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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셋 : 아름다움과 여성혐오 열다 페미니즘 총서 2
쉴라 제프리스 지음, 유혜담 옮김 / 열다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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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성


코르셋, 쉴라 제프리스, 열다북스, 2018.


  미용관습은 여성의 주체적인 행동인가. 저자 쉴라의 주장은 명확하다. “아니다.”

  미용관습이 여성 선택인가에 관해서는 페미니즘 내에서도 이견이 존재한다. 이것은 ‘미용관습’이 무엇인가에 관한 인식 차이에서 벌어진다. 미용관습은 화장, 하이힐, 다이어트, 제모, 로션, 미용영양제, 패션, 보톡스, 성형수술과 같이 여성의 ‘외모’를 성적/미적 대상으로 하는 행위들뿐만 아니라 ‘여성적’인 태도까지를 포함한다. ‘여성적’이지 않은 태도―화장과 제모를 하지 않는 등 용모를 꾸미지 않은―는 여성의 자기관리 능력이 없음을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 능력없고 프로페셔널하지 못하고 게으르고 성실하지 않은.

  쉴라는 ”여자에게 강요되는 ‘아름다움’이 “성별 구분에, 즉 성적 지배 계급인 남자와 피지배 계급인 여자를 쉽게 구별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본다. 미용관습은 순종―여자에게 성적으로 복무할 의지, 심지어 성적 복무를 위해 노력을 들일 의지가 있다는 뜻― 표시이며 ‘굴종적’이라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남성 지배 문화를 이끄는 문화적 관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꼭 미용 관습을 통해 성적 차이를 만들어야 하는가? 남자들이 일상생활을 꾸려나가는 동안 ‘여자’를 보고 고추를 부풀리며 성적 만족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남성 지배 사회에서 ‘여성성’은 피지배자 사회에서 일어나는 집단행동으로 “남자의 성적 흥분을 용이하게 하도록 여성성을 훈련받고 여성성을 수행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이에 대해 디 그레이엄은 “여성성은 사회적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일컬었다.


여자는 남자와는 달리 여성성을 ‘선택’할 위치에 있지 않다. 여성성은 강요되는 것이며, 여자의 낮은 지위를 나타내는 표식이기도 하다. 여자들에게 여성성은 섹스 장난감이 아니라 몸과 감정, 인생까지도 규정하는 규칙이다.


  쉴라는 이러한 서구의 미용관습,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미용관습 역시도 ‘유해한’ 문화 관습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UN은 여성 성기 훼손(FGM), 여자에 대한 강제 음식 주입, 조혼, 남아 선호, 여야 영아 살해, 미성년 임신, 지참금 등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을 철폐하기 위한 유해 문화 관습을 지정하고 있는데 FGM은 서구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중동과 아프리카의 FGM는 다르게 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어쩌면 서구에 ‘관습’을 만들어내는 ‘문화’가 있다는 개념 자체가 낯설게만 느껴져서일지 모르겠다. 보통 서구의 유해 관습은 소비자의 ‘선택’, 아니면 ‘과학’의 ‘의학’, 그것도 아니면 ‘패션’이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며 정당화된다. 관습이 아니라 시장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문화는 비서구에만 존재하는 수구적인 무언가라면, 서구에는 그 대신 과학과 시장이 있다는 식이다.


  미용관습이 ‘선택인가?’에 관한 페미니즘의 시각이 나뉘는 지점이 여기이다. 선택이라 주장하는 근거는 화장과 제모하지 않기, 다이어트나 몸매 관리는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기에 선택이며 강요된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앞서 제시했듯 여성이 미용관습을 거부하면 “분노와 조롱을 부르며” “도덕 같은 성질을 띤다”는 점, 다이어트가 건강에 피해를 주고 죽음까지도 낳기도 한다는 점은 ‘강요’와 ‘사회적 압력’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이것이다. 미용관습에 관한 시각에 서구중심주의, 국가간 권력 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중동이나 아프리카에서 행해지는 관습에 관해―어느 정도 고유한 문화라고 인식하면서도― ‘미개하다’는 시선으로 보고 있다. 어째서 서구가 행하는 것은 ‘세련된’ 문화이고 ‘사업’이 되는가. 왜 흑인 여성에게 여성성은 “백인 여성처럼 되기”가 되어야 하는가. 왜 중국 전족 문화는 여성 억압하는 문화로 문제시되고 서구의 하이힐 문화는 그렇지 않은가. 어느 나라의 ‘문화’적 상황보다 자본이 개입된 ‘산업’이라는 명목에서 ‘여성성’은 더더욱 도구적이고 ‘상품’으로 위치하고 있지 않은가. 

