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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프로이트 때문인가?!


정신분석과 문학비평, 김열규 외, 고려원(고려원미디어), 1996.


  이 책의 문제점은 그 모든 정신분석과 문학비평과의 관계와 흥미로운 관점을 맨 마지막, 논문 하나로 잊어먹게 했다는 점이다. 일단 나에겐 그렇다. 여전히 진지하게 읽으며 정신분석과 무의식과 신화비평에 관해 나름 수긍과 비판을 했건만, 이 책의 마지막 글을 읽고선 정신없이 깔깔거린 기억이 있다. 그러고 책을 덮어 잊고 있었는데 언론에 자주 특정 비서관의 이름이 거론되며 여성비하의 시각을 가지고 있으니 업무를 사임해야 한다는 지속된 주장을 보면서 이 책을 떠올렸다. 뭔 연상작용인지는 모르겠다만. 

  이 책은 문학비평의 정신분석학적 방법에 대한 주제로 10명의 학자·교수가 쓴 논문형태의 글을 모은 것이다. 문학비평과 정신분석은 무엇인가에 관한 개관을 시작으로 정신분석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프로이트와 융의 관점이 문학비평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우리나라 문학에서의 정신분석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실제 작품이나 작가를 대상으로 한 비평을 수록하고 있다. 어쩌면 실제 작품을 가지고 하는 비평이 내용을 이해하기 쉽고 흥미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프로이트 이론 아래 놓인 글인데 「한국 현대시의 정신 분석학적 해석」이라는 표제 아래 8편의 현대시를 해석한 마광수 교수의 분석에 계속 물음표를 달고 있다. 1989년 발표한 논문인데 이 글에 대한 수용이 가능한 이유는 정신분석학적 비평으로 충분히 타당한 견해라는 것일까. 이 글을 읽고 난 생각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을 끌어들여 욕망의 분출을 정당화하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이미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있는 이의 이론이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어 이 이론에 ‘의하면, 따르면, 적용하면’으로 방패를 두르고 성적인 욕망의 표현과 생각을 현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


정신분석 이론은 성욕과 그 사회적 역할의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언어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해명한다.


  시인 윤동주, 한용운 시에 대한 저항과 일제에 대한 독립 투사의 해석을 주입식으로 받았기에 정신분석 이론으로 해석하는 방법의 괴리가 너무 커서 놀라는 것이 아니다. 시험문제식, 교과서식 해석에 대해서도 질려 있기는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마광수 교수의 해석 역시도 신선하다거나 놀랍다는 느낌보다는 마냥 우습고 억지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근본적으로, 예술은 「욕구의 대상」으로 설명된다. 한 예술가가 현실에서 좌절된 욕구를 환상 속에서 대신 충족시킨 것이 곧 예술이라고 풀이되는 셈이다. 결국, 문학이나 예술은 「욕구 대상 충족의 메커니즘」의 하나로 범주화되는 것이라고 바꾸어서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럴 경우에, 예술가는 현실의 실패를 환상 속에서 대신 성취하는 사람, 이를테면 「현실의 실패자 그러나 환상의 성취자」로서 그 개성이 설명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없었다면, 시에 대한 해석이 어떤 식으로 흘러갔을까. 프로이트 이론은 그 영향만큼이나 지나치게 ‘성’에 대한 해석만을 고수하고 있음으로 비판받았다. 마광수 교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성욕’에 근원을 두는 것을 수용하여 “음양의 이론으로 모든 사물의 이치를 구명하려고 했던 동양인들의 의식구조에는 프로이트의 범성욕주의가 오히려 더 잘 들어맞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진정으로 예술가적 기질(또는 시인 기질)을 타고난 사람에게 있어, 예술 창작의 근원적 동기는 ‘성욕의 대리배설’에 있다”고, “예술가 특히 시인들이 작품을 쓰는 근원적인 심리적 동기는 ‘유아기로의 퇴행 욕구’에 있다“고 전제한다.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의 성욕이 직접 배설될 수 있는 사회란 문명 이전의 사회,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사회라고 보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욕의 억압 없이도, 예술적 대리배설 없이도, 모든 인간의 직접배설이 가능한 문명사회는 가능하다. 성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모든 이데올로기를 없애 버리고 문명 발전의 지표를 오직 “인간의 쾌락”에 둘 때, 미래의 유토피아는 원시 상태로의 복귀가 아닌 진정한 문명 상태로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이다.


