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콜럼버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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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고발자


굿바이, 콜럼버스. 필립 로스,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14.8.29.


  1933년생인 필립 로스는 많은 책을 썼다. 가만 보니 핍립 로스의 소설을 제법 읽었다. 어째 필립 로스가 많은 책을 쓴 것보다 그가 쓴 책들을 거의 다 읽었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진다. 그만큼 필립 로스의 책을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좋아함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확실한 건 필립 로스의 첫 번째 작품이자 청년기 작품인「굿바이, 콜럼버스」를 먼저 읽었더라면 그 뒤로 필립 로스의 책을 읽는 일은 더디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필립 로스의 문장과 이야기하는 방식과 이야기에서 받은 깊은 인상은 오랜 세월 다져진 필립 로스에게서 나온 진중함, 연륜에 있었나보다. 글이, 이야기가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어 반복된 주제의식에도 때론 비슷한 상황 설정에도 필립 로스의 책속으로 빨려가게 했다. 긴 호홉의 필립 로스의 글에 매료된 상황에선 청년기, 스물 여섯의 필립 로스의 작품은 재기발랄한 아이러니를 주긴 했지만 장년기 이후의 느낌보다는 확실히 가볍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후 필립 로스에게 반복되어 나타난 유대인 문제에 관한 주제를 너무나 명확하게, 딱,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필립 로스의 소설 세계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끔 되었다. 여전히 그의 글 속 등장인물들은 작가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듯하고.

  「굿바이, 콜럼버스」는 중편이고 이 책에는 다섯 편의 중단편이 더 실려 있다. 일평생 필립 로스는 유대인들의 비난을 받았는데 그의 작품의 주제가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풍자와 신랄한 비판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었다면 더한 공격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유대인이기에 어쩌면 그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자신을 규정하는 문화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이 글로 표현된 것이라 한다면 이 내부고발자적 시선은 그에겐 고통을 깊이 담은 고통의 글쓰기였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필립 로스의 주제의식에 힘입어 이 중단편 속에서 「신앙의 수호자」와 「유대인의 개종」이 그토록 눈에 띄었는지도 모른다. 담담히 읽은 다른 작품에 비해 「신앙의 수호자」에서는 나도 모르게 감정을 노출하기까지 했다.    

 「굿바이, 콜럼버스」는 필립 로스의 소설에서 더러 봐온 이야기였다. 한창의 젊은 남녀의 사랑이야기, 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사랑하지만 유대교 교리에 따른 갈등과 계층의 차이를 느끼게 되는 그런. 게다가 잘 사는 쪽은 늘 여자이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화자는 남자인. 그것은 청춘이 갖는 불안함인 걸까, 그들 세계가 주는 어쨌든 여기 등장인물들이 낯설지 않은데 이들이 자라, 결국 필립 로스의 다른 소설 속에 등장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오지가 알고 싶은 것은 늘 다른 것이었다. 오지가 처음에 알고 싶어했던 것은 「독립선언서」에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나오는데 빈더 랍비는 어떻게 유대인을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빈더 랍비는 정치적 평등과 영적 정통성의 차이를 설명하려 했지만, 오지는 자기가 알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라고 계속 우겼다. 그때 처음으로 그의 어머니가 학교에 왔다.


 「유대인의 개종」은 위와 같이 오스카 프리드먼의 궁금증에서 시작한다. 또한 유대인이 오직 유대인의 불행만을 슬퍼하는 것, 예수의 신성에 대해서도 궁금한 이 소년에게 랍비도 엄마도 아이의 뺨을 때리는 것으로 답한다. 이에 지붕으로 올라가 이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는 아이. “약속해주세요. 하느님 문제로 누굴 때리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약속해주세요.”라는 아이의 외침이 안쓰럽게 귓가에 남겨져 있다.

