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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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숟가락 세상에서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엘리, 2016.


  천국과 지옥에 관한 기억에 남는 묘사는 두 곳에 긴 숟가락이 있다는 이야기다. 입에 닿지 않는 숟가락 때문에 굶주리던 사람들이 서로에게 떠먹여 준 곳은 천국이, 여전히 제 입에만 떠 넣으려고 아우성치는 곳은 지옥이 되었다는. 손가락으로 먹으면 안되나, 생각했지만. 이게 중요점은 아니었을 테니.

  「지옥은 신의 부재」역시 신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신이 있다는 것부터 증명해, 라고 하면 이야기를 이어갈 수 없다. 신이 존재한다면 세트급인 천사, 천국, 지옥 역시 존재한다. 소설에서 지옥은 지상과 큰 차이가 나지 않고 단지 살아 있었을 때 충분히 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회오가 큰 벌이 될 뿐인 곳이다. 영원하며 건강한 육체로 회복되기까지 한다. 그러니 선천적 장애를 갖고 태어난 닐은 천국이든 지옥이든 아무 상관없으며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런 닐이 어떻게 신을 믿게 되었는가.

  지상에 천사가 강림할 때면 행운과 악운을 가져다준다, 고 사람들은 믿는다. 누군가에게는 행운이 누군가에게는 악운이 닥치지만 그에 관한 건 오로지 신의 뜻일 뿐. 닐의 아내, 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사라는 천사의 강림 시 사망한다. 어릴 적부터 선천적인 장애를 가진 닐은 신의 뜻―보다 구체적으로는 신의 벌―이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고 그런 이유로 다른 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 그런 닐을 사랑해주는 아내가 사라진 고통의 닐에게 장모는 사라의 죽음을 신을 믿지 않는 닐의 탓으로 돌린다. 닐은 “납치범이 아내를 돌려준다는 대가로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하며 분노를 느끼지만 영원히 사라와 함께 하고픈 닐은 사라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신을 믿는 것뿐임을 깨닫는다. 사라는 천국에 있으므로. 이제 신을 믿기 위한 닐의 다각도의 노력이 펼쳐진다.


사람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신을 사랑할 수는 없고, 단지 신을 신으로서 사랑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당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신을 사랑함으로써 당신의 배우자와 재결합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진정한 신앙심을 보여준 것이 아닙니다.


  ‘신을 신으로서 사랑하라’는 말의 의미를 곱씹어본다. 여기서 ‘맹목성’이 ‘폭력성‘이 느껴진다면 난 천국에 가긴 글러먹은 걸까. ’신으로서’라는 절대성, 모든 것은 신의 뜻이요 신의 의지라는 말은 신을 믿기 위해 닐이 만나게 된 사람들에게도 주된 화두다. 어떤 이는 “신은 모든 사람이 같은 종류의 시련을 겪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각자가 스스로의 시련을 겪는 것이야말로 신의 의지”라고 얘기한다. 신의 ‘의지’란 도대체 무언가, 보여주려는 것이 무엇인지 무얼 얻고자 함인지 알듯 애매하다. 어떤 시련을 누구에게 줄지 모를 신의 ‘의지’에 휘둘리는 가련한 신의 어린 양들은 신이 준 시련이 벌인지 소명인지 헷갈려한다. 신의 뜻으로부터 메시지를 읽는 사람들의 행태는 각기 다르다.


타락 천사들의 강림은 드물었고 행운도 악운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들은 신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상상 불가능한 자신들만의 일을 수행하면서 인간계를 잠깐 지나갈 뿐이었다. 그들이 나타날 때면 사람들은 질문을 하곤 했다. 당신들은 신의 의지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당신들은 왜 반란을 일으켰는가? 타락 천사들의 답은 한결같았다. “너희의 일은 너희가 결정하라. 그게 바로 우리가 한 일이다. 너희도 우리처럼 하면 될 것이다.”


