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부네
1
간지러운 게 문제였다. 한랭건조해지는 날씨를 피부도 따라가는가. 한랭하고 건조한 피부나 그 덕에 쓸쓸하고 애처로운 마음 같은 건 참아낼 수 있지만, 간지러운 건 인간의 의지로 참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래서 벅벅 긁다 보니 내 몸에 나도 모르는 흉터가 자꾸 생긴다.
더러워서 간지러운 게 아니라구요. 오전 오후 하루 2회 머리 감고 샤워하는 청아한 syo. 아, 그게 문제인가?
팔을 촥 꺾어서 등을 위아래로 쓸어보면 등판에 일정 간격의 선들이 가로로 좍좍 그어져 있는 것이 선명하게 만져진다. 모내기 마친 벼처럼 나란하다. 만석꾼 되겠군.
이런 형태의 등짝선을 두고 야한 뻘소리를―주로 목욕탕에서―주고받던 시절이 생각났다. 그 농담이란, 누구야, 어젯밤엔 또 누굴 얼마나 못살게 굴어줬길래 이렇게 응? 누가 이랬어? 뭐 이런 시답잖은 것들을 말하는 건데, 그러나 어른의 삶이 어언 16년이나 지속되는 동안, 지금껏 누구도 내 등짝에 그래 주지 않았어……. 아무래도 내가 동기부여에 실패했나 보지. 꾸준히도 실패해왔나 보지. 그런 이유로 오늘도 내 등짝선은 내가 스스로 만든다.
손톱을 바투 깎아 보았다.
2
화학적으로 완벽한 아침은 대략 다음과 같다. 내가 아직 비몽사몽일 때, 첫 번째 햇살이 나의 눈꺼풀을 통과하여 망막에 닿는다. 망막은 시신경을 통해 뇌와 연결되며, 뇌의 솔방울샘이 이제 수면 호르몬 멜라토닌의 생산을 중단한다. […] 나의 멜라토닌 수치가 서서히 낮아지는 동안, 적당량의 코르티솔이 분비된다. 그러면 나는 자연스럽게 잠에서 깬다.
_ 마이 티 응우옌 킴, 『세상은 온통 화학이야』
자연스럽게 잠에서 깬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잠을 자는 방은 창문이 거대해서 좋은 와중에 불편하다. 애초에는 마냥 좋았었는데, 어느 날 누워 있다가 건넛집 2층 창문 안쪽에서 손걸레를 들고 왔다갔다 하던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치면서 그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보일 테면 보이고 볼 테면 보라지, 하는 마음으로 마치 창문 따위 없거나 아니면 창문 너머에 타인의 세상이 없는 것처럼 굴며 살았다. 커튼은 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건 남자라서 누릴 수 있는 자동적 특권의 일종이겠지.
그런 태도가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봄인지 이른 여름인지 애매했던 어느 날, 집에 찾아와 에어프라이어로 치킨을 해주겠다는 여자친구의 말을 듣고 번뜩, 아, 창문을 가려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치킨을 해 먹자는 그녀의 말 뒤에 다른 뭔가가 숨겨져 있는지는 그 시점에서 내가 확신할 문제가 아니었지만, 나로서는 치킨만 해 먹고 냠냠냠 맛있다 하고 끝낼 생각이 없다는 것을 늘상 확신할 수 있었으므로……. 그리고 집주인인지 청소업잔지 헷갈릴 만큼 부단히 청소하는 옆집 할아버지께 섹스하는 엉덩이를 보여드릴 수는 없었으므로. 그게 내 엉덩이든 다른 엉덩이든 간에.
우리 동네는 재활용 쓰레기를 내놓는데 특별한 방식이 없다. 저녁나절 해서 자기 집 앞에 놓으면 되는데, 이건 구청이나 수거업체에서 정한 룰은 아니다. 그저 남의 집 앞에 내놨다가는 사회 발전에 따라가지 못하는 인간의 한심한 도덕성에 관한 그 집 주인의 찌렁찌렁한 10분 스피치가 온 골목에 울려 퍼질 것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는 동네 사람들 간의 암묵적 규칙에 가깝다. 딴소리. 하여튼, 특별한 방식이 없다 보니 그냥 집 앞에 늘어놓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 커다란 비닐 봉투에 담아서 배출하는 추세였다. 그래서 우리 집도 검은색 대봉투를 인터넷으로 100매씩 사서 쓰레기를 처리하고 있는데, 그게 가림막으로 맞춤했다. 한 네 장 정도를 이어서 스카치테이프로 창문에 발랐더니 정말로 바깥 세상이 없어졌다. 마음먹고 바르면 쓰봉으로 암막도 만들 수 있는 신기한 세상. 그럭저럭 영상은 막았는데, 소리는 입술로 막기로 할까…….
