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제8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고선우.이연파.최장욱 지음 / 허블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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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타임즈의 재생


2025 8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고선우,이연파,최장욱, 허블, 2025-09-19.

 

 

  유럽 폭염이 심각한 상태로 지속되고 있다. 파리를 비롯해 스페인, 이탈리아 지중해뿐만 아니라 독일, 체코, 폴란드 등 동유럽으로 번지고 있다고. 뉴스를 보면 폭염 지역 기온은 40도 이상이며 45도 이상을 기록한 곳도 있다. 고온에 트램, 신호등, 선로까지 녹아내려 기차가 멈추고 전력공급 차질 등 도시 인프라가 마비파괴되고 있다. 무엇보다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1,300명 이상이라고 하는데, 냉방시설이 제대로 갖추어 있지 않아 위험에 노출된 더 많은 사망자가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유럽 폭염 속 우리나라는 장마 소식이 들린다. 장마가 끝나고 나면 여름, 우리에게도 폭염이 닥칠 거라고 하는데…… 기후변화로 인한 지구의 미래가 어떻게 흘러가려는지 막막하고 아득하기만 하다. 어릴 적 미래는 과학문명의 발달로 저 우주를 유영하거나 로봇이 등장하고 세상은 더할나위 없이 각진, 그러니까 기계가 가득한 세계로 그려지곤 했다. 공상과학 글짓기나 그림에서 아이들이 상상할 수 있는 공상과학의 세계엔 이토록 원시적인 미래는 존재하지 않았다. 문명이 제아무리 발전한다 한들 자연에 대한 대응이라는 것이, 자연을 극복해 내야 한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내가 어릴 적과 얼마나 달라졌을까. 공상과학 글짓기 대회가 아닌 한국과학문학상속 세계는 어떠할까. 미래과학이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한 놀라움, 경이, 찬탄보다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어떻게 인간을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많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경각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냥 인간의 삶이 늘, 그러한 것인지도.

  한국과학문학상 여덟 번째 작품집 카나트는 이러한 느낌을 주는 대표적인 소설이었다. 아주 먹먹한 느낌이 드는. 순간, 과학문학상이라는 타이틀을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되는.

  카나트는 고대 페르시아에서 개발된 지하수로로 사막 지역의 한계를 극복하여 유용하게 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인간 기술의 집합체다. 고선우의 소설 카나트의 세계 역시 여전히 카나트가 필요한 사회다. 기후변화로 인한 극심한 사막화로 물이 비싼 도시, 거대한 수로 카나트에서 물을 공급받는다면 물을 가진 자가 아마도 상위의 권력자가 아닐까. 거대 기업 오아시스가 이 역할을 맡는다. 오아시스는 물의 공급과 유통을 독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비전까지 제시한다.

 

오아시스는 바이오 로봇 스타트업을 인수하고 오랜 기간 연구 개발한 끝에, 인체의 장기와 팔다리의 일부분을 로봇화하는 하이브리드 생체 로봇 기술을 선보였다. 이 기술로 인체의 물 의존율을 크게 낮출 수 있다는 보고서가 곧바로 학계에도 발표되었다.

 

  이건 폭염 문제 해결방안으로 인간이 폭염에 견딜 수 있도록 신체 일부를 로봇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인데, ‘로봇화수술의 대상은 사회에서 부를 가진 자의 몫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왜냐고? 로봇화 수술 비용 문제를 생각하더라도 그건 가진 자나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떡하든 위험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로봇 신체를 갖고자 가지지 못한 이들은 처절하게 발버둥치고……. , 이래서 내가 작가가 못되는 모양이다.

 

학교에서 배운 노동자 계층을 위한 역사에서 선생님이 가장 강조했던 건 여러 세기에 걸쳐 반복되었던 혁명과 투쟁 뒤에도 결국 순응한 자들만이 살아남았다는 교훈이다. 역사는 되풀이되었다. 인류의 90퍼센트가 사라졌던 그날에도 살아남은 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자본과 권력의 편에 섰던 노동자, 그에 맞서지 않고 길들여진 사람들. 딱 할아버지의 삶이 그랬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할아버지의 한 손에는 마실 물이, 다른 손에는 먹을 음식이 있었다. 그 이상을 쥘 손이 없기에 더 많은 걸 꿈꾸지 않아야 했다.

