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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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묻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Prilis Hlucna Samota (1980년)

보후밀 흐라발, , 문학동네, 2016.


  고독보다는 가슴이 저려온다. 책 속 주인공 한탸에게 작가 보흐밀 흐라발이 얹어지면서 이야기는 더욱 더 깊은 울림을 더한다. 자조적이고 연민이 가득한 이 책에 대해 “재미있다”는 말보다 더한 말을 찾아야 하지만, 누군가 묻고 답해야 한다면 일단 급한대로 가장 간단한 말, “재밌어”라고 외치고서 누군가를 붙잡아 둘 것이다. 이것은 너무 한탸같은가. 상당히 매혹적인 소설이다. 장편 소설로는 분량이 짧은데 스토리와 문체와 어조가 모두 흡인력 있다. 여운까지도 쉽게 사라지지 않아 더욱 더 책을 붙잡게 된다. 많은 작가들이 보후밀 흐라발에게 찬사를 보내는 이유가 공감된다.   

  작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체코의 국민작가라 불리며 마흔 아홉에 처음 소설을 쓴 작가. 노동자, 철도원 점원, 보험사 직원, 단역배우, 폐지 인부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삶을 이어간 작가. 정부의 감시와 검열에 출판금지를 당하면서도 체코를 떠나지 않고 글을 쓰며 지하 출판을 한 작가. 체코 출신 작가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수많은 작가들에게 찬사를 들은 작가. 그리고 비둘기….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난 삼십오 년간 나는 그렇게 주변 세계에 적응해왔다. p9 


  ‘체코 소설의 슬픈 왕’이라 불린다더니, 소설을 다시 한번 읽으니 첫 문장부터 슬픔이 가득찬다. 시대가 만든 개인의 상황은 삶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공산주의 체제 하의 체코 프라하. 법학을 전공한, 젊은 시절 시를 쓰기도 한 젊은이는 대학을 떠나 안정된 삶으로 정착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안전한 망명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금서로 지정되어 출판이 금지당하는 상황에서도 체코를 떠나지 않고 체코어로 글을 쓴 작가 보흐밀 흐라발은 삼십 오년째 폐지를 압축하는 삶을 살고 있는 책 속의 한탸와 너무도 닮았다.

  폐지를 꾸리는 일의 단순성에 대해 논한다면 이 일을 하고 있는 한탸는 절대적으로 부정할 것이다. 지하실로 수없이 떨어지는 폐지를 그저 ‘버리는’ 일 없는 한탸는 자기 나름의 기준으로 폐지를 분류하고 해체하여 묶어 내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한다. 폐지를 압축하고 파쇄하는 것이 주어진 임무라면 그것을 ‘어떻게’ 버리든 그것은 한탸의 마음이다. 한탸가 그렇게 하면서 활자를 글자로 보지 않고 의미로 읽어 내며 많은 교양과 지식을 쌓는다. 그렇기에 그는 바퀴벌레와 쥐가 들끓는 열악한 환경 속에 물리적으로 갇혀 있으나, 갇혀 있지 않은 채 바깥 소식의 일들을 폐지로 들어오는 책들을 통해 접한다. 그의 작업장엔 수많은 책들이 방문한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엔 프로이센 왕실 도서관 장서가, 전쟁 후에는 나치 문학과 사회주의 책들이 들어온다.     

  한탸의 고독은 선택이다. 한탸는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 혼자라고 말한다. 그에게 독서는 한낱 기분전환이아 소일거리가 아니다. 한탸는 책을 통해 배우고 사고한다. 자신은 책을, 글을 해체하는 일을 하지만 그 글들은 그의 고독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래서 한탸는 이 일을 벗어날 수 없고 책과 함께 하는 일에 만족한다. 퇴직해서도 압축기를 구입해 이 일을 하기를 꿈꾸기도 할만큼…. 그는 예수와 돈키호테와 노자와 니체와 괴테, 고갱과 노발리스, 실러, 횔덜린 등, 수많은 작가와 글들을 만나며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 만차에 대해서도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한탸는 끊임없이 자신이 삽시 오년째 폐지 더미를 파쇄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내년이면 삽시 육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서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삽십 오년이라 서술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한탸가 삼십 오년째 이 일을 하고 있으며 아직 내년은 오지 않았으며, 지금은 삼십 오년째이니까. 그러니까, 내년은 오지 않을 테니까.

