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는 헤르체고비나 이외에도 반야루까를 수도로 하는 스랍스까 공화국까지 사실상 셋으로 구분되어 하나의 나라로 독립되어 있다. 현재 정식 국명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발칸국가들 중 제일 가보고 싶었던 나라다. 끔찍한 폭행과 살상이 자행되었던 전쟁의 상흔이 여기저기 남아있는 나라.

사라예보에는 모스크와 정교회, 로마 가톨릭 대성당이 공존하고 대단했던 크로아티아 상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 묵었던 여관터와 브란젤리나 부부도 묵었던 유로파호텔이 나란하다. 대성당 앞에는 젊고 발랄한 남녀들이 자유분방하게 웃고 즐기며 파티드레스 같은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들이 붐비고 있다. 이슬람 우물이 남아 있고 현대식 카페거리와 터키식 상가밀집지역이 자연스레 이어져 있는 사라예보 시내거리에서 저 너머로 모스크가 보인다.

세르비아의 대포에 부서지기 전 백 년 동안 이슬람과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터키인과 유대인 그리고 또 다른 이민족이 평화적으로 공존했던 사라예보에는 1차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현장을 목격한 라틴다리가 여전하다. 비극의 현장은 시청사와 당시 현장 사진들, 잊지 말자는 표어가 말한다. 사람의 앞날, 아니 한 치 앞을 모르고 욕망하고 허세 부리고 소유하려는 인간심사가 허망하다. 상처 깊은 도시에서 여전히 부유한 귀족들은 그들만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였던 모스타르에는 교각이 없는 터키식 다리 '스타리 모스트'가 있다. 오래된 다리,라는 뜻. 1993년 보스니아내전으로 파괴되었는데 당시 네레트바강에 매몰된 파편들을 건져올려 터키의 건축가들이 돌을 재배치했다고. 2004년 재건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아담하면서도 견고한 인상의 스타리 모스트는 광택나는 매끄러운 돌들이 아치형(정확히 말하면 거꾸로 브이자 형으로 좀 가파르다)을 이루는 다리 위에 낮은 계단식으로 깔려있어 발가락에 힘을 주지 않고 걸으면 미끄러지기 쉬울 정도다. 다리 저쪽과 이쪽의 정경이 좀 다른 느낌을 준다. 다리를 건너가면 이슬람들의 마을이라 작은 모스크도 있고 터키식 수공예품 가게들이 소박하다.


드리나강의 다리는 이보 안드리치의 고향, 소도시 비셰그라드에 있다.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국경 근처를 지나며 드리나강이 시작되는 작은 시냇물같은 강줄기를 보았고, 비셰그라드에는 거리상 가보진 못했다.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강의 다리」를 읽고 그 느낌을 대신하려고 떠나기 전에 읽었다.  어느 나라의 역사든 그러하지만 강물은 말없이 흐르고 다리 또한 말이 없다. 드리나 강의 다리,는 다리 주변에서 삶을 이어온 보통사람들의 슬픈 삶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너무 담담하고 때론 희극적이라 인간의 삶을 향한 애잔함이 배가된다. 터키제국시대부터 1차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발칸반도 400년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대서사시'라는 부제처럼 유장한 언어로 인간의 운명과 역사를 그린다. 잔인한 역사로 점철된 시간속에서도 인간미를 잃지않고 유머와 생의 기쁨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눈물겹다.


▷ 이렇게 카사바를 부수고 뿌리째 흔들어버리고 오래된 관습들과 살아 있는 사람이건 죽은 식물이건 간에 모두 전복시켜버리는 이 새로운 폭풍우 속에서도 다리는 예전부터 늘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한결같고 희고, 튼튼하고, 상처받지 않는 모습을 지닌 채 서 있었다. (434p)