 

  소설은 시작부터 노동자 계층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어쩌면 시작에서부터 느껴지는 기시감은 소설의 결말이 예견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노동자의 삶이란 결국 늘 그래 왔던 것을. 현재의 노동 시장은 점점 인간 대신 AI가 대체할 것이라 하고 있다. 나아가 피지컬 AI가 등장하며 인간의 노동력이 점점 필요없어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카냐트 속 세계에선 일반 로봇보다는 인간의 몸을 기초로 만들어진 하이브리드 로봇이 더 대접을 받는다. ‘오아시스노동자들에게 효율성을 강조한다. 물부족 사회에서 인체의 물 의존율을 낮춘 노동자란 더 큰 이익을 가져다 주겠지. 그렇다면 아예 하이브리드 로봇보다 그냥 일반 로봇으로 대체하는 것이 더욱 더 효율적이진 않을까? 굳이 라이더들에게 하이브리드 로봇화를 해주는 오아시스의 세계. 이 사회에선 인간화 지수 20%, 로봇화 지수 80%면 인간 등록이 말소된다.

  ‘오아시스의 라이더 아이작은 업무 중에 잦은 실수를 하고 종종 유년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할아버지와 친구들과 함께 했던 날들, 몰래 우물에 들어가 물을 훔쳤던 날의 기억, 훔친 물맛이 주는 기쁨과 두려움. 그의 기억은 나이가 들어가는 사람이 떠올리는 옛기억처럼 그립고 먹먹하다. 기억은 부분부분 생각나지 않기도 하는데 뭔가 계속 희미하거나 파편화되고 지명이나 이름이 생각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작의 신체는 건강하다.

  아니, 아이작의 몸에 이상이 나타난다. 생체에 수분을 공급하는 장치에 문제가 생겼다. 필연적으로 재수술이 필요한 상황이다. 생체에 수분을 공급하는 장치라 한다면, 아이작은 하이브리드 로봇인 건가. 아이작은 재수술을 받고 배달 업무에서 물 저장소 감시자의 지위로 올라서고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했고, 자부심을 느낀다”. 오아시스는 효율적인 업무와 생존을 위해 노동자에게 '신체 기계화 수술'도 진행해주며 하이브리드 로봇지수가 높아질수록 더 좋은 업무를 제공하는 아주 착실한 체계를 갖추고 있으니, ‘오아시스에는 얼마나 많은 아이작들이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들 아이작들은 꿈꾸지 않는, 꿈꿀 수 없는…….

  소설을 읽고 나면 왜 먹먹한지 눈물이 날 것 같은 느낌은 아이작이 보여주는 파편화된 어린 날들의 얘기가 큰 몫을 차지한다. 과거는 서정적으로 서술되어 있고 되돌아가지 못할 추억들은 언제나 그립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 생을 마감하는 자의 의식처럼 점점 흐릿한 기억이기에 더더욱. 생을 마감하는 자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이작은 이미 인간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로봇화 수술의 부작용이 기억상실이라면 아이작은 점점 더 기억을 잃어버리고 건강한 신체만을 가진 채 업무 매뉴얼만 정확히 숙지하며 충실한 업무를 지속할 것이다. 1936년 영화 모던타임즈의 찰리처럼 오아시스가 만든 철저한 하이브리드 노동자로서 말이다. 이것이 과거에도 미래에도 이어지는 노동자 계층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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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돌멩이 - 2026년 제4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이상문학상 작품집
위수정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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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삶은 이어진다


눈과 돌멩이- 2026년 제4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위수정,김혜진,성혜령,이민진,정이현,함윤이, 다산책방, 2026-01-23.

 

 

  대상작으로 최종까지 논의된 작품이 위수정 작가의 눈과 돌멩이, 이민진 작가의 겨울의 윤리라고 한다. 대체로 수상작 모두 재밌게 읽었으나 나 또한 이 두 작품이 소설의 분위기나 문체 등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그러고 보니 둘 다, 겨울 이미지다.