  어떤 상황에 대해 명백한 원인과 결과가 성립하는지 알 수 없이 모든 것은 신이 그렇게 하신 것이라는 생각 하나만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 그렇게 사는 것이 천국이겠구나 싶기도 하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신의 뜻이니 슬퍼하거나 서러워할 것 없이 그저 행복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도 말이다. 어떡하든 천국으로 가기를 행운을 얻기를 바라며 그들의 ‘신의 뜻’을 내세우며 하는 행동들은 이해하기 버겁다. 들여다볼수록 이해할 수 없는 세계. 난 역시 전세계적 전염병 확산 상황에서 벌어지는 종교인들의 결정과 그런 결정으로 이끈 ‘신의 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이해하기 싫은) 사람일테고 신의 뜻에 영원한 의구심을 품을지언정 그 속에서 행복할 수는 없을 테니.


닐은 자신이 지옥으로 보내진 것이 그가 한 어떤 행위의 결과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것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고, 고차원의 목적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 때문에 신에 대한 닐의 사랑이 줄어드는 일은 없다.


  천사의 강림을 목격한 닐은 차량전복으로 사망한다. 그 순간 천상의 빛을 보며 진정 신을 믿지만……사라와는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 진정 신의 구원을 얻을 자격을 얻었건만 신은 닐을 지옥으로 보냈으므로. 천사 강림 시 사형집행중이던 연쇄강간살인범은 천국으로 간 것이 목격된다. 피해자들은 격분하지만 성직자들은 피해자들을 위로하며 말한다. 그건 신의 뜻, 그리고 살인범이 제 인생의 몇 배는 속죄를 했을 거라고….

 「지옥은 신의 부재」는 요즘의 시기에 영화 미드 소마와 같이 생각나는 작품이다. 긴 숟가락이 지배하는 천국과 지옥 세상에서 중요한 건 천국과 지옥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보여준다. 지금, 긴 숟가락이 난무한 이러한 상황에서 여긴 지옥일까 천국일까.

  닐의 지옥에서 신은 없겠지만 닐은 신을 계속 사랑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닐의 이야기를 들먹이며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 역설할 지도 모르겠다. 신이 부재하는 곳이 지옥이 아니라 신이 존재하기에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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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
오인칸 브레이스웨이트 지음, 강승희 옮김 / 천문장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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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제의 용도를 알고 있다


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 오인칸 브레이스웨이트, 2019.


  장담컨대, 표백제가 피 냄새를 감춰 준다는 사실은 다들 몰랐을 거다.

  이렇게 소설은 시작한다. 안타깝게도 표백제의 역할을 잘 알고 있다. 크게 이슈가 된 사건의 범인들이 그렇게(그보다 더한 방법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전혀 놀랍지 않다. 놀라(야 하)는 지점은 따로 있다. 동생 아율라의 살인했다는 전화(동생이라고?)에 당연한 듯 달려가 범죄현장을 은닉하는 코레드다. 코레드는 꽤 익숙한 듯 문제를 ‘꼼꼼하게’ 처리한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데 그 누군가는 이 사람에게 소중한 사람이에요. 이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정답. 코레드가 한 것처럼 시체를 처리하고 현장을 치운다. 신고는? 시체를 처리했다는 것이 신고하지 않겠다는 의지 아닌가. 동생인데,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고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코레드에게 그런 선택을 하게 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아율라의 범행 동기는 무언가. 아율라에게서 살해된 남자들은 모두 애인이다. ‘모두’라는 말에 범행 전력이 단 한번이 아니라는 걸 유추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선 코레드가 한 말을 인용하면 되겠다. 셋부터는 연쇄살인범이 되는 거야!

  코레드의 시선에서 서술되는 소설은 짧은 호흡으로 빠르게 진행된다. 후다닥 살인을 하고 빠르게 그 시신을 처리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동생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흔들리는 지점이 온다. 살인현장을 치우는 코레드의 행동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고, 살인을 저지른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춤을 추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지켜왔던 그 마음이.

