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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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리처드 J. 번스타인. 2018.


이성적 진리의 반대는 무지와 오류이지만, 사실적 진리의 반대는 고의적 거짓말이다. 사실적 진리는 이성적 진리보다 훨씬 더 깨지기 쉽다. 사실이란 우연적인 것이고, 또 사실들이 참되거나 거짓이어야 할 아무런 필연성이 없으므로, 사실적 진리를 부정하거나 또는 고의적인 거짓말로 그것을 제거하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 된다. 사실적 진리가 어떤 사람의 기본적인 확신을 방해할 때는 엄청난 적대감을 맞닥뜨리게 된다. (…) 그녀는 조직적 거짓말, 이미지 메이킹, 기만 그리고 자기기만에는 한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으로는, 압도적인 권력에 직면했을 때 진리를 말하는 자는 무기력해 보이는데도, 체계적인 정치적 거짓이 붕괴하기 시작하는 지점은 결국 다가온다. 정치적 거짓말은 사실적 진리를 파괴할 수 있지만 그것을 결코 대체하지는 못한다.


  정치인들이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코로나 19 상황에 관한 시사프로에 나온 의사의 발언이다. 이 말을 들으며 정치인이 있어서 좋았다보다 미치겠다, 차라리 없어져라 생각했던 날들이 더 많았음을 생각했다. 현재 상황이 어떤지를 명확히 인식하고 대안을 마련하여야 할 정치인의 늘 한길로만 가는 발언-비상식적이고 무책임한 정치적 거짓말-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말이 아닌 것은 걸러야 하지만 ‘어떤 말’들은 마구잡이로 키우는 언론으로 인해 속시끄럽고 귀따가운 일은 여전하다.

  사실적 진리를 요즘 말로 팩트라고 얘기하면 될까. 이것을 하는 명백한 직업군이 존재함에도 ‘시민’이 사실적 진리를 찾아내고 그에 대한 해석까지 하는 일은 오래되었다. 명백하게 의도적인 사실적 오류가 난무할수록 시민은 스스로가 언론인이 되고 정치인이 되어 간다. 이것이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의 회복’, ‘정치 영역의 회복’일 것이다.


아렌트는 자신에게 항상 근본적이었던 것과 우리에게 근본적이어야 할 것─시민이 그들의 목소리가 공적으로 들려질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의 정치적 삶을 날카롭게 벼리는 진정한 참여자가 되도록 하는 열망─을 표현했다. 그녀는 공적 자유가 살아 있는 현실이 되는 곳에서 혁명정신의 발견과 개념화를 시도했다.


  이 책이 출간된 당시에는 ‘난민’ 쪽으로 좀더 초점이 흐르는 것 같았다. 난민 증가 상황에서 아렌트가 지적하는 ‘난민’ 문제에 대한 시각이 난민문제로 격한 갈등이 부딪치는 사회에서 시사점을 주었다. 한나 아렌트의 저작과 그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아렌트 사상의 본질은 정치와 연관되어 있다. 정치적 행위의 결과. 


아렌트의 권력 개념(과 정치이해)에서 굉장히 놀라운 점은, 그것을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방식, 즉 한 개인이나 집단이 다른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 over 지배하는 통제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권력은 수평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복수의 개인이 함께 행위하고 서로를 정치적으로 동등한 존재로 여길 때 나타나고 성장하는 것이다.


  정치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물음은 정치가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에서 그 답이 이루어져야 한다. 정치란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권력개념이 아니라는 아렌트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고 중요하고 간과할 수 없는 개념이다. 정치가 ‘정치인’의 것이 아니라는 것, 정치인 중에는 사실적 진리를 왜곡하고 충분히 조작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그것이 정치행위로서 타당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꽤 오래 주창하고 실행해 오기도 했다.

