는 듯이 바라보게 된다. 밀로시도 그것을 느낀다. 누군가 자신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가진다.

  벽돌공의 도움으로 살아난 소심한 성격의 밀로시는 3개월 만에 기차역으로 복귀한다. 그곳은 늘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가 드나드는 곳이고 신호를 잘못 보냈다고 총살당할 뻔하며, 화물 차량에 빼곡하게 실려있는 죽기 직전의 가축들을 보아야 한다. 비둘기를 돌보며 승진에 목말라하는 역장에 기이한 행동만을 일삼는 후비치카로 인해 감독관이 파견되기도 하는 등, 사건이 끊이지 않는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기차역이다. 이러한 기차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여자친구와의 첫 경험의 실패로 자살시도를 한 밀로시와는 달리 후비치카는 전신기사 아가씨와 쉽게 밀회를 즐기며 심지어 옷벗기기 게임을 하다 역의 직인을전신기사의 엉덩이에 마구 찍어대기도 한다. 이 일로 조사를 받게 되는데 이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독일인의 관점은 너무나 자신들 위주로 사고하는 것이 명백해서, 허탈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 죄가 성립하는 것 같지는 않군.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국가 공용어인 독일어에 대한 명백한 모독 행위라 볼 수 있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으로 책상을 쾅! 하고 내리쳤다.

    “역에서 사용하는 도장의 반 정도가 독일어로 새겨져 있으니까! 이건 명백히 독일어에 대한 명예훼손이야!” p82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는 계속 달린다.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는 독일군이나 독일군에게 필요한 물품을 실은 기차를 가리킨다. 체코만이 아니라 점령지 곳곳에서 달리며 내키지 않으면 총을 쏘아대며 체코인들을, 점령지의 사람들을 공포로 몰고 갈 것이다. 여전히 이러한 기차가 칙칙폭폭 마구 내달리는 체코, 기차역에서 일하는 밀로시는 이러한 공포를 어떻게 견디며 살아가고 있을까. 총살당할 위기에서도 벗어난 밀로시가 전쟁이라는 공포에서 자살결심을 하지 않는 것은 놀랍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외친다.


모두 똑같아, 너희 독일 놈들도 바보들이라고. 아주 위험천만한 바보들이지. 나야 고작 자기 자신이나 조금 다치게 하는 바보일 뿐이지만, 너희 독일 놈들은 항상 남을 해치는 바보들이잖아. p48


  밀로시의 말대로다. 미칠 것 같은 상황에서 절대로 남을 해치지 않는 것. 그러나 끝까지 그렇게 될까. 밀로시는 선택한다.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에 폭탄을 던져넣는 것을. 그것은 결국 그의 죽음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어떻게 소심한 밀로시가 이러한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천만에요. 이렇게 편안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아! 저도 이제 남잡니다. 후비치카 씨처럼 그런 남자가 됐다니까요. 너무 멋진 일이라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그동안 제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모든 짐을 벗어 버린 느낌입니다.“ 나는 책상 위에서 긴 가위를 집어 들어, 날을 벌렸다 철컥! 소리나게 닫았다.

    “이렇게 제 과거를 싹둑 잘라 버렸습니다.” p117


  밀로시는 오래전 “독일군은 탱크를 돌려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라”라는 최면을 걸면서, 꿋꿋하게 부대 전체를 향해 혼자서 대항한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할아버지는 그때 목숨을 잃었지만 할아버지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자신이 일찌감치 할아버지 생각을 했다면 폭탄을 던지는 일이 아니라 다른 일을 감행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의 가슴속엔 할아버지의 이 정신이 숨겨져 있던 것이다. 다만, 이 숨겨진 자의식, 자존감을 일깨워준 것은 그를 ‘남자로 태어나게 해 준’ 사건이다. 그렇다. 그는 역에 들린 누군가의 도움(?)으로 첫경험을 성공한 것이다. 그것이 밀로시로 하여금 전환을 이루게 했다. 두려움을 가지지 않고 폭탄을 던져 엄중히 감시받는 기차를 폭파시킬 행동력과 함께 그 행동력을 강화할 정신까지 갖추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첫경험의 실패 때에는 근방의 폭격이 있었고 첫경험의 성공 후에 그는 폭격을 하러 떠난다.

