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로 읽는 심리 수업
김동훈 지음, 빈센트 반 고흐 그림 / 민음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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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내면 아이


고흐로 읽는 심리 수업

김동훈 (지은이), 빈센트 반 고흐 (그림), 민음사, 2025-02-05.

 

한국인이 좋아하는 화가는 고흐인 듯 고흐와 관련된 책이 정말 많다. 학창 시절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인지 어느 책에서 읽었던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일본이 그렇게 고흐를 좋아한다는 말이 기억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고흐의 해바라기를 비롯해서 고흐의 작품이 다른 화가들에 비해 대단한작품인 듯이 교육하고 강조했다고. ‘일본풍의 그림을 좋아하고 많이 그린 고흐였기에 일본은 그토록 열광했겠구나 싶었다.

  어렸을 적부터 고흐의 그림은 어디서나 쉽게 접했다. 일본의 고흐 열광으로 인해서이기도 하겠고, 고흐의 그림과 그가 남긴 편지들이 많이 남아 있어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어쩌면 예술가의 특징처럼 여겨지는 고흐의 기행(?)’도 큰 몫을 하리라 생각한다.

  이 책도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그가 그린 그림을 통해 고흐의 심리, 나아가 일반적인 심리학 이론을 설명한다. 익히 들어본 심리학 용어들이 고흐의 그림을 통해 예시처럼 펼쳐지는 이야기다. 고흐의 그림도 보고, 고흐의 심리 상태도 보고, 이와 더불어 어떤 날들에 내 행동의 이유를 되돌아볼 수 있게 된다.

  고흐는 히스테릭, 우울증, 광기로 대표되는 화가다. 고흐에 관한 책들을 제법 봤음에도 저런 단어들만이 늘 머물렀는데 새삼스레 이 책을 보면서 고흐가 가진 우울의 근원이나 사랑 등 다른 것들을 각인할 수 있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메시아 콤플렉스. 히스테릭한 고흐에게 기대한다거나 생각할 수 있었던 부분이 아니었기에, 재밌는 부분이긴 했다. 하지만 이 메시아 콤플렉스의 기저에도 고흐의 상처가 내재해 있다.


심리학자들은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끌리는 이유를 메시야 콤플렉스’, 즉 구원자를 자처하는 심리라고 한다. 극단적인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해결자로 나선다.

이렇듯 자신을 구원자로 여기면, 적어도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만큼은 자신이 필요한 존재로 인정받게 된다. 그래서 자신을 원하는 사람에게 손해를 무릅쓰고라도 자신을 기꺼이 내어준다. 하지만 그 내면 깊은 곳에는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은 과거에 그런 존재로 인정받지 못한 상처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고흐의 인생 전체를 지배한 우울과 광기는 어릴 적부터 상처받은 내면 아이때문이다. 저자는 고흐의 이러한 심리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고흐 이전에 태어난 아들의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어머니가 고흐를 고흐가 아니라 형으로 대체하여 바라보았기에 고흐는 늘 어머니의 사랑이 결핍된 아이로 자랐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와 같은 여인에게 마음을 주기도 했고, 창녀 시엔의 불쌍하고 힘든 모습을 보며 결혼으로 시엔을 구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시엔이 점차 자립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고흐는 시엔을 떠난다.

  이 책을 통해서 보는 고흐 역시도 안타깝다가 우선한다. 부모와의 관계, 동생 테오와의 관계, 고흐가 했던 사랑, 고흐와 고갱의 관계는 왜 이다지도 어긋나게 흘러가는지, 삐꺽거리는지. 저자는 고흐에게 있는 강박이 상처와 더불어 이를 더욱 강화한다고 본다.


