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 전혜린 에세이 2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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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진리. '나는 해야만 한다'는 것.......그것에 의해 살고, 그것에 의해 나의 생과 정신을 분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싶다'가 아니라 '...... 해야만 한다'가 이것을 할 것인가, 저것을 할 것인가를 나에게 결정해 줘야 한다.
자기 훈련, 목적 의식, 겸손하고 자기의 환경을 의식한 일에 대한 인내, 인생에 다르게 마련인 가지가지 불쾌감에 대한 관용.......
행복이란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의해 주어지지 않는,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밤낮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충만하고 완벽한 순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자신으로의 복귀한 당위적 자아로의 복귀, 진정한 자아로의 복귀, 본질에로의, 근원에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 p. 80

 


 


오늘 3시간 잤고 부들부들 떨다가 진짜 리뷰쓰는 거 포기할까 생각하다 간신히 글 올린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더니 이젠 정말 진지해져서 그 말 꺼내다간 돌 맞을 시기다.

4.19 새벽에 세월호 유가족들이 시위하시고 계시고 4월 20일 지금은 부활절에 경찰들과 대치중이다.

그리고 난 이 책을 봤다.


 어느 언론이 '시신 수습 성공'이라는 단어를 올려서 맘에 걸린다. 욕하기 전에 검색이라도 해보자 싶어서 '시신을 수습하다'와 '시신 수습에 성공하다'라는 문장을 동시에 구글에 검색해보았다. '시신을 수습하다'라는 검색어엔 그나마 얌전한 기사들이 나온다. 그러나 '시신 수습에 성공하다'라는 문장을 검색하니 갑자기 '호박죽 만들기에 성공하다'같은 기사가 떠서 본인을 멘붕에 빠뜨렸다.

 


 그렇다. 분명히 어감이 다르다.

 '성공을 거두다'라는 말은 분명히 있다.

 우리나라는 종교를 믿는 국가니 종교적으로 설명하자면,

 '주님의 시신을 거두다'같은 말은 할 수 있지만, '주님의 시신을 거두기에 성공하다' 같은 말을 할 수 있는가?

 아마 그 땐 수습이라는 말도 꺼내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을 분명 자살한 사람의 감상적인 독백이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분명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지식인이 되고 싶은 여성으로서 최고로 부러운 교육들을 받았다. 한국에 와서도 독일어 교수로 채용되어 명문대를 전진하고 다니고 수많은 지식인들과 더불어 많은 활동을 했다. 아마 자기계발서 같은 걸 읽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여성의 인생이 '성공'한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녀가 자서전이 아닌 비밀스런 일기를 쓰고, 31살이란 젊은 나이에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죽었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그러나 요컨대 너무 큰 '성공'을 했다는 게 문제이다. 영혼과 지식이 너무나 풍부했던 그 여자는 겸손했고 자신이 좀 더 성숙해지길 바랬다. 우회해서 발언했지만 박정희식 정치의 맹점에 대해서도 상당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먹고 살기에 바쁜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지붕수리한다고 망치를 땅땅 치느라 옆에 있는 사람의 말은 잘 들리지 않는 '불통의 시대'였다. 사회적 동물은 소통과 공감을 못하면 정신이 고파서 죽는다. 그 유명한 예수님도 총 12명의 제자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소통을 하지 못하여 그 감정을 '목이 마르다'라고 표현했다. 신체상으로 볼 때 물은 3일 이상 안 마시면 죽는다.

 그녀는 '그의 의식에 비친 내 의식에 구토를 느꼈다'라는 단 한 구절을 썼다. 이게 1964년 12월 8일날 쓰여졌고 그녀는 1965년 1월 10일에 자살했다.

