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방문자들 - 테마소설 페미니즘 다산책방 테마소설
장류진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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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지켜보고 있다


새벽의 방문자들, 2019.


  여성의 방을 훔쳐보기 위해 엉덩이를 치켜들고 지독히도 낮은 자세로 창문 밖에 엎드리고 있는 남성의 모습은 CCTV에 정확히 찍혀 있다. 3달간 이어진 이 남성의 행위는 재판이 아니라 경찰 조사 단계에서 무죄, 혐의 없음으로 수사 종결되었다. 피해자는 보복당할 것이 두려워 이사한다. 여학생을 뒤쫓아 현관 비밀번호를 마구 누른 남성 사건이 발생한지 얼마되지 않았다. 새벽, 여성을 뒤따라가 여성의 집 안으로 침입하려는 남성의 기사는 어제도, 그제도, 그그제도 나타나 같은 사건인가 생각하게 한다. 워낙 주거 획일성이 높은 나라이니 아파트 동과 호수, 때론 층을 착각하는 일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거침입 범죄 건수가 지난 한해 만4천여 건이라는 기사를 보게 되면, 한밤이나 새벽이면 여성을 뒤쫓아 가 강제로 문을 열려는 수많은 남성이 등장하는 CCTV 장면을 보게 되면, 당연 생각은 달라진다. 아니, 기저에 있던 감정들이 거침없이 올라온다. 안타깝게도 그들에 대한 ‘욕’보다도 더 빨리 퍼져가는 불안과 공포.

  페미니즘을 테마로 한 이 소설집은 일상에서 겪게 되는 불안과 공포의 순간, 불쾌하고 모멸적인 순간, 너무나 흔하게 마주해서 피해에 익숙해진 순간들을 그리고 있다. 특히 표제작과 같은 「새벽의 방문자들」엔 새벽,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들로 인해 두려워하는 여성의 심리가 잘 나타나 있다. 아무도 찾아올 이 없는 새로 이사 온 집에 한밤중 초인종 소리가 계속 울릴 때, 비디오 폰을 통해 방문자를 확인할 수 없다 해도 확인할 수 있는 상태라도 불확실한 방문자로 인한 두려움, 불안과 공포의 감정에 그곳에 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숨죽일 수밖에 없다. 소설 속 ‘여자’ 역시 자신과는 일면도 없는 끊임없는 방문자들이 등장할 때마다 숨을 참는다. 그러다 ‘여자’는 마침내 알게 된다. 끝없이 수많은 남자들이 등장하는 이유를, 그들이 왜 ‘여자’ 집 초인종을 눌러대고 문을 두들기고 열려하고 얼굴을 들이박으며 서성이는지를.


새벽의 방문자들은 잊을 만하면 한번씩 찾아왔다. 여자는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비디오 폰에 달린 모니터로 남자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별일 아니라고 주문을 거는 듯한 태연함, 남에게 들키기 싫은 일을 할 때의 부끄러움, 돌연 술이 확 깨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의 주저함, 그러면서도 어쨌든 곧 벌어지게 될 눈먼 섹스에 대한 설렘 등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얼굴들. 머뭇거리는 그들의 얼굴이 비디오 폰의 카메라에 정면으로 잡히는 순간, 여자는 휴대폰 카메라로 모니터를 촬영했다. 그들이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리고 나면 찍어둔 사진을 프린트했다. 


  도심 오피스텔이 성매매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최근 몇몇 일당들이 잡혔다고 하는데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오피스텔 수는 어마어마하다. 문제는 이들 말고도 또다른 일당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옆집이 윗집이 아랫집 어느 곳이 현실의 그런 공간일지 모른다. 그런 공간을 활용하는 이들로 인해 혹은 그 이상의 이들로 인해 ‘여자’는 늘 불안하고 자유롭지 못하다. ‘여자’를 성적 대상화하며 보고 즐기고 착취하려는 끊이지 않는 방문자들의 존재. 감추려고도 하지 않으며 비밀스럽고 은밀하지도 않게 진행되기도 하는 노골적인 이 행위의 기저엔 무엇이 있는 건가.   

