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올 것 돌아오지 않을 것

 

 

1

 

생각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생각한다. 하지만 억압된 모든 기억들이 언젠간 반드시 증상으로 되돌아오듯, 어느 평온한 날, 철없이 유예한 것들이 사나운 표정으로 돌아와 잔잔한 일상을 거세게 휘젓고 말 것도 안다.

 


그렇다다시 돌아올 수 없이우리 삶의 모든 중대한 순간들은 단 한 번뿐다시 돌아오지 않는다이렇게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완전히 알고 있어야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속임수를 써서는 안 된다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척해서도 안 된다.

밀란 쿤데라농담


 

 

2


왜 칸트인가 

김상환 지음 / 21세기북스 / 2019

 

철학 장르 입문서 덕후가 주의해야 할 생선이 있다. 그것은 연어다. 예를 들어 보자.

 

마르크스에 대해서 읽다 보면 헤겔 선생이 자꾸 눈에 밟힌다. 그래서 헤겔을 뒤적거리다 보면 칸트 선생이 자꾸만 사탕 줄게 아저씨 따라 갈래-를 시전한다. 낚여서 쫄래쫄래 따라가다 보면 길모퉁이에서 흄 선생이 고개만 빼꼼 내밀고 까꿍을 시도한다. 재밌어 보이기에 얼른 모퉁이를 돌아보니 데스라 삼형제(데카르트-스피노자-라이프니츠)가 버티고 서서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을 거라고 약속한다. 주섬주섬 떡을 꺼내 차례대로 하나씩 쥐어주었는데 은근슬쩍 누구 하나가 더 끼어들어 손을 내민다. 네 번째 손의 주인은 안 끼는 데가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다. 맛있게 떡을 씹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보고 있자니 문득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이가 있어, 너네 스승님은 어디 가셨니? 하고 물어본다. 그러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당연한 걸 진지하게 물어보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라는 눈빛을 하고는 말없이 손가락을 세워 하늘을 가리킨다. 고개를 들어보니 앗, 은은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플라톤과 눈을 마주친다. , 플라톤이었어. 난 또, 태양인줄 알았지.

 

거친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신비한, 뭐 그 비슷한 경로가 입문서 덕후에게도 늘 존재하는 것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역류하는 물길에 휩쓸리지 않도록 단단히 버티고 서지 않으면, 망한다. 다 아는 것처럼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다.

 

분명히 헤겔을 읽고 있었는데, 잠깐, 아주 잠깐 놓쳤던 정신줄을 다시 붙잡아 보니, 손에는 칸트가 들려 있었다. 화들짝 놀라서 던져놓았다. 어디에? 장바구니에.

 

요 몇 년 사이, 칸트도 정말 훌륭한 입문서를 갖춘 친절한 철학자가 되고 있는 것 같다. syo가 처음 칸트에 손을 대던 그 엄혹한 시절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쉽게 읽는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다고 선뜻 믿으면 나만 호구된다는 사실을, 주어 없는 쉽게는 한탄과 좌절만 부를 뿐이라는 안타까운 진실을 내게 가르쳐 주었던 그 책들…….

 

이제 조만간 칸트 입문서 커리큘럼도 확보할 수 있겠다.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나저나 이놈의 헤겔 샊이는 정말이지 어떡한담…….

 

 

 

3


어느 칠레 선생님의 물리학 산책

안드레스 곰베로프 지음 / 김유경 옮김, 이기진 감수 / 생각의길 / 2019

 

이 책의 제목에 들어 있는 물리학이라는 단어는 당연하게도 절대 빠질 수 없는 요소이긴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손길을 뿌리치는 역할도 하겠지 싶다. 과학서적의 아이러니는 대충 그런 데 있다. 드르륵 넘겨보기라도 하면 좋을 테지만, 사실 그런다고 해서 정말 흥미로운 부분이 탁 걸리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이유에서 syo가 여기, 이 책에서 가장 멋졌다고 생각한 부분을 옮겨 본다. 권해야할지 말아야할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선택은 예비독자들의 몫이므로. 평균값은 아닙니다. 최댓값에 가깝습니다.

 

 “그래좋아.”

 레베카가 말했다.

 그녀가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레온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이 말이 강한 한 발을 맞은 것처럼 울리고 있다그는 이 대답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그가 그녀에게 전화해 할 수 있는 정확하고 용기 있는 말을 찾는 데 2주나 걸렸다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여러 상황을 생각해 보고 수십 개의 답변을 준비했다.

 “여보세요?”