 더 늦기 전에 내 모습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어떻게 비치는지를 돌아보라. 그리고 그들과 자신의 모습에 대해 대화를 나눠라. 아직 맨 정신이 유지되고 있을 때 실행하는 게 좋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가 원해서 선택한 부모도, 나라도 아니다. 애초에 세상에 나오고 싶었는지는 우리 영혼에게 물어봐도 대답할 수 없을 테니. 그 질문을 할 만큼 머리가 무르익었다면 영혼은 속세에 찌든지 오래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시신 수습에 성공'이라는 단어를 봐도 분노할 기운이 없을 만큼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산 자들이 행복해지려면, 가끔은 이렇게 영혼을 갈고 닦아주는 책을 읽으면서 순간순간에 일어나는 각성과 근원적 자아로의 복귀에 만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근원적 자아로부터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올 때, 우리는 그것과 기꺼이 헤어지며 또 만날 순간을 즐겁게 기다려야 한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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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의 향연 2 - 개정판 얼음과 불의 노래 4
조지 R. R. 마틴 지음, 서계인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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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엔느가 검을 빼 들려고 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칼집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 마법의 검 없이는 싸울 수 없었다. 세르 자이메가 그걸 그녀에게 주었었다. 그녀는 렌리 경을 지키지 못하고 난 후 그를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그녀는 마음이 아팠었다.
"내 검. 제발, 난 내 검을 찾아야만 해."- p. 594

 



이전에는 세르세이가 그래도 이 배우를 써도 될 만큼의 상식은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난생 처음으로 원작인물에 비해 배우가 아까운 건 처음이었다.

종교에 무기를 쥐어준 것이다.


 책에서 본 바에 의하면 100년도 더 전에 이 제국을 다스리던 왕이 모든 종교에 무기를 버리라고 반협박을 했었다고 한다. 세르세이는 토멘을 주축으로 하여 새로운 제국을 만들거라고 하는데, 원작의 분위기를 생각해볼 때 스타니스와 그 분위기 장난 아닌 마법사를 의식해서 자신의 종교에도 무기를 쥐게 했던 것 같다. 본인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분위기이고. 하지만 스타니스는 스타니스고, 라니스터는 라니스터다. 스타니스가 아무리 그 멜리산드레에게 홀렸다 한들 왕권에 대한 자신의 근본적인 철학은 놓고 있지 않다. 그 여마법사도 사실 자신이 국가를 좌지우지하고 싶은 욕심은 없는 것 같고. 게다가 스타니스의 충신 다보스의 복귀에 따라 다른 옛 군신들도 기가 살아나면서 내부에선 스타니스파와 멜리산드레파가 첨예한 대립을 이루고 있는 상황이다. 비록 다보스가 살아있는지는 몰랐다 하더라도 분위기는 파악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결국 그녀는 나라를 왕당파와 종교파로 나누어버리는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게 되며, 성스러움과 순결을 종용하는 종교파에 의해 과거의 방탕이 드러날 위기에 처한다.   

 이번엔 유독 자이메와 세르세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전개였다. 결국 자이메는 설득이 안 되는 세르세이를 포기한다는 선택을 하는데, 그래도 자이메가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냥 패륜관계였다면 모르지만 애를 셋씩이나 둬놓고 지 불리할 때 자신만 새 인생을 살겠다니 무책임하다고나 할까. 세르세이가 도움을 청하는 편지는 읽지도 않은 채 불에 태워버리고, 자신한테 남은 마지막 아들 토멘까지 데리고 도망칠 생각을 하다니.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다른 여인의 등장, 세르세이가 자신 말고 다른 남자들과도 잤다는 사실, 부하들이 자신의 패륜을 알아버렸다는 생각때문에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듯하다. 새 출발을 했다지만 브리엔느도 변심한 듯하고 여러모로 이 인간의 끝이 행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나저나 4부 프롤로그와 마지막에 나오는 페이트라는 아이, 전후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오던데 엔하위키에서 보고 소름끼쳤다;;; 자켄이란 놈 대체 뭐하는 작자이고 이렇게까지 하는 목적이 뭔지 궁금하다. 다면신의 신전은 스파이 역할을 하는 기관인가? 그럼 배후는 누구인가?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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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그대의 품안에서
신영미디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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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키, 나...
그 후로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어.
너는 울었는데 말이야.
나는
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정말 악녀가 되어버렸는지도 몰라.- 6권

 

 아직 이 이야기의 진정한 스포일러가 나올 시점은 아니다. 그러나 보통 정상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10권에서 다 때려쳤을 것이다. 특히 9권 초반에서 요시키가 '지긋지긋해.'라고 라고 해놓고 10권 후반에 '지긋지긋할 정도로 사랑해★'라고 하는 장면에서 충격이 아니라 모에로 떡실신하는 여자들은 이미 쇼타콘의 경지를 넘었다고 봐도 좋을 듯... 난 솔직히 말해서 좀 짜증났다. 여주가 끝까지 안 밝혀서 그렇지 지긋지긋하다는 말 한마디에 충격받아서 손목 그었다고 ㅡㅡ 애정표현하려면 제대로 하던가.

