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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 그람시 산문선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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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탈리아에는 피자, 한국에는 파전



  사상가, 정치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잡지 연재, 강연, 의회 의사 진행 발언을 모은 100년 전 글을 읽는다. 활자화 된 년도를 보고서도 1917년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람시가 현재 이 세상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먹는다. 이탈리아라는 것을 알면서도 책 속의 이야긴 이탈리아가 아니다.

 

 “우리는 앞으로 20년 동안 이 위험한 두뇌를 사용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저런 주장을 하며 심지어는 그에 따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검사는 재판에서 이렇게 말했고 사법부는 20년 4개월하고도 5일의 형을 확정했다. 유치하고 치졸하다기보다 글만으로도 그람시에 대한 파시스트 정권의 공포가 느껴진다. 하지만 그람시의 두뇌는 옥중에서도 잘 작동되었고 그가 옥중에서 쓴 글들은 수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탈리아를 넘어 전 세계에 널리 읽혀지고 있다.

  오늘날에도 자칫하다가는 여론의 뭇매를 맞을 지 모를 ‘증오’란 단어가 들어간 책제목을 보면서 역시나 ‘공산주의는, 사회주의는 과격해’라는 피상적인 도식을 적용하며 공격할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관심’은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무정물이며 그것이 활용되는 방식에 의해 무관심의 가치와 위치가 정해진다. 분명 그람시는 이 무관심을 활용하는 ‘사람’에 대해 증오한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은 살아 있고 삶에 참여하는 인간이기에 삶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 무관심한 사람을 증오한다고. 

  나는 많이 지쳐 증오할 힘마저도 잃어버렸다. 한때는 무관심이 가장 문제라며 부르르 떨기도 했지만 점점 무관심에 종속되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생각하길, 무관심하지 않다가 활동과는 무관한 ‘눈팅’인 것 역시 무관심에 속하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4~5년에 한번 있는 투표활동만으로 나, 무관심하지 않소라고 하기엔 턱없어 보인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늘 따라 다니지만 무엇을 하기도 무엇을 해야 할지도 결정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간다. 그람시의 “진보라는 현상은 일반적으로 많은 개인들이 하나의 정의로운 행동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을 되새기면 무관심뿐만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고, 그리고 실질적인 활동이 필요함을, 사상가들이 늘 강조하는 말들이 이것임을 반복적으로 습득하게 된다.

  100년 전 민중의 정치적 무관심이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발현하고 더욱 더 공고히 했다고 그람시는 말한다. 독재정권에 맞서 열렬히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애쓴 무관심하지 않은 이들이 바꾼 대한민국은 지금 어떻게 되고 있나. 무관심한 이들이 다시 바꿔 놓았다. 그람시가 정의한 ‘무책임하며 언제나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참여하지 않으며 역사 속에서 미래를 만들어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그런 일들은 ‘따로 누군가가 할 일’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길들여 온 사람들이.

  그 사람들 속에 속하지 않기 위해 머리로는 많은 생각들을 한다. 무엇을 해야 할까, 뭘 어떻게 해야 할까, 할 일은 너무나도 많아 뭘 해야 할지 우왕좌왕하다가 또 어떤 날은 끝없는 한숨 속에 놓인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놓아 버린 지가 오래되어서일까.

  

  이탈리아에는 피자, 한국에는 파전

  이탈리아에는 마피아, 한국에는 조폭

  이탈리아에는 파시즘, 한국에는 유신

  이탈리아에는 무솔리니, 한국에는.......

  이탈리아의 무관심, 한국의 무관심


  철학자 크로체는 ‘역사’가 항상 ‘동시대적’이라고 했다. 100년 전의 이탈리아의 역사가 대한민국에서 재생되고 있다.


