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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동사의 멸종 - 사라지는 직업들의 비망록 한승태 노동에세이 3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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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일까

 


어떤 동사의 멸종-사라지는 직업들의 비망록, 한승태, 시대의창, 2024-06-17.

 


  우리에게 아름다움은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니까

  광고를 듣다가 모든 동사가 사라지고 아름다움만 남는 세상을 떠올렸다. 단어 하나에 책제목이 연상되어 참으로 쓸데없이 이어지는 잡다한 생각들.

  이 책은 네 가지 직업에 대한 저자의 경험을 기록한 책이다. 콜센터 상담원, 택배 물류센터 상하차, 뷔페식당 주방, 빌딩 청소원을 저자는 각각 전화받다‘, ’운반하다‘, ’요리하다‘, ’청소하다라는 동사로 이야기한다. 무수한 직업 중 위 네 가지 직업을 경험한 것은 우연은 아니다. 저자는 사람들이 일하는 이야기를 쓰기위해 현장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사라져가는 직업들의 비망록을 남겨보려고 한다. 대규모 단종이 예고된 인간의 노동이라는 카메라를 통해 오늘날 한국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보려 한다. 인간에게는 특정한 노동을 통해서만 발현되는 희로애락이 있다. 그 노동의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고통과 욕망을, 그것들의 색깔, 냄새, 맛까지 전부 기록하고 싶다. 직업이 사라진다는 것은 생계 수단이 사라지는 것만이 아니라, 그 노동을 통해 성장하고 완성되어 가던 특정한 종류의 인간 역시 사라지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AI 노동이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일찌감치 고효율을 따지며 동사 형태가 더 어울리는 노동은 로봇이 대체할 것이라고 했는데, 막상 시간이 지나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게 되었다. 오히려 사무직 노동이 AI로 대체되고 것이 더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저자는 여러 보고서를 인용하여 AI로 대체될 확률이 높은 직업을 표시하고 있는데, 저자가 참고한 보고가 다소 오래된 자료인만큼 책이 출간된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어떤 대체확률이 높은 직업의 순위는 또 다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아무튼. 이 네 개의 노동을 통해서 성장하고 완성되어 가는 특정한 종류의 인간 특성은 무엇일까. 그들은 어떻게 성장하고 완성되어갔을까. ’직장‘, ’이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나타나는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특징을 생각하더라도, 이 직업군이 속한 에 대한 보도는 긍정적인 내용들이 없었다. 저임금 고강도 노동 외에 가해지는 특성이 이곳에 있었다. 그렇기에 이 직업들은 사라진다는 동사에 아주 걸맞은 직업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현장 경험은 생생하기에 왜 이 직업의 대체확률이 높은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콜센터 상담원은 사라져야 할 직업이라고 꼽고 있다.

 

돼지의 배설물은 따뜻한 물과 비누만 있으면 씻어낼 수 있지만 점잖은 사람들이 입으로 쏟아놓는 오물은 1, 2년이 지나도 말끔히 사라지는 법이 없고 갑자기 기억 속으로 파고들어 와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게 만든다.

 

  그러나, 택배 상하차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소위 까대기업무를 하는 사람 중에서 우울해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 얘기에 갸웃한다. 어떤 일터의 분위기가 문제인건가. 사람이, 문제인 건가. ’점잖은 사람들이 입으로 쏟아놓는 오물‘! 점잖은 척하면서 쏟아놓는 오물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결국 직업이라는 종류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는 존재가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사람을, 직업으로 상하를 나누며 나는 보다 너라는 사람이 하고 있는 일보다 더 아름다운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우월감. 다른 사람을 낯추며 본인 스스로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는 그런 사람‘. ’그런 인간

 

  최근 흑백요리사의 열풍으로 요리‘, ’셰프에 대해 긍정적인 분위기다. 과거에는 식당 아줌마‘, ’밥 해주는 사람정도로 인식되던 요리사셰프라는 외국어로 명명하면서 다르게 인식되고 대우받고 있다. 한편으로 그 세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힘들고 고된 일이라 이야기한다. 특정한 몇 명만이 열광적인 지지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을 뿐. 그거야 어디든 무엇이든 그렇지 않겠냐마는, 결국 의 좋고 나쁨이란 그 일에 대한 가치를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아닌가. 직업의 세계에 귀천이 있음을 제도와 인식이 강화하며, 오로지 의 가치를 중시하는 그런 인간들이 전화받다‘, ’운반하다‘, ’요리하다‘, ’청소하다아름답지 않고 천한것으로 취급하는 한, 달라지지 않을 이 노동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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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가게, 오늘도 문 열었습니다 이미경의 구멍가게
이미경 지음 / 남해의봄날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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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조금새끼


구멍가게, 오늘도 문 열었습니다, 이미경 남해의봄날, 2020-06-15.


