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세대
백온유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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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8회는 있는가


약속의 세대, 백온유, 문학동네, 2026-03-20.

   

 

  “약속의 8회가 왔습니다”

  야구 경기 8회가 되면 늘 이런 코멘트가 나온다. ‘8회에 도대체 무엇을 약속했기에’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8회에는 꼭 무슨 일인가 벌어져야 한다는 강렬한 기원, 주술같은 이야기에 휩쓸리고 만다. 승리 굳힘일지 역전의 날림일지 모를 8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패배가 굳혀진 경우가 더 많았지만 그 ‘약속의 8회’는 항상 당연한 듯 이어지고 머문다. 아무것도 몰랐거나 아무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한순간의 유흥으로 지나갔을 ‘8회’는 ‘약속의’라는 단어가 붙은 후엔 단순하지 않은 마음을 휘젓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기대에 미치지 못한 후폭풍은 전신을 휘감는다. 『약속의 세대』에서 ‘약속의 8회’를 떠올리는 건 기시감일까.

  이 소설집엔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약속의 세대’를 제목으로 하는 소설은 없다. 「사망 권세 이기셨네」에 ‘5분위 약속 세대’가 등장할 뿐이다. 소설 속 ‘5분위 약속 세대’는 “역전교가 세계의 주인이 되었을 때를 대비해 일찍부터 통치자 교육을 받은 집단”이다. 작가는 여기에서 제목을 가져왔고 일곱 편 모두에 ‘약속’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곱 편의 소설을 아우르는 ‘약속의 세대’가 뜻하는 건 무언가, 어느 세대를 말하는 건가.

  작가의 말과 인터뷰에 모든 소설을 관통하는 것이 ‘약속’이라고 했다. “헌신하는 만큼 보상이 따를 거라는 기대, 인내하면 찬란한 미래가 당도할 것이라는 믿음”에 배반당한 “헐거운 약속이 지켜지기를 바라며 사는, 삶의 비애를 감내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그렸다고.

  ‘약속’, ‘약속의 세대’라니 뭔가에 너무나 매여 있는 느낌이다. 자신도 모르게 주어진 책임감을 끌어안고 있는 특정한 세대가 있는 건가. 소설집을 읽기 전 수록된 소설 중 「반의반의 반」을 읽었기에 약속의 세대를 ‘노인 세대’라고 생각했다. 이 사회에서 무언가를 약속하는, 그러니까 내가 받은 것과는 상관없이 무언가 끊임없이 ‘주어야 하는’ 세대. 무언가를 준다는 건 ‘가지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그것이 물질이든 마음이든 ‘줄 수밖에 없는’ 세대. 하지만 생각보다 노인들의 등장은 많지 않았고 난 완전히 반대로 생각했던 거였다. ‘약속의’ 의미를. 약속이란 상호적이기도 한 것 아닌가. 그러니 약속하는 사람이 있으면 약속을 받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약속‘하는’이 아닌 약속‘받는’ 것에 대한 것을. 그러니 이건, 약속의 8회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의탁과 위탁 사이」에는 병원에 입원한 할머니를 간병하는 이십대 손녀가 나온다. ‘엄마’는 자연스럽게 잠시만 할머니를 돌봐달라고 딸 ‘연수’에게 부탁하는데 연수는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길러졌기에 그에 대한 부채감과 더불어 이를 수락한다. 여기서 눈여겨봐지는 건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당연하게 ‘돌봄’의 주체가 되는 ‘엄마’가 열외에 있다는 것이다. ‘아이’ 돌봄도 ‘노인’ 돌봄도 엄마는 비껴가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손녀와 할머니를 중심으로 돌봄 과정에서의 감정이 이야기를 차지하지만 이 감정의 영역에서 ‘엄마’는 배제되지 않는다. 할머니는 병원 사람들에게 “오래전부터 친밀했고, 유독 살가웠고, 그만큼 각별했노라고” 손녀와의 관계를 이야기하지만, 그럴 리가. 손녀는 “할머니를 진정으로 측은해하지도, 가여워하지도 못했”고 그 이야기를 힘겹게 듣는다. ‘엄마’가 해야 할 역할이 ‘할머니’와 ‘연수’에게 각각 전이된 상황에서 연수는 자신을 돌봐 준 할머니에 대한 애정보다 엄마에 대한 적개심을 더 갖는다. 또한 일상의 모든 것을 챙겨 준 할머니보다도 가끔 물질적인 것을 주었던 할아버지를 더 따르기도 했다. 손녀에 대한 할머니의 애정은 약속받지 못하게 된 건가.

 「광일」을 보며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떠올랐다. 인력거꾼 김첨지는 택시 운전사 광일로 재탄생했다. 게다가 ‘광일’을 단순 이름 풀이하면 빛나는 하루가 아닌가. 광일에게도 계속 택시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광일’에게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는-좋지 않은 쪽으로-예감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 아내에게 거듭 일찍 가겠노라고 약속하지만 “안락하고 평안한 우리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며 거듭 아내가 바라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광일이다. 택시기사로서 자신을 “신”으로 여기기까지 하는 광일이, 삶의 동반자인 아내를 “헤매지 않고 원하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도록 할 수 있을까.