  아율라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작은 몸집, 긴 속눈썹, 도톰한 입술을 가진 인형”이다. 코레드도 아율라가 매우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것을 안다. 동생과는 달리 코레드는 몸이 크고 아름답지 않다. 간호사 코레드가 마음을 준 직장 동료 의사 타데는 다른 이들과 달리 코레드에 친절하고 자상하다. 코레드는 타데에 대한 연모로 가득하지만 타데는 아율라에게 반하고 만다. 코레드는 동생에 대한 질투와 타데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하다. 아율라는 남자친구, 그녀의 애인이 조금만 성가시게 해도 그렇게 해버리고 마니까. 사람들은 아율라가 착하고 천사같고 여리다고 생각한다. 


“걔가 예뻐서 그래요. 그게 다예요. 남자들은 다른 건 신경도 쓰지 않아요. 그 애한텐 모든 게 무사통과죠. 말이 되냐고요, 내가 동생을 지지하지 않는다니, 동생을 사랑하지 않는다니…타데가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든 건 동생이에요. 동생이 그렇게 말했겠죠. 그 모든 일을 함께 겪고도….”


  이제 소설은 아율라의 아름다움과 코레드의 아름답지 않음을 대비하며 둘의 연대가 깨어질 것을 암시한다. 아율라와 코레드는 타데를 사이에 두고 각자의 방법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려 한다. 코레드는 이성적이고 완벽해 보이는 타데가 다른 남자들처럼 아율라의 미모에 무력해지는 것을 보기 힘들다. 살인자인 아율라는 그에 대한 걱정도 고민도 없이 일상을 즐기는데 코레드는 죄책감과 불안에 떨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코레드에겐 버겁고 불편하며 아율라에 대한 반감이 증가한다. 자, 이제 코레드는 어떤 행동을 보일까.

  작가를 천재적 능력이라 칭하며 '현 시점을 대변하는 이상적인 소설'이란 칭송을 받고 있다는 이 소설의 매력은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에 대한 찬사가 소설에 대한 매력을 반감시킨다. 매력적인 외모의 싸이코 연쇄살인마에게 그렇게 열광적일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아율라의 살인을 묵인하는 코레드의 행동에 어떤 반전이 있어야 한다. 납득할 만한 서사가.  

  아율라가 너무도 당당해서인지 코레드에게 외치게 된다. 너 왜 그랬니? 이제 그만해. 아율라의 살인을 부추긴 것은 너라고. 처음부터 완벽하게 시신을 처리해 줄 것이 아니라 신고를 했어야 한다고. 늘 문제해결사로 달려가 주니 아율라가 계속 살인을 하게 된 것이라고, 이렇게 코레드를 몰아붙이면 이또한 아율라의 외모에 넘어간 반응인 걸까. 하지만 소설이라는 한계로(즉 아율라의 외모를 볼 수 없기에) 눈이 아득해지는 일은 없다. 뿐만 아니라 어찌해도 현실이란 생각을 하면 용서가 될 리 없다. 더구나 아율라를 코레드를 고유정으로 대치시키면 이야기가 갖는 느낌은 달라진다. 고유정은 살인의 이유를 성폭력이라 주장했다. 다만 고유정은 살인도 범죄현장 처리도 완벽히 홀로 처리했다. 전화를 해서 현장을 치워줄 코레드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외모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코레드의 분노가 아율라에게로 향하면 소설은 강력한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여성의 질투를 부각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고유정이 정당방위를 주장하는 살인의 이유와 같이 두 자매가 연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함께 겪은 폭력의 경험이라면 자매의 연대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렇게 지켜온 두 자매의 연대는 타데로 인해 흔들리는 시점, 코레드의 연대는 지켜질까, 아닐까. 두 자매의 비밀을 아는 어떤 존재가 있다면 코레드는 이제 아율라의 살인현장을 처리하는 것에서 직접 살인을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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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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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박사


밀크맨, 애나 번스, 창비, 2019.