  소설에서 ‘여자’는 문 안에서 비디오폰을 통해 남성을 보지만 문 밖의 남성은 여성을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남성의 그 시선을 두려워하는 ‘여자’의 위치는 남성들을 ‘쳐다보는’ ‘촬영하는’ 위치로 바뀐다. 오래 짓눌린 감정 때문에  시선의 위치가 변한 것만으로도 감정이 들뜬다. 사뭇 통쾌하지만 그건 한순간이다. 현실에서 이렇게 대응할 수 있을까. 온갖 감정과 생각들이 스쳐간다. 소설집에서 가장 전복적 행위를 펼치는 건 김현진의 「누구세요?」다.


 면밀하고도 냉정히 머리를 굴리다가 다시 나는 흠칫, 놀란다. 아니 ,당신, 아가씨. 댁은 도대체 누구세요? 내 안에 지금 계신 분, 누구예요? 누구냐고요. 우리 오늘 처음 만나는 것 같은데, 애기 좀 해요. 나는 팬티를 벗어 세탁기에 던진다. 저 팬티는, 내 팬티가 아니다. 그럼 ,누구 팬티야?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낯모르는 사람만이 아니라 결혼을 앞둔 애인과의 관계에서도 여성의 불안과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다. 「누구세요?」에서 지윤은 직장 상사에게 성추행당하고 사표를 내지만 성추행 그깟것은 참으라고, 그따위로 사표를 낸다고 화를 내는 재영과 헤어진다. 이미 지윤은 그동안 벌어놓은 것을 재영에게 착취당한 뒤다. 계획하고 꿈꾸던 미래는 사라지고 월세 독촉에 시달리는 현재에 있는 지윤은 자신도 놀랄 만큼 스스로가 누구인지 모를 상태가 된다. 그녀가 옆집 문을 열고 들어가 그집에서 행한 행위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충격적인 것이었지만 ‘그’라는 이가 행할 때면 그저 익숙한 일상의 풍경이 된다.

  지윤이 서 있는 남성에 대한 전복적 위치는 잠시의 통쾌함도 주지 못한다. 쓸쓸하고 아릴뿐이다. 피해자가 되어도 피해자일 수 없는, 남성들의 성적 대상으로서 위치하는 여성이 이 굴레를 끊어낼 방법이란 자신을 잃지 않고는 없는 것인가. 지윤의 남성을 향한 미러링이 참담함을 자아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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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고, 친애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1
백수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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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친애하고, 친애하는, 백수린, 현대문학, 2019.


대부분의 딸들의 서사는 교육받지 못했고 가난한 어머니를 극복하거나 혹은 대신해 자신의 길을 걸어가 마침내 다른 세계로 진입한 여자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대체로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애증,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다. 나는 어디에서도 우리 엄마와 같은 유형의 엄마를 본 적이 업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랫동안 그것들이 나와 무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왔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또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이야기들이 나의 이야기이고 나와 엄마의 이야기 역시 수많은 형태의 모녀 서사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여성’서사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어머니’ ‘엄마’라는 요소는 그것 자체로 여성 서사 전체를 장악한다. 그래서 이 소설 속의 모녀 서사는 같으면서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역전. 가난을 이유로 교육받을 권리를 박탈당하지 않게끔 의무교육은 고등학교까지 확대되었으며 오히려 부모의 과한 교육열이 ‘사(死)’교육화되어 자녀들은 따라가기 힘들어 하는 시대가 되었다. 어쨌든 자신의 욕구를 자식에게서 실현하려는 부모의 출현은 새롭지 않다.

