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사랑해요
1
호밀, 三, 박곰돌씨 그리고 syo는, 서로를 소위 말하는 불알친구로서 인식하고 있는 사이다. 옛 성현 가라사대, 불알친구라 함은, 물가에서 불알 내놓고 놀아도 부끄러운 줄 모르던 꼬꼬마시절부터의 오랜 친구라는 뜻이라는데,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 불알 이거 함부로 내놓고 놀았다간 큰일 치르기 십상이라는 것 정도는 아는 나이긴 했다. 그럼에도 주말이면 함께 대중탕에 다니며, 우리가 가진 불알의 합계가 그래도 홀수는 아니라니 이것 참 다행이지 암 다행이야, 확인 또 재확인했던 정도는 되는 사이이므로, 불알친구라 칭함에 모자람은 없지 않겠는가 말입니다.
2
호밀은 대구 지역에서 알아주는 춤 선생이다. 춤 선생이라는 용어가 또 구수한 가운데 또 구릿한 맛이 있어, 이렇게만 언급하고 지나가면 이 지역 춤판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호밀의 입지에 타격이 있겠으니 좀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겠다. 호밀이 운영하는 학원 연습실에는 새벽이 다 가도록 춤 연습에 몰두하는 중학생, 고등학생 아이들이 잔뜩 있다. 더없이 천진한 표정으로 선생님, 저 정말 이번에는 식음을 전폐하고 공부하였지만 중간고사 수학 15점 받았어요- 라는 폭탄고백을 해 오는 귀여운 아이들을 가르치고, 선생님, 우리 애는 공부랑은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이제 저희에겐 선생님뿐이에요. 라며 희망을 걸어오는 학부모님들을 다독이는, 호밀과 휘하 많은 선생님들은 그런 일을 하고 있다고.
하여간, 토요일에는 이제 삼십대도 장렬하게 끝물을 맞이해버린 박곰돌씨의 생일 행사가 있었고, 그의 친동생인 三이 모처럼 대구로 내려왔기에 우리 네 사람이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최근 인생행로가 미친 듯 격렬하게 변모 중인 syo는 그 자리에 투척할 몇 가지 고민거리를 준비해보았는데, 막상 살얼음이 잔뜩 낀 500잔을 앞에 놓고 앉은 세 사람의 표정이 알쏭달쏭하여 투척이 쉽지가 않았다. 그리하여, 목하 너희가 겪고 있는 가장 힘들고 슬픈 일들을 이야기해보아라 요청하였는데, 다들 뭔가 스멀스멀 말하긴 했으나 그들이 고백하는 가장 큰 슬픔이라는 게 겨우 syo가 가진 패 가운데 가장 허름한 사연에 떡발릴 정도였다! 와! 알고 보니 이 시끼들은 자기들끼리만 조용히 행복했어! 불알이 뭐 이따위로 야박해! 한 개쯤 없어져도 되겠구만 오늘 확 홀수 만들까 만들어 보까.
그런 분노를 버무려 내놓은 syo의 슬픈 스토리에 혀를 차며 위로하던(가만, 위로하는 데 혀를 찼다?) 호밀이 뜬금없이 말하길, 자기에겐 오랜 소원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뭔고 하니, 바로 자기가 곡을 만들고(최근에 작곡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syo가 가사를 붙여(얘들은 내가 글로써 세상을, 세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읍면동 크기의 영토 하나쯤은 정복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우리 네 사람의 목소리로 노래 몇 곡 뽑는 것, 그리고 그 노래들을 가지고 소규모의 공연을 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와, 이 야망 스케일 좀 보소! 과연 대학교 때 댄스 스포츠 교양과목을 들었다가 문득 깨달은 바 있어 불알 두 쪽(짝수)만 차고 투신, 십여 년 만에 이 지역 업계를 평정한 댄스입시계의 나폴레옹답다 하겠다. 그도 그럴 것이, 음악에 관해서라면 우리 네 사람은 현재, 악보 하나 읽을 줄 모르고, 악기 하나 다룰 줄 모르는, 아, 그야말로 핫바지 오브 핫바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등재되어 있지 않은 고장 난 사전을 갖고 다닌다는 소문이 헛소문은 아니었던지, 이놈의 호밀레옹은 한 번 말이 나오자 그때부터 끈질기게도, 지금 당장 한 번 연습실에 가서 이야기를 나눠보자, 우리가 다 아는 노래로 재미삼아 녹음 한 번만 해보자, 아니면 곡 선정만 해보자, 파트만 나눠보자, 그야말로 끝도 없이 달겨드는 것이다. 하도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준비해온 슬픔카드들은 귀찮아서 소멸했고, 맥주잔의 살얼음은 온데간데없어졌고, 마침 먹태도 증발했고, 남 슬픈 이야기 할 때는 반쯤 졸고 앉았더니 이야기 끝나자 네이버로 토트넘 스코어나 확인하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박곰돌씨도 꼴 뵈기 싫고, 아 모르겠다, 그래 가자 가, 소원이라는데 내가 한 번 가 준다! 이렇게 되고 만 것이다.