  산업혁명으로 인간의 노동력이 기계로 대체되던 때처럼 한탸는 도시로 나갔다가 자신의 것보다 수십배 큰 압축기를 보게 된다. 그 기계를 압축하는 사람들은 신식 시설에서 유니폼을 갖춰 입고 일하며 콜라를 마시며 휴식 시간엔 휴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며 일하고 있다. 한탸의 세계에서는 너무나 놀라운 이 광경은 늘 폐지로 교양을 쌓아 온 한탸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제시해준다. 자신의 세계가, 끝나가는 구나, 라는…. 자신이 새로운 기계와 일하는 그들처럼 빠르게 효율적으로 일을 하는 게, 자신의 삶이 아니라는 것. 자신은 새로운 삶에 절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

 

부브니의 거대한 압축기와 청년 사회주의 노동단원들 그리고 그들의 그리스 여행에 심적으로 팽팽히 대립해 있는 나는 멍청한 인간이었고, 내 작은 압축기보다 더 미미한 존재였다. 그날 오후 내내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일했다. 부브니의 속도로 종이를 갈퀴로 퍼 담았고, 반짝이는 표지의 책들이 내 곁에서 수다를 떨어대도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안 돼, 넌 그럴 수 없어, 단 한권의 책도 펼쳐볼 권리가 없어, 잔혹한 한국 형리처럼 냉정해져야 해’라고 쉴새없이 나 자신을 타일렀다. 내가 압축통 속에 집어넣고 있는 것들이 무감각한 흙덩이인 양, 그렇게 일했다. p98~99


  저항할 겨를없이 당연한듯 한탸의 지하실에도 변화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에 한탸의 선택을 이해하느냐고 아무도 묻지 않기를 바란다.


아무렴, 나는 여전히 쾌활한 사내다. 그런 내가 자랑스럽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p131


  그렇다. 고독 속에 있었지만 한탸는 반복된 일에 찌들어 있지 않고 유머를 잃지 않은 노동자였다. 책을 읽으며 행복해하는 지식인이었다. 지저분하고 더럽고 냄새나는 그 지하실 폐지 더미 속에서 “선물과도 같은 멋진 책 한권을 찾아낼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매순간 살아온 한탸의 삶은 그 희망에 기대어 정말 고독마저도 감미로웠다. 현실에서는 바퀴벌레와 쥐의 등장에 나자빠질 것이 분명한데도 그 공간을 상상하며 한탸와 같은 몽상을 해보는 것도 재밌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탸는 그의 세계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흥미를 가미시켜주었다.

  삽십 오년 동안 폐지 속에 묻혀 있던 사나이. 그곳에서 가져온 책들이 자신의 아파트에도 넘쳐나는 책중독자가 되어버린 사나이. 책과 함께 하기에 늘 너무나 시끄러운 고독 속에 있던 사나이. 그가 마지막 순간에 한 책은 노발리스의 책이다. 노발리스는 <푸른 꽃>을 쓴 독일 시인이다. 낭만주의 시인으로 서른도 되기 전에 사망한 시인이다. 한탸가 읽은 수많은 책, 좋아하는 수많은 작가 중에서 왜 노발리스였을까. 현실과 꿈의 세계가 명확치 않은, 평범한 것에 고상한 의미를, 일상적인 것에 신비스러움을 잘 알려진 것에 미지의 존엄을 담음으로써 낭만화를 발견한다는 노발리스의 말처럼 낭만화고 있는 것이었을까. 여전히 쾌활한 사나이로서의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함일까. 


한 손에 들린 나의 노발리스를 꽉 쥔다. 내가 좋아하는 글귀에 손가락이 올라가고, 입술엔 지복의 미소가 떠오른다. 나는 만차와 그녀의 천사를 닮기 시작했으니까……이제 완전한 미지의 세계로 진입한다. 책을, 책장을, 쥐고 있다……사랑받는 대상은 모두 지상의 천국 한복판에 있다, 라고 쓰여 있다……멜란트리흐 인쇄소 지하실에서 백지를 꾸리느니 여기 내 지하실에서 종말을 맞기로 했다. 난 세네카요 소크라테스다. 내 승천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p131


  한탸는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들고 좋아하는 글귀를 읽으며 지복의 미소를 짓지만 그 누구도 그의 미소를 볼 수는 없다. 한탸는 그가 좋아하던 폐지 더미처럼 파쇄되어 버렸다.

  이 소설은 책읽기에 대한 이야기로도, 묵묵한 성실하게 일하는 노동자의 이야기로도, 고통스런 사회현실에서 살아남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삶의 이야기이다. 소설이 필시 현실을 반영한 허구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소설속 인물의 종말까지도 작가의 모습으로 오버랩된다. 물론 환상적인, 몽환적인 색채가 가득하다. 그러면서도 현실과 경계 어디쯤에 있는데도 작가의 능력이 지극한 현실적, 사실적인 느낌이 가득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저 현실에서 일어난 일인양, 너무한 쓸쓸함과 아픔이 뒤따르는 것일 것이다. 한탸 자신이 너무도 쾌활한 사나이었기에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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