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가 사랑한 정원 - 화가이자 정원사, 클로드 모네의 그림과 정원에 관한 에세이
데브라 N. 맨코프 지음, 김잔디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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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네의 가장 아름다운 명작


모네가 사랑한 정원 - 화가이자 정원사, 클로드 모네의 그림과 정원에 관한 에세이

데브라 N. 맨커프 (지은이), 김잔디 (옮긴이),  중앙books(중앙북스), 2016-03-30.

 

 

  86세에 사망한 모네는 생애만큼 많은 이야기가 있다. 거기다 2,500점이 넘는 그림을 떠올린다면, 그만큼 모네의 이야기는 많을 테다. 그래서 모네에 대한 책을 보면 본 적 없는 그림이 계속 나온다. 모네 생애와 작품을 이야기하는 저자마다 지면이 허락하는 한, 대표적인 것 이외 더 소개하고픈 그림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네에 대한 책은 한 두 권으로는 미진한 느낌이다. 물론 모네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그렇겠지만. 모르는 것이 약이고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조금 아니까 아직 힘이 되지 않는다.

  이 책은 모네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공간 정원을 중심으로 한 모네의 그림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모네는 인생의 마지막 29년을 정원에서 보냈다고 하는데 이 정원은 그냥 있는 공간이 아니라 모네가 창조한 공간이다. 모네 자신 정원은 나의 가장 아름다운 명작이라고 말했고, “자기 그림을 이해하려면 백마디 설명보다 자신이 직접 가꾼 정원을 보는 게 낫다고 말했을 정도다. 모네의 정원을 가본 많은 이들도 모네의 정원에 대해 찬사했다. 어떤 이는 모네를 이해하려면 정원을 보라고, 그림보다 정원이 낫다고 했을 정도다.

  처음 모네가 정원을 가꾼 곳은 1871년 파리와 떨어진 아르장퇴유다. 이곳 테라스에 화분을 놓고 화단을 장식, 정원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때 정원을 배경으로 한 가족들을 그리며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이때의 정원은 전원주택에서 꽃을 가꾸는 것처럼 소소한 형태였고 대규모의 정원으로 확대하게 된 건 지베르니에 정착하고서다. 1883년 파리 북서쪽 작은 마을 지베르니에 처음 정착하고서도 모네는 빛을 그리는 화가로 자연 풍경을 그리기 위해 노르망디 해안, 루앙, 리비에라 등으로 여행을 다녔다. 곧 자신의 정원에 자신이 그리고픈 세계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 세계를 위해 정원을 창조했다


그는 화단을 색과 높이에 따라 분류한 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대규모의 정물화처럼 꾸몄다. 강렬한 자연광 아래에서 꽃을 관찰하여 싱그러운 색채의 향연을 표현했다. 무성한 풀과 나무, 꽃을 심고 굽이치는 둑을 만들었으며 구불구불한 길을 내어 물의 정원을 조성했다. 

 

  이렇게만 보면 실제 모네가 정원을 창조하기 위해 들인 노력이 가늠되지 않는다. 모네는 정원과 관련한 서적을 찾아 읽는데 시간을 더 들였고 정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카유보트와 소설가 옥티브 미르보, 비평가 귀스티브 프루아 등)과 교류하고 온실을 두 개나 만들고 정원사를 여섯 명 고용했다. 1893년 초 초지와 연못이 있는 땅을 추가로 구입해 앱트 강의 지류인 루강이 더 잘 흘러 나가도록 공사를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이웃들의 다툼과 복잡한 행정절차를 모두 감내하고 말이다. 그리하여 모네의 정원은 물의 정원이라고도 불린다. 모네는 습지와 같은 이 땅을 밝은 색 수련이 잔잔한 수면에 떠 있고 주위에는 갈대와 버드나무, 아이리스가 자라는 연못정원으로 바꾸겠다는 구상을 실현시켰다.

  모네는 19세기 후반 자포니즘(Japonisme)‘의 열풍 속에 우키요에에 매료된 대표적인 화가다. 우키요에는 모네의 화풍과 정원 조성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물의 정원은 우키오요에 판화에 등장하는 전통 풍경과 일본식 아치형 다리를 본따 설계하였고, 로저 마르크스가 당신이 미술계에 미친 영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말해달라고 하자, 내가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꼭 찾아내야겠으면 옛 일본식이라는 정도로 해두시오.”라고 말했을 정도다.

  모네의 대표작으로 수련연작이 꼽힌다. 이 정원의 수련을 관찰하여 그린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모네는 관상용으로 수련을 심었을 뿐 그릴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순간 수련에 매료된 모네는 어느 순간 갑자기 연못에서 황홀한 광경을 보았다. 나는 바로 팔레트를 집어들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만장일치로 평단의 호평을 받은 <수련> 연작이 탄생한다.


로저 마르크스는 예술 잡지 <가제트 데보자르(Gazett des Beaux-Arts>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평단이 가장 대담하다고 평가한 요소를 소개했다. 모네는 <수련> 연작을 그리면서 지상의 닻에 얽매여 있던 풍경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이제 더 이상 땅도 하늘도 그 어떤 제한도 존재하지 않는다. 잔잔하고 비옥한 물이 캔버스의 들판을 완전히 덮고 있으며 빛이 넘쳐흘러 녹청색 잎의 표면에서 활기차게 뛰논다. 화가는 원근법의 피라미드식 선이나 단일 초점을 추구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서양의 전통적인 회화규칙에서 벗어났다.˝

 

  모네는, 언제나 기존 질서에서 벗어났다. 평단이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을 뿐. 모네의 기본을 달라질 리 없는데 평단이 변한 건가. 시간의 흐름과 모네의 끝없는 열정과 노력의 결실이 빚어낸 것일테다. 인상파를 조롱하던 때, 루이 르루아의 평론이 실린 때가 1874년이고, <수련> 연작이 전시되던 때는 1909년이니 무려 35년의 시간이 흐른다. 물론, 그 사이에 모네는 런던의 안개 연작도 <건초더미(1890~1891)> 연작도 호평을 받았다.

