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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스타니슬라브 부닌 - 1987년 라디오 프랑스 리사이틀 (한정 수량 단독 판매) [2CD] 스펙트럼사운드 단독 판매 한정반 시리즈 62
쇼팽 (Frederic Chopin) 외 작곡, 부닌 (Stanislav Bunin) 연주 / BELLE AME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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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Stanislav Bunin, "Live at the studio 106, Maison de la Radio France Paris on January 15, 1987"[CDSMBA109], Belle âme, 2023(이하 ‘1987년 프랑스반이라고 약칭.)을 접한 계기는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저번 포스팅을 참고하길 바란다.

https://blog.naver.com/zazaie/223034077437

 

CD 관련해서 일종의 이벤트로 알라딘에서 최초로 음감회를 하였다고 한다.

https://www.aladin.co.kr/events/wevent.aspx?EventId=246852

 

음감회라... 참신하여 웃기다가도 참여하지 못해 아쉬웠다. 이를 네이버에 검색을 하니, 우연히 그 후기를 찾았다.

https://blog.naver.com/ssal_o0000/223050461183

 

블로그에 후기 쓰신 쌀벌레님과 댓글을 나누면서 이웃도 맺고,, 한편 이 CD에 대해 여러 의문점이 있던 나는 음감회를 주최하신 분과 대화를 하고 싶었고, 여러 수소문이 물고 물어 마침내 43일에 주최자 분께 와 닿아 전화를 할 수 있었다.

 

주최자 분은 알고 보니 음반사 대표님이셨다. 그 음반사는 ‘Belle âme(프랑스어로 아름다운 영혼’)’라고 불린다. 대표님의 사모님께서 지으셨다고 한다. 희귀한 음원을 찾아 CD를 알라딘에서만 발매를 하신다고 한다.

 

음반을 업으로 하시는 분이라, 우연히 S. 부닌의 음원을 찾으시고 과거에 부닌의 내한공연 보신 경험, 스푸트니크(Sputnik)에 사진을 고르시는 계기, 음반 소개글(일부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올해 부닌의 도쿄 리사이틀에 가셔서 CD를 주실 거라는(ㅋㅋㅋㅋㅋ) 이야기,,, 이야기를 하다 보니 1시간 45분씩이나 지나갔다. 간만에 새로운 세계를 일면 볼 수 있어서 지루하지 않았다.

 

이 음반은 430일 새벽에 받아서 들을 수 있었다.

 

S. 부닌에게 1987년은...

이 음반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고, 한편으로 아쉬움도 있다. 이를 두서없이 느낌 닿는대로 서술해보겠다. ㅋㅋㅋㅋ

 

우선 음반 사진이 참 인상 깊다. 2013년 이후 S. 부닌(Stanislav Bunin, 러시아인, b1966~)이 연주 활동을 중지한 이유 중 하나로 그의 어머니, 루드밀라 부니나(Liodmila Bunina, 러시아인, ?~2013)의 죽음에 대한 충격이라고 NHK BS4K 또는 “BSプレミアム(Premium)” 채널 그래도 나는 피아노를 친다(それでもはピアノを)” 방송에서 밝힌 바가 있다. 음반사 대표님은 이를 의식하지 않았지만, 사진을 잘 선택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주지하듯이 S. 부닌은 1985년 제11회 쇼팽 국제 콩쿠르 1위 수상자다. 이후 1987년은 S. 부닌이 또 다른 프로그램 레퍼토리를 완성한 때이기도 하다.


그 프로그램은 1987년 독일 뮌헨 피아노 여름에 선보인다. 이후 8, 도쿄에서도 보여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포스팅을 참조하길 바란다.

https://blog.naver.com/zazaie/222951352119

 

여기서 C. 드뷔시를 제외하고, F. 쇼팽의 몇 소곡을 덧붙여 12,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녹음하였다. 이는 다음의 포스팅을 참조하길 바란다.

https://blog.naver.com/zazaie/222973248505

 

그렇다면 이번 메종 드 라 라디오 에 드 라 뮤지크(Maison de la Radio et de la Musique)에서의 '1987년 프랑스반'1987115일의 음원이니, 앞전의 프로그램이 처음 손 보인 라이브라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CD는 총 2개로, 음원 구성은 다음과 같다.