어찌 됐든 그런 상태에서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원망하면서 점점 더 외골수가 되었다는 점이다. 가족과 사랑하던 여인들, 동네 사람들마저 숱한 충돌과 갈등으로 고흐를 외면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강박증에 빠진 이유도 알 것 같다. 우리에게 실재의 것이 없을 때 다른 사람에게 나의 방식을 강요한다. 누구에게는 시기심으로, 누구에게는 열등감으로, 또 누구에게는 괜한 갑질로 표출되지만, 억압한 욕망 때문에 일평생 결핍(그리움)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소중한 실재만 있다면 그 수단은 중요하지 않다. 블로그, 유튜브, , 그림 등 다양한 매체를 오히려 적극 활용할 것이다. 표현할 실재만 있다면 표현할 것만 있다면 인상파이든 초현실주의든 다다이든 추상표현주의든 미니멀리즘이든 개념미술이든 그 방식은 중요하지 않다.

 

  저자는 고흐의 이 히스테릭한 성정이 올리브 나무나 아몬드 나무 등을 그리며 자연에 대한 환기와 내면에 집중함으로써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노란 하늘과 태양이 있는 올리브나무 숲> 그림이 대표적인데, 이를테면 주의회복이론’(ART: Attention Restoration Theory)’이다.

*반 고흐, 노란 하늘과 태양이 있는 올리브나무 숲, 1899

심리적으로 힘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고흐가 굳건히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더 이상 사람을 모델로 삼지 않고 그 대신 아몬드나무나 올리브나무와 같은 자연을 그리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의 회복 이론은 우리의 정신적 에너지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방법으로 자연의 역할에 대해 설명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산만하게 흩어졌던 주의를 다시 집중하려면 네 가지 요소가 중요하다. 그것은 탈주(Being Away), 확장(Extent), 끌림(Fascination), 융합(Compatibility)이다.

첫째, 탈주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 둘째, 확장은 우리의 시야를 넓혀 더 멀리 더 높게 보는 것, 셋째, 끌림은 억지로 집중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는 것, 넷째, 융합은 자신의 취향과 적합하게 연결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연유가 있어서인지, 나 또한 고흐의 그림 중에서 인물을 그린 그림보다도 자연을 그린 그림을 보는 것이 더 편하다. 올리브나무, 밀밭, 별이 비치는 밤. 그리고 그가 병원에서 그렸던 그림을 보면 애잔하다. 병원에 있을 때 그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 그림을 보고 있으면 적잖이 슬퍼진다.

  고흐는 상처받은 삶이라도, 새로운 생명과 희망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고흐의 생명과 희망이 그림 속에 녹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듯도 하고. 내 방에 걸린 고흐의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는 여전히 쓸쓸해 보이긴 한다. 고흐와 관련된 책을 보았어도 딱히 고흐에게 감흥이 없었는데 나이가 들어서인가, 심리학 이론과 함께 보아서인지 고흐에게 좀더 가까워진 기분이다. 알려진 대표적인 그림 외에 고흐의 그림을 새롭게 보고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며 상처받은 내면의 어린 고흐를 생각해본다. 저자가 고흐를 통해 얘기하고 있는 많은 심리학 이론이 고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내 생에도 순간순간마다 이러한 심리적인 질곡이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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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친다! 받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은이), 이순영 (옮긴이), 문예출판사, 2024-10-15.


 

대체로 책을 읽고 나면 줄거리나 주인공 이름은 생각나기 마련이다. 시간이 지나더라도 더구나 톨스토이의 책이라면 더더욱 생각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이던가, 누군가 이 책을 이야기할 때,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어라, 바보 이반이 있었는데, 이반이 무슨 일을 했더라, 왜 바보라고 했던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거였지? 책은 읽었지만 전혀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대표적인 책이 되어버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에 대한 내용이었을 텐데 왜 암전인 건가. 그때에는 이래서 독서를 한 후 기록을 해두어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만을 했었다.

세월이 흘러 여전히 제목만 생각나며 내용이 가물가물한 이 책을 꺼내 들고 통째로 사라진 기억을 찾아 나섰다. 어라, 바보 이반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등장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던 이유를 찾게 되었는데 그건 아마도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방관적, 방어적이었던 내 감정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을까. , 이런 형태의 이야기를 쉽게 수용하지 않았던 건 예전에도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책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표제작으로 단편 10편이 수록되어 있다. 단편 전체 기독교적 사상을 핵심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그렇다. 그것이 문제다. ‘기독교적 사상이 무엇인가.