 

유명 신문 <르 샤리바리>의 평론가 루이 르루아는 모네의 작품 <인상:해돋이>를 풍자하여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에서 이렇게 썼다. “대체 뭘 그린 걸까? 어디 보자. ’인상이라고? 나도 그럴 줄 알았다. 나 역시 인상을 받았으니까. 그렇다고 이 그림에 인상이 존재하는지는 의문이다.” 조롱하는 의미로 한 말이었지만 르루아의 발언은 화가들의 모임에 인상파라는 명칭을 부여했고, 인상파 화가들은 이후 11년에 걸쳐 전시회를 일곱 번 더 개최했으며 1886년에 마지막 행사를 가졌다.

 

  ’인상파화가로서 찰나의 순간을 화폭에 담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빛의 흐름을 표현하려 했던 모네는 강렬한 햇볕에 노출된 탓에 극심한 눈의 피로와 고통이 있었고 백내장 진단을 받는다. 수술 후에도 심한 부작용을 겪으며 심리적으로 위축되기도 한다. 잘 보이지 않거나 사물의 색이 왜곡되어 보이는 현상을 겪는 건 자연을 그리는 화가로서 얼마나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 그럼에도 모네는 기억과 감각에 의지해 붓을 놓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린다.

  이때 그린 그림들을 보면 이전에 그렸던 색채보다 훨씬 강렬하다. 원래 그의 붓터치처럼 거칠고 생략된 표현도 더욱 두드러진다. 이때 모네가 그린 그림들을 많이 보게 되니 비로소 모네가 추상주의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두 그림만으로는 알 수 없는 변화된 그림의 색채, 그 색채의 강렬함이 노년 모네의 고통 강도 같이 느껴진다.

  모네의 그림과 정원이 유명해지고 이곳에 많은 화가들이 모네와 교류하고자 찾아들었다 한다. 그리하여 화가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이들 중 모네가 교류한 사람도 있지만 전혀 교류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한다. 오랜 시간 이웃에 살면서도 전혀 교류가 없을 수는 있지만, 모네의 정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크고 모네에 대한 유명세도 있었을 텐데, 굳이 관심두고픈 세계가 아니었는지, 단순한 사람 사이의 인사들도 없이 완전한 단절이었는지, 특별히 그러한 관계가 된 연유도 쓸데없이 궁금해진다. 세상을 살면서 마음맞는 사람을 만나는 일, 마음을 나누는 일, 사람과의 교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끔 한다. 이웃과의 일을 떠나 모네 자체는 오랜 생을 사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모네를 돌보아 준 이들이 많았던 건 모네의 복일 게다.

  꽃을 좋아하고 사랑한 모네가 죽을 때 관에 검은색 천이 덮여 있어서 이것을 걷어내고 창문에 걸려 있던 화사한 꽃무늬 커튼을 덮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꽃을 사랑한 모네가 마지막 쥐고 있던 꽃은 무엇일까 했는데 모네의 이런 당부가 있었다고 한다.

 

꽃이나 화환은 절대로 원하지 않아. 꽃으로 장식하는 건 헛된 일이야. 내 정원에 있는 꽃을 이런 일에 쓰려고 꺾는 건 신성모독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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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빛의 순간들 - 100개의 대표작으로 만나는 클로드 모네의 모든 것
박송이 지음 / 빅피시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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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모네, 빛의 순간들 - 100개의 대표작으로 만나는 클로드 모네의 모든 것

 박송이, 빅피시, 2026-05-27.

 

 

  모네는 ’, ‘인상이라는 단어들로 소개된다. 이 책은 빛의 순간들이라는 이름으로 모네의 대표작 100점을 연대기순으로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프랑스 공인 문화해설사다. 2016년부터 파리에서 거주한다고 하는데, 미술관이나 모네의 자베르니 정원에서 모네의 작품을 책에 쓴 것처럼 설명하겠구나 싶었다. 문화해설사가 들려주는 화가와 작품 이야기다.

  ‘인상주의하면 파스텔톤 풍경화가 떠오른다. 모네의 작품도 그렇게 여기고 있다. ‘의 활용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림을 그리지 않는 나로서는, 미술책에서 본 그림만으로는 의 흐름이나 머묾을 세세히 잡아내기 어려웠다. 설명을 듣는다 해도 예민한 그 감각을 따라가기가 벅차다. 그러니, 어쩌면 그림은 한 순간의 인상이고 그림이나 화가의 이야기에 더 관심갖게 되는 것 같다. 신화나 성경을 배경으로 한 그림은 어떤 내용인지를 구체적으로 찾아보게 되니 풍경 그림의 장소가 어디인지를 궁금해하는 것하고는 좀 다르니까. 그래서인가. 미술계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이 나올 때면 화단계 영향력있는 이들이, 수용하지 못하고 비난과 비판을 주로 하는 것이.

