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은 아니듯



루미너리스, 엘리너 캐턴, 다산책방, 2016.

   

 

   생각해보니까 천재라는 말은 좀더 어린 사람에게 더 잘 붙는 수식어인 듯하다. 루미너리스의 작가 엘리너 캐턴도 이런 수식어를 받는 ‘어린’ 작가다. 이 작품은 맨부커상 수상작이라는 것과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특히 맨부커상 수상 역사에서 최연소 수상 작가이며 수상작 중 가장 긴 분량이라는 기록을 세웠다며, 28세의 나이 두 번째 작품만으로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천재작가라고 소개하고 있다.

   <루미너리스>는 빅토리아 시대, 1960년대 뉴질랜드의 골드러시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골드러시, 금광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렇듯 금광에 대한 욕망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의 욕망과 갈등이 산재되어 있다. 이 과정에선 당연 살인 사건이 있고 사건의 원인과 진실을 알아내기까지 시종일관 미스터리함이 긴장을 유지하게 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이 소설의 특징은 등장인물의 성격을 별자리와 점성술에 빗대어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요 등장인물 12명은 12개의 별자리를, 다른 5명의 남자는 행성을 상징하며, 천체의 움직임에 따른 인물과 사건의 연결이 흥미를 돋운다.

 

무디가 보기에는 굉장히 피상적인 모임이었다. 열두 명의 남자는 안나 웨더렐이 죽을 뻔했고, 크로스비 웰스가 죽었고, 에머리 스테인스가 사라졌고, 프랜시스 카버는 출항했으며 알리스테어 로더백이 마을에 도착한 1월 14일 밤의 사건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인 거였다. 게다가 모두가 모인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감옥을 관리하는 교도소장 셰퍼드도 없고, 교활한 미망인 리디아 웰스도 없었다. - 1권 p498

 

   소설의 제목인 루미너리스는 점성술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두 별인 해와 달을 가리킨다. 천체의 움직임이나 점성술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소설을 이해하는데는 어렵지 않지만, 그것을 좀 더 잘 안다면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여전하다. 이야기는 많은 등장인물들처럼 다양한 시선으로 전개되고 흩어졌다가 모아지는데 마냥 암울하고 칙칙한 분위기만은 아니다. 희망과 좌절과 욕망과 배신이 난무하는 시대는 어디에나 있다. 오히려 이 빅토리아 시대엔 ‘낭만’이 가미되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것이 지나간 역사라서일지도 모르겠다.


양자리는 집단적인 관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황소자리는 주관적인 태도를 단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쌍둥이자리의 규칙은 배타적이고, 게자리는 원인을 찾고, 사자자리는 목적을 추구하며, 처녀자리는 계획을 바란다. 하지만 이것들은 제각기 진행되는 일들일 뿐이다. 12궁의 두 번째 행동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천칭자리는 개념으로, 전갈자리는 재능으로, 궁수자리는 목소리로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염소자리에서 우리는 기억을 얻고, 물병자리에서는 통찰력을 얻는다. 그리고 12궁에서 가장 오래되고 마지막을 점하는 물고기자리에 와서야 일종의 자아를 얻어 완전해진다. - 2권 p250~251

 

   많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성격은 과연 별자리와 어떻게 연결될까. 인간의 운명이란, 성격이란 정말 점성술이 말하는 대로 정해져 있는 걸까. 때로는 희망을 위해 내 운명에 무언가가 “적혀 있기를” 바라기도 한다. 운명, 인간의 운명, 삶….

이 모든 사건들이 해결되고 상황이 종결되는 그 긴 시간 동안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

는 감정들을 들여다보면서 느끼게 되는 한가지는 확실하다. 어쨌든 그 누구라도 쉽게 삶을 놓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방법의 차이는 달랐을 뿐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금’을 움켜쥐려던 그들이었다. 그들의 ‘금’이 실제의 금이든 아니든 모두 반짝반짝 빛나는 내일을 위해 갈망하고 움직였다. 운명이 ‘쉽게 결정지어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희망이 몸짓이기도 하겠지만 패배의 몸짓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결국 모두는 깨달을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택의 산물이고, 자신의 손으로 결말을 선택한다. - 2권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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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매뉴얼


편의점 인간, 무라타 사야카, 김석희 (옮긴이) | 살림 | 2016-11-01.