 다만 왜 이렇게 사실적 진리를 왜곡하고 정치적 막말을 선동하는 정치집단에게 내 삶의 대리를 맡기는가, 의문이다. 내 삶이 정치에 의해 얼마나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모르지 않으면서 오래도록 정치는 엘리트‘님’이 하는 것으로 ‘그거나 저거나 다 똑같다’라는 식으로 생각해왔다면 아직도 정치는 빨갱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아렌트가 필요하다. 악의 평범성도 전체주의의 기원도 위에서 내려와 강제로 주입한 ‘의식’, 신화처럼 굳어 있는 세뇌당한 습성이 만들어낸 사유의 문제이니까.


오늘날 우리가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아렌트가 우리 앞에 아직도 버티고 서 있는 위험들을 예민하게 잘 이해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 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우리의 정치적 운명을 책임지라고 촉구한다. 아렌트는 우리가 공동으로 행위할 능력이 있고, 새로운 것을 시작할 능력이 있으며, 자유를 지상의 현실로 만들기 위해 분투할 능력이 있다고 가르쳐주었다.


  병이 있으면 진단을 하고 치료를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한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선거 때문에 일본 정부는 올림픽 때문에 이탈리아는 확진자 수가 증가하기 때문에 코로나 검사를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선거가 가까워옴에도 한국 정부는 적극적으로 코로나 검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코로나 19가 뚫리게 만든’ 한국 정부는 무능하고 탄핵되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때때로 ‘이런 말’을 쏟아내는 정치인과 특정 집단의 말이 소위 ‘먹힌다’는 사실이 아찔하고 영원한 난제로 다가온다. ‘나 때문에’ 많은 사람의 생명을 건졌다는 31번 환자의 말까지는 한계일까. 악의 평범성에 반하는 사례인지 해당하는 사례인지 건지… 이러저러한 생각 속에 되묻게 된다. 아렌트의 말처럼 우리는 공동으로 행위할 능력이 있을까. 자유를 지상의 현실로 만들기 위해 분투할 능력이 있을까. 한나 아렌트 때문에-덕분에가 더 어울리지만-, 시민의 혁명정신과 정치 회복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책의 저자는 한나 아렌트를 통해 그것을 읽어야 함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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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리 블라이의 세상을 바꾼 10일 넬리 블라이 시리즈
넬리 블라이 지음, 오수원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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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이 말해준다

넬리 블라이의 세상을 바꾼 10일, 넬리 블라이, 2018.


  정신병원은 항상 음침한 느낌이 든다. 미학적인 설계와 쾌적한 설비를 갖추어 새로 건축했다고 해도 말이다. 정신병원은 어쩌다 무섭고 음침하고 문제가 많다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나. 수많은 다큐에서 실제로,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가상으로 접한 정신병원의 실상이 너무 생생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정신병원이 행하고 있는 다양한 불법적인 행태가 끊이지 않고 드러나고 있어서다. 정신병원 운영자의 탐욕이 만들어낸 결과는 정신병원 건물, 그 공간 자체를 공포의 공간으로 확정짓는다.

  2020년 봄을 향해 달려가는 시점, 감염병 확산으로 특정 병원의 정신병동에서 사망자가 증가하고 있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 공간에 들어가 확인하고픈 심정이다. 지금 상황과는 많이 다른 110년 전 정신병동을 잠입 취재한 기자가 있다.  <뉴욕월드>지는 뉴욕의 정신병원에 들어가 환자 처우와 관리 방식을 취재해 보도해 달라 요청했고 그 요청을 수락한 기자는 넬리 블라이, 병원 잠입시 이름 넬리 브라운, 본명 엘리자베스 코크레인. 넬리 블라이는 “할 수 있으며 해보겠다고 했고, 실제 그렇게 했다.” 그건, “정신이상자들, 신이 만든 피조물 중 가장 무력한 사람들이 친절하고도 적절하게 진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픈 욕구”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넬리 블라이의 블랙웰스 섬의 정신병원 내부 취재기이다. 어떻게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어떤 일들을 겪었는가를 유머를 곁들여 이야기한다. 정신병원에 들어가려면 환자가 되어야 한다. 거짓 환자 행세를 하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넬리 블라이의 심정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정말 끔찍한 기분”이다. 왜냐면.