  모네 또한 파리 유력 평단으로부터 외면당한 대표적인 화가다. 모네가 활동하던 초창기, 당시 화단에서는 전통적인 역사화나 신화적인 주제를 선보이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모네의 그림은 프랑스 왕립미술아카데미가 주관하는 공식 전시회에 입선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조롱받거나 거부당했다. 물론, 모네는 1866년 살롱전에 <초록 드레스를 입은 여인>을 출품하여 수상했다. 이는 모네가 입선을 목표로 하고 그린 그림, 그러니까 현재로 생각한다면 입시용이나 공모전 수상 패턴을 분석하여 이에 맞게 그려서 수상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 같고 모네 자체는 의 표현에 더 관심을 두었기에 이 그림에 만족하지 않았다고 한다.

  모네를 의 표현으로 이끈 이가 모네의 스승 외젠 부댕이다. 15세 모네가 그린 캐리커쳐에 매료된 외젠 부댕이 모네를 자연의 세계로 이끈 것이다. 외젠 자신이 바깥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고 함께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 모네는 이 경험 이후로 야외에서 눈앞에 펼쳐진 자연을 바라보며 이해함과 동시에 풍경화가로서 그림을 그리기로 한다. 나아가 모네에게는 빛의 표현”, “밖에서 보고 기억한 관념적인 색채가 아니라 야외의 자연광을 받은 지금 눈에 보이는 색이야말로 그의 관심사였다.”

  모네는 1866년 살롱전 입선 후, 바로 파리 근교의 빌 다브레에서 정원이 딸린 집을 빌려 2.5m가 넘는 큰 캔버스를 야외에 설치하고 대규모 인물화를 제작한다. 캔버스가 너무 커서 윗부분에 손이 닿지 않아 정원의 땅을 파고 도르래를 설치해 캔버스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장치를 설치하고 그렸다. 이 그림이 모네의 연인 카미유 동시외가 그려진 <정원의 여인들>이다.

 

살롱의 평가는 냉혹했다. ‘그림에 주제가 없다’, ‘붓질의 마감이 거칠다는 이유로 모네는 그해 살롱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이를 두고 모네의 전작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던 비평가이자 소설가 에밀 졸라는 모네는 살롱의 문을 열었지만, 그가 들고 온 이 너무 눈부셔 심사위원들은 서둘러 그 문을 닫아버렸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런 평가는 또 있다. <까치(1869)> 또한 심사위원들로부터 살롱 출품을 거절당했다. 이유는 그림이 지나치게 밝아서 눈이 멀 것 같다는 것. 마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가 생각나는 평이다. 주제가 없다라니, 내가 보기에 <초록 드레스를 입은 여인> 또한 무슨 큰 주제가 있나 싶은데 말이다. ‘빛이 너무 눈부셔 서둘러 그 문을 닫아버렸다라는 에밀 졸라의 평이 너무나 인상깊다!

  이렇게 화가로서 초기부터 평단으로부터 외면받았기에 모네의 삶은 어려웠다. 모네의 일대기를 보면 평생 가난과 궁핍하다는 설명들이 있기에 정말 아주 가난한 거리의 화가로 생각했다. 그러나, 모네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고 어린 시절은 풍족하게 보냈던 것 같다. 모네의 궁핍은 화가가 되어 평단으로부터 외면당한 것과 카미유 동시외와의 결혼을 아버지가 반대함에 따라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인 카미유는 아들을 낳았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고 1867년 아들 출산 시에는 카미유의 곁에 있지도 못했다.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눈치를 보며 아버지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모네는 20대 후반이다. 당시를 생각하면 충분히 독립하였을 나이인데 아버지가 된 상황에서도 모네는 여전히 어린느낌이다. 부유한 집안의 철없는 아들 같은 느낌이랄까.

  화가로도 자리잡지 못한 상황에서 한 가정을 가졌으니 경제적인 궁핍은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모네는 계속된 경제적 궁핍에도 철학이 있었으니, 열 병의 저렴한 와인 대신 단 한 병의 좋은 와인을 택하는 삶이 그것이다. 모네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항상 어느 정도의 안락함 속에서 살아야만 하네. 그래야 네 모든 에너지를 그림에 쏟을 수 있기 때문이지

  모네는 빚을 지거나 임금을 체납하면서도 고용인들을 해고하지 않고, 돈을 잘 벌 때도 아끼고 저축하기보다 저명한 양복점에서 옷을 맞춰 입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와 함께 모네에 대한 많은 글 중엔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달라호소하는 내용이 많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그의 그림은 <여름(1874)>과 같이 햇빛이 비치는 풍경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는 듯한 상쾌함이 깃든 그림들이다. 글쎄, 이것은 좀더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고 안정화하기 위한, 지난 어떤 경험으로 인해 쌓인 방어기제였을까. 모네는 18686월, 강물에 몸을 던진다. 곧 자신의 무모함을 깨닫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물 밖으로 빠져나왔다는데, 모네는 화가 프레데릭 바질(Frédéric Bazille)에게 보낸 편지에 이를 실수라고 표현했다. 모네의 전기학자들은 이를 모네의 자살 시도라고 얘기한다. 이때, 모네의 상태는 아버지의 후원 중단으로 인한 지속된 궁핍, 살던 집에서 쫓겨나기 일보 직전에 그림까지 압류될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고 화가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상실감도 있었을 테다.

  모네 인생을 보면 동료와 후원자를 비롯하여 인복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네의 경제적 궁핍 호소에 그의 그림을 사주거나 경제적 지원을 하였던 이들이 많다. 그들은 화가로서 모네를 보았을까. 인간 모네를 보았을까.