  저자가 일본인이라서가 아니라 아니, 그래서일지 모르겠지만 일본스러운 소설이다가 첫 느낌이었다. 그래 놓고도 ‘일본스럽다’는 의미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를 고심한다. 그럼에도 일본 분위기가 난다는 말도 정확치 않은 그 느낌이 맴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고 일본 소설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다. 나도 모르게 ‘일본’에 대한 정형화된 이미지가 쌓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일본 내에서는 폭발적인 인기와 수상을 얻었다. 저자의 프로필과 책소개에 의하면 그렇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닌지 초판 인쇄 한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읽은 책의 인쇄부수는 15쇄였다. 1쇄도 힘들다는 출판 시장의 분위기를 고려하면 가히 베스트셀러다. 그러니까, 베스트셀러라고 하면 큰 상의 수상작이라고 하면 더 기대하는 바가 있게 된다. 이유도 명확하지 않게 책이 출간되어 홍보될 때부터 소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 사회학 저서로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편의점’이 갖는 의미에 대해 사회학적인 접근을 가한 책으로 생각되어 이것이 소설이라는 것에, 그리고 저자의 자전적이란 이야기에 두 번 놀랐다.

  그래서 읽고 난 후엔 오히려 수필쪽에 더 가깝게 느꼈다. 저자의 글의 서술 방식도 그렇고. 문학책 쪽보다는 사회적인 메시지가 더 강하게 다가왔다. 아마도 이 책이 이토록 수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도 편의점이 많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용 역시 단순 명쾌하고 복잡하지 않고 분량도 매우 짧다. 쉽고 술술 읽힌다. 그래서 아쉽다고 해야 하나. 문장 자체의 재미는 없다. 모든 문학책이 ‘나 문학성이 뛰어난 책이오’라고 할 필요는 없지만, 길게 오래 여운이 남진 않아서…. 편의점을 소재로 한 글이 많이 나왔으리라 생각하는데, 편의점을 전면에 내세운 글로 김애란의 ‘나는 편의점에 간다’는 단편이 좀더 내 취향에 부합하는 글인 모양이다. 10년쯤 전 된 것 같은데 더 기억에 남는다. 

  소설 『편의점 인간』 속 주인공 게이코는 18년째 편의점 알바를 하고 있다. 저자 역시 평소 편의점을 애용한다고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저자 자신이 18년째 편의점 알바를 하고 있다 한다. 어릴 적부터 남과 다른 사고와 행동을 하는 게이코였다. 초반 게이코의 이 남다른 행동은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패턴이라 이 소설이 사이코패스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러나 소설은 여전히 편의점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서른여섯 게이코의 모습을 그린다. 우연히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게 된 이후 매뉴얼이 있는 편의점에서 자신의 안정감을 느끼는 게이코의 모습은 익숙하기도 하고 불안해 보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비켜 있는 게이코엑 많은 사람들이 우려는 표하지만 게이코는 어릴 적 자신의 생각과 행동으로 움직였을 때 자신의 부모님이 아파하고 힘들어 했던 일들을 계기로 절대 자의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타인의 지시에 따라서만 움직이리라 생각하고 살았다. 필요한 말을 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온 게이코에게 사람들이 안심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길들여지고 길러진 게이코는 편의점에서는 최상의 직원으로 성장한다. 매뉴얼에 맞춰 인사하고 물건을 정리하고 판매하고 손님을 응대하는 게이코느 그렇게 자신이 세계의 부품이 되어 잘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지면, 나를 이상하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꼬치꼬치 캐묻잖아? 그런 귀찮은 상황을 피하려면 그럴 듯한 변명이 있어야 편리해.”

이상한 사람한테는 흙발로 쳐들어와 그 원인을 규명할 권리가 있다고 다들 생각한다. 나한테는 그게 민폐였고, 그 오만한 태도가 성가시게 느껴졌다. 너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초등학교 때처럼 상대를 삽으로 때려서 그러지 못하게 해버리고 싶어질 때가 있다. p70


  하지만 여전히 결혼하지 않고 알바로 머물고 있는 게이코에게 사람들은 ‘정상’적이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다름에서 오는 정상적이지 않은, 문제적 시각으로 게이코를 바라보기에 게이코는 그들의 그런 ‘시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름의 애를 쓴다. 역시 사회에서의 열등생으로, 문제인간으로 낙인찍힌 시라하라는 사람과의 ‘결혼’을 생각함으로써 ‘정상적’이라 불리는 궤도에 안착하려 하는 것이다.


  게이코가 끊임없이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사회에 ‘동화’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의 시라하와의 대화가 이 소설의 압권이 아닌가 싶다. 복장 터지는 이 대화가 실제 일반적이라 생각되는 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니까. 하지만 복장이 터지는 이유는 게이코에게는 연민이 가는데 시라하에게는 연민이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사회의 시선을 지적하는 말들이 시라하의 입에서 나올 때 그것의 설득력이 ‘시라하가 하는 말’이라는 이유로 한발짝 떨어져서 보게 된다. 어쩌면 이것도 게이코의 시선인지도 모른다. 게이코는 시라하에게서 이렇게 느끼니까.


