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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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야, ‘인간’이란 그런단다


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한겨레출판, 2026-04-04.

 


  요즘 아니 그보다는 좀 더, 쪼~금 더 된 어느 때부터 “나쁜 무리”가 많음을 느낀다. 그들은 매일매일 매시간, 이렇게 확인하고 외치고 있는 건 아닐까. “이제부터 우리는 한패야”

이러한 ‘나쁜 무리’들이 내 삶을 망가뜨리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나쁜 무리’들의 움직임은 언제나 유치하게 기민하다. ‘나의 무리’가 아닌 ‘너의 무리’, 나는 ‘너’를 알지만 나는 그들과 ‘한패’가 되지 않으려 한다.

  “정말이지, 서로가 서로에게 길이 들었군요.” _「작은 벌」

  아, 생텍쥐페리 「어린왕자」속 ‘길들이다’는 단어가 이토록 불온하게 들리는 상황이라니. 여우야, ‘인간’이란 그런단다.

 

 《너의 나쁜 무리》는 일곱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읽었을 땐 불온하게 봤다. 뭐 이렇게 하나같이 나빠. ‘뭐지!’ 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나서는 그 감정이 많이 소멸되어 ‘뭐지?’.

〈작은 벌〉은 탈주극이다. 죽음을 앞둔 환자와 보호자가 사설 구급차 운전원 ‘이중일’에게서 구급차를 빼앗는 상황을 보여준다. 어떡하든 이중일을 속이고 구슬려 구급차를 탈취하려는 이들과 어리버리하게 휩쓸리는 이중일의 모습엔 살고자 하는 자와 살기 싫은 자의 대비가 뚜렷하다. 구급대원으로 타인의 삶, “환자들의 삶에 관여하는 것이 죽도록 싫었던” 이중일은 그럼으로써 ‘평화’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제 그에게는 ‘평화’가 올까? 그렇다면 제목은 왜, 「작은 벌」일까.

 

그들은 결코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이중일은 속으로 그 문장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거짓말같이 그들은 선한 사람들이며 자신에게 결코 해를 끼치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추운 뺨에 더운 손」은 관계 ‘맺음’이 아니라 이미 관계인 사이의 ‘끊을 수 없음’에 대한 이야기다. 추운 뺨에 더운 손은 한 명의 상태일까, 두 명의 상태일까. 추운 뻠에 갖다대는 더운 손이 타인의 것이라면, 일단 두 사람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만은 않은 듯하다. 그것이 허용되는 관계인 것이니, 이미 이뤄진 관계에서 그 상황을 호의, 선의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아니면 거부하고 싶은가가 중요하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함께 볼 수 있는 게 마임이야. 내가 그것을 보고 있다는 믿음을 통해서.

 

  ‘선의’를 쉬이 파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얼마나 쉬울까. 하지만 ‘선이’에게 ‘선의’를 파악하는 건 쉽지 않다. 이미, 선의로 해석될 수 없기에.

  ‘선이’의 엄마는 다른 사람의 돈과 물건을 훔친다. 이런 엄마라서 부끄러운 ‘선이’는 엄마와 분리되고 싶다. 그러나 ‘엄마’라는 이 관계가 완전히 타인이 될 수 있는 존재일 수 없다. 더구나 어린 ‘선이’에게는 더욱. 그렇기에 선이는 “나로 살고 싶고”, 나로 살고 있는 이들을 미워한다. 엄마에게 짓눌린 어린 ‘선이’가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방법은 있는가. 이해는 해야 하는 건가. ‘선이’에게 새로운 시각을 던져주는 인물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 친구 ‘기문’이다. 선이는 ‘기문’이 그 옛날 자신의 엄마가 훔쳤을 ‘기문’엄마의 금두꺼비를 달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건 그들의 관계도 더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불안을 주는 부분이기도 하니까. 여기에 ‘기문’은 ‘마임’ 이야기를 한다. ‘기문’의 마임 철학을 통해 ‘선이’는 ‘선의’를 볼 수 있을까.