이렇게 잘생긴 청년 앞에서 정신이상자 연기를 해야 하다니! 정말 끔찍한 기분이었다. 젊은 여성이라면 내 말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넬리의 유머코드는 이야기 곳곳에서 발현된다. 심각한 상황에서 종종 나타난다. 넬리의 환자 ‘연기’는 완벽했는지 몰라도 의사들의 진단은 완벽하지 않았다. 넬리는 쉽게 정신병원에 갈 수 있었다. 하긴 블랙웰스 섬의 정신병원은 환자를 강제로 입원시키고 가혹행위로 악명이 높은 곳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의사들의 능력에 대한 신뢰는 전보다 훨씬 떨어졌고, 정신이상자를 가장하는 내 능력에 대한 확신은 전보다 더 높아졌다. 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난폭한 행동을 보이지 않는 이상 그 어떤 의사도 정신이상 여부를 제대로 판별하지 못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넬리가 직접 겪고 보고 들은 정신병원의 실태는 끔찍했다. 기본적으로 의사와 간호사는 제대로 일하지 않으며 환자를 거칠게 다룬다. 입소자 중에는 단지 영어를 하지 못해서 들어오게 된 외국인과 남편 말에 따르지 않아서, 갈데없고 일자리가 없어서 수용된 여성도 있었다. 처우는 매우 열악했고 형편없는 식사는 당연했다. 형편없는 식사라고 하니 어떤 형태일지 상상이 가는데, 실제로 최근 코로나 19 사태로 코호트 격리된 병원의 의료진과 환자에게  청도군이 제공한 식사가 떠오른다.

 중국에서 귀국하여 정부가 제공한 식사와 매우, 매우 차이가 난다. 중앙정부와 지자체라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건 엄청난 문제다. 더구나 도시락까지 확인해야 하는 담당자의 말은 직무태만임은 물론이고 업체와의 어떤 유착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 심각한 전염병 사태에 체력과 면역력을 위해서는 더욱 영양가 있는 식사가 제공되어야 하건만 소꿉장난 할 때나 만드는 허구 도시락도 이것보다 나을 듯 싶을 정도이다. 현재에도 이런 형태가 일어나고 있으니 110년 전의 실태는 얼마나 더 열악했을까.

  열흘간의 정신병원의 실태를 꼼꼼하게 관찰하고서 정신병원을 탈출해 실태를 고발한다. 전문가와 함께 병원을 조사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아마도 내부고발자가 있었던 듯 병원은 준비를 갖춰 조사단을 맞았다. 병원에 대한 처벌과 즉각적이고 보다 많은 변화를 이끌어 내지는 못했지만 넬리의 폭로 기사 덕분에 뉴욕시는 환자들을 위한 예산액을 100만 달러 더 책정했다.

  넬리의 잠입취재기에 나타나는 일들은 현재에도 일어나는 일이다. 권력과 유착해 조사를 어물쩡 넘기는 경우까지 참 닮아 있는 모습이다. 여성이 있어야 할 곳은 가정뿐이라는 어느 신문사 기사에 여성을 가두는 것은 국력 낭비라는 항의 편지를 쓴 넬리 블라이. 그곳 신문사 편집장은 반박 기사를 쓴 넬리의 재능을 알아보고 기자로 채용한다. 기레기가 아니라 발로 뛰는 기자로서 넬리 블라이는 성심을 다한다. 그렇게 취재한 정신병원 잠입취재기인 이 기록은 200쪽 정도의 작은 판형인데 분량이 아쉽다는 느낌을 준다. 10일간의 핵심이 담겨 있다고 할 수는 있지만 좀더 세세하고 정밀했으면 좋았겠다. 그곳에서 느꼈던 순간순간의 감정과 상황을 잘 느껴보고 싶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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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5 10: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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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6 17: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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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의 탄생 - 사회민주주의자 웹 부부의 삶과 생각 대우휴먼사이언스 19
박홍규 지음 / 아카넷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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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서비스 정신


복지국가의 탄생 - 사회민주주의자 웹 부부의 삶과 생각, 박홍규, 2018.


