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쓸모 - 21세기 프랑스 대표적 지성의 문학을 대하는 현대적 방식
앙투안 콩파뇽 지음, 김병욱 옮김 / 뮤진트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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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쓸모 La litterature, ca paye

앙투안 콩파뇽 ,김병욱 (옮긴이), 뮤진트리, 2025-04-17.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시인 박인환(1926~1956)<목마와 숙녀>에서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라고 한 지 70년이 흘렀다. 종이 활자보다는 영상 시대, 그 영상에서도 쇼츠가 더욱 흥행하는 시대, 문학은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아서 어느 새는 흥했다가 또 어느 때는 존재감이 없는 듯하게, 오래도록 그 쓸모가 다해 가는 듯해도 가늘게 이어지고 있다.

 문득문득 내 존재의 쓸모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될 때가 있다. 세상에 내 쓸모를 증명하는 일들이 버겁게 여겨지기도 하는데 그 쓸모의 몇 할은 문학에서 얻어오고 있다. 이 사회에서 쓸모의 기준이 되는 ‘, ’어느 정도의 돈벌이를 하는가가 아니라 문학에 내 쓸모를 빗대는 일, 아니 어쩌면 존재를 찾는 일은 가련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미운 오리 새끼의 그것처럼 애달프고 멋쩍기도 한. ’돈이 되는지돈이 되지 않는것의 대표인 문학으로 말하는 것, 발버둥 같기도 하지만 인생을 살리는 방법인 것도 같다.

 

  이 책은 형이상학적 논리로 전개되리라는 생각을 뒤집고 문학은 돈이 되는가로 시작한다. 이런, 원제가 “La litterature, ca paye!”란다. 시는 수익성이 가장 높은 예술이다가 책의 첫 소제목으로 흥미를 돋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셈만 알고 이야기를 할 줄 모른다면 아무것도 전달할 수 없고, 아무것도 설득할 수 없다”. 문학의 쓸모는 다른 이다.

 

  문학이 탐구하고 가르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는 않으나,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가까운 이웃과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 크고 작은 사물들에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 삶의 균형을, 삶에서 사랑의 자리라든가, 그 힘과 리듬을, 또한 죽음의 자리를 찾는 그 방식, 그밖에 다른 일들, 냉혹함, 연민, 슬픔, 아이러니, 유머 등, 필요하지만 어려운 일들을 생각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그 방식 등

   *이탈로 칼비노 사자의 골수‘, 1955

 

  문학이란 건 작가에게 이 되지도 독자에게도 시간을 낭비하는무용한 일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고, 수많은 사람들이 특히 순수문학을 덜 열광한다. 활자는 사람들에게 독인 듯, 시간낭비인 듯 여겨지고 있다. 사람들은 긴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 줄 수 있는 이야기에 열광한다. 무용함의 대표적인 책으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거론되고 있어, 마구 옹호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한편에 프루스트와 소파, 졸음, 낮잠, 예술을 위한 예술, 고치 속의 삶이 있다. 다른 편에 카버, 셀린, 거리, 분주한 삶. 문제의 정서적 지하철이 있다. 카버나 셀린을 읽는 게 프루스트를 읽는 것보다 더 많이 남는다. 돈을 더 빨리 벌 수 있고 투자금 회수도 더 빠른 것이다.

 

  시간낭비. 수익을 중요시하는 자본주의 시대에 쓸모없는 문제작인 문학. 문학은 왜 필요한가. 일부 문학으로 을 버는 이들이 일부있지만 대부분은 해당하지 않는다. 문학은 오래도록 실용적인 학문과 비교해 경쟁이 밀리고 밀려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은 전면에 드러내지도 않은 채로 현재 교육현장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문학적 소양을 요구하고 있다. 성공적인 주식투자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보다 스토리를 갖춘 이야기가 먹혀들고, 권력을 쥐고픈 정치인들이나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픈 사람들의 말과 태도에서 사람들은 문학적 소양을 찾는다. 어느 분야에서건 문학적 소양을 찾고 있으니 문학은 유용함이란 쓸모를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학 자체는 외면하면서 또한 요구하는 현실 속에서 문학이 어떻게 시대에 맞게 유용함을 보여줄 수 있는가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글을 아는 사람은 자기 삶의 저자다. 문학과 독서, 둘의 응집체인 문학적 소양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에게 늘 보상을 안겨준다. “그것은 이득을 늦게 보는, 하지만 아주 큰 이득을 보게 해주는 투자다.”