  모네는 빛이 매 순간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나는 눈부신 대화들을 기록할 뿐이며 이것이 그가 꿈꾸던 화가의 삶이라고 했다. 그저 낯선 구도를 중시하며 과감한 붓질을 통해 빛의 표현하던 모네는 그의 아내이자 모델 카미유가 사망하는 순간에도 사별의 아픔을 겪는 남편이기보다 빛의 변화를 포착해야만 하는 화가라는 실존적 숙명을 깨달았다. 임종의 안색에서 푸른색, 노란색, 회색의 조화를 분석하는 본능을 자각한 순간, 그는 슬픔을 앞서는 예술적 관찰력에 경악하며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그리고 임종을 맞은 카미유 모네(1879)를 완성해냈다. 모네는 단순히 정적인 풍경을 담기보다는 빛의 산란이나 구도를 위해 거칠고 험한 곳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예술적 집착이 정점에 달했던 18905월 초, 모네는 봄이 오면서 돋아난 초록빛 나뭇잎들이 겨울의 황량한 구도를 망치자 기상천외한 지시를 내렸다. 인부들을 고용해 그림 속 참나무의 잎을 일일이 다 따 버리게 하기도 했다. 사진작가들이 자신이 원하는 구도로 대상을 촬영하기 위해 자연에 험한 짓을 하는 일이 있다는데 잠시 이 상황이 동일시되어 순간…… 문화해설사인 저자는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자연의 시간마저 자신의 캔버스에 맞추려 했던 이러한 행위는, 화가를 넘어 창조주로서 대상을 통제하고자 했던 모네의 광기 어린 집착을 여실히 보여준다.


  광기 어린 집착이라, 예술가들에게 필연적이고 오히려 이런 면모가 유명한 예술가라는 인정처럼 여겨지는 부분이 있다. 연작 시리즈로 유명한 <건초더미(1890~1891)>를 그리던 때에는 이웃 농부들의 사유지를 최적의 각도를 찾기 위해 수시로 농작물이 심어진 구역을 가로질렀고”, “농부들의 대화 소리나 마차의 굉음이 자신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린다며 항의하기도 했으며 이에 농부들과 갈등이 멈추지 않았다. 탈곡을 위해 건초더미를 치워야 하는 시기가 되자 모네는 농부들에게 탈곡을 늦추는 대가로 현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한다. 또한, 연작이 많았던 만큼 갤러리에 천창을 설치해 외부 날씨와 태양의 위치에 따라 그림의 색채가 실시간으로 변하게하거나 작품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결되어 있어, 전체의 흐름과 공간까지를 모두 작품으로 여길 수 있게 전시되도록 갤러리도 직접 구상하고 기획하기도 했다.

  삶의 안정기, 모네는 1899년부터 1901년까지 매년 작업을 위해 런던을 찾았다. 1870년 보불전쟁을 피해 머물던 시절 매료된 안개를 다시 그리기 위해서였다. 이전까지 사람들은 안개를 불편하고 성가진 존재로 여겼는데 모네가 그림을 그리고 나자 안개가 아름답고 신비로울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모네는 수많은 그림을 남겼다. 많은 화가들이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모네는 86세까지 생존했다. 자연의 을 중시하는 화가로서 일찌감치 으로 고통받았는데 말년에는 백내장과 수술 후 부작용으로 색채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증상을 겪었다. 이때 모네는 기억과 감각에 의존해 그림을 그렸으며 사망한 해에는 폐암으로 극심한 고통 속에 있었다. 86세의 화가는 신체적 질병과 그로 인한 고통뿐만 아니라 첫 번째 아내 카미유, 두 번째 아내 알리스와의 사별, 아들과 의붓 딸,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때문에도 슬픔과 아픔 속에 있었다. 모네는 고통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의 작품들은 여러 유명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모네의 그림을 국가가 소장해야 한닥 강력하게 주장한 친구와 모네의 그림을 사랑한 사람들 덕분이었다. 모네의 그림을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기까지,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조력자가 있었음을 새삼 느낀다. 클레망소도 대표적인 사람이다. 모네가 사망할 당시 모네의 관 위에 검은 천이 덮여 있었다. 이때, 클레망소는 안 돼! 모네에게 검은색은 안 돼! 검정은 색이 아니야!”라고 외치며 관 위의 검은 천을 치우고 창문에 걸려 있던 화사한 꽃무늬 커튼을 뜯어와 덮었다고 한다. 검은색을 싫어하고 꽃을 사랑한 친구의 마지막을 진정 꽃길이 되도록 해준 것이다.

  모네의 삶은 꽃길이었을까. 모네가 사랑하고 가꾼, 그의 예술의 공간인 자베르니는 개방된 곳이라고 한다. 화창한 여름, 그곳에 가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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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와 모네 - 인상주의의 거장들 아티스트 커플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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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


마네와 모네 - 인상주의의 거장들

김광우 (지은이), 미술문화, 2017-10-23.


  2026년 클로드 모네가 사망한 지 100년이 되는 해란다. 모네는 마네와 함께 거론되는 교과서에서 다루었던 화가다. ‘인상주의로 대표되는 것 외에, 학창시절 기억에 의존해도 마네와 모네는 늘 헷갈렸고 대표적인 작품이 무엇이었는지도 가물해지는 때, 2025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전시회가 있다고 하여 오직 모네작품만을 생각하며 전시회를 갔다. 모네 작품은 어디에를 연발하며 그저, 모네 작품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아예 잊어버린 채 돌아왔다. 전시회 제목에 딱 쓰인 것이 모네인지라 모네의 수많은 작품이 어느 정도는 될 줄 알았더니 모네의 작품은 1점이었다. 모네는, 그러니까 미끼였던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Johannesburg Art Gallery, JAG)’의 주요 소장품 143점에 모네 작품이 하나일 줄 어찌 알았겠는가.