나는 어떤 심정이었나 하면, 시라하 씨를 성범죄자가 되기 직전의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때문에 곤란을 겪은 여자 알바생이나 여자 손님은 생각지도 않고 자신의 고통에 대한 비유로 강간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시라하 씨를 보면서, 피해자 의식은 강한데 자신이 가해자일지 모른다고 생각지 않는 사고 회로를 갖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p105~106 190


  이 소설은 편의점만이 증가하는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편의점 이용에만 익숙해져 버린 것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저 멀리, 저 머언 밝고 경쾌한 미래가 아니라 암울하고 음침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재의 모든 젊은 청춘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또한 어떤 이는 규격화된 인간의 삶의 방식에 대한 비판으로 읽기도 하겠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오히려 일찍부터 사회의 시선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강제하며 살아가던 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게이코는 사회의 매뉴얼에 적응하지 못하면서도 그 매뉴얼에 따라가겠노라 애를 쓰는 인물이다. 그러나 결국 게이코는 자신이 편의점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거기만이 자신의 공간이라 인식하면서 자신의 의지로 편의점 속으로 회귀한다.


보통 사람은 보통이 아닌 인간을 재판하는 게 취미예요. 하지만 나를 쫓아내면 더욱더 사람들은 당신을 재판할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은 나를 계속 먹일 수밖에 없어요.

나는 줄곧 복수하고 싶었어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기생충이 되는 게 용납되는 것들한테, 나 자신이 기생충이 되어주겠다고 줄곧 생각하고 있었죠. 나는 오기로라도 후루쿠라 씨한테 계속 붙어살 겁니다. p146


  반면 시라하는 어떤가. 말은 온갖 사회의 모순을 짚어내고 문제점을 비판하지만 그의 이  지적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그의 행동에 있다. 사회적인 통념상의 ‘기준’에서 두 사람 다 물러나 있기는 하다. 시라하는 ‘비난’을 끊임없이 하고 있지만 스스로 비난을 받을 행동을 일삼고 있다. 반면 게이코는 ‘비난’을 받을 행동을 하고 있진 않다.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저녁 식사를 초대받은 곳에서 음식의 메뉴는 항상 고정되어 있다고 했을 때 게이코는 오직 한가지 음식만을 먹고 있는 거고 시라하는 그 식탁에 침을 뱉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시라하의 존재는 게이코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이 아닐까 싶다. 시라하를 더욱 ‘비정상’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게이코가 얼마나 ‘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처음엔 게이코의 사회살이에 위협이 되는 듯한 감수성 때문에 불안했고 그다음엔 게이코의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마음씀씀이들이 안쓰러웠다. 시라하와의 동거의 이유와 동거 생활은 답답했다. 하지만 편의점으로 돌아가는 게이코에게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어서오십시오’라고 인사하며 행복감을 느끼고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게 된 게이코는 이전과는 분명 달라졌다. 그러니 게이코의 선택에 축하를 건네야 하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편의점 직원으로서의 삶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만족스러우면서도 사회의 기준에 따라 그 삶을 외면했던 게이코가 자신만의 기준으로 편의점을 선택하게 된 것이니까. 시라하가 정해준 삶을 뿌리친 게이코니까. 개인적으로 시라하를 뿌리치는 모습은 통쾌하기까지 했으니까.


아니, 누구에게 용납이 안 되어도 나는 편의점 점원이에요. 인간인 나에게는 어쩌면 사라하씨가 있는 게 더 유리하고, 가족도 친구도 안심하고 납득할지 모르죠. 하지만 편의점 점원이라는 동물인 나한테는 당신이 전혀 필요 없어요. p190 


  이제 게이코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인식하면서 이제껏 편의점직원으로 인생의 리듬을 맞춰 온 자신의 리듬을 이어가며 살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자신만의 기준에 따른 선택이었음을 게이코는 스스로 인지했다. 그 동안의 내면의 갈등과 일련의 사건들은 그 선택을 위한 여정이었다. ‘편의점’이라는 공간 속으로 들어간 게이코가 아니라 자신만의 기준을 찾아 사회를 살아가는 게이코로서 바라볼 때에는 이 소설의 결말은 과히 나쁘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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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르 사전 열린책들 세계문학 183
밀로라드 파비치 지음, 신현철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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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의 즐거움


하자르 사전,  밀로라드 파비치.