 

   영상으로 인해 문자는 사라질 것처럼만 보였지만 다양한 플랫폼의 발전과 함께 SNS에서는 자기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물론, ’내 이야기만 하기로 흘러가기도 하지만, 어떡하든 기록을 남기려고 하는 이들이 생겨난다면 문학은 오래도록 그 쓸모를 이어가고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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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로 읽는 심리 수업
김동훈 지음, 빈센트 반 고흐 그림 / 민음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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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내면 아이


고흐로 읽는 심리 수업

김동훈 (지은이), 빈센트 반 고흐 (그림), 민음사, 2025-02-05.

 

한국인이 좋아하는 화가는 고흐인 듯 고흐와 관련된 책이 정말 많다. 학창 시절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인지 어느 책에서 읽었던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일본이 그렇게 고흐를 좋아한다는 말이 기억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고흐의 해바라기를 비롯해서 고흐의 작품이 다른 화가들에 비해 대단한작품인 듯이 교육하고 강조했다고. ‘일본풍의 그림을 좋아하고 많이 그린 고흐였기에 일본은 그토록 열광했겠구나 싶었다.

  어렸을 적부터 고흐의 그림은 어디서나 쉽게 접했다. 일본의 고흐 열광으로 인해서이기도 하겠고, 고흐의 그림과 그가 남긴 편지들이 많이 남아 있어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어쩌면 예술가의 특징처럼 여겨지는 고흐의 기행(?)’도 큰 몫을 하리라 생각한다.

  이 책도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그가 그린 그림을 통해 고흐의 심리, 나아가 일반적인 심리학 이론을 설명한다. 익히 들어본 심리학 용어들이 고흐의 그림을 통해 예시처럼 펼쳐지는 이야기다. 고흐의 그림도 보고, 고흐의 심리 상태도 보고, 이와 더불어 어떤 날들에 내 행동의 이유를 되돌아볼 수 있게 된다.

  고흐는 히스테릭, 우울증, 광기로 대표되는 화가다. 고흐에 관한 책들을 제법 봤음에도 저런 단어들만이 늘 머물렀는데 새삼스레 이 책을 보면서 고흐가 가진 우울의 근원이나 사랑 등 다른 것들을 각인할 수 있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메시아 콤플렉스. 히스테릭한 고흐에게 기대한다거나 생각할 수 있었던 부분이 아니었기에, 재밌는 부분이긴 했다. 하지만 이 메시아 콤플렉스의 기저에도 고흐의 상처가 내재해 있다.


심리학자들은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끌리는 이유를 메시야 콤플렉스’, 즉 구원자를 자처하는 심리라고 한다. 극단적인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해결자로 나선다.

이렇듯 자신을 구원자로 여기면, 적어도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만큼은 자신이 필요한 존재로 인정받게 된다. 그래서 자신을 원하는 사람에게 손해를 무릅쓰고라도 자신을 기꺼이 내어준다. 하지만 그 내면 깊은 곳에는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은 과거에 그런 존재로 인정받지 못한 상처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고흐의 인생 전체를 지배한 우울과 광기는 어릴 적부터 상처받은 내면 아이때문이다. 저자는 고흐의 이러한 심리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고흐 이전에 태어난 아들의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어머니가 고흐를 고흐가 아니라 형으로 대체하여 바라보았기에 고흐는 늘 어머니의 사랑이 결핍된 아이로 자랐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와 같은 여인에게 마음을 주기도 했고, 창녀 시엔의 불쌍하고 힘든 모습을 보며 결혼으로 시엔을 구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시엔이 점차 자립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고흐는 시엔을 떠난다.

