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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말들 -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
은유 지음 / 어크로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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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하리라


다가오는 말들-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 은유, 어크로스, 2019.


  일상의 말들이 귀에 꽂힌 채 그저 흘러가지 않을 때가 있다. 어떤 단어나 문장들에 더 민감해 질 때는 안타깝게도 아름다운 말일 때가 아니다. 언제부턴가 일상을 뒤흔드는 말들은 혐오와 배제의 언어가 되었다. 물론 이런 말의 속성은 사람을 뒤흔들기 위함이다. 다만 그 말들의 범위와 빈도가 너무 넘쳐난다는 것. 상식은 찾아볼 수 없는 떼쓰기 떼거지 언어가 난립하며 모든 일상을 파묻는다. 


아름답거나 아릿하거나, 날카롭거나 뭉근하거나. 타인의 말은 나를 찌르고 흔든다. 사고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그렇게 몸에 자리 잡고 나가지 않는 말들이 쌓이고 숙성되고 연결되면 한 편의 글이 되었다. 이 과정을 꾸준히 반복하면서 남의 말을 듣는 훈련이 조금은 된 것 같다. 무엇보다 큰 수확은 내가 편견이 많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같은 말들의 반복, 반복. “아름답지 않고 아릿하지 않고 날카롭지 않고 뭉근하지도 않은,” 저열하고 저급한 말들. 언제부턴가 그런 말들 속에 살아간다. 나는 이런 말들 속에서 한편의 글들을 완성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내가 쓰는 언어는 아름다움을 상실하고 감성을 잃어가는 것 같다. 이미 오래전부터, 오래 전부터. 나를 무장시키는 단어들로 나를 채우게 된다. 이런 언어 상실의 시대, 그래도 내가 숨쉴 수 있는 것 또한 언어란 사실. 그리하여 실검에 오르는 말이 숨통을 틔우는, 언젠가부터 내게 다가오는 말이 되고 있다.

 《다가오는 말들》의 저자 은유는 일상에서 읽고 들은 말로 채운 글이다. 그 말은 저자가 집중하는 말이고 글쓰기 교실의 학인들의 이야기들이다. 저자가 ‘쓴’ 글이지만 그러나 저자가 ‘들은’ 말이다. 저자는 “서로가 경쟁자가 아닌 경청자가 될 때, 삶의 결을 섬세하게 살피는 관찰자가 될 때 우린 누구나 괜찮은 사람이 된다”고 말하며 듣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편견, 무지, 둔감함은 지식이 부족해서 생기는 건 아니었다. 결핍보다 과잉이 늘 문제다. 타인의 말은 내 판단을 내려놓아야 온전히 들리기 때문이다. 타인의 입장에 서는 일이 잘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지만 적어도 노력하는 동안 성급한 추측과 단정, 존재의 생략과 차별에 대한 예민성을 기를 수 있었다. 우리에게 삶을 담아낼 어휘는 항상 모자라고, 삶은 언제나 말보다 크다.


  늘 타인의 말을 잘 듣겠다 하지만 쉬이 들어지지 않는 말이 있다.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말들이 정말로 ‘거지같아서’, 그 말이 가진 ‘악랄함 때문에’ 들으면 내가, 그 말의 강도로 말해야만 할 것 같아서 움츠러들게 된다. 나 또한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차마 들을 수 없는 말, 들어서는 안되는 말 앞에서 나는 기꺼이 경청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겠고 그들에게는 ‘괜찮은 사람’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은유의 글은 삶의 눅진함이 솔솔히 피어나는 진솔하고 정겨운 글이며 따뜻한 시선이 담긴 위로가 되는 글이다. 부딪혀온 나쁜 말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나서 반성한다. 경청, 조금 더 여유롭게 ‘어거지’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 조급하지 않고 나를 갉아대지 않으며 더 길고 오래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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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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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견뎌야 하는 사막


문맹-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한겨레출판, 2018.


  이 짧은 책을 사두고서 한해가 지났다. 책은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거라고,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다지만 읽고 싶어 ‘산’ 책은 왜 이다지도 책장 속에 오래도록 묵혀두게 되는지 모르겠다. 이 책은 그나마 책꽂이에 꽂아 둔 지 짧은 시간에 읽힘을 당한 책이다. 두루두루 보니 아직 묵혀둔 책이 많다. 사두고서 10년이 훨씬 지나서야 읽힘을 당한 책이 1년짜리 문맹을 꼴아보고 있다.