‘독재’라는 단어를 못 쓰도록 하며, 다시는 쓰지 못하여 저절로 사라지게 하려고 한다. 독재라는 단어를 다른 단어, 예를 들면 ‘불가피함’이나 우국, 애국 등의 ‘민감한’ 단어들로 대체하려고 한다.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역사로 탈바꿈하고자 하는 이들이 바로 독재자이다. p121


   민중이 이룩한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선 무관심해서는 안된다고, 무기력하고 기생적이며 비겁한 무관심에 길들여져 가면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가 피해자가 되는 일이라고 그람시는 말한다. 그러니까,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셈이다. 내 삶의 주인이 되지 않아, 그렇게 만드는데 공을 세운 이들을 위해 내가 가해자가 되어 간다는 생각을 하며 그람시의 증오를 받지 않기 위해 무관심에서 벗어날 방법을 힘껏 찾아야 할 시기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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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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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용돌이에 잠기는 것이 아닌가

 

새로운 계급투쟁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한 세기를 풍미했고 여전한 지속성이 있는 계급투쟁. 지금 다시, 계급투쟁에 대한 지젝의 선언은 어디서, 무엇에서 출발한 것일까. 무엇이 새로운 계급투쟁의 상황을 만들고 있는가. 모두가 눈에 본 사건은 유럽 사회에 발생한 테러와 난민 행렬이다. 지속적인 이슬람 테러 위협과 난민 증가라는 문제에 쌓인 유럽은 이 위기상황을 분석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있지만 지젝이 보기에 원인은 분명하다. 이것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한 징후이며 문제의 핵심은 ‘계급투쟁’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을 이 책에서 구체적이고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다.

 

서구 생활방식을 뒤흔들고 있는 진짜 위협은 이민자가 아닌 글로벌 자본주의의 동력이다. 미국만 하더라도 중소도시에서 일어난 최근의 경제적 변화는 이민자 전체가 미친 영향보다 더 크게 공동체를 파괴했다! p24

 

우리는 무엇이, 그리고 누가 난민을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만들었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첫 단계는 당연히 글로벌 자본주의의 동력과 군사개입 과정에서 난민 발생의 원인을 찾는 일이다. 이 시대의 민낯인 ‘신 세계질서’의 지속적 혼란이 난민 발생의 진원지이기 때문이다. p53

 

   아프리카의 경우 전쟁은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공권력이 붕괴한 때문이며 이것은 세계적 정치-경제의 결과이자 서구 자본주의가 개입한 결과이기도 하다. 결국 서구사회가 난민 발생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난민은 전쟁을 피해 보다 잘 살 수 있기를 희망하며 제 나라를 떠나지만 서구사회는 이들의 유입에 위협을 느끼며 난민을 극렬히 거부하거나 또는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던진다.

   모두가 희망하건대 더 좋은 세상, 더 나은 세상을 꿈꾸지만 현실은 전혀 유토피아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가난과 고통과 위험과 같은 힘든 상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하는 이유가 된다. 있지 않거나 혹은 그러한 곳일까를 찾으러 다니기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지 못할 이유는 무어란 말인가!

   여기에 지젝이 제시하는 해답이 있다. 현실을 바꾸자고. 이 모든 불운한 상황을 빚어내는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해 대항할 필요가 있다고. 그것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계급투쟁이며 연대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막다른 골목에 봉착했음이 갈수록 분명해지는 지금 그동안 꿈꿔온 ‘아래로부터의’ 다양한 풀뿌리 민주화운동을 통한 모든 변화의 시도 역시 결국 실패할 운명이다. 그러므로 글로벌 자본주의의 악순환을 효과적으로 끊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일종의 ‘군사화’다. 이는 자율규제 경제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다른 이름이다. p103

 

   여러 난관은 있다. 지금처럼 이슬람에 대한 혐오적인 반응이나 정치적인 논리로 수를 재는 상황에서는 과연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을까. 무조건적인 수용이나 무조건적인 비판이 가져오는 것은 한계일 수밖에 없다. 우리 속에 내재한 금기들을 인식하고 그것을 제거할 필요가 있지만 그것이 ‘서구’의 것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젝은 모두가 의무적으로 지킬 최소한의 규범, 대표적으로 종교의 자유, 집단적 폭력에 대항하는 개인적 자유의 보호, 여성 인권 등,을 만드는 것과 이 제한 내에서 상이한 생활방식에 무조건적 관용을 행해야 한다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종교와 인종으로 문제의 본질을 비켜가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난민 문제의 발생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바로, 난민의 주원인이 글로벌 자본주의와 그를 둘러싼 역학관계라는 것을. 그렇기에 이것은 공동의 문제라는 것을. 함께 투쟁해야 하는 것임을.