  의도치 않게 미로에 들어섰다가 미로를 빠져나온 쾌감에 다시 미로를 들어갔다. 한번에 그치지 않고 또다시 미로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기분. 이것이 하자르 사전에 대한 느낌이다.

 신화와 종교, 역사, 우화가 섞인 듯한 하자르 사전의 묘미는 이야기와 더불어 이야기를 담고 있는 글의 형식이 정점으로 이끈다. 각각의 이야기가 조금 더 큰 줄기와 맞물리고 그것은 다시 더 큰 줄기 안으로 이어지며 마침내 모든 줄기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의 즐거움이란. 작가는 독자의 새로운 즐거움에 관대했음이 분명하다. 이토록 새로운 독서법을 위한 글쓰기에 힘을 쏟았으니 말이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간단하다. 하자르 민족의 종교 개종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여기에서 파생한 이야기는 1982년의 이스탄불 킹스턴 호텔의 살인사건으로까지 이어진다.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연결지어 보면 이야기의 갈래가 많아서 책을 놓을 틈이 없다. 지금은 사라진 하자르 민족 자체에 대한 궁금증, 하자르 논쟁 결과에 대한 궁금증, 책 속에 등장하는 꿈사냥꾼에 관한 기묘한 이야기, 그리고 악마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이야기의 촉발은 이렇다. 하자르 민족의 군주가 어느날 꿈을 꾸고 난 뒤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에게 꿈의 의미를 묻는다. 그리고선 가장 마음에 드는 해석을 한 사람의 종교로 개종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책 속에선 어느 종교로 개종하였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명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각각의 대표들이 자기들 나라의 종교로 개종하였다고 하고 있으니 이들 세 명의 현자들이 꿈에 관한 열띤 해석과 토론을 벌였음은 분명하다. 그 이야기, 각각의 대표자의 관점에서 풀어 나간 하자르 개종에 관한 논쟁은 그들 나라의 입장에서 쓰여진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서 주장과 사실이 맞물린 세 가지 버전의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하자르 논쟁의 당사자들과 하자르 논쟁에 대해 서술한 기록자가 다른 이 내용은 하자르 사전이란 이름 아래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레드북, 그린북, 옐로북으로 나뉜다. 지금은 사라진 『하자르 사전』이지만 하자르 논쟁이 시작된 후부터 현재까지, 하자르 민족과 하자르 논쟁에 대해 관심을 갖는 수많은 이들이 있다. 작가는 처음 편찬자가 누구인지, 하자르 논쟁에 참여한 자, 그것을 기록한 자, 책을 만든 자, 하자르 민족에 대해 연구하는 자 등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알파벳 순으로 정리하여 하자르 사전의 이야기를 재현해 냈다.

  하자르 민족의 언어는 소멸되었으나 하자르 민족은 존재하였다. 그러니 이 사실적인 사건에 작가는 상상력을 곁들여 사전소설로서 모험과 미스터리를 전개시킨다. 아무리 가보지 않은 세계라 한들, 꿈 사냥꾼의 존재나 지옥에서 온 악마나 한두명이 아닌 시공간을 초월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역사적 실제로 믿기엔 난 너무 커버렸기에 그것을 작가의 탁월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환상소설’이라며 놀라워한다. 그럼에도 문득 문득, 작가의 상상력이 실제인 것만 같은 착각을 한다.

  거듭 읽어도 미진한 느낌이 드는 이 퍼즐같은 이야기에 작가는 하나를 더 추가한다. 이 사전이 남성판과 여성판으로 나누어진다는. 이 복잡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는 이야기 끝에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된다. 그 판본의 차이는 10줄이 채 안되는 문단이라는. 이 서로의 차이가 나타내는 바는 무언가 또한 심오하게 들어가게 되는데, 작가는 이러한 판본에 대해 독특한 의사를 표함으로써 유쾌하기도 하며 김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하자르는 세 개의 종교를 둘러싼 논쟁이 이루어졌는데 스페인에서도 세 개의 종교가 공존했던 시기가 있다. 12세기의 스페인의 코르도바. 이때엔 잠시이긴 하지만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조화를 이루었다. 곧 개종과 종교박해가 이루어졌지만. 이러한 실제의 상황에 더해 모험과 살인 사건이 더해지며 『절대적 영원에 대한 논고』를 찾아 가는 소설이 자크 아탈리의 『깨어 있는 자들의 나라』이다. 하자르 사전을 읽으며 이 책이 생각난 것은 이러한 유사성과 그 분위기 때문이다. 자크 아탈리의 소설에서도 그랬듯 최종적인 승리는 유대교인들의 몫인 모양이다. 최근의 연구는 하자르 민족이 유대교로 개종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하자르 민족의 소멸이 이 개종과도 관계된다고도 한다.