 「신앙의 수호자」자야말로 유대인에 관한 가장 풍자적이고 또한 비판적인 단편이 아니었나 싶다. 등장인물인 셸던의 행동과 말로 인해 몇 번을 가슴을 쳐야 했다. 답답함으로. 오직 유대인으로 살고자 하는 이 어린 장병에게서 시오니즘의 절정을 본 기분이었다. 이 위선적인 신봉자의 행태는 그곳이 군대였기에 더욱 더 정점의 감정을 느끼게끔 했다. 생각거리를 주는 것만큼이나 셸던의 철없고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행태에 무조건적인 분노가 솟았다는 점에서 난 종교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구나를 느낌과 동시에 막스의 외할머니과는 아니구나를 함께 느꼈다. 그러니까 셸던의 행태에 대해 자비가 정의보다 우선한다라는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없었다. 군대에서 유대인의 전통과 교리를 들먹이며 유대인이 먹어야 할 음식을 요구하고 유대인의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며 외박을 끊어 중국집 요리를 즐기는, 자신의 인맥을 동원하여 부대 배치를 바꾸는, 그리고 그런 모든 일들이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라고 외치는, 그리고 그 행동에 아무런 거리낌없는 이 셸던에게서 많은 얼굴이 겹치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엡스타인」의 결말은 웃프다. 글쎄, “사람들이 자기 걸 빼앗아 가기 시작하면, 누구나 손을 뻗게 돼. 움켜쥐게 돼…… 어쩌면 돼지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라고 말하는 루 엡스타인은 무엇을 빼앗기고 있다고 느꼈을까. 열심히 일했고 사업에 성공했지만 가업을 이을 아들은 어린 나이에 사망했고 딸은 사회주의 운동이나 하며 말마나 ‘자본가’ 아버지를 비난하고 조카 녀석과 딸은 젊음의 몸매로 각자의 파트너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사랑에 몰두하는데 자신의 아내는 아름다움이 사라진 지 오래. 이웃집 여인에게서 품은 욕망이 자신이 움켜쥐고 싶은 것이었을까.

 「노래로 그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그렇다. 1950년대의 미국. 인간은 얼마나 개별적인가. 그러나 많은 이들이 누군가를 판별하는데 그렇게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 단편적인 것들로만 판단하며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다 예단해 버린다. 이런 일들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알면서도.

 「광신자 엘리」에서는 님비 현상을 느꼈다. 한뿌리인 듯한데, 이 종교의 갈라짐이 인간의 유대를 얼마나 막고 있는가 새삼 느껴진다. 공동체라는 것은 더불어 살아감이 아니라 그들끼리의 삶의 구축인듯하다. 공동체, 공동체 하면서도 갈등하는 집단 사이에서 미친듯한 이 엘리의 절규가 참 안쓰러웠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들 속에서 인간의 이기심을 보게 된 것인가 싶다. 소설이 작가의 경험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필립 로스가 얼마만큼의 갈등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글로 자신의 내면을 표출할 수 있었기에 후련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또한 그만큼의 힘겨움도. 이러한 위선이나 허위들을 유대인이 아닌 이가 지속적으로 제기했더라면 그것은 문화에 대한 몰이해와 배타주의적인 사고 등등의 온갖 비난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작품을 작품으로 보지 않는다거나 그 문제의식을 외면하는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니 문학성과 함께 이러한 ‘문제’들이 있음을 깊이 있는 성찰의 눈으로 보고, 느끼고, 깨닫고, 글로 써준 필립 로스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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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작은 친구들 세트 - 전2권
도나 타트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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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시시피의 아이들


작은 친구들, 도나 타트, 은행나무, 2017-02-28.