  눈 내리는 기차역. 눈이 아름답게 내리는 밤. 밀로시는 최선을 다해 폭탄을 던지지만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고 독일군 병사에게 발각되어 총에 맞기까지 한다. 서로 총을 겨누며 눈밭에 쓰러진 채, 서로에게 죽음만이 마중 나온 상황에서 밀로시는 독일 병사에게 애틋한 마음을 품는다. 그가 엄마, 엄마 외쳐서이기도 하고, 그도 자신도 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평범한 같은 인간인데도 서로 총을 쏘며 죽일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만났더라면 서로 좋아할 수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병사의 손을 잡고 의식이 끊어지는 순간 열차의 폭탄 터지는 소리만이 그를 조금이나마 기쁘게 만들었다. 그에 힘입어 우편열차 열차장이 독일인에게 했던 말을 자신도 병사에게 말한다. 


    “집구석에 궁둥이나 붙이고 얌전히 앉아들 있을 일이지!”


  그들이 그랬다면 서로가 총을 겨눌 일도, 타지에서 죽을 일도 없었을 것이긴 하다. 눈 밭 위로 흘러내렸을 그들의 피가 얼마나 붉을 것인가.

  자존감과 자의식을 되찾은 밀로시는 그의 생에 마지막 순간, 독일군에게도 관대하다. 평범한 이들이, 소소하게 일상을 살아가며 첫경험에 실패한 것에 충격을 갖는 소심한 청년이 나라를 위해 제 의지를 가다듬는다. 기껏해야 권력을 쥔 이들의 더 큰 권력욕이 불사른 전쟁에 수많은 평범한 이들이 삶에서 수많은 첫경험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스러져갔다. 지금도 여전히 특정한 이들이 제 야욕과 엉터리 정의로 세상을 지배하려 난리를 친다. 그깟 경험이야 하지 않아도 될 소소한 시민들이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를 제지시킬 방법은 정말 폭탄뿐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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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타 하리를 느끼지 못했다

 

스파이, 파울로 코엘료, 문학동네, 2016-09-23.

 

 

  실존 인물을 그린 이야기들을 보다 보면 객관적이어야지 하는 생각은 사라지고 그 인물에 감정이입될 때가 많다. 그래서 실제 인물의 생애를 다시 살펴보고 다른 이들의 평가를 보며 다시 인물에 대한 감정과 생각들을 정리하곤 했다. 그런데 마타 하리. 1차세계대전 당시 이중 스파이 혐의를 받고 총살당한 무희인 그녀의 생애를 소설 스파이로 만났다.

  유명인물이지만 그녀의 생애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는데 생각보다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우선 작가가 파울로 코엘류였기에 만족감이 덜했다는 점도 있다. 파울로의 글이라기엔 내용이나 문체가 내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더 나아가 작가가 의도한 바대로의 마타 하리의 이미지, 작가가 그려낸 마타 하리의 생애에 대해 오히려 의문이 가득하게 되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마타 하리에 대해 감정이입을 해야 하고 작가의 의도를 느끼고 인식할 수 있는가 한동안 계속 생각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마타 하리에 대한 검색을 여러 번 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작가가 그려낸 것만큼이나 마타 하리의 실제 행적 자체에 대해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총3부로 구성된 1부는 마타 하리의 어린 시절과 결혼생활을 그린다. 네델란드 장교와 결혼하여 동인도에서 생활하지만 남편의 폭력과 외도에 고통스런 삶을 보내던 중 고대 인도의 전통 무용을 보며 충격과 환희를 경험하고 충격적인 ‘사건’으로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마타 하리란 이름으로 파리로 떠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녀의 결혼은 사랑과 애정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남편의 ‘구혼광고’를 본 그녀가 ‘지원’하면서 이뤄진 결합이었다.

