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르 사전 열린책들 세계문학 183
밀로라드 파비치 지음, 신현철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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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의 즐거움


하자르 사전,  밀로라드 파비치.


  의도치 않게 미로에 들어섰다가 미로를 빠져나온 쾌감에 다시 미로를 들어갔다. 한번에 그치지 않고 또다시 미로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기분. 이것이 하자르 사전에 대한 느낌이다.

 신화와 종교, 역사, 우화가 섞인 듯한 하자르 사전의 묘미는 이야기와 더불어 이야기를 담고 있는 글의 형식이 정점으로 이끈다. 각각의 이야기가 조금 더 큰 줄기와 맞물리고 그것은 다시 더 큰 줄기 안으로 이어지며 마침내 모든 줄기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의 즐거움이란. 작가는 독자의 새로운 즐거움에 관대했음이 분명하다. 이토록 새로운 독서법을 위한 글쓰기에 힘을 쏟았으니 말이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간단하다. 하자르 민족의 종교 개종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여기에서 파생한 이야기는 1982년의 이스탄불 킹스턴 호텔의 살인사건으로까지 이어진다.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연결지어 보면 이야기의 갈래가 많아서 책을 놓을 틈이 없다. 지금은 사라진 하자르 민족 자체에 대한 궁금증, 하자르 논쟁 결과에 대한 궁금증, 책 속에 등장하는 꿈사냥꾼에 관한 기묘한 이야기, 그리고 악마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이야기의 촉발은 이렇다. 하자르 민족의 군주가 어느날 꿈을 꾸고 난 뒤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에게 꿈의 의미를 묻는다. 그리고선 가장 마음에 드는 해석을 한 사람의 종교로 개종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책 속에선 어느 종교로 개종하였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명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각각의 대표들이 자기들 나라의 종교로 개종하였다고 하고 있으니 이들 세 명의 현자들이 꿈에 관한 열띤 해석과 토론을 벌였음은 분명하다. 그 이야기, 각각의 대표자의 관점에서 풀어 나간 하자르 개종에 관한 논쟁은 그들 나라의 입장에서 쓰여진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서 주장과 사실이 맞물린 세 가지 버전의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하자르 논쟁의 당사자들과 하자르 논쟁에 대해 서술한 기록자가 다른 이 내용은 하자르 사전이란 이름 아래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레드북, 그린북, 옐로북으로 나뉜다. 지금은 사라진 『하자르 사전』이지만 하자르 논쟁이 시작된 후부터 현재까지, 하자르 민족과 하자르 논쟁에 대해 관심을 갖는 수많은 이들이 있다. 작가는 처음 편찬자가 누구인지, 하자르 논쟁에 참여한 자, 그것을 기록한 자, 책을 만든 자, 하자르 민족에 대해 연구하는 자 등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알파벳 순으로 정리하여 하자르 사전의 이야기를 재현해 냈다.

  하자르 민족의 언어는 소멸되었으나 하자르 민족은 존재하였다. 그러니 이 사실적인 사건에 작가는 상상력을 곁들여 사전소설로서 모험과 미스터리를 전개시킨다. 아무리 가보지 않은 세계라 한들, 꿈 사냥꾼의 존재나 지옥에서 온 악마나 한두명이 아닌 시공간을 초월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역사적 실제로 믿기엔 난 너무 커버렸기에 그것을 작가의 탁월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환상소설’이라며 놀라워한다. 그럼에도 문득 문득, 작가의 상상력이 실제인 것만 같은 착각을 한다.

  거듭 읽어도 미진한 느낌이 드는 이 퍼즐같은 이야기에 작가는 하나를 더 추가한다. 이 사전이 남성판과 여성판으로 나누어진다는. 이 복잡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는 이야기 끝에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된다. 그 판본의 차이는 10줄이 채 안되는 문단이라는. 이 서로의 차이가 나타내는 바는 무언가 또한 심오하게 들어가게 되는데, 작가는 이러한 판본에 대해 독특한 의사를 표함으로써 유쾌하기도 하며 김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하자르는 세 개의 종교를 둘러싼 논쟁이 이루어졌는데 스페인에서도 세 개의 종교가 공존했던 시기가 있다. 12세기의 스페인의 코르도바. 이때엔 잠시이긴 하지만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조화를 이루었다. 곧 개종과 종교박해가 이루어졌지만. 이러한 실제의 상황에 더해 모험과 살인 사건이 더해지며 『절대적 영원에 대한 논고』를 찾아 가는 소설이 자크 아탈리의 『깨어 있는 자들의 나라』이다. 하자르 사전을 읽으며 이 책이 생각난 것은 이러한 유사성과 그 분위기 때문이다. 자크 아탈리의 소설에서도 그랬듯 최종적인 승리는 유대교인들의 몫인 모양이다. 최근의 연구는 하자르 민족이 유대교로 개종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하자르 민족의 소멸이 이 개종과도 관계된다고도 한다.

  하자르 사전은 여러 가지로 생각들을 뻗게 한다. 소설의 이야기를 찾아나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언어와 종교와 민족에 대해서도. 또한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자르라는 나라는 자신만의 언어와 종교를 이어가지 못했다. 소설 속에서 나타난 하자르인들은 그들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랬기에 그 언어가 소멸된 것일까. 아니면 하자르 민족 자체가 힘이 없는 것이었을까. 이 이야기를 그대로 믿는다면 하자르 군주는 꿈을 이유로 종교를 선택하려 할 때 일찌감치 제 나라의 종교는 배제시켰다. 하자르 민족의 종교에서 말하는 꿈의 의미는 들어볼 생각조차 없었던 것일 테니.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책을 읽으며 일찌감치 유대교가 승리했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꿈 해석에 대한 각 나라의 대표들의 해석을 거듭 읽었다. 하자르 군주는 어디에 끌렸을까, 그가 결정짓도록 한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어떤 생각의 갈래들은 너무도 뛰쳐나와서 이 애들을 끌어모아 정리할 새가 없다. 물론 명징한 하나로 귀결되지도 않을 것이다. 하자르 사전이 대표적이다. 다만, 명쾌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은 외국어를 공부하며 반복해서 뒤적여야 하는 사전처럼, 반복해서 들여다볼 수밖에 없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가의 글쓰기로 인한 새로운 책읽기는 아주,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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