  이 책을 통해서 보는 고흐 역시도 안타깝다가 우선한다. 부모와의 관계, 동생 테오와의 관계, 고흐가 했던 사랑, 고흐와 고갱의 관계는 왜 이다지도 어긋나게 흘러가는지, 삐꺽거리는지. 저자는 고흐에게 있는 강박이 상처와 더불어 이를 더욱 강화한다고 본다.


어찌 됐든 그런 상태에서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원망하면서 점점 더 외골수가 되었다는 점이다. 가족과 사랑하던 여인들, 동네 사람들마저 숱한 충돌과 갈등으로 고흐를 외면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강박증에 빠진 이유도 알 것 같다. 우리에게 실재의 것이 없을 때 다른 사람에게 나의 방식을 강요한다. 누구에게는 시기심으로, 누구에게는 열등감으로, 또 누구에게는 괜한 갑질로 표출되지만, 억압한 욕망 때문에 일평생 결핍(그리움)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소중한 실재만 있다면 그 수단은 중요하지 않다. 블로그, 유튜브, , 그림 등 다양한 매체를 오히려 적극 활용할 것이다. 표현할 실재만 있다면 표현할 것만 있다면 인상파이든 초현실주의든 다다이든 추상표현주의든 미니멀리즘이든 개념미술이든 그 방식은 중요하지 않다.

 

  저자는 고흐의 이 히스테릭한 성정이 올리브 나무나 아몬드 나무 등을 그리며 자연에 대한 환기와 내면에 집중함으로써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노란 하늘과 태양이 있는 올리브나무 숲> 그림이 대표적인데, 이를테면 주의회복이론’(ART: Attention Restoration Theory)’이다.

*반 고흐, 노란 하늘과 태양이 있는 올리브나무 숲, 1899

심리적으로 힘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고흐가 굳건히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더 이상 사람을 모델로 삼지 않고 그 대신 아몬드나무나 올리브나무와 같은 자연을 그리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의 회복 이론은 우리의 정신적 에너지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방법으로 자연의 역할에 대해 설명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산만하게 흩어졌던 주의를 다시 집중하려면 네 가지 요소가 중요하다. 그것은 탈주(Being Away), 확장(Extent), 끌림(Fascination), 융합(Compatibility)이다.

첫째, 탈주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 둘째, 확장은 우리의 시야를 넓혀 더 멀리 더 높게 보는 것, 셋째, 끌림은 억지로 집중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는 것, 넷째, 융합은 자신의 취향과 적합하게 연결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연유가 있어서인지, 나 또한 고흐의 그림 중에서 인물을 그린 그림보다도 자연을 그린 그림을 보는 것이 더 편하다. 올리브나무, 밀밭, 별이 비치는 밤. 그리고 그가 병원에서 그렸던 그림을 보면 애잔하다. 병원에 있을 때 그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 그림을 보고 있으면 적잖이 슬퍼진다.

  고흐는 상처받은 삶이라도, 새로운 생명과 희망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고흐의 생명과 희망이 그림 속에 녹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듯도 하고. 내 방에 걸린 고흐의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는 여전히 쓸쓸해 보이긴 한다. 고흐와 관련된 책을 보았어도 딱히 고흐에게 감흥이 없었는데 나이가 들어서인가, 심리학 이론과 함께 보아서인지 고흐에게 좀더 가까워진 기분이다. 알려진 대표적인 그림 외에 고흐의 그림을 새롭게 보고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며 상처받은 내면의 어린 고흐를 생각해본다. 저자가 고흐를 통해 얘기하고 있는 많은 심리학 이론이 고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내 생에도 순간순간마다 이러한 심리적인 질곡이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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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청춘의 초상 - 조국의 독립에 바친 뜨거운 젊음, 한 장의 사진이 증언하는 찬란한 그 순간
장호철 지음 / 북피움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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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하셨습니까!