“내게 딸이 있다면, n번방 근처에도 가지 않도록 평소에 가르치겠다. 내 딸이 지금 그 피해자라면 내 딸의 행동과 내 교육을 반성하겠다”

- 경제연구소 박사라는 자 曰. 2020년


“사진 찍어 돌린 남자가 90% 잘못한 것이지만 처음 만난 사이에 술에 취해 잠이든 여성도 10%의 잘못은 있어 보인다“  - 의학 박사라는 자 曰. 2015년


  숨쉬는 것처럼 이런 말을 들어왔다. 박사뿐만 아니라 검사, 의원, 교수, 사장, 회장, 기자 할 것 없이. 회장이 호텔방에서 검사가 별장방에서 경찰이 클럽에서 행했던 ‘그 일’에 피해자를 공격하고 탓하며 혐의없음을 만들어주니 끝없이 ‘방’들이 생겨나는 거다. 무한히 뻗어나가는 n번방. 박사가 무한 증식한다. 

  맨부커상 수상작(2018) 『밀크맨』을 생각한다. 폭력 상황에 노출된 열여덟살 익명의 소녀가 그 상황과 심정을 토로하는 소설, 특정 장소도 인물도 지칭하지 않지만 뚜렷하게 상황이 인식되는 소설, 상당한 몰입감으로 소녀의 말에 귀기울이게 되는 소설이다. 언제 우리가 피해자의 목소리에 제대로 귀 기울인 적 있던가. 지치지 않고 이야기하는 소녀의 언어는 그렇게라도 해야만 숨쉴 수 있을 거라는 외침이며 증언이기에 한마디도 놓칠 수 없다.

  소녀가 살고 있는 마을은 길 하나를 두고 대치중이다. 무장세력과 무장세력 간의 테러와 보복이 극에 달한 ‘일촉즉발인 사회’다. 북아일랜드 출신인 작가이기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세력과 저지하려는 세력이 대치했던 1970년대 북아일랜드 상황을 배경으로 생각하게 되지만 작가는 그 어떤 구체적 지칭을 하지 않는다. 길건너, 물건너, 국경너머와 같이 장소를 말하며 북아일랜드만을 한정하지 않은 확장된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한국도 떠오르고….

  십남매의 가운데아이, 열여덟 소녀는 책읽기를 좋아하며 길을 읽으면서도 책을 읽는다. 어느날 소녀에게 한 남자가 다가온다. 사람들이 밀크맨이라고 칭하는 우유배달부, 하지만 우유배달부가 아닌 마흔한살의 유부남인 밀크맨은 소녀가 있는 곳곳마다 불쑥 나타난다. 소녀는 ‘개인공간 침해’라는 게 뭔지 몰랐고 ‘불편한 느낌을 가지더라도 누군가가 접근하는 것을 꺼리거나 거부할 권리가 있음’도 알지 못했다. ‘신체 폭력이 없는 한, 명백한 언어적 모욕이 가해지지 않는 한, 눈앞에서 조롱당하지 않는 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게 기본 원칙이었으니, 그러니 일어나지 않은 일에 피해를 당했다고 할 수도 없었던’ 소녀는 밀크맨으로 인하여 불안과 공포의 일상을 보낸다. 소녀는 밀크맨의 행동에 대해 가족에게도 어쩌면 남자친구에게도 이웃 사람들에게도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만약 내가 “『아이반호』를 읽으면서 경계 도로를 따라 걷는데 그 사람이 차에 타라고 했어”라고 말한다면 “대체 왜 위험한 경계 도로를 따라 걸었고 왜 『아이반호』를 읽었는데?”라는 말이 돌아올 것이다. 만약 내가 “저수지 공원에서 러닝을 하는데 밀크맨이 나타나서 나하고 같이 달렸어”라고 한다면 “그렇게 위험하고 수상한 곳에 대체 왜 간 거고 러닝이라니 그런 걸 왜 했니?”라는 말이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제대로 알려 하지 않고 소녀와 밀크맨이 불륜관계이고 소녀가 밀크맨을 유혹한 것이라 소문을 부풀린다. 근거는 없다. 소녀가 길을 걸으며 책을 읽는 게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라 탓한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면 이유는 하나, 무장독립투쟁군조직의 주요 인물이라는 ‘밀크맨’이 가진 지위 때문이다. 사실과 진실에 무관하게 권력에 대한 맹목적 믿음과 충성은 열여덟 소녀의 삶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눈에 보이는 폭력이 마을 전체를 휘감은 상황에서 밀크맨과 가족과 친지와 이웃의 이 폭력까지 견디며 살아간다. 마을 사람들은 ‘정치적인 것과 무관한 죽음이 일어나면 당황하고 불안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하면서 그들이 소녀에게 가하는 이 폭력을 인지하지 못한다.

