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호밀빵 햄 샌드위치 Ham on Rye (1982년)

찰스 부코스키, 박현주 옮긴이, 열린책들, 2016.


  자연스레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생각난다. “호밀”이 들어간 제목도 그렇거니와 남자 아이가 등장하는 성장소설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이 그 당시 자신이 쓴 소설 중 제일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았고, 평론가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물론 독자들도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작품이라고 한다. 찰스 부코스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헨리 치나스키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인데, 작가의 분신인 주인공을 내세운 찰스 부코스키의 이야기라고 대체로 보고 있는 모양이다. 작가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라 생각한다는 건, 거리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묘사한 작가의 거리 속에서 살아온 작가의 모습, 그런 이야기를 쓰는 작가의 어쩌면 근원과도 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아이의 이야기이기에 거칠게 표현하는 작가에게 있어서도 조금은 완화된 표현과 연민과 그리움이 깃든 언어로 표현되지 않았을까.

  어린 헨리 치나스키가 겉도는 삶을 살아가는 시초는 역시 사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린 소년은 그저 끔찍하기만 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아버지도 끔찍하고 교실도 끔찍하고,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끔찍하기만 하다. 또한, 그 자신 역시도 끔찍함의 대상이 된다.


바깥, 뒤쪽 블라인드 사이로 아버지의 장미가 자라는 것이 보였다. 빨갛고 하얗고 노란, 커다랗고 탐스러운 꽃송이들이었다. 해는 아주 낮게 걸렸지만 아직 지지는 않았고, 마지막 해조차 아버지의 소유물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해는 아버지의 집 위로 비치니까 나한텐 아무런 권리도 없다는 기분. 나는 아버지의 장미 같았다. 아버지의 소유물이지 내게는 아무런 권리도 없는 물건…….p51


  헨리의 아버지는 키우는 장미에겐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장미에겐 가시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장미는 장미하고만 어울릴 테니까. 헨리의 아버지는 가난하기 때문인지 가난을 경멸한다. 나아가 가난한 아이들과 헨리가 어울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헨리보다 잘난 아이들과 비교하며 폭력을 행사한다. 어머니는 헨리를 적극적으로 구원하지 않는다. 어머니 역시도 폭력을 당하며 살고 있고 그런 모습을 헨리에게 보여주기만 할 뿐이다. 사랑받지 못한 헨리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런 헨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독일 이민자 가정 출신이란 아웃과도 같은 말이다. 헨리는 친구들로부터 일찌감치 ‘아웃’의 대상이 된다. 이유가 없이도 미워하고 이유를 만들어 미워한다.

  그런 헨리가 가장 진정으로, 순수한 칭찬을 받은 것은 글짓기 수업일 것이다. 그러나 헨리는 그 글짓기가 상상으로 채워진 글이기에 이런 결론을 내린다.


그래, 사람들이 원했던 건 그거였다. 거짓말. 아름다운 거짓말. 그게 바로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사람들은 바보였다. 내게는 삶이 더 쉬워지겠지. p115


  다니던 학교에서는 쫓겨나고 아버지로 인해 형편에 맞지 않는 학교로 진학해 사는 모양 때문에 오히려 더욱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감을 느끼는 헨리에게 또다른 위기가 다가온다면 그것은 이유모를 피부병이다. 그것은 학교를 그만둘 만큼 심각한 상태에 이르고 치료를 해도 나아지지 않는다.


드릴을 이용한 치료 과정은 끝이 없었다. 서른둘, 서른여섯, 서른여덟번. 더는 의료용 드릴에 대한 공포는 없었다. 결코 있었던 적 없었다. 오로지 분노뿐이었다. 하지만 분노도 사라졌다. 내 쪽에선 체념도 없었다. 오로지 혐오, 내게 일어났던 건 혐오뿐이었다. 아무것도하지 못하는 의사들에 대한 혐오였다. 그들은 무력했고 나도 무력했지만, 유일한 차이는 내가 희생자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집에 돌아가 삶을 누리고 잊어버릴 수 있었지만, 나는 꼼짝없이 똑같은 얼굴을 들고 다녀야만 했다. p210