 

“이따금 신이 택시 기사의 모습을 빌려 사람들을 인도한다는 거예요. 인간은 자신이 신의 안내를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로 그 순간을 통과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그건 기적적인 일이죠. 헤매지 않고 원하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에요.” _「광일」

 

 「사망 권세 이기셨네」속 ‘미리’는 “삶에 위독한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그 근원을 나와 내 어머니로 지목하는 세주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럼에도 “작정하고 조목조목 반박하지 않고” 세주가 원하는대로 끌려다닌다. “종교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적”이 있기 때문일까. 역전교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럼에도, “치리(治理)하고 싶은” 마음에, “훌륭한 왕이자 좋은 백성이 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외면했던 것에 대한 반성일까. 어린 나이부터 역전교로부터 ‘배반’당한 위치는 같은데도 ‘미리’는 ‘세주’를 또다른 교주를 모시듯 종속되고 만다. 종교가 제시한 찬란한 미래가 파괴되고 세주가 미리를 착취하며 삶의 결핍과 좌절 속에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면, 미리는 세주를 끊어내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초연과는 다른 모습이다. “사망 권세”를 이기기라도 하고픈 심정인 건가. 사이비 종교에 대한 글을 읽으면 늘 드는 의문이다. 왜, 어떻게 계속 믿느냐. 열망뿐만이 아니라, ‘믿음의 배반’이 무서워 의문을 갖더라도 ‘회피’하는 거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 ‘미리’도 그런가.

  믿음도 배반도 흔한 시대, 무엇을 믿는지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의 ‘진리’는 이제 하나가 되어 가는 것 같다. ‘내게 좋은 것, 이익되는 것’이 곧 ‘선’이라는. 사회가 외치는 ‘약속’이 함께 만들어가는 ‘약속’이 그 자체가 ‘문제’를 담고 있어서는 안될 거라는 생각을 한다. 또한, 명확한 대안없이 그저 주술처럼 외치는, 일단 질러버리는 ‘약속의 8회’도.

 

 

*https://v.daum.net/v/20260328130128275/

 https://v.daum.net/v/20260401043236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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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나라
손원평 지음 / 다즐링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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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팍팍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젊음의 나라, 손원평, 다즐링, 2025-08-08.

 

 

  “넌 늙어봤냐, 난 젊어 봤다.”

  이런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노인들 영상은 드라마 속에서 꽤 경쾌하였건만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오래전이었는데, 가사도 풍경도 왜인지 서글프게 느껴졌다. 나이 듦, 늙음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인 건가. 늙음은 젊음을 대척점에 두고 얘기된다. ‘늙음’이 ‘늙음’으로 서기 위해선 젊음과 비교하여 그 가치가 정립되지 않아야 한다.

 『젊음의 나라』는 ‘늙음’을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젊음’을 부각하고 있다. 청년인 ‘나(유나라)’의 일기에서 그려내는 ‘늙음’, 이 책을 지금 이 시대 젊은이가 바라보는 노인세대에 대한 인식으로 바라보아도 좋을까. 언뜻 보면 ‘청년’에게 닥친 문제는 모두 ‘늙음’으로 인한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늙음’의 문제를 해결하면 ‘젊음’에게 닥친 문제는 해소될 수 있는가.

  이 책은 가상의 미래공간 “시카모어 섬”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섬은 “치열한 경쟁과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 35세 이하의 청년 60퍼센트와,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슈퍼 리치 시니어 30퍼센트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최고의 삶을 누리는 꿈의 섬”이다. 아니다. 유토피아 같은 이 섬에 살기 위하여 현실을 살아가는 29세의 ‘나’가 위치한 곳은 ‘유카시엘’이니 이곳이 진짜 배경이라고 해야 한다. 현실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나’가 보는 현 세계는 저출생 고령화시대로 노인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인간보다 로봇의 기능이 더 확대되는 사회다. 이민자들이 증가하고 혐오와 차별이 증가한다. 이런 사회에서 ‘나’는 자신보다 “더 젊고 어린 사람들에게 그리고 기계에게 밀려나고”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룸메이트인 이주 2세대 ‘엘리야’를 ‘사회적으로 공인된 약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약자가 강한 존재이자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더더욱 하루하루가 조바심나고 버겁다. 친밀감이 덜하고 인간관계도 좁은 ‘나’는 어린 시절 빛이었던 연락도 닿지 않는 ‘민아 이모’에 대한 그리움과 오직 ‘시카모어 섬’에 가고픈 열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리고 시카모어 섬에 가는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유카시엘 상담사로 일하게 된다.

  ‘나’가 일하는 유카시엘은 어떤 곳인가. 시카모어 섬과 업무 협약을 맺고 있는 국내 최대의 노인 복지 시설로 사회적 위치외 경제적인 상황(어쩌면 균질성)에 따라 유닛 A부터 F까지 다섯 곳으로 분류된다.

 

여러 사람이 한 장소에 모였을 때 분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뭔지 알아? 바로 균질성이야.