▷ 그들은 모두 라키야 한 잔씩을 더 마시고 커피를 마시며 금방이라도 다가올지 모를 현실을 잊고 있었고 모두들 더욱 자유롭고 더욱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이 암흑과 공포, 살인적인 포격 외에 인생에는 좀더 즐겁고 인간적인 다른 무엇이 꼭 있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밤은 지나갔고 그와 더불어 위험과 고생으로 가득찼지만 명백하고, 흔들리지 않고. 자신에게 충실한 인생도 지나갔다. 오래전부터 이어져오고 그렇게 이어져내려온 본능으로 그들은 그런 것들 속에서 자신을 잊고 인생을 순간적인 감상들과 직접적인 필요들로 나누어버렸다. 왜냐하면 이렇게 살아야만, 매순간을 따로 떼어놓고 앞뒤도 보지 않고 살아야만, 견딜 수 있고 좀더 나은 앞날을 바라보며 계속 그런 삶을 지켜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4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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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사생활`의 저자, 알렉산드라 호로비츠의 책 `관찰의 인문학` 의 원제다. 보되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 인식의 한계를 극복해볼 수 있는 유효하고 즐거운 방법을 전한다. 이는 저자 자신이 같은 길을 열한번 걸으며 본 것들에 대한 철저히 경험적인 이야기다. 문제는 집중에 있다. 또한 길을 걷되 누구와 걷느냐에 따라 우리가 보고 깨닫고 느끼는 것의 범주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인생의 길에 동반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 길이 달라지듯.

저자는 자신의 어린아들, 반려견, 시각장애인, 일러스트레이터, 지질학자, 도시학자 등 직업적 왜곡이라 불리는 특정한 편향성에 적극적으로 기대어 열한 가지 다른 동반자의 눈과 함께 도시의 길을 걸으며 보이는 것을 눈에 담고 관찰했다.
그리고 자신의 시야를 확실히 넓혔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상당히 실험적이고 흥미로운 제안으로 들린다.

이 책의 부제는 `같은 길을 걸어도 다른 세상을 보는 법˝이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싶다면 어제 걸었던 길을 다시 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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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DOKU 2015-06-26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롭네요.

프레이야 2015-07-01 15:08   좋아요 0 | URL
네, 흥미로운 접근이에요

처음처럼 2015-07-01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대한 눈을 뜨는 법을 배울 수 있겠네요.

프레이야 2015-07-01 15:09   좋아요 0 | URL
네, 제대로 뜨고 제대로 볼 수 있기를요.
 

 

 

 길과 걷기, 그리고 삶에 대한 통찰이 빛나는 산문집

 내용과 어울리게 배치한 낡은 흑백사진들도 영감을 준다.

 

 

 

 

 

 

 

 

 

 

 

"세계가 우리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파악하기 어려워질 때 그 지주로서 남는 것은 몸이다. 몸은 알쏭달쏭하여 감이 잡히지 않는 삶 속에서 살을 다시 찾아 가질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다. 몸을 다듬는 것은 세계에 매달리는 하나의 방식으로 변했다. 몸은 무한히 재조정되는 어떤 아이덴티티의 부대사항으로 승격했다. 외관은 가장 밀도 짙은 깊이의 장소가 되었다. 폴 발레리가 말했듯이 '가장 깊은 것은 피부다'. 그래서 <걷기예찬>은 삶의 예찬이요 생명의 예찬인 동시에 깊은 인식의 예찬이다."

 

 - 김화영 '옮긴이의 말' 중에서

 

 

 

 

걷기는 언제는 미완상태에 있는 실존의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 걷는다는 것은 끊임없는 불균형의 놀이이기 때문이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보행자는 규칙적 리듬으로 바로 앞서의 운동에 그와 상반되는 또 하나의 운동을 즉시 연속시켜야 한다....... 보행은 세상을 향한 자기개방이므로 겸손과 순간의 철저한 파악을 요구한다. (88p)

걷기는 사람의 마음을 가난하고 단순하게 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을 털어낸다. 걷기는 세계를 사물들의 충일함 속에서 생각하도록 인도해주고 인간에게 그가 처한 조건의 비참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상기시킨다. 오늘날 걷는 사람은 개인적 영성의 순례자이며 그는 걷기를 통해서 경건함과 겸허함, 인내를 배운다. 길을 걷는 것은 장소의 정령에게, 자신의 주위에 펼쳐진 세계의 무한함에 바치는 끝없는 기도의 한 형식이다. (237p)

