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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푸른색 잉크로 쓴 여자 글씨
프란츠 베르펠 지음, 윤선아 옮김 / 강 / 2016년 5월
평점 :
점점 짙어지는 글씨
글을 읽고 작가에 대해 알고 나면 글의 내용이 달리 느껴질 때가 있다. 작가로서의 감성과 감각보다 외적인 것에 더 치중하고 싶지는 않지만, 낯선 작가를 아는 방식은 작품보다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각인될 때도 있다. 그러다 보니 프란츠 베르펠이란 작가는 단번에 ‘말러의 남편이야’가 되어 버렸다. 나같은 사람들이 많은 탓에 작가 역시 당대에 무척 시달렸던 모양이다. 워낙 알마 밀러의 사랑이 유명하다 보니, 아니 많은 예술가들을 사랑했기에 프란츠 베르펠 역시 그녀의 몇 번째 남자인가가 관심사였을 것이다. 알마 쉰들러는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으로 이후 클림트, 코코쉬카, 건축가 그로피우스 둥 먾은 연인을 가진 여자로, 그래서 팜므파탈로 더욱 알려져 있다. 팜므파탈의 남편이 된 프란츠 베르펠에게 온갖 연인들을 뒤로 하고 프란츠 베르펠과의 삶을 선택하게 된 것이 무엇인가 하며 그에 대한 관심도가 증가했을 것은 분명하다.
<옅푸른색 잉크로 쓴 여자 글씨>의 내용은 매우 간단하다. 1936년 10월 아침, 레오니다스가 그날 받은 편지 한통으로 인해 안절부절하는 내용이다. 오스트리아의 교육부 차관이자 이제 오십인 레오니다스는 그 편지를 이십 여년 전 자신이 사랑한 여자가 보내온 편지라 생각하지만 편지를 뜯어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편지의 주인공을 만나던 그때 자신은 결혼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는 지난날을 돌아보는데 자신이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자존감도 없던 사람이었음을 생각한다. 그가 자존감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기숙사 옆방의 유대인 친구에게서 받은 연미복 한 벌로 무도회를 가게 될 기회를 얻은 후 상류사회로 진입할 수 있게 되면서다. 그곳에서 외모와 언변으로 인기를 얻은 후 가장 부유한 집안의 딸 아멜리와 결혼할 수 있었다. 아멜리가 집안의 반대를 이겨내고 그와 결혼했던 만큼 자신의 성공길은 아내가 보장해준 것과 다름없었다. 옛 연인으로부터 한 청년의 후원을 부탁받은 편지를 읽자마자 그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직감을 하지만,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가 내린 결정은 거짓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치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가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 아내의 의심을 받게 되자 그는 자신의 아내를 달래기 위해 아내에게 편지를 보여주게 되고 다시 예측하지 못한 전개로 이어진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는 베라의 아들이 자신의 아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인정할 경우 아멜리가 터트릴 분노와 그녀의 복수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는 아멜리가 당장 이혼 소송을 제기할 거라는 사실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별것 아니라는 듯 여유만만하게 누리고 즐기는 재산, 바로 이 재산의 상실을 그 어떤 것보다 더 무서워하고 있었다. p168
한 남자의 외도를 알리는 편지 한통. 그때부터 남자는 그것을 들킬까 두려워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제 생을 돌아본다. 이 소설에서는 그 남자의 내밀한 심리가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갈등과 번민에 휩싸인 남자의 생각과 심리 변화를 시시각각으로 절묘하게 묘사한 것이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힘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가난한 남자가 부유한 여자를 만나 제 성공을 위해 자신의 여인과 아이를 버리고 성공길을 달리는 이야기는 드라마 단골 메뉴이긴 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이야기에 시대적 배경을 더하고 주인공의 성격이나 특징을 조금만 더하면 이야기의 방향은 달라진다. 작가는 그렇게 몇가지 터치를 함으로써 이야기의 방향을 급선회하게끔 하며 독자에게 다른 생각거리들을 안겨준다. 주인공이 편지내용이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은 편지를 받고 나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이 고뇌한다. 햄릿이 살아온 듯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만 그 바탕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주인공, 레오니다스라는 인물의 위선과 철저한 기회주의적 사고다. 그리고 주인공이 편지를 받은 1936년의 오스트리아는 나치의 시대였다. 작가 역시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도피한 것이 1938년이었다.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의 시대에 고급 관료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레오니다스가 나치 정권에 어떻게 대처를 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을 한나 아렌트식으로 악의 평범성이라고 해야 할까…. 철저하고 당연하게 전형적인 기회주의식 사고와 실천에 앞장서는 레오니다스이기에 그가 18년 전에 결혼을 빙자한 외도를 일삼은 일은 그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될 정도이다. 그래서 그의 내적 고민의 대사들이 구구절절하게 전개된다 하더라도 진실한 반성으로 이어지기보다 결국 그저 그런 결론으로 치닫기 위한 세밀함이 될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러한 지나치도록 세밀한 그의 내적 갈등을 따라가다 문득, 깨닫는다. 아, 레오니다스. 이 사람 자신, 유대인이라니…….
“용서라는 말……” 베라가 그의 물음을 실마리로 삼아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상투적인 빈말에 지나지 않아요. 난 그 말을 싫어해요. 후회할 만한 일을 했다면 그건 각자가 스스로에게 용서할 수 있을 뿐이에요.” p199
우리는 누군가의 생각이 발화되기 전에는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없다. 한 문장의 말이 입으로 나올 땐 생각을 거쳐 나타나는 것이지만 생각은 수많은 가지를 확산하더라도 막상 내뱉는 것은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우린 그 일부를 그 사람의 모든 의도로 받아들이게 된다. 수많은 생각 속엔 보다 바람직한 생각들도 있고 타인을 위한 배려도 있고 잘못에 대한 반성의 순간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이 스치듯 지나가게 하고 욕망의 돌출과 생의 편리가 그 생각들을 누르고 결과가 되고 마는 말로 나타난다. 어쩌면 말로 나올 것이 정해진 채로, 그 정해진 결을 향해 생각들이 전진되었을 지도 모르겠다만.
롤러코스터 같은 진지하고 세밀한 고민의 균열이 이루어내는 힘은 줄거리를 뛰어넘어 레오니다스에게, 이 소설에 몰입하게 한다. 생각없이 읽다가 소설을 지배하는 분위기에 휘감겨진다. 우울한 회색빛이 조금 깔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