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가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지현 옮김 / 민음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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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적 그로테스크

흉가, 조이스 캐롤 오츠, 민음사, 2018.


  원제는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가 여기 담겨 있다.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형태의 이 그로테스크함은 점점 물리학적인 시간과 공간을 연결시켜 전개된다. 공포란 눈에 보이는 시각적 자극의 반응이기도 하지만 그건 심리적인 반응이기도 하다.

  표제작인 <흉가>는 자매같은 두 아이의 흉가체험에 관한 이야기다. 어린 시절엔 왜 그다지도 무서워하면서도 흉가에서 나올 유령을, 그 음침하고 비밀스러운 기운들을 경험하고파 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흉가란 유령보다는 부랑꾼이 모이는 장소라는 것을 늘 잊고 만다.  어릴적 흉가를 찾는 행동들은 그렇게 하고픈 마음은 단지 옛날 옛날의 이야기만일까. 공포와 스릴러를 탐닉하는 것 또한 흉가를 돌아다니고픈 마음과 같은 것이라 본다. 흉가가 간직한 사연들, 그 이야기들은 오래도록 자리잡아 현재를 잠식한다. 어쩌면 미래까지도. 

    

옛날 옛날에라는 말과 함께 동화는 시작된다. 그런데 동화가 끝나고 나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뜻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단지 우리가 들은 이야기와 그 말들이 암시하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흉가」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라는 소제목이 어울린다. 심장을 뜯어내는 듯한 공포보다는 익숙한 이야기가 변형되어 기괴하다. 피와 폭력을 세부적으로 묘사하고 그것을 중점으로 하기보다는 그것에 이르기까지의 심리가 잘 묘사되어 있다. 무섭다보다는 괴랄과 흉측 등등 딱히 꼬집어 말하지 못할 감정을 갖게 된다. 단 하나, 강렬하게 내비치는 피의 이미지가 있는데 그건 생리혈이다. 소설에서 공포,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는 등장인물은 “미혼모, 유린당한 처녀, 불명예와 연민과 수치를 짊어진 여자” 들이다. 그렇기에 종종 불안의 전조 단계로서 비치는 강한 생리혈이 소설속에 잔뜩 깔린다. 남자에게 혹은 아버지에게 맞은 아내와 아이의 피가 아니라 여성들 자신의 필연적인 신체적 특징으로서의 피. 그 비릿한 피는 불안과 폭력과 욕망의 전주처럼만 들린다. 또는 그런 것들이 오로지 ‘여성’의 것임을 보여주는 것도 같다.


신세 망친 여자, 망가진 여자, 모욕당한 여자, 타락한 여자, 돌이킬 수 없이 ‘여자’가 되어 버린 여자.

제셀은 이 시간과 공간에 있는 모든 처녀는 “히스테리 기질”이 있다고, 특히 장로교회 가정교사라면 누구보다도 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쏘아붙인다. 만약 그녀가 운 좋게 남자로 태어났다면, 그런 처량한 동물들은 전염병 보듯이 피했으리라고. -「블라이 저택의 저주받은 거주자들」


  그렇다. 마치 이 세상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블라이 저택이고 여성들은 저주받은 거주자들인 것처럼 비극적 상황의 주인공이 된다. 공포와 불안 심리는 여성만의 지극히도 ‘감정적’인 ‘비이성적’ ‘몰이성적’인 것처럼 반응하는 남성들이 있고 그들은 그런 여성을 혐오한다. 기껏해야 생리시 갖는 히스테리, 여성의 본질적인 성격적 결함으로 인식한다. 공포와 불안을 일으키는 ‘가해자’이자 ‘포식자’로서의 그들은 여성들의 생리혈에 대해, 꿈으로까지 나타나 죄어오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어서는 폭력의 공포를 알 리 없다. 심지어 그 폭력은 시공간을 넘어서까지 쫓아온다. 이런 불안들을 떨쳐내기 위해서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나. ‘내가 과연 자격이 있나?’ 이런 죄책감에서 거듭 벗어나기 위한 노력들에 기껏 “나를 못 믿는 거예요? 응?”이라 말하는, “중요하지 않은”일로 치부되며 “남성적인 짜증을 부리는 태도”일 수밖에 없는 그들이 알 리가 있을까.

