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1. 당신의 시선은 어디에 머무는가

 

 

 *시녀들 (라스 메니나스)

 *디에고 벨라스케스 (Don Diego Rodriguez da Silva y Velasquez)

 *316 x 276 cm,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소장

 *출처) Naver 미술정보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vs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시선은 머무는 곳이다.

  길을 걷다 보면 너무도 익숙한 풍경에 걸음이 멈춰질 때가 있다. 그러나 너무도 낯선 풍경에도 걸음은 멈춰진다. 익숙함과 낯섦은 각각의 특성으로 시선을 끈다. 그리나 조금 더 길게 걸음을 붙잡아두는 것은 어떤 풍경일까. 되돌아 시선이 오래도록 머무는 것은 어떤 풍경일까. 나의 발걸음은 나의 시선은, 익숙함과 낯섦에 반응하며 나를 이끈다.

  그림이 있다. 아마도 난 그림을 지나쳐갈 지도 모르겠다. ‘난 그림보는 눈이 없어서’. 어쩌면 나는 그림을 바라볼 지도 모르겠다. ‘저 그림 엄청 유명해, 유명한 화가가 그린 거래’. 어쩌면 나는 그림을 보고 있지만 전문가들이 말한 특징을 찾아 줄을 긋고 있을지 모르겠다. 해결해야 할 일을 해치우듯이. 나는 제대로 그림을 본 걸까.

  나는 다시 걸음을 돌려 하나의 그림을 본다.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squez)의 시녀들(Las Meninas) 속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 자신도 등장한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화풍은 무엇인지, 잘 그렸다는 것은 무언지를 생각하는 동안의 나는 분명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문제와 그 해답을 제대로 외웠는지를 확인하고 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포인트는 이거야를 확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런 지식없이, 아무런 편견없이 이 그림을 보았다면 어디에 초점을 맞추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내가 추구하는 가치에 의해 확립될 것이다. 천차만별인 가치에 우위를 정하는 것은 상대적이겠지만 보편타당함을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은 절대적이다. 다양한 가치들의 싸움에서 어떤 것을 우선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점점 사람을 본다거나 함께 하는 사회에 대한 것보다는 자본주의의 시장질서에 맞는 형태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듯 보인다. 점점 세상은 경쟁과 차별이 당연시되고 ‘살아가기 위한’ 가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가치를 찾고 있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보게 되었다. 인터넷에서 미술책에서 이 그림은 그림으로만 보였다. 그러나 넓은 미술관에서 내 키보다 큰 커다란 그림을 마주했을 때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그림 속의 인물들을 보고 있었다. 하나의 사회, 수많은 사람들 속의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때 떠오른 책이 바로 이 두 책이다.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그리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이 책의 저자들이 그림에서 본 것은 일반적이지 않은 시선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런 시선들로 세상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세상살이에 익숙해져 한번씩 외치지만 평소에는 늘 뒷전에 두는 그런 마음들. 그것이 조금 더 소리를 높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어떤 ‘시선’을 가지고 있는가가 결국 이 사회를 살아가는 방식을 규정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그림이 처음부터 시녀들이라는 제목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화가 자신이 붙인 제목도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점차 이 그림을 ‘평’하는 이들에 의해 그림에 대한 초점도 달라졌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물론 화가의 의도를 진지하게 찾았겠지만. 밝은 드레스와 금발로 빛을 받고 있는 공주와 많은 사람들이 그림 속에 있다. 사람들은 이 그림 속에서 누구에, 무엇에 관심을 가지게 될까. 뒤돌아서서도 생각나게 만드는 장면은 무엇일까.  책의 저자들은 각각 그림 속 다른 이에게 초점을 맞춘다.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이들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저기 앉아 있는 개라고?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의 작가 라헐판 코에이가 그렇다. 작가는 저 그림 속으로 들어가 개를 감싼다. 저 개는 개가 아니라고. 이름은 바르톨로메, 어린 소년이라고.