  ‘나’는 스물두 살 대학생임에도 ‘실패자’, ‘낙오자’라는 감정에 시달린다. 잠시 휴학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런 감정의 근원은 아마도 따로 있을 듯. “어차피 넌 할 일도 없잖아.” 엄마는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학사경고 전력이 있고 휴학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요즘 세상이 할 일 없는 세상이겠는가. 엄마는 자신이 보기에 할 일없는 딸에게 할머니를 돌보는 역할을 부여한다. 그래서 딸은 어린 자신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미국 유학을 간 엄마에게서 또다시 ‘유배당한’ 느낌을 받는다. 나에겐 어릴 적부터 엄마를 실망시킬까봐 두려운 마음과 상처가 가득하다.


유학을 가고 싶었으나 포기해야 했고, 사랑했던 여교사 대신 지적인 대화를 조금도 주고받을 수 없는 여자와 하는 수 없이 평생을 살게 된 할아버지에게 엄마는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우리 딸은 사내아이의 머리를 지녔어!” 할아버지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했다. 딸아이에게 사내아이의 머리를 가졌다고 하는 것은 할아버지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이었으므로, 겨우 대여섯 살인 엄마는 그럴수록 목소리를 높여 아버지가 건네는 책을 읽었다.


  할머니의 삶은 할아버지의 무시와 폭력을, 아들을 잃은 아픔을 견디어내는 삶이었다. 딸에게 의지한 할머니의 삶, 어린 시절 나를 돌봐준 할머니의 삶에는 엄마의 이야기가 있다. 나는 할머니에 대한 연민만큼이나 엄마의 삶을 이해하지만 언제나 간극은 좁혀지지 않는다.


엄마는 그런 친구들이 아마도 부러웠을 것이다. 엄마와 딸 사이의 공모. 딸에 한자를 가르쳐주고, 예이츠나 워즈워스의 시를 읊어주는 엄마. 그렇지만 엄마의 엄마는 그러는 대신 혼자 술을 마시며 작부처럼 노래를 불렀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에 화가 난 할아버지가 술상을 엎고, 할머니를 때릴 때, 엄마가 미웠던 것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머니였는데, 그 사실을 생각하면 사춘기 때의 엄마는 화가 났고, 커서는 슬펐다.


  ‘나’가 생각하는 엄마에 대한 이해는 그간 가져온 묵은 감정을 온전히 해소할 정도는 아니어서 딱 그만큼의 이해로 머문다. 할머니와 엄마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이해는 서로 달라서 좁혀지지 않는 지점이 있다. 어차피 이해란 각자의 상황에서 이루어지기에 부두를 찾는 날이 많은 할머니처럼 가슴에 맺힌 것들은 쉬이 해소되지 않는다. 할머니는 가슴이 답답하거나 화가 날 때면 부두를 찾았고 뛰어들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쩌면 살아온 생 내내 그렇게 부두를 찾았을 할머니처럼 응어리는 쉽게 떨쳐지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나’가 엄마를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더 나아가는 지점은 그 스물두 살이 아니다. 예상치 못한 임신과 출산을 하고 나서야 깨닫는다. 몸과 마음으로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할머니와 엄마의 삶으로 얽혀 들어갈 수 있다. ‘나’가 비로소 엄마가 되고서야 이해하게 되는 그들의 삶. 이 결론은 여성 서사의 답습이다. 결국 제자리다. 그 삶을 살아야만 이해되는 여성서사란 문학적으로 감정적으로는 완벽한 결말이나 지금처럼 페미니즘과 여성 이야기에 대한 몰이해와 비난, 혐오로 치닫는 상황에선 말이다. 그러니 그사람이 되어보지 않고서 온전한 이해가 있을 수 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해볼 뿐이다. ‘엄마처럼 살겠어’와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어’ 사이에서 외치고 외쳐보아도 ‘엄마’가 되면 애증은 친애하는 감정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되는 여성의 삶. 여성은 사라지고 ‘엄마’가 남는, 다시 자아를 찾고자 하는 삶의 순환. 결국 이해할 수밖에 없는 같은 경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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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2
최은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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섞다


어제는 봄, 최은미, 현대문학, 2019.3.25.