비슷해야 해. 모든 면에서 서로의 수준이 맞아야 갈등이 줄지. 최소한 경제적 조건과 사회적 위치라도 비등하면 분란의 여지가 적어.

 

  ‘나’는 좌천되어 자의반 타의반으로 유카시엘의 모든 유닛을 경험한다. 유닛 A인 ‘사파이어 레이크’에서 ‘선샤인 마운틴’, ‘뉴시티 필드’, ‘아리아드네 정원’, ‘프리 하우스’ 순으로 높은 단계에서 낮은 단계의 시설에서 일하게 되는데, 이는 곧 ‘사는 곳’에 따라 다른 노인들의 삶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유닛 A ‘사파이어 레이크’는 “여기 올 수만 있다면 자신이 가진 젊음을 늙음으로 바꾸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상상이 들 만큼 “모든 게 완벽”한 곳이다. 거주 노인들은 “사회의 중심을 이끌면서도 긴 세월 동안 재력을 유지한 사람들”로 그들은 “주류에 속해 있는 동시에 이 나이 되도록 가진 걸 잃지 않고 꼿꼿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남들 눈에는 세상 편해 보일지 몰라도 뼈를 깎는 노력”을 하고 있다. 반면 유닛 F는 ‘더 이상 갈 곳 없는 노인들을 마지막으로 맡아주는’ 곳으로 노인들은 숙식을 제공받기 위해 ’노동력을 제공‘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이들이 하는 일조차도 기계로 대체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결국 세상에서 가장 싼 건 사람”이기도 하다.

  유닛 B ‘선샤인 마운틴’의 거주 노인들을 상담할 때 나이가 들어 습진 때문에 손끝이 자꾸 갈라지는 것이 불편함이라고 얘기한다. ‘나’는 “삶의 끝자락에 다다라 마음에 품은 고민이 손끝의 습진 정도라면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생각한다. 유닛 C ‘뉴시티 필드’에선 꿈을 꾸기도 하며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제자리인 노인, ‘선 넘지 않고 함부로 꿈꾸지 않은’ 채 살아온 노인, ‘자기연민’ 가득한 삶을 보며 “어제의 행복이 비참함과 불행으로 전환되는 오늘이 진저리나게 서글프다”고 느낀다. 유닛 F의 전단계인 유닛 D ‘아리아드네 정원’의 노인들은 “대체로 조용하고 경직된 인상을 풍겼”는데 벌점을 받으면 퇴출되는 유니시엘 시스템에서 아무도 유닛 F에 가길 원하지 않으므로 벌어진 풍경이다. ’나‘는 “강한 법규 아래에서 인간이 얼마나 고분고분해질 수 있는지를 확인”하며 씁쓸함을 느낀다.

  각 유닛을 거칠 때마다 ‘나’는 거주 노인과 상담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또한 그때마다 엘리야와 자신의 ‘노인’에 대한 시선과 삶에 대한 생각을 기록한다. 요양병원 간호사인 엘리야는 ‘노인 세대’에 대한 반감과 혐오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사회의 변화를 위해 유닛을 철폐하고 청년을 위한 복지를 늘려야 한다는 ‘급진파’에 속한 엘리야는 ‘나’에게 집회에 참가할 것을 권유한다. 노인들은 소비도 생산도 하지 않아 “뭔가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 전반을 삐거덕거리게 하고 느리게 만드는 존재들”, “사회와 경제가 굴러가는 데 하등 보탬이 되지 않는. 그냥 시스템의 얼룩 같은” 존재라고. 그렇기에 “적어도 새로운 소비 주체, 미래의 납세 주체를 만들어 낸, 최소한 젊었을 때 아이라도 한 명 낳은 사람이 더 당당”한 거라며 ”평생 자기의 개인적인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개, 고양이만 키우다 늙어버린 사람의 노후“를 지탱해줘야 하는 것에 불만을 갖는다. ‘나’는 ”차별이란 단어를 무기로 써서 속을 거리낌없이 표현할 수 있는“ 이민자 엘리야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노인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있다“고, ”나이가 들어서까지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젊은이들의 막대한 세금을 빨아먹고 있다“고 생각하며 방관자에서 벗어나 집회에 참여한다.

  더불어 여러 유닛을 거치면서 ’나‘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죽음만큼은 모두에게 공평한 것일지 모르나 “죽음의 형태는 그 사람의 계급을 드러낸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유니시엘에서 그것을 명확히 확인하게 된다. 존엄한 죽음에 이르는 방법 또한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선전하지만 사실은 재력이 넘치는 유닛 A나 B의 시니어들에게만 제공되는 서비스”였으니까. “자유는 팍팍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고 했는데 재력이 없는 유닛 F의 이름은 ’프리 하우스‘이다. 무엇이 프리한 걸까.