 

이제 우리는 계급투쟁을 다시 의제로 삼아야만 한다. 이를 수행할 유일한 길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세계적 연대를 강조하는 것뿐이다. p117

 

   결국 그렇다. 이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를 계속 들여다보면 남는 것은 자본주의와 계급문제다. 교묘하게 피해가고 덮어두기 위해 애를 쓰지만 불쌍하게도 모든 원흉은 자본주의로 귀결되고 마는 것을 보면 그 엄청난 위력을 다시금 실감한다. 하지만 어제도 그제도 그랬듯이 우리는 항상 알고 있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원인이 그렇다는 것을, 그래서 함께 우리 모두 함께 해 나가야 한다고 수많은 사상가들이, 아니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들이 외쳐왔고 행동해왔다. 스테판 에셀로 분노하고 참여하고 공감하자고 말하지 않았던가.수많은 이들의 목소리와 행동은 넘쳐나는데, 왜 문제의 원인은 제거되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세를 과시하고 있는 걸까. 어쩔 땐 이런 책들을 읽으면 힘이 빠지기도 한다. 늘 그러니까. 원인은 아는데 해결방안도 아는데, 문제를 못 풀고 있는 것 같아서. 앞으로도 계속 이 소용돌이에 빠진 채 잠기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에.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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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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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자꾸 내게 이야기하려 한다...

 

 

   아, 살구. 알 수 없는 이해와 감정이입으로 나는 거듭 그녀의 여행에 함께 했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소제목처럼 돌고 돌아 되돌아오는 그 여정에 그녀가 거두고 그녀가 만들어낸 살구와 함께 했다. 아이슬란드의 기후처럼 차가운 살가움, 서리진 추위가 빚어내는 정화(淨化)의 기운이 그녀의 글 속에 스며있었다. 한마디로 단정할 수 없는 감정이 물밀듯이 흘러나왔다.

   맨스플레인의 창시자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책을 통해 그녀를 알고 그 책의 문체와 어조를 예상하고 있었기에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내가 아는 작가가 맞는지를 거듭 확인했다. 마치 오전에는 에너지 넘치는 강의를 듣다가 늦은 밤 사막 한가운데서 별을 보며 자신의 속내를 내비치는 그녀와 마주한 느낌이었다. 더 깊은 인생의 대비가 통찰의 환희가 사유의 고뇌가 이해의 갈망이 그녀의 문장 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흑백 사진의 여백은 마음을 먹먹하게 했고 까닭모르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 먼 나라의 그녀에게서 나는 어린 시절의 그녀를 듣는다. 어깨를 늘어뜨린 채 책다발을 한아름 지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나비가 살짝 와서 머무를 것이다. 그 가벼운 위로의 날개짓을 보지 못한 채 그녀는 두려움을 안고서 더 깊이 더 깊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다. 어느 순간 헤매었을지언정 미로 속에서 길로 인도하는 끝없는 이야기를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다시 되돌아 나오면 되었다. 그 되돌아오기를 결정하는 때가 그녀가 말한 그 순간은 아닐까.

 

유한한 덧없음, 불확실성, 고통, 변화의 가능성 같은 것이 찾아와 삶을 그 전과 후로 나누어 버리는 때가 있다. 수없이 들은 사실과 생각이, 생생하고 급박하고 실감나는 현실이 되는 순간(p223)."

 

   그녀는 많은 슬픈 이야기들을 알고 있다. 그녀의 슬픔은 미로 속에서 같이 헤매었고 저 먼 아이슬란드 바다 위에서 서린 얼음 위에 올려놓고 마주한다. 어쩌면 여행을 떠나는 시초가 되었을지 모를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어머니와의 관계와 애증의 더미가 얼음 위에서 점차 소멸해 간다. 거울과 같이 투명한 그 얼음 속에서 그녀가 자아를 찾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던 노력이 있었기에 그러하다. 그녀는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선택하기 위해 살구더미를 받아들였던 것처럼 그녀의 삶에서 좋은 기억들을 촘촘히 만들어냈다.