 

사람들이 자신을 염려하고 돌봄으로 살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오직 사랑으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사랑으로 사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사는 것이며, 하느님은 그 사람 안에 살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언제부턴가 종교, 특히 기독교사상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와닿지 않는다. 정확히는 보편적인 진리를 기독교의 형식으로 전달하면 그렇게 되는 모양이다. 깨달음보다 반박이 뒤따르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라고 하면 너무하고, 기독교인이라고 해야 적확할까. 그러니까 기독교 사상을 수용하고 이를 실천한다는 기독교인기독교와 일치되게 생각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궁극이 사랑이라면 그들에게 사랑이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사이비 종교라는 타이틀이 붙은 종교를 통으로 같은 선상에 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면도 있지만, ‘하느님의 뜻그에 대한 해석과 실천하는 이들의 정신세계와 그들만의 세상에 계속 받치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이 책을 읽으며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는 이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이 더 맞다.

  ‘JMS’ 같은 부류들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으로 받들어지는 것도 한미정상회담전 한국의 기독교지도자라는 이들이 극우 커넥션을 찾아 벌인 행태도, 보석과 사치품을 들고서 청탁이며 부의 축재에 안달하느라 혐오를 널리 퍼뜨리는 행태들도 모두, ‘교인이란 이름 아래 행해지고 있다. 세계로까지 복음을 널리 떨치고 있는데, 바보 이반속 이반의 두 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탐욕스럽고 악랄한 그들이 부르짖을 ’, 그들이 전파하는 의 가르침이라니. 악은 꼼꼼하다고 하는데 더없이 성실하고 꼼꼼한 그들의 탐욕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 한없이 베풀고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성경에서 그들이 뽑아내는 메시지는 왜 그토록 저렴하고 더러울까. 촛불속 세상처럼, 여전히, .

 

지주가 농노를 지배하던 시절 이야기다. 지주들 가운데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과 하느님을 기억하면서 농노를 가엾게 여기는 지주들이 있는가 하면 인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지주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악랄한 자들은 농노 출신 관리인, 말하자면 보잘것없는 출신으로 귀족 대열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이런 자들 때문에 농노들의 삶은 더욱 힘겨워졌다. -촛불

 

  이런 자들 때문에 어떤 교인들은 계속 힘겨워지고 농도들의 삶은 피폐해진다. 한국에서도 제법 발생하는 사건인데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아래 사건을 보면서, 종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한다.

 

신에게 바치는 제물"4세 아들 호수에 던진 엄마

https://mobile.newsis.com/view/NISX20250827_0003304704

 

  ‘바치겠습니다’, ‘바친다이런 단어에 정말 받친다’, 아니 빡친다려나. 권력을 가진 자, 기득권자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인 앞에 이나 권력을 붙인 이들의 행태, 그들에게 세뇌받고 그들에게 끊임없이 바치는이들의 모습을 보며 이것이 정말 구원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맹목적인 믿음과 신념, 그건 종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긴 하다. 한편으로는 톨스토이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것이 아닐진데, 왜 나는 이 책을 보면서도 늘 다른 부분에 더 꽂히는지 모르겠다. 마침 이 글을 읽을 시점에 나타난 일들이 강해서, 혹은 역시나 하고 터진 특정 종교들-그러나 특정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때문일 수도 있겠다 싶다. 아무튼 바친다’, ‘구원저러한 단어들에 연상되는 것이 그저 사랑이기만 하다면, 정말로 보편적 진리이면 좋으련만 태극기하면 어느새 태극기 부대를 떠올리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사랑이 있는 곳에 이 있을까.

 

하느님을 위해서지. 하느님이 생명을 주셨으니 마땅히 하느님을 위해 살아야지. 하느님을 위해 사는 법을 배운다면 더는 슬퍼하지 않게 될 걸세. 그리고 만사가 편안해질 거야.”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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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청춘의 초상 - 조국의 독립에 바친 뜨거운 젊음, 한 장의 사진이 증언하는 찬란한 그 순간
장호철 지음 / 북피움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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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하셨습니까!