  사람들로 하여금 ‘천재’라는 평을 받는 작가의 기분은 어떨까. 왜인지 이 평의 당사자인 도나 타트는 전혀 괴이치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전진할 것 같다. 안타까운 것은 그 스타일이 소설을 ‘적게’ 쓴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소설을 자주 발표하는 대신 한번에 ‘길게’ 쓰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삼십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세 편의 장품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작은 친구들」이 「비밀의 계절」과 「황금방울새」에 이은 신간인줄 알았더니 그동안 국내 번역 출간이 되지 않은 2002년 출간작이다. 앞의 두 작품은 상당히 흥미있게 읽었다. 그렇기에 도다 타트의 작품을 기억하고 책을 선택함에 주저함이 없었는데 최근작이 아니라는 점에서 조금 아쉬웠다. 10년에 한번 책을 내는 과작 작가라고 하는데 2013년도에 책을 출간했으니 그럼 2023년도에는 신간이 나오려나.

  세밀한 묘사와 서사가 작가의 특징이다. 이것이 작품의 양으로 연결되는 것도 같다. 세 작품 모두 국내 출간에 2권짜리였다. 그렇기에 어느 지점에 가면 약간의 지루함이 생길 때도 있다. 이전 출간된 두 작품에 비해선 조금 지루함이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결말이 해결되지 않았기에 가지는 느낌일지 모르겠다.

  결말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말은 이상하다. 이 작품은 1960년대 미시시피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아홉 살 소년 로빈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12년 후, 여전히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는 로빈의 죽음에 대해 로빈의 동생 해리엇이 그날의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소설을 읽는 동안 누가, 로빈을 죽였는가에 대해 풀리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데…. 이 소설에서 이 궁금증을 풀어주던가? 추리와 미스터리 소설인가 생각하게끔 시작한 소설은 따지고 보면 로빈의 살인자를 찾는 방향으로 흐르긴 한다. 단지, 일반적으로 보아온 추리소설의 스타일을 뛰어넘어 조용히, 그리고 아이의 시선으로 사건의 실마리를 밟아가고 있다.

  그렇다. 이 소설은 그냥 일상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범인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해리엇의 노력과는 별개로. 어쩌면 이 소설에서 해리엇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장식같기도 하다. 해리엇만이 뚜렷하게 양각으로 부각되고 다른 이들은 정적이다. 이 정적인 흐름에 홀로이 급류를 타고 있는 해리엇이 안쓰러워 보이는 것은 어린아이다운 호기심으로 그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으며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가족들은 침체되어 있다. 그들은 로빈이 자신의 집 마당에서 사망한 이후로 마치 생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정적으로 변해 버렸다. 그들은 과거에 더 머물러 있었다.


가족 중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앨리슨이 설명하려 했어도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 항상 추억에 포위되어 현재와 미래가 오로지 과거의 반복이라는 도식으로만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앨리슨처럼 세상을 보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기억―연약하고 흐릿하지만 찬란하고 기적 같은 기억―이란 삶의 불꽃 그 자체였고, 그들은 모든 말을 과거로 시작했다.


  해리엇의 엄마는 그날 이후 약에 취해 늘 잠들어 있었다. 해리엇의 언니 앨리슨도 잠들어 있는 시간이 많고 항상 약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 수다스러운 클리브가의 자매들, 그러니까 해리엇의 할머니와 이모할머니들도 슬픔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그 사건 이후로 해리엇의 아빠는 다른 지역에서 가족은 방관한 채 생을 즐기고 있다. 해리엇의 가족은 12년 전 그날 이후로 항상 음지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똑똑하고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해리엇은 이런 음지같은 분위기를 형성하는 그날의 해결되지 않은 사건을 파헤치려는 결심을 한다. 이른바 탐문과 수사를 시작하며 첫 번째 용의자를 알아냈다. 이제 사건은 어린 날 로빈과 같은 나이였던,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문젯거리’인 래틀리프가의 형제들을 쫓는 것으로 나아간다.

