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국가 폭력의 저항자

“모든 프랑스인은 공범이다. 이게 프랑스의 가치에서 나온 행동인가?”


자밀라 부파차
_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일원. 무슬림 여성.

지젤 알리미
_ 반식민주의 인권 변호사. 프랑스 여성운동의 상징적 인물.

보부아르는 회고록 두 번째 권을 일단 제목 없이 출판사에 넘기고다음 시기 자료 작업을 하러 국립도서관에 갔다. 그 시기는 《레 망다랭》에도 많이 썼지만, 소설은 자전적 글쓰기만큼 삶의 우연을 잘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소설은 예술적인 모든 것으로 만들어진다. 삶은 거대한 통일성으로 엮어낼 수 없는 예측 밖의 무의미한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 P395

알리미는 고문에 책임을 져야 할 프랑스인 고위 관계자들을 고소하자고 부파차를 설득했다. 보부아르가 공개적으로 지지를 표명해줄까? 자칫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부파차는 사형 선고를 받을지도 몰랐다. 보부아르는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인 펜으로 지원에 나섰다. 보부아르의 자밀라 부파차 옹호론은 6월에<르 몽드>에 게재되어 변호위원단 구성에 도움을 주었다. 변호위원단의 목표는 이 일을 널리 알리고 전쟁 중에 일어난 프랑스인의 수치스러운 만행을 밝히는 것이었다. <르 몽드>에 기고한 글에서 보부아르는 사람들이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하는 것이야말로 이 추악한 일의 가장 추악한 면이라고 했다. 타인의 고통에 그토록 무관심한 그들 자신에게 어떻게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있나? - P401

보부아르는 지식인들이 문화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읽을 만한 글을 써야 한다. 이야기를 통하여 그들의 정신에 새로운 가능성을 불어넣어야 한다. - P404

사르트르 철학의 별이 빛을 잃어 가는 동안, 보부아르를 향한 페미니스트의 관심은 높아졌다. 오십 대의 보부아르는 전복적 언어 구사에 단련되어 있었고 독자의 자유에 호소하는 상상적 경험을 창조하는 기술도 뛰어났다. 하지만 보부아르는 전복적언어와 상상의 자유 이상을 원했다. 여성들의 진짜 삶의 상황에 구체적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법의 제정을 원했다.
이십 년 사이에 페미니즘 제2물결이 탄력을 받았다. 1960년대까지 가족 계획은 금기시되었고 피임약 판매는 법적으로 제한되었다. 1960년에 경구 피임약이 미국에서 판매되기 시작했고 영국은 1961년부터 기혼 여성에 한해서 판매를 허가했다. 프랑스에서 피임약 판매는 1967년에야 비로소 가능해졌다(영국 미혼 여성이 피임약을 살 수 있게 된 것도 이 해부터다). 보부아르는 이 변화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제2의 성》은 전 세계 여성들과 페미니스트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었다. - P411

프랑스에서 피임은 1967년에 합법화됐지만 낙태는 여전히 불법이었다. 주간지 <르누벨옵세르바퇴르>가 유명인 몇 명의 이름이 들어간다는 조건으로 선언문을 실어주겠다고 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바로 그 유명인이었고 기꺼이 그들의 대의에 동의했다. 자기 집을 모임 장소로 내어주기도 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일요일마다 보부아르의 집 소파에서 선전 운동을조직했다. 그들은 343명에게 서명을 받아 ‘343인 선언‘을 1971년 4월5일자 <르누벨옵세르바퇴르>에 성공적으로 발표했다. 선언의 메시지는 단순했다.

프랑스에서 매년 1백만 명의 여성이 낙태를 합니다. 의료 시설에서는 낙태가 비교적 간단한 시술이지만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들은 열악하고 미심쩍은 조건을 감수하면서까지 비밀리에 낙태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1백만 명에 대하여 침묵해 왔습니다. 나도 그 1백만 명 중 하나임을 선언합니다. 나도 낙태를 한 여성임을 선언합니다. - P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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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26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젤 알리미가 등장하는군요. 여성주의 책 읽기에서 몇번 나오던 분....

프레이야 2022-10-26 22:03   좋아요 0 | URL
용감하고 존경스러운 언니들 참 많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