  이 소설은 ’나‘를 비롯한 청년세대, 젊은이가 고령화시대에 느끼는 늙은이, 노인세대에 대한 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소설에서 ‘나’가 바라는 것이 한가지 있다. 시카모어 섬을 만든 카밀리아 레드너가 ‘나’가 아는 ‘민아 이모’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녀를 다시 만나고픈 순수한 열망, 그리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금수저’이고픈, ‘권(재)력에 연을 만들고픈’ 염원으로 생각될 수 있다. 이것이 혐오와 자기연민과 더불어 청년들의 꿈꾸는 세계인가. 소설에선 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진 않는데 청년세대의 언어는 지극히 공격적이고 극단적이다. 엘리야를 비롯해 유카시엘 고액 연봉자 선택사 담당 의사 재희, 남북 개방 후 북에서 내려온 브로커 수현까지 정형화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청년과 노인에 대한 갈등과 대비를 너무 작위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요즈음 현실이 그렇긴 하다. 극단적인 혐오의 표현을 더 쓰지 못해 안달이지 않은가.

  이러한 현실에서 보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유카시엘 유닛을 거치면서 어떤 인식을 가지게 되었는가. ‘나’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사회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그것이 이 소설의 핵심적인 화두일 것이다. 그에 대한 답은 시카모어 섬의 면접장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소설은 ‘나’의 일기를 통해서 이 모든 사회의 모습과 ‘나’의 생각과 행동 ‘내면’을 속속들이 기록한다. “지금보다 상황이 나아져 있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일기를 끄적”인 ’나‘는 ’사카모어 섬‘에 갈 수 있는가. ’민아 이모‘는 만났는가. ’민아 이모‘는 사카모어 섬의 창시자가 맞는가. 설렘을 주었던 의사 재희와는 어떻게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 ’나‘가 선택한 결정에 만족하는가. 유토피아가 만들어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시카모어 섬”이 유토피아인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좀더 고급버전의 유카시엘 아닌가 싶은데, 가보지 않아서 뭐라 말할 수는 없다. 유카시엘 유닛별로 나타나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삶과 죽음의 형태에 대해 생각해본다. 한편으론 ’나‘가 유닛 A에서 유닛 F의 노인들을 만나는 과정이 아니라 유닛 F에서 유닛 A의 노인들을 만나는 과정이었다면 ’나‘, ’유나라‘의 인식은 어떠한 형태가 되었을지 궁금해진다.

 

 

손원평, 노인, 청년, 세대, 갈등, 혐오, 차별, 젊음, 늙음, 고령화, 일기, 기록, 죽음, 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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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아름다움 - 스물아홉 번의 탱고로 쓴 허구의 에세이
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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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슬픈 감정


남편의 아름다움 - 스물아홉 번의 탱고로 쓴 허구의 에세이

앤 카슨, 민승남 (옮긴이), 한겨레출판

 


   앤 카슨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읽은 책과 아직 읽어 보지 못한 책을 찾아보니 앤 카슨의 책을 처음 읽었던 때보다 더 많은 책이 번역되어 있었다. 고작 두 작품을 읽고도 아는 이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데 새로운 책들이 나올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나 싶다. 새롭게 이 책을 훑어보다가 예전에 이 책을 읽고 제법 ‘분노’에 차 있었구나란 생각에 웃음이 났다. 다시 보면서도 역시 '남편'을 똑같은 인물로 떠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분노를 잠재우고자 그깟 (남편의) ‘아름다움’보다 ‘탱고’에 더 빠졌었던 것을. 세월이 흘렀는데도 안타깝게도 다시 한번 훑어보며 여전히 같은 감정이 솟기도 하고, 달리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리뷰를 쓰고 나서야 예전에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썼음을 알게 되었다. 세월은 내게 동일한 감정을 유지시키기도 하지만 이렇게 기억에 장애를 주기도 하다니......

  앤 카슨은 존 키츠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이 글을 썼다. 단순한 영감이 아니라 이 책 29장마다 존 키츠의 시와 메모, 편지 등에서 인용한 글을 담아 헌정하고 있다. 난 ‘존 키츠’나 ‘T.S 엘리엇’보다도 ‘실비아 플라스’가 생각났고 책을 덮는 마지막까지 ‘남편’은 ‘실비아 플라스의 남편’으로 치환되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리스 항아리보다도, 그리스 항아리에 새겨진 그림보다도 더 아름다운지 정말 모르겠는 ‘남편’인지라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고, 아름다움 앞에 ‘남편’이 붙는 것조차도 탐탁지 않았다. 앤 카슨처럼 뭐, ‘아름다움 때문에 그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그 무엇에도 충실하지 못했던

내 남편. 그럼 나는 왜 소녀 시절부터 우편으로 이혼 판결을

받은 중년의 나이까지

그를 사랑했느냐고?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그건 비밀이랄 것도 없다. 나는 아름다움 때문에 그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

 

  하지만, 앤 카슨이 “그가 가까이 온다면/다시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은 확신을 준다.”라고 이어서 쓴다면 그건 다르다.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때는 부끄러울 것이다! 내게 아름다움이란 그렇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울 때 아름답다고 하는 거라고.