  한국사회에서는 보수(부르지만 극우에 가까운)라는 집단은 선거철이 되면 어김없이 복지관련 공약을 남발하면서도 뒤로는 복지예산을 깎으려 안달하고 정부의 복지 정책을 포퓰리즘이라 비난한다. 더 나아가 복지정책이 나오기만 하면 어김없이 사회주의, 공산주의, 빨갱이 좌파 정책이라 부르며 정책에 반대하기 바쁘다. 그러면서, 늘 정부가 혜택을 주지 않는다고 손을 흔든다. 전세계적으로 복지국가를 지향세는 확산되어 가는 상황에서 복지정책이 수립될 때마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좌파는 안돼’ 외치는 이들이 정녕 그 뜻을 알고 외치는 건가 궁금해진다.


사회주의라는 말에도 여러 뜻이 있지만 이 책에서는 무엇보다도 개인의 재산권, 즉 사적 소유의 권리를 사회적 차원에서 제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 극단적인 제한, 즉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로 하자는 것이 공산주의인 반면, 모든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아니라 중요한 사회적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되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기본적으로 사유화를 인정하는 것이 사회민주주의다. 반면 모든 생산수단의 사유화를 인정하는 것이 자본주의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중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민주주의를 우리나라 헌법이 금지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그 반대로 인정하고 있고, 실제로도 어느 정도 인정된다. 가령 우리나라에도 국유산업이 상당수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 헌법은 도리어 순수한 의미의 자본주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책은 복지국가의 이념을 정립하고 그것을 실천한 사상가이자 실천가인 영국의 웹부부의 사상과 실천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재벌 딸인 비어트리스 웹과 가난한 공무원 시드니 웹의 결혼이 이루어진 과정, 그들의 사상을 실천하기 위한 협회 조직 활동 과정이 담겨 있다. 특히 저자는 웹 부부가 제시하는 복지국가 이념을 살펴보고자 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세기 영국에서 전개된 웹 부부 수준의 노동조합운동을 포함한 사회개혁운동이 지금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임금투쟁 같은 이익투쟁만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 지금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전반적 사회개혁운동과 함께 전개되는 노동조합운동이다. 민주화, 교육개혁, 도시개혁, 공해반대, 생태보존, 반전평화 등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이 연대하면서 사회변화를 주도할 필요가 있다. 노동운동만을 좁게 외골수로 계급투쟁의 수단으로 파기보다 다른 사회운동이나 시민운동과 함께 폭넓고 유연하게 사회변화의 동반자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복지국가의 핵심은 가난의 책임을 개인이 아닌 국가로 보는 것이다. 웹 부부 역시 「소수파 보고서」에 이러한 생각을 기본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빈곤선의 개념을 제시하는 ‘내셔널 미니멈(national minimum)’의 창시자였다.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최저임금제, 1일 8시간의 노동으로 최저 휴식보장, 최저위생보장, 아동의 대학까지의 교육과 장학금을 지급하는 최저아동보장이 핵심으로 이는 현대의 최저생활보장의 개념과 같다.  저자는 웹 부부의 정신을 공공의 정신이라고 얘기한다.  


자본주의 정신 대신 공공의 정신이 필요하고, 사적인 부의 축적이라는 동기 대신 공공서비스라는 동기가 필요하며, 그것에 의해 비로소 사회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했다. 사회의 합리적 재조직화, 공공복지의 제도화, 각자의 공공정책에 대한 보편적 참여, 즉 사회환경의 전반적 변화는 인간의 정신, 성격, 동기에 영향을 받는다고 보았다.


  웹 부부의 사상은 현재에도 세계가 지향하는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한 세기 전의 두 부부가 제시하고 발전시켜간 사상이 현대에도 유효하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논의가 타당하고 탄탄했다는 얘기일 수 있겠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최저생활보장에 대해 반발이 심한 것을 보면 지금도 한 세기 전의 영국 사회를 이끌었던 이들의 생각과 차이가 없는 세력들이 존재한다는 말일 게다.