 

  문득, 눈을 떠보니 목련이 절정이었다. 벚꽃은 꽃망울이 나뭇가지에 몽울몽울 모여 준비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제 피려 한다. 어제 내린 비가 멈추고 햇살은 어제보다 더 따스해졌고 어김없이 봄은, 와 있다. 내가 더디게 느꼈을 뿐. 2026년도 벌써 3월 중순이 한참 지나있으니 짧게 피고 지는 꽃들처럼 어김없이 봄도 금세 지나갈 테다. 늦게 느낀 만큼 이 봄은 얼마나 짧게 느껴지려나.

예전엔 해가 바뀌기만 해도 겨울보다 봄이 더 가깝게 느껴졌는데, 2월이면 아, 봄이다! 하고 외쳤더랬는데 계절의 변화가 쉬이 느껴지지 않는다. 기후변화 때문이 아니라 나의 변화때문인건가. 봄이 느껴지는 봄비와 봄꽃. 목련이 활짝 피었을 때마다 와 있는 봄을 알지 못하고 올해는 이렇게 시간이 흘렀고, 문득 이 책의 그림들이 생각났다.

  전국 구멍가게의 풍경을 그린 동전 하나로도 따뜻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처럼 이 책 또한 전국의 또다른 구멍가게를 그렸다. 여기서 그린이란 실제로 그림으로 그렸다는 말이다. 책 속에 가득한 목련 나무와 벚꽃 나무나 눈길을 끌고 마음을 이끄는 책이다. 대부분의 구멍가게 앞에서는 나무들이 있었는데, 그 나무들 대부분이 목련이나 벚꽃 나무다. 그리하여 봄의 느낌이 강한 책이다. 우리집 구멍가게에도 목련이나 벚꽃나무가 있었더라면, 아니 다른 나무라도 있었더라면 이 구멍가게 속에 그림으로 남았으려나……. 아무튼 출판사도 남해의 봄날이라서인지 봄날이면 떠오르는 책.



  구멍가게 2탄격인 이 책을 보며, 전국에 이렇게 많은 구멍가게가 있었나 생각했다. 어쩌면 한번쯤 지나쳤을지 모르는 구멍가게의 모습은, 그림으로 그려진 구멍가게의 모습은 그 주변 풍경과 더불어 정겹고도 쓸쓸하다. 작는 구멍가게가 낯설지 않아서 정겹고, 언제 이 가게가 문을 닫을지 몰라 쓸쓸한. ‘오늘도 문을 연구멍가게들. 풍경뿐만 아니라 구멍가게의 이야기도 귀기울여 본다. 어찌어찌해도 세상은 변하고 구멍가게도 사라지기 마련이니까.


지금은 사라진 마을 앞 째보선장이 고깃배와 어부로 북적였을 때, 가난한 뱃사람들이 바다로 나가면 동네 아낙네들은 공장에서 벽돌을 만들며 남정네들을 기다렸습니다. 고기가 안 잡히는 조금 때가 되면 어부들은 잠시 집으로 왔다 다시 바다로 돌아갑니다. 그러고 나면 아낙네들의 배가 점점 불러 오고 열달 후 비슷한 시기에 아이들이 태어납니다. 이 아이들을 조금새끼라고 부른다 하네요. 꽃 같은 나이에 혼인해 바닷물보다 짜디짠 세월 속에 주름진 얼굴과 굽은 허리를 얻은 할머니들이 바닷가 산비탈에 의지해서 살고 있습니다.