그 봄에 그렇게 붙여놓고 귀찮아서 오래도록 떼지 않았다. 또 올 텐데 귀찮게 뭐하러, 하며 시꺼먼 김칫국을 마셨던 건데, 알고 보니 이 봉다리가 그간 아침 햇볕을 차단하면서 내 멜라토닌의 자연적 감소를 방해해왔던 듯. 어쩐지 아침마다 일어나기가 그렇게 싫더라니, 이게 다 과학적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 그렇지. 아무래도 21세기는 과학이다. 게을러도 과학적으로 게을러야 되는 시대다.
3
쓰고 보니 두 꼭지가 비슷한 느낌이다. 등 긁기를 빙자해서 뭔가를 호소하고 있고, 멜라토닌을 입에 담으면서 뭔가를 원하고 있는 눈치다. 집구석 생활도 큰 문제 없이 그럭저럭 평안하다는 증거겠고, 삼십 대 뒷길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건강할 대목에선 건강하다는 의미로구나 한다. 가을은 과연 사랑과 양생의 계절인가요. 아니면 syo가 그냥 이렇게 생겨먹은 syo인가요.
몸이 아프면 슬쩍 달라붙어 당신 손을 잡고 그 어깨에 기대 밥 한술 받아먹고 싶다 사랑한다고 사랑받고 싶다고 말을 못해 무슨 병에라도 옮아서는 곧 떨어져 버릴 듯이 매달려 있고 싶다
_ 이향, <사과> 전문
“아무래도 좋아하는 것에는 손이 저절로 가는 법이지. 어쩔 수 없어. 돼지는 손을 내미는 대신 코를 내밀지. 돼지는 말이네, 꽁꽁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해두고 코앞에 맛있는 음식을 놓아두면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까 코끝이 점점 늘어난다고 하더군. 맛있는 음식에 닿을 때까지 늘어나는 거지. 정말 집념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니까.”
_ 나쓰메 소세키, 『산시로』
한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무엇일 수 있는가?
그러니까,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무엇'일 수 있을 때, 왜 그것은 우리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한 편의 소설이 던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질문이다.
_ 김다은, 『혼밥생활자의 책장』
욕망은 멀리 쏘다니게 할 것이 아니라 가까이서 돌아다니게 해야 할 것이네. 욕망을 완전히 가둘 수는 없으니까. 이룰 수 없거나 이루기 어려운 것들은 내버려두고 가까이 있거나 이루어질 성싶은 것들을 따라다니되, 모든 것은 똑같이 하찮고 겉보기만 다를 뿐 속으로는 똑같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네.
_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인생이 왜 짧은가』
--- 읽은 ---
202. 언젠가, 아마도
김연수 지음 / 컬처그라피 / 2018
소설가도 정말 놀랄 정도로 엄청 돌아다니는 직업이로구나 싶다. 좋은 작가가 되려면 엄청 돌아다녀야 하는 것인가를 생각하면 괜히 서늘해지기도 하고, 작품을 빙자해서 여기저기 잘도 놀러다니는구만, 하는 질투심도 고개를 쳐든다.
이 나라 바깥을 나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 주인공(혹은 작가 자신)이 외국 어느 있어 보이는 나라의 이름만 들어도 있어 보이는 거리 이름을 줄줄 나열하며 돌아다니는 장면을 보면 괜히 화딱지가 나기도 한다. 이러고 말 거면 구글맵으로 보고 써라, 그냥, 괜히 작품 빙자해서 관광하지 말고. 실제로 그렇게 썼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직접 그 거리들을 둘러보면서 내면에 획득한 무언가를 다른 장면이나 서술 방식에 실어서 은근히 전달하고 있는데, 독자인 내가 열등감에 찌든 빙충이라 인식하지 못하고 툴툴거리는 중일 수도 있고. 그렇지만, 그런 부단한 떠돌아다님을 통해 나온 책이 이정도 된다면, 읽는 입장에서는 열등감이고 나발이고 그냥 땡큐땡큐만 연발할 뿐이다. 언젠가, 내가 이 사람의 일곱 배를 떠돌아 다닐 수 있는 날이 온다고 해도, 아마도, 내가 하는 이야기가 이 사람의 칠분의 일만큼도 즐겁고 아름답기는 어려울 것 같다.
--- 읽는 ---
‘장판’에서 푸코 읽기 / 박정수
문 / 나쓰메 소세키
스무 살 / 김연수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 이수영
--- 갖춘 ---
진실에 복무하다 / 권태선
리듬분석 / 앙리 르페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