  2부에서는 마타 하리가 인도에서 본 춤을 재현하며 파리에서 무용가로 명성을 얻는 과정을 그린다. 마타 하리의 이국적인 외모와 나체로 추는 관능적인 춤은 사람들에게 열광적인 호응을 얻게 되며 인기를 얻는다. 유명 극장에서 공연할 기회를 가지며 고위 관료들과 어울리고 프랑스 사교계를 누비던 중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네델란드 여권으로 세계 곳곳을 여행하던 그녀는 독일 정보부의 2만 프랑의 스파이 제안을 받았고 프랑스를 위해 일하고 있던 중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이중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다.

  3부는 마타 하리의 변호사 클뤼네가 마타 하리의 처형 전 쓴 편지로 마타 하리가 고위층과 관계를 어떻게 쌓아나갔는지, 어떻게 이중 스파이로 의심받게 되었는지, 명확한 증거 없이 처형을 당하게 되는 모습에 대해 쓴다.

  이렇듯 총3부이지만 전체적인 분량이 많지 않다. 또한 마타 하리의 편지나 변호사의 편지 형태로 이야기가 정리된다. 그렇기에 등장인물의 내밀한 심리를 보여주기보다 사건 요약의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독자가 마타 하리의 억울한 면이나 생애, 그녀의 생각과 행동을 느끼며 ‘판단’할 새 없이 ‘마타 하리’는 이렇다라고 정해진 서술이었다. 어쨌든 그렇기에 마타 하 리에게 자유롭고 독립적인 느낌도 갖지 못했고 열렬한 페미니스트의 느낌도 갖지 못했다. 마타 하리의 삶에서 춤에 대한 열정도 느끼지 못했고 이중 스파이로서의 역할에 대한 것도 너무나 부족하게 서술되었다는 느낌이었다. 물론 이 부분은 실제 그녀의 이중 스파이 활동이 미미했다고 얘기된다. 어떤 식으로든 그녀가 1차 세계대전의 상황에서 불행하고 억울하게 희생된 느낌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을 느끼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나의 탓이리라.

  작가는 마타 하리를 “시대를 앞서간 여성, 페미니스트”로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여성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 불성실한 독자였는지 작가의 의도대로 못 느끼는 것을 떠나서 오히려 마타 하리에 대해 ‘무지’한 모습만을 읽었다. 그녀가 자유롭고 독립적이어서 희생된 것이 아니라 무지했기에 그렇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그녀가 쓴 편지로 시작한다. 처형당할 때도 당당한 마타 하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의도였는지 모르지만 전반적으로 마타 하리의 시선에서 써내려간 삶의 모습은 당당한 여인보다 ‘무지하고 무지한’ 느낌만이 거듭 느껴졌는데 심지어 자신의 아이 이야기를 하며 아이에게 비쳐지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서술할 때, 반복적으로 자신을 빼내어줄 고위 관료 및 유명인이 많다고 거듭 서술할 때는 이 느낌이 극도에 달했다.


나는 시대를 잘못 태어난 여자이고, 무엇도 그 사실을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훗날 내 이름이 기억될지 모르겠지만,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는 희생자가 아니라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간 사람, 치러야 할 대가를 당당히 치른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p29

 

