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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호세 무뇨스 그림 / 책세상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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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새움 출판사의 [이방인]논란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나도 한 번 사 보았고 이번에 책세상 판을 읽으며 그 책의 역자 노트도 읽고 야외에서 읽을 때에는 그 책으로도 읽었다. 책세상 판은 새움 출판사의 역자인 이정서가 주 비판 대상으로 삼고 있는 김화영 교수의 번역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별반 차이를 못 느끼겠다. 나는 불어를 전혀 모르고, 작품을 문장 하나하나까지 애정을 가지며 읽은 것이 아니라서 그런지 두 번역본이 둘 다 흥미롭게 잘 읽혔다.

 

 

이정서가 비판한 김화영 번역의 책은 민음사 판이고 그 이후에 책세상에서 일러스트 판으로 출간된 것이라 이미 김화영 번역은 또 한 차례 수정이 된 터인 모양이다. 물론 시기상 이정서의 번역본과는 무관하게 출간되었으리라. 그렇다면 한 개인의 번역은 한 작품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도 부던히 수정에 수정을 하는 일을 하게 되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정서의 행위가 불필요했다거나 무의미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역자 노트를 보면 굳이 중요해 보이지 않는 점을 꼬투리 잡는 듯 보이는 부분도 있고 일리가 있어 비교하며 읽어보아 이정서의 번역이 더 좋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도 몇 번이고 수정을 하게 될 터 이렇게 일이 커진 망극함을 어찌할 지 지켜보는 내가 다 염려스러울 뿐이다.

 

 

이 눈물과 소금의 장막에 가려서 나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단도로부터 여전히 내 앞으로 뻗어나오는 눈부신 빛의 칼날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타는 듯한 칼날은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77쪽)

 

가장 큰 논란이 된 부분은 위의 내용이다. 뫼르소가 속눈썹을 쑤시는 듯함이 결국 첫번째 총을 쏜 계기가 되니 뭐 해석의 개별화라치고 심리적(법적으로는 안되겠지만) 정당방위로 보는 것도 가능할 듯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게 정당방위인가 아닌가 왜 네 발을 더 쐈나하는 문제보다는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뫼르소의 태도에 집중하게 된다. 아마 이정서 논란이 아니었다면 굳이 거기까지 신경 안쓰고 읽었을 것 같은데 책을 나의 흐름대로 읽지 못하게 한 것에 대한 원망감이 불쑥 생긴다.

 

책세상 판을 읽으며 새움판의 역자노트를 보다보면 그가 민음사판을 주된 비판의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그런가 같은 역자임에도 해당이 안되는 곳이 있어 대충 읽어도 역자노트가 개인적으로는 공감이 많이 되는 편은 아니었다. 더구나 책세상의 [이방인]은 일러스트가 정말 흥미를 배가 시킨다. 그림을 보고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하여 남들과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여 사형 선고를 받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그것이 정당해 보이는데도) 어떤 제스처를 취하지 않은 뫼르소를 보며 어쩌면 그는 죽음을 살기 위해 생을 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 순간 그 어떤 제스처라도 취하게 되기에 그의 태도는 의문인 동시에 경외감이 들고, 일면 놀랍다가도 질투마저 난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를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라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도대체 산다는 건 뭐지? 이런 원론적인 질문마저. 답은 물론 없다. 머리만 복잡해졌지만 살면서 우리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며 살아야 하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번역의 논란과 무관하게 나는 어쩌면 그가 실은 '태양 때문에' 살인을 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 태양은 구체적인 대상으로서의 태양이 아니다. 그가 살인을 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데에는 명확한 이유가 없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쩌면 사람이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미친다. 그러니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며, 타인의 생각과 행동이 도대체 무슨 의미라는 말인가. 그저 내가 있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행동할 뿐이다. 그리하여 내가 살고 내가 죽는 것이 아닐까?