 

   바닷가 마을 전남 목포의 온금슈퍼 속에서는 조금새끼라는 단어를 만난다. 조수(潮水)가 가장 낮은 때면 바닷가 마을은 아주 북적였을 듯. 생각해보면 조금새끼는 2002년의 월드컵 베이비와 같다. 비록 그 단어 속의 정서와 분위기는 다르지만 말이다. 조금새끼는 목포 바닷가의 고즈넉함과 짠기가 그득하다. 하지만 월드컵베이비는 케이크의 단 맛이 그득하다. 그런 느낌이다. 어느 순간 똑같은 간판 몇 개 수백개 즐비한 편의점처럼 줄지어 선 조각 케이크 같다고나 할까. 너무 달아서 머리가 울릴 정도인.

  내 눈 앞에는 편의점이 수두룩하지만 이 봄날에는 저자가 그린 슈퍼를 찾아가 보고 싶다. 인스턴트 정형화된 틀이 아니라 오래된 나무 한아름 품고 있는 그런 곳으로. 오늘도 변함없이 문을 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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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숲은 어디로 갔을까
김덕일 지음 / 상상창작소 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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푼크툼

 

사라진 숲은 어디로 갔을까, 김덕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한없이 아득하다’. 위에서 무언가를 보는 일은 잦은 일이 아니기 때문에 벅찬 기분이 든다. 하지만, 공간과 시각의 한계로 사선으로 볼 수밖에 없는 그 풍경에 넋을 잃으면서 너무 크고 넓다는 생각과 더불어 아주 작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풍경을 보기 위해 왜 그토록 위로 오르고 싶은지를 알게 한다.

  그럴진대, 사선이 아니라 정면으로 풍경을 내려다보는 맛은 어떨까. 들판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하늘에 누워 아래를 바라볼 때 보이는 그 풍경. 비행기에서 창문으로 보는 것이나 높은 곳에서 내 눈 아래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주 보는 광경.

  이 책은 그러한 풍경을 보여준다. 내가 보지 못한 시선의 풍경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작가가 드론으로 찍은 숲의 풍경이 담긴 책이다. 작가는 '새의 눈(버드 아이 뷰)'라고 표현한다. 책을 펼치면 숲이 풍경보다 무덤이 더 도드라지게 보인다. 이쯤 재목이 사라진 숲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 난 신문기사 속 무덤 사진을 보고 이 책을 찾았으니, 왜 제목이 무덤이 아니지라는 생각을 더 했고 숲보다 많은, 숲이든 땅이든 어느 곳에든 자리한 무덤 사진을 열심히 쳐다보았다.

  그렇다. 책에는 삶의 가까이에 있는 무덤 사진이 많은데 작가는 사진을 찍다보니 이곳이 숲이 있었을 장소인데 싶었고, 숲이 어디로 갔는가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경작지가 늘어가는 것 또한 숲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지만, 경작지에 있는 무덤은 숲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경작지의 한 부부처럼 느껴진다. 경작지든 경작지에 있는 무덤이든 숲을 사라지게 하는 것들이긴 할 거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홀로 남겨진 시간을 맞이한다. 사라지는 숲과 어느새 잊힌 추모의 파편 사이에서 무심한 자연의 흔적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흔적에 발을 딛고 있으면 평행선처럼 맞물릴 수 없는 감각의 표상이 머릿속에 맴돈다. 숲이 묘를 만들고, 묘는 더 이상 사람들이 파헤칠 수 없는 일정한 지대를 만든다. 그 구역을 따라 뻗어가는 사선들과 불규칙한 굴곡의 이끌림이 묘한 긴장감을 준다. 그 앞에 앉아, 또는 그 시선으로 그곳을 바라보며 맞닿을 수 없는 시간을 사색한다.

 


  작가는 전북 고창의 풍경을 주로 담았다. 이 지역은 옛 삼한의 모로비리국이라나. 숲이나 들판의 고인돌뿐만 아니라 붉은 황토밭 사이에 자리한 무덤 사진. 붉은 황토밭, 아직 무언가를 심어놓기 전 갈린 붉은 황토밭 한켠에 자리한 묘를 보고 있으면 묘라기보다는 그냥 밭의 한부분으로만 생각된다. 무덤은 산 속에나 자리하는 것만 같았는데 옛 고인돌이나 무덤을 보는 것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황토밭, 경작지 속의 묘지는 묘하게 이질적이지 않다. 차라리 어느 산 속에서 마주한 웃고 있는, 스마일 스티커와 같이 보이는 무덤이 더 이질적이라고 해야 할까. 넓은 경작이 한켠, 묘의 풍경이 스마일 모양으로 여겨지는 건 작가가 버드 아이 뷰로 찍었기에 볼 수 있는 이미지일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조심스럽고 무서움을 주는 무덤이 아니긴 한데, 붉은 황토밭 속의 무덤은 그 붉은 색깔 때문인지 더더욱 뚜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왜인지 숲에 있을 때보다 더더욱 무덤으로 인식된다고 할까. 숲속에 초록색과 익숙하거나 겨울의 메마른 숲 속에 희미하거 푸석한 모습이 익숙해서 몰랐던 너무나 또렷한 경계. 붉게 테두리쳐 놓은 듯한 저, .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의 공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공간.