  ‘아내’가 열다섯 소녀 시절부터 오랜 시간 사랑한 ‘남편’은 “그 무엇에도 충실하지 못했고”, “정부가 있다고 말하며 수줍으면서도 자랑스럽게 사진 한 장을 내밀“정도였으며 ”스스로 생각을 시작하는 건 싫어“하여 정부에게 보내는 글에도 아내의 글을 제 것인 양 사용하였으며, ”모든 것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이런 남편. 아니, 이런 정도의 성정과 행태를 보이는 사람을 두고 ‘아름답다’는 표현은 맞지 않을 테니, ”아름다움“은 필시 외형적인 형태에 대한 것일 게다. ‘외형에 대한’ 기준도 결국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말로 ‘절대적 아름다움’이어야 할 테다. 누구라도 믿어 의심치 못할. 저러한 행태를 보이는 남편이라면 더더욱 그래야하지 않는가.

 

나는 많은 아내들처럼 남편을 신의 위치까지 끌어올리고 거기에 붙들어 두었다.

힘이란 어떤 것인가?

친구들이나 가족의 반대는 그걸 더 강하게 할 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남편을 신의 위치로 끌어올리고 거기에 붙들어 두었“다는데. 이젠 달릴 수밖에 없다. 남편은, 남편이, 남편을, 아, 아름다움이라니.

  ‘아내’는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결혼했고 결혼한 지 1년 남짓한 때 남편에게서 직접 외도 고백을 듣는다. 다행히 사랑하고 결혼하고 배신을 겪은 뒤 ‘별거’도 ‘이혼’도 한다. 다만, 여전히 남편의 아름다움을 추종한다. 아니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 맞는가. 남편은 끊임없이 아내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필요를 얘기하고 감정적 반응을 바란다. 아내는 여전히 남편의 ‘아름다움’ 때문에 헷갈린다. 이토록 절절한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이라니! 아니, 외도한 남편으로 인해 겪은 그 마음들을 단지 욕설과 분노로서가 아니라, 우아하게 비틀어 표출할 수 있는 아내의 아름다움이라니!

  존 키츠는 ”아름다움이 진리“라고 했다. 아름다움이 인간 구원이라고 했다. 존 키츠의 후예인 것 같은 아내라면 ‘아름다움’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아름다움이 외형이 맞는가. 아름다움이 도덕적인 비난을 줄줄이 발사하게 만드는 그 순간마다 속속들이 있는가. ‘탱고’는 겉으로는 화려하게 보이는 춤이지만 ”춤추는 슬픈 감정*“이라 불린다. 이민자들의 애환-고독과 상실, 향수, 사랑의 아픔 등이 깊게 담겨 있다. 이 슬픔 감정을 파트너와 함께 표출한다. 수많은 감정을 상대와 함께 호흡하며 맞추어가는 춤. 이 춤을 통해 위로받고 치유될 수 있다면 탱고야말로 구원이다. 아름다움이란 결코 외형적인 것만이어서는 안된다. 모든 상실과 고통을 격렬한 탱고로 춰버리고 나면, 마침내 찾아오는 치유의 순간에 머뭇거림도 사라지고 ‘신의 위치’ 또한 바뀌어 가려졌던 인식도 뚜렷해지지 않을까.

 

모든 신화는 풍부해진 형태이자,

두 얼굴을 지닌 것으로,

그 주체로 하여금 겉과 속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이중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이유로 고대에는 모든 시인이 거짓말쟁이라는 관념이 존재했다.

 

  ‘아내’와 ‘남편’이란 관계에서 대놓고 무식하게 폭력적인 사람보다도 더 끔찍하고 역겨운 사람은 고급 언어를 휘두르며 우아하고 고매한 ‘척’하며 ‘선’을 넘는 사람이다. 거짓과 교묘한 언어로 사람을 휘두르려는 자, 자기 통제 속에 사람을 가두려는 자다. 정말로 자신이 ‘신’인 것처럼 구는 그런 인간.

  남편은 ‘신들의 방식이라고 부르는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했다’ 전혀 다른 의미로, 마음대로 의미를 바꾸어. 모든 것에 대해 거짓말하는 존재. 비로소 아내가 남편을 직시하며 깨닫고야 마는 것은 ”남편“과 ”아름다움“을 동일시, 절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은 아름다움의 일부임을 깨닫는 것이다. 또한 도덕적이지 않고 여러 가지로 모순과 거짓과 문제가 많은 남편이 아름다웠다고 한 것처럼 아름다움이 곧 선함, 도덕성과도 일치하지 않음도. ”삶에는 몇 가지 위험들이 있고 사랑은 그중 하나이며 끔찍한 위험들.“이지만, 그럼에도 아내는 ”아름다움을 붙잡아라“라고 외친다. 남편을 사랑했던 순간도 삶의 일부이며 생, 그 모든 순간 그건 결국 ‘아내의 아름다움’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 가지를 간과했다.

아름다움을 접하게 되면 그것이 우선하게 될

것임을―내 심장 속에서,

이미 먹혀버린,

목적의식과 신전들과 신이 있는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그곳에서 그는 이미 나였다.

나의 상태였다.