  시대를 잘못 태어난 여자라는 말은 공감하도록 하겠다. 모든 여성은 어느 때일지라도 시대를 잘못 타고난 상태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덧붙이겠지만. 실제 마타 하리가 처형당할 때 당당하게 걸어갔다고 하니 마타 하리의 주장대로 그녀는 용기 있게 나아가긴 했다. 당당하고 자유로운 삶, 독립적인 삶이란 그녀 스스로 주장하는 '진정한 삶‘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인터넷 검색에서 볼 수 있는 간략하게 전한 마타 하리의 삶의 모습에서 더 보여주지 못했다고 여겨졌다. ’독일을 위해 일하는 스파이인 척하며 실은 프랑스가 전쟁에서 이기게 만들고 있었지요‘ 그녀의 주장을 느낄 만큼의 묘사가 없다는 것. 그저 그녀가 ’나는 이랬다‘라고 말로만 나타내 보일 뿐이다. 그래서 작가의 의도대로 마타 하리를 보기엔 그러한 심리를 느낄 만한 묘사와 서술이 부족하다. 마타 하리의 삶이나 그녀의 춤, 이중 스파이라는 것에서 갖는 강렬함 때문이기도 하겠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가 극적으로 전개되지 않고 오로지 마타 하리의 입을 통해 덤덤히 전개된 까닭에 강한 감정이입이 덜 되는 것인가도 생각해 보지만. 간결하게 펼쳐지는 상황 설명에서 느껴지는 안타까움이 오히려 더 큰 듯하다.


나는 행복을 찾았던 게 아니라 프랑스 사람들이 말하는 ‘라 브레 비La vraie vie’, 진정한 삶을 원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깊은 상심의 순간들이 함께 있고, 충성과 배신, 두려움과 평화의 순간들이 공존하는 진정한 삶. 내가 미행당하고 있다고 거지가 말했을 때, 나는 이전에 맡았던 그 어떤 역할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나 자신을 상상했습니다. 나는 세상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독일을 위해 일하는 스파이인 척하며 실은 프랑스가 전쟁에서 이기게 만들고 있었지요. 사람들은 신이 수학자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신이 만일 사람이라면, 신은 상대방의 수를 앞질러 생각하고, 미리 무너뜨릴 전략을 준비하는 체스 선수일 것입니다. p157

 

  마타 하리가 원했던, 그렇게 살았다고 하는 ‘진정한 삶’. 그것을 느끼기에 소원했던 스파이는 그래서인지 마타 하리의 실제적 삶에 대해 궁금하게끔 하는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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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 1
말런 제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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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할 쉣스템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

 

  레게와 육상과 봅슬레이로 기억되고 있는 나라, 자메이카. 이곳 출생 작가 말런 제임스의 소설이다. 말런 제임스는 그의 첫 작품을 출간하기까지 출판사로부터 78번의 거절을 당했다고 한다. 적어도 한 곳 출판사에만 집중하지 않았을 것이니 70여 곳의 출판사를 향해 도전을 멈추지 않은 작가의 노력과 인내가 놀라웁다. 그런 힘을 가진 작가였기 때문일까. 세 번째 소설 <일골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는 작가에게 맨부커상을 안겨준 작품이고 수상작이자 소설 형식에 대한 거듭된 찬사를 받고 있다.

  문장이 완결되기도 전에 튀어나오는 많은 욕설과 비속어를 모두 걷어낸다면 1,176페이지의 분량이 절반으로 줄었을 소설이다. 안타까운 점은 그랬다면 소설의 묘미도 절반으로 줄었을 거라는 점이다. 사전 정보없이 소설을 읽어나갔기에 소설에 대한 흥미는 이 사건이 ‘현실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배가된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겪은, 겪고 있는 상황과 자메이카의 현실에 깊이 이입하며 1976년의 시간을, 밥 말리라는 가수를, 혼란에 끼인 자메이카를 그려나가게 된다.

  실존 가수 밥 말리에게 실제 일어난, 자메이카 역사의 비극적인 사건을 소재로 한 이야기의 소제목은 레게 가수의 곡과 앨범에서 따왔다. 총5부로 구성된 이야기가 방대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의 사건에 대해 13명의 화자가 등장하여 쉴새없이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떠들기 때문이다. 마치 구전처럼 이야기는 이야기를 파생한다. 이 사건이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시간이 흘러도 또는 이미 생을 다하였어도 그들은 잊지 않고 있으며 여전히 영향을 받고 있음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역사는 또다시 강대국의 이익에 휩쓸리는 한 나라를 보여준다. 그리고 권력욕에 희생되는 나라와 사람들의 모습을, 모든 욕망을 끌어모아 타인을 지배하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자메이카는 대한민국이 그랬듯이 식민의 잔재와 빈부 격차와 인종갈등이 넘치고 있었다. 그에 더해 1976년의 자메이카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대립하고 있었다. 정치권은 갱단과 연결되어 암살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었고 미국을 피해갈 수 없었던 냉전시대, 미국은 제 나라의 이익을 위해 자본주의를 내세운 노동당을 지원한다. 공작정치, 그것을 지원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렇다고 하자.