 아무튼 세 이미지로 전체줄거리를 설명할 수 있겠다.



요시키한테 애를 무기로 삼아 협박하려고 했는데 통하지 않자 가스미를 통해 애 낙태하는 교코(...)

이건 또 무슨 세기의 화풀이냐.



가즈키의 죽음.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엔 너무 착했던 놈.

근데 가스미의 말대로 종나 질척질척거리고 부담스러운 남자인 건 사실.

나는 아직도 니가 가스미 눈 가리고 섹스한 거 안 잊었다.



 그리고 가스미와 연관된 또 다른 남자 등장.

이 생키는 또 웃긴게 가스미 어머니를 좋아하는데 17살이나 연하인 관계로 그 마음이 전해지질 않으니

가스미랑 결혼해서 가스미 어머니랑 얼굴이라도 보겠다고 결심한다.

겐지모노가타리냐. 개인적으로 이런 캐릭터 제일 싫어하는데.

 

 요시키랑 가스미도 독하긴 하지만 그 옆에 있는 인간들도 정말 독하다. 고인을 가지고 '죽어서 요시키를 이길 수 있다니 부럽다. 나도 죽으면 가스미를 이길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교코의 집착력도 정상이 아니고, 가스미 어머니를 짝사랑한다는 그 남자는 말할 것도 없고, 가즈키도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좋은 사람 그 이상은 절대 '무서워서' 될 수 없는 캐릭터다. 그러나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어머니. 요시키하고 딱 관계를 끊던가, 아니면 가스미를 포기하던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되는데 갈팡질팡하는 게 좋은 부모인 것 같진 않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하니 열외로 치지만, 애초에 여행을 가는 것처럼 애들을 속인 다음 분리시키는 게 잘못되었다고 본다. 아무리 지 딸을 걱정하는 거라지만 가스미가 무슨 지 소유인 것처럼 냅다 직장동료에게 주는 것도 좀 찜찜하고... 사실 이 어머니가 기가 막히도록 자기중심적이라는 증거가 또 하나 있는데, 이건 스포일러가 밝혀지면 그 때 썰을 풀기로 하겠다.

 아 물론 포스팅할 필요도 없이 요시키랑 가스미는 정말 꿋꿋이 사랑을 한다. 여성들이 이 만화의 어둡고 더러운 줄거리에 질색팔색을 하면서도 항상 이 만화를 베스트 순위에 넣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악의 궁지에 몰려도 끝까지 여자를 놓지 않는 남자. 현실과 꿈을 계산하지 않고 여자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독종. 음기에 싸여있는 여자는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원초적인 힘이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게 여자가 되었던 남자가 되었던 간에. '거짓말쟁이 미군과 고장난 마짱'이 묘하게 여자들에게 인기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군은 전 여자친구가 죽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마짱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지 않았던가. (사실 이루마 히토마가 마지막에 가서 내용을 심하게 꼬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소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루마 히토마는 언제나 최종장에 가서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람을 좋아할 수 있어!'라는 대목에 가서 솔직히 울었다. ㅠㅠ 에잇 시바 요시키 니가 진짜 사내대장부다! 결혼을 하려면 이런 놈하고 해야 된다고! (2차원을 가지고 망상하는 인간이 여기있습니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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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채근담 - 마음의 사색
한용운 지음, 성각 스님 옮김 / 부글북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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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과 절개가 넘치는 자는
마땅히 덕성으로서 편협함을 융화시켜야 한다.- 덕을 키워라

 


 


한용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건 시 작품밖에 없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 하나를 올려본다. 