  하자르 사전은 여러 가지로 생각들을 뻗게 한다. 소설의 이야기를 찾아나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언어와 종교와 민족에 대해서도. 또한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자르라는 나라는 자신만의 언어와 종교를 이어가지 못했다. 소설 속에서 나타난 하자르인들은 그들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랬기에 그 언어가 소멸된 것일까. 아니면 하자르 민족 자체가 힘이 없는 것이었을까. 이 이야기를 그대로 믿는다면 하자르 군주는 꿈을 이유로 종교를 선택하려 할 때 일찌감치 제 나라의 종교는 배제시켰다. 하자르 민족의 종교에서 말하는 꿈의 의미는 들어볼 생각조차 없었던 것일 테니.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책을 읽으며 일찌감치 유대교가 승리했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꿈 해석에 대한 각 나라의 대표들의 해석을 거듭 읽었다. 하자르 군주는 어디에 끌렸을까, 그가 결정짓도록 한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어떤 생각의 갈래들은 너무도 뛰쳐나와서 이 애들을 끌어모아 정리할 새가 없다. 물론 명징한 하나로 귀결되지도 않을 것이다. 하자르 사전이 대표적이다. 다만, 명쾌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은 외국어를 공부하며 반복해서 뒤적여야 하는 사전처럼, 반복해서 들여다볼 수밖에 없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가의 글쓰기로 인한 새로운 책읽기는 아주,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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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의 자서전 - 시로 쓴 소설 빨강의 자서전
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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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의 로맨스


빨강의 자서전 Autobiography of Red-시로 쓴 소설 

  한국에서 빨강에 대한 공포와 금기가 사그라들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월드컵이라고들 말한다. 붉은 악마의 물결이 휩쓴 그때부터 “빨갱이”라는 말의 순화가 이루어졌다. 물론 여전히 빨갱이에 대한 노골적인 수사와 몰이는 유효하다. 빨강의 열정에 편승하여 빨강색 옷을 입고 빨강색 간판을 달고 빨강빨강 전도하던 이들이 그 몰이의 대표적 주자이다. 그것이 코메디 같아서 어떤 이들에겐 빨강이 종북의 상징이 되고 어떤 이들에게 야유의 대상이 될 지 모른다. 어쨌든 여러 모로 비난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만 빨강이다.

  빨강이 의도치 않은 자의적 해석과 이미지 투영으로 빨강은 탄생 이래 영원히 그 상징에서 벗어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로 빨강에 드리워진 수많은 이미지 중 하나가 ‘괴물’이다. 그리스 신화 속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죄의 대가로 세 개의 머리와 몸을 가진 괴물이 키우는 소들을 훔치는 과업을 수행한다. 괴물의 이름은 게리온이고 붉은 섬이라는 뜻의 에리테이아(Erytheia) 섬에 살고 있다. 그가 키우는 소떼들 역시 붉다. 

  이 이야기에 상상의 나래를 더해 그리스의 서정시인 스테시코로스는 빨강 소떼를 돌보는 이상한 날개가 달린 빨강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의 시의 전문이 온전히 남아 있지 않은 현대에 노벨문학상 후보이자 T.S. 엘리엇 수상자인 작가 앤 카슨은 게리온의 이야기를 재창작한다. 빨강 괴물 게리온의 이야기를 시로 쓴 소설로 엮어 낸다.

  상상력이 스테시코로스에게 빚을 진 측면이 있겠지만 형식과 이야기의 구조와 완결은 오로지 작가의 몫이다. 이 이야기는 게리온의 시선에서 고전의 이야기와는 다른 형태로 흘러간다. 소설의 문장보다 시적 언어로 쓰여진 까닭에 함축적이고 미학적이다. 언어를 음미하며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더구나 이 이야기는 어린 게리온의 이야기에서 시작하기에 ‘괴물’의 성장기를 지켜보게 된다.

  우리가 아이에게 ‘괴물’이라 칭한다면 그것은 아이가 사회가 원하는대로 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성인이 행하는 그것처럼 광기적인 절대 악의 모습을 지니지 않아도 또래와의 사귐에 소극적이거나 학교 생활에 부적응하게 되면 그 선에서의 다름을 이유로 괴물이라고도 부른다는 말이다. 그렇게 어린 게리온은 악의 모습을 보여주고 행하는 이미지보다 그 나이의 아이들과는 ‘다른’ 이유로 괴물이라는 칭호를 부여받는지도 모른다.

  다르다. 외면적인 다름을 말하자면 어린 소년 게리온의 어깨엔 작은 빨강 날개가 있다.