 

CD 1

T1 F. 쇼팽, 녹턴, Op.272(1835)

T2 , 즉흥곡, Op.29(1837)

T3 , , Op.51(1842)

T4 , 마주르카, No.19, Op.302(1836~1837)

T5 , , No.34, Op.562(1843)

T6 , , No.38, Op.593(1845)

T7 , , No.41, Op.633(1846)

T8 , 폴로네이즈, Op.61(1845~1846)

 

CD 2

T1 C. 드뷔시,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L. 75(1890~1905), 프렐류드(Prélude)

T2 , , 미뉴에트(Menuet)

T3 , , 달빛(Clair de Lune)

T4 , , 파스피에(Passepied)

T5 , 영상 제1, L. 110(1904~1905), 물에 비치는 그림자(Reflets dans I' eau)

T6 , , 라모를 찬양하며(Hommage à Rameau)

T7 , , 움직임(Mouvement)

T8 , 아라베스크, L. 661(1888~1891): 이 음원만 음반사에서 공개하였다.

https://youtu.be/pOe5n5oyYEM

 

T9 F. 쇼팽, 왈츠, Op. 18(1833)

T10 , , Op. 642(1846~1847)

T11 , , Op. 641(1846~1847)

 

누구나 피아노를 연습할 때 처음에 완성한 곡은 정교하고, 자세하다. 그런데 완곡이 익숙해질수록 그 익숙함에 젖어서 완숙미를 보인다. 다만 이 모두 실수를 피할 수 없다. 이 말은 프랑스반에서도 유효하다고 본다. 드뷔시 파트에서 실수가 연발하여 아쉽기도 하였다.

 

그리고... 녹음 장소는 육안 상 보면 커 보이고, 좋아 보이는데... 음질이 아쉽다. 필자는 취침할 때 항상 음반을 틀고 자는 버릇이 있다. D Acoustics Alto+를 쓰는데, 보통 음반을 틀면 볼륨 4~5로 하여도 충분하다. 그런데, 이 음반은 8~9로 해야 4~5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또 저음부가 정확하고, 시원스럽게 들린다기 보다 두들겨 패는 듯한 소리이다... 박수 소리가 끊임없이 나와서 실제로 그곳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너무 남발한다는 생각도 하였다. 계속 듣다보니 장소에 비해 좀 박수 소리가 크게 웅장하지 않은 것 같다... 좁은 곳에서 연주하였는가...

 

CD2T8~11은 앙코르 연주인데, T8을 제외하고 전부 왈츠이다. 이는 1986년 왈츠 전곡을 연주한 부닌이 선곡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왈츠는 정말 명연이다!... T9를 제외하고 T10~11Op. 64는 진짜 1985년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Op. 343번을 광속 연주한 것이 안 떠오를 수 없다. 이는 밑의 링크에 남긴다.

https://youtu.be/GeqVjcuEWLA

 

결국...

이상에서 S. 부닌의 1987년 프랑스반에 대한 소회를 풀었다. 1988년 서독으로 망명가기 전에 S. 부닌의 피아니즘을 감히 말하자면 루바토, 템포완서(緩徐), 리드미컬함, 발랄함을 주는 페달링인데, 필자는 이를 ‘S. 부닌의 진솔함이라고 하겠다. 진솔함이 아주 돋보이는 연주이고, 그것을 다음 음반이 아닌가 생각된다.


뜬금 없지만... 이 음반에 대해 일본에서도 광고를 하던데... S. 부닌을 포함한 일본의 반응이 어떤지 궁금하다...