  이 글에서 마광수 교수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매저키스트로서의 여성의 심리가 반영된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왜냐, 꽃이 개나리꽃이 아니라 “진달래꽃”이기 때문이고 “여성 화자가 님과 헤어지더라도 ‘밟히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님과의 격렬하고 비정상적인 교합을 꿈꾸는 것이며” “꽃이 되어 님에게 마음껏 밟히고 싶은 심정이나 님에게 일방적으로 버림받는다는 것이나, 모두 다 매저키스트로서의 피학적 변태심리를 충족시켜 그녀를 황홀경에 이르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한다.

  윤동주의 「십자가」에선 배설욕구를 읽는다. 피를 흘리고 싶다는 표현이 시인의 잠재의식속에 숨겨진 배설의 욕구라는 것이다.


사실 윤동주가 살았던 시대만 괴로웠던 것은 아니다. 어두운 현실 상황이라고 해서 본능이 그 작동을 멈추지는 않는다. 이 시를 쓸 당시의 윤동주가 한층 정력이 솟구치는 젊은이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작품을 “성욕의 매저키즘적 대리배설”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많아지는 것이다.


  유치환의 시 <바위>는 페티시즘의 대표적인 예로, 윤동주의 <자화상>은 관음증적 나르시시즘으로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선 매저키즘적 취향을,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에서는 페티시즘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는 성욕의 대리배설 욕구를 읽는다. 이상의 <오감도>를 남녀간 성교를 표현하고 있는 작품으로 정자들의 무한질주라고 해석하고, 김수영의 <폭포>를 “은폐적 대리배설”의 시로 해석한다. “민중적 사디즘, 집단으로서의  군중이 갖고 있는 폭발적 분노의 심층심리적 근원은 성욕이 충족되지 못한 짜증이 뭉쳐져 증오심과 분노로 변하여 화풀이의 대상을 찾게 되는 것”이라고.


김수영의 <폭포>는 분명 풍자적 알레고리의 시로서 성공한 작품이지만, 이 시가 갖고 있는 심층심리적 상징의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김수영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의 잠재의식 안에는 성적 불만족이 뭉쳐져 있어, 그것이 그 시대의 암울한 상황과 결부되어 이러한 공격적 작품을 쓰게 했는지도 모른다.


  시인들도 미처 알지 못한 무의식을 친절히 알려주는 마광수식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보면서 해석의 다양성과 특정 이론의 집착적 적용이 가져오는 지나친 오독과 폐해에 대해 생각했다.

  상담을 받는데 의사든 상담사든 프로이트의 이론을 적용하여 나의 모든 표현과 행동 하나하나에 저렇게 해석을 내린다면 난 그 병원을 당장 뛰쳐나올 것이다. 몰랐던 나의 무의식에 대해 놀랄만한 견해를 알려주어 절대적으로 감사하오 따위의 감정이 들지 않을 것은 분명하며 오히려 상담하는 이의 정신에 대해 의문을 표시할 것이다.

  즐거운 사라. 그래서였을까. 당시에도 나같은 이들이 있어서? 이 작품을 읽어보진 않았다. 읽어보고픈 생각도 없다. 다만 이 작품을 통해서 마광수 교수가 법적제제를 받았고 책은 출판금지 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아주 옛날인줄 알았는데 1992년이다. 불과 25년 전 우리나라의 의식이 소설책 하나를 수용하지 못했다는 데 놀랐다. 그 당시에도 온갖 외설서적은 난립하고 있던 것으로 아는데 마광수 교수의 작품이 문제시된 이유는 도대체 뭘까. 법무부장관 후보자였던 이는 당시 마광수 작품에 대해 ‘법적폐기물’이란 표현을 썼다. 와설, 음란의 기준이라는 것이 수많은 페이지 속의 몇 개의 문장을 통해 알 수 있는 시각은 얼마만큼일까. 사람들이, 대중이 용인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인가, 예술작품에 대한 판단을 건드리는 또다른 시각이 특정한 ‘이유’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일들이 너무 많아졌다.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하지만 ‘누가’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수용되느냐, 더 널리 인정되느냐가 발생한다. 그저 특정인이나 미디어의 힘으로 평가가, 인지도가 상승하는 것을 떠나서 문학이 정치적인 이유로 ‘구속’되어야 할 일인가. 문학적 표현과 수사를 글쓴이로 동일시하는 일이 얼만큼 적정한가. 이런 의문이 계속 맴돈다.