  사실 대부분이 그렇지만 모네, 마네는 화가의 일대기도 그림도 제대로 본 적 없었던 것 같다. 교과서에 조그맣게 있었던 그림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 외에는 다른 책을 통해서 보다 자세히 접해 보지 못한 화가였다. 우리나라는 고흐에 관한 책은 정말 많은데 생각보다 다른 화가들에 대한 책들은 많지 않다. 아니, 고흐에 관한 책이 너무 절대적인가. 두 화가의 이름은 기억하지만 둘 다 같은 제목으로 그린 그림 때문에도 헷갈렸고 주의깊게 살펴보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전시회에서 본 모네의 그림은 팸플릿에서는 아주 인상적이었지만 전시회에서는 인상적인 기억이 되지 않았다. 작품이 한점이기에 오히려 더더욱 모를 화가로 남았는데 이 책을 보고 모네와 마네를 명확히 구분한다.

  마네와 모네는 대조적이구나. 비슷한 화풍이었던 것 같다며 마네, 모네를 한 유형 한 묶음으로 생각했는데, 두 화가의 그림과 일대기를 보며 어쩌다 이런 혼란을 고정시켰는가 싶었다. 미술 수업을 제대로 안 들었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때문이었을까!

  인상주의라는 이름 하에 간단한 인상을 말하자면 마네는 선명함, 모네는 흐릿함이다. 두 화가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화가로 마네가 모네보다 연상이며, 동일한 제목으로 그린 그림이 몇 있지만 마네가 인물에 중심을 둔 사실주의적 그림을 주로 그렸다면 모네는 풍경에 중심을 둔 인상주의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대충 요약하는데 저자는 세련되게 이들을 비교하여 보여준다.

 

마네는 의도적 구성이나 생략으로 화가 자신만의 느낌을 나타내는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인물화에 관심이 많았고 그에게는 모델이 매우 중요했다.

 

마네는 모더니즘을 연 사람으로, 모네는 최초의 회화 혁명을 체계적으로 일으킨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네와 모네는 동시대를 살며 교류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 책은 이런 마네와 모네의 삶과 작품을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동일한 제목의 그림이 각각의 특성을 가진 채 어떻게 다른지, 잘 보여주고 있다. <풀밭 위의 오찬>(대체로 그림 제목이 풀밭 위의 식사, 풀밭 위의 점심 식사, 풀밭 위의 오찬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이 책은 풀밭 위의 오찬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오찬표현이 이상하게 별로다.), <생리자르역>을 비롯하여 아르장퇴유에서 그린 마네와 모네의 그림들도. 앞의 두 작품이 마네오 모네의 명확한 차이점을 보여준다면 모네가 살고 있던 아르장퇴유에서 모네 부부를 그린 마네의 그림은 아르장퇴유에서 모네가 그린 그림들과 유사한 형태를 보여준다.

  이 책에서 두 화가를 알게 되긴 하지만 기억에 남는 건 에밀 졸라를 비롯한 평론가이기도 했다. 두 화가는 파리 화단의 인정을 위한 살롱전(국전)에 끊임없이 출품하였지만 대체로 평단으로부터 악평을 받았다. 이 때마다 두 화가의 그림을 분석하여 그림을 해석하고 화가의 의도를 설명하며 그림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것은 에밀 졸라였다. 전통적인, 익숙함에 길들여지고 그것만이 옳고 조금이라도 다르면 틀린것으로 치부하는 다른 평단을 향해 제대로 된 비평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당시에도 누드 그림은 성행했는데, 그러고 보면 왜 그다지도 누드그림에 열광하였는지 참 모를 일이다. 그런데, 마네의 그림만은 적나라하게 공격받았다. 모두들 외설적이라 비난했고 황제는 뻔뻔스러운 그림이라고 비난했다. 이 그림은 그래도 낙선전에 전시되었고 황제의 비난 덕분에 홍보가 되어 인기가 좋았다.

  이 책은 마네와 모네에 대한 평단의 비난에 대한 에밀 졸라의 비평이 잘 담겨 있다. 에밀 졸라의 시각으로 그림에 대한 비평을 보고 있노라면 오늘날 이 두 화가를 대표하는 평들이 에밀 졸라에게서 시작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평을 저자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원문을 번역하여 그대로 보여주는 점이 좋았다. 이를 보면서 그림에 문외한인 내가 그림에 대해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눈으로 보고 뭔가를 느끼거나 혹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때, 어떤 점이 포인트가 되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게 한다. 물론 두 화가의 작품을 다룬 책인데도 에밀 졸라만 생각나는 것도 있지만.

  두 화가의 공통점은 평단에 비난 단골이라는 점이다. 이들에 대한 비난에는 기존과 다르다’, ‘새롭다’, ‘낯설다라는 평이 많다. 그리고 이것을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는 형태로 이야기했다. 그렇기에 이들은 오늘날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낸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바로 과거의 전통적인 형식을 파괴하고 미술 자체의 본질과 순수성을 추구했던 혁신적 태도모더니즘이다. 저자가 처음 설명하고 있듯이 마네는 모더니즘의 선구자이자 인상파를 연(물론 본인은 인상파이기를 거부했다 한다) 화가로 모네는 인상주의의 대표 주자로 최초의 회화 혁명을 체계적으로 일으킨 사람이자 추상 미술을 연 화가로 대표되고 있다.