과거와 미래의 공간. 하늘과 땅의 공간. 선주민과 미래 주민의 공간.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공간. 가시적이지만 비가시적인 세계.

그래서 한쪽을 더 자세하게 마주할 수 있는 공간.

 

  

  이러한 사진집을 내며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무덤 사진 외에 개간으로 황폐한 산의 모습 또한 담겨 있다싱크홀처럼 초록색이 뭉텅 비어버린 산숲의 모습그러나 산은숲은 그 자체의 생명력으로 치유력으로 오랜 시간 동안 그 푸르름을 만들어 가고 있다이러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이 파괴한 산의 모습을 통해 숲의산에 대한 소중함을 더욱 느끼게끔 하려는 것이다작가는 미래 세대에 빌려온 자연을 어떻게 돌려줘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으로 이 기록을 했다고 얘기한다.


 

새의 눈으로 사람들의 숲을 본다. 숲이 사라지는 대신 경작지는 늘어만 간다. 늘어난 경작지만큼 숲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이곳도, 도시도, 경제적 경작지는 늘어만 가는데 그 빌딩 숲에서 신선한 바람은 기대할 수 없다. 인간은 바람과 숲의 동무였는데

 


  이 책 속에서 명징하게 살아남은 말은 푼크툼(punctum)’이다. 이 말은 롤랑 바르트가 제시한 개념으로 사진을 감상할 때,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개인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개인마다 사진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나의 푼크툼은 처음 적은 그 느낌처럼 아득하다’, 그리고 슬프다’. 숲에 자리한 무덤, 경작지 그리고 또렷한 무덤의 경계, 그건 숲의 파괴인 걸까. 인간과 자연은 대립인가,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인가. 오랜 시간 한 자리에서 산의 숲의 무너짐과 회복을 보고 있는 저 무덤은 생명력이 있는 건가. 살아간다는 것과 살아난다는 것은 다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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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
메리 파이퍼 지음, 안진희 옮김 / 위고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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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렷하지 않은 사계절처럼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 메리 파이퍼, 위고, 2019.


  1972년 첫 내담자를 만나 30여 년 동안 심리치료사로 일한 메리 파이퍼가 젊은 심리치료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에세이다. 좀더 이론서에 가까울까 했지만 이제 심리치료사의 길에 들어선 이들에게 심리치료사로서의 기본 자세에 관한 경험과 생각을 적은 글이다. 편지형식으로 보내는 이 글은 무척 따뜻하고 정감있는 어조다. 또한 정갈하게 느껴진다.

  심리치료사는 상담과정에서 수많은 유형의 사람을 만난다. 약물과 알콜 중독자, 학대당하는 여성, 분노 가득한 십대, 많은 사람을 돌보는 사람, 이러저러한 상황에 놓인 가족, ‘무관심한 배우자, 성질 못된 십대 자녀, 만사를 자기 뜻대로 하려는 상사에 대해 하소연’ 하는 사람들… 저자에 의하면 ‘우리들 모두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인간성으로부터 도망치려 하기’ 때문이다. 다만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에게 심리치료사는 어떠한 태도를 보일 것인가.

  각각이 처한 상황에 맞는 방법을 행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말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방법은 오랜 경험을 통해 심리치료를 체현한 심리치료사가 자신의 신념과 가치에 맞게 구현해 내는 것이다. 저자가 말한 좋은 심리치료사의 자세로서 인상적인 것은 ‘애매모호함’에 대한 것이다.


좋은 심리치료사들은 애매모호함을 잘 참습니다. 한 인간이 처한 상황은 다채롭고, 다면적이고, 특별합니다. 하나의 방식이 모든 경우에 다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건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방법이 아니면 절대 안 돼’라고 생각하는 완고한 심리치료사들은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흑백논리에 이런 자부심은 회색빛 세계에 살고 있는 내담자들을 미칠 지경으로 만듭니다.