  웹 부부 각각 뛰어난 사상가이고 실천가였다 하더라도 그들의 생각과 이론이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다. 사상의 한계점과 개인의 한계점이 있다. 저자는 다른 학자, 동료들의 웹 부부에 대한 견해를 덧붙이고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지적한다. 분명한 건, 웹 부부의 복지국가에 대한 생각이 오늘날 복지국가의 기틀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웹 부부는 1912년 한반도를 1주일간 방문하여 당시 한반도 최고급 호텔에 머물면서 글을 썼는데 한반도 사람들을 세계 최하의 문화 수준을 가진 미개인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2020년 한국은 영화산업의 심장부인 미국 오스카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주요 부분을 휩쓸었고 BTS가 전세계가 음악 시장을 휩쓰는 등 문화강국으로서의 지위를 점하고 있다. 이런 때 웹 부부가 한국을 방문했다면 평가는 달랐을 텐데. 

  한국에서 보수는 웹 부부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을 것 같은데 백여년전 두 부부의 한국에 대한 평가 때문이 아니라 두 부부가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가 ‘닥치고 싫은’ 맹목적인 집단과 그래야만 잘 살 수 있는 집단들일 것이다. 그런 집단에게 시드니의 견해를 자알, 보라고 내밀어 본다.


시드니는 집단주의적 경향이 모든 국민에 의해 효과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 목표는 모든 국민이 현 정부에 대해 일체감을 갖도록 지향되어야 하며, 그 조직은 정부의 행동이 특정 계급의 권력이나 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복지를 균등하고 일관적으로 실현하여 계속적인 사회발전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집단주의를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것을 방해하는 지주와 자본가에게 집단주의적 이념을 침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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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줄다리기 - 언어 속 숨은 이데올로기 톺아보기
신지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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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이 짜장이 되도록

언어의 줄다리기-언어 속 숨은 이데올로기 톺아보기, 신지영, 2018.


  말은 인격을 나타낸다는 말이 오랫동안 사용되었음에도 지극히 저급한 인격을 나타내는 이들이 있다. 그래도 전혀 괘념치 않아하는 ‘집단’이 있다. 그들이 표출하는 집단적 품격과 인격은 무지가 아니라 ‘이기’에서 나온다. 무지라면 좀더 알려주면 되지만 저 표독하고 끝없는 이기의 언어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혀버리고 만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말을 믿기에 쓰레기처럼 쏟아져 나오는 그들의 말이 세상을 울릴 때마다 환멸이 쌓여간다. 이런 감정을 의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꽤 익숙하게 사용해온 언어일지라도 특정 집단에 의해 지속적으로 사용될 때면 그 단어가 가진 뜻과 뉘앙스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그렇게 어느 때부턴가 새롭게 생각하게끔 되는 단어들이 늘어간다. 지양되어야 할 언어가 확산되는 것은 특정한 집단의 ‘이기’적 생각을 담은 개인미디어의 확산도 영향이 클 것이다. 언어 속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려는 그 지독하고 지난한 노력들. 그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무용한 일이겠지만―던져주고 싶다.

  이 책 『언어의 줄다리기』는 흔히 사용하는 단어를 선정하여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기에 매우 쉽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단어를 선정하고 있기에 오히려 그 점이 아쉽다. 가령 미망인이나 ‘여류’ ‘여교사’ ‘미혼-기혼’ 등에 담긴 이데올로기는 너무나 익숙하게 지적하고 있으니 말이다. 새롭게 등장한 언어나 은어가 담고 있는 표현을 다루었다면 현재의 시점에서 작용하고 있는, 작용하려 하는 이데올로기를 더 잘 알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저자는 언어 사용에 민감할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언어감수성을 높일 것을 권고한다. 언어가 사고체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제일 먼저 선택한 것은 ‘각하’다. 이 말이 가지고 있는 뜻에서부터 언제,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지를 설명한다. 정확하게 따진다면 잘못된 표현이지만 대통령을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되어 왔고 권력은 그것을 선호했고 별칭을 법적으로 강요했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이 단어는 지양해야 할 단어로 꼽고 있다. 아니 명백히 틀린 단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각하가 담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사람의 신분에는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신분제를 전제하는 이 표현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부인하는, 반민주공화국적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그렇게 부르기를 강요당함으로써 언어사용에 사고체계에 남아 있는 이 단어는 은연 중 여전히 신분제를 옹호하는 단어가 아니고 무언가. 특정한 집단이 특정한 인물에게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해진다.