 

* 허어... 이렇게 한국에서 나름 분석하고,, 하는데... 정작 올해부터 개최될 S. 부닌의 일본 전국 투어를 못가다니... 지금의 상황이 원망스럽기 이를 데가 없다... 언젠가는 진짜 죽기 전에 꼭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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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Stanislav Bunin - 쇼팽: 14개의 왈츠 (Chopin: 14 Valses) (일본반)(CD)
Stanislav Bunin / IUM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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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islav Bunin, "Chopin: 14 Valses"[UCCY-3010], Japan: A Universal Music Company, 2015(EMI Toshiba, 1993)는 1992년 스타니슬라브 부닌(Stanislav Bunin, 러시아인, b1966~)이 이탈리아 밀라노 스칼라좌(Teatro allan Scala, since 1778)에서 F. 쇼팽 왈츠 14곡을 라이브로 연주한 것을 녹음한 라이브반입니다. 1993년에 출시되었습니다. 이 음원들은 유튜브에 없더군요.


이 CD의 속지는 1993년, 밀라노에서 부닌과 야마자키 무츠(山崎 睦)의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는데요,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부닌은 콩쿠르를 준비하던 시절에 디누 리파티(Dinu Lipatti, 루마니아인, 1917~1950)와 아르투르 베네디티 미켈란젤리(Arturo Benedetti-Michelangeli, 이탈리아인, 1920~1995)의 쇼팽 왈츠 외에는 하찮다고 생각하였는데, 지금은 아니다. ㅋㅋㅋㅋㅋㅋ


② 부닌이 13살(모스크바음악원부속중앙음악학교 재학생 때) 때 시험 때문에 12시간 만에 처음 본 3번(Op. 34의 2번)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③ 부닌이 가장 좋아하는 왈츠는 Op. 70의 3번.


④ 부닌은 황금만능주의에 찌든 인간 세계를 부정적으로 본다. ㅋㅋㅋㅋㅋㅋ


⑤ 부닌은 쇼팽 왈츠를 현재의 시각으로 해석해서 듣지 말고, 당시 쇼팽의 정신 상태, 생활 환경을 고려하면서 듣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 이 1992년 라이브반(이하 '1992년반'이라고 약칭)과 Stanislav Bunin, "Chopin Waltzs"[VDC-1202], Tokyo: JVC, 1987([A10 00317 006], Moscow: Melodiya Records, 1987; [258 307], Germany: Melodiya-Eurodisc, 1987, 이하 '1986년반'이라고 약칭. 이 CD에 대해서는 https://blog.naver.com/zazaie/222946183046 참고.)에는 당연하게도 은근한 차이가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1986년반에서는 힘이 넘치고, 생기가 발랄하였다면, 1992년반에는 발랄함과 함께 원숙미가 느껴집니다. 이는 1번(Op. 18) 연주에서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1986년반에는 강하게 리드미컬하였는데, 1992년반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 6번(Op. 64의 1번)은 약간 편곡을 한 것 같더라고요. ㅎㅎㅋㅋ 그리고 14번(KKIVa-15)의 경우, 음이 다르더군요! 1986년반과 다르게 1992년반은 『파데레프스키판 쇼팽 IX-왈츠』, 음악춘추사, 1997, 97쪽 75마디의 음과 같이 레# 도 미 레#로 쳤습니다.


F. 쇼팽 왈츠는 진짜 부닌이 최고이지 않나 생각됩니다. 제 생각에 1986년반보다는 아니지만... 원숙미가 느껴지면서 부닌의 개성으로 진지하게 해석된 라이브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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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코프스키 한길로로로 28
에버렛 헬름 / 한길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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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부터 차이코프스키 음악을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단순히 음악이 좋다고만 할 수 없습니다. 음악에도 역사가 있기에 그것을 이해할 필요가 확실히 있기 때문입니다. 꽤나 오래 전부터 사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드디어 읽게 되어 기뻤습니다.

이 책은 차이코프스키에 대한 생애와 음반 목록 등으로 구성된 일종의 평전입니다. 이 책을 통해 러시아 피아니즘의 계보를 공부하고,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왜 우울한지도 나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책 말미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러시아인, 1882~1971)의 말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이로써 이 책의 가치와 나름 내용을 축약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 공유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특별히 러시아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러시아적이라고 생각했던 그림 같은 모스크바 식 음악보다 종종 더 러시아적입니다(192111월자 런던 타임즈에 실린, 스트라빈스키가 디아길레프(Sergei Pavlovich Dyagilev, 러시아인, 1872~1929)에게 보낸 공개 편지, 224.)."