네가 약한 아이라면

힘든 일이겠지만

넌 약하지 않아.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의 작은 빨강 날개를 가다듬어준 후

그를 문 밖으로 떠밀었다. p52~53


  게리온은 커다란 코트로 자신의 날개를 감출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게리온은 내성적인 성격의 아이로 자라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에 흥미를 느낀다. 그렇기에 자신만의 ‘자서전’을 쓰기로 한다. 글자를 모르던 때부터 빨강 토마토 위에 10달러 지폐를 찢어 머리카락을 만들어 자서전을 만든 게리온은 자신의 자서전에 “내적인 모든 것들을, 특히 자신의 영웅적 자질과 공동체에 큰 절망을 안겨줄 이른 죽음에 대해 썼다.” 그리고 사춘기에 이르러 “헤라클레스를 만나게 되었고 삶의 세계는 몇눈금 하강했다.“

  다시 한번 제목을 보자면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엔 “로맨스”라는 부제가 있다. 이 로맨스가 말하는 바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건데 로맨스라는 단어에서 느끼는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필시 게리온의 로맨스라고 짐작할 만한데 그 어디에도 게리온의 이성의 대상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랑’에 대해 좀더 한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바라보면 명백히 헤라클레스의 존재가 눈에 들어온다. 삶의 세계의 눈금이 하강했다라고 할 헤라클레스와의 만남은 사춘기의 게리온을, 이후의 게리온의 삶을 변화시킨다. 둘은 사랑의 날을, 로맨스의 나날을 보낸다. 함께 화산을 보러 가며 여러 곳을 여행하지만 헤라클레스는 이내 무심해진다. 게리온에게 실연의 상처는, 단순한 실연의 상처가 아니다.


그의 얼굴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실연당한 걸 잠시 잊었다가

이내 기억했다. 토사물이 요동치며

게리온에게로 떨어지다가 그의 썩은 사과 속에 갇혔다. 아침마다 충격이 되돌아와

영혼에 상처를 냈다. p109


  오랜 시간을 지나, 대학을 졸업하고 성인으로 두 사람은 다시 마주치게 되지만 헤라클레스 옆에 앙카시가 있다. 헤라클레스의 새 연인. 우연한 만남 가운데에서도 세 사람은 서로 어울리고 게리온의 빨강 날개를 보게 된 앙카시는 빨강 날개에 관한 전설을 이야기한다.


빨강의 존재를 부정하는 건

신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언젠가 미칠 것이다. p173


  앙카시는 헤라클레스와의 삼각점에서는 연적이지만 게리온의 영혼에겐 구원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줄곧 빨강 날개를 감추었던 게리온이지만 앙카시를 통해 빨강 날개의, 자신에 대한 ‘특별함’을 깨달아가기 때문이다. 빨강 날개, 날개는 날아오르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자신의 특별함을 깨달은 게리온은 날개를 움직여 날아오를 것이다.

  게리온은 자신의 자서전에 처음부터 자신의 영웅적 자질에 대해 썼다. 신화 해석학자 조셉 캠벨은 신화는 영웅의 여정, 모험담이라고 이야기했다. 영웅성을 부여받은 이가 온갖 고난을 헤치며 마침내 자신의 ‘소명’을 알고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난다고 말한다. 영웅에겐 여행이 필수이다. 그러니 게리온 역시도 여행이 필연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로맨스”의 의미에 한발짝 들어가면 서구문학에서 로맨스는 중세의 기사모험담을 말한다. 그러니까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로맨스>는 게리온이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며 영웅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게리온을 절망에 빠뜨린 건

그가 날개 달린 빨간 사람으로서 인생 초년에 일상으로 받아들인

조롱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지금과 같은 정신의 완전한 이탈이었다. p134~135


  게리온은 외면이 남과 다르다는 것보다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에 힘겨워했다. 어린 게리온이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던 것은 게리온의 예민한 감수성을, 그 언어를 이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언어와 세계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나타나자 게리온은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회복하고 긍정적인 상태에 이른다. 세상의 모든 다름에 대해 갖는 부정, 차별이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암흑으로 잠식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다름’의 세계에 대한 부정적인 수사는 이어지고 있다.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은 영웅 헤라클레스의 이야기의 주체를 뒤집음으로써 ‘영웅’과 ‘괴물’과 ‘다름’에 대한 생각의 전이를 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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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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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묻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Prilis Hlucna Samota (1980년)

보후밀 흐라발, , 문학동네, 2016.