  우리나라 언어의 장점으로 꼽히는 높임말 사용에 대해서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그토록 나이에 민감한 이유, 그것은 호칭 때문이다. 2002년 월드컵 대표팀 히딩크 감독이 경기진행시 호칭에 존대를 없앤 일을 우선했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누군가를 알아가는 일은 누군가를 부르는 일부터 시작한다면 우리는 누군가를 호칭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 항상 필요했고 그것이 ‘나이’를 알고 나서 이루어졌다.


호칭의 문제에 대해 한국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민감하고 심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사실은 모두 언어 사용과 관련이 있다. 한국어 사용자들은 대화 상대자와 호칭과 서열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대면하여 말을 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있다. 이것이 바로 지금 한국어 작동방식이다.


  언어가 우리의 사고체계를 그렇게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 선조들은 위아래 열넷 정도는 모두 벗으로 사귀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동일한 해에 태어난 경우만을 오로지 친구로 편하게 말을 하고 선후배의 엄격한 위계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의 잔재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타깝다.

  저자는 크게 여덟 개의 단어 속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얘기하고 있는데 그중 많은 부분은 차별요소를 가진 단어다. 특히 성차별적 언어다. 미망인, 여교사, 여검사 등등의 단어. 매우 익숙한. 이 외에 ‘자장면’ 투쟁사와 더불어 ‘자장면‘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짚는다.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짜장면‘을 발음하지 못하고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자장면‘의 세월 동안 자장면의 매출 또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사람들은 왜 그토록 ’짜장‘을 허하기를 요구했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재미있다.


언어 규범은 언어 사용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하는 기준이 된다. 그런데 언어 사용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기본적으로 언어 사용자들의 사용에 기반해야 한다. ‘관’으로 대표되는 몇몇 사람들이 만든 규정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규범은 관이 만들고 ‘민’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민이 만들고 관이 정리하는 것이다. 즉 관이 해야 할 일은 규정을 만들어 민의 사용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민의 언어 사용을 관찰하여 민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 현실을 규범화하는 것이다.

  

  한편으론 ‘짜장면’은 되는데 왜 다른 표현은 안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비민주적이고 차별적인 언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맞다. 자연도태 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제재방법 또한 필요한 일이다. 넘쳐나는 혐오표현을 바로잡는 일은 왜 안되는지, 언어가 가진 힘과 한계가 무엇인지를 이 책을 읽어가며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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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 한나 아렌트의 삶과 사상을 그래픽노블로 만나다
켄 크림슈타인 지음, 최지원 옮김, 김선욱 감수 / 더숲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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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과 싸이코패스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켄 크림슈타인, 더숲, 2019.


  이 책은 한나 아렌트의 생애를 주요한 세 번의 탈출로 정리한다. 한나 아렌트는 베를린에서 파리 그리고 뉴욕으로 국경을 넘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다. 나치의 억압을 피하기 위한 치열한 생존이었다. 1906년생 한나 아렌트는 유대계 독일인으로 어머니로부터 ‘유대인이라고 공격 받으면 유대인이라는 사실로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고 배웠으며 14살 무렵 칸트를 모두 섭렵한 아이였다. 칸트의 저서만이 아니라 칸트가 읽은 책까지 모두 읽고 고대 그리스어를 공부하고서는 그리스 비극 연극단을 결성하는 매우 열정적인 아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매우 똑똑한. 이런 한나 아렌트가 일찌감치 다른 대학생들, 훗날 유명한 사상가들로 알려진 이들에 비해서 두각을 나타냈음은 당연하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자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며 쓴『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으로 유명하다. 세상 모두가 나치는 악마라고 생각하고 있던 때에 그들은 누구와도 다를 리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얘기함으로써 동료 학자들로부터 질타와 외면을 받았다.