  소녀는 말한다. 밀크맨 때문에 ‘얼마나 꽉꽉 닫혀 있었는지, 얼마나 감정도 생각도 없는 존재로 굳어졌는지’를. 더불어 그것은 ’공동체 때문, 정신적 분위기 때문, 점령 상황 때문이기도‘하다고. 한 사회가 가진 의식이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 수 있다. 한국 역시도 소녀가 당한 ‘폭력’의 문제를 정치적인 대립으로 이끌어 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도록 여성을 향한 폭력에 관대하게 반응한 이 사회가 이번 n번방 사건에선 다를 수 있을까. 달라진다면 그건 뚜렷하게 ’권력‘을 가진 가해자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일지, 제외하고서일지 알 수 없다. 소녀의 마을에서 보이는 분위기는 한국 사회에 흐르고 있고 수많은 밀크맨들 간 카르텔이 공고하다.

  그래서, 그렇다고, 소녀는 계속 타인의 공포 속에서 움츠리고 있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소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지, ‘자기와 대립하는 세상에서 겹겹의 장애물을 맞닥뜨리면서도 자기 방식을 고집한다면 미친 건가’를 물어보게 된다.


만약 우리가 이 빛을, 투명함을, 광휘를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그걸 즐기게 되고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익숙해지면 어떻게 될까, 그걸 믿게 되고 기대하게 되고 감명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희망을 갖게 되고 해묵은 전통을 버리고 빛에 물들고 빛을 흡수해서 우리 자신이 빛을 내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나는 소녀가 끊임없이 책을 읽는 장면을 떠올린다. 이것은 총격과 살인이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 총을 든 자와 총을 따르는 자들과 대비된다. 소녀는 많은 부분을 책에서 질문을 구하고 답을 찾는다. 그래서 소녀는 마을 사람들과 ‘다르다’. 공동의 적을 향해서는 오로지 하나의 목표에 모든 것이 매몰된다. 공포와 억압으로 다양성을 통제하며 매우 중요시되어야 하는 ‘인간존재’를 무시하고 인간을 도구화시키는 까닭이다. 소녀가 폭력과 전체주의 사회에서 깨달은 것.


살다보면 많은 일이 믿음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법이다. 나는 결국 산다는 일이 믿음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일이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아무튼 밀크맨의 이름에 대한 소식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속았다고 생각했고 겁에 질렸고 당혹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밀크맨’을 가명이나 암호명이라고 생각했을 때에는 신비스럽고 은밀하고 연극적인 가능성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 이름이 상징이 벗겨진 채 일상적이고 평범하고 친근한 톰, 딕, 해리 같은 이름의 세계로 끌어내려지자 무장단체 핵심요원의 이름에 덧붙였던 존경심이 순식간에 줄어들더니 아예 사라져버렸다.