 


독립운동가, 청춘의 초상

-조국의 독립에 바친 뜨거운 젊음, 한 장의 사진이 증언하는 찬란한 그 순간

 장호철, 북피움, 2025


  책 속 26명의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본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 실려 있던 인물이 몇 명이나 되나. 살아가면서 이 사람의 독립운동가라고 이름 들어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되나. 하지만, 이런 분도 있었어?를 더 남발함에 부끄럽고 또한 안타까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했겠지만, 기본적으로 독립운동가에 대해 얼마나 제한적으로 가르쳐왔으며 소극적으로 알렸던가, 이들을 외면하고 왔던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독립운동가의 삶은 조국의 독립에 바친 뜨거운 젊음, 한 장의 사진이 증언하는 찬란한 그 순간이라는 책의 부제처럼 뜨거웠다. 이들에게 조국은 무엇인가를, 국가란 국민에게 무엇이어야 하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몇 년의 상황들과 맞물려 더더욱.

  책은 돌아오지 못한독립운동가와 돌아온독립운동가로 나누어 이야기하고 있다. 독립운동가의 삶을 읽다가 보면 감정이 울컥해지며 숙연해짐을 느끼게 되는 지점이 있는데,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대부분, 10대와 20대라는 것이다. 청년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린 그들. 그들은 그 어린 나이에 조국의 독립을 외치고 실천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죽음은 일제에 의한 직접적인 처형이거나 굶주림으로 인한 것이라는 점이다. 최근 유튜브에서 AI로 복원한 독립 운동가의 식사하는 장면을 보았다. 왜 이러한 장면을 복원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내내 제대로 드시지 못한 그들이 편안하고 조금은 풍족한 한 끼를 드셨기를 바라는 마음, 뒤늦은 감사와 응원의 마음 아닐까.

  이러한 마음으로 숙연해지는 가운데, 어쩔 수 없이 분노하게 되는 지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일본에 대한 분노여야 하는데, 한 나라의 초대 대통령이란 놈에 대한 것이다. , 일본의 앞잡이이니 일본에 대한 분노와 같은 건가.

  독립 운동가 장인환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제의 제국주의를 옹하고 한국의 독립을 방해한 미국인 더럼 스티븐스를 저격한다. 당시 한인들의 모습을 보자.

 

의거 후에 두 사람이 재판에 넘겨지자 한인들은 성금을 모아 변호사를 선임했고 유학생이던 신흥우가 통역을 맡았다. 애당초 이승만에게 통역을 맡기고자 했으나 그는 샌프란시스코까지 왔다가 자신이 학생 신분이며 기독교도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하여 한인사회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 이쯤에서 내가 잘못 읽었나 하여 다시 한번 문장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둘도 없을 것 같은 이름, 이승만이 그 이승만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데, 그건 여성 직업 교육에 매진한 차미리사의 활동에서다. 여자로 태어났다고 섭섭이라고 불린 차미리사의 소개 내용은 이렇다.


그는 동포의 고통을 외면하고 천국에 가길 소원하는 내세 지향적 영혼 구원 신앙, 불의한 현실 사회에 대해 무관심한 초월주의적 신앙, 정교분리 뒤에 숨어 민족의 아픔을 외면하는 경건주의적 신앙 모두를 비판(한상권)”하면서 의혈 투쟁의 소신을 편 것이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의 재판 법정 통역을 기독교도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한 이승만이 해방정국에서 면담을 요청하자, 차미리사가 이를 단호히 거부한 데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저런 인간을 몇 번이나 대통령에 뽑아. 뽑아 버려야 할 인간을 전직 대통령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과하게 칭송하고 받드는 무리들이 있어 그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이 어떤 나라인가. 식사하셨습니까가 인사이고 안부인 나라. ‘밥 한번 먹자가 만날 약속의 표현인 나라인데.