 

[이방인]의 문장 하나 하나가 하나의 섬이라는 누군가의 말을 따라가지 못했고 단 한 번의 독서로 이 책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지만 그것은 그것대로의 가치가 있지 싶다. 다만 나의 상태를 누군가에게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은 살짝 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인]이라는 제목은 내키지 않는다는 정도로만. 행여 누군가 [일러스트 이방인]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투썸! 

 

 

* 덧붙임 : 새삼 글을 쓴다는 게 무척 어려운 일임을 느낀다. 그림을 가지곤 아무도 딴지를 안 거니 말이다!!! 누군가 [이방인]을 글 없이 일러스트로만 번역을 해야할라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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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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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저곳에서 [마담 보바리]를 추천하는 글을 최근에 자주 읽었다. 통속적인 부인네의 사랑이야기겠거니 싶어 머리 식힐 겸 사두었었는데 그들은 왜 이렇게 이 책을 추천하는 걸까? 더구나 카프카가 플로베르의 글쓰기를 소설가의 전범으로 칭송하며 문학의 수도승으로 섬겼다는 책날개의 정보는 내가 이 책을 구입할 당시의 생각을 뒤집게 한다. [마담 보바리]는 내가 짐작하고 있는 그 이상을 품고 있다는 건가? 어떤 면이 그러할까? 이런 기대감과 달리 좀 답답해보이는 샤를르 보바리와 그의 첫 부인의 이야기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엠마, 아름다운 그녀 '마담 보바리'가 등장한다. 그 이후부터는 툭하면 플로베르의 섬세함이 느껴져 여백에 느낌표를 찍어대곤 했다.

 

내용적으로 보자면야 잠재된 욕망의 여인 엠마가 결혼 후에 그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그린 이야기인지라 통속적 재미로만 읽어도 그만큼은 재미있고 책장도 술술 잘 넘어간다. 하지만 엠마, 아름다운 마담 보바리에 집중하다 보면 나는 그녀가 무너질 것임을 예상하면서도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사랑과 전쟁'에서 바람난 아내가 나온다면 우리는 성실한 남편의 편을 들겠지만 사람 좋은 샤를르의 편에서 엠마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줄곧 그녀에게 공감하고 몰입했다. 그것은 그녀의 남편 샤를르가 나의 남편을 떠올리게 한다던가, 레옹이나 로돌프와 같은 남성들이 주변에서 나를 유혹하고 있다거나(물론 나는 엠마의 미모를 따라갈 수가 없다. 보기만 해도 아름다움이 뚝뚝 떨어진다니!!)하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 이유는 아니다. 사실 언어로 정리하기가 쉽지는 않은데 내 안에도 그녀와 같은 몽상이 한 켠에 자리잡고 있다는 이유일지도 모르겠고, 그 금기된 욕망이 표출된 데에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낀 탓일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그녀가 자신의 욕망을 아름다운 사랑으로 귀결시키지 못한 채 쾌락에 머무르게 한 것은 그녀가 아닌 남자들이라는 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안에는 누구나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이 있다. 현실을 벗어나고픈 욕망이 지금 내게도 자리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더 크고 강하게 자리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런 욕망 따위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현실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느 한 쪽이 우월하다는 뜻이 될 수는 없다. 자기 안의 욕망을 어느 한 때에는 마주해야 할 날이 올 때 그 욕망을 좀더 성숙하고 아름답게 표출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압고 절제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자주 들여다보고 자주 어루만져주어야 하지 않을까? 엠마가 성장기에 그러한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혹은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인정하고 어루만져주었더라면 그녀는 어쩌면 행복을 맛보았을지도 모르겠다.