 

 

우리가 보기에 다리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걷기에 필요한 기술과 확신, 그리고 걸으려는 의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그렇게 천천히 알려지지 않는 존재로, 알 수 없는 존재로 변해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리고 기술이나 사실들을 잃어버렸음에도 자아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지, 기능을 잃어버린 자아의 가치란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p337).

 

   그녀의 사유는 우리가 삶에서 겪는 그 모든 이야기들이 있다. 어느 누구도 삶의 이 내용들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말할 수 없다. 인생에서 겪는 고통과 질병과 고독과 이별과 단절과 반목들. 또한 사랑과 이해와 용서의 단지, 우리와 그녀의 사유의 방식과 사유의 방향이 조금 달랐달까. 어느 누구나 삶을 바라보는 생각의 방식은 있다. 그것에 반응하는 감정의 반향은 있다. 어떠한 결론을 만들어가든, 그녀가 걷는 사유의 길을 같이 걸어 보기를.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좋다.

 

  누가 당신의 말을 듣는가. 할 말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들려진다는 것은 말 그대로 듣는 이의 귀에서 머리까지 이어진 미로를 여행하는 공기의 울림이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두운 통로에서는 더 많은 일이 벌어진다. 당신은 당신의 욕망과 필요 혹은 관심에 부합하는 것을 선택하여 듣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화가 너무 잘 통하는 세상은 삶을 온통 편안한 것과 익숙한 것만 비춰 주는 겨울로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고, 그 반대의 세상에도 마찬가지로 위험은 있다. 주의해서 귀를 기울이자(p283~284).

 

   그녀는 계속 이야기하고 나는 듣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녀의 이야기처럼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이야기 속에 숨겨진 정화의 힘을 믿는다. 그녀는 내게도 이야기하라고 건넨다. 그녀의 이야기를 건네며 너도 감정의 정화 속에 참여하라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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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도덕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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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제도를 만들고 제도는 사람의 관념을 지배하고


  시대를 떠나 결혼과 도덕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가 있으리라는 것, 그것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일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에 관한 ‘절대적’인 것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할까. 1929년의 사회에서 결혼과 도덕에 대해 생각한 러셀은 ‘절대적’이라 간주되어 온 것에 대해서 의문을 표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결혼과 도덕에 대한 관점이 달라져 왔으며 왜 달라져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말한다. 다양한 방면에서 탁월한 활동으로 업적이 드높은 러셀이 1929년이라는 시대적 혼란의 시기에 다른 무엇보다 결혼제도에 관해 진지하게 고찰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풍요와 낭만의 시대가 아닌 전세계에 우울과 상흔이 휩쓸던 그 시기에. 

  어쩌면 혼란과 위기의 사회를 안정화시킬 수 있는 것은 우선 개인, 가정(가족) 단위의 힘에서 발전될 수 있으리라 여겼을지 모른다. “사랑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인생을 두려워하고, 인생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미 거의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p253)”라고 말하는 러셀이라면 충분히 그런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특히나 러셀이 사회(고대이든 현대이든)는 경제와 가족 또는 성적인 요인이 긴밀하게 얽혀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사회의 발전과 가족제도의 발전이 상호적이며 그렇기에 가족제도에 대한 고찰은 사회적 고찰과도 연계된다. 그러니까 이에 관한 논의는 협의적이라기보다 광의의 의미를 가진 성찰이었다.