글을 쓰면서 살겠다고 생각한 스물세 살 이후로 내 정체성은 언제나 글 쓰는 사람이었다. 그것 말고 다른 사람이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정수진은 그 정체성으로 인해 혼란하고 힘겹고 아프다. 많은 이들이 정체성을 정립하지 못해 힘겨운 것과는 다르다. 글이란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이라고도 하지만 누군가에게 읽혀야 하는 것인데 등단한 이후로 책을 낸 적 없고 아무도 그녀가 글쓰는 사람인 줄 모른다. 언젠가는 누군가 읽어주는 소설을 쓰느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시간을 내어 소설을 쓰지만 ‘다른 작가들처럼 원고료를 받고 책을 내고 사는 것도 아닌’ 그녀는 다른 일하는 엄마들처럼 경제활동을 하면서 글쓰는 것이 아니기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 속에 움츠러든다. 매우 성실하며 나쁜 습관과 행동이란 하나도 없는, 성욕까지 없는 남편 또한 그녀의 글쓰기에 응원군이 되지 못한다.

  정수진은 윤지욱의 아내이자 윤소은의 엄마로서의 삶을 성실히 수행해 나가며 열망처럼 갖고 잊는 글을 쓰기 위해 경찰관을 취재원으로 할 정도로 적극적인 면이 있다. 그럼에도 정수진의 글쓰기는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 머무르고 있다. 그녀는 언젠가는 양주에 관한 글을 쓰리라고 하고 있지만 양주는 그녀가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면서 글쓰기를 막는 이유가 되고 있다. 양주, 양주는 어떤 곳이기에.

  양주는 최은미 작가의 소설 『아홉번째 파도』의 척주를 생각나게 한다. 더불어 이선우 경사는 서상화의 느낌이다. 양주는 척주처럼 도시 전체에 비리가 숨겨진 곳은 아닌 그녀의 고향이지만 그녀의 마음속 그곳에서 벌어진 어떤 날의 사건이 트라우마처럼 자리잡은 곳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소설은 제목처럼 봄날의 기운이 한껏 드리워져 있다. 그녀, 정수진은 딸 윤소은이 커가면서 과거의 자기 자신을 기억한다.


아이는 한 해 두 해 커갈 때마다 그맘때의 나를 데려왔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땐 일곱 살의 내가, 아홉살이 되었을 땐 아홉 살의 내가 살아났다. 오랫동안 잊고 살던 기억들이,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죽을 때까지 다시 살아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기억들이 지난 10년간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났다. 나는 아이를 보며 내 엄마 아빠의 결혼 생활을 보았고 엄마가 나에게 했던 분풀이와 탄식을 다시 들었다. 아이는 때때로 내 지난 시간을 들추기 위해 보내진 심판관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 안에서 들끓는 욕들을 아이가 알아챌까봐 겁이 났고 내가 묻어둔 기억들이 아이에게 이식될까봐 두려웠다. 나라는 인간을 형성해온 것들을 완전히 떼어두고 아이를 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을 때마다 벌을 받는 것 같았다.


  현재의 삶에서 과거의 기억을 회상처럼 불러들이는 글은 사건보다는 정수진의 내면의 세계를 집중하고 훑는다.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보는 나는 과거의 정수진을 소환하며 현재 이선우와의 관계를 인식하며 ‘나’인 정수진을 만들어 간다. 어쩌면 ‘섞다’라는 동사를 단 한번도 쓰지 않을 소설을 쓰게 한 기원.   


하지만 내가 정말로 역겨워하는 단어는 따로 있다. 나는 1만 매가 넘는 소설을 쓴다 해도 ‘섞다’라는 동사를 단 한 번도 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섞다’라는 말이 역겹다.