만해 한용운은 '님의 침묵' 등 사랑의 시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 시를 우리가 이단(?)으로 취급하지 않는 이유는 그 내부에 종교적인 메시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요즘 불교가 힐링을 주목하고 있다. 지금은 다시 불교에 정진하고 있지만 트위터와 페북에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짤막한 글귀와 사진으로 일약 스타가 된 혜민 스님, 동자스님 그림과 함께 시를 씀으로서 조용히 팬층을 만들어낸 원성스님 등이 그들이다. 물론 기독교라던가 천주교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차별받는 동성애자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개리 피터슨 같은 목사님이 있다. 용서하라는 교리를 가르치는 성당 자리에 앉아 마음을 꽁꽁 얼리는 사람들에게 '용서가 안 되면 그냥 용서하지 말고 맘껏 미워하세요.'라고 말하는 홍성남 신부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원래부터 좀 따로따로 노는 성향이 강하고, 천주교는 위계 체계가 다른 종교보다 확고히 잡혀있는 편에다 공동체를 어느 정도 의식하는 편이다. 그러고보면 '어느 누구나 수행하면 보살이 될 수 있다'라는 자기계발이론같은 이론에서 시작한 불교가 지금 시대의 힐링에 가장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혼자서 정보를 습득하고 처리하기 쉬워진 시대인지라 대체로 사람들은 타인과 이리저리 부딪치면서 아파하느니 혼자서 자기 내면에 파고 들어가 불모지를 일구는, 개척같은 힐링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용운은 불교식 힐링의 선구자인지도 모르겠다. 본인은 여러모로 좋아하지 않는 곳이나 어쨌거나 설악산 백담사는 한용운과 연관되어 있다. 그곳의 템플스테이라던가 여러가지 행사는 강원도에 널린 여느 절들과 달리 문학가와 문덕들의 시선을 끄는 요소가 있다. 여러가지 체험학습이 이어지는 만해마을은 점점 더 형편이 좋아지고 있다. (아시는지 모르지만 그 만해마을도 백담사꺼다.) 나는 그것이 최근 힐링이라는 개념의 흥함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떤 누가 말했듯이 힐링과 웰빙의 개념은 사라지지 않는다. 일제강점기부터였는지 6.25 전쟁부터였는지 한강의 기적과 새마을운동 때부터였는진 모르겠지만 한국인은 이제 흥이 사라지고 한만 뿌리깊게 남은 족속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리뷰를 쓰고 있는 이 책이라던가 조선불교유신론 같은 책들을 보면 그의 힐링에는 근본적인 사상과 철학의 뿌리가 깊게 박혀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분은 불교사회주의에 온 몸을 바친 분이셨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 사상과 연관있는 건 아니고... 몇 가지 논문 제목만 찾아봐도 금새 알겠지만 한용운은 장자에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며, 장자는 중국의 전무후무한 아나키스트이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불교사회주의는 생태 아나키적 사유를 가지고 있다고 봐야 무난할 것이다.

 힐링의 상품화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실제로 나는 '님'이라는 단어를 보고 사랑하는 사람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세태를 볼 때 한용운을 가볍게 보지 말라는 이야기는 하고 싶었다.

 그나저나 이게 한 권이 아니라 2탄이 있다는데 도서관엔 없다. 지를까 말까 생각중이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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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에세이 1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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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역사와 생활 상황이 우월한 존재보다 완성된 존재라고 끊임없이 가르쳐 준 남성이라는 존재 속에 여자는 자기의 존재를 초월하고 융합하려고 한다. 그러나 남자에게 있어서는 사랑이란 인생 그 자체일 수는 없고 다만 많은 가치 속의 한 가치에 불과한 것이며 남자는 여자 속에서 자기의 실존을 포기하려고 하지는 않고 반대로 자기의 실존 속에 여자를 일체화하고 부속시키려고 할 뿐이다.- p. 38

 

 