  러셀에 따르면 모든 나라의 성 윤리와 제도는 어느 정도 미신과 전통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 즉, 꼭 합리적인 형태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한 건, 사회의 변화에 따라 제도가 변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낡은’ 것에 대해서는 수정이 필요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인식을 달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러셀에게 있어 “사랑은 인간의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제도를 만들지만, 분명 제도가 사람의 관념을 형성하는 측면이 있기에 타당치 못한 인습이 어째서 그런 것인지를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낡은 도덕률을 새로운 도덕률로 교체하는 경우에는, 의식적 사고를 구성하는 인격의 최상층에서만이 아니라, 인격의 모든 구성 부분에서 새로운 도덕률이 수용될 때에만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유년기 내내 낡은 도덕을 접해 온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하기가 무척 어렵다. 따라서 유년기부터 새로운 도덕을 배우지 않은 사람은 새로운 도덕에 대해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p277).


  그런 점에서 “빵을 굽는 유일한 이유가 사람들이 케이크를 훔치는 것을 막는 데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든 성 바울의 성윤리에 대한 관점은 무엇을 낡은 것으로 보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결혼은 마냥 낭만적인 것이 아니며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또한 어느 지역의 사례를 보건대 모성이나 부성은 본능적인 것이 아니며 성행위 또한 그렇다고 지적한다. 역사적으로 성윤리가 사랑을 오히려 구속하고 억압하는 측면이 적지 않았다. 특히나 종교가 금욕주의를 강요하며 성은 죄악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하지만 피임법의 발전과 여성해방사상 등의 사회변화에 맞물려 사람들의 인식은 점차로 변화되어 가고 있고 가족제도에서 부모의 역할을 국가가 대신하는 상황도 증가하고 있다.

  사회의 변화에 미신적인 사고로 인한 제도적인 제약이 가해지는 것은 개인의 자유로운 사랑과 결혼을 저해함과 동시에 사회에도 영향을 미친다. 러셀이 자유로운 사랑과 결혼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적인 방종과 책임의 부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러셀은 오히려 ‘자녀출산’이라는 면에서 결혼과 이혼은 더욱 신중해야 한다고 보며, 자녀 출산을 목적으로 결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남녀가 자식을 낳지 않고 살기로 결정한 경우라면 타인이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러셀은 당시 린지 판사의 우애결혼compnionate marriage에 동조하는데 이 결혼이 일반적인 결혼과 구별되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분간은 아이를 낳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가장 편리한 피임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 둘째, 출생한 아이가 없고 아내가 임신한 상태도 아닌 경우에는 합의에 의한 이혼이 가능해야 한다. 셋째, 이혼을 할 경우 아내가 이혼 부양료를 받을 권리가 인정되지 않아야 한다. 이 제도가 법률에 의해서 확립되면, 상당히 많은 젊은이들이 주신제와 같이 난잡한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 공동생활을 수반하는 상당히 지속적인 배우자 관계를 맺으리라고 주장한다(p147).


  이러한 주장을 하는 러셀이 생각하는 행복한 결혼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행복한 결혼 생활의 정수는 서로 인격을 존중하고, 육체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깊이 있는 친밀감을 유지하는 데 있다. 이런 요건들이 충족될 때 남녀 간의 진지한 사랑은 인간의 모든 체험 가운데서 가장 풍요로운 것이 된다. 이런 사랑은 모든 위대하고 귀중한 것들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의 도덕을 필요로 하며, 더 큰 것을 위해서 작은 것을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런 희생은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희생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사랑의 토대 자체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p281).


  사소한 부분, 방법이나 인습수준 등에서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행복한 결혼에 대해서 굳이 견해를 달리한다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공감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방법적인 측면이다. 러셀이 이미 보편적인 의견에 자신의 견해를 더해 행복한 결혼을 위한 방법을 제시했다면 이제 그 의견에 동의하거나 또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될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해 그 방법적인 부분은 다양한 논의를 통해 더욱 확대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변화에 맞추어 낡은 ‘제도’의 수정이 필요하리라는 그리고 그 제도에 고착화되어 버린 ‘낡은’ ‘비합리적’ 인습에 수정이 필요하리라는 것 또한 공감하리라 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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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의 항해저 너머'를 향한 대담한 탐험

 

월리엄 M. 레디, 문학과 지성사, 2016. 3.

 



 

  감정은 사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으로서 이런 책이 출간된 것이 기쁘다. 감정과 이성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한들 그래 네 생각이야, 라고 끝내 버려 안타까웠다.