  엄마의 부정, 그로 인해 죽은 아버지. ‘섞다’라는 동사를 소설 속엔 쓰지 않지만 정수진은 과거와 현재를 섞어야지만 비로소 하나의 정수진이 될 수 있다. 결국 정수진의 글쓰기와 정체성은 과거의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그것을 어떻게 재인식하는가와 연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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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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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수는 광기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마음산책, 2005.


  눈이 온다. 오지 않는다. 그러나 뉴스는 이미 전국적으로 눈이 온다며 들썩인다고 도배된다. 전국 날씨를 검색해보니 지도의 절반 이상에서 쨍쨍한 태양이 빛난다. 실시간 반영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전국의 절반이 눈이 오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눈이 오는 세상이다. 세상의 중심에 비켜선 마을에선 눈을 상상한다.


삶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했지만 의미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날이었다. 


  『스밀라 눈에 대한 감각』은 눈에 대한 상상에서 떠올린 소설이다. 이런 책을 읽었지. 두꺼운 북유럽 소설. 북유럽 소설은 러시아 소설만큼이나 두껍다. 러시아는 너무 추운 곳이라 두꺼운 장편 소설이 발달했다고 들은 기억이 있는데 북유럽도 뒤지지 않는 추위를 가지고 있어서인지 읽는 북유럽소설마다 길다. 최근 경장편이라고 해서 짧게 나오는 한국소설과 비교해보면 대하 드라마급이다. 그러고보니 책에 유럽인에 관한 인상적인 문장이 있다.


유럽인에게는 쉬운 설명이 필요하다. 그들은 언제나 모순적인 진실보다는 간단한 거짓말을 선호한다.


  소설에서 인상적인 건 스밀라라는 캐릭터와 함께 펼쳐지는 풍경이다. 가보지 못한 땅의 얼음과 눈을 상상하고 있노라면 마음이 정화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수학에 대한 이야기 역시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인데 심오한 철학적 메시지들이 담긴 듯하지만 쉬이 책장이 넘겨지지는 않았다. 예전부터 느꼈던 생각이 고정되어 갔는데 역시, 수학은 차가운 얼음물 같다는 생각이다.


나는 마음속 깊이, 사물을 파악하려는 노력은 맹목성으로 이어지고,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은 타고난 잔인성을 가지고 있어서 진심으로 인식하려는 것을 지워버린다는 것을 안다. 오로지 경험만이 민감하다. 그러나 어쩌면 나는 약하면서도 잔인한지도 모른다. 나는 결코 노력하고자 하는 시도에 저항할 수는 없었다.


  스밀라는 이누이트 출신으로 눈과 수학에 대한 타고난 감각을 가진다. 난 스밀라의 고향 이누이트의 문화에 관한 이야기가 설화같은 느낌으로 다가와 흥미로웠다. 이 책은 스밀라가 이사야라는 소년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파헤치는 스릴러 소설인데 일반적인 추리소설과는 다르다. 사건을 형사처럼 풀이해나가는 방식이 아니다. 모든 것은 소년이 죽은 장소의 눈에 담긴 흔적, 소년이 추락한 곳에 남겨진 눈 위의 발자국에서 느낀 감각, 스밀라의 직관에 의존한다. 어머니의 고향인 그린란드, 아버지의 고향인 덴마크를 오가며 펼치는 스밀라의 삶과 기억들, 추리과정 내내 펼쳐지는 삶과 죽음에 관한 철학적인 사유할 만한 글귀들이 눈과 얼음이란 배경과 맞물려 정서적으로 차분하게 만든다.


인생이 복잡해지는 것은 우리가 선택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떠밀리는 사람은 단순하게 산다.


  그래서인지 여느 추리소설과는 다르게 더딘 속도로 읽게 되지만 다른 추리소설이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에서 순간순간의 긴장과 흥분만을 즐기는 것에서 끝나고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것과는 달리 이 책에 대해선 감각이 남아 있다. 스밀라가 새겨놓은 얼음과 눈에 대한, 삶과 죽음에 대한, 문명에 대한.