  작가의 말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매일 읽기만 하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줄을 모르는, 가장 나태한 소일거리를 하는, 게으른 자”인 줄 알았는데, 이 정의는 내게 허용되지 않게 되는 건가. 질병에 빠져 있었다 싶었지만 치유의 시기가 지나고 다시 질병에 들까 말까 했는데 새삼, 질병이랄 것도 없었다 생각하게 든다. 아무튼.

  작가의 어린 날의 기억과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생각과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이야기가 흐른다는 점에서 굳이 줌파 라히리의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가 생각난다.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일과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프랑스어를 배우는 일은 엄청난 간극이 있지만 한편으론 끊임없이 타자로, 이방인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심정은 큰 간극이 없다.

  읽기와 쓰기에 관한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에는 생존을 위해 말을 삼키고 달려야 했던 역사가 있다. 작가의 생애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언어로 표현해도 부족할 만큼을 보여주지만 그것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언어는 담백하다. 그날을 탈탈 털어 빨랫줄에 수백번은 걸어놓은 것처럼 건조하다. 그것이 사막을 견디어낸 작가의 언어였을까. 이 반복된 건조함이 작가의 생애에 대한 관음증적인 호기심을 지우게 한다.


아무도 러시아어를 알지 못한다. 독일어나 프랑스어, 영어 등의 외국어를 가르치던 선생님들은 몇 달 동안 러시아어 속성 수업을 배웠지만, 그들은 그 언어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것을 가르칠 마음이 전혀 없다. 그리고 어쨌든 학생들도 그것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국민적인 지식의 사보타주를, 당연히 미리 계산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수동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저항을 목격하게 된다.


  헝가리 태생인 작가는 1956년 소련이 쳐들어왔을 때 여러 나라를 도망친 끝에 스위스에 정착했다. 작가는 모국어를 죽이고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어를 적의 언어라 부른다. 그나마 러시아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얼마나 다행인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위로뿐. 마침 3.1절, 상황의 차이가 있었다 할지라도 헝가리인의 러시아어에 대한 ‘저항의 방식’이 부럽게 느껴진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려고, 일본어를 쓰고 말하지 않기 위해 적극적인 저항으로 스러져간, 수동적인 저항조차도 해보지 못한 그들을 생각하면…. 

  

공장에서는 모두들 우리를 친절히 대한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 웃고 우리에게 말을 건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사막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회적 사막, 문화적 사막. 혁명과 탈주의 날들 속에서 느꼈던 열광이 사라지고 침묵과 공백, 우리가 중요한, 어쩌면 역사적인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했던 나날들에 대한 노스탤지어,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뒤따른다.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언어로든 글을 읽고 썼으리라는 작가의 글에 대한 갈망은 단지 작가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재적 의미를 얘기하는 것 같아서 숙연하게 느껴진다.

  나도 점점 문맹이 되어 간다. 시시각각 변하는 인터넷 상의 문자어를 이해하지도 적응하지도 못해 당황한다. 세상의 흐름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대화가 늘어만 간다. 그럼에도 알고 싶지 않은 말들이 넘쳐 나고 간극은 더욱 커져간다. 이것은 내가 견디어야만 하는 사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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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 소설가가 되는 길, 소설가로 사는 길
박상우 지음 / 해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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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키가 컸을 거야


소설가-소설가가 되는 길, 소설가로 사는 길, 박상우, 해냄, 2018.


 하루에도 수백권의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 모든 책들을 다 따라잡아 읽을 이유는 없음에도 어떤 날은 감격에, 어떤 날은 버거움에 벅차오르기도 한다. 책이 팔리지 않는다는 시대, 시간 중고 거래가 활성화되는 시대, 작가 수입은 0으로 수렴해 갈 텐데도 끝없이 책들은 쏟아지고 작가 또한 탄생하고 이내 사라진다. 에세이에 대한 대중 반응은 높아가며 누구나, 저자가 되는 시대가 되고 있다는 점은 굳이 좋지 않게 볼 이유는 없겠지만 이런 시장을 보고 있을 때마다 시인, 소설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직업으로서의 시인, 소설가들을.  


책이 많이 팔리지 않더라도 10년, 20년, 30년 묵묵히 소설가로 정진하는 사람들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책을 많이 팔아 돈을 벌진 못하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선 보이지 않는 재물을 쌓아가는 사람들이다. 인간과 인생의 뿌리를 들여다보며 그 스스로 뿌리가 되어가는 소설가들.