 


독립운동가, 청춘의 초상

-조국의 독립에 바친 뜨거운 젊음, 한 장의 사진이 증언하는 찬란한 그 순간

 장호철, 북피움, 2025


  책 속 26명의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본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 실려 있던 인물이 몇 명이나 되나. 살아가면서 이 사람의 독립운동가라고 이름 들어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되나. 하지만, 이런 분도 있었어?를 더 남발함에 부끄럽고 또한 안타까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했겠지만, 기본적으로 독립운동가에 대해 얼마나 제한적으로 가르쳐왔으며 소극적으로 알렸던가, 이들을 외면하고 왔던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독립운동가의 삶은 조국의 독립에 바친 뜨거운 젊음, 한 장의 사진이 증언하는 찬란한 그 순간이라는 책의 부제처럼 뜨거웠다. 이들에게 조국은 무엇인가를, 국가란 국민에게 무엇이어야 하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몇 년의 상황들과 맞물려 더더욱.

  책은 돌아오지 못한독립운동가와 돌아온독립운동가로 나누어 이야기하고 있다. 독립운동가의 삶을 읽다가 보면 감정이 울컥해지며 숙연해짐을 느끼게 되는 지점이 있는데,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대부분, 10대와 20대라는 것이다. 청년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린 그들. 그들은 그 어린 나이에 조국의 독립을 외치고 실천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죽음은 일제에 의한 직접적인 처형이거나 굶주림으로 인한 것이라는 점이다. 최근 유튜브에서 AI로 복원한 독립 운동가의 식사하는 장면을 보았다. 왜 이러한 장면을 복원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내내 제대로 드시지 못한 그들이 편안하고 조금은 풍족한 한 끼를 드셨기를 바라는 마음, 뒤늦은 감사와 응원의 마음 아닐까.

  이러한 마음으로 숙연해지는 가운데, 어쩔 수 없이 분노하게 되는 지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일본에 대한 분노여야 하는데, 한 나라의 초대 대통령이란 놈에 대한 것이다. , 일본의 앞잡이이니 일본에 대한 분노와 같은 건가.

  독립 운동가 장인환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제의 제국주의를 옹하고 한국의 독립을 방해한 미국인 더럼 스티븐스를 저격한다. 당시 한인들의 모습을 보자.

 

의거 후에 두 사람이 재판에 넘겨지자 한인들은 성금을 모아 변호사를 선임했고 유학생이던 신흥우가 통역을 맡았다. 애당초 이승만에게 통역을 맡기고자 했으나 그는 샌프란시스코까지 왔다가 자신이 학생 신분이며 기독교도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하여 한인사회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 이쯤에서 내가 잘못 읽었나 하여 다시 한번 문장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둘도 없을 것 같은 이름, 이승만이 그 이승만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데, 그건 여성 직업 교육에 매진한 차미리사의 활동에서다. 여자로 태어났다고 섭섭이라고 불린 차미리사의 소개 내용은 이렇다.


그는 동포의 고통을 외면하고 천국에 가길 소원하는 내세 지향적 영혼 구원 신앙, 불의한 현실 사회에 대해 무관심한 초월주의적 신앙, 정교분리 뒤에 숨어 민족의 아픔을 외면하는 경건주의적 신앙 모두를 비판(한상권)”하면서 의혈 투쟁의 소신을 편 것이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의 재판 법정 통역을 기독교도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한 이승만이 해방정국에서 면담을 요청하자, 차미리사가 이를 단호히 거부한 데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저런 인간을 몇 번이나 대통령에 뽑아. 뽑아 버려야 할 인간을 전직 대통령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과하게 칭송하고 받드는 무리들이 있어 그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이 어떤 나라인가. 식사하셨습니까가 인사이고 안부인 나라. ‘밥 한번 먹자가 만날 약속의 표현인 나라인데.