  일본의 눈 덮인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눈과 돌멩이를 읽으며 설국이 생각났다. 특히, 일본의 설경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보면 자동적으로 설국이 생각나는데, 생각보다 설국의 세뇌가 강하구나 새삼 느꼈다.

  눈을 보지 못한 지 너무 오래라 소리없이 펑펑 쏟아지며 쌓이는 을 보고픈 강렬한 욕구가 남아 있는지 소설을 보면서 눈내리는 산골짜기 어디쯤으로 가고 싶었다. 어쩜, 이런 기분에 나도 친구들에게 눈풍경 좋은 곳으로 여행가자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 여행장소를 정하고 여행 갈 날을 기다릴지도. 그러나 그 이후……. ‘수진처럼 죽은 후 나의 유골을 여행하고자 한 그곳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길 수 있을까. 나는 암 투병 중 자살한 친구의 유골을 다른 나라에 가서 뿌리고 돌아올 수 있을까. 내가 죽은 후 나의 친구들은 나의 유언대로 유골을 다른 나라에 뿌려 줄까, 난 어떤 친구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길 수 있을까. 그것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잘 알지도 못하는데 그리울 수 있나?

그리워? 그립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수진의 친구 유미재한은 유골을 들고 일본으로 향한다. 암투병 중 자살한 수진은 자신의 유골을 일본 나고야 도가쿠시 신사에 뿌려달라고 유언을 남긴다. 폭설까지 내리는 낯선 곳은 그들에게 매순간 불안과 위험을 준다. 그들의 기억 속 수진은 그리움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모르는 것 투성이기도 하고, 이해못할 유언과 낯선 곳에서 폭설로 인해 고립될 상황에서 수진을 떠올리며 믿기지 않는 현실과 함께 다양한 감정에 빠져든다. 가까웠던 누군가가 떠나면 누구라도 이런 마음이지 않을까. 그 무력함과 슬픔을. 이어서 뒤따르는, 대상이 모호한 분노도

 

소리와 풍경의 불일치가 오히려 재한의 불안을 조금씩 가라앉혔다. 그것은 낙관이라기보다는 슬픔에 가까웠다. 먼 곳의 풍경은 천천히 멀어졌고, 가까이 있는 나무들은 빠르게 사라졌다. 타인의 기억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이유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눈물이 날 것 같아 재한은 창을 내렸다. 차가운 바람이 들이쳤다. 뻐근한 눈알을 깜빡였다. 슬픔이 날아가도록. 저 흰 풍경 속으로 모두 다 사라지도록. 유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눈송이는 얼굴에 닿는 순간이 끝이었다. 바늘처럼 날카롭게 톡, 치고 소멸하는 차가운 감각.

 

눈은 인간을 고립시킨다. 무기력하게 만들고 결국 미치게 만든다. 자비를 모른다.

 

  설경은 미치도록 아름답지만 수많은 감정 속에서 그들은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고립되기 전 마주쳤던 여장 남자근처에 사는 일본인 코요’. 코요에 대한 편견을 가득 안고 있지만 고립 상황에서 현지인의 도움은 매우 절실하다. 이런 상태에서 코요를 만난다는 건, 소설에서 코요가 이들에게 어떠한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걸 알게 한다. 재한은 코요에게 편견을 가지고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 남성인 재한의 이러한 반응은 편견없는 유미와 대조되는데, 여행 내내 현실을 대하는 태도나 수진에 대한 기억과 감정 표출방식에서 두 사람은 차이가 나타난다.