표제작과 같은 「너의 나쁜 무리」속 이 ‘무리’들을 뭐라 불러야 좋을까. “쉽게 오염되거나 잃어버리기 쉬운 물건은 아예 들이지조차 말라”고 했던 여사, “여사와 우리가 되기 위해 애썼던” 유선. 버림받는 것에 두려움을 갖는 둘은 동일한 사람에게 버려진 사이다. ‘여사처럼 살 거다’라 외치지만 ‘너도 떠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여사를 위해 기꺼이 버림을 선택한 유선이다. 정말 진심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인 건가. 「너의 나쁜 무리」속 전개는 점점 점입가경이 되는데, 궁금해진다. 이들의 행동이 ‘연대’라 할 수 있나. ‘유대’라 할 수 있나. 어떤 의미로 서로의 비밀을 움켜쥔 사이에서 무척 강한 연대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부정적일수록 접착력을 더 강화하며 쉬이 물드는. 나쁘지 않은 것, 맞나?

 

나는 여사처럼 살 거다. 아주 많은 사람에게 마음 주고 몸 주고 절절매며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갈 테다. 그러다 진심으로 그런 생각도 했다. 나쁘지 않은데……?


 「아무 사이」. 아무 사이는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사이를 말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사이를 말하는 걸까.

  시터 일을 하는 ‘희지’는 이 일에 의미를 둔다. 이전일을 하면서 쌓인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변화된 것이다. 그러니까 할머니들을 돌보며 이들에게 자신이 필요한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희지’는 성심성의껏 노인들을 돌보고 애정을 쏟는다. 그런데, “아무 사이”라니. 여기 “아무 사이”는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 전혀 관계맺음이 필요없는 사이, 이미 맺어진 그 어떤 관계에도 불구하고 ‘엮이고 싶지 않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니까, ‘희지’를 이른바 ‘고용’하고 있다 여기는 보호자가 ‘희지’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심지어 희지의 돌봄을 받는 노인조차도 마찬가지다.

 

“저는 최선을 다했는데요.”

“희지 씨, 그러지 말아요.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요.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정말로. 그래서 괜찮은 거예요.”

 

 「작은 벌」에서는 최소한의 관계맺음도 없기를 바라는 건조한 사이에 끈끈이가 뿌려져 뭉침이 이루어졌는데, 「아무 사이」에선 최선을 다한 ‘애정’을 주었음에도 끈끈이가 붙지 않을 수 있음을 보는 듯하다.

 「너의 나쁜 무리」속 ‘여사’님의 말마따나 “딱히 중요하지도 않은 주제에 사람 마음을 초조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이 각각의 소설에 있다. ‘징글징글한’ 관계다. 이 징글징글함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항상 반경 안에 있게 되고 “너무도 쉽게 흔들리고 마는 꼴”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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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 밖은 안녕
이주혜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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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존재들


괄호 밖은 안녕, 이주혜, 문학동네, 2026-04-10.

 


  책을 덮고 나면 ‘번역’이란 단어가 둥둥 떠오르는데 아, 이주혜 작가가 번역가이기도 하다는 걸 알았다. 소설집 속에 반복된 ‘번역’이란 언어와 언어만이 아니라 존재와 비존재, 동식물, 기억에 대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 아니라 항상 ‘낯선 곳’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서 공간에 대한 ‘번역’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 모든 것들, ‘언어’가 아닌 것을 ‘의미화’하여 해석하는 이야기들. 그래서 한편으론 이 낯선 곳에서 여행하면서 ‘번역’으로 인한 어려움이 전혀 없다. 「안개의 기분」에 등장하는 “사슴 키리‘의 능력을 부여받은 것처럼, 어찌 이다지도 소통이 어려움없이 이어질 수 있는 것인가.