 

평생 충족되지 않은 욕망을 채우길 바라며 자신을 학대한 아름다운 마담 보바리가 가엾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그 이야기가 섬세함과 철저한 계산으로 오랜 시간 공들여 쓰여졌다면 더더욱 그 효과가 클 터인데 소설의 많은 부분에서 플로베르의 역량을 느끼게 되었다.  1부에서는 보바리 부부, 혹은 엠마의 정신적 연인들이 등장하고, 2부에서 로도프, 3부에서 다시 레옹이 등장하고, 4부에 엠마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의 구성에서 플로베르의 완벽을 추구하는 기질을 느낄 수 있었고 그런 계획적인 구성 사이 사이에 가령, 뱃사공이 로돌프의 이야기를 꺼내는 에피소드들조차 딱딱 맞아떨어지는 듯해 책날개에 적힌 카프카의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우연 보다는 계획적인 구성이 플로베르를 열정적인 작가라는 느낌은 갖게 하지 않았지만 무척 섬세하고 노력을 많이 하는 작가라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이런 통속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이성적으로 풀어내는 작가가 몇이나 될까? 통속은 대개 감정을 소지시키는 것으로 끝나곤 하는데 [마담 보바리]는 읽으면서 혹은 읽고 나서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가게 된다.  그런 면에서 플로베르가 쓴 [감정 교육]이 궁금하다. 감정과 교육이라, 마담 보바리와 플로베르만큼 흥미로운 조합이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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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북 (반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6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지음, 손향숙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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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야, 요즘 EBS에서 방영되는 애니메이션 '정글북'을 즐겨보고 있지? 그걸 재밌게 보는 널 보면서 내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애니메이션 '정글북'이 떠올랐어. 모글리라는 이름이 타잔이라는 이름에 어느 순간부터 밀려 있었는데 네 덕분에 늑대소년 모글리가 다시금 내 곁에 왔단다. 그런데 요즘 나오는 애니메이션에는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내용들이 나오곤 했어. 물론 재밌지만 말이야. 문득 [정글북]의 진짜 내용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단다. 엄마가 어릴 적 TV에서 보던 만화 영화를 내심 기대했을지도 몰라.

 

그렇게 엄마는 [정글북]을 펼치기 시작했단다. 모글리가 부모를 잃고 늑대 소년이 되게 된 과정도 알게 되고 바기라와 발루 그리고 카의 이름까지 오랜 기억 속에 묻혀있던 이름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어. 하지만 엄마가 어릴 적에 보았던 모글리의 모습은 책 속에 그려진 모글리의 모습과는 느낌이 달랐어. 네가 보는 요즘의 애니메이션 속의 모글리와도 다르고 말이야. 도대체 그때와 지금의 만화 영화 속의 그 많은 이야기들은 대부분 책에서 찾을 수 없는 내용들이라는 점이 무척 당황스러웠어. 그뿐만이 아니라 모글리의 모습도 책에서는 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와 낯설기도 했단다. 아마 이 책의 저자인 키플링 아저씨가 표현하고 싶었던 늑대 소년의 모습과 정글의 생활이 만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표현하고 싶었던 것과는 달랐던 모양이야. 애니메이션 속의 모글리는 귀엽고 보호해주고 싶은 순수하면서 장난꾸러기인 모습이었는데 책 속의 모글리는 그보단 더 용맹하고 남자다운 모습을 갖고 있었어. 키플링 아저씨는 시어칸을 죽이고 인간 사회를 떠나는 모글리의 거친 모습과 집념 그리고 반다로그들에 비해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정글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인데 디즈니 영화사는 낯선 정글에서 겪는 모글리의 신나는 모험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야. 참 다르지? 우리가 봤던 애니메이션은 키플링 아저씨의 [정글북]의 기본 설정을 바탕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뭐가 더 좋을까? 그건 사람마다 다르겠지?