 

  내가 간과한 것은 이 책 속 그렇게 길게 등장하지 않는 '레이', '돌로르', '메르세드'는 이름이 있음에도 ‘아내’와 ‘남편’은  이름이 명명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특정한 누군가를 떠올리며 분노한 것이다. ‘특정인’에 매몰되어 인식할 때 나의 한계는 분명했다. 특정인에 대한 '분노'와 '비난'만이 합당한 것처럼 여기며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내가 이름붙인 '등장인물'의 이름을 지우고 ‘아내’와 ‘남편’으로 인식할 때, 언어는 보다 풍부해지고 세계 또한 확장된다.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에 대한 인식도 그것을 '진리'로 인식하는 마음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삶은, 스물아홉번의 탱고만으로는 부족할 얘기가 넘치기야 하지만 오로지 단순한 분노의 폭발이 아닌 '춤추는 슬픔 감정'을 출 때, 아름다움을 붙잡을 수 있을 것 같다.



*https://v.daum.net/v/20080530095512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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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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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니까


남극 Antarctica. 클레어 키건 (지은이), 허진 (옮긴이), 다산책방, 2025-12-17.

 


  이 작품이 클레어 키건의 첫 작품이라고 한다. 출판사가 출간해 주는 순서대로 읽다보니 작가의 데뷔작을 가장 마지막에 읽게 된다. 클레어 키건의 대표작 『이처럼 사소한 것들』, 『맡겨진 소녀』에서 느낀 느낌을 안고 책을 펼치면, 움찔한다.

   ‘아일랜드’는 가본 적 없는 곳이지만 국가명만으로도 사람을 생각에 잠기게 한다. 건조하며 서늘하지만 매섭진 않은, 묘하게 아득한. 또한 가본 적 없는 ‘남극’은 극한의 추위 속에서도 ‘펭귄’ 하나가 대표적으로 떠올라 갑자기 동화같은 상상 속에 빠지게 된다. 그렇기에 ‘남극’을 사실주의 그림이 아니라 동화같은 판타지 세상으로 이미지화하여 책을 읽는 순간, 전례없는 폭풍을 경험한 듯 매서운 추위를 느낀다.

  『남극』을 관통하는 단어는 아마도 ‘남자’가 아닐까. 다른 말로 하면 ‘남자’로 대변되는 폭력과 억압의 세계, 그에 동조하여 무력하거나 피폐해지는 여성들의 이야기. 이렇게만 적어놓고 보면 페미니즘 문학이다, 익숙하게 보아 온 서사다, 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아니다! 클레어 키건이 다루는 이 이야기는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도 그 내용도 다르다. 클레어 키건 특유의 건조한 문체가 덧대어져 감정적으로 휩쓸리지 않는데, 감정은 극에 달한다.

 

그녀가 어렸을 때 수녀님이 지옥이란 사람마다 다르다고, 각자가 생각하는 최악의 장소라고 했었다. “난 지옥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추운 곳이라고 늘 생각했어요. 반쯤 얼어 있지만 절대 의식을 잃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차가운 태양과 당신을 지켜보는 악마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어요.” (…)

“그러면 나의 지옥은 황폐한 곳이겠네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 말이에요.” 남자가 말했다. “악마도 없고. 지옥에 사람이 바글바글할 줄 알고 늘 마음 놓고 있었는데. 친구들이 전부 거기 있을 테니까요.”_「남극」

 

  「남극」의 강렬함은 표제작이라 첫 페이지에 배치되어 모든 감각을 마비시킨다. 그러니까 지금 ‘지옥’에 ‘영원’히 갇혀버린 여자를 본다. ‘남자’가 만든. 그러나 생각할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것,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던 여자”에 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서다. “행복”한데 왜 여자는 “멀리 나갈 때마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하는지, 그건 무료함일까. 어떤 결핍이 있다면 그걸 “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행복한 결혼 생활”에 갇혀 생각이 너무 빙빙 도느라, 뛰어넘어보기로 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던 여자”의 일탈에 대한 의외성을. 극히 미미하게 묘사된 그 일상의 모습을 “행복한”이라 할 수 있는지를.

  어떤 일탈은 극단적인 상황을 초래한다. ‘남극’에 대한 동경인 걸까. ‘남극’을 동경할 수는 있다. 가보지 않았던 곳, 그곳의 실체를 알 수 없으니. 그러나 남극은 지구에서 가장 추운 곳, 단지 춥다는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곳이다. 자연의 극한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아, 이렇게 생각하니 왜 남극이라 제목을 지었는지 알 듯하다. 너무나 행복한 일상과 대비되는 남극의 풍경이.

 「남극」속에서 주요한 것은 위의 인용문에서 보는 것처럼 남자와 여자의 ‘지옥’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던 여자”로 본다면 자칫 여성이 이 ‘남극’에 있게 됨을 ‘불륜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할 여지가 있다. 종교에서 간통한 여성에게 행하는 ‘마땅한’ 형벌로 ‘여성의 욕망’에 대한 형벌이라는 당연성으로 귀결될 수 있음이다. 불륜이 문제라고 한들 ‘여성의 욕망’은 어째서 ‘남성의 폭력과 통제’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인가. 여성이 자유롭고 탐험으로서의 성적 욕망을 희망한다고 할 때, 남성은 늘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대상, 소유와 통제의 대상으로 여성을 위치시킨다. 결국 두 동등한 성적 욕망이 맞닥뜨렸지만, 여성은 자신의 몸과 정신의 주체성을 남성에게 폭력적으로 빼앗기는 존재가 될 뿐이다. 영원한 지옥에 갇힌, 남성이 만든 ‘남극’의 세계 속으로.