무리수는 광기의 형태에요. 무리수는 무한하기 때문이죠. 무리수를 다 적을 수는 없어요. 한계를 넘어선 지점까지 인간 의식을 밀어붙이죠. 유리수와 무리수를 더하면 실수가 되는 거예요.


  무리수는 ‘보편적인 이치에 맞지 않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생각 또는 행동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다시 한번 이 단어가 수학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무리수. 무리수가 횡행하는 어느 곳에선가는 눈이 오는 날이다. 눈이 내리고 나면 세상은 그 눈에 의해 깨끗해질까, 정화가 될까. 감춰지고 덮어져 순간은 깨끗해질지 모르나 어쩌면 더욱더 더러워질 것이다. 그렇게 인간의 손과 발이 거쳐가면 말이다. 공기는 깨끗하려나. 뭔가 참 불순물이 끊기듯 끓어오르는데 차가운 공기가 식혀줄지는 모르겠다. 무리수는 광기…광기는 지나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멈춰야 하는 거다. 멈추지 않는 광기가 휘몰아친다.


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냉담해질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긴장할 수는 있겠지만 냉담해질 수는 없다. 삶의 본질은 온기다. 심지어 증오조차도 자연적 목표물위로 풀려났을 때는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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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상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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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글쓰기


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왜 누군가의 일기는 소설이 되고 누군가의 섹스 고백은 사랑이 되는 걸까. 이 수상집을 읽은 첫 느낌이다. 소설에 마음이 머무는 건 여러 가지다. 내용, 구성, 문체, 문장…. 이상하게도, 아니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는 평론가들의 평론이 친절히 덧붙여 있으니 그 안내서와 같은 글을 읽으며 난 왜 그런 심오함을 캐내지 못했을까 탓하기도 하며 때론 평론 때문에 머리가 더 아파오기도 하게 된다. 어쨌든 마음이 끌리는 소설이거나 아니거나 찝찝하긴 매한가지다. 이런 뜻이었어, 이런 걸 봐야 하는 거였나. 내가 느낀 바가 그에 멀게 있을 때마다, 조금씩 위축되고 마는. 지금 인기있는 풍토가 대세가 이렇다는데 뭘 어쩌겠나 그런 생각들. 유행처럼 번지는 어느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러면, 그러면 어떻게 되나?


모든 일이 끝난 뒤에 그것을 복기하는 일은 과거를 기억하거나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일이니까. 그것은 과거를 다시 경험하는 것이 아닌 과거를 새로 살아내는 것과 같은 일이니까. 그러나 읽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글을 쓰는 것은 생각보다 고독한 일이다. 그래서 어느날 나는 글을 쓰다가 어쩌면 내가 영원히 혼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게 문득 참을 수 없이 두려워졌다. - 정영수, 「우리들」


  기억에 머무는 건 「우리들」이다. 수상작 전체에서 글쓰기란 무엇인가, 소설이란 무엇인가라 생각하게 되는데 이 소설의 한 코드가 글쓰기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정은과 현수의 글쓰기가 왜 되지 않는지, 나의 연경에 대한 글쓰기가 실패하는지 잘 와 닿았기에 그렇다. 관념적인 내용인데 그것을 세밀하게 포착하여 현실적인 느낌으로 인식하게끔 만드는 느낌이었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글쓰기와 맞물려 할 때 얼마나 다른가. 결국 소설이란 나의 고백적 서사이기도 할 테지만 그것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얼마나 다른가.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될 때 누군가의 말은 귀기울여 듣게 되고 누군가의 이야기는 참을 수 없이 듣고파 지지 않게 될 때와 같은가라는 생각을 한다.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방식, 2019년의 젊은 작가상 수상집은 그것에 대한 소설집이었다고 나는 생각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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