  더욱 더 껍질 속으로 들어가고 냉소적이 되어가는 헨리에게 있어 그나마 위안이라면 책이라고 할까. 헨리는 다양한 작가들의 책들을 읽으며 자신의 영혼을 채운다. 헨리는 그것을 마법이라 표현한다. 비록 밤에는 불을 끄라고 호통치는 아버지로 인해 글을 읽을 순 없지만. 그렇게 밤에는 글을 읽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아버지가 어떡하든 헨리가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아버지의 욕심과 허영 때문이긴 하지만 이곳에서도 헨리의 적응력은 발휘되지 않는다. 물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일한 백화점 물류창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교수에게도 학교에서도 낙인찍힌 자가 되지만, 세상은 또한 그러한 괴짜에게 기이한 이에게 관심갖는 이도 있는 법이다. 그렇지만 헨리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치고 싶었고 혼자 있고 싶었다. 어떤 것에도 아무 흥미가 없었고 종종 열등하다고 느꼈으며 가난했고 주욱 가난하게 살 것이지만 딱히 돈을 원하지도 않았다.


나는 세계사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나의 역사에만 관심이 있을 뿐. 무슨 헛짓거리인가. 부모가 성장기를 지배하고, 마음대로 휘두른다. 그런 다음 자기 혼자 나설 준비가 되었을 땐, 다른 사람들이 제복을 억지로 입혀서 엉덩이에 총을 맞도록 내보낸다. p384


  그렇지만 그가 도서관을 다니며 책을 읽는 것처럼 그의 마음 속엔 글을 쓰고 싶은 열망이 있었는지 모르고, 그것을 헨리의 친구는 알아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한다.


「현실로부터 숨어 버리면 결코 작가가 될 수 없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바로 그게 작가들이 하는 짓이지!」 p375


  작가가 될 생각이 없다, 관심이 없다가 아니라고 하는 것에서 헨리의 마음이 드러난다. 적어도 글쓰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헨리가 지속적으로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다고 말하지만 헨리는 떠돌이 개에게도 늘 괴롭힘을 당하는 고양이에게도 이제 막 거미에게 잡아먹히려는 파리에게도 관심을 쏟았다. 이들 뿐만 아니라 장애인과 이민자들과 아이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을 향한 헨리의 관심은 그들에 대한 연민이자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을 것이다.

  헨리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살에 대해서는 귀찮아지기만 할 것이라 생각한다. 지나치도록 세상에 대해 관심없다고 말하는 헨리에게, 조용하게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하는 헨리에게, 자살은 귀찮다고 말하는 헨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원하는 건 3년 치 식량이 있는 콜로라도의 동굴이었다. 엉덩이는 모래로 닦으면 된다. 무엇이든, 이 지루하고, 사소하고 비겁한 존재 속에서 익사하지 않을 수 있는 무엇이든. p302


  일찌감치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며 학교와 사회에서의 위선적인 일들을 겪으며, 세상의 온기보다는 자신의 냉기에 더 익숙해 있던 헨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냉기를 세상의 위기를 허위를 날려버릴 따스한 온기였을까. 헨리에게 마법이 되는 책이 없었다면 헨리가 그나마의 삶을 버틸 수 있었을까.

  친구는 전쟁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헨리는 그를 배웅한다. 늘 혼자라고 생각하지만 길을 걸을 때면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헨리는 멕시코 소년과 마주치며 기계로 권투 게임을 한다. 그리고 이겨야겠다는 기분을 느낀다. 그것이 왜인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 여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그냥 중요하다고만 생각한다. 그것은 생존일까.


길을 걸으며 나는 혼자라 느끼지 않았고, 실제로도 혼자가 아니었다. 굶주린 잡견 한 마리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불쌍한 동물은 끔찍할 정도로 앙상했다. 갈비뼈가 피부를 뚫고 나올 듯했다. 털은 대부분 빠져 버렸다. 남아 있는 털도 마르고 뭉쳐서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그 개는 사람들에게 매 맞고 위협당했으며 버림받아 겁을 먹었다. 호모 사피엔스의 희생자였다.

나는 멈춰서 무릎을 꿇고 한 손을 내밀었다. 개는 뒷걸음질 쳤다.

「이리 와봐, 난 너의 친구야…… 이리 와, 이리…….」

개는 더 가까이 왔다. 무척 슬픈 눈을 갖고 있었다.

「야,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한 거냐?」 p288~289


  헨리. 그는 친구라는 말도 알았고 손을 내밀 줄도 알았다.