  번역으로 힘든 몸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든 어떻든 소설 속 인물들은 여행을 떠나는데 이 여행 장소는 주로 ‘일본’이다. 일본은 또한 ‘번역’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 언어를 이해하는 공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왜 굳이 여행의 장소는 일본인 걸까. 세계화가 된 지 오래, 점점 다른 나라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일본’ 배경은 이제 한국소설에서 아주 기본으로 자리잡은 느낌이다. 일본이라는 공간이 지리적으로 가까워서일까. 분명 우리나라와는 심리적정서상 이질감과 거리낌이 있는 ‘일본’이란 나라, 꼭 이 나라가 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가, 필연성이 있는가 생각해볼 때가 있다. 젊은 세대에서 ‘일본’에 대해 우호적(?)이고, 한국인이 가장 많이 여행가는 나라가 ‘일본’이라는 것을 본 것도 같다. 굳이 배척할 필요야 없지만 굳이 더 챙기고(?) 그럴 것까지야 있는가 생각하기도 한다. 아직 뭔가 해결되지 않은 듯하여. 하지만, 그런 점에서 또한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인이 주는 ‘소설적인 요인’들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문제는 그래서 일본이 배경인 소설들이 주는 이미지, 정서가 대체로 비슷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아무튼. 소설에서 일상을 벗어나고픈 이들은 자신의 언어가 닿지 않는 낯선 곳을 선택한다. 여행은 보다 ‘낯선 방향으로’ 가서 ‘익숙함을 발견’하고 오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그랬던가. 여기,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낯선’ 곳으로 가, ‘낯선 것 이상의 기묘한 것’을 만나고 ‘과거를 기억’하고 온다. 과거의 ‘기억’을 괄호 밖으로 끄집어내어 ‘해석’하고 온다고 해야 할까. 살면서 타인에 의해서든 자이로든 단단히 갇혀 두었던 그 기억 속 말들을 끄집어낼 때, 그것은 적어도 해석되고 해체되어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게끔 만든다. 그렇다면 이건 치유의 과정인 건가. 「안개의 기분」에서 마주치는 말하는 사슴 ”키리“를 보자. 느닷없이 나타난 키리는 “마음을 다하면 저절로 상대방의 말을 할 줄 아는” 존재다. 소설집에서 이런 존재는 불쑥 나타난다. 여행을 떠난 ‘나’는 비로소 ‘마음을 다하여’ 자신의 마음 속에 숨겨놓은 ‘언어’를 마주할 용기를 가지게 된 걸까. 그것을 위해 작가는 툭툭, 여행 속에서 이러한 존재들을 내밀고 있는 것인가.

 

여자는 음성언어 외의 언어 소통에 능숙했다. 오직 손짓과 몸짓, 표정만 동원할 뿐인데 이상하게도 여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저절로 이해되었다. 여자는 마임 배우라고 해도 좋을 만큼 동작이 섬세하고 표현력이 뛰어났다. 몸에서 출발한 언어는 의식적으로 해석할 필요 없게 단단한 괄호에 담겨 곧바로 내 몸에 도착했다._「괄호 밖은 안녕」

 

「괄호 밖은 안녕」속 비오는 날에 만난 맨발의 여자도 그렇다. 사슴 키리처럼. 그러나 이런 존재들이 정말 존재하는지, 아니 이들을 마주쳤는지는 모를 일이다. 환상처럼 유령처럼 마주한 이들에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놀라지 않고, 자연스럽게 융화되고 그들 너머의 기억을 소환하니까.

  어떤 기억들을 소환하느냐, 「안개의 기분」에서는 민해라는 이름이 ‘민중해방’의 민해인지를 묻는다거나 외할머니와 엄마와 아들이 성이 같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기억을, 「괄호 밖은 안녕」에선 가정폭력에서 도망친 이웃집 여자에 대한 기억과 자신의 가족사를, 「초록 비가 내리는 밤」에선 남성 가부장제의 피해자를, 「여름 손님입니까」에서는 내가 질투한 엄마의 조카인 영란 언니를, 「순영, 일월 육일 어때」에선 결혼과 임신을 이유로 ‘수은’의 인생에서 사라진 언니다. 대체로 ‘가족’에 관한 기억이다. 위안이 되는 존재로서의 ‘가족’ 인지 상처를 주는 가족인 것인지.

  「초록 비가 내리는 집」은 인상적이다. 가부장적인 남편 ‘박천일’에게 40년이 넘는 세월을 순종하며 살아야 했던 ‘양순덕’이 병으로 사망하며 화분 100여개와 그 식물을 키워낸 기록을 적은 노트를 남긴다. ‘박천일’은 아내의 기록을 읽어내지도 식물을 키워내지도 못하고 ‘손우정’에게 집을 세주는데 사회에서의 또다른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손우정’은 ‘양순덕’의 기록을 보며 식물을 되살리고자 한다.