  고독보다는 가슴이 저려온다. 책 속 주인공 한탸에게 작가 보흐밀 흐라발이 얹어지면서 이야기는 더욱 더 깊은 울림을 더한다. 자조적이고 연민이 가득한 이 책에 대해 “재미있다”는 말보다 더한 말을 찾아야 하지만, 누군가 묻고 답해야 한다면 일단 급한대로 가장 간단한 말, “재밌어”라고 외치고서 누군가를 붙잡아 둘 것이다. 이것은 너무 한탸같은가. 상당히 매혹적인 소설이다. 장편 소설로는 분량이 짧은데 스토리와 문체와 어조가 모두 흡인력 있다. 여운까지도 쉽게 사라지지 않아 더욱 더 책을 붙잡게 된다. 많은 작가들이 보후밀 흐라발에게 찬사를 보내는 이유가 공감된다.   

  작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체코의 국민작가라 불리며 마흔 아홉에 처음 소설을 쓴 작가. 노동자, 철도원 점원, 보험사 직원, 단역배우, 폐지 인부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삶을 이어간 작가. 정부의 감시와 검열에 출판금지를 당하면서도 체코를 떠나지 않고 글을 쓰며 지하 출판을 한 작가. 체코 출신 작가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수많은 작가들에게 찬사를 들은 작가. 그리고 비둘기….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난 삼십오 년간 나는 그렇게 주변 세계에 적응해왔다. p9 


  ‘체코 소설의 슬픈 왕’이라 불린다더니, 소설을 다시 한번 읽으니 첫 문장부터 슬픔이 가득찬다. 시대가 만든 개인의 상황은 삶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공산주의 체제 하의 체코 프라하. 법학을 전공한, 젊은 시절 시를 쓰기도 한 젊은이는 대학을 떠나 안정된 삶으로 정착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안전한 망명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금서로 지정되어 출판이 금지당하는 상황에서도 체코를 떠나지 않고 체코어로 글을 쓴 작가 보흐밀 흐라발은 삼십 오년째 폐지를 압축하는 삶을 살고 있는 책 속의 한탸와 너무도 닮았다.

  폐지를 꾸리는 일의 단순성에 대해 논한다면 이 일을 하고 있는 한탸는 절대적으로 부정할 것이다. 지하실로 수없이 떨어지는 폐지를 그저 ‘버리는’ 일 없는 한탸는 자기 나름의 기준으로 폐지를 분류하고 해체하여 묶어 내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한다. 폐지를 압축하고 파쇄하는 것이 주어진 임무라면 그것을 ‘어떻게’ 버리든 그것은 한탸의 마음이다. 한탸가 그렇게 하면서 활자를 글자로 보지 않고 의미로 읽어 내며 많은 교양과 지식을 쌓는다. 그렇기에 그는 바퀴벌레와 쥐가 들끓는 열악한 환경 속에 물리적으로 갇혀 있으나, 갇혀 있지 않은 채 바깥 소식의 일들을 폐지로 들어오는 책들을 통해 접한다. 그의 작업장엔 수많은 책들이 방문한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엔 프로이센 왕실 도서관 장서가, 전쟁 후에는 나치 문학과 사회주의 책들이 들어온다.     

  한탸의 고독은 선택이다. 한탸는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 혼자라고 말한다. 그에게 독서는 한낱 기분전환이아 소일거리가 아니다. 한탸는 책을 통해 배우고 사고한다. 자신은 책을, 글을 해체하는 일을 하지만 그 글들은 그의 고독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래서 한탸는 이 일을 벗어날 수 없고 책과 함께 하는 일에 만족한다. 퇴직해서도 압축기를 구입해 이 일을 하기를 꿈꾸기도 할만큼…. 그는 예수와 돈키호테와 노자와 니체와 괴테, 고갱과 노발리스, 실러, 횔덜린 등, 수많은 작가와 글들을 만나며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 만차에 대해서도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한탸는 끊임없이 자신이 삽시 오년째 폐지 더미를 파쇄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내년이면 삽시 육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서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삽십 오년이라 서술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한탸가 삼십 오년째 이 일을 하고 있으며 아직 내년은 오지 않았으며, 지금은 삼십 오년째이니까. 그러니까, 내년은 오지 않을 테니까.