  유해 미용 관습이 없어진 세계가 올 수 있을까. 쉴라는 미용관습의 유엔 유해 문화 관습 지정이 그 시작이 되리라 보는 듯하다. 미용관습에 적용될 ‘존엄성dignity’은 문화적 차이에 의해, 자본의 차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 존재 자체의 존엄과 자유를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여자가 얻게 될 육체적, 정신적 자유를 위해서라면 투쟁할 가치가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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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하는 페미니즘 - 여자의 삶 속에서 다시 만난 페미니즘 고전
스테퍼니 스탈 지음, 고빛샘 옮김, 정희진 서문 / 민음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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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 그리고 건조기


빨래하는 페미니즘-여자의 삶 속에서 다시 만난 페미니즘 고전, 스테퍼니 스탈 저, 2014.


  쨍쨍한 하늘 그리고 폭염, 빨래가 잘 마르겠구나.

  찌뿌둥한 하늘 그리고 폭우, 빨래가 안 마르겠구나.

  날씨가 좋을 때나 좋지 않을 때나 팔할의 빨래 생각은 지극히 현실적인 반응일 게다. 내일을 위한 옷과 양말 유무는 밖으로 나가는 데 최소로 필요로 되는 것이니까. 또한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빨래 담당자’의 역할에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할 테고.

  나와 같이 빨래에 민감한 여성이 있으니 남편의 빨랫감을 집어던진 여자, 스테파니 스탈이다. 최근 페미니즘 경향과 변화의 움직임을 위해선 신간을 읽는 것이 적절할 텐데도 신간들에는 관심과 흥미가 떨어진다. 그럼에도 페미니즘의 고전이랄 수 있는 책엔 여전히 관심이 간다. 실천적, 운동적인 접근보다 이론적이고 논쟁적인 책들에 대한 관심일까. 아무튼 그렇기에 페미니즘의 대표적 고전 도서를 ‘다시 읽기’하는 이 책은 다시 또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스테파니 스탈식으로 재세탁된 고전들은 저자의 경험과 버무려져 쉽게 다가온다. 원제보다도 한국판 제목이, 그리고 책표지가 아주 맘에 든다.

  장하준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고 이야기한다. 인류를 바꾼, 가장 혁명적 발명품으로 세탁기가 상위를 차지하곤 하는데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켜 사회로 진출할 수 있게끔 했기 때문이다. 분명 세탁기를 비롯한 가전제품의 발명으로 인한 가사노동시간의 단축은 경이로운 일이다. 이제는 날씨까지 극복하는 건조기, 건조기능이 부가된 세탁기도 등장하였으니 ‘여성’의 일이 얼마나 줄어들었는가. 그렇다. 여성의 일하는 시간이 ‘줄어들었을 뿐’이다. 여전히 빨래를 비롯한 가사일은 여성의 일일 뿐이다. 그것만은 세탁기가 발명되든 건조기가 발명되든 변하지 않았다.