손우정은 비를 피하는 게 화분에 이로울지 맞는 게 이로울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헛웃음이 터졌다. 저 많은 화분 중 초록으로 살아난 식물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손우정은 아직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식물들이 번개와 폭우를 견뎌내리라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로 화분들 간 틈이 거의 없게 바짝 붙여주고 가장자리의 아주 작은 화분들은 창고 처마 밑에 옹기종기 모아놓았다. 손우정은 화분 백 개와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속삭였다. 우리 꼭 살아남자.

 

  식물을 가꾸는 아내와 함께 산 남편이 전혀 해내지 못하는, 아내의 기록마저도 무슨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는 남편과 다르게 타인인 ‘손우정’은 ‘양순덕’의 식물에 대한 기록을 읽어내고 해석하고 그를 바탕으로 자신이 당한 억압에서 해방되고 치유하고자 하는 ‘손우정’은 서로 본명도 모르지만 서로를 위로하는 「할리와 로사」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싱글맘의 서사, 가정폭력 피해자, 돌봄 노동에 갇힌 여성들 등 가부장제, 남성 피해에 맞선 여성의 상처에 대한 공유와 연대를 생각나게 한다. "우리 꼭 살아남자".

  생각해보면 “마음을 다하면” 될 일인데, 해석할 수 없는 언어로 존재하는 관계들이 있는 법. 그리하여, 낯선 여정이 해방이 되고 ‘이소’를 꿈꾸는 이들이, 괄호 밖으로 나가기 위한 존재들이 소설에 가득 차 있다. 그들에게는 아직 이 현실에서는 환상의 존재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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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에게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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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설의 삶


복자에게, 김금희, 문학동네, 2020-09-09.

 


  ‘고고리섬’이 어디메쯤 있는지 찾아본다. 가장 닮았을 섬으로 상상하며 섬 찾기를 멈춘다.

제주의료원 산재 사건을 찾아본다. 제법의 기사들이 검색된다. 10년, 재판은 길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을 읽게 되면, 사실 먹먹함이 더 배가된다. 여기에 그들이 살았었구나, 어딘가에 살고 있겠구나, 좀더 실체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소설 속 문장을 빌려오자면 ‘습설’의 삶이 내게로 옮겨오는 듯하다. 내 삶은 옮겨가지 못하고 겹겹이 습설이 되어가기에, 그렇다고 한다면.

 

“사람을 한번 만나면 그 사람의 삶이랄까, 비극이랄까, 고통이랄까 하는 모든 것이 옮겨오잖아. 하물며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언제나 억울하고 슬프고 손해보고 뭔가를 빼앗겨야 하는 이들이야. 이를테면 판사는 그때마다 눈을 맞게 되는 것이야. 습설濕雪의 삶이랄까. 하지만 눈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으려면 빨리 털어내야 한다고.”

 

  사는 동안 무엇을 털어내어야 했을까. 오래도록 끌어안고 있거나 푹 파묻힌 습설의 삶을 사는 이로써 새삼 묻게 된다. 털어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작가는 소설을 다 쓰고 나서 한 문장을 떠올린다면 “나는 실패를 미워했어”라는 문장이라고 했다. 순간 난 생각했다. 누구의 실패일까. 무엇을 실패라고 보는 걸까. 내겐 ‘습설의 삶’이 기억나는 한 문장이다. 돌이켜 보니 “억울하고 슬프고 손해보고 뭔가를 빼앗겨야 하는 이들“이라면 그 삶 내내 실패와 실패의 거듭이겠구나 싶다. 다만, 저 말은 ‘판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의 말이다. 우리나라 판사들의 행태를 보면 그들이 정말로 ‘습설의 삶’을 살고 있는가 의구심이 든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듯이 습설의 삶을 느끼는 판사들도 분명 있겠지. 이영초롱 판사는 어떤가.