2009년 정부가 발표한 교육 부분 친일반민족행위자 22명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근대 여성운동과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 불리었던 사학 설립자들이 많다. 서울여대를 세운 고황경, 인덕대학을 세운 박인덕, 상명대를 세운 배상명, 성신여대를 세운 이숙종, 추계예술대학고 중앙여중고를 세운 황신덕 등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김활란은 이화여대의 초대 총장의 신화로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보다 훨씬 큰 지배력을 지닌 인사로 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지금도 여전히, 이런 현상은 이어진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여전히 힘겨운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친일 세력은 그때 얻은 어마어마한 부를 바탕으로 더 많은 부를 챙기고자 여전히 친일에 목매고 있다. 독립된 지 오래되었는데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친일 문제는 오늘까지 이어져 나라를 흔든다.

 

  한편,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대부분의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동도 알 수 있었다. 여성 독립 운동가로 유관순 누나만 주로 이야기되었던 현실이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여전히 누나로 불리는 것은 그를 온전한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로 바라보는 걸 방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를 유관순 열사라 부를 때 그는 이준 열사와 같은 위상의 공적 영역에 존재하는 인물이 된다는 점을 되새길 만하다.

 

독립 유공자 가운데 여성의 비율이 3%가 채 되지 않는 현실은 옥바라지와 경제활동, 양육까지 병행하며 항일투쟁에 참여한 여성들의 희생이 재조명되어야 할 필요성을 웅변으로 증명한다. 그늘에 가려진 부인들의 뼈를 깎는 희생은 남편에 부수되는 내조가 아니라 동등한 투쟁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아쉽다. 내로라하는 독립운동가들의 투쟁과 헌신은 바로 그들 가족의 희생을 전제로 가능했기 때문이다.

 

  낯선 이름들이 뒤늦게라도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하였을 터인데, 기록에 없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많아 안타깝다. 그러나, 명백히 드러난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외면하고 폄하하는 무리들이 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이들의 투쟁과 희생으로 살아 있으면서 다시금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으려는 밥버러지들의 밥그릇을 걷어차 버리고 싶은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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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셋 : 아름다움과 여성혐오 열다 페미니즘 총서 2
쉴라 제프리스 지음, 유혜담 옮김 / 열다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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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성


코르셋, 쉴라 제프리스, 열다북스, 2018.


  미용관습은 여성의 주체적인 행동인가. 저자 쉴라의 주장은 명확하다. “아니다.”

  미용관습이 여성 선택인가에 관해서는 페미니즘 내에서도 이견이 존재한다. 이것은 ‘미용관습’이 무엇인가에 관한 인식 차이에서 벌어진다. 미용관습은 화장, 하이힐, 다이어트, 제모, 로션, 미용영양제, 패션, 보톡스, 성형수술과 같이 여성의 ‘외모’를 성적/미적 대상으로 하는 행위들뿐만 아니라 ‘여성적’인 태도까지를 포함한다. ‘여성적’이지 않은 태도―화장과 제모를 하지 않는 등 용모를 꾸미지 않은―는 여성의 자기관리 능력이 없음을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 능력없고 프로페셔널하지 못하고 게으르고 성실하지 않은.

  쉴라는 ”여자에게 강요되는 ‘아름다움’이 “성별 구분에, 즉 성적 지배 계급인 남자와 피지배 계급인 여자를 쉽게 구별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본다. 미용관습은 순종―여자에게 성적으로 복무할 의지, 심지어 성적 복무를 위해 노력을 들일 의지가 있다는 뜻― 표시이며 ‘굴종적’이라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남성 지배 문화를 이끄는 문화적 관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꼭 미용 관습을 통해 성적 차이를 만들어야 하는가? 남자들이 일상생활을 꾸려나가는 동안 ‘여자’를 보고 고추를 부풀리며 성적 만족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남성 지배 사회에서 ‘여성성’은 피지배자 사회에서 일어나는 집단행동으로 “남자의 성적 흥분을 용이하게 하도록 여성성을 훈련받고 여성성을 수행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이에 대해 디 그레이엄은 “여성성은 사회적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일컬었다.