  호모 사피엔스의 희생자, 헨리. 아, 사람들이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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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여자들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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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의 제국


  책을 읽는다는 건 책이 담고 있는 시대의 이야기를 함께 읽는 것이다. 더불어 내가 그 책을 읽고 있는 시대도 책을 이해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읽은 시점은 내게 긍정과 부정의 요소를 모두 안겨주었다.

  부정의 요소라면 읽는 동안 너무나 박근혜와 최순실을 연상시키는, 아니 그쪽으로 생각이 몰려가는 바람에 ‘이 정도야 뭐’라고 한다거나 ‘아니, 어떻게 알았니?’라거나 ‘이거 한국 얘기야?’라고 이 여러 문학상 후보에 오른 작품을 국내 막장 드라마 이야기를 바라보듯 보게 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긍정의 요소라면 상상력이 지나치시네라고 할 것을 너무나 쉽게 이해하고 넘어갔다는 것이다. 더욱 더 타이밍이 좋았던 점은, 소설 속의 ‘마약’이 나오는 부분을 읽을 때 한창 언론에선 향정신성의약품, 프로포폴의 이야기를 거론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핵심은 그것이 아닌데 이렇게 되어 버렸다, 안타깝게도.

 목마른 여자들의 표면적 이야기는 여성제국을 여행하는 이야기다. 1970년 페미니즘 혁명으로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까지 이어지는 가장 강력한 여성 제국이 탄생한다. 모든 여성들이 자유와 행복이 가득한 나라로 알려져 있고 많은 이들이 가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혁명제국은 남성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외부와의 통로가 차단되어 누구나 쉽게 드나들지 못하고 방문 허가를 받아야 하는 곳이다. 이 곳에 두 명의 여성과 네 명의 남성이 방문 허가를 얻어 발을 들이게 된다. 이들은 기자와 열렬 페미니스트로 구성된 지식인들이다.

  제국은 ‘목자’라 불리는 유디크가 그의 어머니에 이어서 지배하고 있다. 이들 ‘원정대’는 제국의 안내인이 이끄는 대로 구경을 한다. 목자의 얼굴 모양을 따라 형성된 도로, 여성작가들의 책만이 가득한 도서관, 생식세포를 선별하고 연구하는 곳 등등을 둘러보며 나름 의문을 가지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며 이곳에 반한 페미니스트 한 명은 제국에 살기로 결정을 할만큼 이들은 이 여행을 만족스러워하고 그들이 다녀온 제국에 대한 기사를 써서 많은 판매고를 올린다.

  하지만 이들처럼 제국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이가 또 있다. 제국의 신민으로 살아가는 아스트리트. 그녀는 실제 겪고 있는 생활을 담담히 기록한다. 그녀의 일기 속의 기록들은 이 혁명제국의 실상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녀는 일반 신민에서 목자와 함께 생활하는 ‘자격’을 얻음으로써 목자의 생활과 혁명제국의 실상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목격자인 것이다. 그녀 자신의 아들을 제 손으로 키우지 못할 만큼 이곳에서 남자들은 생존이 보장받지 못한다. 임신단계에서 아예 태어나지 못하거나 태어난 후엔 공동육아소로 보내져야 하고 성인 남성들은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하는 곳.

  목자의 이름이 ‘유디트’인 것도 우연은 아닌 듯하다. 유디트라는 말을 듣자마자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이 떠올랐다. 성서에 나오는,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벤 여인. 팜므파탈로 또는 애국심을 보여준 여인으로 그려지나 전자의 이미지가 더 강한 여인. 남성이 보이지 않고 생존을 위협받는 나라를 건설한 혁명전사라면, 클림트의 그림 속 유디트의 이미지가 딱 어울리지 않은가. 언제든 남성의 목을 베고 그 목을 높이 치켜들 수 있는 여인.

  여자들을 위한 나라는 그저 ‘남자’들만 없으면 되고 남자들의 지배만 없으면 되는 곳으로 묘사된다. 이 혁명제국에 대해 알리는 아스트리트의 기록이나 원정대의 여행담이나 마냥 심각하지 않고 조금은 유쾌하게 그려진다. 재밌게.