  소설은 나, ‘이영초롱’이 1999년 열세 살 한때 살았던 고고리섬에 좌천되어 오면서 어린시절 만난 ‘복자’와의 시간을 회상하고, 또한 재회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부모의 사업 실패로 고고리섬 고모에게 맡겨진 이영초롱은 ”씩씩하고 많이 웃고 더 진취적인 아이“ 복자를 만남으로써 섬생활을 버텨낼 수 있었다. 하지만, 섬 어른들 사이 갈등에 휘말린 상황에서 ”자주 상처받고 여러 번 실망한 아이가 쉽게 선택하는 타인에 대한 악의“로 이영초롱은 복자의 간절한 부탁을 거부함으로써 상처를 주고 화해하지 못한다. 이 이후로 이영초롱은 편지를 쓴다. 복자에게, 복자야 안녕?, 복자야, 복자에게…… 끝나 버린 그들의 관계처럼, 부치지 못하고 폐기되어 버린 편지들이다.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가 필연적으로 짊어지게 되는 무게와 끊임없이 유동하는 내면의 갈등과 번민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이영초롱은 ‘어톤먼트의 브라이오니’가 연상되었는데, 필시 훗날 제 이러한 행동을 후회할 것이다 싶었다. 일찌감치 고모로 인해 ”미안함“을 인생에서 가장 무거운 기억으로 간직했기에, 이영초롱은 눈을 빨리 털어내지 못하는 판사가 되었다고 본다. 눈은 빨리 털어내지 못했는데 법정에서 욕설은 내뱉으면서 이영초롱 판사는 고고리섬으로 가게 된다. 다시 만나게 된 복자는 힘든 삶 속에 있었고…… 그건 어린 시절 그때 이영초롱이 한 일 때문만은 아니지만 이영초롱 판사는 ‘어톤먼트의 브라이오니’가 그랬던 것처럼 ‘복자’의 삶에, 사건에 개입하여 ‘복자’를 위해 ”힘을 쓰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복자’는 실제 사건이 모티프가 된 ‘제주의료원 산재 사건’의 당사자다. 병원의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일한 수많은 간호사들이 유산하거나 기형아를 출산했고, 간호사로 근무하다 유산한 복자는 이들과 함께 산재소송을 진행 중이다. 허나, 익숙하듯 ‘병원’과 ‘대형로펌’이라는 거대 자본 골리앗 연합에 이들은 작은 돌조각 하나도 제대로 쥐지 못한 다윗일 뿐이다.

  소설은 산재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물론 ‘재판’이라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이영초롱과의 연결이 이루어져 전개된다. 하지만 사건이 중심이 된 소설이기보다는 고고리섬을 중심으로 이영초롱의 고모, 복자에게 엄마같은 이선 고모, 친구 고오세, 그리고 이영초롱의 동료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들은 모두 삶 속에서 각자의 빛과 어둠을 품고 살아가며 복자의 산재 사건도 이의 한 부분이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연상되는. 소설은 오세가 드론을 띄워 찍은 고고리 영상을 통해 이러한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오세는 드론을 띄워서 찍은 고고리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바다 위에 그 작은 고고리섬이 떠 있는 게 기적처럼 느껴졌다. 연속해서 몰아치는 파도를 견뎌가며 섬은 마치 가지를 뻗듯 선착장과 부두를 만들고 꽃처럼 다채로운 지붕의 집들을 피우고 보리밭과 해바라기밭을 보듬으며 거기에 있었다. 해안의 거친 바위들, 섬의 유일한 공장인 보리 도정공장과 밭둑의 고인돌들까지, 그렇게 위에서 보니 모든 것이 한없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드론이 점점 내려앉아 지붕의 시점이 되고 잠자리들의 시점이 되고 우리의 눈높이가 되고 갯강구들의 자리까지 내려와 착륙하면 슬픔이 먼지처럼 피어올랐다.

 

  참, 본질적으로 모든 것은 그 자체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슬픔을 지는 존재들일 것도 같다. 살아간다는 건 사실 얼마나 버거운 일인가. 본능을 감당하는 일도 억제하는 일도 힘겹다. 지성과 이성을 끊임없이 담금질하여 문명인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도 끊임없이 사람들과 관계맺음 속에서 감정을 교류하는 일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마냥 어렵다, 버겁다, 힘들다고만 할 수 없으니… ”마냥 우울하고 슬플 수가 없어서“, ‘복자’처럼 “할망! 나! 슬! 펏! 저! 소리치고 나면 슬픔이라는 게 아무것도 아닌 듯하고 그냥 숨 한번 크게 쉬고 나면 괜찮은 듯“ 살아가는 거겠지. 그조차 하지 못했던 이영초롱은 그러한 삶을 깨달아가는 것일테고.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어느 정도는 냉소적인 이영초롱이 유년의 상처와 죄책감을 털어가는, ”나 슬펏저“라고 외치는, ‘실패를 용인할 줄 아는 이’가 되어가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 인생에서 ‘복자’인지, ‘이영초롱’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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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녀의 것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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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나의 것


오직 그녀의 것, 김혜진, 문학동네, 2025-09-30.