  이처럼 훗날에도 이름을 날리며 영향력 있는 화가가 되기까지 이들에게 온갖 말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동료, 평단, 친구, 화단,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두 화가를 둘러싼 반응을 세밀하게 보여주는 이 책을 통해 누군가 ( 더더군다나 예술가라면)’ 를 알아주는 이 한 명이라도 만난다면 참으로 행복한 인생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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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선에서 생명선으로 - 소중한 동식물의 마지막 피난처 DMZ
전영재 지음 / 목수책방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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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잠자리


분단선에서 생명선으로 - 소중한 동식물의 마지막 피난처 DMZ, 전영재, 목수책방, 2025-03-14.

 


  DMZ(비무장지대, Demilitarized Zone)가 이 땅에 생긴 지 벌써 73년이 되었다. 정전협정이 1953727일이니 곧 73주기가 다가온다. 이 여름, DMZ는 어떤 풍경일까.

   DMZ는 서해에서 동해를 가로지르는 248킬로미터, 군사분계선을 따라 남과 북 4킬로미터 양쪽으로 조성된 철책에 갇힌 땅으로,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그래서 마냥 이곳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무너지고 암흑과 같은 이미지가 가득한 곳이었다. 그곳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마치 폐허가 들어차는 느낌이었는데, 오래 전 스치듯 DMZ에 관한 다큐를 보고 그 고즈넉하고 풍요로운 공간을 보고 싶었다. 그곳에는 수많은 멸종위기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었고 전쟁의 흔적이 가득한 곳이기도 했다. 갈 수 없는 곳이기에 더더욱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가서는 안되는 곳이라고 각인도 되었던 곳이다. 이 책을 보고 나서야 DMZ에 관광투어 프로그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가고싶은 형태는 아니지만 그 방법만이 제한적이라도 근처라도 가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이 책은 많은 DMZ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방송기자 전영재 작가가 그동안 취재했던 DMZ의 다양한 생태에 관해 기록한 책이다. DMZ는 전쟁의 모습을 담은 폐허의 폐쇄된 공간이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동물이 모여들고 식물이 자라도록 스스로가 회복한 공간이었다. 인간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던 공간이 인간의 손길과 발길이 사라지자 스스로 회복력을 갖추고 풍요로운 야생의 모습을 만들어 냈다. 자연 회복력, 그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이 살아고 있는 곳에서는 멸종이 되어가는 동식물이 이곳에서 제 이름을 드러내며 달리고, 피어나고 있는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멸종위기종에게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된 곳, DMZ. 그리하여 저자는 이곳을 이제 분단선이 아닌 생명선이라 명하고 있다.

  보지 않고 있는 동안 어떻게 그곳에 동식물이 모여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철새들이 날아오고 씨앗들이 자리잡으며 하나하나 희귀 동식물이 생명을 움트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풍요롭게 이곳을 변화시키고 있다.

  어쩌면 날개를 가진 들이 먼저 이곳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이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텃새들과 겨울을 보내려고 온 수많은 철새들우리나라를 찾는 철새 가운데 가장 기품 있고 아름다운 새로 여겨지는두루미, “전 세계에 50만 마리밖에 남지 않은 희귀종기러기, “ ‘새들의 황제라 불리지만 사실은 사냥 능력이 없어서 죽은 짐승의 사체를 뜯어 먹고 사는독수리, “목뼈가 14개나 있어서 몸체를 움직이지 않고도 머리만 270도 돌려 사방을 볼 수 있는수리부엉이,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서식하던 천연기념물 제197호인 크낙새”, “1912년 함경북도에서 한 개체가, 1927년 서울에서 한 개체가 발견되었다라는 아주 낡은 기록만 있는 호사비오리 같은 멸종위기종 등 맹금류와 다양한 새들이 이곳 비무장지대에서 살아가고 있다.

  강원도 철원은 남한에서 가장 추운 곳이지만, 겨울 철새들에게 젖줄이 되는 샘통지역은 한 번도 언 적이 없는 곳으로 한겨울에 따뜻한 물이 흐르면서 늘 영상 15도의 온도를 유지한다고 하니 철새들에게 얼마나 낙원같은 곳이겠는가. 그리하여 두루미의 먹이가 되는 미꾸라지 등이 많아 두루미과 새들이 이곳을 찾아 겨울을 보내고 떠나는 모양이다.

  책속에 두루미 잠자리라는 사진이 있다. 야생의 동식물 이야기가 나오니 두루미잠자리가 연상되었는데 곤충 잠자리가 아니라 두루미의 침대(?), 침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책에느 저자가 취재하여 찍은 다양한 휘귀종의 동식물, 예쁜 색감을 가진 다양한 새와 꽃, 식물 사진도 나오지만 두루미 잠자리사진이 인상깊었다. 왜인지 비무장지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미지처럼 느껴졌고 울컥했다. 책 속 사진과는 다르지만 저자가 촬영한 영상 속 이미지가 유사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어 캡쳐했는데, 책 속에 사진을 보면 기분이 다를 것이다. 아래 사진보다 더 많은 두루미떼가 비무장지대 그 어느 곳에서 편안히, 잠자고 있는 모습……. 평화롭고, 아득하고


두루미의 잠자리” https://v.daum.net/v/20160229211005154/MBC (www.imnews.com)