  분명 이 책의 표면은 남성사회를 전복시킨 여성사회를 그리는 페미니즘의 나라를 그리는 듯했다. 그러나 점점 그 부분은 지워져간다. 단지, 통치자가 독재자가 여성이라고 하여 페미니즘이라고 읽지 말기를! 오히려 이 책은 페미니즘을 가장한, 그리하여 자칫하면 페미니즘을 더 혐오하게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은 전체주의에 대한, 독재에 관한 이야기가 핵심이다. 우리가 익숙히 보아왔던 전체주의를 그린 몇몇 소설이 생각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왜 전체주의는, 독재자의 모습은 통치자의 성별에 상관없이 이토록 같은 모습인 건가! 그것을 구성하는 이들도, 내세우는 정책도 도무지 독창적이지 않다. 파멸에 이르는 길까지도.

  독재자들이 만드는 세상의 방식이 같다면 무력하게 통치당하는 이들의 모습 또한 다르지 않다. 세뇌당하고 서로 견제하며 두려워하거나 칭송하거나. 그래서 눈에 띄게 좋아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음에도 이 나라에 남겠다고 결정하는 페미니스트의 결정에 실소가 나왔고 이곳을 환상적인 곳으로 포장하는 원정대들의 글에선 왜 이 원정대들이 기자와 언론인으로 구성이 되었던가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 마치, 우리가 잘 아는 그렇고 그런 언론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눈막고 귀막고, 왜곡의 달인이 된 언론. 그래도 이들을 향해 비판하는 자가 있긴 하다. 이들을 향해, 이들의 부족한 통찰력과 엉터리 기록을 비판하는 말, 스탕달의 말을 빌려 이들 언론인들에 가하는 일침은, “경계를 잊지 마라.”

  작가가 익살스러움을 가미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냥 전체주의의 민낯은 코미디다. 독재는 공포와 더불어 늘 이런 실소를 유발하게끔 하는 요소들이, 기가막힌 요소들이 늘 가득차 있다. 당장 2016년 대한민국에서도 목격하는 일이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결말이다. 좀 허무하고 치밀함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 제국을 무너뜨리는 외부적 요인이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한 경쾌한 묘사와 서사가 부실하게 그려져 있다. 내가 놓쳤나 생각했지만. 혁명제국을 또다시 혁명하는 세력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만큼 통쾌함이 덜하다는 이야기다. 뚜렷하지 않게 흘리듯이 그려져 있다. 하긴, 새로운 혁명세력이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은 어리석을 지도 모른다. 이 독재정권에, 전체주의 국가에 대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질서를 요구하는 모든 이들 말고 또 누가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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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가 필요해


요슈타인 가아더, 수상한 빵집과 52장의 카드


    “운명을 꿰뚫어 보려는 자는 운명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철학을 이야기로 풀어 쓰는 작가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설이다. <소피의 세계>가 그의 대표작이듯 이 책은 철학을 주제로 한 소설이다. 최근작이 아니라 1990년대 <카드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소피의 세계>작가의 소설이라 하니 이야기가 흘러 철학의 문제로 가겠거니 생각하게끔 되지만 이 책이 <소피의 세계>보다 먼저 출간되었다. 명백히 선후관계를 따지면 이 책이 <소피의 세계>가 탄생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거란다.

   이 소설의 큰 줄기는 열두 살 소년의 엄마 찾기 여정이다. 자아를 찾아 떠난 엄마를 한스는 아빠와 함께 노르웨이에서 아테네로 찾아 나선다. 이 머나먼 여정에서 한스가 만나게 되는 것은 무얼까. 열두 살 아이가 등장하는 것처럼 신나는 모험이 있다. 다만 여느 모험과는 다르다. 또한 이야기 속에 또다른 이야기가 흐르는, 판타지와 미스테리가 가득한 이야기다. 그래서 잠시 한눈을 팔면 옆길로 빠진다. 마냥 환상 속에 머물러 버릴 지도 모른다.

  아테네는 그리스 철학의 중심지다.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철학자들이 생각난다. 그래서인지 두 부자의 최종 목적지가 아테네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엄마를 찾으러 가는 여행이 철학여행이 되는 것은 철학으로 이끄는 이가 있다는 얘기다. 이 여행에서 한스의 아빠는 이 역할을 맡는다. 동화나 청소년 소설에선 아이는 알지만 어른은 절대 알지 못하는,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의 옷을 보는 상황이 자주 나타난다. 이것은 아이들이 보다 순수하고 정직하고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과 달리 어른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아빠는 비록 한스가 혼자서 맞닥뜨리는 빵집이나 난쟁이들의 모습에 대해 알지 못하고 역시나 보지 못하지만, 한스에게 계속 질문을 제기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한스 역시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철학자라고 말한다.