걷는 사람은 낭패감 속에서도 자신의 삶과 계속 한몸을 이루고 사물들과 육체적 접촉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행복하다. 온몸이 피로에 취하고,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저곳으로 간다는 보잘것없지만 명백한 목표를 간직한 채 그는 여전히 세계와의 관계를 통제, 조절하고 있다. 물론 그는 방향감각을 잃기도 하지만 아직은 알지 못할 어떤 해법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걷기는 하나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 되어 불행을 기회로 탈바꿈시킨다. 인간을 바꾼다는 영원한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길의 연금술이 인간을 삶의 길 위에 세워 놓는다. (2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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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5-05-21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걷기예찬>은 삶의 예찬이요 생명의 예찬인 동시에 깊은 인식의 예찬이다.˝ 참 좋으네요.
저도 걷기를 좋아하니 더 와닿아요^^

새벽녘 이슬 머금은 길을 걷는 느낌은 마치 나니아 연대기로 들어가는 느낌이어요^^

프레이야 2015-05-21 17:28   좋아요 0 | URL
표지 사진 멋지죠. 걷기를 많이 좋아하진 않지만 좋은사람들과 걸으면 다르겠죠. 때론 혼자걷기도 필요하구~^^

아무개 2015-05-21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걷는거 좋아하는데
요샌 미세먼지땜시
쫌만 걷고 와도
콧물 줄줄줄 ㅡ‥ㅡ


프레이야 2015-05-21 22:25   좋아요 0 | URL
알레르기 비염 있으시나 봐요. ㅠ
환절기에 특히 심하던데요. 그래서 아주머니들이 복면을 쓰나 본데
갑자기 보면 식겁합니다. ㅎㅎ
저는 다행히 미세먼지에는 그닥 예민하게 반응하진 않더라구요.

페크pek0501 2015-05-23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걷는 것 즐겨요. 요즘도 매일 걷고요.
해질 무렵에 산책하러 나가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많이 걸어 지루할 땐 폰에 이어폰 연결하여
음악을 들어요
처음엔 소화불량 때문에 매일 한 시간씩 걷기 시작했던 게 이젠 습관이 되었어요.

건강하게 살고 싶다면 지켜야 할 수칙 중 하나는,
`매일 걷는 시간을 가져라`가 될 것 같아요.
걷기가 건강에 참 좋다고 하잖아요. 그래서인지 걷기에 관련한 에세이가 많더라고요. ^^

프레이야 2015-05-23 21:30   좋아요 0 | URL
네 소화 때문에 산책하신단 말씀 기억나요. 저는 사실 잘 안 걷는데 요즘은 일상에서라도 조금씩 걷는 걸 늘려가려고해요^^

처음처럼 2015-05-26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았어요. 이 책....
걷기에 관한 글을 쓸 때면 꼭 한 번은 다시 뒤적이곤 하지요.
^^*

프레이야 2015-05-26 20:38   좋아요 0 | URL
통했어요. 님 ^^ 마음이 고요해지더군요
 

5월이 시작될 무렵부터, 청보리밭을 가고 싶었다. 차일피일 못 가고 있지만 유명한 고창 청보리밭과 경주의 둔덕이 있는 청보리밭 정도를 마음에 봐두고 날을 보고 있었다. 어느새 5월도 중순을 지나 하순으로 가고 있어 올해 청보리밭은 물건너 간 풍경이 될 것 같다. 마음 속으로만 그리는‥

고창이라 하니, 선운사는 다시 안 가더라도 고창읍성과 미당 시문학관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월 하순 문학기행을 그곳으로 잡아두고 기대중이다.

육명심의 `문인의 초상`에는 미당을 `천 년에 한 번 나올까하는 천재`라고 숭배하는 김구용 시인과 그런 미당의 사진이 들어 있다. 육명심의 간결한 글과 그들의 영혼을 담은 흑백 초상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육명심은 미당의 시에서 느꼈던 성과 속의 양면적 인상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고 했다.