  어린 아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기심과 열정으로 해리엇은 자신을 추종하는 친구 할리와 함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지만, 그것은 당연 험난하고 위험을 동반한다. 톰 소여, 허클베리 핀의 모험처럼 위험한 모험을 즐기는 개구쟁이들의 여정이 아니라 가족에게 드리운 그늘을 걷어내고픈 어린 아이의 조용하고 담백한 전진이 이 소설 전체에 흐르는 핵심으로 보인다. 긴, 호흡에서 1960~1970년대의 미국 미시시피의 분위기를 볼 수 있는데 흑인에 대한 차별과 빈부 격차의 상황을 주된 이야기의 흐름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해리엇 가족들의 상황에 무관했다고도 말할 수 없기도 하다. 시간의 변화만큼 해리엇을 둘러싼 가족들과 일상의 변화도 일어난다. 이모 할머니 리비의 죽음이나, 해리엇이 엄마의 애정을 갈구하며 애착을 가졌던 가정부 흑인 아이다와의 헤어짐, 자신이 뒤쫓던 범인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들. 이 여정에서 해리엇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변해가는가는 주요한 부분이다.

  

해리엇은 <보물섬>에서 히스파니올라호 옆 피로 따뜻해진 바다에서 떠다니던 해적 이스라엘 핸스를 생각했다. 그 대단한 여울은 악몽 같으면서도 아주 멋졌다. 공포, 가짜 하늘, 엄청난 환각 배를 잃었다. 해리엇은 그 모든 것을 혼자서 되찾으려 노력했다. 해리엇은 거의 영웅이 될 뻔했다. 하지만 이제 해리엇은 자신이 영웅이 아닐까 봐, 전혀 다른 것일까 봐 두려웠다. 


해리엇이 원하는 게 처음부터 불가능했다고 해도, 해리엇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도 나서서 노력했다는 사실에 쓸쓸한 위안이 있었다.


 역시 미국이란 나라의 분위기인가 싶게 12살 해리엇이 총기를 다루는 장면은 놀랍게 다가왔다. 범인을 찾기 위한 그 여정들을 가족들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마치 한여름 꿈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당사자인 해리엇에게도 마치 환각의 일처럼 여겨지는 이 여정은 해리엇 스스로에게 영웅의 길이었느냐 아니었느냐는 물음을 갖게 한다. 그것은 해리엇이 한가지 목표에만 취중하며 쉽게 생각하고 간과한 문제들을 다시 생각하게끔 하게 한다. 아마도 이 모든 것들을, 이 여정 속의 모든 것들을 해리엇은 차곡차곡 되새겨 볼 것이다. 똑똑한 아이니까. 슬픔을 알고 그 슬픔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 아이니까. 아무리 조숙하다 한들 열두 살의 가족의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의 참 아픈 성장통. 아이를 둘러싼 환경, 관계들의 소중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물론 할머니는 나쁜 의도가 전혀 없었다. 검은 평생 죽어라 일만 하다가 망가진 불쌍한 노인일 뿐이었다. 평생 아무것도 갖지 못했고, 어떤 기회도 없었으며, 기회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왜 손자들에게도 기회가 없다는 뜻이 되는지 유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소설 속에서 대립적으로 등장한 클리브가와 래틀리프가를 보다 눈에 띄는 점이 클리브가는 모두 여성들, 래틀리프가는 남자들의 세계였다. 물론 래틀리프가에는 할머니, 검의 존재가 있긴 하지만. 클리브가는 부유층의 특성과 시끌벅적함이 사그라진 상태로 래틀리프가는 가난한 백인층으로 약물에 빠져 시종일관 환각 상태인 형제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가정의 로빈과 대니는 어린 시절 우정을 나누며 잘 지낸 친구인데, 세월은 ‘가정’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모습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음울의 분위기 속에서 해리엇은 스스로 영웅이 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고…. 변해갈 수밖에 없는 대니의 모습이나 래틀리프가 유진의 저 말이 참 안타깝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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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배수아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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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발저를 아시나요


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로베르트 발저, 한겨레출판, 2017-03-15.


    그 누구도 내가 되기를, 나는 원하지 않는다.

    오직 나만이 나를 견뎌낼 수 있기에

    그토록 많은 것을 알고, 그토록 많은 것을 보았으나

    그토록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말이 없음이여.


