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만나. 자연주의자들의 개더링.
완전한 자유와 평화. 친구들의 집.

거주지가 아니고 통과해 가야 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보보는 광야와 같다고 할 수 있었다. 환경이 열악하다고 불평하지 않는 까닭이 그 때문일 것이다. 더 좋은환경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어차피 거주지가 아니니까 견딜 수 있다. 이곳에서는 어떻게든 연명하면서 통과하기만 하면 되니까. 열악한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의 이상한 평안함도 그런 인식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아마도 현실의 비참함을 이기기 위해 그런 인식을 만들고 부추기고 키웠는지 모른다. 그런 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P200

촛불이 일렁이며 기묘한 그림을 벽에 그렸다. 노래가 합창이 되고 좁은 실내가 공연장이 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누구인가 그때까지 의자에 앉아 있던 황선호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도 엉겁결에 일어나 사람들 속에 섞여 춤을 추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의 격랑이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이건 무얼까, 가슴속을 뜨겁게 만드는 이것은 무엇일까.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태평한 걸까.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친근하게 여겨지는 것일까. 음악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밤이 깊었는데도 노래와 춤은 멈추지 않았다. - P205

형제라는 호칭은 외부 사람들에게 배타적이고, 내부적으로도 형과 아우에게 주어진 태생적인 힘의 불균형으로 인해 시기와 다툼과 분쟁이 발생할 소지를 품고 있지만 친구는 그렇지 않다고 교수는 말했다. 그는 온 인류가 친구가 되는 완전한 세상에 대한 포부를 자주 피력했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 위에 있지 않고 다른 사람 아래 있지 않다. 친구는 옆에, 같이, 더불어 있는 사람에게 옆에, 같이, 더불어 있는 사람이 부르는 이름이다. 인간이 가진 어떤 조건도, 예컨대 피부색이든 생김새든 몸무게든 성이든 종교든 재산이든 지능이든 나이든 취향이든 차별의 구실이 되지 않는다. 그는 모두가 친구가 되는 세상을 지향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친구로 불렀고 자기도 친구로 불리기를 원했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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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쓰기 - 김훈 산문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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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6. 연필로 쓰기 / 김훈 / 문학동네(2019)
381-467쪽 17,18,19,20파일 낭독녹음
전체완료



오늘 점자도서관 가는 길에는 라디오에서 박주원의 슬픔의 파에스타,가 흘러 나왔다. 오래전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에서 박주원 공연 본 거 생각나 좋았다 그냥. 도서관냥이들 갖다줄 습식캔을 까먹을까 봐 어제 한 박스 미리 현관에 내놓았다. 주차하고 보니 저쪽에 한 녀석 앉아서 나를 빤히 보고 있다. 갈색 치즈냥이다. 어쩐지 추워보인다. 가까이 가면 달아날까봐 조금 거리를 두고 폰카메라로 줌인.

습식캔을 상자째 남자직원에게 드렸더니 사료칸에 쟁여두며 한 마리가 얼마전 새끼냥이들을 낳아 좀 예민하다며 씨익 웃는다. 보고 싶지만 참고, 커피 한 잔 들고 녹음실에 들어가 네 시간 연속 달렸다. 오늘은 이 책을 마치고 다음주에 다른 책 하고 싶어서 중간에 화장실 갈 시간도 넘겨버렸다.


오늘 낭독 부분에서 유독 만난 반가운 것들

1. 좋아하는 시, 백석 “국수”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스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평양냉면 먹으러 가야겠다.