  스테파니 스탈은 결혼, 임신, 출산, 육아를 겪으면서 페미니즘이란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의문을 갖는다. 일을 가진 여성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던 그녀의 ‘여성’의 자각은 꿈을 비롯한 많은 것을 포기하게끔 되는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현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이야기다. 이 혼란과 절망에서 사랑, 죄책감, 좌절이라는 어려움에 맞서기 위해서 스테파니 스탈이 선택한 것은 페미니즘 고전 읽기이다. 그녀의 이 선택은 그녀 자신을 혼란에서 나오게 해줄까. 같은 상황에 처해 같은 감정에 휩싸인 또다른 여성들의 삶의 변화를 이끌어 줄까. 페미니즘 고전이 등장할 때마다 그 책은 여성에게, 세상에 용기를 북돋워주고 모순된 것들을 일깨워주었을까. 페미니즘은 세상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자조에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스테파니 스탈이 들여다본 페미니즘 고전의 목록은 메리 울스턴그래프, 버지니아 울프, 시몬 드 보부아르, 베티 프리단, 게이트 밀렛,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개럴 길리건, 주디스 버틀러 등 초기 페미니즘, 급진적 페미니즘, 프랑스 페미니즘 등 다양하다. 이 책들을 개괄하고 요약하면서 스페파니 스탈이 처한 개인적 상황에서 느낀 감정을 이야기하기에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셜리의 어머니인 메리 울스턴그래프트와 시몬느 드 보봐르의 개인적인 생애에 쏠리는 관심은 그들이 주장한 페미니즘의 이론과 연계해서 더욱 생각거리를 안겨다 준다. 그들 작가들도 완벽한 생활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이론을 쓰윽 그려낸 건 아니었다. 한계에 부딪치면서 생각하고 깨치고 생각한 고민의 흔적이 담겨 있다.


한때 육아와 가사 노동은 여자들을 연대하게 만들어 주는 주제였습니다. 2세대 페미니즘은 그러한 연대의 힘을 바탕으로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가사 노동은 인종과 계급을 나누고 이민자와 비이민자를 가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남자들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 여자들을 진정으로 해방시켜 주고 있는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공통의 어려움을 가지고 연대했던 여성들이 같은 문제로 서로가 대립하는 상황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는 같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면 이제는 같이 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애쓴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서 비켜난 지엽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며 그렇게 연대의 틀은 무너져간다. 이러한 역할을 누가, 하고 있는 것인가.

 

일과 양육이 주는 만족도가 얼마나 큰지, 두 가지가 자아실현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비교해 보려는 시도는 허울만 그럴듯할 뿐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두 가지가 서로 다른 종류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언론은 ‘직장 맘 대 전업 맘 전쟁’ 같은 자극적 기사들을 내보내면서 그런 중요한 차이를 언급하지 않은 채 오만하게 넘어가 버린다. 


  스테퍼니 스탈을 힘들게 했던 이 세상에서의 여성이라는 자각, 여성 성역할로 인한 스트레스와 히스테리와 함께 찾아왔던 가족과의 불화는 페미니즘 고전을 다시 읽으면서 화해 무드로 나아간다. 상황의 변화가 있어서가 아니라 저자의 생각의 변화, 인식의 변화가 동반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스테파니 스탈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경험이었고, 이 경험의 이야기를 저자는 세상에 들려주어 다른 이들로 하여금 혼란의 극복방법을 제시하게 한다.


정체성은 지식의 주체가 되는 경험에서 나옵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존재란 과정, 이야기, 대화입니다. 항상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노력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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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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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항상 꽃뱀이 된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창비, 2017-08-30.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어느 시인의 성폭력 이야기를 들었다. 오히려 지금 이야기되는 것보다 더욱 충격적이고 경악스러워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물론 그 이야기를 전한 사람의 ‘권위’에 힘입어 이야기의 타당도와 신뢰성도 높았다. 그 시인의 시는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았기에 시와 시인이 분리되지 않았다. 어느날 갑자기 성향을 바꾸어 진보문학의 대가이자 더없이 능력있는 시인이자 문학활동가가 되었는지, 그와 관련한 이야기에 흥미가 솟기도 했다. 어쨌든 그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이다.