 

 

 어떤 형태의 직업을 가진 이든 평생 그 일을 이어온 사람의 생애는 비슷하지 않을까. 거기에 내게 조금 익숙한 세상엔 적절한 동조나 차별성을 찾아내려 할 테고, 내게 낯선 세상의 이야기는 호기심과 의문을 가지며 바라보게 될 터이다. 편집자의 삶이란 잘 안다고도 낯설다고도 할 수 없는 세계, 이 책을 펴고 읽는 순간에도 페이지가 몇 장을 넘어가는 순간에도 이 책이 이런 내용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1990년대 초 출판계에서 일하는 여성의 이야기는 엄청난 ‘사건’을 바탕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일’을 주요 소재로 소소한 업무와 함께 제 삶을 이야기하는 회고록이나 자서전 형태의 일기와도 같다. 어떻게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일 중에서 왜 그 일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된 인연들, 그 과정에서 일에 대해 자신이 가지는 감정과 태도들을 담고 있어 어쩌면 후배들에게 또는 어떤 직장의 신입들에게 ‘일하는 자세’를 들려주는데 적합한 이야기처럼도 느껴진다. 사회초년생에서 책임을 지는 위치에 올라선 이가 들려주는 어쩌면 직업에서 성공한 이야기처럼. 그래서, 그녀는?

  그녀, ‘석주’가 조금이나마 목적을 가지고 생기있게 활동한 건 대학 시절 문학 창작 동아리에 가입한 것, 거기에서 나아가 소설 창작 수업을 청강한 것이다. 이후로 교사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뜻에 맞서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함께 스물 넷에 ‘교한서가’에 교열자로 입사한다. “크게 보면 오탈자와 문법적인 실수를 바로잡는 것이 교정이고, 문맥과 흐름을 파악하여 표현과 문장을 다듬는 것이 교열”로 교열자는 교정자로 원고의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는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다. 교열자로서 석주는 상사 ‘오기서’ 아래에서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은 주제넘어 보였고, 과도하게 수용적인 자세는 태만하게” 보여 “원고에 어느 정도로 관여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며 점차 교열 업무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진다. 이후 ‘오기서’의 추천으로 부서를 이동하여 인문교양부 편집자로 일하면서 ‘편집자의 마음 같은 것’이 자리하며 편집 일에 대한 열정이 셩겨난다. 편집자 소모임을 찾아가기도 하며 “자신과 비슷한 속도로, 닮은꼴의 꿈을 좇는 듯” 보이는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었”으며 소속감을 느낀다. 또한, 그곳에서 만난 편집자 ‘조원호’와 매일의 산책같은 사랑과 연애를 시작한다.

 

그러게요. 참 이상하죠? 일이 쉬워지는 법이 없으니. 오래하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 일은 그렇지도 않아요. 좋아하는 게 이렇게 무섭습니다. 밉고 싫고 그만두고 싶어도 꾸역꾸역 해나가게 되거든요. 예전에 제 사수가 그러더군요. 뭘 좋아한다는 게 원래 그런 거라고. 더 좋아하고 많이 좋아할수록 마음 다칠 일이 많다고. 그땐 무슨 이런 감상적인 소릴 하나 싶었는데 지나고 나니 틀린 말도 아니더라고요.

 

  물론 연애만큼이나 일에 대한 ‘석주’의 열정과 애정 또한 깊어간다. 직장생활을 해본 이라면 반복된 일 속에서도 혼을 쏟아가며 일을 해내고, 소진이 오기도 하는 반복된 업무의 일상을 보낸다는 것을. 그 과정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와 트러블이 있으면 일은 더 힘들어지기도 하고 보상처럼 승진이 걸려 있다거나, 주어진다면 더욱 열정적으로 그 일에 매몰되기도 한다는 것을. 출판사의 편집자인 석주에게는 어땠을까.