2. 113년 전 오늘(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한 거사


# 열차는 이토가 대련에서 하얼빈으로 온 철도를 거꾸로 달려서 하얼빈에서 대련으로 향했다. 안중근은 이틀째 자지 못했다. 몸이 열차의 리듬에 감겨서 졸음이 쏟아졌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가 본 적 없는 대련이 안중근의 마음에 떠올랐다.
…… 이토의 나라는 대련을 쳐부수어서 차지했고 대련을 발판으로 하얼빈으로 진출했다. 하얼빈역 플랫폼은 내가 이토를 쏘기에 알맞은 자리고 이토가 죽기에 알맞은 자리다.
…… 나는 이토가 온 철도를 거슬러 가고 있다. 대련은 이토의 세상이다. 대련은 내가 말하기에 편안한 자리이고 내가 죽기에도 알맞은 자리다.
- 김훈, 하얼빈(2022), 194쪽



3. 송년회
열심히 일하고 총알도 피해 살아왔지만 꼰대라떼라는 소리나 듣기 십상인 대한민국 일흔살 남자들의 시시껄렁한 송년회 이야기가 마지막 장이다. 왠지 웃픈 장면을 상상하며 김훈 식의 썰렁한 유머에 피식 웃었다. 또 한 해가 간다.

하얼빈역은 동청철도와 만주철도 여순지선의 교차점이다. 하얼빈역은 안중근이 이토를 쏘아 죽이기에 가장 걸맞은 시대적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고, 이토 또한 총 맞아 죽기에 나쁘지 않은 장소였다. 나는 이토가 잠자다가 침실에서 당하거나, 기생집에서 놀다가 당하거나, 자신을 배반한 부하에게 당한 쪽보다는 동청철도 하얼빈역에서 실탄 7발만을 지닌 조선 청년에게 당한 죽음이 그의 명예에 다소 기여한 바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왔고, 이토는 여순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왔다. 둘은 하얼빈에서 부딪쳤는데, 동서와 남북이 만나는 이 교차로의 개방성은 안중근의 거사를 암살이 아니라 공개처형으로 격상시켰고, 이 철도의 침략성은 이토의 제국주의적 야망과 안중근 거사의 당위를 그 철도의 노선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교차점이 안중근의 사격 위치였고 이토의 죽음의 자리였다. 1909년 10월 26일 아침의 하얼빈역 사진 속에서 검은 객차와 레일은 지금도 쇠비린내를 풍긴다. 길들은 싱싱하다. - P415

종합상사 주재원 하던 친구가 어디서 구했는지 달력을 한 개씩 나누어주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잔을 들어서 또 한잔씩 마셨다. 총무가 회비를 걷었다. 다들 3만 원씩 냈다.
저녁 6시에 시작했는데, 오래 버티지 못했다. 8시가 넘으니까 다들 마누라한테서 전화받고, 9시에 흩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어둠 속에서 가슴이 뻥 뚫린 듯이 허전했다.
당신들은 이 송년회가 후지고 허접하다고 생각하겠지. 나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덧없는 것으로 덧없는 것을 위로하면서, 나는 견딜 만했다. 후져서 편안했다. 내년의 송년회도 오늘과 같을 것이다. 해마다 해가 간다. - P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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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26 2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의 애증하는 김훈작가 ㅠ.ㅠ 근데 정말 문장은 너무 좋아요. ㅎㅎ
드디어 낭독 완료하셨군요. 4시간씩 낭독 녹음이 가능한가요? 계속 낭랑한 목소리를 유지해야 하잖아요. 이게 또 그냥 말하는거랑 다르더라구요.
다음 책은 또 어떤 책을 녹음하실지도 궁금해지네요.

프레이야 2022-10-26 22:31   좋아요 1 | URL
애증 ㅠ 뭔가 낭독하기에 문장이 쉽지 않은데 하고는 싶은 문장이라 입술 버벅거려 되돌아가서 다시 자주 그랬네요. 파주 저쪽에 대한 글도 좋은데 기행 에세이 “풍경과 상처”를 다시 보고 싶어지더라고요. 목보다 꼼짝 않고 있었더니 어깨가 뜨아 굳어져서ㅎㅎ 다음 도서는 두구두구 ~ 찜! 신간입니다.