 

책에는 모글리가 주인공인 이야기 세 편 외에도 하얀 물개 코틱의 이야기, 코브라를 물리친 몽구스 리키티키의 이야기, 아무도 보지 못한 코끼리의 춤을 본 순수한 코끼리들의 투마이 리틀 투마이의 이야기, 여왕 폐하에 대한 충성심이 충만한 동물들의 이야기가 함께 있는데 읽으면서 키플링 아저씨만이 쓸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동물들의 삶에 가까이 닿아 있는 이야기들이었어. 포기를 모르는 코틱의 모습과 용맹한 몽구스 리키티키의 모습은 감동적이기도 했고 리틀 투마이가 코끼리의 춤을 본 것에 함께 감탄했지. 하지만 마지막 작품인 <여왕 폐하의 신하들>의 경우엔 공감하기가 어려웠단다. 사실 살짝 지루하기도 했고 동물들의 생각이나 행동이 이해가 안되어서 키플링 아저씨에게 실망하기도 했단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알아 보니 키플링 아저씨의 이야기는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고 해. 엄마는 <여왕 폐하의 신하들>의 경우가 그러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정글북]에 실린 이야기 모두에 대해 좋지 않은 의견을 갖고 있어. 물론 모두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지.

 

너와 함께 내일도 TV 앞에 앉아서 '정글북'을 보게 되겠지만 책을 다 읽고 난 엄마는 이전과는 다르게 시청을 하게 될 것 같아. 물론 당분간은 네 곁에서 함께 만화 영화를 즐기겠지만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너에게 이 책을 건네게 되지 않을까? 아마 그때 너도 당황하기도 하고 낯설어하기도 하며 이야기에 대한 나름의 느낌과 생각을 갖게 될 거야. 내가 그러했듯이 말이야. 그 날을 기대해볼게 일단은 그냥 모글리와 친하게 즐겁게 시간을 보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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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1-26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영화로 만드는 작품을 보면,
원작에 없는 이야기도 꽤 넣고,
원작에 있던 재미난 이야기를 살리지 못하는 때도 잦더라고요.

<마녀 배달부 키키> 이야기도 원작동화를 읽으니
만화영화는 원작동화에 있는 재미를 거의 안 살리고
아주 작은 점을 바탕으로 다른 이야기를 많이 집어넣어서
변형시켰더라고요...

일본에서는 <마녀 배달부 키키> 원작동화를 많이 읽고 난 뒤에
만화영화가 나왔지만,
한국에서는 원작동화를 제대로 읽은 아이나 어른 거의 없이
만화영화로만 이야기가 잘못 알려질 수 있겠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어느 모로 보면
만화영화와 원작은 서로 다른 작품으로 볼 수 있기도 하겠지요......

그렇게혜윰 2014-01-27 09:0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전혀 다른 작품이라고 봐야할 것 같아요. 영화도 그렇구요.
아이템만 가져다 쓴 ㅋㅋ 가끔은 영화가 더 좋을 때도 있으니까요^^

정글북은 정말 서로 다른 이야기더라구요 ㅋㅋ
 
이선 프롬 - 개정판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4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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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표지가 예뻐서 이끌린 책인데 책 정보를 찾다 깜짝 놀랐다. 문예출판사에서는 온라인 서점에서 제공되는 표지를 바꿀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껍질(?)을 벗기면 이리도 예쁜 것을!

 

'저 마을 어딘가에 이선과 지나가 사는 집이 있고, 그 집에서 매티와 이선이 사랑을 하게 되었단 말이지... 그들이 썰매를 타던 그곳도 그 나무도 바로 저기에 있단 말이지....' 혼자 표지를 들여다보게 된다.