 

2주 후면 총선이다. CIA가 이 도시에 쭈그리고 앉아 그 투실투실한 엉덩이로 냉전 시대의 땀자국을 남기고 있다. 잡지사에서는 나한테 별다른 기대도 하지 않는다. 뭔지는 몰라도 롤링 돌대가리들이 녹음은 하고 있는지에 대한 기사나 한 문단 써오라는 것뿐. 헤드폰을 반쯤 걸친 믹이나 키프를 중앙에 배치하고, 배경 어딘가에 색감을 살려줄 자메이카인을 끼워넣은 멍청한 사진이 담긴 완성본으로 말이다. 그딴 건 씨발 좆이나 까라지. 마크 랜싱이 벌이고 있는 건 대체 무슨 게임일까? p132

 

  자메이카 국민에게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전해주고자 콘서트를 여는 가수 밥 말 리가 콘서트 전 살해당할 뻔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갱단이 연루된 이 암살 기도 사건의 든든한 조력자는, 기획자는 과연 누구인가. 이 과정에 연관된 사람들은 말단 갱단원에서부터 CIA 직원까지 다양하다. 노동당과 인민국가당 각각의 갱단들, 갱단원이 된 소년들, 사람들. 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의 시선은 덤덤히, 격렬하게 이 이야기를 전한다. 이 사건을 겪고 본 자메이카 사람 어느 누구라도 트라우마를 겪으며 삶을 견디어 가는 모습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모든 돈과 권력의 이해관계의 속살들을 보며 그것이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희생을 담보로 전진하고 있음은 보는 내내 답답함을 안겨준다. 역사는, 이토록 같은 모습을 보여주며 민중들을 괴롭히며 파탄으로 몰고 간다.

레게 음악의 흥겨운 리듬 뒤편으로 마약이 총질이 끊이지 않는 자메이카를 떠올린다. 봅슬레이를 타며 웃는 자메이카 선수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삶의 비애 속에 놓인 작은 섬 나라의 뒷골목이 떠오르는데 자메이카는 지금도 그런 모습일까. 그럴 지도 모른다. 어떤 한 사건이 오래전에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말끔히 지워지는 것은 아니니까. 대한민국이 그런 것처럼 그런 역사의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면 여전히 혼란스러움은 잔재할 것이고 아픈 역사를 겪은 이들의 트라우마는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암살 사건을 목격한 니나 버지스다. 많은 화자가 등장하는 가운데 홀로 여성인 니나의 삶도 직접적인 살인에 가담하고 마약에 빠지는 갱단원 이야기 못지않게 파란만장하고 애잔하다. 자메이카와 미국을 오가며 겪는 그녀의 삶은 인종과 여성의 차별을 버티어 나가고 있다.

  밥 말리는 여전한 평화운동을 위해 애를 썼지만 암살 기도 사건 5년 후에 암으로 사망한다. 밥 말리는 사망하기 전 평화콘서트를 한번 더 개최했지만 자메이카에 평화란 없었다.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취득하기 위한 개인과 집단에게 ‘평화’에서 얻는 이익이란 게 없다는 점이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게 하는 힘이 된다.

  그러니 이 소설의 모든 말들이 욕으로 시작해 욕으로 쉬고 욕으로 끝맺는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이 자메이카의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일이란 끝없는 욕설 안에서 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임산부도 어린 아이도 주저하지 않고 살해하는 잔혹한 폭력과 성에 대한 탐닉, 그리고 성적 폭력. 폭력이 난무하는 자메이카는 자메이카를 이끈다는 지도자들이 만들어 가는 작품이다.