  조이스 캐롤 오츠는 SF와 페미니즘의 세계를 잘 그리는 작가다.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가 그리는 이야기는 매우 고전적으로 느껴지는데 ‘고딕 호러’의 대표적 작가로 알려져 있다. SF의 세계가 이 소설집에서도 상당히 등장하는데 물리적인 이론들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속에서 그런 이론을 내세우는 이들은 모두 남성들이다. 그 이론적 세계를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지만 그 물리적 틀을 바탕으로 폭력당하는 직접적 체현이 여성현실이다.

  적어도 이 책이 단편집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감흥은 달라졌을 것이다. 이야기의 연결고리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진도는 더디고 답답했다. 소설 중반부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작품의 소재와 스토리와 구성이 왜 이럴까를 찾아보아야 할 정도로 이해되지 않아 힘들었는데 뒷장 작품 지면수록을 보고 다른 연도에 쓴 작품들을 묶은 소설집임을 알았을 때의 허망함이란. 거듭 찾아보았는데도 왜 굳이 장편으로 여겨졌는지 생각해보면 책의 정보를 미리 알지 않으려는 이유와 목차 구성 때문이었다. 단편이라면 굳이 4부로 나눌 필요가 있었을까. 단독 스토리임을 그대로 나타냈으면 될 것을 굳이 연결성이 없는데 4부라 나눈 편집에서 끝까지 장편이라 여기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연도별, 주제별, 소재별, 다른 스토리를 이렇게 묶은 의도가 있을까. 작가의 의도는 아닌듯하다. 각각의 단편들은 서로 다른 잡지에 다른 연도에 출간되었다. 다양한 발표지에 수록된 것을 한번에 읽는 독자로서는 매우 기쁘지만 묶음의 이 카테고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주제와 형식적인 면을 따진다고 해도 분류의 이유와 목적이 수긍되지 않는다. 공포와 스릴의 순간이 얼마나 자주 깨져버렸는지를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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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정신 오늘의 젊은 작가 18
김솔 지음 / 민음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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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의 추출

보편적 정신, 김솔, 민음사, 2018.


  소설보다 작품해설이 흥미로웠다. 소설이 하나의 이미지덩어리로 흘러갔다면 작품해설은 그 이미지를 깨뜨리고 구체적이었다. 보통 평론, 작품해설은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여 소설을 더욱 어렵게 느끼게 하거나 소설을 이해하는데 실패(?)했다고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번엔 오히려 머릿속 제멋대로 흘러가는 생각들을 잘 모아주어 좋았다.

  회사의 비밀스런 페인트 제조의 비밀을 알고 있는 다섯 원로 중 창업주의 유일한 손녀가 죽었다. 이로써 회사는 사업의 미래를 걱정하고 비상 경영 체제를 선언한다. 전작의 영향으로 회사 내의 암투, 조직이 개인을 억압하는 그런 이야기가 전개될 것인가 했던 싶었으나 소설은 지금 현재의 상황 이전으로 거슬러 창업주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방대하게 뻗어가는 이야기를 등장인물의 연대기를 중심으로 읽어 가면―작품해설이 안내해준 대로― 시작은 창업주가 태어난 1889년부터다. 결혼하고 출산하고 그리고 연금술에 빠지는 창업주와 결혼한 아내들과 자녀들의 서사가 펼쳐진다. 붉은 염료를 찾아 헤매던 창업주가 스승을 만나 연금술을 익히는 과정, 실패하고 신비한 붉은 페인트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는 이야기 또한 서사의 한 축이다. 창업주가 신비한 붉은 페인트를 만드는 일에 열심이었다면 첫 번째 아내는 그 페인트를 판매하는 일에 주력한다. 처음엔 집시들에게 생계를 위해 창업주가 실패한 페인트를 판매했는데 점차 ‘신비한 주술적 힘’을 가진 것으로 알려지며 잘 팔리게 되자 첫 번째 아내는 대량생산공장을 갖추어 판매를 본격화한다. 판매를 하려면 생산이 있어야 하고 이 붉은 페인트의 생산비밀이 자손들에게 이어져 온 것이다.