“나는 우리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얘야, 절대로 그렇지 않아. 우주에는 생명력이 넘치고 있어. 다만 우리는 우리뿐인지 그렇지 않은지 결코 알 수가 없는 거야. 은하는 마치 외로이 떨어진 섬들과 같거든.”

아버지에 대해 할 얘기가 많지만, 나는 아버지와 이야기하는 걸 한 번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항해사로서의 인생에 만족해서는 안 되었다. 내 생각에 아버지는 철학자로서 나라에서 봉급을 받았어야 했다. 아버지도 언젠가 비슷한 얘기를 했다. “우리나라에는 별의별 장관이 다 있지. 그렇지만 철학 장관은 없어. 큰 나라들마저도 그런 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지.” p27 


  한스가 낯선 환상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은 마치 처음부터 정해진 일인 것처럼 이루어진다. 그가 만나는 난쟁이와 그의 안내, 빵집의 제빵사. 그로부터 건네받은 꼬마책. 지금의 열두 살이라면 이런 책보다는 그저 핸드폰을 들고서 여행을 했겠지만 한스는 수상한 빵집 제빵사 루트비히에게 받은 꼬마책을 읽는데 푹 빠진다. 루트비히가 건넨 롤빵에 있던 돋보기로 봐야만 읽을 수 있는 아주 작은 책, 꼬마책. 거기엔 1790년의 이야기, 카리브해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온 선원 프로데에 관한 이야기가 쓰여 있다. 52장의 카드, 이것은 프로데의 친구들이다. 환상의 섬인 만큼 이 신비로운 일이 가능했고 여기에 조커가 등장하여 흥미진진하게 한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중에 불쑥 불쑥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나‘ ’어디로 가고 있나’와 같은 질문들이 튀어나와 머릿속을 비현실적이게 만들었다가도 현실적으로 돌려놓기도 한다.


사랑하는 아가야, 널 이렇게 불러도 되겠지. 나는 여기 앉아서 내 인생 이야기를 적고 있고, 네가 언젠가 도르프에 올 것이라는 것을 안다. 어쩌면 너는 발데마르길의 빵 가게를 느릿느릿 지나가다가 금붕어가 든 유리 어항 앞에 멈춰 서겠지. 너는 네가 왜 왔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무지갯빛 레모네이드와 마법의 섬 이야기를 계속 이끌어가기 위해 도르프에 올 것임을 알고 있다.

    지금은 1946년 2월이고 나는 아직 젊다. p48 .


  아이가 그 먼 여정을 가는 바람은 4살 때 헤어진 엄마를 만나는 것이었으니만큼 엄마를 만나게 될까. 엄마는 자아실현을 위한 모델일을 잘 하고 지속적으로 하려 할까. 아빠는 여전한 철학적 질문을 쏟아낼까. 그리고, 오래전에 이야기로만 전해져 오는 한스의 할아버지는 어디에, 살아는 계실까. 수상한 빵집과 더불어 또한 불쑥 튀어나오는 난쟁이를 만나게 되는 한스의 여행은 꼬마책 속에 등장하는 환상의 섬과 오버랩되며 그 명확한 경계를 흐리지만 이야기의 연결고리는 명확하다.


 우리는 놀라운 동화 속에서 살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세상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천사나 화성인처럼 비정상적인 존재를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단지 그들에게 세상이 수수께끼로 보이지 않는 다른 데 있을 뿐이다. 나는 아주 다르게 느끼고 있다. 나는 세상이 놀라운 꿈으로 가득 찼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난 이 꿈이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찾고 있었다. p191


  이 환상의 세계가 52장의 카드가, 조커가 흐릿하게 다가온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는 선에서 이야기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갇힌, 익숙한 선에서만 생각하려고 하기 때문에. 물론 그것을 질서라고 얘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너머를, 본질을 본다면 더 깊은 깨달음과 더불어 더 넓은 상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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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푸른색 잉크로 쓴 여자 글씨
프란츠 베르펠 지음, 윤선아 옮김 / 강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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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짙어지는 글씨