  글을 읽을수록 여러 생각의 갈래로 달려갔는데 그 중 하나는 끌림이었다. 끌림의 느낌은 서늘함이었다. 싸늘함과는 다른, 왜인지 모르게 서러움 가득한 기분. 발저의 글 속으로 푸욱 파묻혀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서글픈 설움에 떨렸다. 작가의 생애를 먼저 알았기에 작가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되었을까. 물론 그렇지않다고 할 수는 없다. 분명 작가의 생애로 인해 글과 작가가 일치되었고 길 위의 고독가가 느껴졌다.

  발저의 생애를 보다가 몇몇의 작가가 생각났는데 거리의 작가 찰스 부코스키와 체코 소설의 슬픈 왕이라 불리며 국민작가라 칭송받는 보후밀 흐라발이다. 발저 역시 스위스의 국민작가라 칭송받는다 하며 독일문학사의 중요한 작가라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부코스키, 흐라말, 발저의 공통점이라면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글을 쓰고 주류라 불리는 분위기로부터 몇발짝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외부적인 요인이 그들의 주변에 흐르고 있었고, 물론 그것이 내면에도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다.

  로베르트 발저의 마지막은 그의 작품 「크리스마스이야기」에서처럼 크리스마스의 아침, 산책길, 눈밭에 쓰러진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이 작품 「산책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걷고 걷는 이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작가의 인생에서 걷기와 쓰기가 중요한 듯 그의 인생은 걷는 것과 쓰는 것의 반복이었다고 한다. 가난한 그의 생에 종이조각이라면 어디든 글을 썼다는 발저는, 자살을 시도하고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발저의 자살은 원체도 가난한 삶에 전쟁으로 인해 더 심해진 궁핍과 그로인한 우울때문이라 한다.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간 후 절대 글을 쓰지 않았는데, 왜냐면 글을 쓰러 간 것이 아니라 ‘미치기 위해’ 들어간 것이기 때문이라고. 독특한 그의 세계가 가늠이 되지만 내면 깊이 걸어 들어가는 발저의 글맛이 독특한 세계, 그런 것이 어디 있나 싶다.


고독하다는 것. 얼음과 같은, 쇠붙이와 같은 전율, 무덤의 냄새. 자비심 없는 죽음의 전조. 아, 한번이라도 고독했던 자는 다른 이의 고독이 결코 낯설지 않은 법이다.


  이 작품집으로 발저의 글을 처음 접하지만 고독이 짙게 배여 있다는 느낌과 머릿속이 복잡하였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 머릿속을 깔끔하게 정리하기 위한 방법이 발저의 산책으로 그리고 글쓰기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싶었다. 끌림도 글속에 짙게 배인 이 고독과 서정의 나래였다고 생각된다. 100년도 전에 태어난 발저에 대해 책표지의 저자 소개 정도로만 알고, 단지 작품 하나 읽었다 뿐인데도 나는 그의 세계가 이해되는 듯이 굴고 있다. 나는 홀로 산책하듯 발저의 글을 읽다가 그가 내 앞에서 걸어가는 듯이 여기며 글을 읽었다. 어떤 정서나 문체에서 발저의 끌에 한없이 끌린 후 마냥 산책을 하고픈 기분에 시달렸다.


나는 언제든지 할 수만 있다면 몽상에 잠긴다! 그게 무엇인지 알고 하는 건 아니다. 조금도 알지 못한다! 나는 늘 생각하는데, 어디서 큰돈이 굴러 들어오면 나는 일하지 않으리라,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나를 어린아이처럼 기쁘고 들뜨게 만든다.


   나는 언제나 걷고 싶었고 길만이 아니라 내 내면의 길로도 끊임없이 걸어가고 싶었다. 마냥 걷는 것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탁월하고 두서없이 글을 적는 것 역시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나름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다만 글이 생각을 따라가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발저의 이 산책과 함께 한 글들에 자꾸 맴돌게 되었나, 싶다. 그래서 반가운 글들과 더러는 재밌는, 그리고 아주 많이 서러운듯 느껴지는 글들을 보면서 그의 마지막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나, 아니 그의 선택이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한 생에 또한 우울했던 그의 생에 대해 그 자신, 아름답다 생각하며 눈을 감았을까.