2009년 정부가 발표한 교육 부분 친일반민족행위자 22명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근대 여성운동과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 불리었던 사학 설립자들이 많다. 서울여대를 세운 고황경, 인덕대학을 세운 박인덕, 상명대를 세운 배상명, 성신여대를 세운 이숙종, 추계예술대학고 중앙여중고를 세운 황신덕 등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김활란은 이화여대의 초대 총장의 신화로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보다 훨씬 큰 지배력을 지닌 인사로 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지금도 여전히, 이런 현상은 이어진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여전히 힘겨운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친일 세력은 그때 얻은 어마어마한 부를 바탕으로 더 많은 부를 챙기고자 여전히 친일에 목매고 있다. 독립된 지 오래되었는데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친일 문제는 오늘까지 이어져 나라를 흔든다.

 

  한편,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대부분의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동도 알 수 있었다. 여성 독립 운동가로 유관순 누나만 주로 이야기되었던 현실이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여전히 누나로 불리는 것은 그를 온전한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로 바라보는 걸 방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를 유관순 열사라 부를 때 그는 이준 열사와 같은 위상의 공적 영역에 존재하는 인물이 된다는 점을 되새길 만하다.

 

독립 유공자 가운데 여성의 비율이 3%가 채 되지 않는 현실은 옥바라지와 경제활동, 양육까지 병행하며 항일투쟁에 참여한 여성들의 희생이 재조명되어야 할 필요성을 웅변으로 증명한다. 그늘에 가려진 부인들의 뼈를 깎는 희생은 남편에 부수되는 내조가 아니라 동등한 투쟁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아쉽다. 내로라하는 독립운동가들의 투쟁과 헌신은 바로 그들 가족의 희생을 전제로 가능했기 때문이다.

 

  낯선 이름들이 뒤늦게라도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하였을 터인데, 기록에 없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많아 안타깝다. 그러나, 명백히 드러난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외면하고 폄하하는 무리들이 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이들의 투쟁과 희생으로 살아 있으면서 다시금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으려는 밥버러지들의 밥그릇을 걷어차 버리고 싶은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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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이 말은 체념, 포기, 전진 중 어디에 더 가까운가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어쩌면 망각하라는, 이 말은 정녕 효과적인가. 효과적이란 건 또 뭔가. 말을 한 이의 위로라는 진심에 방점을 두고 의미는 관용어로 제쳐둔다고 해도,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는 말은 늘 헷갈릴 수밖에 없는 문장이었다.

  그러나, ‘조국의 시간을 통해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의미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시간어떻게 수용하고 활용하는가는 결국 위로받는 이가 해야 할 몫이라는 걸.

 

 

2021년 출간된 이 책은 2019년부터 벌어진 검찰개혁사태에 대한 기록, 사건일지다. ‘검찰개혁에 대해 광기처럼 쏟아졌던 기록보도를 대척점에 두고서 공권력의 가감없는 조작과 기본적인 사실조차도 서술하지 못하는 언론의 행태를 고스란히 알려주고 있다. 개혁에 선봉에 선 이를 소멸시키면서 조작이 어떻게 가능한지, 얼마나 잘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세상에 일이 그것뿐인 양, 세상이 무너질 일인 것마냥 속보 전쟁을 벌이던 언론이 최근 사실진실에 여전히 입닥치고 있는 상황에서, ‘시간이 해결의 첫 걸음은 사실에 대한 기록이 첫 걸음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도 잊혀지기 전에 어떤 상황에 대한 것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복기하는 것이 괴로운 일이 될지라도, ‘거짓말왜곡’, ‘조작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하는-누군가에 대해, 그것이 어떻게 쓸 거라는 것은 우선 제쳐두고- 무식한 이를 위해서.

 

나는 죽지 않았다. 죽을 수 없었다.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나의 흠결을 알면서도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생환(生還), 그것이면 족했다.