 

나는 정치를 증오한다. 이 동네에 살자면, 정치의 틈바구니를 살아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정치의 틈바구니를 살아내지 않으면, 정치가 나를 통해 살게 된다. 1권. p69

 

  그러니 정말 피똥 쌀만하다. 거룩하고 대단한 정치를 보고 있는 기분이 말이다. 그래서 자메이카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쉣스템SHIT+SYSTEM’이라고. 부패한 정치들, 그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 부패하고 난장판인 시스템들. 세상 어느 누구도 체제에 시스템에 영향받지 않을 사람은 없다.

  피똥 쌀! 피똥 싸게! 등장인물마다 입에 달고 있는 이 말이 웃프게 들리는 건 여전히 괴상망측하게 정치를 이해하고 정치를 행하려는 이들 때문이다. 정치는 인간의 삶을 보다 나아지도록 하는 것이지 특정한 이의 환희에 찬 삶의 송가가 아니다.

  변화에 대한 기대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걸까.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건가. 평화콘서트도 막을 내리고 레게 음악이 구슬프게 여겨진다. 지금 자메이카는 그때와 같지 않은데 대한민국은 어떤가. 젠장할 쉣스템. 젠장할 인간들. 정치인들에 의한 살인의 역사는 오래도록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유일한 시스템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언제나 평범한 ‘나’ ‘너’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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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하지 않은 빛.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앤서니 도어, 민음사, 2015-07-10 .


  단문. 현재형 문장. 표현의 유려함. 인상적인 구성. 먹먹한 여운.

  이 소설에서 느끼는 특징이다. 2015년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작가는 10년에 걸친 기간 동안 이 소설을 완성해 나간다. 10년이라는 시간, 오랜 시간일수록 많은 자료를 들여다보며 더 길게 이야기를 늘일 수 있을 듯도 싶은데 작가는 어쩌면 이토록 정갈하게 이야기를 풀어 놓았는지.

  처음 이 소설을 읽고 나선 먹먹하고 아린 마음이 지속되었는데 그렇게 1년 여의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른 만큼 마음이 안정되는가 했더니 표지만 봐도 아린다. 마리 로르와 베르너가 등장하는 이 소설은 여러 장르에서 자주 접한 2차 세계 대전의 고통을 겪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전쟁속에서 스러져간 인물들의 이야기는 늘 마음을 당기게 된다. 특히 이 두 주인공이 소녀와 소년이며 좀체 만나기 어려운 맑은 영혼이기에 그럴 것이다. 


실제로는 말이죠. 수학 상으로는 어떤 빛도 눈에 보이지 않는답니다. p230


  어떤 빛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절망 속에서도 마리로르와 베르너는 ‘빛’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 불친절하고 참혹한 시대에서도 그들 자신의 ‘빛’을 잃지 않고 성장한다. 그녀가 단지 볼 수 없기에 나치가 찾아 헤매는 보석에 초연한 것은 아닌 것처럼 베르너 역시 전쟁의 상흔 속에 자신을 파괴하지 않으려 애쓴다.


뇌는 완전한 암흑 속에 갇혀 있습니다. 당연한 사실이랍니다. 어린이 여러분. 그 목소리는 말한다. 뇌는 두개골 속 깨끗한 액체 속에 떠 있지, 빛 속에 있는 게 절대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뇌가 정신 속에 지어 올리는 세계는 빛으로 가득합니다. 뇌는 색과 움직임으로 넘실거립니다. 그런데 어린이 여러분, 뇌는 단 한 점의 빛도 없이 살아가면서 무슨 수로 우리에게 빛으로 가득한 세계를 지어 주는 것일까요? p80~81


  어릴 때부터 시력을 잃고 박물관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둘이서 살아가던 마리로르는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 생말로로 피신한다. 박물관 관장의 명으로 전설의 133캐럿짜리 블루 다이아몬드 ‘불꽃의 바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 개의 모조품을 더한 총 네 개의 다이아몬드 중 아버지가 진품을 가진 것인지는 모르나 이로 인해 보석을 노리는 나치의 추적을 받는다. 상황을 보기 위해 파리로 갔던 아버지마저 실종된 상황에서 마리로르는 라디오를 송신하며 전쟁을 견뎌낸다.『해저 2만 리』를 읽어주면서, 도와달라는 메시지를 절박하게 전하면서 기다린다.