  이런 나의 안타까움을 알아보기라도 한듯 저자는, 그것도 역사학과 인류학 교수이신, 최근의 감정연구를 분석하여 새로운 이론틀을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다. 일단, 저자 역시 감정이 생각과 완전히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저자의 이론을 제시하는데 있어 '역사'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 혁명시기를 예로 들어 그가 주장하는 감정의 세계에 이성적으로 빠져보자.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그람시 산문선

 

안토니오 그람시, 바다출판사, 2016. 3.





  “4.13 선거가 다가오는구나!!!!

 

 그람시는 이탈리아에 파시즘이 자리잡은 요인을 민중의 정치적 무관심이라 지적했다. 이 말에 공감하면서도 우리는 자연적으로 무관심해지고 있다. 정치가 민중들로 하여금 '무관심'을 택하게 만드는 전략을 세우고 있는 듯도 하다. 그렇담 우리나라의 정치가들은 뛰어난 정치력을 가진 이들이 아닌가!

 선가가 다가오고 있다. 정치에 질려버린 피로해진 사람들이 정치에서 희망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는 이때, 그람시의 산문은 어떤 힘을, 행동력을 키워줄까.

 타인의 무관심으로 내 삶이 큰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나에게 관심을 꺼달라고요!와 당신의 무관심이 나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구요!라는 맥락은 다르다. 

 파시즘의 이탈리아 상황이 1900년대 초반이건만 2016년의 대한민국은 허구헌날 과거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4.13일은 선거일이다.

 

 

 

 

나쁜 페미니스트-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사이행성, 2016. 3.

 



  페미니스트는 그렇다. 페미니스트라고 쉽게, 외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또 생각해보면 페미니스트는 뭐지? 페미니즘은 뭐지?라는 생각이 맞물린다. 대한민국에 페미니즘이 너무나 왜곡되어 인식되어 있는 까닭이다. 하긴 오죽하면 여성 국회의원조차도 국회의원이 되려면 멍청(?)해 보여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일삼는 나라인데...오죽하랴.

 

 저자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데 대한 여러 문제들을 지적하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데 있어서는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건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누구이고 어떻게 이 세상을 헤쳐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편에 선다는 의미이며 그러므로 스스로를 나쁜 페미니스트라 인정하고 다른 나쁜 페미니스트를 이해라려 노력하자고 말한다.

 

 

 

동성결혼은 사회를 어떻게 바꾸는가

 

리 배지트, 민음사, 2016. 3.

 

 


  동성결혼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분여 있다. 그것이 무엇이고 어떤 방향인가가 관건이 될 것이다. 이 책은 동성결혼을 허용하면 될지 말지, 허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에 대한 논의의 책이 아니다.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지에 관한 책이다.나는 사회를 바꾸고 싶나? 왜 이렇게 사회가 바뀌는 형태에 관심이 달려가는 걸까......

 저자는 동성 결혼을 경험한 국가가 겪은 사회문화적 변이 양상을 실증하는 연구로 이러한 물음에 접근한다. 말많은 결혼과 그에 더 나아간 동성결혼. 정말로 논쟁들처럼 동성결혼은 사회악을 불러왔는지 아닌지, 이 책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카라바조, 이중성의 살인미학

 

김상근, 21세기북스, 2016. 3.

 

 

 화가들마다 자신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카라바조도 독특한 세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인상주의나 낭만주의적 그림들에 열광하는 분위기를 보건대 그의 그림은 또한 섬뜩하니까. 살인자에 도망자라는 개인의 이력이 더해져서 더욱 그렇게 보일지도.

 카라바조의 그림을 통해 당시의 세계를 읽어내는 책이다. 카라바조는 르테상스와 종교개혁 시기의 삶을 살았던 화가다. 그림에 대한 새로운 기법은 잘 모르겠고 그의 삶과 그의 예술적 정신에 대한 이야기, 혼돈의 시기에 그림을 통해 어떤 정신을 말하고자 했는지 그 살인미학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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