 그녀의 달콤한 목소리를 들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레베카나 레온이야이번 주 금요일에 식사 초대를 하고 싶은데……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너도 발파라이소(칠레 발파라이소주의 최대의 항구 도시)에 가보고 싶어할 것 같아서한 번도 안 가봤다고 말했던 거 혹시 기억해해 질녘에 노을 구경도 할 수 있고투리 광장에서 치즈를 넣은 조개 요리랑 와인 한잔하면 좋을 것 같아서근데 시간이 안 된다면 괜찮아이해해…….”

그가 앞뒤가 안 맞는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것 같았지만놀랍게도 그의 체면과 자존심을 세워주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래좋아.”

 레온은 이 행복이 좀 얼떨떨했다그는 이제까지 늘 레베카와 거리를 두고 대화했었다지금도 그녀는 15km 이상 떨어진 먼 곳에 있다그 대답을 들었을 때 느꼈던 감정은 안테나와 실리콘 칩들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다그가 처음 그녀를 봤을 때도 최소 2m 이상 떨어져 있었다그 거리는 원자적 우주에서의 광대함 그 자체였다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연결한 걸까외롭던 그가 어떻게 아주 만족스럽게 레베카를 바라볼 수 있었던 걸까?

 이 모든 것의 답은 바로 파동에 있다그의 휴대전화에서 그녀의 휴대전화로 전송된 파동 덕분에 멀리 있어도 레온이 레베카를 식사에 초대할 수 있었다또한첫날 레온이 그녀를 볼 수 있게 해준 것도 바로 이 파동이다그날 오후 태양에서 나온 파동즉 빛은 레베카의 미소에 부딪히고 나서 다시 얼음이 되어 버린 레온의 오른쪽 눈으로 들어왔다또한그가 처음 들었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도 파동과 성대에서 나온 공기의 진동이었다그 진동들이 양쪽 귀에 도달한 것이다그가 레베카에 대해서 알게 된 모든 것은 물리적 현상즉 파동(전파소리)에서 시작되었다이런 비물질이 그녀의 이미지를 만들었다그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적어도 사랑에 빠지기에는 충분하다는 것을. (59-61) 

 

 


4

 

그러니까 우리 이제 마주앉아 가능한 것들을 자꾸 이야기하자. 내일의, 먼 곳의,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들, 그런 것들 말고, 오늘 혼자 뚜벅뚜벅 걸으며 괜스레 추웠을 그 거리와 저녁에 함께 먹을 따뜻한 밥 한 끼를 이야기하자. 오지 않은 것들을 나열하다보면 오지 않을 것들을 믿게 되고, 한 팔로 안아 감을 수 없는 것들을 응시하다간 생채기만 쌓이기 십상이지. 한 입에 베어 물기 적당한 것들로만 적당한 하루를 가능하게 하자. 이야기가 많이 더 많이 필요하겠다.

 


우리 인간은 감정과 생각으로 산다우리는 같은 공간같은 시간에 있을 때 대화를 하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피부를 스치면서 감정과 생각을 교환한다이런 만남과 교환의 네트워크를 통해 성장한다하지만 사실 이러한 교환을 위해 굳이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에 있을 필요는 없다서로를 연결하는 생각과 감정들은 바다를 건너는 것도 어렵지 않고 수십 년의 세월을어떤 때는 심지어 수 세기를 건너뛸 수도 있다.

카를로 로벨리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5

 

그러나저러나, 읽는 것이 더디니 쓰는 일도 퇴일보만 거듭하고 있다. 얼마쯤 굳센 마음이 필요하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갑자기 나태해지고잘 참다가 조급해지고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빠지는 일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그래도 계속해서 노력하면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그게 쉬운 일이었다면그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

빈센트 반 고흐반 고흐영혼의 편지


"늘 더 잘 쓰고 싶어요제가 가지고 있는 문장이라든지어떤 평범한 것들을 더 윤을 내서 빛나게 해야 하는데더 잘해야 하는데그런 생각을 계속해요그렇지만 잘하지는 못하고현상을 유지하는 것도 힘에 부쳐서 늘 헉헉거려요더 잘 쓰고 싶고예전에 안 썼던 것도 써보고 싶고요한데 늘 시간에 쫓기고 마감에 쫓기느라.“

김필균문학하는 마음』 中 최은영의 말

 

 

 

- 읽은 -

+ 강의 / 신영복 : 357 ~ 515

+ 혐오의 시대 철학의 응답 / 유민석 : 102 ~ 196

+ 아리스토텔레스 / 조대호 : 222 ~ 331

+ 예측 불가능한 시대에 행복하게 사는 법 / 윤성식 : 146 ~ 299

 

 

- 읽는 -

- 자본주의 / 제임스 풀처 : ~ 92

- 사라짐, 맺힘 / 김현 : 64 ~ 168

- 반 고흐, 영혼의 편지 / 빈센트 반 고흐 : 88 ~ 188

- 슬프다 할 뻔했다 / 구광렬 : ~ 88

- 오늘 참 괜찮은 나를 만났다 / 양창순 : 107 ~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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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1-28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칠레 선생님의 물리학 산책...까지 한국에 있는 쇼님이 읽네요? 좋은 세상이다.
그나저나 레베카 스토리 좋다..
그래 좋아 ♡

syo 2019-11-28 16:45   좋아요 0 | URL
달달하죠? 레온이도 귀엽고....
저렇게 며칠이나 고민하고 궁리하고 예상질문 뽑아 가면서 설레봤던 게 그러니까 구한말쯤이었나.....

