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시스와 글쓰기


나는 <율리시스>에 아주 많은 수수께끼를 숨겨 두었기에

앞으로 수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분주할 것이다.


 

   랩같은 문장. 마침표 없는 문장.

  내가 <율리시스>를 보완할 수는 없다는 점은 분명하므로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 어쩌면 몇 번을 더 읽고 나면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대해 주구장창 분석해 댈 수 있을까.

  어떻게 생각하면 경외감, 달리 생각하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율리시스>를 읽었다. 방대한 분량에 놀라고 이것이 하루의 기록이라는 것에 놀라고 이것이 율리시스의 뼈대를 가져왔다는 데 놀라고 조이스의 다른 작품의 주인공들의 돌려쓰기라는 데 놀라고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델이라는데 놀라고 아무튼 놀라고 놀라고.

  이 작가, 교묘한 방법을 쓴다. 자신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야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생각보다 글이 편하게 읽혀졌다. 어쩌면 다른 생각들을 하지 않고 별생각없이 읽으려 했기 때문일지도. 처음엔 무수하게 달려있는 각주 때문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 많은 각주들을 다 이해해야 하니 첫 장이 넘어가지 않았는데 이 책을 북리뷰가 끝난 이후에도 완전히 다 읽기로 작정을 하고서야 각주를 잠시 잊고 그냥 문장들을 읽어나갔다. 그러니 내 식대로 그러려니 하면서 글이 넘어갔다. 아마도 다시 찬찬히 읽으면서 글들을 곱씹게 되겠지만, 어쩌면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해석하려는 생각들이 이 글을 읽는 방해요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너무 많은 의미찾기에 매달리지 않는 것도 재미있게 읽는 방법이긴 한데.

   제임스 조이스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구성과 등장인물을 자신의 <율리시스>를 써 나가는 축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제목과 목차만 봤을 때만 해도 이것은 그 유명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러다가 이것이 왜 율리시스인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율리시스와의 연관성을 계속 곱씹는 맛이 있다.

 오디세우스가 그 긴 세월을 바깥에서 떠돌아다닌 이야기라면 이 작품은 머릿속에서 하루종일 떠드는 이야기다. 제임스 조이스가 태어난 곳, 아일랜드 더블린을 배경으로 1904년 6월 16일 아침 8시부터 그 다음날 오전 2시까지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이 율리시스 속에 담겨 있다.

  <율리시스> 전문가들의 작품 해설들을 끌어와 이 뼈대를 설명하자면, 율리시스는 크게 세 가지의 내용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3부 구조와 같다. 텔레마키아, 율리시스의 방랑, 귀향의 구조라는 것이다. 그리고 각 장들은 역시 호메로스의 그것들을 차용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조이스는 <율리시스>를 온전한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었는데, 등장인물들이 그의 이전 작품들의 등장인물들의 연결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스티븐 데덜러스는 작자 자신이기도 하며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이다. 율리시스에서는 조이스의 작품들 속 등장인물들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단,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는 점이 있지만. 그런데 또 이들 모두는 상상의 인물이 아니다. 자신의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은 거의가 실제 모델이 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주변인물들에 대한 탐색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써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글쎄. 감동이란 건 무얼까. 어떤 글귀가 마음에 남는다? 이야기의 내용이 탁월하다? 그냥 율리시스는 놀랍다. 가만 보면 별 일 아닌 것들을 쉽게 써내려가고 있어, 전혀 대단치 않은 작품이다. 왜냐고, 이것은 우리가 늘상 하고 있는 말과 이야기들 아닌가? 딱히 신비로울 것도 놀라울 것도 없는. 어찌 보면 익숙한. 이것을 소설로 끌어들였다. 그래서 다들 놀란 것 아닌가. 이런 식이라면, 나도 소설을 쓰겠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늘, 첫 시도가 중요한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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