  문학적 표현이든 그냥 일상의 말이든 특정한 표현에 휘둘리는 일은 있다. “세상에, 그런 말을 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 앞으로는 그 사람과는 말하고 싶지 않아” 그런 생각이 드는 일들이. 이럴 때 시간이 지나 이성과 감정의 조화로움을 발휘한 적절한 생각의 정도는, 방향은 어떤 형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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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에 대한 불안 현대의 문학 이론 44
해럴드 블룸 지음, 양석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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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태어나지 못한 불안


영향에 대한 불안-The Anxiety Of Influence: A Theory Of Poetry Harold Bloom


해럴드 블룸, 문학과지성사, 2012.


  제임스 조이스의 영향일까. 블룸이란 이름에 끌리는 것은. 외국인 이름을 두고 특별히 좋고 예쁘다는 느낌이나 생각을 가지진 않았는데 유달리 생각나는 이름들이 있다. 블룸이 그 하나인데, 이유없이 친숙하게 느껴진다. 블룸, 블룸 말할 때의 발음의 유연함과 꽃피움의 뜻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블룸 블룸하고 있으면 주위에 무언가가 피어오르는 느낌이 드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레오폴드 블룸과 Bloomsday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으니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의 영향인 모양이다. 해럴드 블룸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이 비평가를 알게 된 것도 오로지 그의 성이 ‘블룸’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밀리기엔 억울하게도 해럴드 블룸은 유명한 문학비평가이다. 많은 책들에 ‘해럴드 블룸의 추천’ 태그가 붙어 있다. 1930년생이니 지금은 87세의 이 비평가는 ‘비평가의 거인’이라 불리며 40권이 넘는 저서를 썼다. 해럴드 블룸에 대한 설명, 평가에는 그의 비평이 시대의 주류 비평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블룸은 ‘보수주의’ 비평가로 분류된다.

  낭만주의 시인들에 대한 비평을 주로 해온 블룸의 대표적인 비평 개념 ‘영향’, 이 책은 “영향”에 대한 이론을 담고 있다. 대체로 문학비평이나 문학이론서가 독특한 어휘를 사용하며 문장을 힘들게 써내려가는 까닭에, 더구나 번역서이기에 이해를 하기 위한 서글픈 노력을 기울여야 했지만 이 책 <영향에 대한 불안>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해럴드 블룸은 자신의 비평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장르에서 개념을 차용했는데 철학과 프로이트 이론이었다. 이 두 개념이 어떻게 문학을 설명하는데 ‘이용’되는지 지켜보는 흥미가 있다.


시적영향은 ―강하고 진정한 두 시인과 관계할 때―항상 이전 시인을 오독함으로써 이루어지며 이 오독은 실제로 필연적으로 오역인 창조적 교정의 행위이다. 풍부한 결실을 낳는 시적 영향의 역사, 즉 르네상스 이후 주요 서구 시 전통은 불안과 자기구원적 풍자, 왜곡의 역사이며, 도착적이고 의도적인 수정주의의 역사이며, 이 수정주의 없이는 근대시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해럴드 블룸은 시인이 시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선배 시인의 ‘영향’을 받을까 ‘불안’을 끊임없이 겪는다고 말한다. 그것을 이겨내는 것이 위대한, 독창적 시인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 <영향에 대한 불안>이 다루는 핵심 개념이다. 여기에 앞서 말한 철학의 개념과 프로이트의 방어 기제를 끌어와 선배 시인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는 심리적 갈등과 투쟁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해럴드 블룸에게는 ‘모방이 창조’라는 말보다 선배와의 차이, 왜곡, 오류가 문학 창작에서 더욱 중요한 것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창조적인 해석을 두고 벌이는 선배와의 경쟁. 그러니까 선배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 자각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 노력의 과정을 여섯 개의 수정률― 클리나맨, 테세라, 케노시스, 악마화, 아스케시스, 아포프라데스-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클리나맨은 선배 시에 대한 오독, 이탈, 타락으로 수사학적 아이러니에 해당한다. 클리나맨을 위한 투쟁으로 블룸은 반동형성을 방어기제로 설정한다. 테세라는 도자기 파편을 의미하는 것으로 테세라는 연결성을 의미한다. 여기에 “자기 자신으로의 선회”와 ‘반전"을 방어기제로 설정한다. 욕동의 대상이 타자에서 자신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의 테세라는 복원과 재현인데 이것은 새로운 불안과 수축을 야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케노시스로 선재 시에 대한 ’비우기‘를 의미한다. 격리, 취소, 퇴행의 방어기제로 투쟁의 과정을 설명하는데 “자신 속에서 선구자의 힘을 취소하는 것이 자아를 선구자의 입장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처럼 프로이트가 설명한 방어기제 이론을 적확하게 자기 의미화하며 <시적 영향에 대한 불안>을 설명하는데 그것이 프로이트 이론이라 이해를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여러 비판과 비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가 문학, 역사, 과학, 의학 등 전반에 걸쳐 거둔 영향력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쯤되면 프로이트에 맞선 악마화, 여섯 개의 수정률이 필요하다 싶다.