"어느 누구에게도 특별히 러시아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러시아적이라고 생각했던 그림 같은 모스크바 식 음악보다 종종 더 러시아적입니다."(224쪽.)

"우리는 또한 스스로를 이기려는 의지 속에서 인간이, 아니 우리 자신이 얼마나 위대해질 수 있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것은 예술가이든, 학자이든, 운동선수이든 자신의 삶을 더욱더 철두철미하게, 최선을 다해 살려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와 닿는 일이다."(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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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지식인의 패러독스와 역사철학 - 나이토 고난과 근대 일본의 학지 태학역사지남 4
신현승 지음 / 태학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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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본이 만든 '동양'이라는 허상과 그에 대한 학문적 지식들의 성격을 대략 규명하는 준전문서입니다. 5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2부에서는 나이토 토라지로(内藤虎次郎, 일본인, 1866~1934)를 중심으로 그의 패러독스(paradox, 逆說)와 역사철학을 주제로 논하고 있습니다. 그의 '시대구분론'(근세설), '당송변혁론'은 모두 '문화중심이동설'에 근거하였습니다. 그는 교토제대의 사학과 교수가 되기 전에 저널리스트였습니다. 그래서 포퓰리즘적인 기질을 버리지 못하였고, 자국의 역사를 강조하여 우월성을 확인하는 아주 그럴싸한 학문적 이론을 제기하였습니다.

3부에서는 나이토 토라지로와 함께 동양사학과의 양대산맥인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 일본인, 1865~1942)와 비교를 하였습니다. 시라토리 쿠라키치는 도쿄제대 사학과 교수로, 만철과 동양문고를 고안해낸 전형적인 제국 지식인이다. 그의 '남북이원론', '비교문화학'... 이것은 나이토 토라지로의 동양사학과 차이는 있지만 결국 자국사를 강조한다는 것에는 크게 변함이 없습니다. 즉 표면적으로 문헌고증사학으로 나름 밝힌 것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일본식 아시아주의를 위한 학적 이데올로기였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학문과 정치가 유착한 '정학유착(政學癒着)'... 우리는 이것을 알고 경계해야 합니다. 명심합시다! 후대를 위해서!...

1~3부에서는 중국을 학문을 통해 폄하하여 '동양'이라는 허상을 만들고, 일본을 강조하였다면 4, 5부에서는 니시 아마네(西周, 일본인, 1829~1897)와 중국의 양명학으로 일본의 근대를 이루었다는 반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니시 아마네는 한학적 소양과 주자학적 지식을 갖춘 학자입니다. 더군다나 당시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에서 그를 채용하고, 네덜란드 유학까지 보내서 근대 지식까지 섭렵하였습니다. 오늘날 '철학', '분석'.,, 등 동아시아 근현대 학술개념어를 만드는 데 기여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그의 이력을 보듯이 주자학적 지식을 필터로 근대 지식을 섭렵하여 학술개념어를 도출하였습니다.

5부에서는 주자학의 계서제적 질서와 양명학의 지행합일(知行合一) 등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자는 자신의 스승인 고지마 쓰요시(小島毅, 일본인, b1962~)의 "중국 문화야말로 메이지시대의 정신적 지주였다"라는 인용구를 설명하였습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저절로 명저인 스테판 다나카(Stefan Tanaka), 박영재·함동주 옮김, 『일본 동양학의 구조』, 문학과지성사, 2004(Japan's Orient: Rendering Pasts into Histo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가 떠오릅니다. 신현승의 저서는 저 책보다 완벽하진 않고 가끔 반복되는 문장도 있지만 확실한 개념 설명과 일본 근대학문에서의 중국 폄하와 이용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본중심주의(우월주의), 일본문화 우월주의, 더 나아가 제국주의, 혹은 패러독스에 의한 에스노센트리즘의 구현 및 궤변의 역사철학"(10쪽.)

고지마 쓰요시(小島毅, 일본인, b1962~): "중국 문화야말로 메이지시대의 정신적 지주였다"(186쪽.)