  산업혁명으로 인간의 노동력이 기계로 대체되던 때처럼 한탸는 도시로 나갔다가 자신의 것보다 수십배 큰 압축기를 보게 된다. 그 기계를 압축하는 사람들은 신식 시설에서 유니폼을 갖춰 입고 일하며 콜라를 마시며 휴식 시간엔 휴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며 일하고 있다. 한탸의 세계에서는 너무나 놀라운 이 광경은 늘 폐지로 교양을 쌓아 온 한탸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제시해준다. 자신의 세계가, 끝나가는 구나, 라는…. 자신이 새로운 기계와 일하는 그들처럼 빠르게 효율적으로 일을 하는 게, 자신의 삶이 아니라는 것. 자신은 새로운 삶에 절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

 

부브니의 거대한 압축기와 청년 사회주의 노동단원들 그리고 그들의 그리스 여행에 심적으로 팽팽히 대립해 있는 나는 멍청한 인간이었고, 내 작은 압축기보다 더 미미한 존재였다. 그날 오후 내내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일했다. 부브니의 속도로 종이를 갈퀴로 퍼 담았고, 반짝이는 표지의 책들이 내 곁에서 수다를 떨어대도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안 돼, 넌 그럴 수 없어, 단 한권의 책도 펼쳐볼 권리가 없어, 잔혹한 한국 형리처럼 냉정해져야 해’라고 쉴새없이 나 자신을 타일렀다. 내가 압축통 속에 집어넣고 있는 것들이 무감각한 흙덩이인 양, 그렇게 일했다. p98~99


  저항할 겨를없이 당연한듯 한탸의 지하실에도 변화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에 한탸의 선택을 이해하느냐고 아무도 묻지 않기를 바란다.


아무렴, 나는 여전히 쾌활한 사내다. 그런 내가 자랑스럽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p131


  그렇다. 고독 속에 있었지만 한탸는 반복된 일에 찌들어 있지 않고 유머를 잃지 않은 노동자였다. 책을 읽으며 행복해하는 지식인이었다. 지저분하고 더럽고 냄새나는 그 지하실 폐지 더미 속에서 “선물과도 같은 멋진 책 한권을 찾아낼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매순간 살아온 한탸의 삶은 그 희망에 기대어 정말 고독마저도 감미로웠다. 현실에서는 바퀴벌레와 쥐의 등장에 나자빠질 것이 분명한데도 그 공간을 상상하며 한탸와 같은 몽상을 해보는 것도 재밌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탸는 그의 세계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흥미를 가미시켜주었다.

  삽십 오년 동안 폐지 속에 묻혀 있던 사나이. 그곳에서 가져온 책들이 자신의 아파트에도 넘쳐나는 책중독자가 되어버린 사나이. 책과 함께 하기에 늘 너무나 시끄러운 고독 속에 있던 사나이. 그가 마지막 순간에 한 책은 노발리스의 책이다. 노발리스는 <푸른 꽃>을 쓴 독일 시인이다. 낭만주의 시인으로 서른도 되기 전에 사망한 시인이다. 한탸가 읽은 수많은 책, 좋아하는 수많은 작가 중에서 왜 노발리스였을까. 현실과 꿈의 세계가 명확치 않은, 평범한 것에 고상한 의미를, 일상적인 것에 신비스러움을 잘 알려진 것에 미지의 존엄을 담음으로써 낭만화를 발견한다는 노발리스의 말처럼 낭만화고 있는 것이었을까. 여전히 쾌활한 사나이로서의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함일까. 


한 손에 들린 나의 노발리스를 꽉 쥔다. 내가 좋아하는 글귀에 손가락이 올라가고, 입술엔 지복의 미소가 떠오른다. 나는 만차와 그녀의 천사를 닮기 시작했으니까……이제 완전한 미지의 세계로 진입한다. 책을, 책장을, 쥐고 있다……사랑받는 대상은 모두 지상의 천국 한복판에 있다, 라고 쓰여 있다……멜란트리흐 인쇄소 지하실에서 백지를 꾸리느니 여기 내 지하실에서 종말을 맞기로 했다. 난 세네카요 소크라테스다. 내 승천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p131


  한탸는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들고 좋아하는 글귀를 읽으며 지복의 미소를 짓지만 그 누구도 그의 미소를 볼 수는 없다. 한탸는 그가 좋아하던 폐지 더미처럼 파쇄되어 버렸다.

  이 소설은 책읽기에 대한 이야기로도, 묵묵한 성실하게 일하는 노동자의 이야기로도, 고통스런 사회현실에서 살아남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삶의 이야기이다. 소설이 필시 현실을 반영한 허구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소설속 인물의 종말까지도 작가의 모습으로 오버랩된다. 물론 환상적인, 몽환적인 색채가 가득하다. 그러면서도 현실과 경계 어디쯤에 있는데도 작가의 능력이 지극한 현실적, 사실적인 느낌이 가득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저 현실에서 일어난 일인양, 너무한 쓸쓸함과 아픔이 뒤따르는 것일 것이다. 한탸 자신이 너무도 쾌활한 사나이었기에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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