  익명 세상에 숨어 있던 박사가 이름을 찾았다. 이름이 드러난 순간 익명 세상에서 벌이던 행태와는 다른 행동을 보이고 사람들 역시도 다른 태도를 보인다. 박사의 실체를 찾아내는데 어느 피해자의 끈질긴 노력과 구체적인 행동이 있었다는 글을 보았다. 그 분의 노력에 빛이 들어야 한다.


타인에 대한 공포처럼 다른 사람의 심리를 장악하는 것들은 숙주가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고 숙주를 제거하면 자기도 제거될 수밖에 없다.


   ‘여성 문제는 혼란스럽고 까다롭고 아주 빌어먹게 성가신 문제이고 문제 여성들은 완전히 맛이 간 사람들‘이라는 신념을 주장하며 여성을 도구화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것들에게 『밀크맨』이 닿지는 않을 테니, 그들이 가지려 애쓰고 가지고 있는 ’권력‘을 제거하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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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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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허블, 2019-06-24.


  오로지 비현실적인 상황 자체로만 ‘이것은 SF소설이오’라고 내미는 소설이 있다. SF라는 소재를 반감시키며 대체로 경직된 분위기, 옅은 과학적 상상력, 매력적이지 않은 문체로 인해 오랜 여운을 주는 SF소설을 찾기란 어려웠다. 그래서 잘 읽어지지 않고 찾게 되지 않는다. 열광하는 외국 작가 몇몇에 의지하게 되는 이유다. 이들의 소설이 소재와 생각의 무한함을 보여주며 얼마나 우아하고 매력적으로 이야기를 펼쳐놓는지 말이다.

  과학도였다는 작가의 이 소설집은 그동안 읽어본 한국 작가의 SF 소설과는 다른 느낌이다. 과학이라는 표피만을 훑어서 이야기를 쏟아놓지 않았다. 익숙한 주제들을 푹 고아서 독자들에게 먹기 좋게 내밀어 준 듯 느껴졌다. 다소 테드 창의 소설을 보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래서 좀더 편안하게 읽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인상적이고 좋았다.

  소설 주인공으로 할머니가 제법 등장한다. 우주는 항상 아득한 느낌인데 할머니라는 단어 또한 그런 느낌을 준다. 아득함과 아득함이 만나 소설은 친숙하기도 하고 낯선 감정과 조금은 서글픈 감정에 빠지게 한다. 이런 감정은 잘 팔릴까.

  「감정의 물성」은 다양한 감정을 물성처럼 만들어 판매하는 회사와 이를 소비하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기쁨이나 즐거움만이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들도 잘 팔린다. 왜?


“부정적 감정 라인은 판매되는 물량에 비해 실 사용량이 적대요. 다들 쓰지 않아도 그냥 그 감정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언제든 손안에 있는, 통제할 수 있는 감정 같은 거죠.”  -「감정의 물성」


  눈물 흘리는 누군가를 위로할 때 “울지 마”가 아니라 “그래, 실컷 울어”라고 말할 때의 기분을 생각했다. 실제로 이렇게 통제만 적절히 이뤄진다면 온갖 부정적 감정들을 물성화해 생산해 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현대 사회가 다채로운 감정을 펼칠 기회를 주지 않고 특정한 감정만을 발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 말이다. 감정적 동물이어서는 안되겠지만 감정이란 필요한 것이니까.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는 유전자 선택으로 장애도 없고 혐오와 차별도 없는 그리고 사랑도 없는 유토피아 같은 행성을 그린다. 그리고 여전히 혐오와 차별과 장애가 있는 그런 지구가 있다. 지구로 순례 여행을 떠난 이들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마치 「감정의 물성」에서 우울체를 손에 쥐고 있으려는 구매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떠올려진다. 하지만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이미 없는 것이 가득한 그 세계보다 단 하나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 어쩌면 늘 정답으로 정해진 그 하나의 이유, 그것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당장 내일도 미래이지만 과학기술이 좀더 발전된 어느 미래라고 해서 인간의 삶이 특별히 달라져 보이지는 않는다. 삶은 기술발전에 따른 편의와 편리를 경험한다 해도 감정의 스펙트럼은 특별히 달라질리 없으니까. 여전히 희로애락이란 삶을 지배하는 절대적 요인이 된다. 여전히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는” 기술적 한계와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가득한 세상이다. 달라진 듯 달라지지 않은 풍경 속에서 그럼에도 의지하고 기대고 위로받는 것은 역시 인간이라는 사실. 그래서 「스펙트럼」속의 루이는 할머니에게, 인간에게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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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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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만들어진다