  스페인의 왕 펠리페 4세가 통치하던 17세기에도 지금과 달라지지 않은 점이 있다면 “너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야, 알겠니?”라는 말의 울림이다.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지성과 의식수준이 높아지고 생활여건이 좋아졌다는 현재에도라고 해야 할까. 저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때론 의지와 다짐의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절실히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음을 기저에 두고 있다는 것을.

 

    마드리드에 가면 매일 보게 될 왕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는 듯했다. 이 아이들에게 마드리드는 희망의 도시이자 기회의 땅이었다. 바르톨로메에게만 아니었다. 후안은 그런 대도시에서 병신들이 얼마나 심한 차별을 받고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불구자는 이 곳 마을처럼 단순히 구경거리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한테서 침 세례를 받고 갖은 수모를 당했다(p28)


 

   먹을 것이 풍족하다고 해서 지상낙원이 되지는 않는다. 정신적인 풍요가 없다면 말이다. 농촌에 비해 물자가 풍요로운 도시 마드리드가 그랬다. 조롱과 멸시는 곱추 바르톨로메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니 조롱과 멸시로부터 안전한 방법은 존재를 숨김으로써다. 안타깝게도 그의 숨김이 가장 우스꽝스러운 상태로 해제되었을 때 바르톨로메는 최고 권력의 눈에 띄었다. 5살 마르가리타 공주는 바르톨로메를 개, 인간개라고 표현했다. 이후 바르톨로메는 ‘개’가 되어 공주의 장난감으로 살아야 했다. 자신을 장난감으로 만든 공주에게 귀염을 받는 것만이 오히려 편안한 삶을 살게 되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당연 인간이 개가 아닐진대 개처럼 한다는 것은 육체적인 피로가 따르고 그보다 더 크나큰 정신적인 고통이 뒤따른다.

   그림 속엔 바르톨로메와 같이 장애인이 나온다. 그들도 바르톨로메에게는 못 미치는(적어도 그들은 개가 아니라 사람이니까) 차별을 겪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바르톨로메를 힘들게 괴롭히는 이들은 같은 장애인들이다. 다른 이들이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낄 때 오히려 이들은 바르톨로메를 경계한다. 못난이 난쟁이라 불리는 마리에 바르볼라나 난쟁이 니콜라시토를 보면 순응한 자의 행동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공주의 귀염을 차지하는 바르톨로메에게 위협을 느끼며 자신들의 위치가 변화될까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을 그저 바르톨로메를 제거(죽인다는 의미는 아니다)하려는 데 쓰는 니콜라시토의 모습은 그림 속 바르톨로메에게 발을 올리고 있는 모습에서도 보인다. 오로지 권력자의 말 한마디가 중요한 세상에서 살기 위한 본능적인 체득은 권력자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임을 철저하게 실현하는 그들에게 안타까움과 분노가 함께 느껴진다.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이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가장 큰 이해를 해주리라는 기대가 무너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순응한 자, 마리에 바르볼라의 말에서 그녀가 견디는 삶의 모습에, 그럴 수밖에 없음에 연민을 느낀다. 

 

잘사는 왕족들의 놀이에 끼여 함께 논다고 생각해. 너무 마음 쓰지 마. 네 일만 제대로 잘하고,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면 여기 궁중에서도 아무 근심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해 봐. 그냥 연극이라고. 넌 그 연극의 주인공이야!(p201)

  그래, 삶이 연극이라면 시간이 정해져 곧 막이 내려질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더구나 고통스런 상황에서라면 더욱 더. 하지만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삶에서 언제까지고 가장 비참한 역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배역을 바꾸어야 한다. 그 배역을 바꾸기 위한 첫걸음이 자신이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다. 바르톨로메는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화가가 되는 일이다.

 

 프레하 : 바르톨로메. 너는 절대 화가가 될 수 없다. 우리 같은 흑인이나 노예, 난쟁이들은 사회 주변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일반인들과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리는 조합이나 단체에 가입할 수도 없고, 출세나 성공 같은 건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고 이 사회에 조그마한 도움이 되는 한 그저 우리를 참아줄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르톨로메 : 상관없어요!