반유행열반인 2019-11-28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굳세게, 읽고 쓰고 살고! (그런데 나란 놈은 왜 책장 열 쪽을 못 넘기고 이러고 있는가...)

syo 2019-11-28 16:45   좋아요 1 | URL
읽는 것 따위 저리 꺼지라 할 정도로 재밌거나 알차거나 행복하거나 한 뭔가를 하고 계신 게 아닐까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19-11-28 19:52   좋아요 0 | URL
빌어주신(추측해주신?) 덕분에 내일도 재밌거나 알차거나 행복하거나 한 하루를 보낼 것 같습니다. 꾸준히 읽는 멋진 syo님, 항상 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syo 2019-11-28 23:34   좋아요 1 | URL
제가 엉겁결에 힘 이런 걸 드렸나보네요. 저 하나 감당하기도 벅차서 낑낑대는 아이를 남도 일으켜 세우는 훌륭한 인물로 만들어주시네요. 제가 늘 감사합니다^-^

초록별 2019-11-28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독모습에 감동받습니다...몇칠전부터 프루스트 <잃어버린...>끼고 돌아다녔는데
굼벵이기어가듯~~^^

syo 2019-11-28 16:46   좋아요 0 | URL
아..... 그 책이라면 정말이지 굼벵이가 읽으나 제가 읽으나 속도에 별 차이가 없을 것도 같습니다.
어렵고 보람찬 길 가시네요 초록별님. 응원합니다.

수이 2019-11-28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고 기다리던 쇼님 페이퍼~ 아리스토텔레스 읽고싶지만 참아야지~

syo 2019-11-28 16:48   좋아요 0 | URL
아리스토텔레스 나쁘지 않던데요?
그리고 책이 예뻐요.... 저 시리즈는 어쩐지 자꾸 뽑아들게 하는 외모예요. 저한테 먹혀요.....

Angela 2019-11-28 1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쌤의 시대별 철학 개론” 뭐 이런거 한번 가시죠!

syo 2019-11-28 23:3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이름만 들어도 언감생심이네요.

감은빛 2019-11-28 2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고 책 두 권 보관함에 담았습니다.
책 읽을 시간은 없건만, 왜 자꾸 책을 보면 사고 싶어지는지 모르겠네요.
아니 읽을 시간을 억지로 만들어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늘 현실은 일 때문에 들춰보는 책이 아니면 손도 못 대고 있죠.

마르크스에서 플라톤까지 연어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정말 타고난 이야기꾼이세요!
다음에 또 어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실지 기대하겠습니다.

syo 2019-11-28 23:37   좋아요 1 | URL
제가 뭘 채점하고 판단할 만큼 살아보지도 못했지만,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바쁘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언젠가 읽으리라는 생각에 책장을 배불리는 사람은,
어느 날 자기 탓이 아닌 이유로 길을 잃어도, 잠시일 뿐 결국 자기 길을 금방 찾아내는
좋은 사람이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답니다.

감은빛 님 언제나 화이팅입니다 ㅎㅎㅎㅎ

Comandante 2019-11-28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리스토텔레스도 끌리는군요. 아르테 출판사 책들이 디자인도 잘 되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쓰신글 즐겁게 읽었어요..^^

syo 2019-11-28 23:38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저 책들 하나하나도 예쁘지만 주욱 꽂아놓아도 서재가 굉장히 예뻐질 것 같습니다.
이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서재 데코하는 시절은 지나간 것인가요.
Comandante님, 들러주셔서 언제나 감사합니다^-^

짜라투스트라 2019-11-29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겔 샊이 ㅋㅋ 그러나저러나 제가 칸트 원전이랑 헤겔 입문서를 동시에 읽다 못버티고 한달동안 독서를 멀리한 걸 생각해보면 맞는 ‘샊이‘가 맞는 말이기는 해요^^;;;

syo 2019-11-30 13:19   좋아요 0 | URL
저는 심지어 원전을 읽지도 않습니다 으하하하하하.....

종이달 2022-05-22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