  새들 다음에는 비무장지대를 흐르는 물을 토대로 살아가는 생물들이 등장한다. 역시 멸종위기종인 수달과 물범, “야생에서 찾아보기 어렵고 증식도 어려워 복원이 쉽지 않다고 알려져 있는광릉요강꽃, 이 광릉요강꽃이 어떻게 군락지를 이루게 되었는지, ‘둠벙이라 부르는 물웅덩이 근처에 사는 수서곤충이며 희귀종 물거미며, ‘불새라고 불리는 호반새, 희망의 상징 희망새 등이 또 얼마나 기껍게 이 공간에서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다음으로는 가슴떨리게도 지뢰밭에서 살아가는 희귀한 동식물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준다. ‘한국의 에델바이스라고 불리는 솜다리꽃, 신비의 팔색조와 긴꼬리딱새, 고라니와 멧돼지, 삵과 너구리, 족제비와 하늘다람쥐, 호랑이, 반달가슴곰, 산양 등. 4000~4500살 정도되는 습지, ‘자연의 타임캡슐’, ‘자연사 박물관’, ‘자연의 고문서라 불리는 이탄층 용늪의 모습이 담겨있다.

마지막으로 이 아름다운 야생 생물들이 살아가는 이 비무장지대가 얼마나 역사, 문화, 생태학적으로 귀중한 자원이며 가치가 있는지를 알리고 이 땅이 계속 희망과 생명의 땅이 되도록 이곳을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이에 관해 독일이 동서독 국경 지역을 그뤼네스반트(Grunes Band)로 보전한 사례가 있으므로 우리도 이를 참조하여 보다 적극적인 방안이 필요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이 책을 보고 나면, 북한에 있는 옛 역사적 유적지와 이 생명력 넘치는 야생의 생물들을 직접 볼 수 있는 날이 얼른 오기를 기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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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노예 남편 아내 - 2024 한국인 최초 퓰리처상 수상작
우일연 지음, 강동혁 옮김 / 드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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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 수 있다는 가능성


주인 노예 남편 아내우일연, 강동혁, 드롬, 2025-12-24.

 


  이 책은 한국계 미국인의 퓰리처상 수상작이다. 퓰리처상 수상작을 보긴 하지만 이 책을 보게 된 것은 이 이유도 크다. 보면서 계속 앞장과 마지막장을 다시 들추며 생각한 말, “이거 소설이었나?” 이 책은 퓰리처상 보도 부문 수상작이다. 그러니까 소설이 아니고 실제 이야기다. 책을 읽을수록 그 사실을 잊고 다시금 이 글이 주는 이야기에 놀란다.

  주인 노예 남편 아내,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했던 것을 어느새 잊고 두 부부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왜 그동안 이 두 부부에 대해서 몰랐을까. 난 엘렌 크레프트도 윌리엄 크래프트도 처음 알았다. 이들이 미국 남부를 탈출한 노예라는 것을. 더구나 여자인 엘렌이 백인 주인으로 남편인 윌리엄이 흑인 노예로 변장하여 탈출했다는 것을. 책 제목은 그것이었다.

  막연하게 노예는 흑인일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다가 엘렌이 백인이라고 하는 것에 놀란다. 엘렌은 혼혈로 피부색이 밝았기에 병약한 백인으로 분장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들이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여정은 길고 위험하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노예들이 그들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어두운 경로가 아닌, 기차와 증기선을 이용하여 어둠 속에서만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선택한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담대한 방법으로 노예 부부가 탈출하는 그 긴 여정의 이야기다.

  두 부부는 1848년 미국 조지아주 메이컨에 살고 있던 노예였다. 이 책에선 노예예속 피해인’, 노예를 부리는 이들을 예속 가해자라 명명한다.

 

이 시기에 소위 한방울 법칙이라는,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들어가면 그 사람의 몸 전체가 유색인종으로 변한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었다. 게다가 노예제도는 언제나 어머니의 혈통을 따랐다. 흑인이라는 혈통과 예속은 건드려서도 취소해서도 안 되는 영구적인 조건으로 간주되었다. 힐리 가족이, 그리고 이제는 엘렌도 바로 이런 가정에 반기를 들었다.

 

  우리나라 또한 노비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랐다. 어떻게 이다지도 역사는 다를 게 없을까. 엘렌이 노예가 된 이유는 어머니가 노예이기 때문인데, 엘렌의 어머니 또한 혼혈이었다. 자기 자식을 노예로 만드는 아버지라니. ‘흑인의 피에 그토록 반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흑 성적 대상으로는 생각하고 실행하는 모순이라니.

 

브레머는 엘렌에게 왜 예속 가해자들에게서 도망쳤느냐고 물었다. 브레머는 그들이 엘렌을 학대했는지 궁금해했다.

엘렌이 대답했다. “아니요, 그 사람들은 언제나 내게 잘해줬어요.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지는 않았죠. 그래서 도망친 거예요.”

 

  다른 말이 더 필요할까. 엘렌의 저 말이 엘렌이 기나긴 여정을 버티는 힘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엘렌은 예속 가해자는 자신의 아버지였으며 또한 자신의 이복 자매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백인중심, ‘백인우월인 시대, 엘렌은 스스로를 백인으로 위장하여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순수한 혈통 중심의 사회, 왜 인종 간 차별이 계급이 생기게 된 것인지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보아도 지금 시대에도 결국 여전한 차별과 계급이 존재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면 그 참담한 마음을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들이 떠나온 세계는 흑인이 말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있는 세계, 아무리 자유 흑인이라도 총을 들었다가는 등에 39대의 채찍질을 당해야 하는 세계, 백인의 몸에 위해를 가하는 것이 사형에 처해지는 중범죄인 세계였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다음과 같은 세상이었다.