 

  ‘공소권 없음으로 상황을 종결지으려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에 이 구절은 떨리는 문장이 되었다. ‘죽지 않았다는 것. 죽을 수 없었다가 더 맞을 듯하지만, 이런 일련의 사태를 겪은 이를 나로 대체한다면 나는 과연 버틸 수 있었을까.

 

수모와 모욕을 당한 후 기소가 이루어지고 여전히 재판을 받고 있지만, 김주대 시인이 저를 위해 쓰고 그린 문인화(文人畵) 속 글처럼,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습니다.” ‘공소권 없음을 바랐던 사람들의 은밀한 희망과 달리, 죽지는 않았습니다. 촛불시민 덕분입니다. 날벼락처럼 들이닥친 비운이지만, 지치지 않고 싸우겠습니다.

  저자는 광복절 특사로 사면되었지만, 검찰의 조작으로 이어지고 연결된 이 사건은 사면으로는 부족함 또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사안을 판단하는데 있어 조국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그 사람의 사실과 진실에 대한 정보 수집 능력,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는 능력과 의지를 볼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입만 나불대는 인간인가, 아닌가. 정녕 분노해야 할 때가 언제인지는 제대로 아는 자인지, 내뱉는 정의가 얼마나 가소롭고 편협한지를. 또한 잘 몰라서라고 하면서 끊임없이 잘못된 사실에 근거하여 판단하고 평가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잘 몰라서가 아니라 잘 알아도조국뿐만 아니라 모든 사안에 대해 그렇게 판단하고 평가한다. 그들 마음 속에 정의라는 것은 비틀려 있거나 애당초 내게 이익이 되는 것, 내가 손해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래 문단처럼, 보수인사들의 부정과 비리에 그토록 관대한 것은, 결국 그들 자신과 같기 때문 아니려나.

 

    왜 언론은 보수인사들의 부정과 비리에 이토록 관대한가. 왜 진보인사는 배우자와 자녀는 물론, 사돈의 팔촌까지 털려가며조리돌림을 당하는가. 언론들이 보도 경쟁을 하며 전국적인 사안이 되는 경우는 보수언론과 진보언론 가릴 것 없이 다 함께 뛰어들 때다. 그런데 보수언론은 진영논리라는 개념조차 없어서 보수인사의 부정비리에는 쉽게 눈감고, 진보인사의 부정비리에는 사력을 다해 달려든다. 진보언론은 진보인사의 부정비리를 보수인사의 그것과 똑같이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진보인사의 부정비리는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이 합세해 금세 전국적 사안이 되지만, 보수인사의 그것은 묻혀버린다. 족보를 뒤지는 연좌제 성격의 추국행 보도는 보수언론의 전매특허이므로 보수인사에게는 적용될 일이 없다. 보수언론의 파렴치와 진보언론의 염치가 언론 보도 불균형의 주요 원인이다. 뻔뻔한 보수보다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진보가 때렸을 때의 타격 효능감도 더 클 것이다.˝

   

- 이재성, #그런데 윤석열 장모와 부인은?, 인권연대, 발자국통신(2020.5.28.)

 

  저자의 새로운 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의 출발점에서 온전히 해결되어야 하고, 이해되어야 하는 시간이 바로 조국의 시간아닌가 싶다. 2025년의 8.15는 새롭게 다가오는데 끔찍했던 최근 몇 년 동안이 쉬이 보상될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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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었다고?

 

 ,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어떤 이야기들은 옛날 옛적에로 시작한다. 하지만, 현재진행형인 이야기를 알고 있다. 이 이야기도 시간이 지나면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며 전해질 것이다. 다만 동화가 아니라 사실’, ‘실제 사건이라는 전제를 달고서. 그럼,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이 되는 건가?

  어릴 적부터 그림책, 동화책, 애니메이션 벌거벗은 임금님을 봐 왔지만 제목에 맞게 임금님은 완전히 벌거벗은 적이 없었다. , 팬티 하나는 걸치고 있었다…….