"어느 한 시대를 살다간 지식인들의 사유 양식은 필연적으로 시대 상황과 그 시대가 자의적 혹은 타의적으로 요구하는 시대정신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물론 시대를 초월하는 사유 양식을 소유했던 지식인들도 존재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시대의 환경에 의해 제약받는다. 역사관 또한 마찬가지이다."(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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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국가와 대칭국가 - 식민지와 한국 근대의 국가
윤해동 지음 / 소명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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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적으로 언급하지만 '공교육에서의 한국사'가 역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역사는 아주 광범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 식민지의 역사는 늘 일제의 지배와 조선(한국)의 저항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서사는 '근대 국민 국가 수립 운동', '민족 운동'이라는 대주제명으로 전개되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동시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결론을 짓습니다.

윤해동, 식민국가와 대칭국가, 소명출판, 2022는 그러한 통념을 깨버리는 전문서적입니다. 우선 이 책은 근대사를 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전제는 '식민지근대'입니다. 그는 예전부터 "근대란 원래 세계 체제를 전제로 한 것이므로 한국적 근대라는 문제의식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윤해동,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 휴머니스트, 2007, 19쪽.) 라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모든 근대는 식민지근대'가 되는 것입니다(21쪽.). 

이러한 시각으로 조선총독부의 국가론적 성격을 분석합니다. 우리는 총독부라고 하면 단순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식민지를 억압한 권력체라고만 인식합니다. 하지만 자세하게 알거나, 그 정체성을 규명해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6쪽.).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중국가, 식민국가, 대칭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분석합니다.

이중국가는 대한제국과 통감부가 병존하던 시기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대표적인데, 헝가리 왕국은 헌법과 의회가 있었지만 오스트리아와 군사, 외교와 재정을 공유하고 국왕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겸임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경우는 고종과 순종이 존재하였고 군대와 경찰도 있었다. 하지만 러일전쟁 개전과 함께 잠식적으로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8월 제1차 한일협약, 1905년 11월 제2차 한일협약(한일보호조약, 이른바 "을사조약" 이후 1906년 2월에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1대 통감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다.), 1907년 7월 제3차 한일협약(이른바 "정미조약")을 차례로 체결하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의병운동을 제압하고, 군대, 경찰, 사법기구를 접수하며, 고종을 퇴위시키고 통감체제를 확립시켰습니다.

이후 1910년 8월 한일합병조약으로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그야말로 식민국가가 됩니다. 총독은 천황에 직속되나, 본국의 내각의 직접적 통제를 받지 않고 식민지의 행정, 입법, 사법 등 종합행정권이 부여된 '소천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던 한국 정부의 조직을 토대로 조선주차군과 헌병경찰(1910년대 무단통치의 주류였던 경찰과 헌병경찰의 약 58%가 조선인이었다. 다만 최말단인 순사보와 헌병보조원으로 머물렀다(210~212쪽.).)을 장악하였습니다. 하지만 1929년 척무성, 1942년 대동아성이 설치되면서 본국의 중앙정부와 제국의회의 직간접적 통제를 받았고, 이왕직(천황가의 2단계로 왕공족으로 우대하나, 조선왕조의 상징공간을 박물관이나 동식물원을 설치하여 신성성을 떨어뜨리고, 고종과 순종은 궁에 유폐되어 사소하고 반복적인 일상을 보내었다.), '조선군(1904년 한국에 주차하는 일본군을 '한국주차군'이라고 명명하고, 1918년부터 '조선군'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이들은 조선통치의 군사적 기반이자, 3.1 운동 진압, 중국침략을 위한 군대로 변모되었고, 1938년 지원병제도가 도입된 이후 1944~1945년 사이에 학병과 징병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인도 동원되었다. 그 중에는 자발적으로 지원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사회적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생각하거나, 차별에서 탈출한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306~318쪽.). 또한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은 오사카 루스(留守) 제4사단장으로 활동하였다. 쓰카자키 마사유키(塚崎昌之), 신주백 역, 오사카성 부근에 남겨진 근대 한일 관계의 상흔, 역사비평83, 2008.) 참고.)', 조선은행(엔블록을 견인하는 국제투자기관으로 역할을 다하며 중국 침략에 대한 군사비 충당을 위해 화폐 증액발행을 하였다.) 등에 대해서는 감독권이 없었습니다. 한편 지방행정제도에는 도제를 도입하여 총독 중심 중앙행정체계를 수립하는 데 핵심적인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여기서 도평의회 혹은 도회의원의 약 70~75%는 조선인이었고, 이들은 조선인 교육문제, 생활개선 문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을 요구하였습니다(249~252쪽.). 이렇게 식민지 경영 방법을 모색하는 데 영국과 프랑스의 사례를 많이 참고하였다는 것에 또 충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식민국가 조선총독부는 인민의 동의에 기반하지 않은 식민지 통치라는 측면에서 주권 없는 근대국가였습니다(372~380쪽.).

