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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벌써 20년이다. 당시 김영하의 소설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던 나를 흘끔 보던 남자친구는 소설책을 집어들어 훑어보더니 "이노마 변태 아이가?"했다. 속으로 "니 얘기 하나?" 잠깐 생각했지만 아무튼 당시 읽혀지던 소설들과는 결이 달랐던 것은 분명했고 나는 그것에 빠져 이전까지 빠져있던 은희경의 세계를 벗어나 김영하 월드로 입문했다.
이후의 소설이 모두 좋았고 그래서 그가 내게 '영하느님'이 된 것은 아니다. [검은 꽃]의 경우는 몹시 좋았고, [퀴즈쇼]의 경우는 나와 맞지 않았다. 자라지 않는 인물에 회의를 느낀 적도 있었지만 [검은 꽃], [빛의 제국] 역시 그 즈음에 나온 작품들이기에 그의 역량을 믿고 기대했다. 에세이의 경우도 그렇다. [읽어본다] 시리즈가 단단했지만 내가 더 좋아했던 것은 그의 여행 에세이였다. 소설과 달리 여행 에세이에서는 그의 생각이 직접 드러나는데 바로 그 부분에서 내 생각과 같은 점을 너무나 자주 만나는 것이다. 아, 신나라. 그의 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바로 그 이유다. 그의 작품이 매번 나를 미치도록 빠져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쓰는 글들 속에 들어간 그의 생각(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경지라고 본다.)이 좋았던 것이다. 그렇게 내게 김영하 작가는 소설이든 에세이든, 그리고 육성이든 방송이든 '영하느님'으로 동경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 책을 읽기 얼마 전 [오직 두 사람]을 재독했다. 김영하 작가의 소설을 재독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이 책으로 시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여하튼 다시 소설을 읽으며 처음의 생각과 거의 같은 생각의 흐름을 느꼈기에 새롭다거나 몰랐던 면을 알게 되었다는 느낌은 없었다. 첫 느낌은 대체로 정확하다. 그래서 '역시 나는 김영하가 좋아'라는 결론을 얻은 터였다. 그리고나서 이 책을 읽는데 더 이상 부정할 수도, 이유를 찾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이 책은 그냥 김영하다. 내가 수많은 소설과 에세이를 통해 찾고 싶었던 '나는 왜 김영하를 읽는가?'에 대한 답을 '여행의 이유'에서 모두 찾을 수 있다. 그야말로 '김영하의 이유'인 셈이다.
그와 나는 경험이 다르다. 난 어릴 때부터 쭉 한 곳만 머물며 살아왔고, 그 때문에 이동을 겁내한 탓에 지금껏 여행을 거의 하지 못했고 그나마도 최근의 일이다. 그는 타인과의 관계를 맺고 푸는 것에 고민을 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이주를 하며 살아왔고 그것의 강제성에 반감을 가지고 자발적 여행자가 되었다.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생각이 만날 수 있을까? 그건 여행과는 큰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앞서 말한 그의 생각(철학)이 가는 방향이 내가 가고 싶은 방향과 일치한다. 이런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는 지금의 김영하가 될 수 있었을 테다. 가끔씩 복용해야 하는 자기만의 경험, 내게는 '혼자가 되는 경험'을 복용해야 한다는 처방이 있는데 그것의 원인은 잘 모르겠다만 내게도 어떤 '프로그램'이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 나의 '불안'을 걱정하고 있다. 왠지 모르게 생활은 안정되어 가는데 내 마음이 급격히 불안하다. 이 책을 읽기 전 나름대로 세상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불안인가보다 결론을 내렸었고 그것을 놓기 위해 애써봐야겠다 싶은 마음을 가졌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 내 불안이 '통제 불가의 불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김영하 작가가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라는 장에서 말하길 "삶의 안정감이란 낯선 곳에서 거부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고 믿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그의 프로그램이라면 나의 프로그램은 "삶의 안정감이란 내가 생각하는 상식의 범주 안에서 사람들이 행동할 때 찾아온다고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슷해보이기도 하는데 나의 안정감이 좀더 못된 것 같다. 그 못됨을 좀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작가의 프로그램이 어릴 때 이주의 경험이 근원이 될 수 있었든 나의 프로그램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던 나의 부모에 대한 경험이 근원이 될 것 같다. 더구나 나는 현재 진행형이다보니 아직도 프로그래밍화하는 단계인 것도 같고.
그래도 '혼자를 복용하세요.'라는 처방을 받아두었으니 정히 힘들면 그것을 지키면 된다. 나 역시 호텔을 좋아하는데 단순한 이유로 여행지의 숙소는 집보다 좋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집에 산적한 문제들이 여행지에서도 발견이 된다면 정신적으로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삶이 되어버리니까. 생각을 벗어던질 수 없을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내게 김영하가 왜 매력적인 작가인가에 대한 답도 찾았지만 더불어 내 불안의 원인까지 정리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책으로 나는 가장 간편한 여행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앞서 김영하 작가의 생각을 철학이라고 표현한 이유도 바로 그래서이다. 그는 정말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것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짐작된다. 아마 그 점도 나와 비슷할 지도 모르겠다. 그는 작가라서 그게 쓸모가 있다지만 나는 좀 피곤한 게 사실이다. 아무튼 이 책 참 좋다. 몇 번을 읽게 될 것 같다. 내게 베스트인 [자기만의 방]의 자리를 위협할 정도이다. 갓 영하느님!!!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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