여자는 남자와는 달리 여성성을 ‘선택’할 위치에 있지 않다. 여성성은 강요되는 것이며, 여자의 낮은 지위를 나타내는 표식이기도 하다. 여자들에게 여성성은 섹스 장난감이 아니라 몸과 감정, 인생까지도 규정하는 규칙이다.


  쉴라는 이러한 서구의 미용관습,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미용관습 역시도 ‘유해한’ 문화 관습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UN은 여성 성기 훼손(FGM), 여자에 대한 강제 음식 주입, 조혼, 남아 선호, 여야 영아 살해, 미성년 임신, 지참금 등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을 철폐하기 위한 유해 문화 관습을 지정하고 있는데 FGM은 서구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중동과 아프리카의 FGM는 다르게 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어쩌면 서구에 ‘관습’을 만들어내는 ‘문화’가 있다는 개념 자체가 낯설게만 느껴져서일지 모르겠다. 보통 서구의 유해 관습은 소비자의 ‘선택’, 아니면 ‘과학’의 ‘의학’, 그것도 아니면 ‘패션’이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며 정당화된다. 관습이 아니라 시장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문화는 비서구에만 존재하는 수구적인 무언가라면, 서구에는 그 대신 과학과 시장이 있다는 식이다.


  미용관습이 ‘선택인가?’에 관한 페미니즘의 시각이 나뉘는 지점이 여기이다. 선택이라 주장하는 근거는 화장과 제모하지 않기, 다이어트나 몸매 관리는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기에 선택이며 강요된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앞서 제시했듯 여성이 미용관습을 거부하면 “분노와 조롱을 부르며” “도덕 같은 성질을 띤다”는 점, 다이어트가 건강에 피해를 주고 죽음까지도 낳기도 한다는 점은 ‘강요’와 ‘사회적 압력’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이것이다. 미용관습에 관한 시각에 서구중심주의, 국가간 권력 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중동이나 아프리카에서 행해지는 관습에 관해―어느 정도 고유한 문화라고 인식하면서도― ‘미개하다’는 시선으로 보고 있다. 어째서 서구가 행하는 것은 ‘세련된’ 문화이고 ‘사업’이 되는가. 왜 흑인 여성에게 여성성은 “백인 여성처럼 되기”가 되어야 하는가. 왜 중국 전족 문화는 여성 억압하는 문화로 문제시되고 서구의 하이힐 문화는 그렇지 않은가. 어느 나라의 ‘문화’적 상황보다 자본이 개입된 ‘산업’이라는 명목에서 ‘여성성’은 더더욱 도구적이고 ‘상품’으로 위치하고 있지 않은가. 

  유해 미용 관습이 없어진 세계가 올 수 있을까. 쉴라는 미용관습의 유엔 유해 문화 관습 지정이 그 시작이 되리라 보는 듯하다. 미용관습에 적용될 ‘존엄성dignity’은 문화적 차이에 의해, 자본의 차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 존재 자체의 존엄과 자유를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여자가 얻게 될 육체적, 정신적 자유를 위해서라면 투쟁할 가치가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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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사이언스 클래식 4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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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에는 별이 있다


코스모스, 칼 세이건, 사이언스북스, 2004.


  지나치게 걱정이 앞섰던 걸까. 마치 물리학이나 고급 수학 교재처럼 생각했던 까닭에 코스모스를 들쳐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주를 이해하고자 하면 더 쉽고 가벼운 책으로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더 쉽고 가벼운 과학책을 보았던 건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과학책을 읽고자 하는 강력한 열망이 생겼다. 코로나 19 상황이 가져온 긍정적 요인이다. 이해하지 못할 신천지 종교관과 행동에 대한 반발심은 과학과 사실이란 단어에 더 집중하게 했다. 우주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거짓과 망상이 아니라 사실과 증거로 내 사고체계의 중심을 잡고 싶은 까닭인지 과학적 사실에 대한 강력한 욕구가 마침내 코스모스를 읽게 했다. 그리고 알았다. 코스모스는 너무도 쉬운 책이라는 걸. 수학적 기호와 물리학 공식이 가득한 ‘교재’가 아니었다.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음만 활짝 열면 되는 거였다. 그러면 아름다운 문장과 이야기들이 마음을 사로잡아 우주로 이끈다. 시작부터 이 책을 읽고자 했던 마음에 꼭 들어맞는 문장이 등장했다.