  그래, 어쨌든 「남극」을 성적 욕망으로 행복한 가정생활을 일탈한 여자가 당한 비극이라 치다. 그러면, 성적 욕망을 바라지도 않았던 그 많은 여성들은 ‘행복한 가정’ 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폭력과 억압 속에 휘둘리는가. 소설 속 여성들, 삶은 왜 이다지도 힘든가. 그 ‘힘듦’을 준 것이 남성들이라는 점, 남성들의 세계라는 것을 키건은 잘 보여준다. 아, 결국 「남극」속 여자는 “포기해놓고 그것을 행복이라고 불렀던“ 건가.

 

방에서 친척 여자들이 차를 들고 내 주변으로 모여든다. 찬장 깊숙이에서 꺼낸 도자기 잔과 잔받침이 쟁반에서 쨍그랑거린다. 트위드 차림의 뼈대가 굵은 여자들로, 나에게 옳고 그름과 예의범절을, 또 힘든 노동의 가치를 가르쳤다고 생각한다. 포기해놓고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르는, 배가 납작하고 변덕스러운 여자들. 우리는 남자를 위로하는 여자와 절대 거절하지 않는 남자의 후손이다._「남자애한테는 이상한 이름」

 

  소설 속 아일랜드, 교외의 가정들은 한국을 닮았다. 이렇게 먼 이국의 가족풍경이 한국과 닮았다니. 그 속엔 아이를 책임지려 하지 않는 남자가 있고, 자식에게 무관심하며 차별하는 남자가 있고, 아이와 아내를 여자를 두들겨 패는 남자가 있고, 불륜을 일삼는 남자가 있고, 강간하는 남자가 있고, 일하지 않는 남자가 있다. 그들은 왜 그럴까. ”남자니까.“ 그래도 된다고 누가 부여한 것인마냥. 이 사회에서 언제나 그 하나면 족하다. ”남자니까.‘

 

아빠가 다트판을 직접 건 다음 다트를 던지고 분필로 점수를 적는 동안 엄마와 나는 모자 달린 방한 재킷을 입고 돼지와 소와 양에게 먹이를 주고 암탉을 밖으로 내보낸다.

“왜 아빠랑 오빠는 아무것도 안 해요?” 내가 엄마에게 묻는다.

나는 따뜻한 짚 안으로 손을 넣어 더듬더듬 달걀을 찾는다. (…)

“남자니까.” 엄마는 이 한마디면 전부 다 설명된다는 듯이 말한다.

_「남자와 여자」

 

  남자니까, 남자라서 그저 절대적인 권력과 폭력을 휘두르며 다른 이들을 그 권력에 순응하도록 하고 서로를 싸우게 만든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아버지의 손이 어떻게 15년 동안 어머니를 멍들게 했는지” 말해주면서 “똑같이 잔인한 눈을 가졌기 때문에 나도 아버지만큼 싫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남자가 아닌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마는데 계속 이 ’위험하고 찌질한‘ 남자들로 인해 ’행복을 포기하고 말 것이냐‘는 생존과도 직결된다. 되물림되는 폭력과 그로 인한 고통과 상처는,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적어도 “욕망”도 감추고 순응하고 “포기해놓고 그것을 행복이라 부르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나는 너에게 위안을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남자를 아이처럼 보살피는 여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여자는 내 세대에서 끝이다. _「남자애한테는 이상한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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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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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야, ‘인간’이란 그런단다


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한겨레출판, 2026-04-04.

 


  요즘 아니 그보다는 좀 더, 쪼~금 더 된 어느 때부터 “나쁜 무리”가 많음을 느낀다. 그들은 매일매일 매시간, 이렇게 확인하고 외치고 있는 건 아닐까. “이제부터 우리는 한패야”

이러한 ‘나쁜 무리’들이 내 삶을 망가뜨리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나쁜 무리’들의 움직임은 언제나 유치하게 기민하다. ‘나의 무리’가 아닌 ‘너의 무리’, 나는 ‘너’를 알지만 나는 그들과 ‘한패’가 되지 않으려 한다.

  “정말이지, 서로가 서로에게 길이 들었군요.” _「작은 벌」

  아, 생텍쥐페리 「어린왕자」속 ‘길들이다’는 단어가 이토록 불온하게 들리는 상황이라니. 여우야, ‘인간’이란 그런단다.

 

 《너의 나쁜 무리》는 일곱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읽었을 땐 불온하게 봤다. 뭐 이렇게 하나같이 나빠. ‘뭐지!’ 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나서는 그 감정이 많이 소멸되어 ‘뭐지?’.

〈작은 벌〉은 탈주극이다. 죽음을 앞둔 환자와 보호자가 사설 구급차 운전원 ‘이중일’에게서 구급차를 빼앗는 상황을 보여준다. 어떡하든 이중일을 속이고 구슬려 구급차를 탈취하려는 이들과 어리버리하게 휩쓸리는 이중일의 모습엔 살고자 하는 자와 살기 싫은 자의 대비가 뚜렷하다. 구급대원으로 타인의 삶, “환자들의 삶에 관여하는 것이 죽도록 싫었던” 이중일은 그럼으로써 ‘평화’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제 그에게는 ‘평화’가 올까? 그렇다면 제목은 왜, 「작은 벌」일까.