  ‘코요의 존재가 이들과 연결되는 지점, 그 역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냈다는 점이다. 코요는 자신의 집 정원 한곳에서 그의 연인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코요의 애도의 형태는 재한과 유미보다 더 적절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이 적절함이란 내내 재한과 유미가 그들의 우정이 지극히 느슨하고 끊임없이 수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계속 그들의 불안하고 혼란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드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두 사람의 수진의 유골을 뿌리기 위한 이 여행에서 표출하는 모습이 이해가 되기도 하면서 애초에 정말 이런 마음으로 이 여정을 시작할 수도 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코요의 연인은 죽은 것이 아니라 떠나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또다시 이미 코요의 그의 연인을 위한 애도 방식에 대해 가졌던 마음이 주춤해진다. 아니, 그러니까 그냥그래, 사람에 대한 마음이란 그들에 대한 기억하는 방식도 잊기 위한 방식도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온전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방식은 정해지지 않은 것일 텐데도, 과도하게 뭔가 그래야 하는 것이 있기라도 하는 양 그것에 매몰되었나 싶다.

  수진과 재한, 유미. 그들이 처음 일본 여행을 계획한 것은 일본의 설경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히쓰마부시란 음식을 먹기 위해서다. 장어요리로 나고야 지방의 대표적인 향토 음식이라는데 재한은 코요와 대화를 나누며 히쓰마부시히쓰으 마부시이라고 잘못 발음하였음을 알게 된다. 재한은 장어덮밥을 이야기한 것인데 잘못된 발음으로 인해 재한은 비통’, ‘눈부시다라는 단어를 읊조린 것이다.

  이제 고립도 끝나고 무기력하고 미치게 만드는, 자비를 모르는 눈도 그쳤다. 밤이 지나 흩날리던 희뿌연 풍경 속 꼭대기가 보이지 않던 나무 사이로 내리던 눈송이들 속에 수진의 뼛가루를 뿌려둔그들은 무엇을 할까. ‘수진수진에 대한 기억을 떨구어 내고팠던 그들의 아침은 어떤 모습이 되려나.


숲에서 나오며 재한은 주머니 안의 돌멩이를 만져보았다. 코요의 눈빛과 그의 정원이 떠올랐다. 여기다 버리고 갈까, 잠깐 고민하다 집으로 가져가기로 했다. 하지만 돌멩이는 국외 반입 금지일 텐데. 재한은 앞서 걷는 유미를 불렀다. 유미가 뒤돌아 재한을 보았다. 하얀 풍경 때문인지 유미의 얼굴도 환했다. 돌멩이는 유미에게 비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히쓰으 마부시이 먹으러 가자. 재한은 일부러 끝을 길게 늘여 말했다. 재한은 주머니 속 돌멩이를 꼭 쥐었다. 그것은 단단했고 언제든 만질 수 있었다.

 

  계속 이미지와 감각이 눈 앞을 아른거렸다. 한편으론 그럼에도 삶은 이어진다는 말이 생각나는, 눈송이보다 돌멩이를 움켜쥐고픈 마음이 들었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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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노예 남편 아내 - 2024 한국인 최초 퓰리처상 수상작
우일연 지음, 강동혁 옮김 / 드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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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 수 있다는 가능성


주인 노예 남편 아내우일연, 강동혁, 드롬, 2025-12-24.

 


  이 책은 한국계 미국인의 퓰리처상 수상작이다. 퓰리처상 수상작을 보긴 하지만 이 책을 보게 된 것은 이 이유도 크다. 보면서 계속 앞장과 마지막장을 다시 들추며 생각한 말, “이거 소설이었나?” 이 책은 퓰리처상 보도 부문 수상작이다. 그러니까 소설이 아니고 실제 이야기다. 책을 읽을수록 그 사실을 잊고 다시금 이 글이 주는 이야기에 놀란다.

  주인 노예 남편 아내,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했던 것을 어느새 잊고 두 부부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왜 그동안 이 두 부부에 대해서 몰랐을까. 난 엘렌 크레프트도 윌리엄 크래프트도 처음 알았다. 이들이 미국 남부를 탈출한 노예라는 것을. 더구나 여자인 엘렌이 백인 주인으로 남편인 윌리엄이 흑인 노예로 변장하여 탈출했다는 것을. 책 제목은 그것이었다.

  막연하게 노예는 흑인일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다가 엘렌이 백인이라고 하는 것에 놀란다. 엘렌은 혼혈로 피부색이 밝았기에 병약한 백인으로 분장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들이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여정은 길고 위험하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노예들이 그들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어두운 경로가 아닌, 기차와 증기선을 이용하여 어둠 속에서만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선택한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담대한 방법으로 노예 부부가 탈출하는 그 긴 여정의 이야기다.