  그 시인의 이야기가 수면으로 올라왔을 때 ‘우와, 드디어’라고 안타깝게도 기뻐했다. 잘못을 시인하는 듯이 행동했던 시인은 외신에서 자신의 행동을 적극 해명하고 시간이 흐른 후 형사소송이 아닌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10억7000만원짜리 재판이 얼마전 시작되어 인터넷엔 여성 시인 이름만 실시간으로 올랐다. 호텔룸 제안 이후의 성폭력 폭로가 이어졌기에 무언가를 ‘노리는’ 폭로라는 부정적 시선도 있었다. ‘미투 권력’이라는 비아냥도 있었다. 재판 진행 중인 사건을 둘러싼 거대한 구름을 보고 있자니 답답하다 싶었는데, 내가 시인의 성폭력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편해질 수 없는 마음이 리베카 솔닛의 『모든 질문의 어머니』, 침묵의 강요를 생각나게 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공격당한 경우라면 거의 모든 상황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여자를 비난하는데, 그것은 남자를 비난하지 않으려는 방편이다.


  참 이상한 것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특성에 의해 남성의 ‘성폭력’은 당연하며 이해해줘야 하는 것으로 여성은 절대로 당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얘기된다. 이런 모순적 인식의 기저에는 오로지 ‘남자를 비난하지 않기 위한’ 이유만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리베카 솔닛이 말처럼 페미니즘은 남자들 일이어야 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이 여자들 일인 것은 그저 그 일이 여자들에게 저질러지기 때문이다. 그 일을 저지르는 건 대부분 남자들이니 어쩌면 페미니즘은 줄곧 남자들 일이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한국판 제목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의 원제는 『모든 질문의 어머니』. 리베카 솔닛은 경험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유머가 깃든 언어로 감각적으로 이야기한다. 지금도 여전히 여성혐오, 데이트 폭력, 디지털 성범죄가 만연하고 “물어뜯는 질문, 질문 속에 이미 답이 포함되어 있으며 실은 우리를 강제하고 처벌하는 것이 목적인 질문”만이 가득한 세상이다. 강요된 정답과 강요된 침묵을 ‘추구’받는 현실에서 여성이 침묵에서 벗어나 이야기해야 함을, 그러한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세상의 언어는, 이야기는 달랐다. 여성들은 항상 ‘어머니됨’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여성의 삶의 방식은 아기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것이라는 인식 속에서 여성의 세상은 가부장제 속에서 차별과 편견과 멸시의 언어의 대상이 되어왔다. 모든 이야기들은 남성의 시각에서 이루어졌다. 심지어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리베카가 제시하는 「여자가 읽지 말아야 할 책 80권」 목록은 의미심장하다. <에스콰이어>지가 소개한 ‘남자가 읽어야 할 최고의 책 80권’의 책목록을 비튼 것이다. 리베카 솔닛이 우려하는 것은 이 목록을 좇는 독자가 이들 책을 통해 여성을 배우게 될 텐데 그들은 “여자를 배우고 싶을 때 찾아가야 할 전문가라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남자들”이라는 점이다. 즉 이들 책은 여성혐오적인 시선이 가득한 책들로 익히 아는 작가들의 이름이 끝도 없이 등장한다. 탐정류의 소설에서 강간은 어떤가. 강간은 강간범이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옷이, 여성이 먹은 것이, 여성이 간 장소가 저지르는 것처럼 묘사된다. 

“남자들은 일종의 날씨처럼, 주변에 감도는 자연력처럼, 우리가 다스리거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불가피한 무언가처럼 추상화 된다. 이런 이야기에서 남자들 개개인은 사라지고, 강간과 폭행과 임신은 여자들이 적응할 수밖에 딴 도리가 없는 날씨가 된다.”