  글을 읽고 작가에 대해 알고 나면 글의 내용이 달리 느껴질 때가 있다. 작가로서의 감성과 감각보다 외적인 것에 더 치중하고 싶지는 않지만, 낯선 작가를 아는 방식은 작품보다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각인될 때도 있다. 그러다 보니 프란츠 베르펠이란 작가는 단번에 ‘말러의 남편이야’가 되어 버렸다. 나같은 사람들이 많은 탓에 작가 역시 당대에 무척 시달렸던 모양이다. 워낙 알마 밀러의 사랑이 유명하다 보니, 아니 많은 예술가들을 사랑했기에 프란츠 베르펠 역시 그녀의 몇 번째 남자인가가 관심사였을 것이다. 알마 쉰들러는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으로 이후 클림트, 코코쉬카, 건축가 그로피우스 둥 먾은 연인을 가진 여자로, 그래서 팜므파탈로 더욱 알려져 있다. 팜므파탈의 남편이 된 프란츠 베르펠에게 온갖 연인들을 뒤로 하고 프란츠 베르펠과의 삶을 선택하게 된 것이 무엇인가 하며 그에 대한 관심도가 증가했을 것은 분명하다.

  <옅푸른색 잉크로 쓴 여자 글씨>의 내용은 매우 간단하다. 1936년 10월 아침, 레오니다스가 그날 받은 편지 한통으로 인해 안절부절하는 내용이다. 오스트리아의 교육부 차관이자 이제 오십인 레오니다스는 그 편지를 이십 여년 전 자신이 사랑한 여자가 보내온 편지라 생각하지만 편지를 뜯어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편지의 주인공을 만나던 그때 자신은 결혼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는 지난날을 돌아보는데 자신이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자존감도 없던 사람이었음을 생각한다. 그가 자존감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기숙사 옆방의 유대인 친구에게서 받은 연미복 한 벌로 무도회를 가게 될 기회를 얻은 후 상류사회로 진입할 수 있게 되면서다. 그곳에서 외모와 언변으로 인기를 얻은 후 가장 부유한 집안의 딸 아멜리와 결혼할 수 있었다. 아멜리가 집안의 반대를 이겨내고 그와 결혼했던 만큼 자신의 성공길은 아내가 보장해준 것과 다름없었다. 옛 연인으로부터 한 청년의 후원을 부탁받은 편지를 읽자마자 그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직감을 하지만,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가 내린 결정은 거짓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치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가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 아내의 의심을 받게 되자 그는 자신의 아내를 달래기 위해 아내에게 편지를 보여주게 되고 다시 예측하지 못한 전개로 이어진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는 베라의 아들이 자신의 아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인정할 경우 아멜리가 터트릴 분노와 그녀의 복수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는 아멜리가 당장 이혼 소송을 제기할 거라는 사실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별것 아니라는 듯 여유만만하게 누리고 즐기는 재산, 바로 이 재산의 상실을 그 어떤 것보다 더 무서워하고 있었다. p168


  한 남자의 외도를 알리는 편지 한통. 그때부터 남자는 그것을 들킬까 두려워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제 생을 돌아본다. 이 소설에서는 그 남자의 내밀한 심리가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갈등과 번민에 휩싸인 남자의 생각과 심리 변화를 시시각각으로 절묘하게 묘사한 것이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힘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가난한 남자가 부유한 여자를 만나 제 성공을 위해 자신의 여인과 아이를 버리고 성공길을 달리는 이야기는 드라마 단골 메뉴이긴 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이야기에 시대적 배경을 더하고 주인공의 성격이나 특징을 조금만 더하면 이야기의 방향은 달라진다. 작가는 그렇게 몇가지 터치를 함으로써 이야기의 방향을 급선회하게끔 하며 독자에게 다른 생각거리들을 안겨준다. 주인공이 편지내용이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은 편지를 받고 나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이 고뇌한다. 햄릿이 살아온 듯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만 그 바탕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주인공, 레오니다스라는 인물의 위선과 철저한 기회주의적 사고다. 그리고 주인공이 편지를 받은 1936년의 오스트리아는 나치의 시대였다. 작가 역시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도피한 것이 1938년이었다.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의 시대에 고급 관료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레오니다스가 나치 정권에 어떻게 대처를 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을 한나 아렌트식으로 악의 평범성이라고 해야 할까…. 철저하고 당연하게 전형적인 기회주의식 사고와 실천에 앞장서는 레오니다스이기에 그가 18년 전에 결혼을 빙자한 외도를 일삼은 일은 그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될 정도이다. 그래서 그의 내적 고민의 대사들이 구구절절하게 전개된다 하더라도 진실한 반성으로 이어지기보다 결국 그저 그런 결론으로 치닫기 위한 세밀함이 될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러한 지나치도록 세밀한 그의 내적 갈등을 따라가다 문득, 깨닫는다. 아, 레오니다스. 이 사람 자신, 유대인이라니…….