  베르너는 독일 탄광촌 고아원에서 여동생과 함께 지내며 쓰레기장에서 주운 고장난 라디오를 조립하며 프랑스의 과학 방송을 청취한다. 이것은 베르너를 통신 기계에 대한 관심과 재능으로 이끈다. 그리고 이 능력으로 인해 나치의 눈에 띄어 청년 정치교육원으로, 전쟁의 현장으로 투입된다. 그리고 마침내 독일군의 마지막 방어 기지인 생말로로, 연합군의 폭격이 무참하게 진행되는 그곳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필연처럼 베르너가 듣게 되는 마리로르의 메시지. 독일 소년과 프랑스 소녀의 짧은 만남. 그러나 그 만남을 위해 두 아이의 인연의 끈은 오래 전부터 촘촘하게 이어져 있었다.


제파르 박사가 말한다.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끄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야. 예를 들어 진주, 그리고 왼편으로 감긴 조개류, 그러니까 왼쪽에 입이 달린 조개 같은 것들이 그래. 최고의 과학자들도 이따금씩 자기 주머니에 슬쩍 집어넣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거든. 그렇게 자그마한 것이 그토록 아름답다는 것에 혹해서 그런 거야. 값어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하니까. 오직 강한 사람만이 그런 것에 끌리는 감정으로부터 등을 돌릴 수 있어.” p87~88


  마리로르에게도 베르너에게도 삶의 순간 순간마다 ‘혹’하는 때가 있었을지 모른다. 비단 보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로르의 라디오를 송신하며 메시지를 전하는 레지스탕스 활동같은 것, 베르너가 나치에 순응하며 전쟁속 군인으로서의 행한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그대로 살아가는, 그런 ‘혹’. 그런 충동. 그러한 무수한 ‘혹’의 순간들에 등을 돌린 그들은 강한 사람이었다.  


내가 시력을 잃었을 때 말이에요, 베르너, 사람들이 나더러 용감하다고 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떠났을 때도 사람들은 내가 용감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건 용감해서가 아니에요. 내겐 달리 방법이 없었는걸요. 난 자고 일어나면 그저 내 인생을 사는 거예요. 당신도 그렇지 않아요? p371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자고 일어나 제 인생을 묵묵히 살아나갔다. 또한 눈만 뜨면, 제가 혹한 탐욕을 찾아 남의 인생마저도 제 인생처럼 휘두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역사는 늘 이들이 반복되어 흘러갔다. 인간의 삶에 욕망이 무조건 나쁜 것도, 그래서 나쁜 결과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욕망엔 종류가 다양하니까. 당연 욕망을 욕망하는 종류와 방법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소설 속에 이야기의 줄기로 나오는 쥘 베른의 소설과 더불어 과학적 접근의 ‘빛’에 대한 이야기가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타인에게 까지 피해를 입히는 종류의 욕망에 집착할 때 찬란한 다이아몬드 ‘불꽃의 바다’의 저주처럼 영원히, 멈추지 않는 악운을 맞게 될 것이다. 그 찬란한 빛 속에 감겨 버린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될 때, 그 인생은 나의 인생이라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러니 눈을 뜨란 외침이 예사로이 들리지 않는다. 삶의 곳곳엔 언제나 선택의 순간이 있다. 그 순간에 잊지 말아야 할 그것들.


눈을 떠요. 그리고 영원히 감기기 전에 그 눈으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걸 찾아봐요.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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