이 나라에는 이런 식의 이야기가 많다. 믿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이야기, 가난의 원인이나 인종차별의 결과와 같은 현상을 드러내기보다 덮어 감추는 이야기. 결과에서 원인을 떼어내고, 의미를 멀찍이 치워버리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에 명확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새로운 인식이다. 오래도록 배제되었고 있음에도 그것을 명할 언어가 없었다면 이제는 개개인이 겪고 있는 경험을 묘사할 단어를 만들고 여성들의 이야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사물을 보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인식을 위한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일, 여성은 이야기가 필요했다. 침묵하거나 답정녀의 세상을 살지 않기 위해서, 나아가 더 자유롭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차별과 편견의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를 갖는 일은 그렇기에 필요하다. 결국 리베카 솔닛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그 진정한 이름으로 부르는 일, 힘닿는 데까지 진실을 말하는 일, 어떻게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지를 아는 일, 특히 과거에 침묵당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는 일, 수많은 이야기가 서로 들어맞거나 갈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 혹시 우리가 가진 특권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해서 특권을 없애거나 그 범위를 넓히는 일. 이 모든 일이 우리가 각자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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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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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지 오래됐다  


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교양인, 2018-02-14.


  내 인생의 영화라고 꼽을 만한 것이 없다. 딱히 영화를 즐기지 않으니. 이 폭염 속 극장에서 음료를 마시며 시원함을 즐기는 영화에 대한 환상도 없다. 가기까지가 귀찮아진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러 가는 일은 연례행사가 되기 일쑤다. 아니, 영화관에 가는 일이라고 해야 하나. 갑자기 ‘혼자서 보는’ 이라는 말이 낯설어진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일이 과연 혼자서 하는 일인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보는 아는 누군가가 없이 영화를 본다는 말이다. 영화관은 사람으로 넘쳐나니까. 그럼 이건 혼자서 하는 게 맞나?! 그렇게 보면 철저하게 혼자서 하는 건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책을 읽는 시간은 철저히 ‘혼자’라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영화보다는 책이 혼자서 하기에 알맞은 취미생활이라고 생각해본다. 당연, 작가는 이런 질문을 예상했듯이 이렇게 말한다.


‘혼자서 본 영화’가 ‘나 홀로 극장에’라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영화와 나만의 대면, 나만의 느낌, 나만의 해석이다. 나만의 해석. 여기에 방점이 찍힌다. 나의 세계에 영화가 들어온 것이다. 지구상 수많은 사람들 중에 같은 몸은 없다. 그러므로 자기 몸(뇌)에 자극을 준 영화에 대한 해석은 모두 다를 것이다. 한 작품을 천만 명이 본다면 그 영화는 천만 개의 영화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하는 것에 대한 매력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여 이야기를 들어본다. 하지만 이 책은 혼자서 보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게 혼자서 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인생 문제를 해결해주고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이기에 타인이 필요치 않고,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외로움을 원한다고 말한다. 인생문제가 대부분이라도 해결된다는 이 뻔뻔스러운 고백에 28편의 영화를 보는 저자의 시선을 따라간다. 영화에 대한 감상보다 ‘혼자서’에 더 꽂혀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픈 마음이 더 크지만, 영화마다 시선을 녹여내는 작가를 따라가다 나도, 여러 생각에 잠기게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저자는 가족과 사회에서의 사랑과 상처, 젠더와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관한 평소의 시선을 그대로 녹아 낸다. 다양한 영화들 그 에피소드들에서 저자가 생각하고 주장하는 바에 관해 더욱 세밀한 시선을 채집하며 사회에서 수동적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 여성에 대해, 그렇게 만드는 사회의 시선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희진 작가의 책을 읽었다면 젠더에 대한 저자의 시선을 알기에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그래도 <강철비> <의형제> <용의자> <공조> 영화를 관통하는 시선은 재밌게 봐진다.


당대 남한 여성들의 낭만적 사랑의 욕구가 반영된 ‘남북’ 영화는 역설적으로 북한 여성이나 남한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성애 제도에서 보는 사람(관객)이 여성일 때, 대상(화된 인물)은 남성일 수밖에 없다. 한반도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사라졌다. 그래서 이런 영화들을 남북 화해와 흥행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영화라고 평가하는 것은 사실이 아닐뿐더러 위험하다.