  이 소설은 뭔가 길게 이어지고 복잡하다. 공간적배경도 한국이 아니라 브라질과 남미를 넘나들며 시간적배경도 100년 이상이다. 현실적인 회사의 이야기를 보여주나 싶었건만 창업신화를 넘어서는 방대함을 갖는다. 연금술, 비밀, 신비로운 붉은 페인트와 같은 단어들이 등장하면서 무엇에 중점을 두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에 이야기는 설화적이고 비현실적인 형태로 흘러간다. 조지 오웰의 『1984』와 히틀러도 언급된다. 이의 등장은 폭압·강압적 전체주의를 연상케 한다. 스승이 창업주에게 한 많은 이야기들, 창업주의 비극적 가계도, 그리고 연금술이 어떻게 이 전체주의와 히틀러와 연계되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내내 제목처럼 <보편적 정신>을 언급하고, 그런 질문을 답을 하게 한다.


운명을 믿는 자는 결코 위대한 연금술사가 될 수 없다고, 스승은 제자에게 여러 번 강조했다. 연금술이란, 모든 물질 속에 내포되어 있는 보편적 정신을 찾아내고 추출하여 모든 재료들의 쓸모를 재조정하는 학문이자 실천 방법이라고. 그러니까 납과 황금의 차이는 쓸모의 차이일 뿐이며 각각에 내재되어 있는 보편적 정신을 조정함으로써 얼마든지 그 쓸모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금술사의 주된 역할은 물질과 물질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보편적 정신이 자유롭게 건너다닐 수 있도록 입구와 다리를 만드는 것이라고 스승은 말했다.


  생각해보면 ‘보편’이란 단어는 자주 쓰는 단어다. 그럼에도 ‘보편이 뭐지?’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려면 어렵다. 그러다보니 이것이 소설의 멈춤 지점이 된다. 아, 보편이란 게 보편적 정신이 뭐더라, 뭘까, 뭐여야만 하는 걸까.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건에 대해, 인간에 대해 인류에 대해 세상 모든 것에서 ‘보편이 뭘까’를 끊임없이 묻도록 하는 책. 


가역 변화에 중요한 요소는 보편적 정신이지만 그것은 혼자서 존재할 수 없고 반드시 사물이나 현상, 사건, 사건과 사건 사이, 침묵, 어둠, 망각 등에 깃들인 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신이 창조했든 스스로 진화했든 상관없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목적과 쓸모를 존중받아야 한다. 한 가지 존재의 소멸은, 그것을 반영하고 있는 존재 모두의 즉각적인 소멸을 야기하며, 소멸이 진행되는 순간은 찰나에 불과해서 거의 동시에 모든 것이 소멸된다고 말하는 편이 진리에 가깝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 환경에 대한 최소한의 채무 의식,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경외감이야말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보편적 정신이 아닐까. 인생이란 불완전한 인간이 조물주의 선한 창조물로 환원되는 과정이다.


  스승은 연금술을, 붉은 페인트의 비밀을 알려주는 듯 알려주지 않고 비밀을 지운다. 굳이 비밀을 지운다는 건 그 비밀스런 방법을 아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앎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대한 우려일 것이다. 오랜 역사에서 붉은 페인트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 페인트를 인간이 어떻게 활용하려 했는지, 그때 붉은 페인트를 활용하기 위한 인간의 정신은 ‘보편적 정신’이었는지 아닌지. 폭력과 배신을 기본으로 한 인간의 잔혹함이 보편적인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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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로 하여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
편혜영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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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에 충성하지 않는다

죽은 자로 하여금, 편혜영, 현대문학, 2015.