 프레하 : 상관없는 게 아냐! 네 것이 되지 않을 것을 위해 하루 종일 일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니? 남들로부터 솜씨를 인정받으면서도 네가 심혈을 다해 그린 그림에는 낯선 사람들의 인장이 찍히고, 낯선 사람의 이름이 붙을 것이다.

 바르톨로메 : 프레하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이제껏 제 자신이었던 적이 없었던 과거보다는 백배 더 나아요. 저는 화가가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p273)


 

  바르톨로메는 ‘개’에서 ‘사람’이 되는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바르톨로메가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의 도움과 노력으로 ‘개의 삶’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자신이 살고 싶어 하는 삶에 대한 의지를 표한다. 물론 여전히 바르톨로메의 삶은 제한적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배역을 바꾸기를 원했고 ‘누군가’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첫 단계로 나아가기 원했다. 개가죽을 뒤집어쓰고 개처럼 헉헉거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바르톨로메로 돌아오기 위한 과정은 안타깝게도 바르톨로메 혼자서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람인 바르톨로메가 곱추라는 이유로 개가 되어야 하는 것에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생각과 그 부당함을 행동으로 보여준 사람들의 연대가 이루어낸 것이다. 그리고 계속 ‘개’로 남아 공주의 총애만을 얻으려 하지 않았던 바르톨로메의 의지가 더해진 것이다.

  개의 등에 발을 올리고 있는 난쟁이에서 인간 바르톨로메를 그려낸 작가의 상상력과 작가의 ‘시선’이 나를 붙든다. 새삼스럽게 함께 하는 삶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끔 한다.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그림 속의 개는 바르톨로메가 아니다. 처음부터 바르톨로메의 자리가 아니었다. 저것은 그저, 진짜 개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저자 박민규는 개 뒤에 서 있는 시녀에 주목한다. 그녀는, 음, 음, 너무 못생겼다. 우리는 기억한다, 주인공을. 주인공은 당연 잘생기거나 예쁘거나, 능력이 많거나, 돈이 많거나, 다 갖췄거나 그렇다. 작가는 가장 못생긴 여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 이야기를 한다. 못생긴 여자를 기억하느냐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보고 작곡 했다는 모리스 라벨의 곡과 동일한 제목의 소설이다. 그 때문인지 시종일관 라벨의 배경음악이 깔린 듯이 이야기가 전개된다. 책을 덮고 나서도 귓가에 온통 배경음악이 흐르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어쩌면 음률이 계속 느껴지는 것이 여운이 아닐까.

아무리 사랑해도 결국 타인의 고통은 타인의 고통일 뿐이니까. 그것이 자신의 고통이 되기 전까지는, 어떤 인간도 타인의 고통에 해를 입지 않는다(p15~16).

  아마도 그렇다. 그 어떤 사랑이라도 그 어떤 고통이라도 타인의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다만 타인의 고통은 내 것과 비교되었을 때 이해되고 와 닿는다. 1986년에 스무살이던 청년은 1999년에도 여전히 자신의 고통을 기억한다. 그녀에게 모리스 라벨의 음반을 선물한, 함께 「라 스메니나」의 그림을 본 그녀를. 이 소설은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보면서 계속 못생긴 시녀에 머무르는 뒤돌아서도 그녀를 떠올리는 한 남자의 기억이다.   

  사랑은 개인적 경험이 아니다. 보편적 경험이다. 다만 ‘누구’를 사랑하느냐가 개인적 경험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사랑경험은 개인에게 특수할 뿐, 타인에게는 고통이 되지 못할 경험이다. 그러나 못생긴 여자와 못생긴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라면 달라진다. 타인의 개인적 경험에 연민을 느낀다. 그런데 연민의 대상자가 누구라고? 못생긴 여자인가,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인가?