  심리치료사들은 지치고 아프고 우울한, 최대한 많은 부정적인 언어를 끌어모은 상태의 내담자들을 만난다.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어떡하든 그 심연을 이끌어 내고 싶어 안달복달하게 될 터,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의 결과를 빨리 보고파 하는 마음일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타인의 심연에 이르기가 쉬울까. 애매모호함을 잘 참는다는 말이 정말로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싶다. 바삐 흘러가는 세상에서 점점 뚜렷해지지 않는 사계절처럼 모호한 경계를 지나고 나면 좀더 뚜렷하게 보일 것이다. 그 지점을 지나고 나서야 계절은 있었다는 것을.

  이처럼 수많은 이들의 애매모호함을 견뎌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끌어내고 생각의 방향을 전환시키려 애쓴 좋은 심리치료사를 보면 나도 그 상담실 문을 열고 싶어진다.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일방적으로 그들의 생각을 전환시키고 문제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신뢰를 형성하며 상호작용하는 관계라고 말한다. 일방적으로 지식과 기술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내담자에게서 심리치료사 또한 배우게 된다는 것을 저자는 말한다.


좋은 심리치료사들은 예전의 상식을 유지하는 일과 새로운 생각을 고취하는 일 사이에 놓인 평균대 위를 균형을 잘 잡고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이해가 심오한지 혹은 우리의 조언이 적절한지 우리는 절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자연과학이 아닙니다. 그보다, 심리치료에는 체계적인 지식과 직관, 친절이 필요합니다. 심리치료에서 정말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진짜 사람과 진짜 사람이 서로 연결되는 일입니다. 


  내가 이제 막 심리치료사의 길을 들어섰다면 이 책을 읽으며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심리치료사가 되고픈 열망에 들뜰 것 같다. 가슴 두근거리며 설렘과 신념을 다지는 그런 마음이 들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해도, 아니 심리치료사가 아니더라도 어떤 물음에 직면했을 때 스스로 생각하고 헤쳐 나갈 자세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다만, 보헤미안 속담 하나가 눈에 띄었는데, 긍정적인 해석이 되지 않는다. 아, 저절로 행해지는 삐딱해지는 마음. ‘신’이시여, 어찌 그런…. 나는 저런 기쁨은 사양한다, 절대로. 아,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기엔 나는 심리치료사로서의 자질은 안되갔구나!


테드 쿠서의 『로컬 원더』는 오래된 보헤미안 속담을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신은 가난한 사람을 기쁘게 하고 싶을 때, 먼저 그에게 당나귀를 잃게 한 다음 다시 찾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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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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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찮다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손홍규, 교유서가, 2018-12-05.


  한파에 눈물이 떨어지지 않고 머물러서가 아니라 한해를 마감하는 날이라서가 아니라, 돌아보면 ‘마음을 다쳐 돌아오는 저녁’인 나날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그저 인생사가 희로애락인지라… 흐르는 시간탓이라고 말할 밖에.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점점 이 세상과의 안녕과도 가까워짐을 자꾸 인식하며 그런 일들 또한 많아진다. 다친 마음과 몸이 한번에 돌아오는 날 또한 다반사이다. 새삼 나만이 겪는 일이 아닐진대 무어 이리 허우적거리게 되는지 모를 일이다.

 『마음을 다쳐 돌아오는 저녁』속에서 너무나도 닮은 아버지, 어머니를, 할머니를 만난다. 심지어 소까지도…. 짜장면이 싫다는 어머니는 이제 햄버거를 맛나게 드시는 광고가 등장하는 판인데 부모님은 여전히 ‘너희 먹어라, 나는 됐다’를 시전하신다. 까마득한 어느 때 손가락이 잘린 아버지는 붕대를 감아 시림을 막았다. 작가가 제 아비의 잘린 손가락을 보며 소설을 영글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 손가락을 보며 무엇을 했던가. 반복된 수술로 힘겨운 어머니가 내 끼니를 걱정할 때 나이든 딸의 끼니 걱정일랑 마시라며 서로 핑퐁처럼 걱정과 안부를 오가다 결국엔 무조건적인 ‘나는 괜찮다’는 말씀에 버럭으로 마감했던 날들을 떠올리는 것이 정말 사실인가. 그런가,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이 너희가 하는 대로, 하라는 대로, 너희 좋은 것이면 다 좋다더니 어찌 그리 선거에서만은 끝끝내 좋고 싫음이 분명하신지 꽁한 얼굴로 노여움을 풀지 않던 할머니…가시던 날도 선거 무렵이었으니 오히려 결과를 보지 못하고 가신 것이 더 나았으려나. 이산가족 상봉은 취소되고 북으로 띄운 편지만이 되돌아왔으니 직접 그곳으로 가셨던 게 더 빨랐을지도.