 옛날에 교실이데아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학교체제에 맞지 않는 청소년들을 데려다가 대안학교에서 살게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책이나 테이프를 보면 알겠지만 지금은 부자들만 갈 수 있다는 그 대안학교와는 많이 다르다. 굉장히 치열하고 각박하고 팍팍하고 말 그대로 인생 바닥까지 치고 올라온 애들이 한 데 모인 자리라서 살벌한 분위기가 난다고 할까. 그 때 어떤 여학생이 이 책을 읽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호기심이 있어서 나도 찾아 읽어봤지만, 유독 남녀관계에 대해서만은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여중여고를 나왔었고 게다가 어렸을 때의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극도로 남자를 혐오하게 된 나로서는. 아니, 그보다는 '남자도 인간인데 이렇게 이율배반적이고 자기중심적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반복적으로 들어서 책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20대 중반에 난 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여자는 남자없이 살 수 있다 보지만) 남자는 여자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며, 50대에 가서야 삶에 대해 깨닫게 되고 그 전엔 자신과 주변의 모두를 닳아빠지게 만드는 불쌍한 존재라고. 여자가 이해해주지 않으면 남자는 자신이 만든 불모지 한가운데서 무력한 미아가 된다고. 우연의 일치인진 모르겠지만 전혜린도 이 글을 쓸 때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나이였다. 

 여기서 어머니의 말을 빌린다. '결혼은 사실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권장할 수 없는 선택이다. 그러나 육욕을 이기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 걸 우려해서 결국 결혼을 하게 된다면 남자와 여자 모두가 희생해야 한다. 지금은 시대가 좋아져서 전혜린처럼 고통받는 여성이 많지 않지만 그 와중에서도 여자가 결혼해서 더 희생해야 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여성이던 남성이던 누구던 희생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건 이기적인 것이다. 사실 여성은 대부분 가정과 아이만 있으면 그걸로 충만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남성은 뇌구조부터가 가정에 충실할 수 없게 만들어진 존재다. 그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결혼한 여성과 남성은 인생에 대한 각자의 깨달음을 얻는데, 여성은 보통 30~40대쯤 되서 깨닫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남성은 아무리 빨라도 50대다. 그 깨달음이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다. 그걸 감수하면서 희생의 즐거움을 누리거나 아니면 그냥 상대방을 참아주던가 아님 그걸 버티지 못하고 바람피거나 자살을 하는 것이다.'

 전혜린은 독일에 대한 동경이 굉장히 큰 사람인데, 니체를 좋아하고 데미안과 생의 한가운데를 진지하게 읽으며 생의 의미를 찾은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생의 한가운데의 내용과 많이 연관되 있을 것 같은 이 글을 올려본다.


 하나는 여자로서의 자기를 백 퍼센트 의식하고 자기를 하나의 물, 육체로 보는 전적인 자기 포기의 타자 의존적인 생활방식이며, 또 하나는 자기를 인간으로(여자이기 전에) 의식하고 인간으로서의 자기를 사회내에서 현실시켜 나가 보려는 외롭고 괴롭지만 떳떳하기는 한 두 가지 방법이다. 이 두 가지 중 이성의 사랑을 보다 많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전자이며 후자는 사랑을 받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생활 방식의 선택이다.
 그러나 전자라 해서 절대로 안심은 아니다. 30대의 님페트는 생각해 볼 수조차 없지 않은가. - p. 216~217


 오영수의 갯마을이라는 소설이 있다. 내가 가장 감명깊었던 한국소설 중 톱 2에 속하는데 그 책을 읽고 독일어로 번역하려고 하고 오영수 선생님에게 직접 편지를 남겼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나도 오영수 선생님에게 편지 올리고 싶어....



전혜린의 글을 보면서 생각난 게 아스카의 독백 장면.

그러고보니 아스카의 어머니도 자살했던 걸로 기억함.

자살과 여성은 어찌 보면 남성과의 관계보다 더 친근한 것일 수도.



P.S 그리고 제목에 대해서 갖가지 상상을 하는 건 좋은데, 하인리히 뵐을 모르면 그냥 생각만 하고 아무것도 쓰지 말자. 소설을 많이 읽었다면서... 하인리히 뵐을 안 읽었으면 대체 뭘 읽었단 말인가? 이 나라 독서 질이 심히 염려된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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