˝한 시인에게 이같이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요소가 공존한다는 것은 그만큼 시의 세계가 원대하고 광활하며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는 요인이 될 것이다.˝(130p)

김구용 시인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그의 시는 이상의 시보다 어렵다할 정도로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한다.

˝그는 미당 선생과 자기의 시를 감히 비교한다면 무위와 유위의 차이라고 말했다. 미당은 거미가 거미줄을 뽑듯이 그렇게 시를 뽑아내는데 자기는 책상에 엎드려 틀로 기름을 짜듯 머리를 쥐어짜 시를 만들어낸다고, . . . ˝(46p)

이 사진책의 부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72인, 그 아름다운 삶과 혼을 추억하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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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5-19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경리 문학관은 가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미당 시문학관은 제가 가본 국내 문학관 중 최고였습니다. 마을 풍경하며, 바닷길로 이어지는 그 길들이 참 좋더군요.
제가 생각하기엔 이상 시인은 작법상의 이해가 까다롭다면, 김구용 시인은 그 명상적인 깊이에 쉽게 다가가기 힘든 거 같아요. 실례가 아니길 바라며, 김구용 시인의 제가 아끼는 시 한 편 선사합니다 :)


반수신半獸身의 독백



어느 날, 내 몸이 나의 우상偶像임을 보았다. 비가 낙엽에 오거나 산새의 노래를 듣거나 마음은 육체의 노예로서 시달렸다. 아름다운 거짓의 방에서 나는 눈바람을 피하고 살지만 밥상을 대할 때마다 참회하지 않는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생을 두려워 않는다. 언제나 일월성신日月星辰과 함께 괴로워 않는다. 추호라도 나를 속박하면, 나는 신을 버린다.
순간이라도 나를 시인하면, 나는 부처님을 버린다. 몸과 정신은 둘 아닌 것, 비단과 쇠는 다르다지만 그러나 나에게는 하나인 것, 언제나 여기에 있다.
시침이 늙어가는 벽에 광선光線을 긋는다. 산과山果는 밤에도 나뭇가지마다 찬란하다. 돌은 선율로 이루어진다.


사람 탈을 쓴 반수신은 산속 물에 제 모습을 비쳐 보며, 간혹 피 묻은 입술을 축인다.


김구용 [뇌염](2001, 솔)

붉은돼지 2015-05-19 09:54   좋아요 0 | URL
미당 시문학관이 최고라니 한번 가봐야 할 듯...

저는 김구용이 시인인줄 몰랐던 것 같아요..국어시간에 배운 듯도 하고...
김구용하면 동주 열국지 만 떠오릅니다. ^^

프레이야 2015-05-19 15:50   좋아요 0 | URL
바닷길로 이어지는 길도요?
기대됩니다~ 김구용의 시 몇번을 읽게되네요. 감사합니다.

AgalmA 2015-05-19 17:31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길 바라서, 제 서재에 미당 시문학관 풍경을 올려 봤습니다.

붉은돼지님, 동주 열국지라니...그쪽은 또 제가 익숙치 않은...역사 공부 좀 열심히 해야하는데...

cyrus 2015-05-19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석우의 `벽모의 묘`도 난해하기로 유명해요. 이 시가 우리나라 최초의 난해시입니다.

프레이야 2015-05-20 00:09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찾아보겠습니다^^

지금행복하자 2015-05-20 0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6년전에 갔던것으로 기억하는데 기석나는것은 국화그려진 지붕이 있는 마을과 파란하늘만 기억에 남아있어요. 그렇게 아름다운곳이었군요~ 다시 기회를 만들어 가봐야겠어요~~

프레이야 2015-05-21 13:22   좋아요 0 | URL
언제부터인가 그렇고그런 벽화로 마을을 꾸민 곳이 많지요. 그곳에도 벽화마을이 있더군요. 검색해보니 ㅎㅎ
 

`더 책` 앱으로 시인의 목소리로 낭송되는 시를 들을 수 있다. 목소리가 참 꾸밈없고 진중하다.


화양연화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이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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