  ……그래도 경제적으로 힘들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게 되진 않을까. 아무리 ‘좋은 소설’을 쓰리라는 마음으로 정진한다 해도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힘겨움을 디디고서 정신의 재물이 차곡차곡 쌓을 수 있을까. 그렇기에 어떤 이들은 현실적인 꿈을 꾸고 실행해 가는지도 모르겠다. 

 

“나 3년 동안 노래연습 하루도 거른 적 없고, 뮤지컬 오디션도 빠짐없이 다 봤어.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건 없지만 내안에서 뭔가가 이만큼 키가 컸을 거야. 꼭 통장잔고가 늘고 취직을 해야만 발전하는 건 아니다.”  ―드라마 <메리대구 공방전> 中


  아직도 잊히지 않는 귀를 뚫고 지나가는 드라마 대사, “내 안에서 뭔가가 이만큼 키가 컸을 거야.” 이 말은 머리를 때리고 심장에 묵직함을 주었다. 당장의 성과에 연연하는 것에 반성했지만 드라마가 나온 만큼의 세월이 지나서 내 안에서 ‘커진 키’보다 쌓이지 못한 통장 잔고에 집착하게 된다. 어쩌면 소설가가 못되는 이유, 또는 무언가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내 안에서 커져갈 무엇을 키우는 일보다 늘어가는 숫자에 대한 욕구가 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쉬이 ‘자기 부정과 비관’에 익숙해졌는지 모른다.


자기 부정과 비관은 인생의 어느 분야에서도 생산적인 길을 가지 못하게 만든다. 깊이와 넓이와 높이의 인생이 아니라 퇴보와 정체와 나락의 삶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끊임없는 질문이자 끊이지 않는 탄식이다. 나이 한 살 더 먹는다고 해서 판단과 결단이 명쾌해지지는 않는다. 자아는 혼란에 빠지기 일쑤다. 어떻게 하면 살에서 ‘무아’에 이를 수 있을까.


어떻게 살건 문제의 관건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예술가적 삶에 최대의 적이 되는 건 말하나 마나 ‘나’라는 망상체이다. 그것과 싸워 이기지 않는 한 원하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를 버리고, 부수고, 비워야 한다는 점에서 예술도 도를 닦는 행위와 하등 다를 게 없다. 2,500년 전 석가모니가 설파한 ‘무아(無我)’를 소설 창작의 정신적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에서 섬뜩한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책은 ‘소설가’가 되는 길에 관한 글이다. 소설을 써야 소설가가 된다는 점에서 소설쓰는 방법을 알려주지만 소설가의 자세나 소설가가 무엇인가에 대한 글이 많다. 소설가로 산다는 일은 어떤 이들에겐 멋있어 보이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베스트셀러 작가는 몇몇에게 해당되는 천운이 필요한 일로 대체로 고난과 고독의 길임을 알려준다. ‘소설가’라는 제목에 맞게 소설가로서 경험을 알려주지만 굳이 소설가가 아니라 세상에 어떤 ‘꿈’을 가진 이들에게 들려주는 인생 선배의 경험담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무언가를 꿈꾸는 사람, 인생의 진로에서 고민하고 있는 이들에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이 담겨 있다. 또한 소설독법에 대한 안내도 되어 있는데 소설 읽기가 어려운 이들이 참고하면 독서에 대한 새로운 흥미를 느낄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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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독서 -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유쾌한 책 읽기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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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합니다. 취향해 주시죠.

쾌락독서-개인주의자 문유석의 유쾌한 책 읽기, 문유석, 문학동네, 2018.


이 책에 등장하는 책들은 ‘추천도서’나 ‘필독도서’가 아니다. 누구 마음대로 ‘필독’이니? 난 ‘필’자만 들어도 상상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완장 찬 사감 선생이 고리타분한 책을 코앞에 억지로 들이미는 느낌이 든다(물론 그 필독도서가 내가 쓴 책인 경우에는 팅커벨이 반투명 날개를 흔들어대며 보물 상자에서 책을 꺼내주는 느낌이지만). 여기 등장하는 책들은 ‘그저 어떻게든 나에게 영향을 주었던 책’이다. 선정 기준은 ‘지금도 뭔가가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지 여부’.