허구의 세계는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무한히 상상하는 내면의 자아를 매우 밀접히 알지 못하면서 그런 자아를 재현하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 말로에게는 변화가 거의 없다. 예를 들면 그의 과시적 인물들은 모두 똑같은 과시적 인물이고, 희생자들도 똑같은 희생자이며, 마키아벨리적 인물들도 똑같은 악마적 인물이다. 탬벌레인, 바라바스, 마키아벨리적 인물들도 똑같은 수사법을 공유하고 똑같은 욕망으로 어지러워한다. 셰익스피어는 말로에게서 이탈하면서 구별을 창조했다. 이보다 더 큰 승리를 거둔 시적 영향은 없다.


  창조적 작가라면 누군가의 이름에 종속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흔히 다른 작가들과 비견되고 실제로 '누군가‘를 이야기할 때면 그 이전의 선배 작가를 빌어 표현하는 경우가 작가뿐 아니라 다른 장르에서도 비일비재한 일이다. 제2의 누구다! 이런 수식에 감사함을 표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불편과 구속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자기 인정욕구, 자기과시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할 때 뒤늦게 태어난 이유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먼저‘의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해럴드 블룸의 ’영향‘. 그리고 그속에 닮고픈 의지와 벗어나고픈 욕망이 공존하고 있어 ’불안‘한 상태의 ’젊은이‘들을 생각해본다. 이것은 비단 ’문학‘에 대한 것뿐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도 흔들림없이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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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앓다 - 문학은 상처에서 출발하고 상처 위에 존재한다 민음의 비평 5
강유정 지음 / 민음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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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의 상처


타인을 앓다, 강유정, 민음사, 2016.


  타인을 앓는 일은, 불쑥 일어난다. 의도하지 않음에도 들이닥치는 감정의 풍랑이다. 그것은 오래도록 가슴에 머물러 종내는 머리를 지배하기도 한다. 가령 외벽 작업 중 사망한 가장의 다섯 아이와 아내, 노모를 향한 모금 행동도 타인을 앓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고인과 남겨진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일은 ‘정’이 많아 일컬어지는 한국인들에게는 더러 볼 수 있는 일인 듯하다. 어쨌든, 그렇다면 이처럼 타인을 앓는다는 것은 사회를 살아가는데 꽤나 중요한 힘이다.

  평론은 문학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그냥 그 자체로 서 있다. 대체로 서두에 시작하는 온갖 학자들의 명언이나 문구들을 보면 늘 특정한 이의 이름과 문구가 인용되고 평론들 마다마다에 사용된다. 그러니, 문학을 읽는 방법이 학자나 타인의 문구를 통한 해설이 되어 평론은 문학을 매개로 한 비평가들의 세계로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도 제법의 학자들을 평론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 비평이 준 장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평론에서 사용하는 용어나 언어의 틀은, 오히려 소설 또는 시에 대한 이해를 저 멀리로 보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굳이 비평집을 찾아 읽은 것은 오로지 제목 [타인을 앓다] 때문이다.

  이 제목에서 전하는 바를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라 여겼기에 어떤 학자들의 말들이 줄줄줄 이어진대도 견디어 볼 수 있다 생각했는데 굳이 견딜 필요가 없었다. 쉽고 평이하게 소설들을 비평하고 있어서 저자가 말하는 관점에 유의해서 소설을 생각해보는 재미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이 비평집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에서는 문학과 사회비평을 다루고 있다. 소설의 재미는 무엇인지, 당대 소설의 주요 서사 소재지, 출판시장의 기획형 상품, 청소년 소설 장르란 무엇인지, S.F라는 장르 등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과 의견을 건넨다. 2부는 2000년대 이후의 작품을 중심으로 비평을 서술하고 있다. 그렇기에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에 대한 비평을 확인할 수 있다.