눈으로 덮인 채, 눈 속에 파묻힌 채 온화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여. 비록 전망은 앙상했지만 그래도 생은 아름답지 않았는가. 


   비가 오지 않는 오랜 가뭄의 날들. 발저의 글을 들여다볼수록 왜인지 서러운 울음이 나는 듯했는데 눈이 쌓여 있지 않기 때문일까. 나는 이 세상에 불만도 불안도 많고 어쩔 땐 전혀 원하는 것이 없기도 어쩔 땐 뭘 원하는지도 모른 채 분노에 휩싸이기도 한다. 한동안은 계속 그랬고, 지금도 역시 분노를 버리면 안 되겠구나, 하며 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잡고 있는 것도 없으면서 놓아버리고 싶은 기분에 들 때가 있는데…발저처럼 인간과 제도에 원한을 품지 않을 날이 올까. 아직, 확신할 수 없어서 더 서글픈지도 모르겠다.


세월 저편으로 사라져간 아름다움의 색 바랜 고결한 그림이여, 감미롭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지금 이 세상과 이 인간들에게 등을 돌려버리는 것 또한 합당하지 않으니, 그 누구도 역사의 사색에 잠겨 있는 자신의 기분을 고려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인간과 제도에 원한을 품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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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지금이 아니면 언제?, 프리모 레비, 김종돈 (옮긴이), 노마드북스, 2010.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 이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작가로 알려진 프리모 레비는 그 경험들을 여러 저서를 통해 나타낸 바 있다. 그의 책들은 그 시대의 경험과 생각들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그렇게 직접적으로 표현했던 작가가 ‘소설’이란 형식으로 이 글을 썼을까.

  프리모 레비의 글쓰기는 직접 경험한 일들에 대한 느낌과 생각, 고통과 슬픔, 비해, 분노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직접 겪은 일을 바탕으로 하기에 생생하고 그가 전하는 메시지나 글은 남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실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소설은, 허구라는 것이 전제된 것이다. 그럼에도 소설이란 형식을 빌린 것은 프리모 레비의 마음 속에 이 경험들이 허구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까?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의 경험이 가득한 이야기다. 등장인물의 이름들이 바뀌었을 뿐, 벌어졌던 일들을 기록한 소설이다. 빨치산 유격대원들이 러시아에서 동유럽을 거쳐 밀라노로 도착하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의 여정을 담았다. 그 기간엔 나치에 대항한 러시아와 폴란드계 유대인들의 유격전을 비롯한 다양한 유격전이 있고 그만큼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제까지의 글들이 경험을 통한 작가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대해 기술한 것이라면 여기서는 등장인물만큼의 수많은 상황과 생각과 느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혼자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조금은 달랐으려나.

  그럼에도 작가가 줄기차게 이야기하는 핵심은 다르지 않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성이란, 인간의 선악과 폭력성에 관한 줄기찬 물음. 살아 있음을 대한 부끄러움. 이 살아있음에 대한 부끄러움은 늘 그가 전쟁에서도, 아우슈비츠에서도 살아남았음에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생의 의지를 말하면서도 결국 끝까지 살아있음을, 살아남을 선택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라면 빨치산으로 활동한 이력을 들어 종북좌빨이라 낙인찍었을 작가의 이력. 나치에 대항한 많은 빨치산과 레지스탕스의 모습을 이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다. 많은 탈영병이 있고 길을 잃은 이들이 있다. 살기 위해, 죽이지 않기 위해 그러나 죽이기 위해 빨치산이 되고 레지스탕스가 되려는 이들의 여정은 당연 까마득하다. 굶주림과 공포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막연함 속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떠도는 이들의 삶은 안쓰럽다. 생각보다 전투적이지도 조직적이지도 않은 이들의 방랑이 그대로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이 책의 제목은 유대인의 애환을 담은 노래에서 따왔다. 유대인 사형수가 처형전에 적은 가사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희망한 것은 바로 노래가사를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래는 이렇게 살아남아 다른 이들에게로 전해졌다.

