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완의 시대에 그저 좋은 사람이란 될 수 없다


셀레스트 응. 내가 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


   줌파 라히리, 애완의 시대, 트라우마, 자기연민과 자기암시, 꿈, 가정, 피임…

  아이들은 순수한가?, 그래서 결국 리디아를 죽인 자는 누군가. 리디아는 어떻게 죽었나.

   책을 읽는 중 스치고 지나간 생각들이다.


  “리디아는 죽었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의 배경은 1950년대에서 1970년대 즈음이다. 1977년 리디아가 사망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오가며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핵심은 ‘누가, 왜, 리디아를 죽였는가’로 모아진다.

  줌파 라히리의 단편 <그저 좋은 사람>이 떠오른 건 미국의 이민자 가정의 두 남매의 분위기가 이 소설의 남매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언뜻 미국은 이민자 가정들이 미국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갈등하는 소재의 이야기를 참 좋아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야기가 있는 소설마다 미국의 유수한 상들을 휩쓸고 미국 평단의 반응이 좋게 나타났다. 하긴, 평이 좋으니까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이런 소설들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오로지 나의 선택이 아니라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또다시 느끼는 건 그런 이민자의 이야기를 쓴 작가들은 역시, 이민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읽은 책에 한정해서이지만 생각을 거듭해도 거의 100%였던 듯하다.

  이 책의 작가 셀레스트 응 역시 홍콩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셀레스트 응의 아버지는 나사 소속 연구원이고 어머니는 화학과 교수라는 점을 볼 때 미국사회에서 나름 안정적인 배경을 가지고 생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 역시 이른바 금수저로서의 위용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이민자 가정이 전반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할 때, 가난으로 인한 어려움, 지식의 결여로 인한 소외감이나 무시는 비교적 덜했으리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작가의 경험이 어느 정도 가미된 이야기인 걸까. 소설의 주인공들은 중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그들의 세 아이들의 이야기다. 앞서 말한 대로 이 가정에서 둘째딸인 리디아가 어느날 사망한 사건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이 생각난 것처럼, 이 외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생각이 나긴 했다만, 이 소설의 소재는 익숙하다. 당연하겠지만 이민자 가정이 겪는 문제, 이민자 가정의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겪는 문제란 왕따와 정체성의 고민이니까. 하지만 작가는 이 익숙한 소재를 이야기하는 형식을 비틀어 상당히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엮어 간다. 아마도 6년 동안이나 이 소설을 수없이 수정한 것이 보다 유연하고 흥미있게 소설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힘이 되었을지 모른다. 무엇보다 그 힘은 “리디아는 죽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로 시작되는 추리와 미스테리한 형식에서 돋보인다고 할 것이다. 분명 함께 범인을 찾는 이야기인가 싶어 각을 잡고 범인을 추리하자라고 할라치면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한 가정의 내밀한 가정사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겪는 갈등과 욕망. 사랑과 소통의 이야기.


한번도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고 자란 20대 젊은이 중에 이유없는 무기력과 우울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자신의 느낌이 무엇인지, 감정이 무엇인지, 한번도 자신을 탐색해보지 못한 채 성장해 어느 순간 삶의 의미도, 동력도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누군가를 대신하는 삶은 온갖 걱정과 무기력을 채워진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그것을 잘하고 있는지 그 의미도, 목적도 모른 채 주어진 기대와 관심에 부응하려 애쓰지만 그 일 또한 온전한 자신의 선택이 아니기에 완전히 책임질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p70 <애완의 시대 중>


  <애완의 시대>가 생각난 것은 이 시대의 이 가정의 부모들에게서 베이비 부모 세대의 애환이 고스란히 전해졌고 이들 모두에게서 애완을 보았기 때문이다. 길들여지고 길들여지는 이 애완을 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얼까. 이 가족에게 <애완의 시대>를 추천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 피임도 절대적인 한 방법이다. 피임! 우리의 능력있고 강단있는 메릴린에게 필요한 것, 애초에. 자기결정권이란 말은 쉽다. 하지만 자기결정권의 궁극은, 최상은 결정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최상일 때 아닐까. 결코 상황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너의 결정을 따르리라” “너의 결정이 최고의 방법이다”라고 말한들, 공허함이 돌 뿐.


황금빛 찬란한 바닐라 향이 나는 인생을 꿈꿨을 테지만 결국 딸은 떠나버리고, 연필로 밑줄 친 꿈 외에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이 작고 슬프고 텅 빈 집에, 작고 슬프고 텅 빈 인생에 갇힌 파리 같았을 엄마의 인생을 생각하면서 메릴린은 날카롭고 깊은 아픔을 느꼈다. 그래서 슬픈가? 아니, 화가 났다. 엄마의 인생이 발하는 그 보잘것없음에 맹렬하게 화가 났다. 이거야, 메릴린은 분노에 싸여, 요리책을 어루만지면서 생각했다. 엄마를 기억하려면 이게 필요해. 내가 간직하고 싶은 건 이것뿐이야. p120~121


  사망한 것은 리디아인데, 리디아만큼이나 가족 모두가 사망한 것이 여겨지는 이야기들을 한바퀴 돌고 나면 정말이지 막내 한나의 존재가 각인되며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순수한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이 땅의 수많은 아이들이 저들과 ‘다른’ 것에 항상 거리를 두다 못해 ‘낙인’을 찍는데 앞장선다는 것이다. 누구랄 것도 없이 순수하기에 순수한 놀림 그 이상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행동들을 아이들은 하고 있다. 정말로 아이들은 순수한가. 이 아이들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 아이들 스스로가 아니라는 점을 알기에, 안타까움과 울분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어른은 그렇게 변해가는가. 그들의 사고는 왜 지식을 얻으면 얻을수록 지식을 변질시키려 하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눈이 파랄 수 있지? 어쨌거나 중국인 아냐?”

    리디아가 눈을 깜박였다.

    “엄마가 미국인이잖아.”

    “갈색 눈이 우성이라고 생각했는데.” p269


  우리는 누구나 ‘나’가 되어야 한다. 그 어느 누구의 ‘나’가 아니라 나의 나가. 그러나 우리는 ‘누구의 누구’를 분리하여 말해질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내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어떤 사회에 가정에 있느냐가 전적인 지분을 가지지 않는다고는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지분으로 나를 휩쓴다. 그때에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말들이 아닐까. 그것은 마냥 ‘이기적’인 것과는 다른 맥락의 말. 중심과 가치를 잊지 않고 잃지 않기 위한 최선의 길일 것이다.


  웃고 싶지 않을 땐, 웃지 않는 거야. 꼭 기억해야 해. p366

 적어도 난 내가 할 일을 다른 사람이 말하게 하진 않는다고, 절대로. 적어도 난 두려워하진 않아.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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