“용서라는 말……” 베라가 그의 물음을 실마리로 삼아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상투적인 빈말에 지나지 않아요. 난 그 말을 싫어해요. 후회할 만한 일을 했다면 그건 각자가 스스로에게 용서할 수 있을 뿐이에요.” p199


  우리는 누군가의 생각이 발화되기 전에는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없다. 한 문장의 말이 입으로 나올 땐 생각을 거쳐 나타나는 것이지만 생각은 수많은 가지를 확산하더라도 막상 내뱉는 것은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우린 그 일부를 그 사람의 모든 의도로 받아들이게 된다. 수많은 생각 속엔 보다 바람직한 생각들도 있고 타인을 위한 배려도 있고 잘못에 대한 반성의 순간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이 스치듯 지나가게 하고 욕망의 돌출과 생의 편리가 그 생각들을 누르고 결과가 되고 마는 말로 나타난다. 어쩌면 말로 나올 것이 정해진 채로, 그 정해진 결을 향해 생각들이 전진되었을 지도 모르겠다만.

  롤러코스터 같은 진지하고 세밀한 고민의 균열이 이루어내는 힘은 줄거리를 뛰어넘어 레오니다스에게, 이 소설에 몰입하게 한다. 생각없이 읽다가 소설을 지배하는 분위기에 휘감겨진다. 우울한 회색빛이 조금 깔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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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의 시대에 그저 좋은 사람이란 될 수 없다


셀레스트 응. 내가 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


   줌파 라히리, 애완의 시대, 트라우마, 자기연민과 자기암시, 꿈, 가정, 피임…

  아이들은 순수한가?, 그래서 결국 리디아를 죽인 자는 누군가. 리디아는 어떻게 죽었나.

   책을 읽는 중 스치고 지나간 생각들이다.


  “리디아는 죽었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의 배경은 1950년대에서 1970년대 즈음이다. 1977년 리디아가 사망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오가며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핵심은 ‘누가, 왜, 리디아를 죽였는가’로 모아진다.

  줌파 라히리의 단편 <그저 좋은 사람>이 떠오른 건 미국의 이민자 가정의 두 남매의 분위기가 이 소설의 남매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언뜻 미국은 이민자 가정들이 미국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갈등하는 소재의 이야기를 참 좋아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야기가 있는 소설마다 미국의 유수한 상들을 휩쓸고 미국 평단의 반응이 좋게 나타났다. 하긴, 평이 좋으니까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이런 소설들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오로지 나의 선택이 아니라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또다시 느끼는 건 그런 이민자의 이야기를 쓴 작가들은 역시, 이민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읽은 책에 한정해서이지만 생각을 거듭해도 거의 100%였던 듯하다.

  이 책의 작가 셀레스트 응 역시 홍콩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셀레스트 응의 아버지는 나사 소속 연구원이고 어머니는 화학과 교수라는 점을 볼 때 미국사회에서 나름 안정적인 배경을 가지고 생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 역시 이른바 금수저로서의 위용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이민자 가정이 전반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할 때, 가난으로 인한 어려움, 지식의 결여로 인한 소외감이나 무시는 비교적 덜했으리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작가의 경험이 어느 정도 가미된 이야기인 걸까. 소설의 주인공들은 중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그들의 세 아이들의 이야기다. 앞서 말한 대로 이 가정에서 둘째딸인 리디아가 어느날 사망한 사건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이 생각난 것처럼, 이 외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생각이 나긴 했다만, 이 소설의 소재는 익숙하다. 당연하겠지만 이민자 가정이 겪는 문제, 이민자 가정의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겪는 문제란 왕따와 정체성의 고민이니까. 하지만 작가는 이 익숙한 소재를 이야기하는 형식을 비틀어 상당히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엮어 간다. 아마도 6년 동안이나 이 소설을 수없이 수정한 것이 보다 유연하고 흥미있게 소설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힘이 되었을지 모른다. 무엇보다 그 힘은 “리디아는 죽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로 시작되는 추리와 미스테리한 형식에서 돋보인다고 할 것이다. 분명 함께 범인을 찾는 이야기인가 싶어 각을 잡고 범인을 추리하자라고 할라치면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한 가정의 내밀한 가정사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겪는 갈등과 욕망. 사랑과 소통의 이야기.