  31편의 평론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바탕은 제목이 함의하고 있는 것처럼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다. 생각해보면 어떤 소설을 읽었을 때 ‘좋다, 재미있다’를 적극적으로 말할 때는 등장인물, 특히 주인공에게 공감했을 때이다. 인물에 공감하지 못하면 소설에 대한 평가가 박해지는 듯하다. 책제목이 [타인을 앓다]인 것에 대해 저자 강유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인을 앓는 것, 문학을 읽는 것과 문학을 하는 것의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타인을 앓는 것, 깊은 공감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 그게 바로 미련하지만 두터운 문학의 길일 것이다. 이해하고자 애쓰는 내가 먼 곳의 다른 고통과 소통하는 초월적 인식의 공간, 그게 바로 문학의 공간이다.


  문학의 공간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점은 수용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설속 세계는 현실의 반영이라 아무리 외면하고픈 사건의 연속일지라도 무엇 하나라도 이해의 고리를 발견하고픈 욕구가 있다. 저자는 최근의 젊은 작가들에게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성적 도덕’이란 동시대성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근현대사의 흐름에 문학은 그 궤를 같이 했다. 그 역사를 증언하고 기록하는 것을 넘어 알지 못했던 이들의 사연들을 재현하며 소설속 인물이나 그것을 읽는 독자 모두 상처를 치유하기를, 고통을 내 고통처럼 여기기를 바라는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저자는 타인에 대한 공감을 위한 소설은 기존과는 다른 플롯과 서술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시대정신의 구현’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나’라는 특정한 소설적 주체가 아닌 불투명한 타인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공감하는 자가 타인을 앓는 윤리적 작가이고 시대의 보편적 감정을 목격하고 재현하는 것이 바로 지금, 여기 소설의 존재 이유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의 보편적 감정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이 필요하다. 저자는 최근 젊은 작가들의 소설이 “그냥”이라는 단어 사용과 인물이 추상적이라고 지적한다. 물론 인물의 직업도 명확하지 않다는 이 상황을 20대의 독특한 세대적 고민이거나 서사적 관점의 부재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이들의 소설에서는 부정과 무위와 냉소와 욕망의 부재가 자리잡고 있다고 파악한다.

  최근의 시대를 관통하는 공통의 관점이 없다는 것이 소설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50년대 소설 속 인물들은 한국 전쟁과 절대적 가난, 1960년대 대학생들은 4·19 세대의 정서적 박탈감과 가난, 1980년대는 민주화운동이라는 맥락에서 인물들을 이해할 수 있다면 2000년대 이후의 20대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면들을 발견할 수 없다. 마냥 사용되는 “그냥”과 “습관”이라는 방관의 태도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란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어떠한 ‘정신’ ‘상처’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작가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 된다. 작가들에게 동시대의 상처없음이 결핍이 된다. 왜냐하면 문학은 타인을 공감하는 것,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상처’가 필요하니 말이다. 2000년대 이후의 동시대가 경험하는 상처의 부재가 작가들에게는 긍정의 요소가 될 수 없음이다.


문학은 상처를 필요로 한다(2007년 젊은 작가 대회에서 한유주는 자기 세대의 특징으로 거대 담론, 대문자로 기록된 역사적 상처의 부재를 꼽았다. 그는 공통의 상처가 없는 세대에게, 9·11 테러는 신선한 시적 충격으로 다가왔다는 고백을 덧붙였다). 중심의 상처가 부재하다는 사실에 가벼움의 향락을 느낄 것이라 기대했던 것과 달리 이들은 환부 없는 상처의 곤란을 증언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공통의 상처를 기억하게 된 것인지 모른다. 세월호라는 상처, 그리고 촛불혁명이라는 벅찬 불빛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상처…. 그러니 이제 동시대가 함께 느끼는 상처를 가졌으니,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기대해도 좋으련가. 저자가 지적하는 대로 문학은 상처를 필요로 한다는 것에 공감한다. 상처를 어떻게 풀어가는가는 작가의 역할이다. 거기에서 “타인에 대한 공감”이라는 바탕이 흐른다면 읽는 독자는 더없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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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림


문학은 자유다 At The Same Time, 수잔 손택 , 이후, 2007.