  작가는 이렇게 말하지만 어쩌면 작가가 읽은 책들만 리스트업 되고 있을 것이다. 애초 이 책 자체가 출판사의 요청에 의해 ‘기획된’ 것임을 밝히고 있듯이 말이다. 누구에게나 영향력까지는 아니더라도 강력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책은 있다. 그들의 기억 속 책들에 관해 이야기를 풀기를 아무도 요청하지 않기에 글을 쓰는 일도 출판하는 일도 없을 뿐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 기억을 간절히 소환해 줄 것을 바란다. 그 자체가 결국 ‘추천’이란 이름을 달게 될 것이고 ‘필독’ 목록에도 올라가게 될 것이다.


나는 솔직히 취향으로 차별화하는 우아한 ‘인생 책’ 리스트를 볼 때마다 궁금해진다. 저 책들도 물론 좋았으니 언급했겠지만, 정말 저 책들이 평생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들이었을까?


  그러니 취향의 문제라면서 ‘우아한’ 책에 대해 굳이 하는 의문 속에서 책에 대한 차별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밖에 없다. 저자에게는 ‘우아한’ 책들에서 잊지 못할 인생의 기억을 안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 말이다. 어떤 기억이든. 그냥 저자의 기억을 소환하는 책들을 ‘우아한’ 책들과 비교하는 것, 이것 역시도 ‘우아한’ 책과 그 책을 읽은 이들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는 듯하다. 대표적인 것이 거짓과 허세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으론 독서 취향을 가져볼 수 없도록 책과 멀어지게끔 자라도록 한 것이 누구냐, 그런 한탄을 하고 싶다. 그런 이유로 우아한 책을 읽었다 한다면 의문을 갖고 검증하려 하거나 마치 나쁜 일을 한 것쯤으로 여기는 태도가 형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작가는 ‘지식인들의 글에는 독자가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삼엄한 차단 장치’가 있고 ‘생동감이 없고’ ‘비슷한 관 속에 누워 있는 귀족의 시신들처럼 우아하게 죽어 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문유석 작가가 읽은 책을 이야기하는 이 글들은 ‘삼엄한 차단 장치’를 치우고 생동감 있게 쓰려 한 듯하다. 수다를 떨듯 가볍고 경쾌하게 딱딱한 책보다는 ‘야한 것’을 기준으로 책을 선택하고 재밌고 즐거운 책들만을 골라 읽었던 지난날의 독서취향을 얘기한다.

  지난날 작가는 놀이보다 책장에서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읽는데 몰두했었다고 말한다. 무협만화, 순정만화, 심지어 요리대백과 까지도. 야간자율학습 시간에도 만화책이나 무협지를 친구들과 돌려보며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고 말이다. 이쯤되면 작가에게 동류의식을 느끼며 제법의 사람들이 하이파이브를 날리려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는 ‘이문열을 거쳐야 하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이야기하며 1등을 달고 사는 학생임을 말한다. 반 전체에 국어를 가르치기까지 하는. 이쯤되면 완벽한 뒤통수요 배신자라 아니 할 수 없다.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고 그저 ‘우아하게’ 남아 있는 많은 ‘우아한’ 책들이 있었을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지만 어떤 기억을 소환하든 독서가 주는 즐거움을 말하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이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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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글쓰기 - 고민이 시작된 딸에게 건네는 엄마의 손편지
김정은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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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엄마의 글쓰기 - 고민이 시작된 딸에게 건네는 엄마의 손편지, 김정은, 휴머니스트,  2017-07-03.


  명확히 하자. 이 책은 엄마가 아이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책이 아니다. 자라나는 아이에 맞는 적절한 글쓰기 교육서가 아니라, 실제 엄마의 글쓰기 이야기다. ‘엄마’란 누구일까. 여기서 ‘엄마’는 두 아이의 엄마인 저자 자신을 가리키겠지만, 또한 저자 자신과 저자의 엄마 그렇게 두 엄마의 존재라는 생각도 든다.

  엄마인 저자는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겪게 되는 혼란을 이미 ‘거쳐온’ 경험자임에도 아이들이 물어오는 질문에 당황하고 아이들이 겪는 혼란에 적절하게 해줄 말을 찾지 못해 힘겨워하며 서로 간의 오해가 원망이 되어 갈등을 빚게 된다. 학교가기 싫다 하고, 자존감을 상실해 주눅들어 있고, 미래 직업에 대해 고민하고, 친구와의 사귐에 어려워하고, 성경험을 물어오고, 세장 진지한 질문을 하고, 마냥 엄마를 원망할 때… 저자는 아이들이 맞닥뜨리는 필연적인 혼란들에 안쓰러워한다. 또한 초보엄마인 자신의 역할을 탓하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힘겨워한다. 그러면서 두 아이의 엄마인 저자는 자신의 ‘엄마’를 떠올린다. 저자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학교에 들어갔을 때, 사춘기일 때, 이차성징을 겪을 때, 엄마와 갈등을 빚을 때, 그런 일상의 나날들에 엄마는 저자에게 어떻게 해주었던가.