희선 2022-10-27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월 26일은 10, 26으로만 알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자세히 몰랐나 봅니다 찾아보니 나오는군요 해는 달라도 10월 26일에 여러 일이 있었네요 113년 전에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쏜 날이군요 명량대첩도 일어난 날이에요 1920년 청산리 전투도 있네요

네 시간이나 녹음하시다니, 쉬지 않고 해도 목 괜찮으신지... 많이 추워지면 고양이는 어디에서 지낼지, 어딘가 따듯한 곳에서 지내겠지요 먹을 게 아주 없지 않아 다행이네요


희선

프레이야 2022-10-27 11:00   좋아요 1 | URL
따끈한 차 마셔가면서 해요^^
그날이 명량에 청산리에 그렇군요.
잊지 못할 날입니다 ^^

기억의집 2022-10-27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하얼빈 시작 했습니다~ 저도 어제 검색하다가 10,26이 안중근과 관련된 날이라 이 날을 안중근의 날로 저장하려고요. 저도 길고양이 밥주는데.. 날이 추워져서 그런지 사료가 줄지 않네요… 요 맘때 고양이들이 가장 힘든 시기 같아요!!

프레이야 2022-10-27 14:06   좋아요 0 | URL
에구 추워 보였어요. ㅠ 하얼빈 조만간 기억님의 시원한 리뷰 기대됩니다. ^^
저는 아직 하얼빈 리뷰를 못 쓰겠어요.

그레이스 2022-10-27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백석 시 좋죠!
그분들의 송년회^^ ... 재미있네요!

프레이야 2022-10-27 10:58   좋아요 0 | URL
김훈은 구질구질한 걸 잘 쓰는 것 같아요^^

책읽는나무 2022-10-27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시면 흩어지는 송년회!!!
엄마들의 모임과 좀 비슷해 보입니다??ㅋㅋㅋ
재밌네요. 김훈 작가님 의외로 유머스럽지 않아 보이지만, 유머러스한 듯 합니다.
지난 번 김중혁 작가님이 김훈 작가님 집에 놀러갔는데 지우개로 열심히 연필로 쓴 글을 지우고 계시더래요.
김중혁 작가님이 ˝에이. 그러게 첨부터 잘 쓰시지?˝ 했다는 거에요.ㅋㅋㅋ
저는 까마득한 후배가 그런 농담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김훈 작가님 진정한 아재이신 듯 합니다.^^

프레이야 2022-10-27 15:11   좋아요 1 | URL
여섯시 만나 여덟시부터 마누라들 전화가 오더라는 대목에서 넘 웃겨가지고요 ㅎㅎ 그 나이에 뭘 그래 남표니한테 전화로 들어오라고 그러는지. 일흔 넘은 남표니가 어디서 주접떨고 길 잃을까봐 구러는지 ㅋㅋ 아무튼 넘 웃기는 송년회였어요. 노래 부르러도 안 가고 말이죠. 김중혁 작가도 좋아요. 여전히 연필로 꾹꾹 눌러쓰고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쓰는 김훈 작가 ^^ 인터뷰 보면 은근 유머러스한 면이 있어요. 예전에 춤****님 생각나요. 김훈 작가 완전 애정하셔서 ^^

서니데이 2022-10-27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뉴스에서 안중근 의사 관련 소식이 있었어요.
올해 하얼빈이 나왔고 이 책이 수년 전 출간된 것을 생각하면 장편소설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 같아요.
잘읽었습니다. 프레이야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프레이야 2022-10-27 17:24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어제 저녁 뉴스에서도 봤어요. 113년전 그날^^ 안중근을 오래오래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해요 소설로 쓰고자. 고심했을 것 같아요. 쉽게 쓸 수 없는 사람이고 그런 일이라.