  동시에At the same time와 문학은 자유다라는 제목을 보면서 나라면 이 책에 어떤 제목을 붙였을까 생각한다. 저자가 아니니, 편집자의 입장에서라도 말이다. 문학은 자유다라는 제목은 이 책이 문학 관련 내용이 가득찬 것으로 느끼게 한다. 반면 동시에라는 제목은 그 내용을 예상하는데 어려움을 준다.

  이 책은 저자 수잔 손택의 마지막 생애에 쓴 평론과 연설을 모은 책이다. 소설가로 평론가로 에세이스트로 이름을 날렸던 수잔 손택의 글들이 빛을 발한다. 암투병 중에도 수잔 손택 자신이 직접 구상과 계획으로 쓰고 정리한 차례라고 한다. 총3부로 1부는 문학평론으로 문학작품에 대한 해설,  2부는 미국의 9·11 테러 직후의 글과 포로수용소 학대 등 수잔 손택이 관심을 둔 정치사회문제에 대한 글, 3부는 수잔 손택의 문학에 관한 연설들을 모았다.

 미국 편집자는 동시에를 한국 편집자는 문학은 자유다라는 제목을 선택했다. 한국판은 스스로 ‘소설가’로 불리기를 원했던 손택의 뜻을 담았다 했다. 미국판은 “이 책의 다양성과, 손택의 문학세계와 정치 활동, 미학과 윤리학, 내적 삶과 외적 삶의 분리 불가능성에 대한 경의의 뜻으로.”라고 제목 선정의 이유를 밝혔다.

  미국 편집자의 말이 길어서가 아니라, 동시에라는 제목에 더 끌린 것은 수잔 손택에 대한 인상 때문이다. 수잔 손택은 평론가, 소설가, 에세이스트 등 작가로서 명성이 드높다. 하지만 수잔 손택은 또한 정치사회문제에 대한 참여의식이 높고 실제 활동가였다. 그 활동가적인 사회참여의식을 생각하면 동시에란 제목이 수잔 손택의 모든 것을 더 적절하게 담는 느낌이다. 단지 수잔 손택이 쓴 글과 여러 뉴스, 타인의 글을 통해서 수잔 손택을 접할 수밖에 없는데, 수잔 손택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수잔 손택의 지적이고 활동적인 모든 면모가 부러움과 경외감을 안겨준다. 그래서 수잔 손택의 글을 읽을 때면, 뭔가 모르게 떨린다.


자기 수양 자체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타주의,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라는 기준이 없는 문화(문화라는 단어는 표준적인 의미로 썼습니다.)가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확장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처음에는 독자로서, 나중에는 작가로서 문학이라는 기획에 제가 몰두하게 된 것은 문학이 다른 자아, 다른 영역, 다른 꿈, 다른 언어, 다른 관심사에 대한 공감의 확장이기 때문입니다. p202


  수잔 손택 스스로 문학인이라 불리기를 원했다고 하는데 수잔 손택의 ‘문학’은 사회문제, 사회참여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소설가이든 평론가이든, 에세이스트이든 글을 쓰는 작가로서 수잔 손택의 활동은 끊임없는 사회활동의 연장선이자 상호작용이다. 수잔 손택의 문학관이 곧 그가 쓴 글과 유리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저는 소설이나 희곡을 쓰는 작가를 당연히 도덕적 행위자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작가에 대한 이런 개념은 나딘 고디머의 문학관과 제 것 사이의 여러 연결점 가운데 하나지요. 저는 나딘 고디머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보는데, 문학에 매달리는 소설가는 도덕적 문제를 고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어떤 것이 낫고 어떤 것이 나쁜가, 혐오스러운 것과 존경스러운 것은 어떤 것인가, 개탄할 일은 무엇이고 기뻐할 것은 무엇이고 인정할 것은 무엇인가. 직접적으로 생경하게 교훈을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지한 소설가는 도덕적 문제를 구체적으로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지요. p278~279