  두 부부는 1848년 미국 조지아주 메이컨에 살고 있던 노예였다. 이 책에선 노예예속 피해인’, 노예를 부리는 이들을 예속 가해자라 명명한다.

 

이 시기에 소위 한방울 법칙이라는,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들어가면 그 사람의 몸 전체가 유색인종으로 변한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었다. 게다가 노예제도는 언제나 어머니의 혈통을 따랐다. 흑인이라는 혈통과 예속은 건드려서도 취소해서도 안 되는 영구적인 조건으로 간주되었다. 힐리 가족이, 그리고 이제는 엘렌도 바로 이런 가정에 반기를 들었다.

 

  우리나라 또한 노비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랐다. 어떻게 이다지도 역사는 다를 게 없을까. 엘렌이 노예가 된 이유는 어머니가 노예이기 때문인데, 엘렌의 어머니 또한 혼혈이었다. 자기 자식을 노예로 만드는 아버지라니. ‘흑인의 피에 그토록 반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흑 성적 대상으로는 생각하고 실행하는 모순이라니.

 

브레머는 엘렌에게 왜 예속 가해자들에게서 도망쳤느냐고 물었다. 브레머는 그들이 엘렌을 학대했는지 궁금해했다.

엘렌이 대답했다. “아니요, 그 사람들은 언제나 내게 잘해줬어요.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지는 않았죠. 그래서 도망친 거예요.”

 

  다른 말이 더 필요할까. 엘렌의 저 말이 엘렌이 기나긴 여정을 버티는 힘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엘렌은 예속 가해자는 자신의 아버지였으며 또한 자신의 이복 자매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백인중심, ‘백인우월인 시대, 엘렌은 스스로를 백인으로 위장하여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순수한 혈통 중심의 사회, 왜 인종 간 차별이 계급이 생기게 된 것인지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보아도 지금 시대에도 결국 여전한 차별과 계급이 존재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면 그 참담한 마음을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들이 떠나온 세계는 흑인이 말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있는 세계, 아무리 자유 흑인이라도 총을 들었다가는 등에 39대의 채찍질을 당해야 하는 세계, 백인의 몸에 위해를 가하는 것이 사형에 처해지는 중범죄인 세계였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다음과 같은 세상이었다.

 

별만 떠 있는 새벽이 오기 전인 이 시간에는 많은 것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지나온 풍경에는 한 가지 분명한 변화가 있었다. 이곳에는 커튼과 붉은 깃발이 달린 노예 우리나 경매장이 없었다. 담장이 높고 가시 박힌 슈거 하우스도 없었다. 소금물 웅덩이나 후추 병, 소금자루가 갖추어진 채찍이나 쳇바퀴도 없었다. 부부나 부모나 아이가 판매되는 법원도 없었다.

 

  두 부부가 예속 피해자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탈출의 긴 여정 속에서 그들을 지지하고 도움을 준 이들 덕분이다물론, 엘렌은 이들의 이 여정에 신앙의 힘이 있었음도 얘기한다.그중에는 그들과 같은 예속 피해자뿐만 아니라, 인간의 권리를 박탈하는 이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 이들 부부에 대한 연민을 가진 사람들 덕분이다. 이들의 힘은 예속 피해자가 증가할수록 더욱 더 강해지고 견고해진다.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일이 단지 현재 삶의 평안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단순함을 떠나 보편적인 문제 인식으로 확산되기까지, 또한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음도 잊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이 부부의 여정은 실화이기에 이들이 노예제도가 성행하는 남부를 탈출하여 자유의 땅으로 도착했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현재의 시점에서도 이들의 탈출 여정이 놀라운데 당시에는 어떠했을까. 이들에 대한 비판과 찬탄이 이어졌을 것이고 이들로 인해 노예문제에 대한 논쟁 또한 가속화되었을 것이고 이들을 영웅화한다거나 무엇에라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조금이라고 깎아 내리려는 이들도 있다.