  한때 북한은 ‘나쁘고 악하고 아름답지 않은‘이 총체적으로 형상화되었다. 그러던 것이 공공경비구역 JSA 즈음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최근 잇따른 북한이 소재로 등장하는 영화에서 북한에 대한 묘사는 확연히 달라진다. 북한 남성들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은 기본으로 멋진 외모까지 갖춘 남성으로 등장한다. 저자는 그런 변화에 영화의 주소비층인 젊은 여성들의 욕망, 북한 남성 판타지가 숨어 있다고 말한다. 젠더의식이든 이데올로기든 그것을 뛰어넘는 것은 늘 자본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자본주의가 강자다. 이데올로기를 전환시키는 그 탁월함.

  

우리가 본 영화는 우리의 인생과 붙어 있다. 몸으로 영화를 본다. 영화의 내용은 감독의 ‘연출 의도’가 아니라 관객의 세계관에 달려 있다. 누구나 자기의 삶만큼 보는 것이다.


  영화에서 저자가 집어내는 상처와 문제들은 대부분 젠더 문제로 귀결된다. 저자의 말처럼 영화를 보는 내내 저자가 살아온 삶이 어디에 머무는가를 보여준다. 타이타닉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장면이 화로에 끊임없이 석탄을 넣고 있는 노동자라고 말했던 운동권 선배의 시선을 떠올린다. 나는 책이든 영화든 이 사회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때그때 달라요… 그래도 책을 읽고 생각을 주절거리는 것이 인식 확장을 위한 노력의 한방편이라 생각하며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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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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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를 기다리며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문학동네, 201.


  요즘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이 책 제목만큼 절실한 문장이 있을까 싶다. 최근 몇 년 사이 어떻게 페미니즘이 흘러왔는지는 옆눈으로 보았다 해도 알만큼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었다. 지금도 사건들의 줄잇기는 마찬가지지만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논의는 더욱 거세질 듯하다.

  페미니스트이자 사회운동가 벨 훅스 역시도 모든 페미니스트가 주장하듯이 페미니즘은 ‘남성혐오운동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외쳐왔듯 단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라고 거듭 외친다. 벨 훅스처럼 거의 모든 페미니즘 운동가들이 페미니즘이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고 더더욱 남성을 역차별하자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 무엇에 의해서도 억압받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아가기 위해 함께 하자는 것이라고 부르짖는데도 어찌하여 페미니즘은 자꾸 여성만을 위한, 남성을 혐오하는 운동이란 이미지로 굳어가고 있는 걸까. 더 이상의 공감도 더 이상의 연대도 필요치 않는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감과 혐오가 자고 일어나면 쌓여만 간다.

  벨 훅스는 자신이 페미니즘에 관해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늘 이렇게 이야기하곤 한다고 말한다. “당신은 남성을 혐오하고 늘 화가 나 있는 ‘진짜’ 페미니스트 같지 않다고, 당신은 다른 것 같다고.”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벨 훅스와 같은 말을 들은 일이 적지 않음을 고백한다. 이쯤되면 페미니스트들에게 고정된 편견이 가득히 덧씌워져 있거나 그들 운동 방식의 전략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소위’ 페미니즘 시위에 대한 우려와 반감은 어쩌면 이 시위야말로 페미니스트에 대해 가지는 고정관념과 편견에 찬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제야 ‘진짜 페미니스트가 나타났다’고 외칠지도 모른다. 저 멀리 떨어져서 말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으로 갑자기 페미니즘 서적 또한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왔다. 거기서 거기인 이야기들을 하고 있어서 흥미를 떨어뜨렸고 분위기에 편승하려는 출판사들이 쏟아낸 책으로 인해 페미니즘이 가볍게 다뤄지고 여겨지는 것 같아 우려되기도 했다. 그래도 이만큼이나 관심도가 증가되었다면 페미니즘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는 확산되었으리라 했는데 그것이 아님을, 그렇지 못함을, 오히려 지금까지 있었던 관심이 좋지 못한 쪽으로 이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짜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기껏 먼발치서 인터넷 기사를 클릭하며 가지는 감정인데 현장에, 보다 가까이에 있는 이들의 시각은 어떨까.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이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이에 대해 알지 못한다. 직접 운동을 이끄는 축에 있지 않고 그저 페미니즘 서적을 들척이고 좋은 의견에 동조하고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의견에 반대할 뿐인 일반인으로서의 내 목소리는 어쩌면 페미니즘 운동사에 전혀 가닿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건대 페미니즘은 운동가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차별과 억압받지 않고 산다는 것은 나에게도 필요한 일이기에 시선을 거둘 수는 없는 일이다.