  의학드라마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 이런 광고인지 모를 연예기사가 새 의학드라마 방영을 앞두고 쏟아진다. 대체로 한국드라마는 병원에서 연애하고 법정에서 연애하고 직장에서 연애하고…그런 기승전‘연애물’이라는 비판이 있다. ‘병원’과 ‘의사’라는 장소와 직업이면 의학드라마로 분류되는 것인지 뜬금없는 의문을 가지면 그렇다면 ‘병원’과 ‘의사’가 나오는 소설은 의학소설이 되는 건가, 절대 망하지 않을 소설이 되는 걸까 쓸데없는 자문을 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이인시의 선도병원이다. 의학드라마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드라마 <하얀거탑>이 다루는 이야기쪽에 가깝다. 스릴러, 미스터리쪽으로 강한 편혜영 작가의 소설이라고 덧붙이게 되면 상상가능한 분위기가 떠올려진다. 하지만 소설은 내게 전혀 다른 부분에서 추리를 가하게 만드는데 『마태복음』 8장 구절이라는 소설의 제목,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석’처럼 곱씹고 곱씹는다.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서 계속 곱씹었어. 예수는 인자하고 자비롭다면서 죽은 사람한테 왜 이러나, 사람이 죽었는데 이렇게 야박해도 되나…… 이해할 수 없었지. 한참 새기니까 조금 알 것도 같더라고.”

“무슨 뜻인데요?”

“영혼이 죽은 자는 내게 필요 없다, 불신자는 불신자에게 가고 믿는 자들은 나를 따르라. 그러니까 나를 따르는 건 믿는 자로 충분하다는 뜻이려나.”

  

  소설은 수술방의 이야기보다 원무과가 중심이 된다. 병원이라는 공간이 필히 갖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사람들이 아니라 돈이 흘러오고 나가는 그 구조에, 병원이 지탱해 나가는 힘인 돈, 그것을 다루는 원무과, 병원 경영과 행정에 더 집중한다. 그 상황을 둘러싼 인간의 행동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구체적으로는 선도병원으로 이직한 ‘무주’의 선택이 불러온 파장을 보여준다. 무주는 새로운 조직에서 가장, 아니 유일하게 인간적으로 대해준 ‘이석’의 자잘한 비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폭로할까 고민한다. 그 자신이 실제 행하지 않은 병원 비리에 연루되어 책임을 지고 사직한 경험을 생각하며 무주는 ‘공명’함을 선택하기로 한다. 이제 태어날 자신의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런 무주는 곧 병원비를 내지 못한 장기환자를 침상에서 내쫓는 일에 앞장선다. 그것에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공명심’을 선택한 자의 이 변화된 행동의 이유는 무엇인가.


무주는 완벽하게 좌우대칭이 맞는 세계, 균형이 잡힌 세계란 없다고 생각해왔다. 모든 것은 비뚤어져 있고 기울어져 있기 마련이라고. 그런 점에서 세계는 애초 구(球)나 정육면체처럼 정확하고 완벽한 형상이 아니라 오히려 트램펄린 같은 것이었다. 똑바로 서면 균형을 잃는 곳, 균형을 유지하려면 비틀거리거나 한쪽 발을 구부리고 팔을 뻗어야 하는 곳, 뒤뚱거려야만 가까스로 설 수 있는 곳 말이다. 그런 세계이므로 균형을 잃은 태도를 오히려 균형 잡힌 태도로 여겼다.


  소설이 그리는 세계가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분명하다. 무주의 상황과 변화하는 심리 또한 생생하게 이해가 되며 그래서 무서워진다. 무주의 선택이 가져온 결과는 감당할 수 없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무주의 확고함이 부족했던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든 확실하게. 확고함, 그것을 또한 믿음이라 말해도 좋을 듯하다. 그때그때 따라서 행동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무주와 달리 이석은 그 유연해보이는 얼굴 이면에 확고한 행동방향을 설정하고 있다. 이석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무주에게 ‘충고’하는데 두 사람의 대화를 보다보면 무주가 얼마나 유약한지 느껴진다. 