  2차 세계대전이 유태인 학살임을 알기에 등장하는 유태인의 대화는 여러 모로 자조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유태인 풍자극이나 사람을 만나면 유대인인지를 먼저 확인하는 모습이 그 시대를 지배했던 유대인이라는 공포가 유대인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세계 곳곳에 수많은 유대인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유대인의 최종지가 늘 수용소, 죽음이 되는 그 공포에서 그들은 나치에 대항한 여러 활동을 계획하기도 하고 서로가 의지하며 가족이 연인이 부부가 된다. 어깨에 총과 바이올린을 둘러메고 어느 순간 바이올린을 켜는 게달레 빨치산 대장 같은 사람도 있다. 전쟁통에도 공포 속에도 사랑은 있고. 당연 배신도 있고. 일상의 삶 또한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 전쟁의 카테고리와 마주한 순간 이야기는 훨씬 더 암흑이 되고 만다. 전쟁이란 이름은 쉽게 동지가 되었다가 쉽게 적이 되기도 한다. 필요라는 이름으로 필연이라는 이름으로. 그러나 그 필요와 필연은 누가 정하는 것이며 무엇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 유대인의 최종지, 나치는 패망했음에도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 버리는 유격대의 여정의 끝은 어디가 될까. 암흑에서 시작해서 암흑으로 향해 가는, 그런 암흑을 마주하기에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더 깊은 내면의 성찰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인물로 인해 자연적으로 같은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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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경제, 정체성


그저 좋은 사람 Unaccustomed Earth, 줌파 라히리, 박상미 옮김,, 마음산책. 2009-09-05.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여러 가지다. 확고한 정체성이 삶을 더욱 안정적으로 이끈다고 삶의 추진력을 얻는다 하기도 한다.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민족과 국가. 과연 개인에게 어느 정도의 강도로 영향을 미칠까. 특히 타지에 살고 있는 경우라면 더더욱.

  줌파 라히리는 미국에 살고 있는 인도인이다. 그런가? 여기서 미국에 살고 있다는 것은 국적을 이야기하고 인도인이라는 것은 종족을 이야기하는 걸까. 줌파 라히리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고 곧 미국에서 살았다. 부모에게 인도인의 문화를 몸에 익히며 미국의 사회와 문화를 헤쳐 나가야 했다. 어쨌든 그런 작가의 삶의 궤적이 나타나는 소설에서 이민 세대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한참 느끼다가 불현듯 궁금해졌다. 소설 속 인물들은 어떻게, 이토록, 미국에 ‘비교적’ 잘 정착하고 있는가,라는.

  이 책은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라는 반박의 소리가 들린다. 그렇다. 이민세대와 2세대의 내적인 혼란과 방황이 곳곳에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일상에서 그것을 느끼고 그들 스스로의 생에 대한 질문이 된다. 그런 그들에 대한 질문이 스친다. 그들을 규정해 나가는 그냥, 소설적 질문이라기보다 일반적인 시선의 질문이라고 생각해보면 되겠다. 그들의 내밀한 삶을 들여다보지 못한 경우 우리는 물을 수 있다. 한국인에게 자주 듣게 되는 질문일 수도 있겠다.

  “어떻게 그렇게 ‘미국에서’, ‘영국에서’ 공부도 잘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갔는가.”

  인물들은 타국에서 겪는 고향에 대한 향수와 정체성, 일상에서의 고독에 휩싸이고 있다. 특히, 인도인의 문화와 관습을 명확히 지닌 채 미국 생활 정착에 집중하는 부모 세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된 바탕에서 살아가는 자녀 세대들은 인도와 미국의 관습과 사고, 생활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내는 데 집중한다. 서로 다른 나라의 문화 사이에서 일상의 행동을 장악하는 것은 인도인의 관습이기에 충돌할 수밖에.