  출판사에서 일하는 편집자, 문학 동아리에 가입하고 소설 창작 수업을 들은 이라면 이후 업무와 관련하여 ‘석주’가 맡게 되거나 하게 되는 일이란 건 예측이 된다. 또한 1990년대 출판사에서 일하는 여성 편집자라면 당시에도 당연하게 흘러갔을 노동하는 여성, 전문직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분위기가 어떠했을 지도 짐작된다. 일과 사랑이란 왜 이분법처럼 나눠지는 선택이어야 하는 것인지.

 

“그럼에도 먹먹함이 밀려왔다”

 

  그렇다. 이 소설은 ‘석주’가 말하는 것처럼 “닮은꼴의 하루가 반복되는 진부한 이야기 같았다. 극적인 사건도, 놀라운 반전도 없는 서사, 개성도 매력도 없는 주인공이 완성해 나가고 있는 그 스토리”와 같다. “어떤 독자에게도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할 것 같”은 스토리. 하지만 그럼에도 먹먹함이 밀려오는.

 

시시하고 평범한 그 이야기는 다름 아닌 자신의 삶이었다. 석주가 미약하게나마 감동을 느낀 건 쓰지 않은 것과 쓸 수 없는 것까지 모두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대단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그 여정은 오직 석주에게 속한 것이었고 그녀만의 것이었다.


  여기에서 소설의 제목이 등장한다. 오직 그녀의 것. 업무도 다르고 처한 상황도 다름에도 ‘석주’의 서사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 그것은 ‘석주’가 하는 일을 다른 업무로 대체한다고 했더라고 보편적으로 느끼게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얼마간 자신과 닮은 듯했고 때때로 자신처럼 느껴지는” 이야기. ‘석주’가 그 마음까지를 모두 알려주는 꽉 닫힌 엔딩.

 

특별한 사건도, 감정의 동요도 없는 그 이야기에 어째서 마음이 끌리는지 석주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가 읽는 건 작가가 상상한, 현실에는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인물은 얼마간 자신과 닮은 듯했고 때때로 자신처럼 느껴졌다. 석주는 알고 있었다. 이야기가 향하는 곳이 자신의 내면이라는 것을. 허구의 서사가 불러일으키는 것은 내밀한 기억의 감정이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에게도 돌아오는 것이 실은 읽는 행위의 전부라는 것 또한.

 

  이것이 ‘오직 그녀의 것’이 ‘나의 것’이 되어가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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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의 온기
김혜진 지음 / 창비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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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햇살


달걀의 온기,  김혜진, 창비, 2026-04-08.

 


  “넌 봄날의 햇살같아.”

  우영우가 이런 말을 했을 때, 분명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 빛나는 언어 표현도 우영우를 대하는 ‘봄날의 햇살’ 행동도.

  한국인은 ‘정’이라는데, 최근에는 외국인에게 어필하되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부담스럽게 여겨지거나 의심부터 하게 되는 문화가 되어가고 있는 것도 같다. 오랜 시간 뼈 속에 박힌 이 정서가 쉬이 사라지진 않겠지 싶으면서도, 개인주의를 넘어 점점 이기주의로 치닫는 세상에서 누군가의 마음이 정인지, 오지랖인지, 범죄를 위한 미끼인지 생각해야 하는 일이 서글프다. 『달걀의 온기』는 이런 마음을 모듬은 소설집이 아닐까.


삶에서 사소한 정을 주고받는 일이 점점 드물어진다는 생각을 그녀는 자주 했다._「빈티지 엽서」

 

관심도 지나치면 병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과 생활 방식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세요. 참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_「관종들」

 

그러니까 안전하고 평화로운 하루를 영위하는 현명한 사람들이 매일 반복하는 일. 그건 애실이 평생 노력했으나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던, 현서로 인해 잠시 잊었던 일상이었다. …… “애실씨, 혹시 걔한테 돈 빌려줬어?” _「하루치의 말」

 