사실 나는 절망을 말하고 싶다. 절망한 사람을 말하고 싶다. 절망한 사람 가운데 정말 절망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를 말하고 싶다. 멀쩡하게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사랑을 나누는 사람인데 깊이 절망한 사람이기도 하다는 걸 말하고 싶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이토록 진부하게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손가락을 잃은 뒤로 아버지가 어떻게 절망했는지, 절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절망하지 않은 사람처럼 살아왔는지를 쓰고 싶다.


  우습게도 절망하는 건 나다. 누군가로 인해 생의 피폐함에 있었을 때도 절망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왔던 그들의 삶 옆에서 젊은 나의 포효가 가장 높았고 지속되었다. 그들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저 ‘아짐찮다’를 온몸으로 내보이고 있을 뿐. 통곡은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어디에다 쏟고 있는 걸까. 

  이 책 작가인 아버지는 딸의 아픈 팔을 보며 아이가 자라 마음이 다쳐 돌아가는 저녁이 많아질 것을 염려하는데 나는 조금이라도 몸이 아픈 채 돌아온 어머니를, 아버지를 보며 훗날 내 마음이 다쳐 돌아갈 저녁을 염려한다. 아직 닿지도 않은 날을 당겨와 마음이 푹푹 꺼지는 감정을 경험하는 이것은 두려움일까. 정직하게 흘러가는 시간으로 그들을 ‘여읠까’ 싶은 마음에는 그들보다 나의 감정만이 우선하여 있다는 생각에 미치도록 놀란다.

  이제는 몇 번을 확인하여 되묻고, 부연 설명을 곁들어야 그들, 내 부모님과의 이야기 한뼘이 지난다. 누군가를 말한대도 몇 번의 사람을 거치고, 몇 번의 사건들을 거쳐야 지칭하는 대상이 명확해진다. 단어는 또 말해 무엇하랴. ‘체험하는 순간에야 오롯이 내 말이 되기에’ 그들 세대의 단어와 지금의 나의 단어가 얼마나 먼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그리하여 돌고 돌아서 말하는 사이 이제야 세월이 품은 그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아간다. 살면서 직접 보지 않은 것들 이외에 알지 못했던 것. 진즉 묻지 않았던 그들의 삶, 이야기.


이야기는 실제 삶을 불안에서 건져주지는 못하겠지만 그 불안을 무사히 건너갈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 만약 이게 최소의 원칙이라면 좋은 문학은 이 최소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하며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내는 것이어야 한다. 어떤 존재든 그 존재의 의미는 그의 내부에 있지 않다. 의미는 그에게 허락된 것을 넘어서는 순간 태어난다. 우리가 서로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지 못한다면 우리가 지난 세월 서로에게 무심했음을, 우리에게 사연이 없다면 우리가 헛되이 함께 살아오기만 했음을 말해준다. 이야기꽃은 남루한 삶 한가운데서 피어나 우리의 사연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꽃이다.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단어와 문장으로 써 내려간 작가의 지난 시간의 이야기가, 그를 둘러싼 이들의 이야기가 작가에게 불안을 무사히 건너가는 기제가 되었을까. 작가가 쓴 소설들을 떠올리며 그리고 꿈을 꾸듯이 이 책의 문장속에서 허우적인다. 타인의 슬픔과 비극을 외면치 않고 ‘사람과 세상에 대한 예의’를 배우며 작가가 세상을 담는 동안 이 위안과 후회를 머금게 해주는 시선에서 나도 오래 머물게 된다.

  그토록 말없이 품고 있던 그들 생의 이야기가 또 한해 마감되어 간다. 한편으론 작가는 소설가로서 그들의 삶을 이야기로 담아내었지만 한 사람으로서, 자식으로서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이유를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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