3
호밀의 거대한 승합차를 타고 연습실로 가는 새벽 두 시의 도로 위에서 syo는, 아 내가 진짜 하도 간절하게 바라니까 한 번 해주는 거다, 원래 난 새벽시간에 술까지 먹고는 절대 노래 안하는 사람인 거 다들 알아줬으면 한다, 참 우정이란 이런 것이다, 있는 생색 없는 생색을 내며 친구들을 지루하지 않게 해주느라 분투했다(참 우정). 그러자 핸들을 잡고 있던 호밀이 파안대소하며 20년도 더 지난 추억 한 자락을 소환했다.
어릴 적부터 노래라고는 동요와 창작동요밖에 모르던 순수한 어린이가 있었는데 그 이름을 syo라 했다. 그러나 그런 syo에게도 중학교 입학을 앞두자 삼쩜오춘기는 오고, 이내 그는 이런저런 테이프들을 입수해 몰래몰래 가요라는 것을 들으며 어른의 삶과 사랑에 대한 달고도 쓴 지식들을 쭉쭉 빨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니, 사랑이 이런 거였다니. 햇빛 눈이 부신 날에 이별해 봤니… 비오는 날 보다 더 심하단다… 작은 표정까지 숨길 수가 없잖아… 크아… 이별에 공식이… 크아… 죽인다, 이 쌉싸름짭쪼름한 것이 바로 어른의 맛이라는 그것인가… 해본적도 없는 이별인데 그 공식은 어떻게 또 알 것만 같았나보지, 근의 공식도 모르는 놈이. 하여간,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고 착각하)면서 또 내가 이미 어른임은 숨기고 싶었던 syo는, 학생은 공부를 해야지, 가요 같은 건 대학가서도 부를 수 있어, 뭐 이러면서 끝까지 동요밖에 모르는 척을 했던 모양으로, 6학년 졸업여행지로 가는 버스 안에서 아이들이 전부 HOT 노래를 합창할 때도 나는 핫인지 뭣인지 걔네들 누군지 몰라- 이런 세상 누구도 속지 않을 컨셉을 잡으며 따라 부르기를 거부했던 기억이다. 중학생이 되어 친구들이 노래방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에도 syo는 함께 가긴 했지만 너도 노래하라는 말에는 고개만 가로저었고, 마이크를 건네든 말든 한번 낀 팔짱은 음료수 마실 때나 푸는 어이없는 고집쟁이였다.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호밀의 증언이다. 그러던 중2의 어느 날, 참다 참다 호밀이 말했다고 한다. 야, 너는 지금 우리랑 노래방 같이 온 게 30번도 넘을 건데, 어떻게 진짜 한 번을 안 부르느냐, 이 독한 새끼야? 三이 말했다고 한다. 야, 우리가 명색이 불알친군데 불알친구랑 노래방에 와서 팔짱만 끼고 앉아 있게 되어 있느냐, 지금 불알을 업신여기는 것이냐, 업신여기는 데만 쓴다면 그 불알 너한테 과연 두 개씩이나 필요하겠느냐, 이 징한 새끼야? 그리고 박곰돌씨가 말했다고 한다. 야, 가만 냅뒀더니만 고등학생이 만만해 보이느냐, 지금 당장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나의 주먹이 너의 그 쓸모없는 주둥이에 새로운 쓸모를 만들어 주고 말 것이니 목숨이 아깝다면 지금 당장 학교종이땡땡땡이라도 2절 완창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이 콩만 한 새끼야? 상황이 그쯤 되자 드디어 syo의 팔짱은 풀렸던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스크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마이크를 딱 켜더니 아아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둘하나둘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춘궁기에 모래 섞인 쌀 한 되 부어주며 생색내는 악덕 지주같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 내가 진짜 하도 간절하게 바라니까 한 곡 불러주는 거다. 원래 어디 가서 노래 부르고, 나 그런 가벼운 사람 아니다. 너희들 쯤 되니까, 그래 우리 쯤 되는 사이니까, 내가 나의 굳은 신념을 깨고 지금부터 노래 한 곡 하려 한다. 그러니까 이런 내 마음, 너희는 알아야 한다. 자 그럼 노래를 시작하겠다. 아아아, 도레미파솔라시도 아아, 흠흠. 그러고 돌아서서 기계에 붙은 번호판을 신중하게 누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syo가 오랜 침묵을 깨고 처음 선택한 곡은, 이후 봇물 터지듯 일주일에 세 번씩 노래방을 다니며 마이크를 놓지 않았던 노래방 쳐돌이 syo가 처음 부른 기념비적인 곡은, 오늘날까지 6명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불렀고, 결혼 못 할 것 같긴 한데 호밀과 三과 박곰돌씨가 기어이 결혼한다면 그때도 축가를 부르게 될 것 같은 syo가, 그 놀라운 여정의 첫 번째 디딤돌로 고른 전설적인 바로 그 곡은,
한스밴드 – 선생님 사랑해요
였다고 합니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한스밴드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선생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리고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저 노래의 킬링파트는 다름 아닌,
나의 첫사랑 너무 소중해
그 사람 나를 어떻게 보실까
내가 바라는 건 단 한번이라도
나 그분 앞에서 여자이고 싶어