  그때 저자의 엄마는 도시락에 손편지를 넣어 두었다. 엄마의 손편지를 떠올리며 저자 또한 마주보고 하기 힘든, 그러나 전해주고 싶은 말과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손편지로 전달하기로 한다. 

  엄마의 편지를 받으며 아이들은 궁금했던 것에 대해 해답을 얻고 상처받고 화난 상황에서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을 다잡는다. 물론 저자도 아이들의 생각과 마음에 대해 더욱 잘 알게 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아이들에게 편지를 전해주는 과정에서 저자 역시 한발자욱 성장해 나간다. 자신의 마음속에 마냥 묻혀 있던 어린날의 상처들, 엄마에게 품었던 섭섭함과 이해하지 못할 엄마의 행동들을 다시, 엄마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기도 하고 마음으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며 아이들에게 들려줄 더욱 좋은 이야기와 고민해결방법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 방법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에서 이어지기도 하고 경험에서 얻은 문제점을 고려하면서 나타나며, 명확하게 가치관을 정립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결국 이 엄마의 글쓰기는 아이들의 질문에서 아이들과의 생활에서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아이들이 생활해 가는 동안의 지침, 가치관으로 삼았으면 좋을 방법들을 건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또한 그렇게 살아가리라 다짐하는 저자의 외침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는 ‘아이’의 성장을 돕는 엄마의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엄마의 내면의 성장기가 이 책이 아닐까 한다.

  엄마는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에게 맞는 언어로 편지를 쓰며 엄마의 생각을 전한다. 하지만 다시 자신의 언어로 아이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재정리한다. 그것은 과거와의 화해이기도 하고 현재에 대한 파이팅이기도 하며 보다 나은 미래를 아이들과 함께 하고픈 희망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면 아이들에게 띄운 편지보다 내면의 욕망을 잘 정립한 저자의 ‘일기장’이 눈에 간다.

  아이들에게 모든 최고의 것을 해주고픈 우리네 엄마들. 과거 극도로 가난한 나라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보면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움을 안겨주고 있기도 하다. 개별적이고 상대적이긴 하지만 이전 세대에 비해 풍족한 물자의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물려받는 경험은 덜한 이 세대가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전달해주는데 익숙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아이들에게 건강한 가치를 전달해주기 위한 ‘엄마’ 자신의 건강한 가치관을 정립하는 과정으로 읽혀진다. 내 마음속에 각인된 ‘내면아이’를 끄집어내고 치유해야만 흔들림없는 이야기들을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지 않을까.

  아이와 저자와 저자의 엄마, 이 3대가 함께 편지로 이어진 일상의 삶들이 일회적인 이벤트로 끝나지 않고 지속되어 온 기록을 보며 자연적으로 ‘글쓰기’가 갖는 힘을 알게 된다. 글쓰기 방법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지만 ‘글쓰기’를 얘기하고 있는 이 책은 엄마와 아이들의 사랑과 이해의 연결고리를 지난 추억과 현재와 미래의 삶에 대한 의지와 가치관의 연결고리를 정리해주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도구가 된다.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왜 김광석의 노래가 떠오를까. 엄마가 다시 쓰는 일기 때문일까. “나를 둘러싸는 시간의 숨결이 떨쳐질까 / 내가 간직하는 서글픈 상념이 잊혀질까 / 내가 알고 있는 허위의 길들이 잊혀질까 / 잊혀져 간 꿈들을 다시 만나고파”

  엄마가 다시 쓰는 일기장 속에서 아련한 상념을 맞닥뜨리며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고민하고 생각하며 전해주는 엄마의 글쓰기도 필요하지만, 나 자신의 상념과 꿈을 기록하는 나만의 글쓰기도 필요함을 깨닫는다. 저자 역시 자신의 엄마에게 글을 쓰기를 권한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에도 엄마로부터 손편지를 받는 저자이니만큼, 이 이야기의 시작이 자신이 엄마에게 받았던 편지로부터 기인한 만큼 ‘엄마가 다시 쓰는 글’이란 느낌은 아련함을 동반한다. 이 세상의 엄마는, 엄마이기도 하지만 엄마 이전에 ‘나’이기도 하다.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 · 『엄마의 글쓰기』 

 김정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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