 

소설은 사랑 이야기이다. 극단적으로 단순하게 이야기하자면 아내의 사촌과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이렇게만 이야기하니 마치 통속적인 이야기가 거침없이 진행될 것 같지만 그들은 겨우 입맞춤을 한 사이이고 헤어지기 직전에서야 사랑을 확인한 사이이다. 길지 않은 소설이지만 짧게 쓰자면 더 짧아질 수도 있을 이 이야기가 나직나직하게 길어진 것은 이디스 워튼의 힘이다. 우리에겐 영화 덕분에 [순수의 시대]가 더 잘 알려졌지만 그조차도 사놓기만 하고 읽지 못한 나는 그녀의 문장이 섬세한지 알지 못한 채 읽었지만 읽으면서 이들의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다. 이선과 매티의 입장에서도 서 보고, 지나의 입장에서도 서 봤지만 나를 어디에 세워야 할지 몰랐던 것은 이디스 워튼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며 어느 한 사람을 절대적으로 지지하지 않고 각자의 입장을 다 느끼게끔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바로 그 힘 때문에 이디스 워튼이 아직까지 사랑을 받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아직 [이선 프롬] 한 편만 읽은 나로서는 그녀의 개성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지는 않았다. 그녀 이후의 여성 작가들에게서 느꼈던 느낌과 유사한데 아마 그녀들이 이디스 워튼의 영향을 받은 탓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소설을 몇 편 더 읽어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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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卍).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반양장)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춘미.이호철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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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소설가가 운영하는 팟캐스트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에서 이 책의 일부를 들었을 때 나는 다니자키 준이치로라는 소설가를 처음 알게 되었음에도 '다니자키 준이치로 = 탐미주의 문학'의 공식을 머릿속으로 세워버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작품이 궁금해지는 것은 여전했고 이번에 읽어보자 마음을 먹고 어느 정도까지 읽었을 때에는 여성이 여성을 사랑하는 모습이 예상되기는 하였지만 그저 우리가 흔히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될 줄로만 알았다.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소설을 쓸 때 중요시 여긴 것이 바로 '재미'라고 했다지만 책은 정말 눈을 떼지 못하게 독자를 집중시킨다. 역자의 해설에 따르면, [만(卍)]이라는 제목은 네 인물이 마치 제목의 글자처럼 서로 얽히고 얽혀 서로에게세 헤어나오지 못하는 관계를 드러낸다고 하는데 그러지 않고서야 저 길한 글자가 이 이야기의 제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 얽힘의 가장 중심은 바로 아름다운 여인 미쓰코였고 그 팜파탈의 여인에게 가키우치 부부와 와타누키가 거미줄에 걸린 채 빠져나오지 못하는 형국이 얼핏 우리가 욕하면서도 본다는 막장 드라마 속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단순히 변태적이고 막장의 이야기 전개만 있었더라면 나 같은 사람은 건너 뛰며 읽었거나 중도에 그만 뒀을 테지만  [만(卍)]은 읽으면 읽을수록 어쩌면 사람이 이다지도 어리석고 하찮은 존재인지를 보게 되어 불편하면서도 뭔가 덧없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불교 용어인 만(卍)과 연관이 있어 어느 순간 제목이 단순히 내용을 이미지화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짧지 않은 이야기를 소노코가 마치 고해성사를 늘어놓듯이 그 긴 이야기를 상대에게 단순하게 털어놓는 형식으로 서술하였는데도 쫑긋 귀를 기울여가며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단지 탐미라는 주제로만 시선을 끈 소설가가 아니라 문장의 힘도 대단한 작가라는 것을 증명한다. 실제로는 오사카 사투리로 쓰였다고 하는데 역자도 표준어로 구사해야했던 소노코의 말을 무척 아쉬워했다. 하지만 표준어로 쓰였어도 충분히 소노코의 이야기를 듣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번역이 매끄러운 덕도 있겠다. 어쨌든 소노코의 말로 네 남녀의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놀라기도 적잖이 놀랐지만 시간이 갈수록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소노코의 목소리를 빌려 조롱하고 허무해하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집중하게 한다. 욕망에 너무나 쉽게 무너져버리는 그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바로 나를 포함한 인간이라는 것이 씁쓸해진다.