한번도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고 자란 20대 젊은이 중에 이유없는 무기력과 우울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자신의 느낌이 무엇인지, 감정이 무엇인지, 한번도 자신을 탐색해보지 못한 채 성장해 어느 순간 삶의 의미도, 동력도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누군가를 대신하는 삶은 온갖 걱정과 무기력을 채워진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그것을 잘하고 있는지 그 의미도, 목적도 모른 채 주어진 기대와 관심에 부응하려 애쓰지만 그 일 또한 온전한 자신의 선택이 아니기에 완전히 책임질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p70 <애완의 시대 중>


  <애완의 시대>가 생각난 것은 이 시대의 이 가정의 부모들에게서 베이비 부모 세대의 애환이 고스란히 전해졌고 이들 모두에게서 애완을 보았기 때문이다. 길들여지고 길들여지는 이 애완을 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얼까. 이 가족에게 <애완의 시대>를 추천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 피임도 절대적인 한 방법이다. 피임! 우리의 능력있고 강단있는 메릴린에게 필요한 것, 애초에. 자기결정권이란 말은 쉽다. 하지만 자기결정권의 궁극은, 최상은 결정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최상일 때 아닐까. 결코 상황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너의 결정을 따르리라” “너의 결정이 최고의 방법이다”라고 말한들, 공허함이 돌 뿐.


황금빛 찬란한 바닐라 향이 나는 인생을 꿈꿨을 테지만 결국 딸은 떠나버리고, 연필로 밑줄 친 꿈 외에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이 작고 슬프고 텅 빈 집에, 작고 슬프고 텅 빈 인생에 갇힌 파리 같았을 엄마의 인생을 생각하면서 메릴린은 날카롭고 깊은 아픔을 느꼈다. 그래서 슬픈가? 아니, 화가 났다. 엄마의 인생이 발하는 그 보잘것없음에 맹렬하게 화가 났다. 이거야, 메릴린은 분노에 싸여, 요리책을 어루만지면서 생각했다. 엄마를 기억하려면 이게 필요해. 내가 간직하고 싶은 건 이것뿐이야. p120~121


  사망한 것은 리디아인데, 리디아만큼이나 가족 모두가 사망한 것이 여겨지는 이야기들을 한바퀴 돌고 나면 정말이지 막내 한나의 존재가 각인되며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순수한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이 땅의 수많은 아이들이 저들과 ‘다른’ 것에 항상 거리를 두다 못해 ‘낙인’을 찍는데 앞장선다는 것이다. 누구랄 것도 없이 순수하기에 순수한 놀림 그 이상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행동들을 아이들은 하고 있다. 정말로 아이들은 순수한가. 이 아이들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 아이들 스스로가 아니라는 점을 알기에, 안타까움과 울분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어른은 그렇게 변해가는가. 그들의 사고는 왜 지식을 얻으면 얻을수록 지식을 변질시키려 하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눈이 파랄 수 있지? 어쨌거나 중국인 아냐?”

    리디아가 눈을 깜박였다.

    “엄마가 미국인이잖아.”

    “갈색 눈이 우성이라고 생각했는데.” p269


  우리는 누구나 ‘나’가 되어야 한다. 그 어느 누구의 ‘나’가 아니라 나의 나가. 그러나 우리는 ‘누구의 누구’를 분리하여 말해질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내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어떤 사회에 가정에 있느냐가 전적인 지분을 가지지 않는다고는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지분으로 나를 휩쓴다. 그때에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말들이 아닐까. 그것은 마냥 ‘이기적’인 것과는 다른 맥락의 말. 중심과 가치를 잊지 않고 잃지 않기 위한 최선의 길일 것이다.


  웃고 싶지 않을 땐, 웃지 않는 거야. 꼭 기억해야 해. p366

 적어도 난 내가 할 일을 다른 사람이 말하게 하진 않는다고, 절대로. 적어도 난 두려워하진 않아.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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