이러한 조선총독부와 대치하는, 즉 대칭국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입니다(이하 임정). 임정은 3.1 운동 이전부터 조선의 지식인들이 국민주권설과 공화정에 기반한 임정 수립 논의가 있었기에 쉽게 수립될 수 있었고, 명목상으로 국내의 한성정부를 계승하되, 실제로 초기 상해임정과 러시아령 대한국민의회가 통합하여 성립되었습니다.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았고, 식민지배가 종결될 때까지 5번의 헌법을 개정하면서 인민주권의 원칙을 유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점유하고 있는 영토가 없고, 국제적 승인을 받진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임정은 식민국가를 통해 국민국가를 상상하고 학습하였기에 '이념상의 정부'로서 저항성을 담보한 '상상 속의 국가'인 셈입니다. 즉 반주권(半主權)을 보유한 반국가(半國家)라는 것입니다(355~372쪽.).

19세기 서구 열강의 침략이 시작될 때 일본은 홋카이도(1869), 오키나와(1879)를 병합하고, 청나라 중심의 중화질서는 와해되고 있었습니다. 이후 국민국가를 지향하는 청, 이중국가로서의 대한제국, 제국 일본으로 정리되고, 1930년대에는 국민국가를 지향하고 있던 분열된 중국, 이중국가로서의 만주국과 식민국가로서의 조선, 그리고 그들의 '모국'인 제국 일본이라는 혼성적 결합으로서의 동아시아형 국가간체제가 탄생하였습니다. 여기서 제국 일본은 내지와 외지로 구성되는 국내적 '공영권(共榮圈)'을 핵으로 대동아공영권 결성을 시도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상의 전지구적 근대가 만들어내고 있는 풍경이자 다성음악이(405~406쪽.) '공교육으로서의 한국사'에서 전개되어 학생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넓은 역사 인식으로부터 세상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역사학의 과제이고, 시민들에게 공유되어야 할 역사상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다 좋았지만... 아쉽게도 잘못된 점이나 오타가 있었습니다. 이는 평점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됩니다. 제가 지적한 것은 소명출판사에 신고를 하였고,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38: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사진과 설명 불일치. -> 반대로 되어 있어야 함.

399: “달리진다” -> “달라진다수정 필요.

405: 특별한 의미가 있으면 「」를 확실히 하거나, 아니면 삭제 요망.

"‘선진국‘ 한국의 바탕에는 민족주의의 두터운 거품으로 싸여있는 식민지가 깊숙이 그리고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를 직시하는 가장 올바른 방법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이다. 식민지 경험은 한국인만이 치러야 했던 예외주의적 고난의 사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6쪽.)

"궐위의 시대 곧 정치와 권력이 서로 어긋나 있는 시대, 국민국가가 더 이상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런 시대는 ‘지구화된 주권‘이라는 이상을 요구하고 있다. 새로운 전지구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구화된 주권이라는 이상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자유로운 세계의 만민은 지구적 정의라는 이상과 더불어 주권적 자유를 향유하게 될 것이다."(383쪽.)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전지구적 식민지근대가 만들어내고 있던 이런 국가의 풍경을 그려내고 싶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국가 너머를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4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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