  병원의 구매품목을 조작하는 비리자를 고발하는 것은 병원을 위해 옳은 선택이고 정의로운 선택일텐데 무주는 조직 내에서 왕따당하고 한직으로 밀려난다. 아이는 유산되고 아내와는 멀어지는 상황, 오래도록 병상에 누워있던 이석의 아들 죽음에 대한 죄책감까지 겹친 무주의 일상. 그 속에서 무주는 쉽게 자신을 바로세우지 못한다. 거기에 이석의 복직까지 이어지면 마침내 무주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의심하게 된다.

  ‘조직’이란 언제나 개인을 죽인다. ‘조직’이라는 생물이 굴러가는 방식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 방법에 파괴되고 무너지는 개인은 언제나 무력하다. 정의와 윤리는 이상이과 관념일 뿐 실제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지 모른다. 그래서 항상 조직에게 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니다. 무주가 그랬던 것처럼 ‘솔직하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실은 원하는 것이 정의와 윤리가 아니었는지도. 정확하게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면 무주처럼 되고 만다는 생각을 한다.  

  문득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고 조직에 충성한다는 검찰총장 후보자의 말이 떠오른다. 어찌 생각하면 이 말도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무주의 결정과 방식이 후보자의 방식과 같은 면이 있으면서 매우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무주가 ‘지금 처한’ 상황은 후보자가 한때 겪어야 했던 그 과정 중에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무주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쉬이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흔들리는,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생각없음은 아니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신념 하나가 조직의 생존방식을 누르고 세상 모든 공존방식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죽은 자로 하여금… 이 말, 아주 아주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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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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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관한 문제


레몬, 권여선, 창비, 2019.


   오늘도 과자가 탔다.

   되는 노릇이 하나도 없군요 우리 베티 번 씨


  「레몬과자를 파는 베티 번 씨」를 찾아봤다. 자작시라고 했으니 실제하지 않을 텐데도 인터넷상에 저 시가 있을 것만 같아서. 첫 연의 다음은 어떤 시구로 채워져 있을까. 시큼한 레몬을 쳐다보며 마무리되지 않은 시의 나머지를 생각했다. 어째서 소설의 나머지가 아니었는지는 모르겠다. 더웠고 되는 일 하나 없는 또하루였다.

  소설은 날마다 보는 살인사건 기사가 담지 않을 것을 이야기한다. 고교생 A양과 B군 혹은 김양과 한군에 관한 기사가 아니다. A양과 B군 혹은 김양과 한군을 알고 있는 “생생한 삶의 내용이 파괴된” 이들의 삶의 이야기다. 다언, 상희, 태림 세 화자가 장마다 연도를 바꿔 이야기를 전개하고 2002년의 어느날 경찰서 취조 장면을 상상하는 다언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어떤 삶은 이유 없이 가혹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가련한 벌레처럼 가혹한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우리 삶에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까.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걸까. 그저 한만 남기는 세상인가. 혹시라도 살아 있다는 것, 희열과 공포가 교차하고 평온과 위험이 뒤섞이는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을까.


  뭐라 형용할 수 없을만큼 아름다운 언니의 죽음. 그후로 다언은 ‘되는 노릇 하나 없다’ 말하지도 못하는 삶을 산다. 나머지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사라진 삶. 거기다 사실은 언니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에 죄책감과 부채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 용의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명확히 특정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해언의 죽음에 가해자는 없는 셈이다. 소설은 가해자를 정확히 밝히지는 않고 있다. 화자의 독백을 통해 유추하도록 했다. 특별히 미스터리함이 강조되진 않는다. 다언이 해언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에서 벗어나 어떻게 애도에 이르는가에 더 중점을 둔다.