  정말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없는가. 지금처럼 이렇게 충격적인 일이 가득한 시위의 현장을 기사로 접하면 정말로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특정한 이들의 전유물’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니면 정말로 페미니즘 운동이 아니라 다른 세력인 것인가. 많은 이들에게 생존과 존재 자체로서의 삶이 걸린 페미니즘이 왜 희화화되는지, 왜 일베스러워졌는지가 의아할 뿐이다. 이런 형태로 페미니즘은 나아가는 것일까. 

  다른 책들에 비해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흥미로웠던 건 편하게 읽힌다는 점 이외에 그동안의 페미니즘의 논쟁, 각기 주력하여 주장하는 바가 달랐던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소개하고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개되어온 페미니즘 이론과 페미니스트들의 투쟁 노선과 방법들은 직접 현장에 있지 않았다면 잘 알지 못했을 세세한 부분에서의 문제점을 벨 훅스는 잘 지적하고 있다. 다양한 페미니즘 이론의 역학 속에서 페미니즘이 변화·성장하여 오늘에 이르렀겠지만 분명 그로 인한 한계가 있었고 여전히 지속되는 한계가 있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혜화역의 시위가 그저 페미니스트들 간의 이론과 투쟁 방법상의 차이가 있고 특정 계파의 투쟁방법이 대두되었다고 하기엔 그동안 페미니즘이 이루어낸 역사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은 분명하다. 문제는 이 방식이 과연 페미니즘인가의 의문과 함께 그렇다면 왜, 그 방식이 선택되고 이루어지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왜, 한국에서의 페미니즘 운동의 방식은 이렇게 혐오에 기반하여 달려가고 있는가.


한쪽에서는 캐럴 길리건 같은 페미니즘 사상가들이 질리지도 않고 여성이 더 다정하고 더 윤리적이라고 말했지만, 여성들이 자신보다 더 힘없는 다른 여성들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도무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여성들이 자신이 속한 정체성이라 생각하는 같은 민족이나 인종 집단에 보이는 보살핌의 윤리는, 그들이 공감할 수 없고 동질성이나 연대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최근 시위에서 자신이 속한 집단(까페)의 정체성과 다른 이들에게 가하는 행동을 보면 도무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페미니즘, 성차별 철폐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오로지 혐오만이 목소리 높다. 페미니즘이 목적이 아니라 조롱 자체가 목적이 된 듯한 생각마저도 든다. 지금의 페미니즘 운동이 흘러가는 방향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많은 이들이 지향하는 바일까. 이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이렇게 흘러가는 이유가 페미니즘을 이끌어갈 운동 세력의 리더가 부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촛불혁명을 거치며 특정 리더가 아니라 자발적인 시민의 의식이 의견을 형성하고 주장을 높이는 형태가 여성운동에서만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인가.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데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운동의 선구적인 페미니즘 이론이 운동의 방식이 이것을 이끌어갈 주체가 격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 외면받고 비난받는 운동이 되기엔 차별의 역사는 너무나 길었다. 그리고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한 살아야 할 생이 아직 너무도 많다. 그러기에 벨 훅스의 주장처럼 우리나라에도 워마드가 이끌어가는 운동이, 시위가 아니라 합리적이면서 모두에게 공감을 이끌어가는 페미니즘 운동이 확산되기를 바란다. 존경받는 페미니스트의 존재가 보고프다.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장내기 위한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은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비록 대중 기반의 운동 역량은 갖추지 못했지만 그러한 방향으로 운동을 새롭게 시작하는 게 우리의 첫번째 목표다. 우리 삶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선구적인 페미니즘 이론은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 우리의 현재를 고심하게끔 끊임없이 생산되고 재생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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