 

별만 떠 있는 새벽이 오기 전인 이 시간에는 많은 것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지나온 풍경에는 한 가지 분명한 변화가 있었다. 이곳에는 커튼과 붉은 깃발이 달린 노예 우리나 경매장이 없었다. 담장이 높고 가시 박힌 슈거 하우스도 없었다. 소금물 웅덩이나 후추 병, 소금자루가 갖추어진 채찍이나 쳇바퀴도 없었다. 부부나 부모나 아이가 판매되는 법원도 없었다.

 

  두 부부가 예속 피해자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탈출의 긴 여정 속에서 그들을 지지하고 도움을 준 이들 덕분이다물론, 엘렌은 이들의 이 여정에 신앙의 힘이 있었음도 얘기한다.그중에는 그들과 같은 예속 피해자뿐만 아니라, 인간의 권리를 박탈하는 이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 이들 부부에 대한 연민을 가진 사람들 덕분이다. 이들의 힘은 예속 피해자가 증가할수록 더욱 더 강해지고 견고해진다.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일이 단지 현재 삶의 평안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단순함을 떠나 보편적인 문제 인식으로 확산되기까지, 또한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음도 잊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이 부부의 여정은 실화이기에 이들이 노예제도가 성행하는 남부를 탈출하여 자유의 땅으로 도착했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현재의 시점에서도 이들의 탈출 여정이 놀라운데 당시에는 어떠했을까. 이들에 대한 비판과 찬탄이 이어졌을 것이고 이들로 인해 노예문제에 대한 논쟁 또한 가속화되었을 것이고 이들을 영웅화한다거나 무엇에라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조금이라고 깎아 내리려는 이들도 있다.

 

엘렌은 대단히 유능했고 큰 인기를 얻었으며 태도도 자신감 있게 변했다. 엠마 미첼이 친구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허영심을 갖거나 자기 분수를 잊을지도 모른다고 약간 우려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엘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는 이제야 자신을 여자라고 느끼게 됐습니다. 제가 더 이상 단순한 물건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런 제가, 단지 사람 대접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우쭐해질 거라고 생각을 대체 어떻게 하실 수 있나요?”

 

임신 마지막 3개월 동안, 엘렌은 남부에서 더 많은 나쁜 소식을 들었다. 신문에서는 엘렌이 자유롭게 살면서 너무 불행해진 나머지 남편을 버리고 미국 신사의 손에 자신을 내맡기며 예속 가해자들에게 돌려보내 달라고 애걸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마치 남부의 권위자들이 엘렌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그녀의 몸을 되찾지 못한 자신들의 무능력에 괴로워한 나머지 그녀의 이야기를 대신 차지하려는 것만 같았다. 엘렌에게는 자기 삶에 대한 주권이 없으며, 그녀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노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말이다. 그들은 엘렌을 아내가 될 능력도 없는 사람, 남편을 버린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들은 가짜 뉴스를 통해 엘렌의 의지를, 욕망을 도용하려 했다.

 

  이 책 전반에서 이들이 무사히 자유의 땅으로 탈출할 수 있기를 응원했다면-우습게도 이 책이 그들이 무사히 탈출한 기록임을 알면서도-, 후반부에는 이들 부부에 대한 당시 사회의 반응을 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특히, ‘엘렌에 대해 아니 여자 노예에 대해 가지는 사회의 압력은 편견은 인간에 대한 억압 철폐를 주장하며 평등을 외치는 상황에서도 얼마나 모순되게 이어지는지…….

 

여기서든, 다른 곳에서든 크래프트 부부가 받은 반응을 보면, 이들이 앞서 한 여행이 성공한 이유는 엘렌이 백인 행세를 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돈이 많고 장애가 있는 백인 남자 행세를 했기 때문임을 잘 알 수 있다. 크래프트 부부가 그렇게 여행할 수 있었던 건 서로 친밀한 관계나 남편과 아내라는 점, 어느 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성적인 친족 관계라는 점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관계가 드러난 지금, 크래프트 부부는 조지아주를 떠나 이동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편견에 마주하게 되었다. 남부를 벗어나고 미국을 벗어났는데도 남편과 아내라는 역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인과 노예, 그건 아니라도 주인과 하인이라는 역할은 받아들여졌는데도 말이다.

 

  작가는 엘렌의 성공은 그녀가 속한 세상의 위선과 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냈다.”라고 했다. 그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가능성, 문명이 스스로 세운 잘못된 구조를 인식조차 못한 채 허물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역사가 이미 알려주었지만 이 책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여성에 대한 차별적 구조는 더더더 세월이 지나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아니, 어떤 이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누군가를 차별하기 위해서 꺼리를 만들어내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이들을 예속 가해자라고 부르면 되려나.

  이처럼 여전히 차별 꺼리를 양상해내는 국가들 혹은 사람들이 있지만, 두 부부가 지나온 풍경이 변화였듯이 역사는 어쨌든 변화해왔다. 노예와 노예주라는 두 범주의 사람이 원래존재하지 않으며, 납치와 인신매매가 등 예속화(enslaving)”하는 것이 문제다. 문명이 스스로 세운 잘못된 구조를 인식조차 못한 채 허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이제 그것이 어떤 것이냐와 더불어 속도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문제가 되는 제도를 인식하였음에도 그것을 철폐하지 않으려는 이들로 인해 계속 예속 피해자가 생겨난다. 이 땅의 예속 가해자예속에 대한 의식적이고 맹목적인 인식이 속도를 갖춘 가능성에 의해 빨리, 신속하게 해결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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