2022-10-31 0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27 2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반부터 흡입력과 사유의 깊이에 다시 놀란다.
이승우! “신성과 순수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

나는 그런 존재와 같다. 저 세계를 빠져나왔고, 그러니까 저 세계의 존재자가 아니고 그렇지만 이 세계에는 등기되지 않고 떠돈다.
그러니까 이 세계의 존재자 역시 아니다. 나는 헤카테,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하는 문을 지키는 신에게 임시로 소속된 자이다. 헤카테는 교차로, 문턱, 건널목을 지배한다고 알려져 있다. 나는 교차로와 문턱과 건널목에서 서성이는 자이다. 교차로와 문턱과 건널목은 거주지가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거주자가 아니다. 교차로와 문턱과 건널목은 이곳도 아니고 저곳도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없는 사람으로 있고, 살지 않는 사람으로 산다. - P55

그것은 그 도시에서의 정착의 여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삶이 불안정할 때 삶의 뿔안정함을 토로하는 글은 길고 글쓰기는 잦다. 삶이 안정할 때 삶의 안정함을 토로하는 글은 짧고 글쓰기는 드문드문하다. 첫날 쓴 그의 글에는 비장한 기운이 흐르는데, 보보라는낯선 도시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것이 그는 이곳에 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이곳에 나타난 사람이 아니라 (그곳에서) 사라진 사람이었다.
어떤 글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 운명에 대해 하는 예언이 되기도 한다. 무언가를 쓰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그는 아마 그것을 몰랐을 것이다. - P56

진동하는 악취의 중요한 원인 제공자인 이 배설물들은 자동차나 자전거의 바퀴, 그리고 사람의 신발에 붙어서 형체를 바꿔가며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개들은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사람들은 개들과 함께 어슬렁거린다. 개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걸까. 사람보다 많고 사람보다 의젓하다. 개들은 사람을 힐끗거리며 어슬렁거리고 사람들은 개들을 힐끗거리지 않고 어슬렁거린다. 개들은 배설을 가려서 하지 않고(가려서한다면 개가 아니지!), 사람은 개들의 배설물을 괘념치 않는다. 도시는 악취로 정복된다. 쏘고 베고 찌르는 것만 무기가 아니다. - P72

발밑의 현실이 하늘의 추상을 이긴다. 중요한 것보다 시급한 것을 먼저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치이다.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냄비 속의 음식이 타고 있을 때는 가스불부터 꺼야 하고 화장실이 급할 때는 화장실부터 가야 한다. 시급한 일이 있으면 중요한 일은 미뤄진다. 시급한 일이 끊이지 않으면 중요한 일은 영원히 미뤄지고 끝내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 P90

순수는 보임으로써 더러워진다. 눈에 보임으로써 순수는 더러워지지만, 순수를 봄으로써, 즉 순수를 오염시킴으로써 눈은 화를 입는다. 그런데 순수를 보는 순간 눈은 화를 입어 보는 기능을 상실하므로 순수는 결코 더러워지는 법이 없다. 순수를 오염시킬 수 있는 것은 시선이지만, 시선이 가닿기 전에 눈이 먼저 상하기 때문에 순수는 오염되지 않는다. 순수는 오염되지 않지만 눈은 순수를 본(보려고 한) 대가로 오염된다. 순수를 보는 시선은 덫과 같다. 이 덫에 걸리는 자는 덫을 놓은 자이다. 말하자면 눈은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 탐욕의 시선을 구사한 데 대한 화, 일종의 형벌이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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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국가 폭력의 저항자

“모든 프랑스인은 공범이다. 이게 프랑스의 가치에서 나온 행동인가?”


자밀라 부파차
_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일원. 무슬림 여성.

지젤 알리미
_ 반식민주의 인권 변호사. 프랑스 여성운동의 상징적 인물.