 

그들은 결코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이중일은 속으로 그 문장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거짓말같이 그들은 선한 사람들이며 자신에게 결코 해를 끼치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추운 뺨에 더운 손」은 관계 ‘맺음’이 아니라 이미 관계인 사이의 ‘끊을 수 없음’에 대한 이야기다. 추운 뺨에 더운 손은 한 명의 상태일까, 두 명의 상태일까. 추운 뻠에 갖다대는 더운 손이 타인의 것이라면, 일단 두 사람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만은 않은 듯하다. 그것이 허용되는 관계인 것이니, 이미 이뤄진 관계에서 그 상황을 호의, 선의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아니면 거부하고 싶은가가 중요하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함께 볼 수 있는 게 마임이야. 내가 그것을 보고 있다는 믿음을 통해서.

 

  ‘선의’를 쉬이 파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얼마나 쉬울까. 하지만 ‘선이’에게 ‘선의’를 파악하는 건 쉽지 않다. 이미, 선의로 해석될 수 없기에.

  ‘선이’의 엄마는 다른 사람의 돈과 물건을 훔친다. 이런 엄마라서 부끄러운 ‘선이’는 엄마와 분리되고 싶다. 그러나 ‘엄마’라는 이 관계가 완전히 타인이 될 수 있는 존재일 수 없다. 더구나 어린 ‘선이’에게는 더욱. 그렇기에 선이는 “나로 살고 싶고”, 나로 살고 있는 이들을 미워한다. 엄마에게 짓눌린 어린 ‘선이’가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방법은 있는가. 이해는 해야 하는 건가. ‘선이’에게 새로운 시각을 던져주는 인물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 친구 ‘기문’이다. 선이는 ‘기문’이 그 옛날 자신의 엄마가 훔쳤을 ‘기문’엄마의 금두꺼비를 달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건 그들의 관계도 더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불안을 주는 부분이기도 하니까. 여기에 ‘기문’은 ‘마임’ 이야기를 한다. ‘기문’의 마임 철학을 통해 ‘선이’는 ‘선의’를 볼 수 있을까.

표제작과 같은 「너의 나쁜 무리」속 이 ‘무리’들을 뭐라 불러야 좋을까. “쉽게 오염되거나 잃어버리기 쉬운 물건은 아예 들이지조차 말라”고 했던 여사, “여사와 우리가 되기 위해 애썼던” 유선. 버림받는 것에 두려움을 갖는 둘은 동일한 사람에게 버려진 사이다. ‘여사처럼 살 거다’라 외치지만 ‘너도 떠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여사를 위해 기꺼이 버림을 선택한 유선이다. 정말 진심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인 건가. 「너의 나쁜 무리」속 전개는 점점 점입가경이 되는데, 궁금해진다. 이들의 행동이 ‘연대’라 할 수 있나. ‘유대’라 할 수 있나. 어떤 의미로 서로의 비밀을 움켜쥔 사이에서 무척 강한 연대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부정적일수록 접착력을 더 강화하며 쉬이 물드는. 나쁘지 않은 것, 맞나?

 

나는 여사처럼 살 거다. 아주 많은 사람에게 마음 주고 몸 주고 절절매며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갈 테다. 그러다 진심으로 그런 생각도 했다. 나쁘지 않은데……?


 「아무 사이」. 아무 사이는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사이를 말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사이를 말하는 걸까.

  시터 일을 하는 ‘희지’는 이 일에 의미를 둔다. 이전일을 하면서 쌓인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변화된 것이다. 그러니까 할머니들을 돌보며 이들에게 자신이 필요한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희지’는 성심성의껏 노인들을 돌보고 애정을 쏟는다. 그런데, “아무 사이”라니. 여기 “아무 사이”는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 전혀 관계맺음이 필요없는 사이, 이미 맺어진 그 어떤 관계에도 불구하고 ‘엮이고 싶지 않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니까, ‘희지’를 이른바 ‘고용’하고 있다 여기는 보호자가 ‘희지’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심지어 희지의 돌봄을 받는 노인조차도 마찬가지다.

 

“저는 최선을 다했는데요.”

“희지 씨, 그러지 말아요.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요.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정말로. 그래서 괜찮은 거예요.”

 

 「작은 벌」에서는 최소한의 관계맺음도 없기를 바라는 건조한 사이에 끈끈이가 뿌려져 뭉침이 이루어졌는데, 「아무 사이」에선 최선을 다한 ‘애정’을 주었음에도 끈끈이가 붙지 않을 수 있음을 보는 듯하다.

 「너의 나쁜 무리」속 ‘여사’님의 말마따나 “딱히 중요하지도 않은 주제에 사람 마음을 초조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이 각각의 소설에 있다. ‘징글징글한’ 관계다. 이 징글징글함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항상 반경 안에 있게 되고 “너무도 쉽게 흔들리고 마는 꼴”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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