오늘날 우리는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강력하고 정교한 방법을 알고 있다. 그것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과학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낮추는 일이 된다거나 무엇인가의 권위에 도전‧반항하는 것이란 사고는 오래 전에도 있었지만 여전한 듯하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건 모두 ‘신의 뜻’이라 말하며 머리를 조아리면 되었다. 2,500년 전 이오니아에서 새로운 깨달음의 기운이 일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이 미신에 갇혀 세상을 보고 있을까. 많은 것들을 보고 들으며 현상을 발견하고 해석해 내면서 인간은 점차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에 부여된 체계적 질서를 알아가게 된다.


과학의 세계에서 새로운 생각이 인정을 받으려면 증거 제시라는 엄격한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벨리코프스키건의 가장 서글픈 면은 그 가설이 틀렸다거나 그가 이미 입증된 사실을 간과해서가 아니라, 자칭 과학자라는 몇몇 이들이 벨리코프스키의 작업을 억압하려 했던 데에 있다. 과학은 자유로운 탐구 정신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했으며 자유로운 탐구가 곧 과학의 목적이다. 어떤 가설이든 그것이 아무리 이상하더라도 그 가설이 지니는 장점을 잘 따져봐 주어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생각을 억압하는 일은 종교나 정치에서는 흔히 있을지 모르겠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이 취할 태도는 결코 아니다.


  칼 세이건은 우주 탄생과 생명의 진화, 별과 행성, 항성에 관해 관찰과 탐험의 사례를 유려한 언어로 이야기해준다. 칼 세이건은 금성은 높은 압력과 맹렬한 더위, 맹독성 기체 등으로 지옥 낙원보다는 지옥에 가까운 현장이라고 이야기한다. 화성―지금도 여전히 많은 과학자들이 탐험하며 알고자 하는―엔 생명체가 존재하는가,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인가를 설명하며 보다 본질적인 것을 지적한다. 화성에 생명이 있다면 그대로 놔둬야 한다고. 그건 지구조차도 잘못 사용한 인간이 화성에 생명이 있을 시 화성을 어떻게 만들어갈 지에 대한 우려를 표한 것인데 실제 화성에 대한 탐사를 수식하는 단어가 ‘정복’이라는 점에서 이 점에 동의한다. 어떤 문명이 한 문명에 우위를 점하고 그에 대하여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칼 세이건은 단순히 과학적 사실과 현상만을 나열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인간이 우주를 알고 이해하려는 이유를 끝없이 주지시킨다.

  칼 세이건의 언어로 우주의 이야기로 읽는 과정은 여행기를 읽는 것처럼 흥미롭다. 인간이 별과 달과 행성에 가 닿기 위한 끝없는 도전 과정, 우주의 모든 별과 행성의 흔적은 학창 시절 교과서를 통해 배웠던 단편적 이해를 뛰어넘어 아름답게 보이고 가슴 벅찬 느낌을 준다.

  꽃 중에 코스모스를 좋아했는데 왜 코스모스인지 궁금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코스모스 사진을 보고서야 알았다. 코스모스는 가운데 통과 같이 생긴 꽃인 통상화와 꽃잎으로 알고 있는 설상화 두 가지 종류의 꽃이 합쳐진 꽃이라 한다. 이런 꽃을 두상화라고 한다는데 코스모스의 통상화를 잘 들여다보면 각각의 별모양을 한 꽃들이 한덩어리로 무리지어 있다. 코스모스 속의 코스모스. 아, 우주의 질서는 더할 나위 없이 신비롭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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