  수잔 손택에게 느끼는 동경이 그저 지식인으로서 활동가로서 그녀의 외적인, 보여지는 측면에 대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하지만, 난 그녀의 삶 전체에 대한 동경에 빠져 있진 않다. 그녀의 삶은 오로지 그녀의 삶인 것이고 현재 세상에 있지 않은 작가라는데 대한 안타까움이 있을 뿐. 그 삶에서 느껴지는 열정에 대한 동경이 더 강하다고 할까. 그러나 이런 글들을 만나면 같은 생각을 마주할 때의 반가움, 통찰력 있는 예리한 시선, 거침없는 비판들에 주체할 수 없는 떨림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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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7-04-07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년 전인가 한 출판사가 주최가 되어 수전 손택의 <수전 손택에 관하여(REGARDING SUSAN SONTAG)>란 다큐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다큐를 통해 미처 몰랐던 수전 손택의 민낯이라고 해야 하나 일상을 보게 되었고 그 덕분에 그의 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같아요. 간만에 저도 이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

모시빛 2017-04-07 23:23   좋아요 1 | URL
마침 수전 손택의 목소리가 넘 궁금하던 차였는데 이런 다큐가 있군요.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다큐를 보고 나면 글만 볼 때와는 느낌이 또다를 것 같네요. 막 설레지네요. 또 다른 이해의 문을 만난 것 같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다큐를 꼭 찾아서!!!
 


변화경영시인, 구본형


  그는 전문가에서 사상가로 스스로를 명명하면서 언젠가는 ‘변화경영시인‘이라 부르고 싶다고 한다. 그것이 작가 인생 후반기의 진화 여정이라고 얘기한다. 그는 삶을 시처럼 살고 싶다고 얘기한다. 그가 말하는 시처럼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시처럼 살고 싶다. 나고 깊은 인생을 살고 싶다. 무겁고 진지한 삶이 아니라 바람처럼 자유롭고, 그 바람길 위의 새처럼 가벼운 기쁨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싶다. 내면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깊은 기쁨, 그것으로 충만한 자의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울지. 어느 날,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한 사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문득 의미를 발견하여 말할 수 없는 헌신으로 열중하고, 평범한 한 여인이 문득 하던 일을 중단하고 내면의 북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하는 느닷없는 전환은 아름답다. 그것이 삶을 시처럼 사는 것이다(깊은 인생, p11)”


“나는 삶을 시처럼 살다 가고 싶다. 책을 보고 싶으면 책을 즐기고, 비가 내리면 비를 즐기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걷고, 여인을 만나 사랑하고, 자식을 낳아 그들이 커가는 것을 보고, 내 세계 하나를 만들어 그 속에서 사람들과 삶의 기쁨을 나누고 싶을 뿐이다. 나에게는 살아 있음의 흥분과 떨림이 중요하다. 나에게 있는 특별한 장점은 이렇게 감흥이 도도하게 일어나는 삶의 체험들을 책 속의 지식들과 뒤섞어 그 속에서 무엇인가 진득한 수프를 끓여내는 것이다(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 p451)”


 삶을 시처럼 살고 싶은 열망은 2002년에도 보인다. 『사자같이 젊은 놈들』 속에 ‘시처럼 살고 싶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미 작가는 오래 전부터 그가 살아가고픈 인생을 그리며 그렇게 살아오고 있었던 듯하다. 시처럼 살고 싶다는 것이 저자가 이야기하듯 깊은 인생을 진득한 수프로 끓여내는 일이라면 그는 그가 좋아하는 신화이야기를 가지고 『그리스인이야기』라는 진뜩한 수프를 마지막으로 끓여 내었다. 여기에서 그는 신화 속 영웅들의 삶 하나하나를 이야기하면서 또한 시로서 풀어내고 있다. 그가 신화 속 이들의 삶을 들려주며 종국에는 그들의 삶을 서사시처럼 읊어 내는 것처럼 그의 삶도 누군가에게, 또 그 자신에게 시로서 읊어 지리라. 그리고 그가 바랐듯이 ‘시처럼 살고 싶은 인생’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는 이들이 있어 그의 인생 또한 한 편의 시처럼 기억되리라.

 그가 떠난 후 그가 남긴 글들과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전한 내용을 토대로 세 권의 책이 발간되었다. 그의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구본형의 마지막 편지>, 그가 남긴 글들에서 선별한 60편을 묶은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 라디오 고전읽기를 통해 남긴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이다. 그가 사랑한 시, 그가 쓴 시들 역시도 한편으로 묶여졌으면 하며 ‘변화경영시인’으로 살다가 죽고 싶다고 한, 그에게 변화경영시인이라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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