  세 화자를 중심으로 했는데 다언 외에 두 사람은 용의자가 아니다. 작가는 이들을 비켜두고 사건의 목격자 태림과 특별한 등장인물을 등장시킨다. 다언의 동아리 선배 상희다. 언니가 죽은 동아리 후배와 잘 아는 자의 삶은 그 ‘죽음’에 얼마만큼 영향을 받을까. 다언에서 상희의 시점으로 바뀌는 지점에서 이 소설이 다른 소설과 다르게 느껴졌다. 왜 상희가 등장할까, 상희의 역할은 무엇일까. 상희의 목소리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제법 한다. 상희가 본 다언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다언만이 뭔가를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나 또한 뭔가를 잃어버렸다. 오히려 더 치명적인 쪽은 나일 수 있었다. 다언은 자신이 뭘 잃어버렸는지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는 데 반해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다언을 관찰하고 다언의 말을 들으며, 이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저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관대한 척 고개나 끄덕이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다언에게 내 속을 들키자 발끈하여 그녀를 공격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상희는 다언을 관찰하는 위치에만 머물지 않는다. 다언의 지적처럼, 상희의 자각처럼 상희는 사건의 피해자, 유가족을 바라보는 자들이다. 어설프게, 섣불리 위로하려 들며 내밀한 이야기들을 들으려는, 들을 자격을 부여받은 듯이 행동하는 그런. 어쩐지 나도 뜨끔해진다.

  소설은 한편으로는 그 구조가 엉성하게 느껴지면서도 뭔가 단단하게 느껴진다. 이 아이러니를 모르겠지만 그렇다. 먹먹함이 사로잡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용의자로 다언의 증오를 한껏 받은 한만우의 삶이 그의 동생 선우가 그의 어머니가 겪은 삶이 있으니까. 원래 부르려던 이름 대신 바꾸게 된 이름이 죽음을 부르게 된 것은 아닐까 싶어 죽은 딸의 이름을 개명하려는 다언 어머니의 행동이,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할 줄도 모르고, 당한 줄도 모르고 여전히 사모하던 여학생의 기억에 수줍은 웃음을 웃어대는 한만우의 미소가, 계란 후라이를 부쳐먹는 만우와 선우 남매의 모습이 계속 맴돈다. 이건 누가 누구를 죽였는가에 관한 질문과 답이 아니니까, 그래서일 것이다. 삶에 관한 문제니까. 


이제 그들은 죽고 없다. 한만우의 죽음을 경유함으로써 나는 비로소 언니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삶과 마찬가지로 언니의 삶 또한 고통스럽게 파괴되었다는 것을, 완벽한 미의 형식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내용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면 그밖의 것은 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살아 있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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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줄다리기 - 언어 속 숨은 이데올로기 톺아보기
신지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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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이 짜장이 되도록

언어의 줄다리기-언어 속 숨은 이데올로기 톺아보기, 신지영, 2018.


  말은 인격을 나타낸다는 말이 오랫동안 사용되었음에도 지극히 저급한 인격을 나타내는 이들이 있다. 그래도 전혀 괘념치 않아하는 ‘집단’이 있다. 그들이 표출하는 집단적 품격과 인격은 무지가 아니라 ‘이기’에서 나온다. 무지라면 좀더 알려주면 되지만 저 표독하고 끝없는 이기의 언어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혀버리고 만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말을 믿기에 쓰레기처럼 쏟아져 나오는 그들의 말이 세상을 울릴 때마다 환멸이 쌓여간다. 이런 감정을 의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꽤 익숙하게 사용해온 언어일지라도 특정 집단에 의해 지속적으로 사용될 때면 그 단어가 가진 뜻과 뉘앙스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그렇게 어느 때부턴가 새롭게 생각하게끔 되는 단어들이 늘어간다. 지양되어야 할 언어가 확산되는 것은 특정한 집단의 ‘이기’적 생각을 담은 개인미디어의 확산도 영향이 클 것이다. 언어 속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려는 그 지독하고 지난한 노력들. 그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무용한 일이겠지만―던져주고 싶다.