  그러니까 타인의 호의에 반신반의하게 되고 선뜻 타인의 손을 잡기 힘든 불편한 기류들이 흐른다. 그래서 내가 행한 단순한 선의가 타인에게 불경한 것으로 치부되며 뒷담화의 소재로 사용될 때, 「빈티지 엽서」속 ‘나’는 자기변명과 자기합리화로 자신을 단속해야 한다. 내 일상을 변화시키며 그 안으로 스며들어 좋은 기운을 전하는 이, 그래서 좀더 삶을 애착하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그 사람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행복할 수 있을 듯한 순간, 호의가 ‘목적’을 위한 것, 거짓임을 알았을 때 느끼게 되는 당혹감. 「하루치의 말」속 애실이 경험하는 감정이다. 아마, 다시는 사람에게 호의도 삶의 환희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집의 제목은 『달걀의 온기』다. “무슨 일이 있나 한번 살펴주는 게 뭐가 어려워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세상에서 마냥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관종들」의 정해는 가까운 이들에게서도 모진 말을 듣지만 타인에게 관심을 두는 걸 거두지 않는다. “아이들을 생각하고 불안과 걱정을 나누는 데 시간과 마음을 들이는” 일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니까. 작가는 이처럼 ‘최소한의 온기’를 나눌 수 있기를 더 소망하는 듯하다.

  닭이 갓 낳은 달걀은 따스하다. 그 달걀을 맛보려면 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온기를 느끼는 것 또한 조심스러울 일인데, 그 온기를 나누려면 따스함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더 세심해야 할까. 「달걀의 온기」에서 선희가 청란 두 알의 따뜻함을 느끼는 부분은 의미심장하다.

 

선희는 아이가 건넨 청란 두알을 받아 들었다. 따뜻했다. 그건 바깥의 열기와 무관한, 내부에서 만들어져 흘러나오는 온기였다. 아니, 바깥에서 불어넣지 않았다면 결코 생겨나지 못했을 온기인지도 몰랐다. _「달걀의 온기」


  내부, 속으로만 흘러 들어가서는 깨닫지 못할 온기가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다. 아마도 이것이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관계맺음 속에서 ‘나누는 온기’일 것이다.

  선희는 투자 사기를 당하고 아버지가 살던 고향집을 처분하기 위해 내려와 지내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니 마음이나 행동이 까끌까끌한 상태이다. 혼자 닭을 키우고 달걀을 팔며 살아가는 소녀 ‘민지’를 보며 선희는 과거의 자신을 마주한다. 자신이 얼마나 자기연민에 빠져 있는지, 그만큼 타인에 대한 원망을 하고 있는지를.

  「푸른색 루비콘」속 ‘그’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에 대한 갈망이 크지 않고, 새로운 만남이 기대되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서 재미를 찾지 못하는, 관계 안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는 부류가 아닌 ‘그’의 관심사는 늘 내부로 향했는데 교회에서 만나게 된 ‘남자’와 엮이며 차가 구덩이에 빠지는 일을 겪기도 하지만, 결국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를 통과한 햇살이 그의 얼굴에 따뜻하게 와닿”는 것을 느끼고 ‘남자’가 준 꿀물 한잔은 ‘그’에게 “입안에 달콤한 내음이 감돌게 하고, 나른한 졸음을 주며 잠깐의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하나의 세계는 필시 다른 세계와 엮일 수밖에 없다. 홀로, 내부로만 집중해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다. 타인의 선의를 기대하다 실망하고 문을 닫아버리기도 하지만 내가 타인에게 선의를 줄 수도 있음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봄날의 햇살’처럼 무심히 행하는 보살핌과 애정을 받게 되면 “마음을 뭉클하게 하며 당혹스럽고 부끄러운 감정을 불러오게” 한다. 나그네의 옷을 벗긴 따스한 햇살의 온기처럼 조용히 퍼져나갈 온기를 잊지 않기를, 타인에 대한 애정을 감각하기를 소설은 전하는 듯하다.

 

선희는 지갑을 가지러 집 안으로 들어가며 청란을, 그 청란이 품고 있는 온기를 떠올렸다. 그러나 왜 그것이 돌연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지, 왜 당혹스럽고 부끄러운 감정을 불러오는지에 대해선 깊이 고민해보지 못했다. 그것이 자기 삶에는 없다고 여겼던, 스스로 감쪽같이 지워버렸던 누군가의 보살핌과 애정 같은 것을 일깨웠다는 사실을 안 건 시간이 더 흐른 후였다. 그러니까 그녀가 이곳을 떠날 때 동력으로 삼았던 원망과 미움이 옅어지고, 그 아래 자리한 것들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였다.  _「달걀의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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