아이히만을 사악한 괴물이라고 한다면 어떤 면에서 그의 범죄를 용서해주는 거야. 그리고 우리 모두 잠재적인 죄를 짓게 되지. 철저하게 사유하지 못한 죄.

슬픈 진실은 선과 악에서 마음을 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제일 사악한 일을 저지른다는 거야.

  

  결이 다를지 모르지만 최근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준 고유정 사건의 프로파일러들이 고유정은 ‘싸이코패스’가 아니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에 관해 프로파일러를 비난하는 글들이 넘쳤다. 고유정은 싸이코패스가 되어야만 고유정의 행위가 설명되는 것처럼 댓글들은 성토했다. 드러나는 단편적인 것만으로 이해하고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어떻게 보면 ‘싸이코패스’라는 말 한마디는 모든 사건의 이유를 쉽고 간단하게 치부해버리는 말처럼 느껴진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이 사건의 이유가 단지 ‘싸이코패스’라고 한다면 이해가, 되는 건가. 그렇게 되면 법적 처벌의 강도가 달라지는 건가. 이런 물음이 떠오르지만 어쩌면 그래서, 프로파일러를 비난하는 이들의 심리가 어쩌면 나치 전범자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했을 때와 같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한나 아렌트의 이 통찰은 인간과 인간의 행동에 대해 더욱 경악과 경각심을 갖게 함은 분명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전에는『전체주의의 기원』을 통해 ‘악이 어떻게 발생하느냐’를 다루었다. 이 모든 한나 아렌트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 있다. 한나 아렌트는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첫 번째 인물인 스승 마르틴 하이데거를 만난다. 하이데거는 한나 아렌트에게 사상적 영향을 미친 사람이자 연인이었다. 평생의 연인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하이데거는 유부남이고 한나 아렌트는 두 번의 결혼을 한다. 첫 번째 남편 권터 슈테른, 두 번째 남편은 독일 시인이자 철학자 하인리히 블뤼허다. 한나 아렌트는 권터 슈테른의 사촌 발터 벤야민과 사상적으로 교류가 깊었는데 이 책에서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만큼이나 발터 벤야민에 매혹된다. 아케이드를 보면 자동적으로 벤야민이 떠오르는데 벤야민의 자살은 생각할 때마다 매우 안타깝다.

  지성인이라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싶은 한나 아렌트는 생애 수많은 학자와 사상가, 예술가, 정치가들과 교류했다. 그 시대가 그러하였기도 하지만 수많은 사상가들이 세상의 폭압 속에서 인간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들은 참으로 애틋하고 벅차는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책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사상의 나눔, 그 사유와 철학자들의 대화를 들여다보면 (어쩌면 이 책이 그것을 지나치게 극화한 측면이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심오하다는 생각, 어렵다는 생각 외에도 조금은 낯간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무슨 말장난인가 싶기도… 삶은 던져짐이라… 학창시절 하이데거의 생애에 관해서는 배우지 않고 그저 시험에 나올 정도의 하이데거의 이론에 대해서만 배우기에 하이데거의 삶을 보고서 놀랐다. 이 책을 통해서도 하이데거의 사상적 깊이, 사람 자체에 대한 끌림을 얻지는 못했다. 하이데거의 책을 통해서는 느낄 수 있을까. 엉뚱하게도 한나 아렌트가 왜 하이데거에게 끌렸는지 이해하지 못함은 외적인 부분에서가 아니라 한나 아렌트의 생애 한나 아렌트가 발전시켜온 사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건 꼭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 사상가들의 사상과 행동의 일치는 항상 같지 않다.

  이 책은 한나 아렌트가 제시하는 대표적인 사상적 이념을 쉽게 이해하게 해준다. 사유의 중요성,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존재적 고민을 왜 이토록 어려운 길로 헤매며 이해해야 싶은 생각들을 할 때가 많은데 그 핵심을 잘 포착할 수 있다. 만화형태의 이 책은 무겁고 딱딱하지 않은 문체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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