 

반면,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느낌이 조금 다른데 50살도 넘게 차이나는 젊고 아름다운 아내에게 집착하는 구니쓰네의 모습이나 너무나 아름답기에 남의 아내도 빼앗는 시헤이의 태도 등은  [만(卍)]에서 여성을 탐하는 모습과 닿아 있으나 문장은 많이 다른 느낌이다.  [만(卍)]이 소노코의 말로 서술되어 차분하면서도 조곤조곤 이야기 듣는 느낌이라 몰입이 잘 되는 반면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일본 문화와 문학의 깊은 내용이 함께 있어 글이 고전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내용 풍성해지는 매력이 있다. 우리와 다른 문화에 때때로 이질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색다른 문화를 만난다는 점에서는 신선함을 느낄 수도 있다. 또  [만(卍)]이 네 남녀가 점점 파멸로 향해 가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끝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면,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에서는 시게모토가 과연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어머니를 만난다면 그는 어머니를 어머니로 대할 것인가 여인으로 대할 것인가와 같은 궁금증을 가져가며 읽게 되었다.

 

두 작품 모두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살았을 때는 물론 지금도 쉬이 받아들여지는 내용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때나 지금이나 대문호로 추앙받는 것은 그가 단순히 여체를 탐하는 변태적인 상황 설정 속에 숨어 있는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탐구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아름다운 여인이 무엇이길래 스스로가 악의 화신이 되고 자신과 남을 파멸로 몰아넣는가, 도대체 아름다운 여인이 무엇이길래 오랜 시간 아들이 모정을 마치 여인에 대한 사랑인 듯 느끼도록 상황이 전개되는가와 같은 물음을 소설을 읽으면서 묻게 된다. 어쩌면 평소에 던지기 힘든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욕망이나 성(혹은 그 어떤 대상에 대한 탐심이라할 수도 있는 모든 욕망)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작품의 가치가 아닐까 생각이 되기도 한다. 극한 상황에까지 가야 인간은 근원적인 질문을 하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처음엔 탐미주의라는 말에 내 안의 욕망을 들여다보자라는 간단한 생각으로 책을 읽었던 것 같다. 하지만 두 작품을 읽고 단순히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탐미주의 작가라고 부르기엔 스스로 억울한 면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도 잘하는 장동건이 미남 배우라고만 불린다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연달아 다른 작품들도 읽어볼 생각이다. 그가 아름다운 여인의 몸을 소재로 내게서 어떤 질문을 이끌어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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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4-01-09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에서부터 풍기는 아우라가 장난이 아닌데요. 탐미주의 소설은 많이 읽어보지 않았는데, 님의 페이퍼 읽고 나니 궁금해지고, 작가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네요.

다만, 감당이 될지, 그게 좀..... 걱정됩니다. ^^

그렇게혜윰 2014-01-09 20:31   좋아요 0 | URL
묘해요, 진짜 막장 느낌도 나는데 뭘 건드려요...그래서 다니자키 준이치로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그럭저럭 감당은 됩니다. 다음 책으론 <열쇠>를 시작했어요.

숲노래 2014-01-09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살아가는 밑바탕을 살필 때에
아름다운 문학이 되겠지요~

소재가 무엇이든지요.

그렇게혜윰 2014-01-09 20:31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이세요..^^

페크(pek0501) 2014-01-10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소설을 쓸 때 중요시 여긴 것이 바로 '재미'라고 했다지만 책은 정말 눈을 떼지 못하게 독자를 집중시킨다" - 이런 책이라면 제가 충분히 찜해 둘 만하네요.

재미있는 글을 쓰기... 이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이것만큼 필수인 것도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게혜윰 2014-01-10 18:45   좋아요 0 | URL
묘하게 끌어당겨요...스스로 내가 이런 이야기를 좋아했었나 의아할 정도로요...
일단을 다른 작품 몇 더 읽어야 작가에 대해 좋다 싫다를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직은 낯선 호감이라서요^^ 이 작품이 매력적인 것만은 분명한 듯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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