 

엘렌은 대단히 유능했고 큰 인기를 얻었으며 태도도 자신감 있게 변했다. 엠마 미첼이 친구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허영심을 갖거나 자기 분수를 잊을지도 모른다고 약간 우려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엘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는 이제야 자신을 여자라고 느끼게 됐습니다. 제가 더 이상 단순한 물건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런 제가, 단지 사람 대접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우쭐해질 거라고 생각을 대체 어떻게 하실 수 있나요?”

 

임신 마지막 3개월 동안, 엘렌은 남부에서 더 많은 나쁜 소식을 들었다. 신문에서는 엘렌이 자유롭게 살면서 너무 불행해진 나머지 남편을 버리고 미국 신사의 손에 자신을 내맡기며 예속 가해자들에게 돌려보내 달라고 애걸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마치 남부의 권위자들이 엘렌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그녀의 몸을 되찾지 못한 자신들의 무능력에 괴로워한 나머지 그녀의 이야기를 대신 차지하려는 것만 같았다. 엘렌에게는 자기 삶에 대한 주권이 없으며, 그녀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노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말이다. 그들은 엘렌을 아내가 될 능력도 없는 사람, 남편을 버린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들은 가짜 뉴스를 통해 엘렌의 의지를, 욕망을 도용하려 했다.

 

  이 책 전반에서 이들이 무사히 자유의 땅으로 탈출할 수 있기를 응원했다면-우습게도 이 책이 그들이 무사히 탈출한 기록임을 알면서도-, 후반부에는 이들 부부에 대한 당시 사회의 반응을 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특히, ‘엘렌에 대해 아니 여자 노예에 대해 가지는 사회의 압력은 편견은 인간에 대한 억압 철폐를 주장하며 평등을 외치는 상황에서도 얼마나 모순되게 이어지는지…….

 

여기서든, 다른 곳에서든 크래프트 부부가 받은 반응을 보면, 이들이 앞서 한 여행이 성공한 이유는 엘렌이 백인 행세를 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돈이 많고 장애가 있는 백인 남자 행세를 했기 때문임을 잘 알 수 있다. 크래프트 부부가 그렇게 여행할 수 있었던 건 서로 친밀한 관계나 남편과 아내라는 점, 어느 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성적인 친족 관계라는 점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관계가 드러난 지금, 크래프트 부부는 조지아주를 떠나 이동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편견에 마주하게 되었다. 남부를 벗어나고 미국을 벗어났는데도 남편과 아내라는 역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인과 노예, 그건 아니라도 주인과 하인이라는 역할은 받아들여졌는데도 말이다.

 

  작가는 엘렌의 성공은 그녀가 속한 세상의 위선과 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냈다.”라고 했다. 그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가능성, 문명이 스스로 세운 잘못된 구조를 인식조차 못한 채 허물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역사가 이미 알려주었지만 이 책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여성에 대한 차별적 구조는 더더더 세월이 지나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아니, 어떤 이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누군가를 차별하기 위해서 꺼리를 만들어내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이들을 예속 가해자라고 부르면 되려나.

  이처럼 여전히 차별 꺼리를 양상해내는 국가들 혹은 사람들이 있지만, 두 부부가 지나온 풍경이 변화였듯이 역사는 어쨌든 변화해왔다. 노예와 노예주라는 두 범주의 사람이 원래존재하지 않으며, 납치와 인신매매가 등 예속화(enslaving)”하는 것이 문제다. 문명이 스스로 세운 잘못된 구조를 인식조차 못한 채 허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이제 그것이 어떤 것이냐와 더불어 속도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문제가 되는 제도를 인식하였음에도 그것을 철폐하지 않으려는 이들로 인해 계속 예속 피해자가 생겨난다. 이 땅의 예속 가해자예속에 대한 의식적이고 맹목적인 인식이 속도를 갖춘 가능성에 의해 빨리, 신속하게 해결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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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24 소설 보다
김채원.이선진.이연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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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적인 밤

이선진, 밤의 반만이라도



소설 보다 : 2024, 김채원, 이선진, 이연지, 문학과지성사, 2024-03-14.