보부아르는 회고록 두 번째 권을 일단 제목 없이 출판사에 넘기고다음 시기 자료 작업을 하러 국립도서관에 갔다. 그 시기는 《레 망다랭》에도 많이 썼지만, 소설은 자전적 글쓰기만큼 삶의 우연을 잘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소설은 예술적인 모든 것으로 만들어진다. 삶은 거대한 통일성으로 엮어낼 수 없는 예측 밖의 무의미한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 P395

알리미는 고문에 책임을 져야 할 프랑스인 고위 관계자들을 고소하자고 부파차를 설득했다. 보부아르가 공개적으로 지지를 표명해줄까? 자칫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부파차는 사형 선고를 받을지도 몰랐다. 보부아르는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인 펜으로 지원에 나섰다. 보부아르의 자밀라 부파차 옹호론은 6월에<르 몽드>에 게재되어 변호위원단 구성에 도움을 주었다. 변호위원단의 목표는 이 일을 널리 알리고 전쟁 중에 일어난 프랑스인의 수치스러운 만행을 밝히는 것이었다. <르 몽드>에 기고한 글에서 보부아르는 사람들이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하는 것이야말로 이 추악한 일의 가장 추악한 면이라고 했다. 타인의 고통에 그토록 무관심한 그들 자신에게 어떻게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있나? - P401

보부아르는 지식인들이 문화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읽을 만한 글을 써야 한다. 이야기를 통하여 그들의 정신에 새로운 가능성을 불어넣어야 한다. - P404

사르트르 철학의 별이 빛을 잃어 가는 동안, 보부아르를 향한 페미니스트의 관심은 높아졌다. 오십 대의 보부아르는 전복적 언어 구사에 단련되어 있었고 독자의 자유에 호소하는 상상적 경험을 창조하는 기술도 뛰어났다. 하지만 보부아르는 전복적언어와 상상의 자유 이상을 원했다. 여성들의 진짜 삶의 상황에 구체적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법의 제정을 원했다.
이십 년 사이에 페미니즘 제2물결이 탄력을 받았다. 1960년대까지 가족 계획은 금기시되었고 피임약 판매는 법적으로 제한되었다. 1960년에 경구 피임약이 미국에서 판매되기 시작했고 영국은 1961년부터 기혼 여성에 한해서 판매를 허가했다. 프랑스에서 피임약 판매는 1967년에야 비로소 가능해졌다(영국 미혼 여성이 피임약을 살 수 있게 된 것도 이 해부터다). 보부아르는 이 변화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제2의 성》은 전 세계 여성들과 페미니스트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었다. - P411

프랑스에서 피임은 1967년에 합법화됐지만 낙태는 여전히 불법이었다. 주간지 <르누벨옵세르바퇴르>가 유명인 몇 명의 이름이 들어간다는 조건으로 선언문을 실어주겠다고 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바로 그 유명인이었고 기꺼이 그들의 대의에 동의했다. 자기 집을 모임 장소로 내어주기도 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일요일마다 보부아르의 집 소파에서 선전 운동을조직했다. 그들은 343명에게 서명을 받아 ‘343인 선언‘을 1971년 4월5일자 <르누벨옵세르바퇴르>에 성공적으로 발표했다. 선언의 메시지는 단순했다.

프랑스에서 매년 1백만 명의 여성이 낙태를 합니다. 의료 시설에서는 낙태가 비교적 간단한 시술이지만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들은 열악하고 미심쩍은 조건을 감수하면서까지 비밀리에 낙태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1백만 명에 대하여 침묵해 왔습니다. 나도 그 1백만 명 중 하나임을 선언합니다. 나도 낙태를 한 여성임을 선언합니다. - P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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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26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젤 알리미가 등장하는군요. 여성주의 책 읽기에서 몇번 나오던 분....

프레이야 2022-10-26 22:03   좋아요 0 | URL
용감하고 존경스러운 언니들 참 많습니다 ^^
 
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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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외로움에 사무치는 일이 없도록 나는 글을 쓰겠다.”
-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기억을 잘 다루는 작가 중 한 사람.
사람의 기억이 타인에게 힘과 위로가 되는, 다감함.