  이 책 『언어의 줄다리기』는 흔히 사용하는 단어를 선정하여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기에 매우 쉽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단어를 선정하고 있기에 오히려 그 점이 아쉽다. 가령 미망인이나 ‘여류’ ‘여교사’ ‘미혼-기혼’ 등에 담긴 이데올로기는 너무나 익숙하게 지적하고 있으니 말이다. 새롭게 등장한 언어나 은어가 담고 있는 표현을 다루었다면 현재의 시점에서 작용하고 있는, 작용하려 하는 이데올로기를 더 잘 알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저자는 언어 사용에 민감할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언어감수성을 높일 것을 권고한다. 언어가 사고체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제일 먼저 선택한 것은 ‘각하’다. 이 말이 가지고 있는 뜻에서부터 언제,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지를 설명한다. 정확하게 따진다면 잘못된 표현이지만 대통령을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되어 왔고 권력은 그것을 선호했고 별칭을 법적으로 강요했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이 단어는 지양해야 할 단어로 꼽고 있다. 아니 명백히 틀린 단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각하가 담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사람의 신분에는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신분제를 전제하는 이 표현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부인하는, 반민주공화국적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그렇게 부르기를 강요당함으로써 언어사용에 사고체계에 남아 있는 이 단어는 은연 중 여전히 신분제를 옹호하는 단어가 아니고 무언가. 특정한 집단이 특정한 인물에게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해진다.

  우리나라 언어의 장점으로 꼽히는 높임말 사용에 대해서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그토록 나이에 민감한 이유, 그것은 호칭 때문이다. 2002년 월드컵 대표팀 히딩크 감독이 경기진행시 호칭에 존대를 없앤 일을 우선했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누군가를 알아가는 일은 누군가를 부르는 일부터 시작한다면 우리는 누군가를 호칭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 항상 필요했고 그것이 ‘나이’를 알고 나서 이루어졌다.


호칭의 문제에 대해 한국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민감하고 심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사실은 모두 언어 사용과 관련이 있다. 한국어 사용자들은 대화 상대자와 호칭과 서열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대면하여 말을 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있다. 이것이 바로 지금 한국어 작동방식이다.


  언어가 우리의 사고체계를 그렇게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 선조들은 위아래 열넷 정도는 모두 벗으로 사귀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동일한 해에 태어난 경우만을 오로지 친구로 편하게 말을 하고 선후배의 엄격한 위계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의 잔재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타깝다.

  저자는 크게 여덟 개의 단어 속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얘기하고 있는데 그중 많은 부분은 차별요소를 가진 단어다. 특히 성차별적 언어다. 미망인, 여교사, 여검사 등등의 단어. 매우 익숙한. 이 외에 ‘자장면’ 투쟁사와 더불어 ‘자장면‘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짚는다.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짜장면‘을 발음하지 못하고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자장면‘의 세월 동안 자장면의 매출 또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사람들은 왜 그토록 ’짜장‘을 허하기를 요구했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재미있다.


언어 규범은 언어 사용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하는 기준이 된다. 그런데 언어 사용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기본적으로 언어 사용자들의 사용에 기반해야 한다. ‘관’으로 대표되는 몇몇 사람들이 만든 규정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규범은 관이 만들고 ‘민’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민이 만들고 관이 정리하는 것이다. 즉 관이 해야 할 일은 규정을 만들어 민의 사용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민의 언어 사용을 관찰하여 민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 현실을 규범화하는 것이다.

  

  한편으론 ‘짜장면’은 되는데 왜 다른 표현은 안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비민주적이고 차별적인 언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맞다. 자연도태 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제재방법 또한 필요한 일이다. 넘쳐나는 혐오표현을 바로잡는 일은 왜 안되는지, 언어가 가진 힘과 한계가 무엇인지를 이 책을 읽어가며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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