와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뭐이고싶다고?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죽고싶다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4
더는 군소리 없이 호밀을 따라가, 아이들이 밤새도록 춤 연습을 하는 연습공간의 지하층에서 문을 꼭 닫아걸고, 네 시 반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우리는 노래를 불렀다. 잘 알지도 못하는 노래를. 그때는 말하지 않았지만 얘들아, 호밀의 그 꿈 이야기 때문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얘들아, 너희들이 이 글을 볼지는 모르겠지만 얘들아,
우리, 노래 정말 소름 돋게 못 하더라.
도무지 답이 없더라.
근데 왠지 연습은 또 정말 너무 열심히 하더라……
그래서 더 가열차게 불쌍하더라…….
그리고 전신 거울로 봤더니 나 되게 작고 못생겼더라…….
근데 니들도 다 고만고만하더라…….
그나마 이 중에서는 내가 제일 나은 것 같더라…….
그래서 웃은 거였어.
행복해서 웃은 게 아니라…….
아니지, 이것도 행복이라면 행복이지…….
노래가 웃겨서 웃기 시작했지만,
마지막까지 웃은 건 얼굴 때문이었어…….
얘들아 미안해…….
그래서 같이 다니는 건 아니야, 아니지만,
못생긴 애들 중에 그나마 제일 잘생긴 애라서,
내가 늘 너희들한테 참 많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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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저마다 다르게, 다채롭게도 못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못생긴 사람들이 하나도 즐거울 게 없는 표정으로 거리를 걸어 다니고 영화를 보고 백사장을 걷는 게 축제, 인가.
_ 박상영,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쉽게 받아들인다. 아마도 그것은 그 어느 것도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관하기 때문일 것이다.
_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죽지 않는 사람」
우리가 저자를 비웃고 있느냐, 아니면 저자와 함께 웃고 있느냐, 이 두 질문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저자의 등 뒤에서 웃고 있는지, 아니면 마주 보고 웃고 있는지, 저자의 의도와는 반하게 웃고 있는지, 아니면 그의 의도에 부합해서 웃고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_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읽거나 말거나』
기억은 지나간 것에 대한 의식적 접근, 즉 의식 활동입니다. 절대로 무의식 활동이 아닙니다. 하지만 기억을 탈의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아요. 섬세한 성찰 없이 기억은 상당히 문학적인 개념으로, 의식은 비문학적인 개념으로 이야기합니다. 마치 기억을 중요시하는 것은 문학의 영역인 양 말이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기억이 결국 '자기방어 시스템'이고 그 목적은 자기 보존에 있습니다. 현재의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의식은 객관적이지 않고 현재 자기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를 걸러 내는 필터로 작용합니다. 언제나 방어기제죠. 의식 활동으로서 기억은 과거라는 무한한 경험의 저장고에서 현재 자기에게 유리한 것들만 뽑아내는 작업입니다. 기억을 분석하면 결국 '의도'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_ 김진영, 『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 읽기』
- 읽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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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키아벨리 / 김경희 : 173 ~ 291
+ 가능세계 / 백은선 : 150 ~ 243
+ 작가는 어떻게 생각을 시작하는가 / 이응준 : 133 ~ 272
- 읽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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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 / 신영복 : 250 ~ 357
- 아리스토텔레스 / 조대호 : 117 ~ 222
- 혐오의 시대 철학의 응답 / 유민석 : ~ 102
- 반 고흐, 영혼의 편지 / 빈센트 반 고흐 : ~ 88
- 오늘 참 괜찮은 나를 만났다 / 양창순 : ~ 107
- 예측 불가능한 시대에 행복하게 사는 법 / 윤성식 : ~ 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