  어쩌면 ‘나’에게 트라우마가 있지 않았다면 이 소설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보다 잘생긴 아버지, 못생긴 어머니는 자신의 헌신이 무색하게 아버지로부터 버려졌고 못생긴 어머니의 아들인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이기에 못생긴 여자에게 갖는 마음이, 시선이 달랐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못생긴 여자도 부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못생긴 여자를 향한 수많은 사람의 멸시를. 그로 인해 쌓아올리지 못하는 자신감과 상대방의 진심을 믿지 못하게 되는 자신을.


 

나는 그 무엇도 이해할 수 없었고, 그 무엇도 믿지 않았다. 따라 뛰는 사람들, 피리소리를 따라 어디론가 달려가던 사람들과...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세상의 풍경들을 그저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었다. 아름다워지는 여자들... 아름다워 <져야만> 하는 여자들과... 학력을, 차를, 또 집을... 말하자면 힘을 <가져야만> 하는 남자들... 서로에 의해, 서로에 비해, 올라선 서로를 위해 구축하던 프리미엄과... 올라서지 못한 서로에게 요구되던 또 그만큼의 스펙에 대해... 그러나 전혀 달라지지 않는 삶의 성질에 대해... 오로지 스펙과... 프리미엄만 늘어날 뿐인 이 삶에 대해... 하여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었다. 30년만 지나면 허물어야 할 한 채의 집을 위해, 실은 조건과 조건... 이윤과 프리미엄에 의해 만난 서로에 의해... 하여, 실은 있지도 않았던 사랑에 내내 절망할 이 삶에 대해... 그 <생활>에 대해... 하여 자신의 자녀밖에는 사랑할 수 없는 이 삶에 대해... 다시 사랑이란 명목으로 가두고 사육하는 이 삶에 대해... 갖추고 올라섰다 한들, 이를테면 일병 7호봉 정도나 될 그 대단한 프리미엄에 대해... 실은 허망한, 하여 과시밖에는 할 게 없는 이 삶에 대해... 그러나 결국 죽음을 맞이할 이 삶에 대해... 고생하셨어요, 말은 하지만 실은 유산을 셈하고 있을 자녀들에 대해... 그래서 실은 그 무엇도 남지 않을 이 삶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p328)


 

  사랑이야기는 은은하고 안타까움이 더해지며 그것을 더욱 깊고 짙게 하는 것은 저자의 문체와 구성이다. 소소하게 그려 넣은 80년대가 90년대로 넘어가는 변화 속의 사람들의 모습은 그 문체로도 덮을 수 없는 현실감이 느껴지기도, 조금은 과장되어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에 콤플렉스 덩어리를 모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수많은 덩어리를 모으며 우리는 노예로 전락해 가고 있지 않은지를 사랑이야기 속에 녹여 내었다.

 

“저는 늘 스펙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경쟁력 없이 살 수밖에 없는 대다수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삼미 슈퍼스타즈가 남자들을 위한 소설이었다면, 이번 소설은 여자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저자의 의도는 사실, 달갑지 않다. 같은 상황에서 여자에게는 ‘외모’가 더 추가된 것이 현실이라 해도 외모로 인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이 시대의 여자들에게 과연 이 책은 위로가 될까?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는 것이 위로인가라는 반문을 해본다. ‘나’에게 못생긴 어머니의 일이 없었다면 과연 그는 그림 속 못생긴 시녀에게 관심을 두었을까. 경험이 있음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볼 때 사회에서 ‘소외’되는 자에 대해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고는 생각한다.

  경쟁사회에서 결국 인간을 위로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의 진정성있는 마음이다. 그것이 상대에게 닿을 수 있는가는 사회가 억누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이 말하는 것은 ‘누군가로부터의 위로’일 수도 있겠다. 이 같은 시대에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일 게다. 그리고 타인의 위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나도 타인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로받는 상황이 되는 것은 역시 달갑지 않다. 세상은 점점 위로받고 싶은 자들만이 가득해지고 있다. 가장 좋은 것은 그런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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