‘내가 어렸을 때 익숙하게 듣던 목소리로 엄마가 말했다. "루시바턴, 못된 계집애 같으니. 너한테 우리가 쓰레기라는 말을 들으러 내가 이 나라를 가로질러 여기까지 날아온 게 아니야. 우리는 이 나라로 건너온 최초의 사람들이었어, 루시 바턴. 내 조상과 네 아빠의 조상 모두 너한테 우리가 쓰레기라는 말을 들으러 내가 이 나라를 가로질러 여기까지 날아온 게 아니라고. 그들은 선량하고 점잖은 사람들이었어. 그들은 매사추세츠 주 프로빈스타운의 해안에 닿았고, 물고기를 잡는 정착민이었어. 우리는 이 나라에 정착했고, 나중에 선하고 용맹한 사람들은 중서부로 건너갔지. 우리는 그런 사람이야. 너는 그런 사람이라고. 그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돼." - P142

세라 페인이 말했다. 자신의 글에 약점이 보이면 독자가 알아내기 전에 정면으로 맞서서 결연히 고쳐야 해요. 자신의 권위가 서는 게 그 지점이에요. 가르친다는 행위에서 오는 피로가 얼굴에 가득 내려앉았던 그 강의 시간 중 하나에서 그녀가 말했다.
사람들은 우리 엄마가 사랑한다는 말을 절대 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 P157

그때 이후로 내게도 임종을 앞둔 사람들의 곁을 지킨 순간들이 있었고-나이가 들면 자연스러운 일이다-나는 육신의 최후의 빛이 꺼져갈 때 눈동자가 불붙듯 타오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그 남자가 그날 내게 도움을 주었다. 그의 눈동자가 말했다.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을 거야. 나는 그가, 죽음이, 엄마가 나를 떠나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절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 P163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방식으로 쓰게 될 거예요. 이야기는 걱정할 게 없어요. 그건 오로지 하나니까요." - P169

나는 작가가 되려면 냉혹해야 한다는 제러미의 말에 대해 생각한다. 또한 내가 늘 글을 쓰고 있고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며 오빠나 언니, 부모님을 만나러 가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하지만 가고 싶지 않아 안 간 것이기도 했다.) 시간은 늘 충분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내가 결혼생활에 안주하면 또다른 책, 내가 정말로 쓰고 싶은 책은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진정, 냉혹함은 나 자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에서,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 P204

나는 늘 그 순간을 떠올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 아이의 유년기가 끝난 건 그때였다고. 죽은 사람들, 연기, 이 도시와 이 나라에 가득 퍼진 공포, 그 이후 세계적으로 일어난 참혹한 사건들. 하지만 나는 그날에 대해 떠올릴 때 내 딸만 생각한다. 그전에도, 그후에도 그 아이가 그런 목소리로 외친 것은 들은 적이 없다. 엄마.

또 가끔 생각하는 건, 내가 세라 페인을 옷가게에서 만났을 때 그녀가 자기 이름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사실이다. 그녀가 아직 뉴욕에 사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뒤로 그녀는 새 책을 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몹시 지쳐갔던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이야기는 하나뿐이라던 그녀의 말을 생각하지만, 나는 아직 그녀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혹은 무엇인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가 쓴 책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녀가 뭔가를 피해 비켜서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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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0-25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트라우트 작가는 기억
의 연금술사일까요 -

신작도 궁금해지네요.

프레이야 2022-10-26 00:28   좋아요 1 | URL
공교롭게도 에르노와 스트라우트를 동시에 읽었어요.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기억과 체험을 소재로 쓰고 그런 작가들이 많지만요. 다루는 방식의 차이에서 작품의 결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개성이기도 하겠습니다.
신작은 읽어보셨을 수도 있겠지만 내이름은루시바턴 을 먼저 읽고 보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