 


그거 아니? 사람들은 누구나 밤을 갖고 태어나. 갓난아이 속에 갓 난 어둠이 있는 셈이지. 그런데 사람의 몸속에 밤이 심겨 있는 건 아주 잠깐뿐이야. 보통 사람들은 탯줄처럼 밤과 연결되어 있다가 밤에게 버림받아. 너도 그렇고. 그런데 나랑 내 딸은 버림받지 않았단다. 밤이 우리 안에 뿌리내리기를 선택했고, 내가 계속 밤을 품고 있기를 선택한 거야. , 내가 앞이 안 보인다고 눈에 뵈는 것도 없는 여자라고 생각하지? 천만에. 나는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에 무슨 꿍꿍이가 들어차 있는지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어. 다 내 밤 덕분이지. 그리고 너도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이담에 나는 내 딸한테 내 밤을 물려줄 거란다.“

 

  빛조차 감지 못하는 전맹인 엄마 미수 씨의 말이다. 보통 밤은 어두움이고 불길하고 불안정함을 대표하는 말이다. 다운의 엄마 미수 씨의 은 그렇지 않은 걸까. 제 아이에게 밤을 물려줄 거라말하는 저 자랑찬 언사라니. ‘이 장애를 말한다면 다운은 전맹인 엄마 미수의 장애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한쪽 눈의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결국 제 엄마처럼 흰 지팡이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다운이다. 엄마는 제 말을 잘 지킨 셈이다.

  어떤 존재에게 매혹됨은 그에 대한 많은 것을 닮고 싶게끔 한다. 사소한 하나라도 같은 것을 찾아내고야 말며 닮아지려 버둥거리게 한다. 어린 시절엔 동화 속 공주가 그렇게 부럽고 좋다고 하면서도 마녀에게 끌리게 된다. 겁먹어서 얼어붙은 건가? 마녀들을 매력적으로 그리며 기존 동화를 전복시키는 이야기들도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에 대한 속절없는 끌림은 결핍과 욕망에서 발현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 모녀의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인 미숙또한 다운을 좋아하는 만큼, 이들에 대한 끌림이 있는 만큼 제게도 이 있노라(나한테도 있어요, 나만의 밤이“) 외치며 기꺼이 제 밤을 찾아내고야 만다.

  미숙의 밤들……. 미숙의 삶에 켜켜이 쌓인, 묻어둔 어떤 밤들. 어쩌면 미숙은 제가 가진 이 있기에 그 모녀에게 끌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제 삶 속 그 밤들이 마냥 어두운 채로 제 삶을 휘감지 않아도 됨을 알게 되었을지도. 조금씩 꺼내는 미숙의 이 미숙을 외롭고 힘들게 두지 않고도 미숙이 살아갈 수 있을 것임을,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야 한다는 위로와 격려, 채찍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을 힘있는 매혹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그 순간에 느껴지는 아련함이 있다. 무서운 어떤 것에 대한 이미지가 그 또렷한 경계가 파스텔톤으로 바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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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는 토요일 새벽 - 제1회 아르떼문학상 수상작
정덕시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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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 거미


거미는 토요일 새벽,  정덕시, 은행나무, 2024-11-25.

 


  개가 사람을 물었는데

  옆집 개가 사람을 물었다. 피를 닦을 휴지를 찾고 병원 얘기가 오가는 소리가 휴일 새벽 동네를 흔들었다. 개에 물린 남자는 다음날도 찾아와 개가 사람을 물었다고 외쳤다.

  옆집 대문을 지날 때면 개가 짖을 때가 있었다. 개를 키우지 않고 개의 습성에 대해 잘 모르는 나로서는 개가 짖을 때면 가끔 손을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바로 옆집인데 설마 경계한다고 그렇게 짖어댈까 싶어서. 왜 어떨 때는 짖었다가 어떨 때는 짖지 않을까 의아함도 가지며. 사람을 물은 저 개가 또 사람을 물게 될까. 그동안 짖는 일은 있어도 사람을 물었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왜 그 사람은 물었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정말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많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반려동물 관련 다양한 산업이 성행하고 물림 사고 등 반려동물로 인한 피해, 반려동물 유기 문제도 증가하고 있다.

