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내가, 가진 돈에 비해 비교적 집을 잘 구했다는 걸. 난 운이 정말 좋았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이 집, 잘 때 엄청 시끄럽고, 화장실에서는 시도때도 없이 하수구 냄새가 올라오고, 건물은 40년도 넘었고, 경비 아저씨는 오지랖도 넓고, 밑에서는 치킨 냄새가 올라오고, 시끄러워서 환기도 잘 못시키고, 겨울엔 난방비도 많이 나오고, 주차장도 없는데!!!!!!! 라고 생각하며 그러니 아무도 이런 집에서 살고 싶지는 않을 거야,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올 초 한겨레21에서 전세 난민들과 관련된 기사를 봤다. 기자가 직접 전세를 구하는 체험을 한 거였는데, 어쨌든 서울 중심에는 그 돈으로 (얼추 내가 가진 것(대출 포함)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많거나) 얻을 수 있는 집이 없었다, 는 요지의 기사였다. 그 밑에 댓글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돈도 없으면서 서울 중심으로만 집을 찾으니까 그렇지, 돈 없으면 변두리 가서 집을 구해야지, 기사가 이상하다, 뭐 그런 거였다.
아. 그렇구나.
맞다. 돈이 없으면 변두리로 밀려나야 되는 거지. 나 그런 도시에, 그런 나라에 살고 있는 거지. 돈도 없는 주제에 서울에 내가 좋은 집을 잘도 구했지. 비록 40년이 됐지만, 대로변에서 엄청 시끄럽지만, 가끔 새벽에 탱크 지나가는 소리도 들리지만, 그래도 뒤로는 한강이 있고, 여의도가 있고, 옆으로는 이태원이 있고, 앞으로는 서울역이 있는 이런 곳에 내가 주제넘게 살고 있었구나, 그러면서 터무니없이 이런 40년된 아파트는 전세값이 안오를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싶다. 어쩌겠는가, 돈이 없으니 변두리로 밀려나는 게 사실은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난 이 동네가 좋았는데. 곧 없어질 동네의 마지막 주민이 되고 싶었는데. 여기 살면서 이런저런 추억들 많이 만들고 싶었고, 또 자신도 있었는데, 현실은 낭만 따위를 허락하지 않는다. 나의 현실은 내가 좋아하는 동네에 계속 살 수 없는 것.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들고 계속 계속 멀리 멀리 중심으로부터 멀어져가는 것. 주변에 쭉쭉 올라가는 주상복합들이 나를 비웃는 것 같다.
난 우리 집도 정말 좋아하는데. 계단 한층만 올라와도 되는 것도 마음에 들고 거실이 넓은 것도 마음에 들고 공간 분할도 마음에 들고 내가 물건 배치해놓은 것도 마음에 들고 책장이 부족해도 너저분하게 책 쌓아둘 공간 많은 것도 마음에 들고. 사람들 불러다 도란도란 놀 수 있는 테이블이 있는 것도 마음에 들고. 책을 다 내다 팔아야 하나? 테이블 같은 건 역시 사치였나? 나는 다시 어떤 공간에서 살게 될까?
1~2천이면 어찌어찌 용을 써볼텐데, 이건 무려 4천이다. 와. 이렇게 어이없이 오르기도 하는구나. 아직 1년이 좀 안되는 시간이 남긴 했지만. 경험상 시간은 금방 가고, 그 기간동안 내가 받을 월급을 한푼도 안쓰고 다 모아도 그 돈은 모을 수가 없는데 나는 이미 이 집에 들어오기 위해 얻은 대출금과 빠듯한 생활비에 4천만원은 커녕 한푼도 모으기가 힘든 실정이다. 게다가 ㄷ님의 말을 빌자면 한번 오른 물가는 내려가는 법이 없으니 희망 같은 건 절대 가지면 안되겠지. 어이없게도 이 순간 생각났던 건 계약서 도장 찍을 때 했던 주인할머니의 말. "살고 싶을 때까지 살아" 였다. 혹시나 운이 좋아 주인 할머니가 돈을 안 올려받지 않을까, 싶은 나이브한 생각도 들었지만 생각해보니 우리집에 살던 주인할머니 딸도 전세 얻어 나갔는데, 나랑 비슷한 시기에 전세 만기가 될테고, 그럼 그 딸 오른 전세값은 고스란히 이 집 전세 올려 받아서 내주겠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거다. 아. 아. 아. 이건 뭐, 희망이 없다 OTL 게다가 4천이나 올랐는데 어느 주인이 안올려받겠는가. ㅜㅜ
처음에 이사와서 지금까지, 그래도 세입자가 잘 해놓고 사는 게 주인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 조심조심 깨끗하게 집을 쓰고 있는데, 갑자기 그것도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나를 몰아내고 (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쓰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음) 다음에 이 집에 살게 될 세입자만 좋은 일이잖아. 그건 어쩐지 배가 아프다. 나는 이 집을 정말 좋아하지만 돈이 없어서 살 수가 없는데. 돈이 있어 살게 될 누군가를 위해 내가 조심조심 사는 건 어쩐지 억울한 마음이야.
아. 비뚤어질테다. 흑흑. 올 겨울엔 커튼도 달려고 했는데. 엉엉.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 같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