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 문학동네, 2018.


  여성에게 소설쓰기와 아이 기르기는 어떤 의미일까. 구병모 작가의 여덟 단편을 읽고 난 첫 질문은 이것이었다.

   「지속되는 호의」와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를 보며 끝날 줄 모르는 짜증과 답답함이 있었다. 그 감각이 여전히 뒷목을 서늘하게 한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산골로 거주지를 옮긴 정주에게 모든 것을 간섭하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 다른 아이들을 보살피는 과정에서 점점 노골적으로 무례함을 보이는 아이들의 태도, 그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 지 모르는 불안과 공포가 잊히지 않는다. 공동육아, 육아에 대한 사회서비스가 증가하고 체계를 갖춘다 해도 ‘내 아이’에 관한 한 관대하고 편협하게 행동하는 부모의 존재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움직여야 하지만 합의된 방식이란 여전히 모성신화를 기반으로 하는 건 아닌가.

  엄마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모성신화는 실존을 뛰어넘는다. 그보다 우선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기에 모성신화만큼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인 프레임이 있을까. 환상적 신화에 맞추어 현실이 창조된다. 그래서 엄마는 있지만 나의 엄마는 없는 듯이 생각되기도 한다. 모든 것에 우선해 ‘나’라는 존재의 확립이 중요할 거라는 건 완벽하게 짜여진 신화 앞에 기꺼이 무너진다. 그래서 여성 자신의 자아 찾기에 관한 담론이 늘어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현실을 벗어난 가상의 세계 속에서 새로운 신화를 찾아보고자 만들어보고자 하는 것인지도.

  소설집을 읽으며 거듭 나의 언어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현실 세계이든 가상 세계이든 상황을 인식하며 나라는 정체성을 명확히 하며 살기 위해선 어떤 ‘말’이 필요한지, 어떤 ‘말’에 휘둘리지 않아야 하는지 그런 생각들. 글이란 글쓰기란 존재를 자각하는 행위라고 생각할 언어 자체가 한계를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할 것이다. 「오토포이에시스」는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주체는 AI 소설 기계이지만. 그 이름이 ‘백지’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그는 날마다 수많은 한 문장을 쓰고 버렸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였다. 꿈은 이 세계 바깥의 현실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거나 모든 것을 기억하라. 미로에서 빠져나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솟아오르는 것이다. 모든 것을 관조하라. 우아함은 정열의 독이다. 이 같은 문장들 사이사이에는 아무런 서사적 인과관계가 없었으나, 한 문장 한 문장은 저마다 자꾸만 무언가 의미를 담아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백지가 그토록 버리려고 했던 의미를.   ―「오토포이에시스」


  미래를 상상하는 건 무궁무진하지만 어느 상상력이든 현실과 유리되지 않은 삶의 연장선이다. 새로운 세계에도 그 세계를 지칭하는 신화와 말은 존재한다. 그곳에서 또한 나는 규정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이야기의 주제를 압축하는, 나아가 그 모든 이야기와 무관한 궁극의 문장”. 본질적인 나를 규정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규정된, 원치 않는 신화를 깰 언어가 문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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