  반려식물도 키우기 힘든데 반려동물을 키우는 일은 더더욱 난제라 내게 속하는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반려동물을 너무나 제한적으로 생각했던 건 아닌가 싶다. 무언가에 대한 애정을 갖는 일은 그또한 의지와 무관하게 찾아올 수도 있는 것일 테니……. 어쩌다 나도 타란툴라를 마주치면 스파크가 튀거나 은근하게 소유하고픈 마음을 가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은 반려동물 두희에 관한 이야기다. 반려동물의 종류는 거미’, ‘타란툴라이고 화자인 수현에겐 17년을 함께 한 가족이었다’. ‘두희의 죽음으로 시작해 어떻게 두희와 함께 하게 되었는지 두희와 함께 했던 날들을 회고하며 두희가 수현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아 가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까, 정리하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까.

 

내 인생에 블루프로그가 없었다면 어쩌면 내 삶은 훨씬 평탄했을지 몰랐다. 두희가 없는 삶 속에서는 두희로 인해 엄마와 척을 지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소라와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또 타란툴라에 대한 편견으로 나를 대하는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지금보다 단조로운 삶이 분명했다. 나는 단순하지 않은 삶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내 인생에 블루프로그가 있었기 때문에 포포를 지키고 싶어하는 원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나와 당신이 참 많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 무언가와 함께 산다는 건, 그래서 서로를 관찰할 수밖에 없고 그럼에도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다는 건 내게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결국 반려거미를 보내고 남아있는 자의 넋두리다. 떠난 것에 대한 애도이며 상실에 대한 위로다. ‘거미를 반려동물로 삼고 살아가는 수현은 거미를 반려동물로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해 외롭고 힘겹다. 수현은 두희와 교감하고 있지만 이를 쉬이 드러내지 못하며 두희로 인해 일상이, 관계들이 변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기에 거미 두희를 떠나보내고 난 뒤의 수현이 기억하는 17년은 아주 길다. 두희가 가족이기에, ‘가족에 대한 얘기가 많다. 경험한 자로서 수현이 느끼는 가족에 설명이 충분히 이해된다.

 

괜찮아. 가족이잖니. 원래 가족끼리는 한 번씩 싸우면서 지내는 거야. 너무 화목하기만 하면 그것도 밋밋하고 재미없어.”

엄마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내려온 사람처럼 활기가 넘쳤다. 엄마에게 가족이란 모든 사건의 주범이며, 동시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인 것 같았다. 내게도 가족이란 마법 같은 단어였다. 그것은 평생을 할애해도 이해할 수 없는 단어였고,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단번에 설명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두희는 내 가족이었다.

 

어쩌면 가족이란 서로에게 불가피한 영역을 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의미에서 가족인 두희를 수현은 이해했을까. 얼마나. ‘반려묘만 해도 사람의 손길 닿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특별히 스킨쉽도 쉽지 않고 비바리움에 두고 보는’, 어쩌면 관찰하는것이 대부분이었을 두희에 대한 수현의 마음이란 교감이 아닌 일방적 관계인 것은 아니었을까. 장식장에 둔 고가의 장식품, 명품가방을 대하는 그런 것. 글쎄, 반려견이 제 이름에 반응하지만 두희라 부르면 그것이 제 이름인지조차 알지 못했을 타란툴라 거미에 대하여.

 

두희는 자기 이름이 두희였다는 걸 알았을까?”

그건 모르겠지만 걔도 너의 무언가를 알아채는 순간들이 있었을 거야. 그게 아주 찰나였을지라도.”

  오로지 열일곱해를 두희에게 마음쓰며 삶의 순간순간을 함께 했던 수현은 두희와 함께 하는 삶 속에서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두희의 존재가 그저 나쁘기만 한다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의미함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겐 긍정의 영향을 미쳤음을, 무엇보다 자신에게는 그러한 존재였음을 느끼고 알아간다.

   내 생애 의미있는 어떤 것, 그것이 무엇인든 그 존재가 나를 더욱 더 단단하게 올려둔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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