  그래서 「머물지 않은 방」의 등장인물이 아밋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상처라고 한다면  랭포드를 보낸 것, 타지에서 생활하게 된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민자들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편적인 반응일 것이다.  


큰 상처를 겪으면 젊을 때 머리가 셀 수도 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누가 갑자기 죽거나 사고를 당한 기억은 없었고, 삶에서 커다란 변화를 겪은 것도 아니었다. 부모님이 그를 랭포드로 보낸 것 외에는. p115


  일상이라 부르는 생활사건들에 대한 소설속 인물들의 감정적인 동요가 눈에 띄는데, 이것이 줌파 라히리 소설의 특징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생각하니 이들 삶의 피폐함은 정서와 정체성에 기반되어 있고 환경적인 요소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싶기도 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삶의 경제적인 어려움, 육체적인 고단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섬세한 감정의 선들이 또렷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은.

  반면 노동자인 이민 세대의 삶의 모습은 이와는 상당히 다르게 느껴질 것이란 생각이었다. 이들 삶은 내면의 고통 외에 현실적 고통의 강도가 더욱 세게 지배했을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할 겨를 없이 여전히 ‘생존’에 더 방점을 두지 않았을까. 이민자이진 않지만, 미국인 메간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다른 삶의 방향을 생각할 겨를 없이 일상을 버티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은, 이민세대로서의 인도인인 이들은 일상이라는 생활사건 속에서 ‘경제적 고민’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의 인물들이 “먹고 살기 충분하다”라는 말을 내뱉는다. 물론 인도에서 살았다면 충분히 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잘 살았”다고 말한다. 그러니 지금의 삶은 상대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보다는 약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물들 대부분의 삶에서 경제적 힘듦은 삶에 추가되지 않는다. 그들은 미국 사회 내에서도 충분히 ‘먹힐’ 직업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여러 면에서 그들은 타지에서도 충분히 뿌리내릴 여건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저 좋은 사람>을 시간이 지나 다시 읽은 시점에서, 줌파 라히리 소설에 대한 끌림과는 별개로, 왜 이 점에 자꾸 집착하게 되었을까. 어쩌면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삶의 괴로움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이라고. 그것은 정체성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인간성’을 상실할 파괴력을 지녔다고. 아니다, 편견이 아니라 그렇다고 말하고 싶은 거다. 경제적으로도 피폐해지면 어느 곳에서나 뿌리를 내리는 것이 어렵다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경제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둔 이들이 인생의 큰 상처로서 “경계에 있는 나”에 대해서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아버지가 루마의 일 얘기를 다시 꺼냈다. “일은 중요하다, 루마야. 경제적인 안정도 주지만 정신적인 안정도 있다. 내 평생, 열여섯 살 때부터 난 쭉 일을 해왔다.” p50


  아버지의 의도는 다르게 말했지만 「길들여지지 않은 땅」의 아버지가 하는 말을 인용한다. 누군가에게는 경제적인 안정이 정신적인 안정을 주는데 주요한 일이 된다는 것을. 일상의 사건들 속에서 느끼는 감정적 상실과 혼란은 개인별로 차이가 있겠지만. 어쨌든 아련한 이야기 속에서도 한편으론 이들 방황이 처절한 고통에서는 한발짝 먼 느낌이 드는 것은 또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정체성을 경험하지 못했구나가 느껴졌다. 그렇게 보니 줌파 라히리의 소설 속 주요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지식인층이다. 충분히 교육받고 충분히 안정된 삶을 살고 있지만,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영국으로, 미국으로 가고 있다. 정치적인 이유로, 경제적인 피폐함을 타개하기 위한 이민과는 또다른 것이다. 이런 경험이라면 줌파 라히리의 소설에선 어떻게 다뤄질까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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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8 08: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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