  그동안 벌거벗은 임금님에 맞는 적절한 캐릭터를 찾지 못했는데, 마침내 완벽하게 딱 맞는 인물을 찾아냈다. 안데르센의 동화가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얼마나 현실을 잘 보여주는 예언서인지 새삼 깨달으며. 1837년 작(원제, Kejserens nye Klæder)이라는데 2025년에 벌거벗은 임금님을 맞닥뜨릴 줄이야.

 

  그 옛날 우리의 임금님은 참으로 무능하고 사치스러웠고 나랏일에는 관심도 없었다. 관심을 가진다고 나랏일을 잘하는 건 아니어서, 관심을 가지고 한 일은 특히 더, 망하게 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그런 임금인지라 온갖 것을 끌어모아 제 주머니를 채우기에 급급했는데, 입어도 티도 나지 않는 명품옷도 해당되는 품목이었다. 제가 임금이니만큼 그 권위를 위해 명품 옷을 주문했다. 평소 임금이 하던 것처럼 삥땅에 최적화된 재단사가 선택되었고, 필연인지 채택된 브랜드명은 멍청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옷이었다. 재단사는 옷을 만드는 시늉만 하다가 옷을 완성했다고 내밀었다.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점검한 그 누구도 문제점을 찾아내지 못했고, 마침내 완성된 옷이라고 내밀어진 옷을 본 임금과 그 주위 관료들은 보이지 않는 옷을 칭찬해대다 제 멍청함을 감추려한 것인지 드러내려 한 것인지 전국민에게 명품 옷을 선전하기 위해 행사를 기획했다. 멍청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옷이라니, 임금의 옷을 보지 못한 그 누구도 자신의 멍청함을 드러내지 못하고 환호만 질러댔다. 이때, 어떤 꼬마가 말했다. “어랏, 임금님이 옷을 벗었네?“

   몇 개월 전이었다면 이 꼬마는 잡혀갔다. 보이지 않는 옷을 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자가 넘쳐나는 세상이었을 테고, 꼬마의 석방을 외치며 임금 네 옷뿐만 아니라 너 또한 명품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은 고난을 겪고 있을 세상. 거짓 명품, 짝퉁의 시대에 네네, 옷이 보입니다요라고 말하는 이들이 줄줄이 비엔나처럼 끊이지 않고 나오는 것을 본 건 충격이었다. 여전히 그들은 존재하고, 아직도 옷이 보인다고 외치고 있다. 이들을 벌거벗은 임금님 속 그 신하라고 생각하며 답답함을 좀 털어내고 적잖은 조롱을 섞어 웃어본다.

  여러 보도를 보건대, 임금님이 옷을 벗었다는데 옷만 벗은 게 아니라 바닥에 드러누워 난동까지 피웠다는데, 생각할수록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그 모습을 굳이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렇게 벌거벗은 임금님이란 동화가 생각이 나, 다행히 순화된 그림으로 그 모습을 대체하며 웃음 짓는다.

  


  특정한 누군가로 인해 이 버전 그림책 표지가 제목이란 너무도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임금의 행차에 오토바이와 차량이 등장하는 바로 이 장면옛날 같으면 마차와 말들이 등장했겠지만요즘은 이 모습이 맞겠지벌거벗은 임금님을 태운 차가 요란하게 지나가는 이 그림이 눈에 익다.





   정시 출근한 건 이틀밖에 안된다는 어느 임금 기사에 기가 찼었는데 그 많은 나날들을 빈 차들만 보냈다는 기사들이 생각난다. , 알면서 그런 것은 제대로 제 때에 보도하지 않는 건가. 그 많은 신하들과 다를 리 없는 언론종사자들! 그들은 임금님의 옷도 보이고 진정 임금도 볼 줄 아는 능력자들이었던가. 생각하니 전해져야 하는 이야기 버전은 이 그림처럼 차량에 없는 임금이 그려진 모습이어야 하겠다.

  정당한 절차와 체계를 망가뜨릴 줄 아는 임금은 역시나 끝까지 할 줄 아는 것만 하는구나 싶어, 안쓰러움도 더한다. 그러나, 부끄러움은 내 몫으로 두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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